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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

디디에 드베즈, <사건으로서의 자연> 2장(3/3)

by 인-무브 2025. 7. 20.

사건으로서의 자연: 가능한 것들의 유혹

 

저자: 디디에 드베즈(Didier Debaise)

영어 번역: 마이클 헤일우드(Michael Halewood)

한글 번역: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2장 보편적 마니에리슴 A Universal Mannerism (후반부)

 

느낌들의 전파

 

여기에 이르기까지 느낌의 형이상학을 재건(창설, instauration)하는 과정은 느낌 행위의 개체적 차원, 즉 이 찰나에 이뤄지는 이 사로잡음의 특수한 양식을 강화하는 걸 필요로 했다. 지금까지 제시된 예시들, 가령 미생물, 식물, 경계하는 동물, 심지어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자조차도 단순한 행위들로 환원될 수 없다. 가장 자발적인 신체 움직임에서든 가장 단명하는 사유에서든 동물이 환경에 대해 느끼는 아주 미세한 감각은 결코 단순하고 독특한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따라서 화이트헤드가 쓴 “꽃은 인간 존재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빛을 향해 몸을 돌린다”라는 문구는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된 느낌 행위들의 얽히고설킨 다수성(intertwined multiplicity) - 진정한 민주주의(a genuine democracy) - 을 함의하는 걸로 이해되어야 한다. 꽃이 빛을 향해 몸을 돌린다는 게, 외부에서 볼 때는 다소 단순하지만 느린 작용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상상력이나 기술적 수단을 활용해 관점을 바꿔보자. 그러면 이렇게 겉보기에는 단순한 행위 안으로 들어가서, 꽃을 구성하는 각 부분에서 벌어지는 작은 행동들의 다수성, 이 움직임의 특정한 시간을 형성하는 지속에 걸쳐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의 전달들(transfer), 전파들(transmissions)을 망라함을 볼 수 있다. 수 세기 동안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 존속하거나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사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들 또한 외부에서 볼 때는 단순하고 균일하게 보이는 느낌 행위들의 다수성이자 얽힘이 아닐까?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를 따라서, “각 개체는 그 안에 각자의 삶을 누리는 방대한 수의 하위 개체들로 혼합되어(compounded) 있다는 의미에서 다양체일 수 있다. 그들의 희망들, 두려움들, 호기심들(intrigues)은 우리 안에서 태어나고 죽어가며, 우리가 단 한 번의 생애를 사는 동안에도 그들의 수많은 세대가 오고 간다.”[64]라고 말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나는 이러한 집합적 실존들, 즉 느낌들의 이러한 배열들(arrangements; agencements) 또는 절합들(articulations)을 “사회들(societies)”라고 부를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인간의 삶을 묘사하는 대목에는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담겨 있다.

 

인간의 삶은 두드러질 정도로 (...) 서로를 계승하는 현실적 계기들의 역사적 경로(historic route)다. 어떤 이가 그리스어를 처음 습득하기 시작한 때부터 그 말에 대한 적합한 지식을 상실할 때까지, 모든 계기들을 포함하는 그러한 일련의 계기들은 그 그리스어 지식과 관련하여 하나의 사회를 구성한다. 그러한 지식은 역사적 경로를 따라 계기에서 계기로 계승되는 공통된 특성이다.[65]

 

이 예시에서 화이트헤드는 “역사적 경로(historic route)”라는 근본적인 생각을 전개한다. 인간의 삶은 느낌 행위들 각각이 이어지면서, 전파와 재연(reprise)의 끊어지지 않는 긴 사슬을 형성하는 하나의 역사적 경로다. 각각의 행위는 앞서는 행위들을 받아들이고 뒤따르는 행위들에 전파한다. 화이트헤드는 그리스어와 같은 언어 지식이라는 인간 삶의 다소 평범한 한 측면을 통해, 이러한 역사적 경로가 결코 단 하나의 차원, 단 하나의 움직임으로 이뤄져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만약 정말로 인간의 삶이 순전히 생물학적이거나 신체적인 행위의 단순한 연속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 언어를 배우는 일 – 그 첫 단계부터, 발달과 심화, 그것의 고유한 존재 양식들, 그리고 마침내 그 언어가 잊혀지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 과 같은 다른 질서의 차원들을 부여하지 않은 채, 삶을 그려보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또한 이 배움은 그에 동반되는 기대와 희망, 실패와 함께 진정한 역사, 즉 수많은 면에서 인간 실존(the existence of man)의 다른 차원들과는 다르면서도 그와 나란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역사적 경로를 구성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언어 지식에 그러한 역사적 경로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면, 어째서 인간 실존의 다른 차원들에 대해서는 그런 경로의 존재를 부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스어 지식의 전기(傳記, biography)와 유사하게, 각 기관(器官, organ)의 삶 또한 저마다의 고유한 전기를 가질 수 있는 역사적 경로가 아닐까? 이처럼 각 기관의 삶은 훨씬 더 복잡해진다. 분명 그것은 느낌 행위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행위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며, 언뜻 보기엔 서로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다수의 궤적을 형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언제나 하나의 삶(a life), 동일한 인격(same person)에 관한 문제다. 이러한 역사적 경로들은 무한히 펼쳐질 수 있으며, 그 경로들이 관여하는 관점들을 증식시키고, 그 경로들을 구성하는 시간들이 다원적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것들을 공통된 형식에 종속시키려는 건 헛된 시도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게 하나의 연속적인 실재에 관한 문제라는 인상을 피할 수가 없다. 자신의 범주들을 실재에 투사하고 자신이 이미 거기에 넣어둔 것만 발견하는 표상(representation)의 환영에서, 그와 같은 생각이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실존의 다원성을 완전히 지울 순 없으나 어느 정도 가리는 근본적인 차원, 즉 동일성(identity)에 대한 단언인가? 느낌의 “역사적 경로”와 실존의 모든 수준에서 발견되는 사회 조직(social organizations)의 문제는 이 두 가지 선택지{표상과 동일성}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동일한 삶의 문제라는 것을 어떤 단순한 표상 모델(representation model)로 환원할 필요는 없다. 동일한 것(the same)과 통일성(unity)에 대한 이러한 경험은 진정으로 실재하는 어떤 것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에서는 그 삶을 구성하는 느낌 행위들을 파생시키는 어떤 실체론(substantialism)의 형식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 느낌 행위들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일성은 실재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한다. “질서의 더 중요한 특성은 한 사람을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지속하는 인격(person)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복합적인 특성일 것이다. 또한 이 사례에도 그 사회의 성원들은 그들의 발생적 관계들(genetic relations)을 따라 하나의 계열적 질서(a serial order)로 배열된다.”[66]

 

이 인격의 동일성이 역사적 경로다. 그 삶을 구성하는 행위들(acts)의 역사는 그것이 전개되는 맥락을 결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역사는 그것 안에서 가장 근본적인 실체(substance)를 형성한다. 이 역사는 하나의 행위가 다른 행위를 따르면서 그것을 계승하고 뒤따를 행위들에게 자신의 유산을 물려주는 방식의 역사다. 이런 방식으로 그것은 행위들의 “발생적 관계” 또는 개체화(individuation)를 확립한다. 물론 어떤 느낌 행위도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그 특정한 방식으로 계승되는 이유를 제공할 순 없다. 계승(inheritance)은 전적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그것이 발생했다는 사실, 즉 다른 행위가 아니라 바로 이 행위였다는 것은 그것이 관여하는 경로가 특정 방향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들이 생성을 방향 잡는다(canalize)[67]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계하는 동물은 포식자의 직접적 현존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 신호들이 가리키는 바에 따라 모호하고 불안한 현존을 느낀다. 분명히 그것의 현재 행동(action), 즉 현재의 주의(attention)는 이상한 소리와 냄새, 혹은 다른 동물들의 갑작스러운 움직임과 같은 과거 인상들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이 위험의 원천으로 보이는 것을 향해 움직이거나 멀어질 수 있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각각의 새로운 행위는 이 역사의 계승을 받아들이고 그에 순응할 것이다. 이는 어떤 방식이 되었든 기계적 반복이 되지는 않는다. 핵심은 이 설명이 이러한 이질적 행위들 사이의 연결을 확립하기 위해 기억, 정신 또는 습관의 실존을 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행위 자체, 그 가장 깊은 실재에서, 바로 그 자체의 구성에서 이 역사가 확립된다. 마치 각각의 행위가 자신이 출현하는 전체 역사를 재생하는(repaly) 기억과 같다. 이 예시에 관한 논의를 더 밀어붙여 보자. 동물이 위험을 감지하는 특정 순간에 나타내는 두려움은 감각들이나 지각들의 모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러한 실재들은 공감, 슬픔, 호기심과 같은 다른 정서적 양태들을 지닌 다른 살아있는 존재에 의해 매우 다르게 경험되었을 수 있다. 두려움은 어디에도 없지만, 그럼에도 각각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동물이 두려움을 가진다고(has) 말하는 것은 순전히 관습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각각의 행동 안에 있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동물이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행동들을 소유해왔던(has taken possession)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는 동물이 두려움에 의해 소유되었다(possessed)고 말해야 하며, 이 소유(possession)는 특정 행위들 안에 위치하므로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행동은 두려움의 양상(modality)에 의해 깃들어 있다. 그 양상은 과거가 통합되는 특수한 양식이다. 그것은 각 행위 안에 있다. 비록 이 특정한 역사, 즉 경계하는 동물의 이러한 역사적 경로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이와 같은 두려움이 실존하는 계기가 되지만, 그것의 양식은 무(無, nothing)로부터 생긴다. 두려움의 이러한 특성들 - 특정한 기원이 없다는 사실, 느낌 행위들의 다수성 속에서, 그리고 별개의 찰나들과 장소들에서 발견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의 양식을 드러낸다는 점 - 은 앞에서 언급한 이상한 형태의 플라톤주의를 상기시킨다. 화이트헤드는 항상 그의 예시들, 특히 영원한 객체들에 관한 예시들을 매우 신중하게 사용했는데, 그 예시들에 관해 사유해보는 한 가지 방법은 역사적 경로를 따라 행위에서 행위로 이어지는 이러한 두려움의 계승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한 행위에서 다른 행위로 전달되는 것은 행위의 내용뿐만 아니라, 특정한 정서적 색조(affective tonality, 영원한 객체)가 특정 상황에 진입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항상 변화하고, 강화되거나 반대로 흩어져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행위에서 행위로 전파되어 이러한 특정한 경로의 역사 - 이는 동물의 삶에 출현하는 관여(concern)다. - 를 형성한다. 정확히 말하면, 전달되는 것은 두려움 자체라기보다는 두려움의 출현(appearance)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동일성이 그것을 실존하게 하는 역사적 경로, 즉 받아들여지고 전달되는 행위들의 역사에서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사회는 고립되어 있지 않다. 경계하는 동물은 도처에서 나와 호소(號召)하는 간청들(solicitations)에 반응하며, 이 간청들은 그 존재의 각 부분에 침투한다. 식물은 빛을 파악함으로써 자기 환경의 변화에 대한 자신의 애착(attachment)을 보여준다. 심지어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조차도 동시에 발생하는 사건들에 의해 영향받으면서 연속해서 변경(modify)된다. 

 

환경(milieu)은 항상 “에든버러의 캐슬록(Castle Rock at Edinburgh)”과 같은 강렬한 활동의 무대이다. 캐슬록은 “그 자신의 역사적 경로에 있어 선행하는 계기들에 의해 내려진 결정(decision)에 근거하여 찰나에서 찰나로, 그리고 세기에서 세기로”[68] 실존하고, 계속되며, 변화하다, 마침내 소실(消失)된다. 이러한 예시들과 느낌의 논리는 환경이 결코 작용들이 펼쳐지(unfold)거나 사건들이 신체성(corporeality)을 획득하는 단순한 공간적 틀(framework)이 아님을 보여준다. 두 개체가 공간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이 같은 환경을 공유한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만나지 않는 서로 다른 실존 양태들, 경험 형태들, 그리고 수준들이 동일한 공간에 겹쳐(imbricate) 있을 정도로, 사회들은 얽혀있다. 개체가 자신의 환경(environment)에 대해 깊은 애착과 생명에 밀접한 흥미(vital interest)를 지닐 때, 이를 지칭하기 위해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의 표현을 따라 “연합된 환경(associated milieu)”[69]이라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하다.

 

모든 사회는 더 넓은 사회적 환경을 필요로 한다는 학설(doctrine)은, 사회가 그 환경에서 일어나는 특정 종류의 변화들과 관련해 어느 정도 “안정화될(stabilized)” 수 있다는 특징과 통한다. 환경에 관련된 부분들이 그러한 종류의 변화를 보일 때, 한 사회가 그 환경 가운데서도(through) 존속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어떤 유형들의 변화와 연관하여 “안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 사회가 그러한 종류의 이질성(heterogeneity)을 지닌 환경 가운데서도 존속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그와 같은 측면에서 “불안정(unstable)”[70]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들의 안정성과 불안정성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이러한 깊이 있는 실용적 질문(pragmatic question)이 제기되는 맥락을 통해, “물리적(physical)” 사회와 “살아있는(living)” 사회 간 차이들의 출현을 규명할 수 있다. 물리적인 것(the physical)과 생명적인 것(the vital)을 구별하는 문제는 이 책의 범위를 명백히 넘어선다. 이러한 구별은 상당 부분 자연의 이분화(bifurcation)가 남긴 유산으로, 존재들이 물리적 요소들을 더 많이 나타내는지 아니면 생명적 요소들을 더 많이 나타내는지에 따라 그들을 분류하려는 시도는 대개 새로운 형태의 환원주의(reductionism), 즉 물리주의자나 생기론자 둘 중 하나로 환원하는 걸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분화의 몸짓과 유사한 몸짓으로서, 이제 새로운 수준에서 전개된다. 대부분 구성된 존재들의 본질적 성질들을 추출하여 그것들을 순전히 현상적이고 이차적인 성질들에 대립시키는 이러한 몸짓은, 이제 새로운 수준의 유효성(effectiveness)을 얻는다. 방금 논의한 사회들과 그 환경들 사이의 관계들을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관점(perspective)의 전환을 제시할 수 있다. 주로 물리적 특성과 생명적 특성 둘 중 하나를 실증하는 그 존재들을 순전히 가설적으로 구분하고서 존재들 간의 연결을 확립하거나 한쪽을 다른 쪽으로 환원하려는 데서 시작하기보다는, 별개의 반응들이 환경 변화에 대해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를 헤아려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만약 물리적 실존 형태들과 생명적 실존 형태들을 유사한 변화들에 관계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나 양식들로 여긴다면, 우리는 그들 간의 차이에 대해 어떤 대안적 견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환경의 변화는 적어도 두 가지 가능한 반응, 바로 무관심(indifference)과 변형(transformation)을 야기할 수 있다. 첫 번째인 무관심부터 살펴보자. 무관심은 “물질적(material)” 또는 “물리적” 몸들을 특징짓는다. “이러한 물질적 몸들은 우리가 육안으로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정도로, 구조화된 사회들 중 가장 낮은 등급에 속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유형의 복합성을 가진 사회들, 이를테면 결정체들(crystals), 암석들, 행성들, 그리고 태양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몸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구조화된 사회들 가운데 가장 수명이 긴 것들로서, 그 개별적인 삶-역사들(life-histories)을 통해 추적될 수 있다.”[71]

 

분명히 모든 사회는 환경에 의해 계속해서 영향을 받는다. 교환들, 파괴들, 변태들(變態, metamorphoses)이 일어난다. 하지만 물리적 사회들은 무관심(indifference)으로 특징지어진다. 모든 게 그들에게 영향을 준다. 물리적 사회들은 “살아있는 사회들”만큼이나, 대부분 감지하기 어려운 개변들(改變, alterations)에 취약하지만, 그러한 변화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일정한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곧 그들의 생존 조건은 “둔감함(grossness)”에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 표현을 유머러스하게 사용하여, 변화에 대한 이러한 반응의 특수한 측면을 가리킨다. 다소 특이한 이 용어는 아마도 물리적 사회들의 준통계적(quasistatistical) 특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리적 사회들은 변화나 개변의 평균(average) 또는 산술 평균(mean)에 따라 기능하며, 대부분의 변형 요인들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세부 사항으로 축소한다. “사회”의 유일한(sole) 지향이자 목표는 자신의 역사적 경로, 즉 자신을 계승하는 움직임, 자신을 이루고 있는 느낌 행위들의 수용(the taking up)과 전파(the transmission)를 유지하는 것이다. 결정체들이나 암석들과 같은 사회들의 경우, 이러한 존속함(persisting)의 가능성은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배제할 수 있게 하는 평균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특정 찰나에 환경의 변화가 그 사회들의 경험 양태들만큼 커질 경우, 이러한 변화들은 더 이상 평균의 무지(ignorance)가 유지될 여지를 남기지 않으면서 그 사회들에 자신들을 강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사회들은 스스로 자신을 변형시킬 수 없기에, 자신들의 동일성을 규정했던 경로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회들의 안정성은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부분성(partiality)에 대한 관련성 때문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심지어 사활이 걸려 있을 만큼(vitally), 그들의 환경에 관심을 갖는다(interested). 바로 이 지점에서 “물리적 사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 있는 변화들의 세부 사항들이 온전히 중요해진다. 살아있는 사회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건 “그들 자신으로 향하는 것”, “선택하는 것”, “탐색하는 것”[72]을 의미한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특정 환경과 관련된 활동에 관한 문제다. 살아있는 사회들은 그들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일에 단순히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 영향을 받으려 적극적으로 다가간다(reach out). 이것이 바로 그들이 자연의 질서들 내에서 실재 중 가장 연약한 실재들을 형성하는 이유이다. 환경은 어떤 종류의 평균에 의해 압도되는 무관심한 연속(succession)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회를 내적 변형(그 형식의 변화들) 또는 외적 변형(그 환경 내 요소들의 변화들)으로 이끌 질문들의 집합이다. 만약 사회를 사회적 질서가 지구(持久)하는 것(버티고 견디는 것, endurance)으로 정의한다면, 살아있는 사회들은 이 사회적 질서를 변경할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capacity)은 그들의 연속되는 실존의 바로 그 조건이다. 그들의 과거는 자신을 강제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환경 변화에 따라 각 계기마다 다르게 현행화할 잠재태다. 살아있는 사회들은 그들의 틈새에 숨어 있는 것들에 의해 그들 자신이 변형되도록 하며, 그들은 다시 그것들을 자신들의 역사적 경로에 받아들인다.

 

“살아있는 사회”에 제기해야 할 질문은 바로 그들의 일관성(consistency)에 관한 것이다. 존재의 일관성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변천들(vicissitudes)을 가로질러 자신의 동일성들을 보존할 수 있는 능력”[73]으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각각의 몸은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74] 살아있는 사회들은 자신들을 규정하는 전통을 영속시킴으로써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수단들을 통해 그들이 기인하는 질서를 유지한다. 그들은 물리적 사회들과 존속함(persisting)이라는 공통된 지향을 공유하지만, 살아있는 사회들은 이를 달성하는 수단들을 통해 물리적 사회들과 차별화된다. 살아있는 사회들에게는 모든 것이 틈새(interstitial) 수준에서, 생명이 숨어 있는 빈 공간들에서[75], 생성의 덩어리들(blocks) 사이의 간격들(intervals)에서, 그리고 하나의 존속 안에 관여하는 여러 계열을 분리하는 구역들(zones)에서 일어난다. 만약 개체가 세포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살아있는 인격(living person)이라면, 이는 그들을 구성하고 그들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행위들 사이에 특정한 변형들이 자신들을 삽입하여 그들의 존재 양태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살아있는 인격들과 세포들은 그들 자신을 계승하는 양식을 부분적으로 재발명(reinvent)한다.

 

물리적 사회들, 즉 암석들이나 결정체들은 “환경으로부터 파생된(derived) 정교한 사회들의 파괴를 요구하는 행위자들(agencies)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회는 그러한 행위자다. 살아있는 사회가 파괴하는 사회들은 그것의 먹잇감이다. 이 먹잇감은 다소 더 단순한 사회적 요소들로 용해됨으로써 파괴된다. 그것은 무언가를 강탈당한(robbed) 것이다.”[76] 살아있는 사회들의 실존 조건은 절도(theft)와 환경 요소들의 파괴를 포함한다. 도둑질당한(stolen) 것은 다른 하위 유기체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선(善, good)을 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삶은 강탈(robbery)이다.”[77] 결정체들과 살아있는 무언가를 구별해주는 건, 살아있는 것을 규정하는 관심을 기울이는 활동(the interested activity)이다. 결정체는 자신이 생산하는 것과 단기적으로 환경의 효과들에 무관심하다. “사이클론은 자신이 일으키는 파괴를 즐겁게 해주려고(to feed) 인구 과밀 지역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자기가 갈 곳으로 갈 뿐이다.”[78] 그러나 살아있는 것은 “찾아내고, 붙잡고, 꾀어내고, 사로잡고, 덫을 놓고, 추적하는 수단들”[79]을 필요로 한다. 살아있는 존재의 역사는 살아있는 존재가 버틸(endure) 수 있도록 하는 “점점 더 효과적인 파괴 양식들”[80]의 역사다. 물리적인 것과 살아있는 것을 비교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은유는 그들을 구별하는 것, 즉 한편으로는 무관심(indifference)과 분리(detachment), 다른 한편으로는 관심(interest)과 애착(attachment)을 망각할 위험이 있다.

 

스탕게스(Stengers)를 따라, 나는 살아있는 존재와 환경 사이에 있는, 이러한 관심을 기울이고 의존하는 관계들(interested and dependent relations)의 모음을 “감염의 동역학 (dynamics of infection)”[81]라 부르겠다. 이 관계들은 가변적이고 결코 한 번에 완벽히(once and for all) 확립되지 않기 때문에, 동역학적(動力學, dynamic)이다. 한때는 행위자였던 것이 나중에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과정의 효과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동역학들 그 자체 외에는, 곧 살아있는 존재와 환경 사이의 변화하며 협상되는 관계들(the changing, negotiated relations)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안정성의 지점(point of stability)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정의로 이어진다. 살아있는 존재는 감염시키고 스스로 감염되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감염”이라는 용어를 그것의 어원적 의미로 - in-facere, ‘안에서 만들다’, ‘내부에서 작용하다’,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흡수하다’ 또는 ‘흡수되다’라는 의미로, 물론 여기에는 병리학적인 부정적인 함의는 제외한 의미로 -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감염”이라는 용어는 사변적 의미(speculative sense), 다시 말해 이런저런 특수한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그 결과들과 관련해서 중립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감염은 살아있는 존재들이 할 수 있는 파괴 변형들 모두를 나타낼 수 있다. 이는 살아있는 존재가 환경의 요소들을 전유하고 - “삶은 강탈이다” - 차례로 그것들을 변형시키는 모든 그러한 의존, 활동, 오염(contamination)의 관계들, 그리고 통합 과정들 - 느낌 행위들 - 을 드러내는 문제다.

 

모든 것은 만남들(encounters) 속에서 일어난다. 사회의 역량은 그 환경에 상대적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존재들이 관여하는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경험주의의 형식을 넘어서기는 불가능하다. “강조해야 할 점은 경험되는 사물들과 경험하는 행위의 집요한 특수성(insistent particularity)이다. 브래들리(F. H. Bradley)의 학설 – 늑대가 어린 양을 잡아먹는 것을, 절대자를 규정하는 하나의 보편자로 간주하는 - 은 이 명백한 사실에 대한 곡해다. 늑대는 양을 시간에 장소에서 먹었다. 늑대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양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독수리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82]

 

다른 늑대, 다른 환경, 다른 만남은 다른 사건과 다른 힘들을 수반할 것이다. 늑대의 힘은 양의 힘과 그들의 만남이 발생한 장소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진다. 이러한 조건들(terms) 중 그 무엇도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데 있어 선험적인(a priori) 우위를 갖지 않는다. 그러한 역동성은 관계들의 진정한 생태학(ecology of relations)을 함의한다. 지금까지의 분석은 단 하나의 수준, - 한 유기체와 다른 유기체의 만남 - 에 머물렀지만, 이는 모든 수준으로 일반화될 필요가 있다. 각 유기체는 하나의 사회인 한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다. 감염 관계의 이러한 일반화는 프랑스 생물학자 피에르 소니고(Pierre Sonigo)의 저작에서 찾을 수 있는 생각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신도 유전자도 아니다(Neither God nor Gene)』에서 소니고는 “세포들은 우리가 다른 수준에서, 즉 생태학이나 경제학에서 발견하는 것과 유사한 사회를 형성한다”[83]고 썼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회의 실존 양태들을 설명하는 – 그럼에도 기술적(technical)이기도 한 - 또 다른 양식, 또 다른 방식이다. 따라서 “세포들 간의 관계들은 생태계(먹이 사슬)나 인간 사회들(경제적 순환)을 구조화하는 것들과 비교할 수 있는 자원 교환들에 의존한다”[84]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각자 안에는 수십억 개의 미세한 동물들로 구성된” 하나의 온전한 생태계(an entire ecosystem)가 발견될 수 있으며, “우리는 이것들을 세포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며,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85]

 

화이트헤드는 브래들리(Bradley)와는 대조적으로, 늑대와 양 사이의 관계가 유기체를 구성하는 수십억 개의 세포 사회들의 수준에서 다뤄질 수 있다고 말한다. 세포들이 살아있는 사회들인 한, 그들은 다른 살아있는 사회들을 취하고, 사로잡고, 파괴하며, 다른 모든 것들처럼 자신들의 실존을 연장하려고(prolong), 즉 버티려고(endure) 시도한다. 세포들조차 자신들의 환경에 관심을 가진다. 우리가 더 복잡한 유기체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무한히 작은 규모의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미친다(They are affected and they affect). 살아있는 존재가 이러한 역동성에 관해 가질 수 있는 모든 의식은 그러한 역동성의 결과이지, 결코 그 기원이 아니다.

 


 

각주

*저자가 직접 인용하는 구절들 중 한글 번역본이 있는 경우엔 가능한 한글 번역본을 따라서 번역하려 했으며, 그중 일부 용어나 문구를 다듬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아래 각주에서 *으로 표시한 내용은 드베즈가 인용한 자료의 또 다른 판본의 서지사항 및 페이지 또는 한글 번역본의 서지사항 및 페이지를 적은 역주다.

 

2장

  

[64] Samuel Butler, Life and Habit (London: Trübner, 1878), 124.

[65]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89–90.

*『과정과 실재』, 209.

[66]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90.

*『과정과 실재』, 209.

[67] 콘래드 할 와딩턴(Conrad Hal Waddington)의 The Strategy of Genes: A Discussion of Some Aspects of Theoretical Biology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57)을 참고하라. 화이트헤드 철학이 생물학에 어떻게 계승되었는가와 관련해, 조셉 니덤(Joseph Needham)의 저작을 참고하라. 특히 The Refreshing River (Nottingham, UK: Spokesman, 1943)과 Order and Lif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6)을 참고하라. 그리고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Crystals, Fabrics, and Fields (Berkeley, CA: North Atlantic Books, 2004)에서 이 영향에 관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68]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43.

*『과정과 실재』, 126.

[69] 영역자 주: 지금까지 이 구절에서 원어인 프랑스어 milieu를 번역하기 위해 “milieu”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같은 단어를 “environment”로 바꾸어 번역할 것이다. 이는 이어지는 인용문에서 화이트헤드가 “milieu” 대신 “social environment”과 “environmen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두 용어가 지닌 함의를 모두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시몽동의 “연합된 환경”이라는 표현을 살펴보려면, 다음의 저작을 참고하라. 질베르 시몽동,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황수영 옮김, 2017, 그린비).

[70]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00.

*『과정과 실재』, 227.

[71]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02.

*『과정과 실재』, 229.

[72] 여기서 살아있는 존재들의 “관심을 가지는(interested)” 특성에 연결된 지식의 변형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이에 관해 더 자세한 논의를 보려면, 뱅시안 데스프레(Vinciane Despret)의 Quand le loup habitera avec l’agneau (Paris: Les empêcheurs de penser en rond / Le Seuil, 2002)를 참고하라. 데스프레는 “실존 명제(proposition of existence)”라는 개념을 생명(living)의 진정한 “문화”의 중심에 놓는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역사들’이 벡터들(vectors)인 실존 명제들, 이러한 역사들에 동물을 끌어들이는(enlisting) 양식들과 그들을 배치하는 실천들은 순종적이고 말이 없는 세계, 즉 우리의 표상들을 위한 단순한 지반(support)을 향해 말을 거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 관계하는(concern) 우리의 역사들은 그들에게 무관심하지 않다.”(Quand le loup habitera avec l’agneau, 26) 여기서 관건은 살아있는 존재들이 그들에게 제기되는 질문들을 향해 관심을 기울이는 특성을 부각하는 것이다.

*위 인용문은 영역자의 영역을 기준으로 하여 번역하되, 프랑스어 원문을 참고하였다.)

[73] Eugène Dupréel, “La consistance et la probabilité constructive,” Lettres 55, no. 2 (1961): 1–38.

*해당 인용문은 영역자의 영역을 기준으로 하여 번역하되, 프랑스어 원문을 참고하였다.

[74] Dupréel, “La consistance,” 1–38.

[75] 틈새 생명(interstitial life)에 포함된 관계들에 관한 상세한 분석은 다음 자료에 담긴 내 논의를 참고하라 “A Philosophy of Interstices: Thinking Subjects and Societies from Whitehead’s Philosophy,” Subjectivity 6, no. 1 (2013): 101–11.

[76]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05.

*『과정과 실재』, 235.

[77]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05.

*『과정과 실재』, 236.

[78] Isabelle Stengers, Thinking with Whitehead: A Free and Wild Creation of Concept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 313.

[79] Stengers, Thinking with Whitehead, 313.

[80] Stengers, Thinking with Whitehead, 313.

[81] Stengers, Thinking with Whitehead, 157–63.

[82]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43.

*『과정과 실재』, 126.

[83] Jean-Jacques Kupiec and Pierre Sonigo, Ni Dieu ni gène: Pour une autre théorie de l’hérédité (Paris: Points/Seuil, 2000), 129.

*해당 인용문은 영역자의 영역을 기준으로 하여 번역하되, 프랑스어 원문을 참고하였다.

[84] Kupiec and Sonigo, Ni Dieu ni gène, 129.

[85] Kupiec and Sonigo, Ni Dieu ni gène,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