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서의 자연: 가능한 것들의 유혹
저자: 디디에 드베즈(Didier Debaise)
영어 번역: 마이클 헤일우드(Michael Halewood)
한글 번역: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2장 보편적 마니에리슴 A Universal Mannerism (중반부)
느낌들의 주체성
느낌은 모든 존재의 일차적 활동[작용, operation]이다. 그런데 느낌에 이처럼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이 책의 초기 목표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가? 앞서 중심에 놓여있다고 말했던 주체성 개념에는 무엇이 남는가? 주체성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고 비판받았던 이들처럼, {우리의 논의 또한} 이 개념에 단지 제한된 지위만 부여하고, 그것의 실존적 관련성을 제약하며, 나아가 자연의 특정 영역으로 환원해버리는 결과를 낳는 건 아닐까? 주체적 경험 자체는 느낌과 관련하여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 이제 “주체”는 인간학적 주체뿐만 아니라, 느끼고 경험하며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to be affected)고 말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모든 실존 형태들을 가리키는 용어가 된 걸까? 아니면, 반대로 느낌은 그 어떤 주체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일차적 활동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주체”라는 단어의 두 가지 의미, 즉 철학사 속 두 개의 상이한 전통에 기반을 둔 의미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주체는 subjectum(기체; 基體) 또는 superjacio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을 대립하는 것으로 보거나, 어느 한쪽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거나, 각각의 한계를 추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각 용어는 주체성 개념의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주며, 이 측면들은 여기서 제시되는 느낌의 형이상학에서 상보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물론 그것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서로 마주 대할 때면 대립 관계에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것들을 느낌의 두 가지 상이한 찰나들로 간주한다면, 그러한 대립은 충분히 사라질 수 있다. 나는 주체성의 서로 다른 측면들에 상응하는 느낌의 위상들(phases)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주체 개념의 이러한 두 가지 기원에 연관된 특성들은 경험의 중요한 차원들을 표현하므로, 이를 개괄한 다음 느낌의 형이상학 틀 안에 위치시켜야 한다.
첫 번째 의미부터 살펴보자. 주체는 근대 철학 전반에 지배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은 subjectum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용어는 아래에 놓여 있는 것, 곧 무언가의 아래로 던져진다는 관념을 강조한다. 따라서 주체는 모든 외양, 가지각색의 속성들, 변화하는 인상들 또는 피상적인 성질들 아래에서 스스로를 지탱하며, 이 모든 것들을 발산하는 지반 또는 기초를 형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이데거(Heidegger)는 니체(Nietzsche)에 대한 강의에서 이러한 성질들을 식별하고 재정식화하는 데 있어 기반이 될 만한 설명을 제공한다.
subjectum[29]은 작용(actus)에서 근저에 두어지고 근저에 던져진 것이며, 그것에 다른 것들이 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귀속되는 것(joining)에서는, 즉 우유성(偶有性, accidens)에서는, 현존성에서 함께-도래함(presencing-along-with in presence), 즉 현존의 한 방식이라는 의미가 더 이상 간취될 수 없게 되었다. 근저에 놓여 있는 것, 근저에 두어진 것(subjectum)은 다른 것들이 그 위에 놓이는 근거의 역할을 떠맡는다. 그 결과 근저에 두어진 것은 또한 근저에-서 있는 것(떠받치는 것)으로도, 이처럼 모든 것에 앞서 항구(恒久)하는 상수(constant, 常數)로도 이해될 수 있다.[30]
이러한 subjectum의 문제는 우리의 현 관심사인 느낌의 형이상학 안에 위치되어야 한다. 이 개념은 어떤 경험, 느낌의 어떤 차원에 관련되는가? 방금 인용된 구절에서 하이데거를 따른다면, 그리고 이를 느낌의 관점에서 번역하면, subjectum은 지반, 즉 불변하는 토대를 형성하는 물러난(withdrawn) 실재이자 느낌의 기원이다. 지금까지 제시한 느낌의 형이상학은 확실히 주체에 대한 그러한 관념에 들어맞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subjectum으로서의 주체에 관한 이 진술에서 일반적인 경험 속에서 식별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려 한다. 자신의 느낌을 소유(possession)하고 있는 주체라는 이러한 관점이 근대 철학에 현저한 것으로 자리 잡았다면, 이는 분명히 경험의 어떤 근본적인 특성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경험이 집중되어 있고, 표현적인 성질들 - 즉 정서적 어조들, 소리들, 색깔들, 촉각적 감각들 등 - 을 발산하는, 중심 주체를 향하고 있다는 관념을 표현한다. 느낌들이 자신들이 향하는 주체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 한, 이 주체는 실질적으로 그 느낌들이 기원하는 지반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회고적으로만 나타난다. 오직 사후에야, 곧 느낌의 활동이 이미 일어난 후에야, 우리는 그것 너머에 근원이나 목적을 귀속시킬 수 있다. 그 순서는 역전되어야 하거나 오히려 재확립되어야 하며, 느낌과 주체의 관계는 진정한 발생을 부여받아야 한다. 느낌의 지반이나 토대의 출현, 즉 느낌들이 파생되는 주체라는 게 분명히 있다는 생각은 다양한 주체 철학이 이론적 기반으로 삼으려 했던 일반적이고 논쟁의 여지 없는 관념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러한 생각은 과정의 효과이지 목표가 아니다. 다시 한번 데카르트로 돌아가 보자. “데카르트는 그의 철학에서 사유하는 자(thinker)를 계기적 사유(the occasional thought)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유기체 철학[곧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이러한 순서를 뒤집어, 사유를 계기적으로 사유하는 자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사유하는 자가 최종 목적이며, 이로 말미암아 사유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31]
자기 자신을,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의 느낌들(혹은 화이트헤드의 예에서는 자신의 사유들)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으며, 자신의 변화들 아래에 있으면서 그것들을 지지하는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주체를 일차적 실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로, 회고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주체는 “경험의 연쇄들”[32]에 따른 결과로서, 그를 통해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고유한 완전성을 획득한다. 주체는 느낌들이 통일된 경험으로 결정화되는 순간, 느낌들의 복합체가 단 하나의(singular) 경험으로 되는 순간에 나타난다. 대다수의 경우, 사유는 주체에 묶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회고적으로 그것의 발전 단계를 되짚어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파생적일 때 주체를 그것에 더할 수 있다.
이러한 역전은 일반화될 수 있으며, 자연 내의 모든 경험 중추들에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물은 자신의 느낌들, 영향을 받는 특수한 방식들과 그들의 경험이 더 넓은 환경과 관계 맺는 특수한 방식들을 갖는, “그 몸의 다양한 부분”[33]이라는 다수의 경험 중추들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부분들인 다수의 경험 중추들은 복수의 신체적 중추들이 소통하고 복합적인 통일체(a complex unity)를 형성하도록 해주는 “하나의 경험 중추”[34]와 연결되어 있다. 이 통일체는 느끼는 동물로서 살아가고 자신을 드러낸다. 몸의 각 경험 중추는 하나의 경험 지점[35]에 위치한 느낌들의 다원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주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 중추들”의 집합이 더 상위의 통일체로 수렴하는 경우, 경험들의 복합적인 통일체를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동물이라는 주체를 형성한다. 루이예는 화이트헤드를 명확히 언급하면서, 이렇게 뒤얽힌 다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중첩된’ 주체성들”[36]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루이예에 따르면, 우리는 “의식의 장(a field of consciousness)에서의 주체성과 유사한 주체성을 물리적 존재에게 부여하는 것”[37]을 망설여서는 안 된다. 이런 국지적 주체성들(local subjectivities)의 절합이 곧 몸을 구성하는 조건이다. 이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다. 느낌들에 관한 물음은 상당히 다른 실존의 수준들에서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물음이 모든 경우에 있어 경험의 국지적 통일체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더 높은 수준의 통일체, 즉 일종의 지배적인 모나드(monad)가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식물의 경우에, 우리는 수용된 표현들이나 타고난 여건들이라는 측면에서 더 고등한 복합성을 지닌 그 어떤 하나의 경험 중추도 결단코 수반하고 있지 않은 신체적 유기화들(bodily organizations)을 발견한다.”[38] 다수의 작은 경험 중추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더 상위의 중추에 종속될 필요는 없다. 바로 이것이 화이트헤드가 “식물은 민주적 체제를 택하고 있는 데 반해, 동물에서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경험 중추들이 지배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배는 제한되어 있으며, 그것도 매우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선도하는 중추적 존재의 표현들은 그 존재가 몸으로부터 수용하는 여건들과 관련되어 있다”[39]라고 말하는 이유다. 따라서 subjectum으로서의 주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느낌들의 경험에서 중요한 요소를 입증해주지만, 그것은 후자의 공고화(consolidation)[40], 즉 통일된 경험이 단계적으로 응집되어(coalesces) 자기의 경험, 즉 그 몸의 이 부분, 이 동물, 이 사유하는 자로 되어가는 과정의 종착점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그 자체로서는 완전하지 않다. 이는 불가피하게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주체가 고전적인 개념에서처럼 느낌의 기원에 자리하든, 아니면 여기서 제시된 것처럼 공고화 과정의 결과로서 끝에 자리하든, 설명에 일종의 비약이 있는 것처럼 보이며, 동시에 그에 관한 설명이 가로막히는 것 같다. 만약 느낌이 어떤 식으로든 이미 주체적이지 않거나, 적어도 주체성을 가질 수 없다면, 어떻게 그것으로 될 수 있었을까? 주체적 경험이 정말로 과정의 끝, 즉 최종 위상에만 위치한다면, 비주체적인 것에서 주체적인 것으로의 추이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이 찰나는 시작, 끝, 또는 중간 어디에든 놓일 수 있지만, 주체적 차원의 증폭(amplification)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관해 우리를 어둠 속에 남겨둔다. 만약 느낌의 모든 수준에서 주체성의 움틈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특정 찰나에 관한 물음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겠는가? 바로 여기서 화이트헤드가 다른 전통에서 가져온 주체 개념의 또 다른 의미, 즉 superjacio로서의 주체를 채택한 것이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한다. 이 단어는 “위로 던지다” 또는 “~을 향해 내던지다” 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이는 더 이상 온전히 실현된 주체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경향성을 의미한다. “지향(목적, aim)은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여건들을 향유하는 느낌의 복합체다.”[41] 이 잠복한(latent) 주체성은 느낌 자체의 내부에, 즉 그 형식에 위치한다. 이는 화이트헤드가 말했듯이, 느낌이 그 자신을 펼치는 양식(manner)이다. 이 주체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양식, 곧 경험이 빚어지는 양식, 무언가가 느껴지는 양식, 어떤 사태가 일어나는 양식이다. 각 느낌은 고유한 양식, 즉 다른 모든 느낌과 구별되는 색조(음조, tonality)로 특징지어진다.[42] 사유들, 즉 감각적 인상들이 환경이 그것들에 제공하는 여건과 연결되는 수많은 특수한 방식들을 이미 구현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 위해,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experience of self)을 소유하는 주체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 이 양식은 지향이며, 느껴지는 것이 관여하거나 동원되는 방향(orientation)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느낌들은 그것들이 지향하는 목표와 유리될 수 없다. 이 목표는 느끼는 자(feeler)이다. 느낌들은 그 목적인으로서의 느끼는 자를 지향한다.”[43]
앞서 언급했듯이, “주체”라는 용어의 두 가지 의미, 즉 subjectum과 superjacio는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인간학적인 맥락에 배타적으로 국한되지 않는, 새롭게 갱신된 주체에 대한 사유 속에서 함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 느낌의 문제에서 출발하면, 두 개의 주체적 위상에 상응하는 느낌의 두 가지 찰나가 있음이 명확해진다. 첫째, 초기 단계에서 느낌은 느껴지는 것, 즉 여건, 감각들, 관념들, 일반적인 인상들과 혼합된다. 그러나 주체적인 형식은 이미 여건에 대한 느낌의 이와 같은 내재성(immanence) 안에 존재한다. 둘째, 첫 단계에서 느낌은 느껴지는 것과 거의 구별될 수 없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양식과 여건의 집중은 이미 잠재적 주체성(virtual subjectivity, superjacio)의 표현, 즉 느낌의 내재적 스타일의 표현이다. 경험의 활동이 끝나는 데서, 화이트헤드가 자기-향유(self-enjoyment)라고 부르는 자기 경험이 나타난다. 그러면, 그것은 그 자체로 subjectum, 즉 그것을 발생시키는 여건들을 가로질러 그 자체의 소유자가 된다. 들뢰즈는 화이트헤드의 기획을 신플라톤주의 계보 안에 놓으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자기-향유는 파악이 자신의 고유한 여건으로 가득 채워질 때,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 충만해지고 점점 더 풍부한 사적인 삶에 도달하는 방식을 특징짓는다. 이는 영국 경험론이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킨 (특히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와 함께) 성경적인 - 또한 신플라톤주의적인 - 관념이다. 자신이 기인한 요소들을 관조하고 강렬하게 수축시키는 그만큼 자기 자신으로 더욱더 충만해지면서, 식물은 신의 영광을 노래하고, 또한 이러한 파악 안에서 그 자신의 고유한 생성에 대한 자기-향유를 느낀다.[44]
이러한 방식으로, 화이트헤드의 몸짓은 느낌들을 자연에 부가된 보충물이 아니라,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으로 만드는 데 있다. 미적인 것이 곧 모든 존재론의 장소(site)가 된다. 그것은 존재 양식들, 행함(doing)의 양식들, 영향을 받는 능력들, 한마디로 “느낌”의 양태들의 다원성으로서, 자연에 관한 주체 이론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이는 “실재”와 “지각”, “존재”와 “미적 가치” 사이의 대립을 되살려서 그것들을 통일시키려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화이트헤드를 따라} 자연을, 각각이 직접적으로 표현적인 경험 중추들의 다수성으로 즉각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토닉 마니에리슴
주체와 양식 사이에는 구별이 없다. 주체성의 형이상학적 원리에 가능한 가깝게 머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도달한, 이 문장은 이제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한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모든 주체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온 이 존재 양식들의 기원은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것들은 항상 국지화되어 있을 뿐인가? 정확한 장소, 즉 고유한 주체 안에만 실존하는가? 아니면, 그것들이 편재해 있어, 공통된 특색이나 성질을 지닌 주체들의 다수성 안에서 발견되는가? 그것들은 한 주체에서 다른 주체로 추이하는 유산처럼 전승되는가, 아니면 언뜻 보기에 그것들을 파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체들과 함께 사라지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를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가장 어렵고 논쟁적인 측면 중 하나에 직면하게 한다. 화이트헤드가 하나의 학파가 아니라 전혀 다른 소속들에 동조하면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 주된 축들은 경험론(주로 로크의 경험론), 제임스와 듀이의 프래그머티즘, 그리고 베르그손의 철학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또한, 상당히 다른 본성의 유산을 스스럼없이 주장한다. “이 강의들(『과정과 실재』)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유의 흐름은 플라톤적이다.”[45] 의심할 여지 없이, 화이트헤드의 눈에는 플라톤에 대한 언급이 부차적이거나 협소한 것이 아니라, 그의 체계의 바로 그 원리들과 관련된다. 그는 이를 수많은 언급을 통해 확인시켜주어, 그 중요성에 대해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만일 플라톤의 일반적인 견해를 {플라톤과 현대 사이에 개재하는} 2천 년 동안 사회 조직, 미적 성취, 과학, 종교 등에서 이뤄진 인간 경험의 최소한의 변화를 반영해 옮기려 한다면, 우리는 유기체 철학의 구축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46]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형이상학적 주체에 관한 새로운 이론의 관점 안에 위치시키기로 선택했다는 것은 그의 사유의 플라톤적 측면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그것의 중요성과 현재와의 관련성을 식별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그것의 적용 범위를 줄이거나 낮추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화이트헤드의 의도나 텍스트를 충실히 독해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이 느낌의 형이상학에 근본적이기 때문에,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에 관한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을 최대한 면밀하게 따를 것이다. 화이트헤드 사유의 이 측면을 받아들이는 건 확실히 간단치가 않다. 화이트헤드는 어떻게 자신의 기획을 초월적 또는 급진적 경험론의 표지 아래에 있는 경험론의 계보 속에 위치시키면서도, 아무런 도발적인 기색 없이 플라톤주의가 자신의 주요한 준거점 중 하나라고 선언하고 당연하게 수용할 수 있었을까? 이건 그러한 입장들이 서로에게 가했던 대립과 명시적이고 상호적인 거부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무지였을까? 플라톤주의와의 관계는 단지 특수한 분야(예를 들어, 추상적 형식들, 논리학, 또는 수학)에 연결된 제한적인 것이었으며, 그래서 그의 철학의 다른 분야들, 즉 경험론의 유산이 더 적합한 분야들에 추가될 수 있었던 것인가? 이 책에서 설정하는 관점에서 이러한 물음들을 제기한다면, 이것들은 매우 특수한 방향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주체의 형이상학에서 출발하여 자연의 근대적 이분화를 넘어서려 한다. 그런데 만약 플라톤주의에 너무나 근본적인 역할을 부여한다면, 새로운 이원론의 도입을 통해 이분화로 다시 회귀할 위험이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화이트헤드가 주장하는 플라톤주의는 정확히 무엇인가? 화이트헤드의 저작에서는 베르그손의 저작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라톤 사상에 대한 어떠한 묘사, 서술, 혹은 종합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관련한 언급들은 흩어져 있으며, 그것들에 합당한 중요성을 제대로 부여하려면, 이렇게 명시된 언급들을 가져와서 이 이상한 플라톤주의를 끌어내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러면 이것이 극도로 정화된, 가장 단순한 형태로 환원된, “학자들이 일정한 주견도 없이 플라톤의 저술에서 끄집어낸 사상의 체계적 도식”[47]이 제거된 플라톤주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플라톤주의는 가장 진정하고 직접적인 플라톤주의를 지향하며, 플라톤주의를 예속하는 후대에 가해진 해석들에 앞서 제시된다. 이는 일차적 직관으로 환원된 플라톤주의이다. 화이트헤드는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자기 사유의 토대를 찾는데, 이 저작은 그가 구상하는 유산(遺産)의 계보를 발전시킬 초석이 된다. 그는 “과학적 세부 사항에 대한 진술로 놓고 본다면, (...) [그것은] 실로 어리석은 시도였다”[48]라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심오한 추진력(impetus)이 관통하고 있으며, 현재의 맥락에 주어질 수 있는 우주론적 관념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여전한 사실이다.
화이트헤드가 정화된 플라톤주의를 정식화하는 작업을 한다는 게 놀라운 일로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정식화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친숙한 형태의 플라톤주의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본질적으로 플라톤주의에서 취하는 것은, “첫 번째의 것 {똑같은 상태로 있는 형상}으로 변하지 않고, 창조되지 않았으며, 죽지 않는 것, 그리고 외부로부터 다른 어떤 것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도 다른 어떤 것에 들어가지 않는 것, 시각이나 다른 어떤 감각으로도 지각될 수 없는 것들의 부류”[49]와 두 번째로 “첫 번째 부류의 구성원들{형상}과 같은 이름을 가지며 그들과 닮아있지만, 지각될 수 있고 창조되었으며 특정 장소에서 실존하게 되었다가 이후에 다시 그곳에서 없어지며 부단히 운동하는 것의 부류”[50] 사이의 정형적인 차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플라톤적 이원론을 불필요한 장식이나 복잡한 정교화 없이 그것의 초기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다. 이러한 {둘 간의} 차이에 아무것도 더해져서는 안 된다. 분명한 건, 화이트헤드의 플라톤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두 가지 존재 영역, 즉 “변화하지 않고, 창조되지 않았으며, 죽지 않는” 것들과 생성하는 것들 사이의 구별이라는 점이다. 관건은 이들 간의 차이를 최대로 심화시키는 것이다. 두 존재 영역 사이에 간극을 두어, 그들 사이에 그 어떤 유사성이나 귀속하는 관계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이제 문제가 되는 사안은 『티마이오스』에서 전개하는 아이디어, 곧 첫 번째 질서의 존재들은 “그 어떤 감각으로도” 접근할 수 없으며, 모든 감각 경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화이트헤드는 그 존재들을 가리켜, “영원한 객체(eternal objects)”라고 부른다. 현대에 플라톤주의가 갖는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영원한 객체들”의 문제를 탐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바로 영원한 객체가 플라톤주의의 계보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앞에서} 내가 ‘플라톤적 형상’이라고 불렀던 것을 (...) {이제} ‘영원한 객체’라는 말로 부르겠다. 그에 대한 개념적 인지에 있어 시간적 세계의 어떠한 한정된 현실적 존재들[주체들]과도 필연적 관련을 포함하지 않는 그런 존재는 모두 ‘영원한 객체’라고 불린다.”[51]
화이트헤드가 “영원한 객체” 개념을 정교화하는 작업은 두 단계로 이뤄진다. 첫째, 그는 “영원한 객체들”와 “현실적 존재들” 사이에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대립을 설정한다. 현실적 존재에 관한 생각은, 앞서 데카르트의 예에서 비롯하는 느낌의 문제에 관해 대의할 때, 이미 다루었다. 그 둘 간의 대립은 화이트헤드의 사변적 작업에서 절대적으로 중심이 되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불필요한 신조어와 기술적 구별의 증식을 피하고자, 별도의 개념 정의를 제공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화이트헤드가 이 용어에 부여하는 일반적인 의미, 즉 실존하는 주체라는 의미를 고수할 것이다. 그에 따라, 지금까지 전개된 전문 용어들을 사용하여 효과적인 느낌, 가짐, 사로잡음, 생성 행위가 아닌 모든 것을 영원한 객체라고 부를 수 있다. 화이트헤드가 대립을 통해 “영원한 객체”를 정의하는 절차는 적절해 보이지만, 어떤 중대한 어려움을 드러낸다. 실제로, 이 대비는 급진적이어서 어떠한 절충도 허용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객체”와 주체 둘 중 하나다.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명제는 단순한 구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대담한 결정이다. 이 결정은 통상적인 주체들에 귀속하는 모든 관계로부터 영원한 객체들을 말 그대로 배제한다. 영원한 객체들은 “한정된 현실적 존재들”, 즉 통상의 효과적인 실재와의 “필연적인 관련” 없이 마치 평행 세계를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선 논의들에서는 “주체들의 경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걸 형이상학적 원리로 삼을 정도로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영원한 객체들”을 주체들과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한다면, 그것들의 지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약 이 지점에서 영원한 객체들을 모든 존재의 조건이자 기초를 형성하는 것과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환원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러한 물음은 단지 화이트헤드의 방법론적 입장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다. 만약 그런 차원의 문제 제기라면, 화이트헤드의 도식 중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와 같은 명제가 부정된다는 점을 근거로 영원한 객체와 주체의 분리를 가정하는 그의 방법이 전혀 적절하지 않았다고 답함으로써 문제 지점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이보다 훨씬 근본적이다. 그야말로 “영원한 객체”의 지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이트헤드는, 실존의 이원성이 제기하는 난점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명제를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존재들의 근본적 유형은 현실적 존재들과 영원한 객체들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유형의 존재들은 오직 이 두 가지 근본적 유형에 속하는 모든 존재가 현행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서로 어울려 공동체를 이루고 있느냐를 표현할 뿐이다.”[52]
나는 앞에서 주체성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가능한 한 면밀하게, 그리고 있는 그대로 따르고자 했으며, 주체 너머에 실존하는 어떤 것도 가정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와 완전히 모순되는 생각에 직면하게 되었다. 주체만큼이나 근본적인 다른 유형의 존재들이 있다. 그것들은 주체로부터 생겨나지 않으며 결코 주체의 파생적인 표현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주체와 동등한 실존적 지위를 갖는다. 이러한 난점은 비본질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다. 이어서 보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것은 “영원한 객체”의 재건(창설, instauration)에 일조하는 중요한 성분(成分)이다.[53]
화이트헤드가 영원한 객체를 정교화하는 두 번째 단계는, “영원한 객체들”과 주체들 사이에 대립이 설정되었으므로, 이제 이를 사용하여 전자의 몇 가지 예를 분류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해설에 제기되는 난점이 있는데, 그 어려움은 “영원한 객체”를 그것의 형태 변화나 경험적 여건의 일반화에서 탐색할 수 없으며, 영원한 객체 그 자체를 그것의 순수한 형태로 다룰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오직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만 영원한 객체들을 가리켜 보일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에 관한 예로 돌아가 보자. 거기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지각 수준에서 바꿀 수 없는 사건으로 생각될 수 있는지를 살펴봤다. 그러나 스케일을 바꿈으로써, 즉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 요소들 안으로 들어가 보거나, 그 대안으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 거하는 역사의 폭 – 어디에서 그것이 창조되었고, 수세기에 걸쳐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포함하는 -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때, 그 바늘을 독특한 생성에 사로잡힌(caught in) 단 하나의 사건으로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각각의 사건은 단일하고, 각각의 찰나는 특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건들 가운데서 무언가를 인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강변길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위를 쳐다보며 ‘어어, 저기 그 바늘이 있네’라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러분이 바늘을 인식한다고 해봅시다.”[54] 이때 인식되는 건, 바늘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도 그것의 특이성(단독성, singularity)도 아니고, 바늘을 구성하는 존재들이다. 즉, 바늘의 특수한 빛깔, 기하학적 형태, 특수한 질감, 그리고 “또다시 여기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경험 내에 존속하며 바늘을 그 효과적인 실존에서 각각이 동등하게 단 하나의 경험인 수천 가지의 다른 경험들과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러한 모든 요소가 인식된다. 바늘에 대한 이러한 경험은 그것의 실존에서 그 자체로 반복되는 요인들, 한 실존에서 다른 실존으로 전치(轉置, transpose)되면서 별개의 찰나들에 위치하는 요인들을 시사한다. 우리는 빛깔 그 자체나 주어진 기하학적 형태, 순수한 소리를 전혀 경험하지 않으며, 오직 특수한 사건들 속으로 그것들이 “진입(ingression)”하는 것만 경험한다. 즉, 이 찰나 이 장소에서의 이 변주 말이다. 따라서 빛깔에 대하여 그것은 영원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영혼처럼 시간을 따라다니며 맴돈다. 그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이 나타날 때면, 그것은 언제나 같은 빛깔이다. 그것은 살아남지도 살아가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것을 필요로 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55] 그에 따라 화이트헤드의 작업 전반에 걸쳐 발견될 수 있는 영원한 객체들의 범주들과 유형들, 즉 “녹색”과 “파란색” 같은 “sensa”뿐만 아니라 미묘하게 차이나는 색상들, 성질의 보편자들, 감정의 성질들로서 기능하는 “sensa”, 형태와 강도의 성질들, 수학적 형식들과 같은 객체적 공간의 객체들, “패턴들”과 “관계들”[56]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떻게 이 “영원한 객체들”을 주체 이론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들에게 실재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자신의 사유는 플라톤적으로 움직인다고 말할 때의 화이트헤드를 따르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그것들은 주체성의 형이상학적 원리에서 어떤 자리를 얻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까지 직면해왔던 질문은 주체가 선행하는 세계를 파악하는 양식, 즉 어떻게 그것을 사로잡고 통합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파악을 통해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주체적 실존의 핵심에 이 양식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양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기원과 원천은 무엇인가? 주체가 선행하는 세계를 계승하는 양식이 이 선행하는 세계로부터 유래한다고 답하고 싶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주체들 그 자체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 전반에서 논의했던 바대로, 우주는 각 “찰나”마다 다수의 전망 지점들(multiplicity of points of perspective) - 이 전망 지점들이 곧 새로운 주체성들이다 - 로 수축하며, 이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즉, 각각의 새로운 주체성은 새로운 주체성을 구축할 재료를 형성하기 위해 다른 것들의 무한한 다수성에 자신을 더한다. 그러나 만약 이 새로운 주체성이 파생되는 양식이 전적으로 그것이 계승하는 과거에서 비롯한다면, 새로움(novelty)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따라서 영원한 객체들의 도입은 우리에게 두 가지 명확한 대안을 제시한다. 하나는 주체가 과거를 계승하는 양식이 과거, 즉 다른 주체들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고 그러한 양식으로 우주가 무한히 반복되어 주어진 실존 형식들에서 더해지거나 빠지는 것 없이 주체에서 주체로 전달(transfer)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하나의 대안, 곧 이 양식이 과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계승도 넘어서는 새로움의 조건이며, 따라서 주체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모든 예상과 달리, 영원한 객체들이 이러한 새로움의 조건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나의 주장은 “영원한 객체들”을 사건들 안에 담긴 새로움을 규정하는 순수한 잠재태들(pure virtualities)이 되도록 할 때 들뢰즈가 논의하는 바와 완전히 일치한다. 아래는 들뢰즈가 『주름』에서 -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개념의 측면에서 - 주체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파악들과 잠재태들로 종합하고, 이를 ‘오늘 저녁 콘서트가 있다’라는 예를 통해 설명하는 대목을 길게 인용한 것이다.
{오늘 저녁 콘서트가 있다.} 그것은 사건이다. 음(音, sound)의 진동들이 퍼져나가고, 주기적인 운동들이 배수음과 약수음을 함께 지닌 채 그 공간을 관통한다. 그 음들은 내적 성질들, 높이, 강도, 음색을 가지고 있다. 악기나 목소리의 음들의 원천들은 그 음들을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각각은 자신의 음들을 지각하고, 또한 그렇게 자신의 음들을 지각하면서 다른 음들도 지각한다. 이것이 서로를 표현하는 능동적인 파악들(active prehensions), 내지는 서로를 파악하는 파악들이다. (…) 음의 기원들은 자신의 지각들로 가득 채워지고 한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이행함에 따라, 그 자신들의 즐거움(joy)으로, 강렬한 만족(satisfaction)으로 차오르는 모나드들 또는 파악들이다. 그리고 음계의 음들은 영원한 객체, 즉 음의 기원들에서 현행화되는 순수한 잠재태들이면서, 또한 진동들이나 흐름들 안에서 달성되는 순수한 가능태들(Possibilities)이다.[57]
따라서 영원한 객체는 새로움의 근본적인 조건이 된다. “이것들의 영원성(eternity)은 창조성(creativity)과 대립되지 않는다.”[58] 바로 이것이 우주론적 마니에리슴(cosmological mannerism)의 온전한 의미이다. 양식들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파생되지 않지만, 실존의 국지적 조건들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주체는 자기 것으로 삼을 양식들을 자연, 즉 자기 경험에 투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파악하고 사로잡으며 통합하는 국지적 양식들이 경험하는 주체를 위한 개체화(individuation)의 조건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양식들은 새로움에 내재하며, 새로운 주체의 생산을 위해 요구된다.
하지만 영원한 객체들이 주체들로부터 파생되지 않는다면, 논증을 정반대로 뒤집음으로써 주체들의 특수성이 영원한 객체들 안에 위치하게 되어, 그것들의 존재론적 중요성이 줄어들 위험이 있지 않을까? 형이상학의 더 고전적인 용어로 말하면, 만약 가능적인 것(the potential) [영원한 객체]이 현행적인 것(the actual) [주체]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면, 화이트헤드가 제시한 바를 따라 현행적인 것을 가능적인 것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설명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지 않을까? 화이트헤드가 영원하고 불변하며 기원이 없다고 말하는 가능적인 것은 현행적인 것을 파생시킬, 개체화의 형식이자 원리가 될 위험이 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화이트헤드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그가 보기에 플라톤주의로부터 파생된 접근 방식인 참여 이론(the theory of participation)을 비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접근 방식에서 그리스 철학을 관통하는 미혹(迷惑, temptation), 즉 수학에 정당하게 기대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역할을 부여하려는 하나의 미혹을 발견한다. “플라톤은 그 초기 사상에서 변화하지 않는 완벽함으로 이해될 수 있는 수학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었고, 그래서 영원히 완벽하며 영원히 직조된 이데아의 초월-세계(super-world)를 상정하였다. 그는 결코 이 관념을 그의 사상으로부터 일관성 있게 몰아내지는 않았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때때로 그것을 거부하기도 했다.”[59]
플라톤적인 참여 모델이 그 자체로 잘못된 건 아니며, 특정한 실재들을 설명하는 타당한 방식 중 하나로 남아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 일반화는 부적절하다. 이 비판은 그의 저술들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를테면, 참여 모델과 같이 특수한 경험 분야에 연관된 방법,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연역법은 그 적절성을 일반화시킬 수 없으며, 다른 분야들에 그대로 전치될 수 없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수학에 적합한 방법들과 철학에 적합한 방법들 사이의 이러한 혼동 안에, 참여 모델을 도입하는 데에 동반되는 과장과 그것에 기반하여 존재론을 구축할 때 뒤따르는 위험을 위치시킨다. “수학의 주요 방법은 연역이다. 철학의 주요 방법은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일반화다. 수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연역은 일반성의 범위를 시험하는, 본질적으로 보조적인 검증 방식이라는 그의 진정한 위치를 점하는 대신, 철학의 표준 방법으로 철학에 억지로 떠맡겨졌다.”[60]
이것이 바로 화이트헤드가 참여 모델에 맞서 진입(ingression)이라는 개념을 내세우는 이유이다. “‘진입’이라는 술어는 어떤 영원한 객체의 가능태가 특수한 현실적 존재의 한정성에 기여하면서 그 현실적 존재 안에서 실현되는 특수한 양태를 지칭한다.”[61] 진입은 “영원한 객체”가 새로운 주체 내부에서 현행화되는 과정이다. 이미 실현가능성(possibility)의 장을 결정하는 다른 주체들로 구성된 현존하는 세계, 그러므로 다른 영원한 객체 대신 이 영원한 객체가 현행화되는 것을 넘어서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원한 객체들은 자신들이 현행화되는 주체들에 대해 중성적(neutral)이다. “영원한 객체는 항상 현실적 존재자들을 위한 가능태다. 그러나 그 본질상 그것은 개념적으로 느껴지는 것으로서, 시간적 세계의 임의의 특수한 현실적 존재 안에 물리적으로 진입한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중성적이다. ‘가능태’는 ‘소여성(givenness)’과 상관적이다. ‘소여성’의 의미는, 지금 ‘주어져’ 있는 것이 ‘주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주어지지’ 않은 것이 ‘주어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62]
참여와 대조할 때, 진입은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진입은 “영원한 객체들”이 그 내재적 과정에 있는 세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원한 객체들은 세계를 설명하지도, 그 이유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 반대로, 세계와 그 세계에서 실존하는 것들은 자신들이 처한 세계의 상태와 관련하여 무엇이 연관되고 무엇이 가능한지를 간청(solicit)한다. 마치 우주가 실재하는 것들이 새로운 방법으로 가능한 무언가를 계승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우주 자신의 창조적 진전 속에서 새로운 제약들, 즉 실재하는 것들 자체를 끊임없이 창조하는 것과 같다. 만약 영원한 객체들이 형식적 실존을 갖지 않았다면, 그리고 만약 그것들의 국지적 체현들(incarnations)이 연속해서 바뀌고 있는 세계에 의해 간청되지 않는다면, 주체들은 단지 기계적인 반복들에 불과했을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전반을 관통하는 경험론의 본질적인 요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원한 객체들은 (…) 그것들이 경험 속으로 진입하는 것에 관하여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을 보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바로 경험의 영역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63]
영원한 객체들, 즉 이러한 느낌의 양식들은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하나의 느낌의 양식이 어떻게 한 행위에서 다른 행위로 전달되는가? 만약 모든 행위가 다르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우며 서로 간에 비교될 수가 없다면, 장기간 또는 단기간에 걸친 존재의 존속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만약 우주가 두 번 다시 같을 수 없고, 창조성과 새로움의 생산이 근본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자연 속에서 지속과 존속이라는 서로 다른 질서를 경험할 수 있는가? 요컨대, 영원한 객체가, 또는 더 정확하게는 영원한 객체들의 복합체가 어떻게 존재가 실존하는 하나의 찰나에서 다른 찰나로 전달되는가?
각주
*저자가 직접 인용하는 구절들 중 한글 번역본이 있는 경우엔 가능한 한글 번역본을 따라서 번역하려 했으며, 그중 일부 용어나 문구를 다듬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아래 각주에서 *으로 표시한 내용은 드베즈가 인용한 자료의 또 다른 판본의 서지사항 및 페이지 또는 한글 번역본의 서지사항 및 페이지를 적은 역주다.
2장
[29] 원문에는 subiecutum으로 표기되어 있다.
[30] Martin Heidegger, The End of Philosoph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27.
*『니체 2』(박찬국, 2012, 도서출판 길) 중 제8부 「존재의 역사로서의 형이상학」의 “휘포케이메논이 기체(subiectum)로 변화함”, 399.
[31]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51.
*『과정과 실재』, 317.
[32] 경험의 연쇄들과 경험의 전이에 대한 논의는 윌리엄 제임스의 『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정유경 옮김, 2018, 갈무리)(원제: Essays in Radical Empiricism, London: Longmans, 1912)을 참고하라. 특히 2장 「순수경험의 세계」(A World of Pure Experience)를 살펴보라. 그리고 경험의 연쇄들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과학기술학 편람 1』(김명진 옮김, 2019, 아카넷)(원제: The Handbook of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ed. Edward Hackett et al., 83–112, 3rd ed., Cambridge, MA: MIT Press, 2013)에 수록된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교과서 사례의 재검토: 존재양식으로서의 지식」(A Textbook Case Revisited: Knowledge as Mode of Existence)을 보라.
[33] Alfred North Whitehead, Modes of Though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8), 32.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23.
**『사고의 양태』, 61.
[34] Whitehead, Modes of Thought, 33.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23.
**『사고의 양태』, 61.
[35] 현대 생물학의 역사에서 개체적 관점의 문제에 관한 설명은 스콧 길버트(Scott Gilbert)의 논문 “A Symbiotic View of Life — We Have Never Been Individuals”(2012, Quartely Review of Biology 87, no. 4, 325–41.)을 보라. 길버트는 명확히 다음과 같이 썼다. “동물들뿐만 아니라 식물들에서도 개체들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생물학의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하고 지구상의 서로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들을 모색한다. 우리는 모두 이끼들(lichens)이다.”(위 논문의 336쪽)
[36] Raymond Ruyer, “Ce qui est vivant et ce qui est mort dans le matérialisme,” Revue philosophique 116, nos. 7–8 (1933): 28–49.
[37] Ruyer, “Ce qui est vivant,” 40 (해당 인용문은 번역자가 번역한 것이다.)
[38] Whitehead, Modes of Thought, 33.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24.
**『사고의 양태』, 61.
[39] Whitehead, Modes of Thought, 33.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24
*『사고의 양태』, 61-62.
[40] 나는 “공고화(consolidation)”라는 용어를 Eugène Dupréel의 “Théorie de la consolidation: Esquisse d’une théorie de la vie d’inspiration sociologique”(1934, Revue de l’Institut de Sociologie 3, 1–58)에서 가져왔다.
[41] Whitehead, Modes of Thought, 208.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152.
152.
*『사고의 양태』, 293.
[42] This is very close to what Étienne Souriau calls “solicitudinary.” For more on this, see Étienne Souriau, Avoir une âme: Essai sur les existences virtuelles (Paris: Les Belles Lettres, 1938); and Étienne Souriau, The Different Modes of Existences (Minneapolis, MN: Univocal Publishing, [1943] 2015), which has a magnificent introduction written by Bruno Latour and Isabelle Stengers.
[43]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222.
*『과정과 실재』, 442.
[44] Deleuze, Fold, 78; 원문과 달리, 구두점을 약간 변경하였다.
*『주름』, 145.
[45]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39.
*『과정과 실재』, 118.
[46]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39.
*『과정과 실재』, 118.
[47]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39.
*『과정과 실재』, 118.
[48]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93.
*『과정과 실재』, 214.
[49] Plato, Timaeus and Critia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44–45.
*『티마이오스』, 박종현·김영균 옮김, 2000, 서광사, 145.
**여기서 인용하는 대목의 전문을 박종현·김영균의 번역에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들이 이러하므로, 이 중의 한 가지가, 즉 ‘똑같은 상태로 있는 형상(形相)’이 있다는 데 동의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것이며, 자신 속에 다른 것을 다른 곳에서 받아들이지도 않고 또한 자신이 그 어디고 다른 것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는 것이며,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다른 식으로도 지각되지 않는 것이지, 이것은 ‘지성에 의한 이해(앎)’ (사유: noēsis)가 그 대상으로 갖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형상과 같은 이름을 갖고 그것과 닮은 둘째 것은 감각에 의해 지각될 수 있고 생성되는 것이며, 언제나 운동하는 것이요, 그리고 어떤 장소(topos)에서 생성되었다가 다시 거기에서 소멸하는 것이며, 감각 지각(aisthēsis)을 동반하는 판단(의견: doxa)에 의해 포착되는 것입니다.”
[50] Plato, Timaeus and Critias, 44–45.
*『티마이오스』, 145.
[51]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y, 44.
*『과정과 실재』, 128.
[52]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25.
*『과정과 실재』, 90.
[53] 영역자 주: 여기서 영어 단어 “instauration”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 단어는 영어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는 아니지만,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미완성된 주요 저작인 Instauratio Magna, 영어로는 The Great Instauration으로 번역된 책의 제목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 용어에는 설립(establishment)과 갱신(renewal)을 동시에 환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The Oxford English Dictionary)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무언가를 복원하거나 갱신하는 행위 The action of restoring or renewing something.” 또한, 이 용어는 수리오(Souriau)의 The Different Modes of Existence (2015)에서 매우 전문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관련하여 브뤼노 라투르와 이사벨 스탕게르스가 쓴 그 책의 서문을 참고하라.
[54] Alfred North Whitehead, The Concept of Natur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20] 1964), 169.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08.
**『자연의 개념』, 244-245.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된 대목을 좀 더 자세히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강변길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위를 쳐다보며 ‘어어, 저기 그 바늘이 있네’라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러분이 바늘을 인식한다고 해봅시다. 사건을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사건이 지나갔다면, 그 사건은 지나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유사한 특징을 가진 다른 사건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자연의 삶의 현실적 덩어리는 그것의 유일한(unique) 발생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특징은 인식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채링크로스 근처의 강변길로 가면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인식되는 특징을 가진 사건을 관찰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55] Alfred North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New York: Pelican Mentor, [1925] 1948), 88.
*『과학과 근대세계』, 157.
[56] 화이트헤드의 영원한 객체의 분류에 대해 더 자세한 분석을 보고 싶다면, 월리엄 크리스천(William Christian)의 An Interpretation of Whitehead’s Metaphysics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59)을 참고하라.
[57] Deleuze, Fold, 80.
*『주름』, 148.
[58] Deleuze, Fold, 79.
*『주름』, 147.
[59] Alfred North 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3), 354.
*『관념의 모험』, 오영환 옮김, 1996, 한길사, 419-420.
[60]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0.
*『과정과 실재』, 64.
[61]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23.
*『과정과 실재』, 87.
[62]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44 (강조는 원문을 따랐다.)
*『과정과 실재』, 128.
[63] Jean Wahl, Vers le concret: Études d’histoire de la philosophie contemporaine (Paris: J. Vrin, 1932), 135 (인용문은 영역을 기준으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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