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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Writing/인-무브 서교연

돌봄의 정치: 무엇을 돌볼 것인가?

by 인-무브 2025. 5. 15.

돌봄의 정치: 무엇을 돌볼 것인가?

 

 

권범철(서교인문사회연구실, <문화/과학> 편집위원)

 

 

돌봄을 중심에 둔다는 것

돌봄에 대한 관심이 특히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전례없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돌봄을 중심에 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럴때 우리는 어떤 돌봄을, 어떤 사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2024년 9월 서울시와 고용노동부가 추진하는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이 시작됐다. 이 ‘서비스’의 이용 대상은 “직장 경력을 유지하며 육아 부담을 지고 있는 20~40대 맞벌이 부부, 한부모, 임산부 등”[1]으로, 이는 이 사업의 목표를 잘 보여준다. 그 사업은 이용대상자(아마도 여성)가 아이를 기르면서도 직장 경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서비스’로서의 돌봄을 제공한다. 이때 돌봄 ‘서비스’는 ‘직장’을 위해 제공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우리의 돌봄을 대신해준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여러 지점에서 이 사업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열악한 노동조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돌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사관리사, 전 지구적 돌봄 사슬 등등.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돌봄 ‘서비스’가 우리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제공된다는 점이다. 이때 돌봄은 노동 중심 사회를, 그래서 자본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지금껏 그랬듯이.

 

이 사업은 정부가 돌봄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보여준다.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가 보편화되어 생계부양자 남성의 임금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재생산 비용 아래로 떨어”지고[2] 재생산에 필수 불가결한 수단들 — 주택, 교육, 보건 등 — 이 사회적으로 지원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부채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되면서 ‘맞벌이 가족’은 신자유주의 가족의 규범이 되었다. 부부 모두가 생계부양자(임금노동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당연하게도 돌봄 능력의 약화로 이어졌고 또한 (여성들의 재생산 노동 거부와 맞물려) 극적인 출산율 저하로 이어졌다. 이는 다시 자본에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다. 자신을 위해 일해 줄 인구 자체가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를 제 살을 깎아먹는 식인 자본주의의 한 양상으로 기술한다. 이 “돌봄 폭식가”는 자신을 위해 일할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돌봄노동에 의지하면서도 그것을 약화시킨다.[3] 전 지구적 돌봄 사슬의 한 양상으로서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이 사업은 우리의 취약해진 돌봄 능력 혹은 돌봄노동 거부를 외국인 가사관리사 수입이라는 인종화된 수탈 체제로 해결하려 한다. 돌봄은 현재 혹은 미래의 노동자를 (재)생산하기 위해 계속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사업은 돌봄을 자본의 기둥으로 계속 유지하려 한다.

 

돌봄의 문제화

이러한 돌봄의 기능은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돌봄은 현재와 같은 노동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가사관리사’를 노동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돌봄의 가치를 계산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그 일의 사회적 기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집 안에서 여성이 무상으로 하던 일을, (이제 그 여성이 ‘직장 경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국의 다른 (그러나 여전히) 여성이 임금을 받고 수행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변화란 무엇일까? 돌봄이 GDP 계산에 포함되는 것? 서비스 일자리의 창출? 이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이를 낳아도 일할 수 있다는 사실? ‘맞벌이 가족’이 규범이 된 사회에서 이는 중요하겠지만 많은 경우 여성들에게 집을 떠나 일을 하는 것은 돌봄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이중 노동이라는 또 다른 문제로 귀결된다(가사 관리사가 맡더라도 돌봄은 늘 남는다). 무엇보다 돌봄으로부터의 부분적인 ‘해방’이 다른 누군가에 대한 성별화되고 인종화된 수탈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해방은 아니다.

 

또 중요한 것은 가사관리사를 혹은 다른 돌봄 노동자를 여타의 전문 노동자처럼 대우하는 일은 현재의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가치 절하된 재생산/돌봄노동에 의존하는, 다시 말해 재생산 노동의 가치 절하를 통한 엄청난 비용 절감에 기대는 시스템이고 그래서 실비아 페데리치가 말하듯 “낮은 비용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권리 없는 노동자 계급을 계속해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언제나 본래 성주의적(sexist)이며 인종주의적으로 구조화된 시스템이었던 이유다.”[4] 당연한 말이지만 성주의와 인종주의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비/저임금 노동 체제를 정당화하고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돌봄에 대한 인정 같은 건 일어날 수 없다. 돌봄이 중심이 된 사회란 돌봄 ‘서비스’ 수요를 파악해서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하여 돌봄 공백을 잘 메우는 사회가 아니다. 중요한 건 돌봄을 계산하는 일도, 그래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적절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도, 그렇게 고용된 노동자를 통해 그 공백을 메우는 일도 아니다. 이 과정에서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가 조금 늘어날 수 있을 뿐) 사회의 변화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돌봄을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문제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이미’ 정해진 과제를 해결하는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돌봄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 때 그 일은 손쉽게 시장에서 해결 가능한 혹은 국가가 알아서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가 되며 이 과정에서 돌봄은 그저 현재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머무르게 된다. 따라서 돌봄에 대한 구성적 관점이 필요하다. 이는 돌봄을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구성적 기제로 이해하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돌봄을 인정할 수 없는 이 사회에서 돌봄을 중심에 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돌봄을 중심에 두는 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일 수밖에 없다. 현 사회를 지탱하는 돌봄이라는 기둥을 빼내어 다른 사회의 주춧돌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돌봄을 현재의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삶형태의 토대로 만들 수 있을까?

 

낸시 프레이저는 『전진하는 페미니즘』에서 후기 산업시대에 가족임금을 대체할 새로운 젠더 질서를 검토한다. 그는 지금까지 제시된 답을 두 가지로 나누는데 한 가지는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동등한 돌봄제공자 모델’이다. 전자가 주로 여성의 고용을 창출하고 증진하여 젠더 정의를 강화하려 한다면, 후자는 비공식·비임금으로 이루어지던 돌봄노동을 지원함으로써 젠더 정의를 향상하려 한다.[5] 프레이저는, 전자는 여전히 남성중심주의적인 모델이라는 점에서, 후자는 여성의 주변화를 막지 못한다는 점에서 젠더 정의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는 모델로 평가한다. 그에 따라 그가 제시하는 모델은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이다.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이 여성을 남성처럼 만들려 하고, 동등한 돌봄제공자 모델이 여성의 ‘차이’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그의 모델은 남성을 여성처럼 만드는 기획이다. “후-산업시대 복지국가에서 젠더 정의를 달성하기 위한 열쇠는 지금 현재 여성의 생활 패턴을 모든 사람이 규범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6] “지금 현재 여성의 생활 패턴”이란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을 병행하는 패턴을 말한다. 그 병행이 현재는 주로 여성의 몫이라면 이제는 남성을 포함한 모두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이 모델에 입각한 복지국가에서는 모든 일자리가 돌봄제공자인 동시에 노동자인 사람을 기준으로 고안될 것이고(현재 대부분의 일자리는 노동자가 돌봄을 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오는 초등학교 아이를 둔 부모의 퇴근 시간이 그렇게 늦을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시간이 전반적으로 줄어들 것이며(그 아이의 하교 시간에 맞추려면 현재의 노동시간은 대폭 줄어들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취업할 수 있도록 돌봄 서비스 지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것은 돌봄을 중심에 둔 사회의 한 모습처럼 보이며 이로 인한 변화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프레이저의 말처럼 이 모델을 통해 젠더 정의는 효과적으로 증진될 수 있을 것이고, 정부가 그렇게도 바라 마지않는 출산율 회복도 가능할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 역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 역시 여전히 돌봄을 필요를 채우는 문제로 한정하고 있다. 유의미한 효과는 있겠지만 현재 돌봄의 사회적 역할 ― 자본의 기둥 ― 자체를 문제화하기보다 그 역할 내에서의 ‘정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의 (또 다른 의미에서) 뒤집어진 버전이다. 이 모델이 여성의 남성 만들기를 통해 고용시장에 대한 접근에서의 ‘평등’을 추구한다면, 이 모델을 뒤집어 남성의 여성 만들기를 꾀하는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은 재생산 노동 분배에서의 ‘정의’를 추구한다. 양자에 공히 결여된 지점은 ‘평등하게’ 혹은 ‘정의롭게’ 분배된 그 노동 — 생산과 재생산을 아우르는 — 자체의 문제화다. 현재의 질서 안에서 수행되는 생산 노동이 문제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재생산 노동이 그 문제적인 노동을 계속해서 뒷받침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재)생산 노동의 평등한 접근/분배 이전에 노동 자체를 문제화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 돌봄을 보편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돌봄의 불평등한 분배만이 아니라 돌봄의 사회적 기능 자체를 문제화해야 한다.[7]

 

자기가치화로서의 돌봄

이처럼 우리가 보편적 돌봄을 말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돌봄과 돌봄이 지탱하는 노동을 문제화하는 것이다. 먼저 노동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아마도 노동의 문제화에 가장 열심이었던 사람 중 한 명에 속할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갑작스럽게 사망하기 얼마 전에 쓴 글에서 지구를 파괴하는 노동과 그것에 종속된 사회를 문제화한다.

우리 사회는 일에 중독되어 있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있다면 그건 일자리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생각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일자리를 가져야만 한다. 일은 우리의 도덕적 시민성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사회적으로 볼 때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거나, 즐기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나쁘고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것 같다. 그 결과 일은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을 점점 더 많이 흡수하게 된다.[8]

 일은 왜 문제인가? 우선 많은 일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지금 당장 사라져도 무방할 그런 쓸데없는 일이다(많은 직종이 “주로 그들이 존재할 이유가 있다고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존재”[9]한다). 또 그러한 일은 유용한 일을 밀어낼 뿐 아니라(대표적인 예로 서류 작업에 파묻힌 교사) 심지어 더 좋은 보수를 받는다.[10] 결정적으로 이러한 노동 시스템은 자본주의를 계속 작동시키면서 지구를 파괴한다. 요컨대 노동은 많은 경우 사회적으로 무의미한 일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게 만들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삶의 터전 자체를 망가뜨리는데 기여한다. 노동을 문제 삼을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그레이버 못지 않게 노동을 문제 삼는 해리 클리버는 그것이 (경제 활동이라기보다) 정치적인 통제 수단임을 분명히 한다. 그는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노동을 문제화하는 이론으로 이해하는데, 그에 따르면 맑스의 이론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사회질서의 근본적인 조직화 방식이 어떻게 끝없는 노동의 부과”인지 깨닫게 해준다.[11] 맑스주의자들이 흔히 말하길 자본의 유일한 목적은 ‘이윤을 위한 이윤’, ‘축적을 위한 축적’이다. 그러나 이윤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일자리를 유지하고 창조하는” 이윤의 사회적 역할이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이것을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선물로 이해하지만, 맑스는 그 선물이 “어째서 실제로는 절도인지, 일의 부과와 확대된 부과가 어떻게 해서 우리의 시간, 우리의 에너지, 우리의 삶을 훔쳐 가는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윤 창출은 우리에게 일을 부과하여 우리를 통제한다는 사회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자본주의적 수단에 불과하다.”[12] 그에 따라 클리버는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자본에 대한 노동의 가치, 즉 사회를 조직하고 통제하는 근본적인 수단을 제공함에 있어 노동이 지닌 가치 이론으로” 정의한다.[13] 노동의 가치란 이윤 창출만이 아니며, 더 중요한 것은 끝없는 노동 부과 속에서 우리를 계획 가능한 존재로, 열심히 일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일자리에 쏟아붓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경제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도구이며 돌봄은 그 도구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돌봄의 문제화란 바로 이러한 역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돌봄이 노동을 지탱하는 그 관계를 끊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자본 내에 포함된 노동계급의 이중적 본성에서 파열점을 찾는 마리오 트론티의 논의를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그에 따르면 노동계급의 이중적 본성은 “구체 노동이면서 추상 노동인, 노동이면서 노동력인, 사용가치이면서 생산적 노동인, 자본이면서 비자본인 — 즉, 자본이면서 동시에 노동계급인 — 그 존재 안에 있다.” 그러나 “노동과 노동력이 노동계급 내에서 객관적으로 분열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데, 이것은 바로 “그것들이 자본 내에서 통합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열은 이 사회의 “정상적인 관계”이지만 “자본의 힘은 바로 분열된 것을 하나로 묶는 능력”에 있다. 따라서 그 분열이 우리에게 정치적인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은 주체적인 행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그것들은 “대안적 권력 형태를 건설하는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자본의 힘이 노동력을 (다른 무엇도 아닌) 노동 — 클리버에 따르면 “사회를 조직하고 통제하는 근본적인 수단” — 으로 발휘시키는 능력에 있다면 그 연결하는 종합을 깨뜨려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종합의 메커니즘을 파열하는 지점을 찾아야 하며 그 지점은 “노동계급이 자본 내에 있는 것처럼 노동계급 내부에 있다.”[14]

이 지점은 정확히 노동계급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노동으로부터, 따라서 자본으로부터 분리되는 지점이다. 이는 경제적 전략으로부터 정치적 힘의 분리다. (…) 자본과 싸우기 위해 노동계급은 자본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 이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들에게 모순의 정점이며, 이 모순을 확대하고 조직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 체계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을 것이고 자본의 계획은 후퇴하기 시작할 것이다. (…) 노동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 임금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조건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 노동이 되는 것에 대한 노동력의 거부, 노동력 사용에 대한 노동계급의 대규모 거부, 이러한 것들은 바로 맑스의 분석이 처음 노동의 본성 내에서 발견한 초기의 분열-대립이 여기서 전략적으로 다시 제안되는 용어들이다. (…) 이처럼 상품에 표현된 노동의 이중성은 노동계급의 이중적 본성으로 발견된다. 이중적이면서 동시에 분열되고, 분열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대립하며, 자신에게 대립하면서 동시에 자신과 투쟁한다.[15]

 트론티의 제안은, 노동계급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객관적인 분열을 조건으로 자본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주체적인 파열점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을 우리의 맥락으로 가져와보자.

 

돌봄에 대한 정의가 다양하고 그 의미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쉽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돌봄이란 “의존적 존재인 성인 또는 아이의 신체적이며 정서적인 요구를, 그것이 수행되는 규범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상에서 충족시키는 것에 관여된 행위와 관계”이다.[16] 이 복잡하고 긴 정의는 무엇보다 의존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돌봄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걸 보여준다(여기서 이 돌봄의 정의를 세세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꼭 필요한 그 일이, 성별화되고 인종화된 수탈을 통하여 자본을 위해 무상으로 혹은 저렴하게 노동력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노동계급(가사노동자)의 이중적 본성을 발견한다. 그 본성은 한편으로는 비자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인 그 존재 안에 있다(나의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 자본을 위한 저렴한 노동이 된다). 마찬가지로 자본의 힘은 그 분열된 본성을 묶는 능력에 있다. 여전한 성별 분업 모델로 집 밖의 남성 노동자와 집 안의 여성 노동자를 묶는 ‘결혼 거래’는 “자본가 계급에게 한 사람의 가격으로 두 명의 노동자를 제공한다.”[17] 우리가 트론티의 제안을 따른다면 돌봄을 잉여가치 증대로 연결하는 그 종합의 메커니즘을 파열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 “자본과 싸우기 위해 노동계급은 자본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 잉여가치를 증대하는 돌봄노동자로서의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노동이 되는 것에 대한 노동력의 거부”로, 다시 말해 노동거부로 가능할까?

 

여기서 돌봄 특유의 곤란한 점이 나타난다. 돌봄은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려 잉여가치를 증대하지만 — 이것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증대와 유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 내 구성원의 생명을 유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동은 거부하기 어렵다. 우리는 상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돌봄을 쉽게 그만둘 수 없다. 이러한 책임감은 자본이 이들의 노동을 값싸게 부릴 수 있는 좋은 기제가 된다. 자본은 우리가 단지 임금만이 아니라 다른 가치를 (특히 누군가를 돌보는 일의 경우) 크게 고려한다는 것 ―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다 ― 을 잘 알며 이를 자신의 잉여가치를 늘리는 수단으로 전유한다.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차원들 — 책임감, 상호 의존 등 — 을 포획하여 자본의 도구로 전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점을 알더라도 돌봄을 쉽게 버릴 수 없다. 거부의 전략이 모든 노동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18] 그렇다면 돌봄노동자가 “자본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돌봄의 사회적 기능이 어떠하든 그 자체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돌봄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돌봄과 잉여가치 증대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 즉 자본과 비자본의 종합을 파열하는 주체적인 분열은 가능하며, 이것이 바로 돌봄노동자가 자본으로서의 자신과 싸운다고 말할 때 뜻하는 의미다. 이것은 예전처럼 돌봄을 이어가는 것일 수도 그냥 그만두는 것일 수도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돌봄에 대한 구성적 관점이 필요한 이유다. 돌봄을 계속 이어가되 다르게 수행하는 것, 이는 다른 삶을 위한 것이면서 그 자체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다른 삶의 양식을, 결국 다른 사회를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즉 돌봄을 자본의 가치화가 아니라 자기가치화의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돌봄은 “돌봄을 하는 사람으로부터 분리(소외)”되어 “상품처럼 전달할 수 있고 교환이 가능한”[19] 서비스가 아니라 어떤 삶을 원하는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는 과정이 된다. 이는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나 중요한 문제겠지만 특히 오늘날의 위기 상황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 우리에게 돌봄과 노동을 통해 부여되며 또한 우리가 지탱하는 이 삶의 양식이 우리의 터전을 체계적으로 망가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가치화는 우리가 원하는 삶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인류에게 생존의 문제가 된다. 

인간 사회를 재구성하는 다양한 선택지에 대해 논의를 하다 보면, 결국 가치의 문제가 전면으로 나오게 된다. 인류세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궁극적인 질문은 어떤 기술, 정책, 제도를 채택할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은가다.[20]

 문제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은가”를 결정할 수 없다는데 있다. 그레이버는 이를 자유의 문제로 연결한다. “궁극적인 자유는 가치를 창조하거나 축적할 자유가 아니라 (…)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이다.”[21] 돌봄은 이러한 자유를 구축하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가치화할 것인가를 결정할 뿐 아니라 그 결정을 실현해나가는 과정 말이다. 여기서 이 자유를, 앞서 이야기한 책임감, 즉 상대에 대한 의무와 함께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레이버는 마르셀 모스를 인용하며 자유와 의무를 선명하게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시장체계가 야기한 환상”임을 강조한다. “시장의 익명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줄곧 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익명성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곧, 전적으로 혼자 살기를 원하지 않는 한 자유란 사실 어떤 종류의 의무를 누구에게 지고 살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22]

 

우리가 생각한 자유는 스스로 가치화할 수 있는 자유 ―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 ― 였다. 그런데 동시에 자유는 누군가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의존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지는 의무란 어떤 형태든 돌보는 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기가치화로서의 자유는 서로 의무를 지는, 즉 서로를 돌보는 집합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이 의무는 이중적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유대와 속박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봄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암시하듯, 누군가를 보살피고 관심을 갖는 일은 슬픔과 고난으로 쉽게 바뀔 수 있다.[23] 대표적인 (아니 많은 이들에게 어쩌면 유일한) 돌봄의 공간인 가족은 이러한 의무의 이중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곳으로 보인다. 그레이버는 앞에서 인용한 문장에 뒤이어 이렇게 쓴다.

(…) 모스가 주목했던 무제한적 상호부조 혹은 “코뮨적” 관계가 대단히 쉽게 위계와 보호 및 착취 관계로 전이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적인 조직은 역시 가족이라 할 수 있다. 거의 어디에서나 가족은 무제한적인 헌신과 상호부조의 중심인 동시에 원형적 권위의 출발점이자 사회적 위계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 탄생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24]

많은 이들이 가족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사실은 이 제도가 그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유대이기보다는 억압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앞에서 본 것처럼 살림살이로서의 돌봄이 자본의 도구로 전유되는 것도 가족이라는 제도를 통해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가족이 ‘만들어진’ 것 자체가 19세기 노동계급의 소멸 위기에 대응하고 좀 더 건강하고 강인하며 생산적인 노동력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25] 요컨대 가족은 자본주의를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런 이유로 돌봄이 가족이라는 제도를 통해 수행되는 한 그 안의 돌봄노동자는 자본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싸우기 어려울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의 폐지를 주장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때의 폐지란 각자 홀로 살아가는 사회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배타적이지 않은 연대의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돌봄을 사적인 영역에 가두는 가족이 많은 이들에게 거의 유일한 돌봄의 공간으로 남게 되면서 “극단적인 형태의 나르시시즘과 개인주의를 풀어놓”기 때문이다. 가족은 친밀과 유대의 특권적인 패러다임으로 기능하면서 다른 대안적인 관계 형태들의 출현을 어렵게 만든다.[26] 그러니 가족 내에서의 고립된 돌봄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하는 — 현재 정부가 추진하듯이 — 방안은 사회적으로 별다른 의미가 없으며, 배타적인 가족 자체를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돌봄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는 각자도생의 기본 단위인 가족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심화시킬 뿐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돌봄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이렇듯 가족을 통한 돌봄은 문제적이지만 국가에 맡기는 것 역시 (이미 본 것처럼) 그 일을 관계가 아니라 서비스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시장을 통한 돌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때문에 돌봄에 대한 공통적인 접근이 중요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돌봄을 자기가치화를 통한 다른 삶의 구성으로 이해할 때 돌봄은 그 자체로 공통장(commons)의 원리가 된다. 우리가 공통장을 단순히 부를 공유하는 제도가 아니라 다른 삶의 구성으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후자의 의미에서 공통장은 페데리치가 말하듯 “비다 디그나 데 쎄르 비비다(vida digna de ser vivida)”,[27] 즉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에 대한 헌신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가족을 공통하는(commoning) 것, 혹은 혈연관계를 완전히 내려놓은 새로운 유대 관계로서의 “근족”(kith)[28]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우리가 답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실천적인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세 시대의 우리에게 결정적인 질문이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은가”라면 새로운 유대로서의 근족의 구성 혹은 가족의 공통화는 스스로 결정한 사회를 직접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답이 되는 실천이다. 나는 이러한 실천의 사례를 다른 글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29] 여기서는 그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인 조건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돌봄 공통장의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빚짐

지금까지 우리가 문제화한 돌봄의 사회적 역할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면서 동시에 자본의 가치화 도구로 기능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 연결을 끊고 자기가치화하는 돌봄 관계로서의 공통장을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서 이 공통장은 임금노동을 거부하고 돌봄 관계로 스스로를 재생산하고자 하는 관계다. 그러므로 노동의 거부는 그저 거부만이 아니며 새로운 것의 구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존의 (자본의 가치화를 위한) 문제적인 노동을 거부하고 (자기가치화를 위한) 노동(공통화)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제도를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의 논의에서 노동 거부와 돌봄 공통장의 구성은 늘 한 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에게 판매할 노동력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그래서 임금이 없는 공통장의 생계는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 노동을 거부한 이후 우리의 생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우리는 공통장으로 자급할 수 있을까?

 

이러한 현실적인 질문은 노동 거부에 대한 상상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우리를 기존의 질서로, 가족으로, 노동의 자리로 다시 돌려놓는다. 하지만 생태위기에 대한 우리의 구조적인 연루 — 그저 살기 위해 일할 뿐이었지만 — 에서 벗어나려면 노동의 문제화는 필수적이다. “기술 변화만으로는 주어진 시간 내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우리가 노동과 소비와 일상생활의 리듬을 바꾸고 시스템 전반의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생태계 쇠락”[30]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노동의 문제화와 거부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과 시스템 전반은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 체계에 의해 크게 구조화되어 있으므로 전자의 변화는 후자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후자의 변화는 (트론티에 따른다면) “자본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일, 즉 노동 거부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스템 전반의 구조” 변화는 흔히 강력한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정치학자 데이비드 오어에 따르면 “장기적이고 복잡한 비상사태에 있어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의 실적은 그다지 고무적이지 않다.”[31] 또한 “권위주의 정부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예측 불가능하고 다중적인 차원의 문제에 대처할 유연성이나 지역적 현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잘 갖추고 있을 확률은 높지 않다.” 즉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단일한 ‘해결책’은 없”으며[32] (국가가 여전히 자원 동원과 실행력에서 큰 힘을 갖고 있더라도) 우리 각자가 다양한 조건에서 돌봄의 공통장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다시 (돌봄 공통장과 한 몸을 이루는) 노동 거부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돌봄을 사회에 중심에 두는 방법이 아니라 노동 거부를 중심에 두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노동 거부를 중심에 두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돌봄을 고민하고 실천해나가야 할 것이다. 돌봄은 이럴 때만이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일이 된다.

 

그러나 노동 거부는 쉽지 않으며 어떤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결단이 아니라 사회적인 환경에서 발현할 수 있는 기운이다. 다시 말해 ‘주체적인 분열’은 개인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 우리는 일자리가 아닌 다른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때 거부의 용기를 낼 수 있다. 주체성은 집합적이다(내가 용기를 낸다기보다 그런 기운을 받게 된다). 나는 다른 글에서 비임금자들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미 일자리로부터 배제된 까닭에 서로를 돌보는 관계를 형성하며 이 관계가 거부의 용기를 낼 수 있는 공통장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썼다.[33] 여기서는 그러한 장의 조건을 이루는 좀 더 물질적인 사례를 생각해보자.

 

노동 거부의 용기를 내기 위해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면 그건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일련의 역사적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클리버는 1968년 학생들의 운동을 가능하게 한 조건 중 하나로 당시의 일자리-소득 환경을 언급한다. “이전 [68] ‘운동’이 학생들을 위한 보조금과 장학금에서 재원을 일부 확보했으며,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의 실업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점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 낮은 수준의 실업은 대부분의 대학생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학교 안에서 학교에 맞서 투쟁하는데 얼마나 쏟아붓든 그들의 미래 소득이 안전하다는 믿음을 주었다.”[34] 이러한 사정은 한국의 80년대 학생운동에서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제가 계속해서 성장할 것만 같던 시기에, 특히 대학생으로서 미래 소득에 대한 불안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대학은 아주 다른 공간이다. 졸업 이후의 상황이 잘 그려지지 않는 학생들에게 대학은 무엇보다 자기훈육과 경쟁의 공간이기 쉽다. 과거에 그나마 기댈 수 있던 일자리라는 — 비록 우리는 이를 문제화하고 있지만 — 선택지는 저성장 시대에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공공 복지에 기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영역들이 사회적으로 지원되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은 불안에 전염되어 각자도생의 삶을 선택하기 쉽다(그런 기운을 받게 된다).

그 [68 시기의] 전진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반격으로 그러한 커리큘럼[학생들이 만든 대안적인 교육과정]에 대한 공격, 실업 증가, 임금 하락, 보조금에서 대출로의 전환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많은 학생들을 “실용적인”(즉 일자리에 중점을 둔) 교육 과정으로 밀어 넣을 만큼 미래 소득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더 나아가 일과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저항에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개발된 수업 활동과 과외(課外) 활동에 쏠려 있던 그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돌려놓았다.[35]

이것은 미국의 대학에 대한 이야기지만, 국내의 특히 1997년 이후 대학의 상황에 대한 묘사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당시 외환위기와 그로 인한 구조조정은 많은 학생들을 “미래 소득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 빠뜨렸고 본격적인 자기관리 과정으로서의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기운을 얻기 어렵다. 따라서 문제는 다른 기운(정동)이 순환하는 기댈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무언가의 구성은 어디에서 시작할 수 있을까? 프레이저는 오늘날 돌봄 위기의 뿌리가 금융화된 자본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부채를 통해 삶의 필요를 해결해야만 하는 금융 자본주의에서 우리의 모든 시간은 부채 상환에 저당잡혀 상환을 위한 노동으로 환원되고 주변을 돌보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위기의 뿌리가 금융화에 있다면 우리가 시작해야 하는 지점도 그곳이 아닐까?

 

부채, 즉 빚은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도구임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 말을 좁은 경제적 개념에 한정하지 않고 폭넓게 사용한다. 가령 ‘마음의 빚을 안고 있다’는 말은 내가 누군가에게 갚아야할 은혜가 있다는 말이며, 이는 내가 그 누군가로부터 과거에 도움받은 상황을 전제한다. 즉 빚은 상호 의존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빚의 마법』을 쓴 리차드 디인스트는 채무로서의 빚(debt)과 빚짐(indebtedness)을 구별하는데, 채무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셀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면 빚짐은 “우리가 갚게 되는 현실의 채무들로 환원될 수 없는 책임과 사회적 귀속 그리고 상호의존의 차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양상들이 결코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책(『빚의 마법』)은 현재의 채무 체제가 빚짐이라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차원을 “포획하여” 그것을 이윤의 동력으로 전환시킨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빚짐”과 같은 단어에 어떠한 긍정적인 … 의미도 부여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채무를 [자신을] 약화시키는 조건으로만 경험합니다. [하지만] 나의 사전에 “빚짐”이란 실재적으로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속합니다.[36]

그는 빚짐을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이해하면서 현실에서 나타나는 채무로서의 빚이 어떻게 “정치적 요구들로 재구성될 수 있는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필요들을 표현하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뒤 이렇게 덧붙인다. “분명히 주거와 보건과 교육 — 이 모든 것은 개인이 혼자서 지불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지출을 요구한다 — 은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는 의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37]

 

주거와 보건과 교육은 우리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빚이 아니면 충족될 수 없다. 우리의 삶이 불안한 이유다. 이는 거꾸로 우리의 ‘용기’를 낼 수 있는 장을 구성하는 열쇠도 여기에 있음을 암시한다. 채무로서의 빚이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필요들을 표현”한다면 우리는 그 각자의 빚들을 어떻게 정치적 요구로 묶어낼 수 있을까? 우리는 이를 위한 경로의 방향을 디인스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주거와 보건과 교육 같은 기본적인 필요들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는 의무”로, 즉 서로에게 지고 있는 책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개인적인 빚들을 사회적인 책임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빚짐과 공통재(common good) 간의 적절한 역사적 접속”[38]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각자의 의무(채무)를 공통의 의무(빚짐)로 바꿀 수 있다.

 

크리스티안 마라찌는 이러한 빚의 전복을 구체적인 정책에서 발견한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행정부가 시행한 주택소유자지원대책(Homeowner Affordability & Stability Plan)이 파산한 가구주 소유의 대출을 조정하게 한 데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이 조치는 적어도 맹아적으로 공통재에 관한 사회적 소유권 문제를 제기한다. 분명히, 이러한 권리는 오늘날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 즉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고 있다. 달리 말해, 오늘날까지 공통재에 관한 접근권이 사적 부채 형태를 취했다면, 당연히 이제부터는 그러한 접근권을 일종의 사회적 지대로 인식해야 한다(그리고 그러한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39]

여기서 저자가 언급하는 공통재란, 디인스트가 언급한 주거와 보건과 교육 등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재화를 가리킨다. 그의 주장은 디인스트와 일맥상통한다. 사적 부채를 “사회적 지대”로, 즉 우리가 서로에게 지고 있는 책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빚은 억압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능력과 공통의 부를 확대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나가며

이렇게 뒤집어진 빚이 자기가치화로서의 돌봄 공통장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인 주거와 보건과 교육에 접근하기 위해 빚을 지고, 그렇게 진 빚이 노동을 강제하며, 그에 따라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을 빼앗기며 지구를 파괴하는 자본주의 체계에 봉사한다면, 이 긴 문제적인 연쇄의 출발점을 뒤집는 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는 적어도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을 어느 정도 되찾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만큼 노동 거부와 돌봄 공통장을 위한 조건도 마련되리라 기대할 수 있다. 즉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은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조금은 얻을 수 있다.

 

인류세 시대의 우리는 돌봄을 강요받는다.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을, 생명뿐 아니라 비생명을, 우리 주변과 거리, 마을, 도시, 지구를 돌보아야 한다고 한다. 이는 대체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억누르고 절제하는 삶을 요구한다. 먹지 말아야 할 것, 타지 말아야 할 것, 이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 점점 늘어난다. 이러한 절제는 어느 정도 필요해 보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 와중에도 우리가 여전히 자본주의 체계 또한 돌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떤 아이러니를 낳는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절제하면서 — 그것에 성공한다면 — 사회적으로는 돌봄과 자연을 “폭식”하는 “걸신들린 짐승”[40]양육한다. 우리의 일할 수 있는 힘과 무엇보다 일할 의지를 재생산하면서 그에 따라 열심히 일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일할 힘과 의지가 아니라 공통할 힘과 의지를 재생산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의 돌봄이 전자에서 후자로 이동하기를 바라면서 그레이버의 말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이 아니라, 우리의 청교도주의다. 우리가 그러한 즐거움을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해 고통받아야 한다는 우리의 느낌이 문제다. 우리가 세계를 구하고 싶다면 우리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41]

 

 
*이 글은 <문화/과학> 120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고용노동부장관·서울특별시장,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서비스 제공기관 모집공고」, 고용노동부 공고 제2023-456, 2023.9.15.

[2] 낸시 프레이저,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23, 139.

[3] 같은 책, 3장 참고.

[4] Louise Toupin, Afterword From Yesterday to Today: The Intellectual Journeys of Mariarosa Dalla Costa and Silvia Federici, from 1977 to 2013, in Wages for Housework: A History of an International Feminist Movement, 197277, tr. Käthe Roth (Vancouver, BC: UBC Press and London: Pluto Press, 2018), e-book.

[5] 낸시 프레이저, 『전진하는 페미니즘』, 임옥희 옮김, 돌베개, 2017, 161.

[6] 같은 책, 189.

[7] 물론 프레이저가 돌봄의 전유를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프레이저는 2022년에 낸(한국어판 2023) 『좌파의 길』에서 경제를 존립하게 하는 배경 조건들과 경제가 맺는 관계를 강조한다. 식인 자본주의란 경제활동의 배경 조건을 먹어치우면서 스스로의 존립 기반까지 허물어뜨리는 자본주의의 양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다루는 배경 조건은 크게 네 가지로, 사회적 재생산(돌봄), 비인간 자연, 자본화되지 않은 형태의 부, 공적 권력이며, 이는 마리아 미즈의 논의에서 주된 배경조건으로 다루어지는 세 가지(여성, 식민지, 자연)에 한 가지(공적 권력)가 추가된 형태를 띠고 있다(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최재인 옮김, 갈무리, 2014 참고). 이러한 최근 논의를 볼 때 1994년에 쓴 글(한국어판 2017)에 대한 본문의 비판은 과도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프레이저의 옛 글을 굳이 언급하며 비판적으로 다룬 것은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에 대한 논의가 국내에서 여전히 칼럼이나 보고서 등에 많이 인용될 뿐 아니라 (대체로) 긍정적으로만 인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처럼 일하는 것이 해방이 될 수 없듯이 남성이 여성처럼 일하는 것도 해방이 될 수 없다. 이미 강조한 것처럼 노동과 그것을 떠받치는 돌봄, 돌봄의 공간인 가족 자체를 문제화해야 한다. 또한 프레이저가 최근 작(『좌파의 길』)에서 돌봄의 전유를 다루기는 하지만 주로 돌봄이 폭식당하는 양상이 시대별로 어떻게 변해왔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돌봄의 재구성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대안 구축이나 노동의 문제화 등은 다루지 않는다. 이처럼 돌봄의 전유를 둘러싼 그의 논의는 주로 위에서부터 이루어지며 아래로부터의 관점은 생략되어 있다. 이런 점은 그가 돌봄의 폭식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미 1970년대부터 이 문제를 다룬)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논의를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8] David Graeber, To save the world, were going to have to stop working, BIG ISSUE, 2020.9.8.

[9] Ibid.

[10] 그레이버는 이러한 쓸데없는 일에 불쉿 잡(bullshit job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음을 보라.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 김병화 옮김, 민음사, 2021.

[11] Harry Cleaver, Rupturing the Dialectic: The Struggle against Work, Money, and Financialization (Chico, CA: AK Press, 2017), 13.

[12] Ibid., 82-83.

[13] Ibid., 13.

[14] Mario Tronti, The Struggle Against Work!, in Workers and Capital, tr. David Border (London: Verso, 2019), 272-273.

[15] Ibid., 273(강조는 원저자).

[16] Mary Daly ed., Care Work: The Quest for Security (Geneva: International Labour Office, 2001), 37; 우에노 지즈코, 『돌봄의 사회학』, 조승미·이혜진·공영주 옮김, 오월의봄, 2024, 57에서 재인용.

[17] Silvia Federici, Preface, in Leopoldina Fortunati, The Arcana of Reproduction: Housewives, Prostitutes, Workers and Capital, tr. Arlen Austin and Sara Colantuono (London: Verso, 근간).

[18] 거부하기 어려운 재생산/돌봄 노동에 대한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논의를 참고하라.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노인 돌봄이라는 새로운 위기: 여성의 자율성과 돌봄 노동 임금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의 투쟁』, 이영주·김현지 옮김, 갈무리, 2020.

[19] 『돌봄의 사회학』, 57.

[20] 줄리아 애드니 토머스·마크 윌리엄스·얀 잘라시에비치, 『인류세 책: 행성적 위기의 다면적 시선』, 박범순·김용진 옮김, 이음, 2024, 271.

[21]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서정은 옮김, 그린비, 2009. 202.

[22] 같은 책, 476. 강조는 인용자.

[23]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 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57.

[24]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476-477.

[25] 자본을 구원하기 위한 제도로서 가족의 형성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Silvia Federici, The Construction of Domestic Work in Nineteenth-Century England and the Patriarchy of the Wage, in Patriarchy of the Wage: Notes on Marx, Gender, and Feminism (Oakland, CA: PM Press, 2021); 소피 루이스, 『가족을 폐지하라』, 성원 옮김, 서해문집, 2023.

[26]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공통체』, 정남영·윤영광 옮김, 사월의책, 2014, 236.

[27] Silvia Federici, Womens Struggles for Land and the Common Good in Latin America, in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Oakland, CA: PM Press, 2019), 146.

[28] ““근족이라는 개념은 존재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 혈연과 비슷한 유대를 지칭하지만, 그 근거는 인종, 혈통, 정체성보다는 지식, 실천, 장소이다. 서로를 가족처럼 대하기를 중단할 때 얼마나 많은 인간애가 만들어질지를 놓고 우리는 놀랄지도 모른다(『가족을 폐지하라』, 154).

[29] 권범철, 「가족을 공통하기: 예술가 근족과 아트 스피릿 머신, 『문화와 사회』 32 2, 2024, 139-187.

[30] Juliet Schor, Plenitude: The new economics of true wealth (New York: Penguin Press, 2010), 2; 『인류세 책』, 294에서 재인용.

[31] David Orr, Dangerous years: Climate change, the long emergency, and the way forwar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6); 『인류세 책』, 304에서 재인용.

[32] 『인류세 책』, 304.

[33] 권범철, 『예술과 공통장』, 갈무리, 2024, 7-9, 281-282.

[34] Harry Cleaver, op. cit., 274.

[35] Ibid.

[36] 리차드 디인스트, 『빚의 마법』, 권범철 옮김, 갈무리, 2015, 309-310.

[37] 같은 책, 291.

[38] 같은 책, 263.

[39] 크리스티안 마라찌, 『금융자본주의의 폭력: 부채위기를 넘어 공통으로』, 심성보 옮김, 갈무리, 2013, 123.

[40] 프레이저가 식인 자본주의를 묘사하며 쓴 또 다른 표현이다(『좌파의 길』, 25).

[41] David Graeber, op. 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