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서의 자연: 가능한 것들의 유혹
저자: 디디에 드베즈(Didier Debaise)
영어 번역: 마이클 헤일우드(Michael Halewood)
한글 번역: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1장 <근대인의 우주론>의 후반부입니다.
서문과 1장 전반부는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en-movement.tistory.com/565
디디에 드베즈, <사건으로서의 자연> 서장 & 1장(1/2)
사건으로서의 자연: 가능한 것들의 유혹 저자: 디디에 드베즈(Didier Debaise)영어 번역: 마이클 헤일우드(Michael Halewood)한글 번역: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도서 정보Nature as Event: The Lure of the P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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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의 물화
이분화에서 비롯되는 물질 개념이 단순 정위의 원리 주위로 조직된다는 생각은 베르그손의 사유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갖는다.[39] 화이트헤드는 의심할 여지 없이 베르그손에게서 영감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 그에게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자연의 개념』에서 그는 “저는 저의 이런 신조가 베르그손의 입장과 온전히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40]라고 썼고, 『과정과 실재』의 서문에서 “베르그손,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에게도 힘입은 바가 크다. 내가 몰두해온 과제 중 하나는 그들의 사유 유형이 반주지주의(anti-intellectualism)라는 비난 – 그 비판이 옳든 그르든 그에 연루되어 있다는 오해 - 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었다”[41]라고 밝히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미친 베르그손 사상의 영향의 모든 요소를 개괄하려는 건 아니다. 만약 그걸 다루려 한다면, 제임스의 사상과도 연결해야 한다. 여기서 물으려는 건 어떤 종류의 철학적 영향보다 더 제한적이면서도 더 날카로운 문제이다. 그것은 근대적 자연 개념을 진단하는 방식들과 이를 넘어서기 위한 조건들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베르그손의 사유 중 화이트헤드의 국지화 개념과 연관되고 또 그것을 명확히 해줄 수 있는 요소들만을 다루어, 자연의 이분화에 저항하는 두 가지 방식을 대표하는 이 두 철학적 입장을 활성화하고 그들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개괄하고자 한다.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에서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썼다.
완벽한 공간성은 서로의 관계에 있어 부분들의 완벽한 외재성, 즉 완전한 상호독립에 있다. 그런데 다른 모든 질점(material point)에 작용하지(act on) 않는 질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 완벽하게 고립된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지만, 과학은 우주를 상대적으로 상호 독립적인 체계들로 분할하는 수단을 찾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저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42]
부분들의 독립성과 과학이 물질을 공간성의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화이트헤드가 “국지화”라는 말로 이해한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두 용어 - “국지화”와 “공간화” - 가 유사한 특징들의 윤곽을 그려준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추상화와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이라는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구별될 수 있다. 이를 개략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나는 베르그손이 과학의 기능과 지위를 어떻게 서술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다른 한편, 『창조적 진화』에서 그는 “과학의 본질적인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명시적으로 제기한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을 증대하는 것이다. 과학은 그 형식에서 사변적일 수 있고, 그 직접적인 목적에서는 무사심(無私心, déintéressée)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과학이 원하는 만큼 긴 장기 신용대출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만기가 아무리 연장되어도 소용없다.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결국 과학이 노리는 것은 언제나 실제적 유용성(practical utility)이다. 이론으로 나아갈 때조차도, 과학은 실천(practice)의 일반적인 형식에 자기 행동을 적응시키도록 요구받는다.”[43]
이 구절에서 베르그손은 과학을 실천적 활동과 명확하게 동일시한다. 따라서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지식이 사물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손은 자신의 요점을 명확히 한다. “우리는 행동이 도약으로 진행된다고 말한 바 있다. 행동하는 것은 자기를 재적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다는 것, 즉 행동하기 위해 예견하는 것은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배열에서 재배열로 나아가는 것이다.”[44] 그리고 세계에 부과되는 과학적 해석으로서의 공간화의 일반화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과학의 이러한 실천적 지향성이다. 그래서 “과학은 서로에게 점점 더 근접하는 재배열들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자신이 고립시키는 순간들의 수를 늘릴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이 고립시키는 것은 언제나 순간들일 것이다.”[45] 고전 과학과 근대 과학 사이의 차이, 즉 특정 장소와 시간을 특권화하는 연구와 특정 장소와 시간에 대한 무관심을 보이는 연구(모든 순간은 동일하다) 사이의 차이는 과학의 본질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는다. “고대 학문과 마찬가지로 근대 과학은 영화적(cinematographical) 방법에 따라 진행된다. 그것은 다른 식으로 될 수가 없다. 모든 과학은 이 법칙에 종속된다.”[46] 베르그손이 지성의 기능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통해 상식과 과학 사이의 연결 고리를 설정할 수 있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물질 과학은 일상적 지식처럼 진행된다. 그것은 이 지식을 완성하고, 그것의 정확성을 높이고 그 범위를 증대시키지만, 그것과 같은 방향으로 작업하며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동한다.”[47] 공간화는 지성의 자연적인 경향, 즉 그것의 생명력으로 환원된다.
화이트헤드와 베르그손은 공간화의 중요성에 동의하지만, 그 원인과 결과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갈라선다. 화이트헤드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철학의 역사는 인간 지성이 ‘우주를 공간화한다’는 베르그손의 고발을 지지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유동성을 무시하고 세계를 정적인 범주로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을 뒷받침한다. 실제로 베르그손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경향을 지성의 내재적 필연성으로 여겼다. 나는 이러한 규탄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나는 ‘공간화’가 상당히 친숙한 언어로 표현된 명쾌한 철학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48]
화이트헤드는 이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구절을 사용하여 그의 비판을 강화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입장은 상당히 유사해 보이지만, 그 차이는 중요하며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바로 과장(exaggeration)이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베르그손을 거부하는 이상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입장에 잠재된 핵심이다. 그는 베르그손의 분석, 즉 그가 공간화를 기술하는 방식에서는 베르그손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베르그손이 비판의 속도를 늦추기를 바랐을 것이다. 베르그손의 공간화 개념은 적절했지만, 그의 과장 덕분에 그 비판은 불합리해지는 수준으로 내몰렸고, 더 심각하게는 그 비판이 요청하는 초월(surpassing)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과장은 정확히 무엇인가? 물론 철학사(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언급에 과학사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는 베르그손의 분석을 확인해주지만, 그 어떤 것도 그에게 공간화를 지성(intellect)에 내재된 필연성으로 만들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베르그손이 『창조적 정신(The Creative Mind)』에서 “우리의 지성은 자연적 성향을 따를 때, 한편으로는 단단한 지각들로,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된 개념들로 나아간다. 지성은 부동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오직 부동하는 것의 관점에서 운동을 개념화하고 표현한다”[49]라고 말할 때, 그는 공간화에 그것을 확립하는 틀을 초과하는 차원을 추가한다. 이로부터 화이트헤드가 거부하는 두 가지 결과가 비롯된다. 우선 공간화를 지성의 필연성으로 만듦으로써, 베르그손은 과학을 하는 모든 다른 방식들을 하나의 일반적 범주 아래에 두어야만 했다. 예컨대, 그는 고전 학문과 근대 과학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동일한 접근 방식을 공유한다. 방법의 다양성, 과학사 내의 불일치, 모델의 다수성, 실험 과정에서의 긴장감은 모두 동일한 기저 활동 아래서 결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베르그손의 진단이 지닌 엄청난 규모가 과장을 구성한다. 즉 베르그손에게 과학적 활동에 관한 분석은 그것이 제기되는 극단적인 일반성의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그리고 이는 화이트헤드에게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인데, 공간화와 지성의 동일시를 극화하는 것은 대안을 위한 여지를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둘째, 베르그손은 “철학한다는 것은 사유 작용의 정상적인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50]라고 말하며, 그는 비공간화된 사유의 조건을 찾아야만 했다. 따라서 그가 호소하는 형이상학은 필연적으로 “상징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51] 과학의 모습을 띠게 된다. 화이트헤드가 비난하는 과장은 과학이 공간화하는 지성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장 발은 화이트헤드의 언급을 발전시키려 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과학은 그것이 너무 자주 연결되었던 유물론적인 신념(conception)과 혼동되었다. 베르그손과 낭만주의자들은 과학을 정적이고 독단적인 신념으로 만들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과 더 최신 이론들은 과학을 벗어났다고 생각되었던 것을 더 유연한 과학으로 통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52] 그러나 발이 하는 것처럼 새로운 과학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과학적 추상화는 실용적 활동과 연결된 기능에 해당하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추상화의 변형 능력을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다.
화이트헤드가 철학에 부여하는 기능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철학은 특수한 사고 양태들을 지배하는 추상화에 대한 비판이다.”[53] 철학의 기능이 추상화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화이트헤드가 마치 추상화 없는 경험이 가능한 것처럼 경험을 추상화의 손아귀에서 구출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이 구절에서 사용하는 “비판(criticism)”이라는 용어는 통상의 대립적 의미보다는 칸트적인 함의를 더 많이 갖는다. 즉, 추상화의 한계, 그것의 작용 조건, 그리고 경험에서의 그것의 효과를 규정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경험에서 추상화에 근본적인 역할을 부여하려는 가장 대담한 시도 중 하나로 보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추상화는 경험적 사실의 재현이나 일반화가 아니라 구성물이며,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통제하는 진정한 무기”[54]다. “추상화”라는 용어는 이미 추상화의 논리-수학적 모델과 베르그손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너무 자주 동일시하여 모든 경험 해석의 핵심이 되어버린 언어에서의 실체화 형태를 훨씬 넘어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추상화는 그것에 고유한 제약, 그것만의 제작 양태, 자신만의 움직임과 행동 방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추상화의 존재 양태와 가장 구체적인 경험들(그것들의 단순한 형식적인 재현이 아닌)에서의 그 기능에 대한 탐구가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지성 개념에 대한 일반적 비난에 참여하진 않지만, 지난 3세기 동안 확립된 물리학적 유물론(physicalist materialism)을 구성하는 특정한 과학적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그것에 대항하여 그는 다른 사유 체계, 다른 우주론을 제시한다. 화이트헤드는 공간화가 물질, 공간, 존재자들 간의 관계 등을 사유하는 데 있어 근대 과학의 모든 어려움의 핵심이라는 베르그손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그 범위를 특정 시기 동안에 특정 추상화에 연결된 영향력으로 제한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비판은 이론적 모델로 간주되는 공간화에 대한 것만큼이나 이러한 오류를 지성 일반에 귀속시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과 근대세계』에서의 화이트헤드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강의의 주요 입장 중 하나는 과학의 추상화가 교정되거나 변경될 수 없다는 관념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다.”[55]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는 철학의 과제가 추상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속받은 추상화의 한계와 그것들이 보여주는 불일치를 입증하고 지금이라도 교정하는 게 가능하다면 우리의 추상화를 교정하는 것이며, 혹은 심지어 새로운 추상화를 구성하기 위해 그것들을 포기하기까지 하는 것이라고 썼다.
더 나아가, 단순 정위 자체가 오류는 아니며, 더욱이 자연의 이분화도 오류가 아니다. 왜냐하면, “구성적 추상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단순 정위하는 물질 조각들이라는 추상화들과, 과학적 도식에 내포된 정신들이라고 하는 다른 추상화들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56] 자연의 이분화와 국지화는 무엇보다도 추상적 조작들(abstractive operations)이며, 자연에 대한 실험을 인도하는 도구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들은 정당한 실재성(reality)을 가지며, 화이트헤드는 그것들에 커다란 존경심을 표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철학(역주: 17세기를 마감했던 독특한 성격의 과학 철학)이 과학적 탐구의 조직화를 위한 하나의 개념 체계로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점에서 그 철학은 그것을 탄생시킨 17세기의 천재성에 완전히 부합한다. 그것은 그 이후로도 과학적 탐구의 지도 원리로서 행세해왔다. 그것은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57] 오류는 그것들이 가능하게 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들의 혼동, 질서들의 전도에 있다. 역설들과 잘못된 과잉들은 “오직 우리가 우리의 추상화를 구체적인 실재들로 오인했기 때문에 발생한다.”[58]
자연의 이분화라는 추상화는 생산되고 발명된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조작에서 유효성(efficacy)을 발견한 후, 이제 그것은 이상한 절차를 통해 물화(reified)된다. 마치 자연이 실제로 그 자체로 이분화된 것처럼, 마치 경험의 일차적 요소들이 정말로 단순 정위의 관념을 반영하는 것처럼 말이다.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과 혼동되었고, 결과가 원인과 혼동되었으며, 과정의 산물이 그 기원과 혼동되었다. “단순성이 우리 탐구의 목표인 한,” 화이트헤드는 “모든 자연철학자를 인도해야 하는 삶의 지침은 이렇습니다. ‘단순성을 추구하되 그것을 불신하라!’”[59]고 썼다. 추상화 과정, 즉 앞서 논의된 몸짓과 조작이 활성화되어 있고, 그것들이 허용하는 것의 관점에서 평가되는 한, 그것들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일단 이 추상화가 물화되어, 도구가 아닌 형이상학의 “실재적(real)” 기초로 여겨지는 순간, 그때부터 잘못된 문제들이 경험보다 우선시하게 되면서, “우리의 행동, 희망, 공감, 목적에서 표현되는 직접 경험을 왜곡하고, 그러한 경험을 언어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직접 경험을 왜곡하게”[60] 된다.
화이트헤드는 추상화가 물화되는 조작을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라고 부른다. 화이트헤드는 근대 사상에서 작용하는 물화의 조작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물질에 대한 과학적 학설의 형성에 관한 저의 이론은 이렇습니다. 먼저 철학은 사고 방법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인 추상화, 즉 벌거벗은 존재자를 다양한 의미에서 존재자의 속성들로 할당되는 자연 속의 여러 요인에 대한 형이상학적 기체(substratum)로 불법적으로 변형시켰습니다.”[61]
근대 철학의 상당 부분이 이분화와 국지화에 빠져들어, 이원론과 같은 그 효과들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렸으며, 그들이 이미 넘어섰다고 주장하는 조작의 근원으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았다. 화이트헤드는 의심할 여지 없이 불완전하지만, 이분화에 기반을 둔 사유의 종류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를 그려낸다. “물질과 정신을 동등한 기초으로 받아들이는 이원론자들과 정신을 물질 속에 두거나 물질을 정신 속에 두는 두 가지 유형의 일원론자들이 있다.”[62] 이러한 입장들의 범위는 명확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동일한 공간, 즉 공통의 문제점 - 이분화의 일차적 존재를 받아들이지만, 그 중요성을 여전히 확인하면서 그 효과를 줄이려 한다는 문제점 - 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한편으로는 공간과 시간 안에 단순 정위하는 물질을, 다른 한편으로는 지각하고 고민하며 추론하되 (다른 것에) 간섭하지는 않는 정신을 산출한 과학적 추상화가 엄청나게 성공한 결과, 철학은 이 추상화를 사실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표현(rendering)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63]라고 썼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대안 중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이러한 사유 이미지의 근원에 있는 몸짓들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파생한 조작들이 암묵적으로 남아 있고, 그것들의 소멸에서 그 효용성을 찾는 한, 단순히 근대 존재론에 반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근대적인 자연 경험은 추측(실재적 자연)을 꿈(현상적 자연)과 연결하려 시도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사건으로서의 자연
이분화는 극복되어야 한다. 어떻게 이것을 달성할 수 있을까? 모든 길이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여러 가능성의 갈림길에 서 있지만, 근대성 내에서 자연 개념이 출현하게 된 것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진단은 적어도 앞으로 나아갈 어떤 길이든 의심스럽게 만든다. 앞서 보았듯이, 대안들은 피상적일 뿐이다. 이분법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다양한 존재론들은 그들이 의존하는 조작과 몸짓을 감춘다. 이분화와 국지화의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나는 자연 개념의 구성에서 영향을 미치는 지배적인 관심사들을 개관했다. 이러한 관심사들은 본질적으로 조작적이고 실용적이며, 자연이 취할 수 있는 형식화들을 가능케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차별화의 몸짓뿐만 아니라 자연에 작용하는 방식에서도 파생된다. 우리는 모든 것이 뒤바뀐 상황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조작들이 존재론을 대체하고, 추상화가 사물들의 구체성과 실존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을 대체한다.
그러나 『자연의 개념』에서 화이트헤드는 이분화, 즉 추상적인 물질과 환상적인 경험 사이의 기묘한 상관관계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그의 해결책은 너무 큰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자연 개념이 전적으로 현상적인 기반 위에서 예증되어야 하며 어떤 형이상학적 입장도 거부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화이트헤드는 후에 이 점에 대해 생각을 바꾸는데, 이게 『자연의 개념』 전체를 관통하는 근대인들의 우주론 비판과 관련해, 그의 후기 저작들에 기반해야만 이분화의 완전한 극복을 구상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이분화에 대한 이러한 형이상학적 대안으로 넘어가기 전에, 화이트헤드가 이 단계에서 염두에 두었던 해결책, 즉 현상학과 주목할 만한 유사성을 보이는 해결책을 개략적으로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64] 이는 그가 후기 자연 형이상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화이트헤드가 현상학을 그 자체로 철학적 운동으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지만) 이러한 현상학적 접근 방식에 대한 시도가 어떤 요구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의 후기 형이상학은 그의 이전 이론을 무효화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 한계를 한정하려고 시도한다. 장 발이나 메를로-퐁티와 같은 화이트헤드의 여러 독자는 『자연의 개념』에 제시된 화이트헤드의 접근 방식을 그의 철학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기초로 다루었다. 즉, 그들은 이 책에서 자연의 현상적 경험에 기반을 둔 자연 철학을 도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화이트헤드 독해는 『자연의 개념』의 범위를 과장하는 특정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선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대신, 흥미로운 질문은 왜 수학자가 인식론자가 되었고 일반 형이상학을 발전시켰는가다. 자연 경험의 현상학화(phenomenologization)에 기초한 『자연의 개념』에서 제시된 해결책이 어떻게 완전하면서도 부분적인지, 그래서 어떻게 조사 영역의 경계 설정을 요구하면서도 화이트헤드가 억누르기에는 너무 집요한 요소들을 미해결 상태로 남겨두었는가다. 핵심 문구는 “자연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한 것 속에서 관찰하는 것입니다”[65]이다.
이것은 주로 방법론적인 진술이다. 자연 그 자체, 자연의 성질들, 형태, 또는 그것의 실존 양상들에 대한 어떤 존재론적 주장과도 관련이 없다. 단지 위치, 즉 자연 경험의 원초적 지점을 나타내고, 자연에 관한 진술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정당한 영역을 대략 기술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 입장은 화이트헤드가 오직 직접적 경험에만 호소함으로써 자연의 성질들을 확립할 수 있게 하는 결정을 시사한다. 화이트헤드가 요구하는 것은 경험의 중요성에 과중한 부담을 지우는 어떤 것도 더해지지 않아야 하며, 특히 어떤 것도 거기서 빠져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자연에 관해 아는 모든 것은 함께 가라앉거나 함께 나아가야 하는 한배에 타고 있습니다.”[66] 이게 진정한 방법의 시작점이다. 화이트헤드가 정확히 이와 같은 용어들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암묵적으로 그의 진술들은 『자연의 개념』이 가능한 한 가장 엄격한 방식으로 따르는 방법을 포함하며, 일단 변형되고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전개되면, 사변적 사유에 알맞은 방법이 될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화이트헤드 사유의 진화, 즉 사변적 접근으로 향하는 경로는 그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이 방법, 즉 경험에서 아무것도 빼지 않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 저작인 『사고의 양태(Modes of Thought)』에서 화이트헤드는 이를 다시 다루며, 특히 과학과는 대비되는 철학에 고유한 요구와 동일시한다. “철학은 그 어떤 것도 배제할 수 없다.”[67] 이 원칙은 윌리엄 제임스의 급진적 경험주의(radical empiricism)를 관통하는 철학적 운동과의 인상적인 계보를 나타내는데, 제임스의 정식화는 화이트헤드의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하나의 경험주의가 급진적이려면, 그것을 구축할 때 직접 경험되지 않은 어떠한 요소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직접 경험된 어떠한 요소도 배제해서도 안 된다.”[68] 『자연의 개념』에서 작용하는 게 바로 이 급진적 경험주의이며, 이것은 화이트헤드를 자연의 지각적 경험에 집중하도록 몰아간다. 후에 그가 일반 형이상학을 발전시키도록 재촉하는 것 또한 동일한 경험주의인데, 그것의 사변적 대담성에 관해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의 결론에서 극찬했다. “철학은 종종 범주들에 대립시키기 위해,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개념들, 즉 실제로 개방적인 개념들, 관념들의 경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감각을 드러내는 개념들을 제시하려고 시도해왔다. 가령 본질적인 것에 맞서는 ‘실존적’인 것, 개념들에 맞서는 감지들(感知, pecepts contre concepts)이 그러했으며, 또는 화이트헤드에게서 발견되며 『과정과 실재』를 현대 철학의 가장 위대한 저작 중 하나로 평가받도록 한, 경험적-이상적 개념들(empirico-ideal notions)의 목록이 그러했다.”[69]
『자연의 개념』에서 이 방법은 자연 경험을 어떻게 탈바꿈시키는가? 나는 경험주의가 호소하는 방법을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빼지 않고 어떤 외부적 요소도 더하지 않을 때, 지각에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답변은 약간은 당혹스러운데, 그건 지각을 새로운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알아차림(awareness)에 대한 직접적 사실은 자연의 전체적 생기(生起, occurrence)입니다. 그것은 감각-알아차림에 대해 현전하고, 본질적으로 추이하고 있는(passing) 사건으로서의 자연이다.”[70] 이 구절에는 두 가지 뚜렷히 구별되는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전체적 생기”인데, 이는 신체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관점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자연의 총체성이다. 우리는 자연의 총체성에 명확하게 접근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가려져” 있으며 우리는 그에 대해 막연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적 삶으로서의 사건, 이 방 안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경과로서의 사건, 그리고 다른 부분적 사건들의 막연하게 지각되는 집합체(aggregate)를 알아차리고 있습니다.”[71] 자연은 지각에 의존하여 지각되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오직 관점에 따라서만 경험할 뿐이다. 또한 자연은 독립적으로 지각되는데, 그런 점에서 부분적 사건들의 막연한 지각은 우리의 현재 지각을 넘어서는 무언가로 경험된다. 신체, 지각되는 방, 건물은 지각의 현행적 대상은 아니나 그 안에 지속되며 그리고 막연하게만 지각되는 측면들에 가닿을 수 있도록 해주는 사건들의 배경을 제공한다.
두 번째 요소는 그 단락의 말미에서 언급된다. 화이트헤드는 그가 너무나 근본적이라고 여겨서 주저 없이 그것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 특수한 성질을 자연에 부여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자연 경험의 다른 모든 성질은 이 성질로부터, 곧 첫째 원리인 추이(passage)의 수많은 사례 또는 현행화로서 파생될 것이다. 여기서 자연 개념의 궁극적인 원리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데, 그것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지각의 사례들과의 관련성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요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다시 베르그손으로 돌아간다. “비록 베르그손은 제가 ‘자연의 추이’라고 부르는 근본적인 사실에 대해 ‘시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저는 저의 이런 신조가 베르그손의 입장과 온전히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72] 당면 과제는 베르그손의 추이 개념을 가장 넓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적 이행, 진화 또는 생성(becoming)뿐만 아니라 공간적 변화, 장소 이동 또는 운동을 가리킨다. 이러한 차원들 중 어느 것에도 우선성을 부여할 이유가 없다. 모든 추이는 즉각적으로(directly), 또는 정확히 말하자면, 직접적으로(immediately) 시간적이자 공간적이다. 따라서 발이 썼듯, “카이사르의 암살이라는 사건이 공간을 점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과 시공간의 관계는 거의 모든 면에서 유사하다. 한편에는 공간 안에 대상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시간 안에 해프닝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건들인 해프닝-대상들(happening-objects)이 존재한다.”[73]
따라서 추이는 “사건”이다. 여기가 화이트헤드의 작업에서 사건이라는 개념이 그토록 중요성을 띠게 되는 첫 순간이다. 여기서부터, 즉 사건을 자연의 일차적 특성이자 자연 경험의 궁극적인 지점으로 삼으려는 이 결정으로부터, 화이트헤드의 철학 전체는 사건 개념에 관한 방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 들뢰즈가 화이트헤드 철학에 헌정한 『주름』의 어느 한 장에서 썼듯이,
화이트헤드의 이름과 더불어 세 번째로 “사건이란 무엇인가?”이라는 물음이 울려 퍼진다. 그는 속성적 도식(attributive scheme)에 대한 급진적 비판, 원리들의 거대한 놀이, 범주들의 증식,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화해, 그리고 개념이 주체로 변형하는 것, 즉 이러한 교만 일체(an entire hubris)를 받아들인다. […] 사건은 단지 “사람이 압도된다”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피라미드는 하나의 사건이며, 이것의 한 시간, 삼십 분, 오 분 동안의 지속이고…, 자연과 신의 추이, 또는 신의 전경(全景, view)이다.[74]
따라서 자연의 추이는 사건이며,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관점들과 우리의 지각에서 우리가 분별하는(differentiate) 그 부분들도 마찬가지로 사건이다. 지각 안에서는 모든 것이 사건이다.[75] 나는 몇 가지 예, 곧 그것들이 보여주는 사건들의 측면에 따라 그룹화될 예시를 제시할 것이다. 세 가지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세 개의 광범위한 그룹이 있다.
1. “어제 첼시 강변길에서 어떤 사람이 차에 치였다.”[76] 사고나 특수한 생기라는 관념은 사건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다. 즉,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고, 상황의 예기치 않은 전복, 회고로 연결될 수 있는 인과 연쇄와는 명백히 단절된 듯한 실재의 출현, 경험의 연속성에서의 크고 작은 단절, 이 모든 것이 자연 내에서의 생기로서의 사건이라는 관념에 포함된다. 여기에 놀라운 건 없다. 화이트헤드는 단지 사건에 대한 통상적인 개념을 받아들이고 “생기”라는 용어 아래 다양한 진술들을 모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첼시”의 예에서 특히 예리하게 나타나는 전제들의 배경을 발견할 수 있다. “생기”라는 이 관념은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것은 무엇인가가 일어난 주체 안에, 이 사건 이전에 존재했던 주체 안에 있는 건가? 이러한 의미에서 사건적 요소는 단지 속성에 불과한가? 명확히 하자면, 이 진술에서 사건은 차에 치인 남자에게 위치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목격자들, 피해자, 운전자, 그리고 아마도 첼시 제방을 가득 채운 보도들을 연결하는 더 넓은 실재인가? 분명히 무언가가 일어났지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그 어떤 지지물이나, 그것에 할당될 수 있는 모든 주체, 또는 그것이 출현하는 데로부터 유리된 것처럼 보인다. 단순히 스스로 자기에게 부과한 방법을 따르는 화이트헤드의 입장은, 우리가 사건을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 즉 직접적 인식에서 주어진 것으로 환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에는 마땅한 자리가 주어져야 한다. 사건이 이와 같은 생기인 한, 생기 자체가 실재적 실체성(real substantiality)을 얻게 되며, 남자, 목격자, 첼시 제방, 그리고 화자는 그것의 속성이 된다. 이게 결정적인 지점이다. 화이트헤드는 생기를 사건의 기초이자 실재적 실체성으로 만들고자 하며, 그 자체 외 다른 어떤 것도 거기에 귀속시키기를 거부한다. 더 나아가, 생기 - “어떤 사람이 차에 치였다” - 는 우리가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할 때 분명해지는 공간적 관계들의 다수성 속에서 전개된다. 그것은 “강을 지나가는 바지선과 스트랜드가의 차량들에 인접한 곳에서” 일어났다.[77] 그러나 이것은 또한 다른 과거 또는 동시대의 생기들의 무한한 다수성 안에 삽입된 시간적 생기다. 따라서 “그 사람은 당신이 차를 마시는 시간과 저녁 식사하는 시간 사이에 차에 치였다”[78]는 것은 다른 생기들의 성좌 내에서 그 생기가 자리한 시간적 위치를 표현한다. 다른 사건들 모음의 중심에 그것을 위치시키는 생기의 이러한 시공간적 관계는, 마치 시간과 공간이 사건들이 일어나는 형식들, 용기들, 또는 축들처럼, 외부적인 맥락이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사건 간의 관계를 시간과 공간이 그 일관성을 얻는 핵심으로 삼는다.
2.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 채링크로스 강변길에 있다.”[79] 이 오벨리스크의 존재에 사건의 지위를 부여하는 건 언뜻 보기에 상식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첫 번째 범주의 사건들에 명확히 귀속될 수 있는 생기, 추이, 시간적 이행이라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사건들의 이 첫 번째 집합의 실체를 형성하는 사고들, 인과적인 단절들, 그리고 돌발(irruption)들은 어디로 가는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차이는 보이는 것만큼 뚜렷하지 않다. 동일한 요소들을 찾을 수 있지만, 그것들은 새로운 수준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화이트헤드는 사고 실험, 즉 관점의 창의적인 변화를 언급한다. “어떤 천사가 수억 년 전 지구가 실존하지 않았을 때 그런 말을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2천만 년 전에는 템스강 자체가 없었을 것이며, 80년 전에는 템스강의 강변길이 없었을 것이고, 제가 어렸을 때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 거기에 없었을 것입니다.”[80] 모든 것은 채택된 시간적 관점에 달려 있다. 우리가 특히 긴 시간 틀 안에 우리 자신을 둔다면, 오벨리스크의 존속은 처음에 보였던 것보다 더 덧없는 것이 된다. 또한, 일반적인 전체상의 관점에서 보면, 오벨리스크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만일 우리가 그것의 내부 실존에 몰두하여 그 구성 요소들을 분석한다면, 외양의 단순함 아래에 변양, 변화, 그리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의 다수성이 있음을 깨닫는다. 따라서 “자연의 삶의 부분을 전자들의 춤으로 보는 물리학자는 자연이 매일매일 일부 분자를 잃고 다른 분자를 얻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81] 우리가 더 넓은 시간 척도에서 보든, 오벨리스크를 미묘하게 변화시키는 미세한 변형 안에 우리 자신을 두든, 결과는 같다. 오벨리스크의 실존이 갖는 연속성은 원칙적으론 자연 내의 다른 생기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건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화이트헤드에 동의한다면, 우리의 경험에 있는 모든 “사물들”, 즉 물질적 대상, 물리적 대상(기술적이든 생체적이든)은 추이와 시간적 이행의 유사한 원리들을 표명하는 사건들이다. 화이트헤드의 입장은 모든 대상을, 그것들이 존속되는 한, 사건의 영역 안에 두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사건, 사고 또는 생기의 한 사례는 직접적으로 존속이라는 관념을 보여주지 않지만, 이를 전제한다. 첫 번째 사례의 경우, 상황의 단절인 돌발적인 사고가 최소한의 현실성을 가지려면 운전자, 피해자, 목격자, 채링크로스의 존속성이 필요하다. 사고는 복합적인 존속을 배경으로 삼아 펼쳐지며, 그와의 관련에 따라 차이가 생겨난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에게 존속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은 지속이라는 개념, 실존의 유지, 존재의 바로 그 규모를 의미한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가 이러한 존속들 안에 우리 자신을 둔다면, 우리가 더 깊이 파고들수록, 오벨리스크의 외관상 안정성과 연속성 아래에서 매 순간 그것이 실존하는 각각의 찰나들을 변화시키는 수많은 작은 사고, 자그마한 변화, 그리고 변형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일반적인 규칙을 이끌어낼 수 있다. 존속은 생기를 전제한다.[82] 오벨리스크의 실존을 유지하는 것은 화이트헤드가 나중에 “역사적 경로”라고 부를 일련의 생기들, 즉 그 자체의 실존이라는 관점에서는 완전히 덧없는 작은 사건들의 반복과 재개의 연쇄와 다름없다.
3. “태양 스펙트럼에는 암흑선들이 있다.”[83] 처음 보면, 이 진술은 앞의 두 진술과 연결되어 그것들을 확인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생기(태양 스펙트럼에 어두운 선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사실) 또는 존속성(어두운 선들에 의해 존재가 암시되는 스펙트럼)이라는 관념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걸로 보기 쉽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이 진술에서 사건의 새로운 구성 요소를 이끌어내길 원하는 게 분명하다. “암흑선들”이나 “태양 스펙트럼”의 실존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사건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모든 사건이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라는 점은 이미 밝혀졌으므로, 이 진술이 다른 두 진술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이 두 사건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이 다른 사건들의 관계적 실존과 어떤 면에서 다른가? 이 진술의 특정 요소는 “태양 스펙트럼”과 “암흑선들”이라는 사건들에 추가되는 새로운 차원의 도입을 통해, 그것들을-관계-맺는(their putting-into-relation) 조작에서 찾을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정의하지 않지만, 나는 이것을 “객체적 상관관계(objective correlation)”라고 부르고자 한다. 화이트헤드의 진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두 사건이 주어졌을 때, 어떤 상관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가? 이 활동은 태양 스펙트럼의 이 특정한 사례가 강조한다고 화이트헤드가 믿는 이론들, 주로 과학 이론들의 핵심에 있다. 다시 말해, “만일 어떤 사건이 할당된 특정 상황들(circumstances)에서 태양 스펙트럼을 표출하는 존재로서의 특성을 가진다면, 그 사건은 또한 그 태양 스펙트럼에서 암흑선들을 표출하는 특성을 가질 것이다.”[84]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사건 이론에 이론적, 추상적, 조작적 요소들을 배치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첫째, 그것은 자연의 사건들과 그것들이 재현되는 양식(사실적 상태들과 재현들) 사이의 초기 구별을 깨뜨리고, 그것들을 직접적으로 같은 수준, 같은 평면에 놓는다. 모든 것은 자연의 평면 위에 수평적으로 놓인다.[85] 즉 우리가 사건들을 연결하는 방식은 경험 자체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이러한 방식들은 오벨리스크의 존속성만큼이나 실재하는 실존의 요소들이다.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방법에 큰 비중을 두며, 거기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론들은 첼시에서의 사고나 오벨리스크의 존속만큼이나 인식의 직접적 여건(data)이다. 상관관계가 그 자체로 사건이라고 진술하는 것은 화이트헤드를 그의 사건 이론의 두 번째 결과, 즉 이론들을 자연의 다른 모든 사건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끈다. 이론과 사건 사이의 이러한 관계의 결과에 관한 물음은 『자연의 개념』이 저술될 당시에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과정과 실재』에서 명제 이론의 형태에서 완전한 표현을 찾을 것이며, 그에 관해선 본서의 마지막 장에서 다룰 것이다. 이 시점에 중요한 점은 『자연의 개념』에서 무대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과학 이론들은 생기, 존속, 역사적 경로, 유동하는 연결이라는 동일한 특성들로 특징지어지는 사건들이다. 따라서 이 세 번째 진술에서 제시된 사건의 의미는 “태양 스펙트럼”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인 “암흑선들”과 상관관계라는 세 번째 유형의 사건을 매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사건들의 완전히 다른 공간이 설정되는데, 이는 다른 사건들과 연결되며, 그 실존은 이러한 다른 사건들의 절합에 기초한다. 내가 객체적 상관관계라고 불렀던 건 이제 사건의 새로운 실존 양태가 되며, “생기”와 “존속”에 추가된다. 『자연의 개념』에서 도출된 이 세 가지 구성 요소는 모두 서로를 전제하는 복잡한 경제를 이룬다. 사고(accident)는 복합적인 존속들을 배경 삼아 펼쳐지는데, 이 존속들 자체는 공통된 역사적 경로를 따라 유지되는 돌발적인 생기들의 연쇄다. 이론들은 그 자체로 이미 작용하고 있는 존속들과 사고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통해서만 실존하는 전제들(presuppositions)의 배경을 형성한다. 명백하게도, 이러한 구성 요소들 중 어느 하나만을 다른 구성 요소들의 일차적 실존 조건을 획득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 화이트헤드가 암묵적으로 따르는 방법은 알아차림(awareness) 안에 담겨 있는 자연의 추이라는 직접적 사실의 관점에서 경험을 탐구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이 구성 요소들 - 사고, 오벨리스크, 그리고 태양 스펙트럼과 상관관계가 있는 암흑선들, 그리고 직접적 사실 - 의 상호 엮임이 자연 평면의 일차적인 배열을 형성한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 “사건적(evental)”이지 않은 존재자들로 구성된다. “강변길을 따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어, 저기 그 바늘이 있네!’라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러분이 바늘을 인식한다고 해봅시다. 여러분은 사건을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사건이 지나갔다면, 그 사건은 지나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사한 특성을 가진 다른 사건을 관찰할 수 있지만, 자연의 삶의 현행적(actual) 덩어리는 그것의 독특한 생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86] 각 사건은 추이이며, 식별 불가능성 원리의 재점화에 따라 그 순간에 있어 본래적으로 독특하고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다. 그러나 모든 사건에는 문자 그대로 추이하지 않는 요소들, 즉 공간적 연장도 시간적 두께도 없는 요소들이 있다. 우리가 “이것은 거기 있다, 다시 여기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마다 우리는 경험을 하고 있다. 이것이 대상의 실존을 확증하는 최소한의 가장 간결한 표현이다. 무언가가 다시 여기에 있다. 정확히 우리는 무엇을 인식했는가? 색깔의 변화, 다양한 기하학적 형태들, 특정한 소리의 강도, 특수한 감각들이다.
화이트헤드는 순전히 관례에 따라 이것들을 “객체들(objects)”이라고 부르는데, 그 목록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가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객체다. 화이트헤드의 “실재론(realism)”은 모든 인식이 습관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사건들의 다양한 성질을 물화한 후에야 그것들을 연결한다는 주장으로 반박될 수 있다. 파란색에 대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항상 그 자체로 항상 다른 “파란색”에 대한 특수한 경험들의 반복(repetition)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파란색”의 이러한 사례들은 어떤 점에서 항상 다른가? 모든 사건이 다르다면, 모든 경험이 변화하고 있다면, 파란색의 각 농담(濃淡, shade)이 다른 것과 차이가 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는가? 이처럼 우리는 설명을 원하는 만큼 계속해서 회귀시킬 수 있지만, 결국 항상 같은 질문이 남겨질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원초적인 경험으로 보이는 것에서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는가? 용어는 부정확할 수 있고, 단어는 실패할 수 있으며, 상응관계는 어긋날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되돌아왔다는(비록 우리가 그것을 처음 경험했다 하더라도), 사건의 한 측면이 다른 측면과 유사하다는, 우리가 이미 다른 형태로 그것을 경험했다는 인상은 그대로 남는다.
화이트헤드는 우리가 어떻게 “객체”를 그 자체로 알 수 있는지, 즉 이 “파란색”이나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우리가 어떻게 각 계기마다 그것들을 국지적으로 경험하는지, 그리고 모든 지식이 사건과 관련해 어떻게 위치하는지에 관해 논한다. 사건들은 대상을 경험하는 계기들이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원리를 약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 자연의 수준으로 전치한 것으로, “감각들을 통해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것들을 형성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관념들과 원리들이 있다. 비록 그 감각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알아차림으로 가져다주지만 말이다.”[87]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계기들”에서만, 즉 국지적인 차원에 따라서만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역전된다. 특유한 방식으로 그것들이 연결되고 특정되는 대상 없이는, 사건도 없다. 반대로 우리는 사건적인 상황들에서만, 즉 경험된 사건 너머를 가리키는 무언가를 인식하는 그 계기들에서만 대상을 경험한다. 이것은 두 요소가 대립하는 성질들을 가지기 때문에 기이한 혼합이다. 사건으로서의 오벨리스크는 그 실존에 있어서 독특하다. 그것은 그 자체의 시간과 공간을 가진다. 우리가 그걸 경험하는 관점에서 우리는 오벨리스크 안에서 무수한 성질들, 즉 그것을 구성하는 복합적 형태들, 색깔들, 그것들의 변화와 조정을 인식한다. 이러한 “객체”들은 정신에서 자연으로 단순히 투사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색깔, 소리, 형태가 우리에게 속하는 것처럼 다시 이분화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정신이야말로 그것들 안에서 실존 조건을 찾으며, 그것들로부터 파생된다. 자연 안에 반복 - 인식 가능한 것이 있기에 - 정신은 비교하고 연결할 수 있다.
『자연의 개념』 안에서 화이트헤드는 이미 이분화를 넘어설 수 있는 방식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정합적이고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분화는 추상적 성질들과 현상적 성질들을 구분하기 때문에, 자연의 사건에 관한 이론을 통해 이 사건들을 지각 경험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들을 재결합할 수 있는 방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화이트헤드 사상의 발전, 그의 저작 내에서 아이디어가 발전해가는 여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더 깊은 문제, 즉 이 책의 관심사에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시사한다. 내가 논증하려고 시도했듯이, 사건 이론이 하나의 방법(오직 지각 경험만을 고려하는 것)과 하나의 전제(모든 사건의 추이나 사건으로서의 자연)에 의존한다면, 이것 자체가 자연의 근대적 이분화를 넘어설 수 있는 정합적이고 일관된 방법을 제공하는가? 자연을 “현상적” 평면에 놓기로 선택함으로써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배제해야 하는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가 『자연의 개념』에서 따르는 방법은 그에게 무엇을 부정하도록 강요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분화를 넘어설 가능성은 이 단계에서 자연에 대한 어떤 형이상학적 고찰도 배제하기로 하는 결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화이트헤드 저작에 대한 독해에서 수많은 애매함과 오해가 나타난 건 화이트헤드가 취했던 태도,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분명하게 제시한 입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저는 이 강의가 실재의 궁극적 특성에 대해선 아무것도 다루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해야만 합니다.”[88] 그는 이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재앙이 될 것이라 말하며, 자신의 요점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형이상학에 호소하는 것은 마치 화약고에 성냥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무대 전체를 날려버립니다.”[89] 화이트헤드의 입장은 단순하지 않으며, 그는 이 점이 자신의 기획에 상당한 제약을 가한다는 걸 인정한다. 이건 실망스러운데, 그것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필연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추이로서의 자연 경험이 지각과 관련하여 위치 지어지면서도 자율적이라는 한, 이는 필연적으로 자연을 구성하는 존재들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알고 있었으며, “철학자로서는 제가 여러분 앞에 세운 한계들 내로 자신의 논의가 실제로 제한되고 있다는 점을 깨닫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 경계는 바로 그 사람의 정신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에 세워집니다”[90]라는 것을 인정한다. 현상적인 기초 위에서의 자연 개념의 구축과 이미 개괄한 사건 이론이 이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형이상학적 고찰도 거부하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방법은 자연 자체에 대한 탐구를 넘어서고 모든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질문을 괄호 안에 넣기 때문에 급진적이었을 수 있다. 주체에 관한 물음과 그 물음이 자연과 맺는 관계는 오직 발견법적인(heuristic) 것이다. 이게 화이트헤드의 기획을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로 “사변 물리학을 재조직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가 되는 자연철학의 기반”[91]을 마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이분화를 넘어서는 것은 과학사와 새로운 사변 물리학의 구축으로 한정되는 국지적인 사안일 것이다. 이는 실재에 대해서 또는 지각과는 독립적인 자연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도 취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게 사건 이론의 성공 조건이었다. 즉, 어떤 형이상학적 입장도 포기하는 것 말이다.

각주
*저자가 직접 인용하는 구절들 중 한글 번역본이 있는 경우엔 가능한 한글 번역본을 따라서 번역하려 했으며, 그중 일부 용어나 문구를 다듬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아래 각주에서 *으로 표시한 내용은 드베즈가 인용한 자료의 또 다른 판본의 서지사항 및 페이지 또는 한글 번역본의 서지사항 및 페이지를 적은 역주다.
1장
[39] 영어판 역자주(Michael Halewood): 위치(location)는 국지화(localization)를 의미한다.
*여기서 simple location은 ‘단순 위치’로 번역될 수 있지만, 기존 화이트헤드 한국어판 번역 용례를 따라 ‘단순 정위’로 번역한다. location만 쓸 때는 위치로 번역하고, localization은 위치화보다는 특정한 자리에 배치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국지화로 번역한다.
[40] Whitehead, Concept of Nature, 54.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36.
**『자연의 개념』, 85.
[41]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ed. David Ray Griffin and Donald Sherburne, Gifford Lectures of 1927–28. Corrected ed. (New York: Free Press, [1929] 1978), xii.
*『과정과 실재』, 오영환 옮김, 2003, 민음사, 44.
[42] 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 trans. Arthur Mitchell (London: Palgrave Macmillan, 2007), 214. 해당 구절의 영어 번역을 약간 수정하였다. “It is undeniable that there is no entirely isolated system.” 영역본의 원래 번역은 다음과 같다. “It is undeniable that if there be no entirely isolated system.”
*『창조적 진화』, 황수영 옮김, 2005, 아카넷, 307-308.
[43] Bergson, Creative Evolution, 329.
*『창조적 진화』, 484.
[44] Bergson, Creative Evolution, 329.
*『창조적 진화』, 485.
[45] Bergson, Creative Evolution, 329.
*『창조적 진화』, 485.
[46] Bergson, Creative Evolution, 328.
*『창조적 진화』, 483-484.
[47] Bergson, Creative Evolution, 336.
*『창조적 진화』, 493.
[48]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209.
*『과정과 실재』, 442.
[49] Henri Bergson, The Creative Mind: An Introduction to Metaphysics (Mineola, NY: Dover, 2007), 159. (강조는 원저 프랑스어판을 따랐다.)
[50] Bergson, Creative Mind, 160. (강조는 원저 프랑스어판을 따랐다.)
[51] Bergson, Creative Mind, 36.
[52] Wahl, Vers le concret (2010), 123–24.
[53] Whitehead, Modes of Thought, 67.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48-49.
**『사고의 양태』, 105.
[54]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34.
*『과학과 근대세계』, 68.
[55]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84.
*『과학과 근대세계』, 150.
[56]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59.
*『과학과 근대세계』, 107.
[57]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56.
*『과학과 근대세계』, 102.
[58]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56. (‘발생한다’는 문구가 원저에는 ‘arise’로 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는 문맥에 맞게 arises로 고쳐 인용했다.)
*『과학과 근대세계』, 102.
[59]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63.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4.
**『자연의 개념』, 236.
[60]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49–50.
*『과정과 실재』, 138.
[61] Whitehead, Concept of Nature, 20–21.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4.
**『자연의 개념』, 39.
[62]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57.
*『과학과 근대세계』, 104.
[63]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57.
*『과학과 근대세계』, 104.
[64] 현상학과 화이트헤드 철학 사이의 관계에 관한 설명은 Bertrand Saint-Sernin의 Whitehead, un univers en essai (Paris: J. Vrin, 2000)을 참고하라.
[65] Whitehead, Concept of Nature, 3.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2.
**『자연의 개념』, 14.
[66]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48.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95.
**『자연의 개념』, 215.
[67] Whitehead, Modes of Thought, 2.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2.
**『사고의 양태』, 15.
[68] William James, Essays in Radical Empiricism (London: Longmans, 1912), 42.
*『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 정유경 옮김, 2018, 54.
[69]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London: Athlone Press, 1994), 284–85.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2004, 민음사, 604.
[70]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4–15.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
**『자연의 개념』, 31.
[71]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5.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
**『자연의 개념』, 31.
[72] Whitehead, Concept of Nature, 54.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36.
**『자연의 개념』, 85.
[73] Wahl, Vers le concret (2010), 136. (영어 역자인 헤일우드가 영어로 번역하였다.)
[74] Gilles Deleuze, The Fold (London: Athlone Press, 1993), 76.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140.
**한국어판 역자주: ‘an entire hubris’에서 ‘hubris’는 고대 그리스어 hybris에서 유래하였다. 그리스 신화나 비극에서 신들이 세운 세계 질서에 도전하는 인물들에 분노한 신들이 그러한 인물들의 태도를 규정할 때 사용되는 용어다. 이를테면 자만·오만·교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질서 원리가 부여하는 한계에 맞서고 그걸 넘어서려는 자기 과신이나 과잉을 뜻한다. 들뢰즈는 이 용어를 통해, 화이트헤드가 그리스 비극의 인물들과 같은 태도로 사건에 관해 사유하려고 도전했다고 평가한다.
[75] 『자연의 개념』에서 논의하는 사건 이론과 그 이론이 『과정과 실재』와 같은 후기 작업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살펴보려면, Wahl의 Vers le concret (2010)를 참고하라.
[76]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65.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6.
**『자연의 개념』, 239.
[77]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66.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6.
**『자연의 개념』, 240.
[78]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66.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6.
**『자연의 개념』, 240.
[79]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66.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6.
**『자연의 개념』, 239.
[80]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66.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6.
**『자연의 개념』, 241.
[81]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67.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자연의 개념』, 242.
[82] 존속이 반복들(reprises)의 궤적을 포함한다는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물려받은 유산을 브뤼로 라투르(Bruno Latour)의 An Inquiry into Modes of Existence: An Anthropology of the Modern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3)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존재양식의 탐구』, 황장진 옮김, 2023, 사월의책.
[83]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65.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6.
**『자연의 개념』, 239.
[84]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67.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7.
**『자연의 개념』, 242.
[85] 나는 “자연의 평면(plane of nature)”이라는 표현을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가져왔다. 예를 들어, 그들은 『천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경도와 위도, 속도와 이것임(haecceities)만을 알고 있는 이러한 평면(plane, 판)을 (조직의 평면과 전개의 평면과 대립되는) 일관성의 평면(고른 판) 또는 조성의 평면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내재성(immanence과 일의성(univocality)의 평면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과 아무런 관계는 없지만 이것을 자연(Nature)의 평면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평면에는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사이에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 평면이 아무리 많은 차원을 가질지라도, 이 평면은 그 위에서 일어나는 것에 관련한 부가적 차원을 절대 갖지 않는다. 오직 그것만이 이 평면을 자연적이고 내재적인 것으로 만든다.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London: Athlone Press, 1988), 266.
*『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2011, 새물결, 505.
[86]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69.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8.
**『자연의 개념』, 244-245.
[87] Gottfried Wilhelm Leibniz, New Essays on Human Understanding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74.
*『신인간지성론 2』,
[88] Whitehead, Concept of Nature, 151.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97.
**『자연의 개념』, 218.
[89] Whitehead, Concept of Nature, 29.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20.
**『자연의 개념』, 50.
[90] Whitehead, Concept of Nature, 48.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32.
**『자연의 개념』, 76.
[91] Whitehead, Concept of Nature, vii–viii.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x.
**『자연의 개념』,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