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무브 Translation

디디에 드베즈, <사건으로서의 자연> 3장

by 인-무브 2025. 7. 23.

사건으로서의 자연: 가능한 것들의 유혹

 

저자: 디디에 드베즈(Didier Debaise)

영어 번역: 마이클 헤일우드(Michael Halewood)

한글 번역: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3장 경험의 강화

The Intensification of Experience

 

지금까지 나는 이분화의 몸짓(the gesture of bifurcation)으로부터 발생하는 근대적 자연 경험에 맞서 존재에 관한 마니에리슴적 정의(mannerist definition of being)를 제시했다. 양식들을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니에리슴은 다원주의적 우주를 사유하기 위한, 가능하고 일관된 경로로 제시되었다. 이 다원주의적 우주는 각기 동등하게 중요하고 동등하게 능동적(active)인, 무수한 경험의 중심들로 구성된다. 인간의 인간학적 경험은 그중 한 형식을 표상(representation)하지만, 결코 그것들의 토대나 모델이라고 주장할 순 없다.[1]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물로부터 추출되었던 모든 성질, 즉 관점들, 미적 감각들, 중요성과 가치의 감각들을 실존 자체의 내부로 다시 위치(relocate)시킬 필요가 있었다. 필요한 것은 그 형식 자체에서, 그 야망에서, 그리고 사물들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 자연의 심원한 다원적 경험에 합당한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는 철학이다. 나는 이 철학을 “사변적(speculative)”이라고 부를 것이며, 그것의 기능, 곧 경험을 그 최대 지점까지 강화하는 것을 통해 그를 정의할 것이다. 이 기능을 개괄하기 위해, 나는 화이트헤드의 마지막 위대한 저작인 『사유의 양태(Modes of Thought)』에서 나오는 두 가지 요소를 활용할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독자들과 전문가들은 이 책을 접했을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하나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태도로,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이 책이 이미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서 충분히 다루어졌던 내용을 단순화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경계하는 태도였는데, 이 책이 너무 은유적이고 서정적이어서 명료하게 해주기보다는 혼란을 더 많이 초래하는 것 같다고 봤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이전 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물음이 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 나는 그 물음을 사변적 기획(speculative enterprise)의 핵심에 놓고자 한다. 이른바, 무엇이 중요성의 감각(a sense of importance)을 생산하는가? 이 질문은 그 자체의 일관성을 제공하는 다양한 다른 질문들을 수반한다. 이 중요성의 감각은 특수한 재능(faculty), 즉 세계의 사물들에 자신의 관심들(interests)과 가치들(values)을 투사하는 느끼기, 상상하기, 혹은 추론하기의 재능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중요성은 실존 그 자체의 핵심에 위치해야 하는가? 마치 사물들이 그러한 중요성을 단언하는 이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중요성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며, 다른 시대에서는 중대한 것이라 믿었던 것을 우리 시대에는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해 거부하게 하는 역사적 변동을 겪는가? 한 마디로, 이 중요성의 감각은 인간의 재능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오로지 인간학적인 영역을 넘어선 차원만을 가리키는가?

 

정의를 제시하기에 앞서, 중요성과 관련하여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두 가지 대비(contrasts)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무엇보다도 중요성은 사실의 문제들(matters of fact)과는 다르다. 화이트헤드는 이 둘을 모든 경험의 핵심에 놓는다. “모든 광범위한 경험의 근저에 필연적으로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대조되는 두 관념(ideas)이 있다. 하나는 중요성의 관념(notion), 중요성애 대한 감각, 중요성이라는 전제이며, 다른 하나는 사태(matter-of-fact)에 관한 관념이다.”[2] 중요성은 어떤 것의 가치에 관여하며(concerns), 사실들은 무미건조한(brute) 실존을 가리킨다. 이러한 무미건조한 실존이라는 은 지성에 의해 수행되는 단순화 행위에서 비롯되는 순수한 추상이다.[3]

 

본질적으로 절대적으로 중요성이 부재한 사실적(factual) 실존은 어떤 것일까? 설령 그러한 사실의 예를 발견한다 해도, 우리는 그러한 사실의 가능성 자체를 중요성의 문제로 만들지 않을까? 그것이 검증 중인 가설의 중요성을 확증하거나 부정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중요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실적 실존과 독립해, 중요성 그 자체로 존재한다(be)는 건 뭘까? 그것을 뒷받침하거나 중요하게 만드는 존재들을 어떤 식으로든 참조(refer)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즉시 모든 가치를 잃지 않을까? 중요성과 사실의 문제들 사이의 대조는 대립(opposition)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의 서로 다른 성질들(distinct qualities)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순전한 사태(sheer matter-of-fact)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그것은 중요성의 기초다. 피할 수 없다고 하는 사태의 특성 때문에 중요성은 중요한 것이 된다.”[4] 그 결과, 중요성이라는 관념(notion)은 흔히 혼동되는 또 다른 관념인 관심(interest)과 구분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이 흥미롭거나 관심을 끈다고 말할 때, 궁극적으로 그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이게 문제다(it matters)’, ‘이건 중요성을 가진다(it has importance)’라고 말할 때와 같은 가치를 갖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것에 부여하는 중요성은 단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갖는 관심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 두 관념 사이에는 명확하고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중요성은 어떤 사건에서 그것의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직접적(immediate) 실존을 넘어서 무엇이 관건(關鍵, at stake)인지를 결정화(結晶化, crystallize)하는 양식을 표현한다. 우리는 어떤 발견이나 발명에 대해, 그것들이 발생하는 세계의 상황을 진정으로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할 때, 중요하다고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를 받아들여, 예를 들어 역사적 사건의 중요성은 그 자체의 실재를 넘어 역사 과정에서 그것이 생산하는 전환들에 비례한다고 단언한다. 궁극적으로, 이 견해를 확장하면, 중요성은 “우주의 통일성(unity of the Universe)”[5]의 표현이라고 주창하게 된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순간부터, 선행하는 모든 사건은 회고적으로 수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역사적 사건은 앞선 사건들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조정하는데, 이 새로운 시대가 중요성을 갖는 것은 바로 그것이 본질적으로 그 사건이 위치하면서도 그 사건을 초과하는 세계의 경로(course)에 관해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관심이라는 관념은 그렇게 광범위하지 않다. 그것은 사건의 특수성, 사건의 개별성과 관련이 있다. 만약 이 두 대조(중요성과 사태/중요성과 흥미)에 의해 전달되는 것을 연결한다면, 중요성은 항상 현행적 사건(actual event)에 위치하는 이러한 우주의 통일성이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화이트헤드는 중요성에 대해 보다 기술적인 정의를 제시한다. 중요성은 “느껴진 사물들의 우주에다 하나의 전망(perspective)을 부여하는 느낌의 한 측면”[6]이다. 이 정의는 다소 모호하며, 화이트헤드는 마치 그 정의가 자명하여 다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다는 듯이, 이를 정당화하거나 발전시키려 하지 않고 단순히 선언한다. 사용된 용어들, 특히 느낌들과 전망들이 다른 저작들에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던 건 사실이다. 화이트헤드는 『사고의 양태』에서 전망들에 대해 한 장 전체를 할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성에 대한 이러한 정의가 그렇게 빠르게 정식화되었다는 점은 그 구성 요소들이 다른 곳에서 다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정당화될 순 없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러한 정의를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며, 다른 해석을 과하게 부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느낌(feeling)”이라는 용어가 두 번 나타난다는 걸 발견할 수 있는데, 이로부터 “느낌”으로 시작하여 “느낌의 측면”으로 나아가다 느껴지는 세계에 대한 “전망”으로서 “느껴진 것”으로 끝나는 순환적 정의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느낌을 정의의 핵심에 두려는 이러한 집념은 직접적이고 급진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느낌은 중요성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의식(consciousness)이나 의도성(intentionality)에 귀속되던 것을 대신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건의 중요성이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의식, 우리가 그것에 투사하는 의도들, 또는 우리가 예견하거나 추론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효과들과 관련이 없다고 추정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 점을 여러 번 재차 강조하며, 왜 그가 느낌에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부여하는지에 대해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것을) 무시하기도 하고, 주의를 집중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주목하여 강조함 없이도, 필수적인 여러 기능을 수행한다”[7] 또는 “느낌은 그 자체 안에 의식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8] 이건 의식이 중요성과 관련하여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진 않지만, 의식이 중요성의 기원이나 기반도 아니라는 뜻이다. 사건의 중요성에 대한 감각, 즉 무엇이 중요한지(무엇이 중요성을 가지는지)를 경험하고 느끼는 양식은 그 어떤 의식보다 앞선다. 이 중요성의 감각은 의식이 표현하는 것보다 더 넓은 차원을 나타내며, 그것은 생명의 활동(activity of living)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중요성에 대한 감각은 (...) 동물적 경험의 존재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9]

 

 

명제적 유혹들

그러나 의식에 앞서는(prior to) 수준에서 중요성을 느낌들 안에 위치시키는 것은 결정적인 질문 하나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둔다. 바로 이 중요성의 감각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만약 중요성이 오로지 “느껴지는 사물들의 우주에 하나의 관점이 부과되는 느낌의 측면”에 불과하다면, 그것의 증가(increase)와 계조(階調, gradation)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떻게 이전에는 중요하지 않았던 사건들의 중요성이 커지거나, 반대로 어떻게 장기간이나 단기간에 중요성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화이트헤드가 시사하듯, 이러한 중요성의 정의에 모든 느낌과 관여하는 우주론적 요소가 있다면, 중요성의 변동들, 강화들, 감소들, 또는 등급 매기기(ranking)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중요성의 변화들에 관한 물음은 사변적 사유의 기능을 정의하는 데 핵심적이다. 왜냐하면, 만약 중요성이 각 사건마다 단 한 번에(once and for all) 즉시(instantly) 주어진다면, 사변적 사유는 중요성이 있다고 진술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갖지 않을 것인데, 만일 그렇게 된다면 중요성이 너무 만연해져서 모든 관련성(relevance)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변 철학의 독특한 기능이 경험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make experience matter), 경험을 최대한으로 강화하는 것(intensify it to its maximum)이라고 본다. 따라서 경험의 중요성을 증가시키는 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 불행히도, 화이트헤드가 제시한 중요성의 정의는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데, 그 정의가 느낌에 핵심 역할을 부여하려는 한에서 그러하다. 하여 그것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과정과 실재』에서 화이트헤드는 “명제들(propositions)”에 관해 한 장 전체를 할애한다. 명제들에 관한 물음, 즉 무엇이 명제를 특징짓는지, 명제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명제가 어떤 효과를 내는지는 적어도 『수학 원리』 시절부터 화이트헤드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일관된 주제 중 하나다. 나의 목표는 화이트헤드의 작업에서 “명제들” 개념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도, 그 개념과 화이트헤드가 저술할 당시에 분명히 가졌던 다른 철학적 입장들 사이의 연관성을 확립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명제들에 근본적인 지위를 부여하려는 논리학, 인식론, 혹은 기호학 과 같은 다른 철학적 접근들과 화이트헤드의 “명제들”을 비교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목표는 그보다 엄밀하다. 바로 경험이 어떻게 강화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곧이어 살펴보겠지만, 화이트헤드가 『과정과 실재』에서 “명제들”을 다룰 때, 강화(intensification)의 관점에서 논의하기 때문이다. 명제는 사태에 관한 기술(description)도 아니고, 표상(representation)이나 판단(judgment)도 아니다. 그것은 느낌을 위한 유혹(a lure for feeling)[10]이다. 본질적으로, 명제 만들기는 느낌들의 다수성을 유혹하기(the luring)다.

 

우리는 “유혹(lure)”이라는 용어를 잠시 살펴봐야 한다. 화이트헤드가 이 단어에 있는 모든 부정적 함의를 제거하고, 아주 독특한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어휘에서 “유혹”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고안된 술책(artifice)이나 현실을 가리는 환상(illusion)의 의미를 전혀 담고 있지 않다. 화이트헤드에게 이 용어는 단호하게 중립적이다. 유혹은 상황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일 수 있는 어떤 변화를 촉발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유인하고,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며, 사건의 경로를 변경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가 명제들을 “느낌을 위한 유혹들”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어떤 비판이나 비난도 의도하지 않았다. 단지 명제들을 사로잡음(capture)이나 붙잡음(grasping)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이런 의미에서, 명제들을 판단들(judgments)과 혼동하지 않는 게 필수적이다. 이 둘의 기능들은 상호 보완적이지만 동일하진 않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명제들을 판단들의 특수한 사례들로 만들려고 하는 이론들을 여러 차례 강력히 비판했다. 예를 들어,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불행히도 이론들은 ‘명제들’이라는 이름으로 논리학자들의 손에 넘겨지고 말았으며, 그들은 이론들의 유일한 기능이 그것들의 진위(眞僞, truth or falsehood) 여부를 판단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장려해왔다.”[11] 논리학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단지 명목에 불과하다. 문제는 훨씬 더 광범위하며, 명제의 주요 기능이 판단의 매개가 되는 것이라는 부당한 믿음에 근거한다. 이는 명제의 이러한 측면을 완전히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관련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제시하고 있는 학설에서는 (...) ‘판단’이 구성 요소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의식’ 또한 마찬가지다.”[12] 이러한 차이를 가능한 한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화이트헤드는 명제들과 판단들 간의 모든 혼동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거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희화화에 가까울 정도로 극명하게 요약한다. “풍부한 상상력이 깃들어 있는 문학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논리학자들에게는 그들의 편협한 학설이 불합리하다는 데 대한 경고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모든 논리학자가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를 읽을 때, 맨 처음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기 시작하여 35행 전체를 읽는 내내 판단하는 작업만 계속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틀림없이 읽어나가는 어느 시점에서 판단은 미적 환희(aesthetic delight)로 뒤덮여 빛을 잃고 만다.”[13] 비록 독백이 일련의 진술들로서 순전히 이론적일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순전히 언어적 표현에 그치지 않고 그를 넘어선 어떤 기능을 가진다. 즉, 느낌들의 다수성을 사로잡는 것이다. 판단이 지나치게 협소한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판단은 명제에 함축된 상상적 도약(imaginative leap)을 잃게 된다. 독백에 함축된 느낌들은 미적, 도덕적, 가치론적이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논리적이기까지 한 서로 다른 질서들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느낌들은 서른다섯 줄의 운율을 관통한다. 이 구절들은 개별적으로 판단될 수 없으며, 이러한 느낌들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낼 그 어떤 일련의 판단들을 통해서도 판단될 수 없다. 하나의 명제로 간주될 때, 그 독백은 유혹하는 느낌들의 명확하고 극적인 강화를 생산한다. 이러한 느낌들은 “느낌의 요소들로서의 가치”[14]를 지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햄릿의 독백에서 발화된 명제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묻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완전히 다른 기능, 즉 느낌들에 체현된(embodied), 느낌들이 부착된(attached) 경험의 중요성을 증가시키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안 세계들

명제들의 기능은 느낌들의 강화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명제들이 어떻게 이러한 강화를 해낼 수 있는가? 명제들은 무엇을 전망 안으로 들이기에(put into perspective), 이러한 느낌들의 강화를 유도할 수 있는 걸까? 정확히 말해, 명제들이 유혹하는 자(lures)로서 작용할 때, 이 명제들에 사로잡히는 게 무엇이기에, 이 느낌들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차원을 어떻게 얻게 되는 걸까? 새로운 예를 들어보자. 바로 워털루 전투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났고, 그 결과 이 패배를 바탕으로 우리 현행 세계의 구조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승리했더라면, 그 경우에 뒤따랐을 또 다른 경로의 역사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추상적 관념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들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상상력이 풍부한 역사가들이 그러한 가설적인 대안에 몰두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가설적인 대안들을 아예 무시할 때조차, 일단 그것들에 관해 사고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그것들이 관련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15]

 

전투의 예를 사용하여 명제 이론을 설명하는 데는 일정한 위험이 따른다. 이는 돌발(irruption)이라는 관념을,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파열(rupture)로서의 사건이라는 관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명제 개념을 주로 인간학적 틀 안에 위치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여 이와 같은 전투 예시는 적절하면서도 위험하다. 하지만 화이트헤드가 이 예시를 제시하는 방식, 그가 소집하는 요소들, 그가 사용하는 용어들은 내가 제기하는 논증에 요구되는, 명제들의 사변적 차원들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게 해준다.

 

명제들은 현행적 느낌들(주어들)과 가능 세계들(술어들)을 연결한다. 워털루 전투를 언급할 때,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명제 이론에서 지속하는 관심사 중 하나를 이루며, 내가 사변적 명제들이라는 틀 내에서 명제에 부여하려는 역할에 비춰볼 때 강화 문제의 핵심 지점인, 매우 특정한 무언가를 도입한다. 그는 “또 다른 역사적 경로가 가능했다”라는 관념을 제기한다. 이것은 - 상황이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다며 -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에 덧붙일 수 있는 구호나 단순한 억설(臆說)이 아니다. 또 다른 경로에 대한 이러한 역설은 사건의 심장부에서 울려 퍼진다. 사건에 대해서든 역사를 대해서든, 또 다른 행동 경로에 관한 질문은 전투의 실존이 걸린 모든 수준에 걸쳐 그 전투를 구성하는 각 행위에서, 패배의 가능성 앞에서 사기가 꺾이고 병사들이 주저하는 바로 그 순간에서 긴급히 제기된다. 이러한 주저함들을 가로지르면서 각 행위가 벌어지고 있을 때, 가능 세계들의 다수성이, 예컨대 ‘프랑스군이 승리하고, 저들은 패배한다’, ‘연합이 무너지고 새로운 균형이 드러난다’, ‘전투가 계속되고 승리는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다’가 그 행위들에 부착된다.

 

화이트헤드는 샤를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를 윌리엄 제임스가 그에게 보낸 찬사를 통해서만 알았던 게 틀림없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가 역사의 다른 경로들을 구상하는 것, 사건들이 달리 일어날 수 있었음을 고려하는 것에 부여하는 강조점(emphasis)은 르누비에가 그의 저서 『위크로니(Uchronie)』에서 확립한 장르(genre){대체 역사 또는 가상 역사 소설}와 그리 다르지 않다.[17] 이러한 “위크로니들(uchronies)”[18]의 기능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사건들을 상대화하고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에 완벽히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추상적인 연습들에 불과한가? 위크로니들은 이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교육적(pedagogical)이거나 발견적(heuristic) 도구가 아니다. 그것들은 내가 중요성에서의 상승, 중요성의 강화라고 부르는 것의 조건(condition)이다. 이 점은 사변적 사유의 기능에 핵심적이므로, 더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만약 전투의 결과가 항상 정해져 있었다면, 만약 그것이 단 한 번에 확립된 일상적인 경로를 단순히 따랐다면, 만약 그것이 오직 역사적 과잉-결정들(over-determinations)만을 현행화했다면, 사건의 모든 가치는 흩어져 사라질 것이고, 그와 함께 우리의 유산도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투는 단지 선형적인 순서(linear sequence)에 속한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하여 계기를 우리의 현행적 세계의 창조가 펼쳐졌던 역사적 순간으로 만드는 걸 틀림없이 놓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들은 패배를 극적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 세계들의 위상(status)을 과장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만약 그것들의 실존이 항상 국지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사건들 안에 -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의 주저함, 찰나에 느껴진 걱정스러움, 행동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분기들 속에 - 위치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단지 순수하고 일반적인 추상화들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행위들(deeds), 모든 행위자들(actors), 모든 행동들(actions)에 대해, 가능 세계들은 “순수한 가능태들(pure potentialities)과 현실태들(actualities) 간의 하이브리드”[19]라고 진술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변적 명제들은 자신들의 일관성을 부여하는 환경(milieu)을 요구한다. 그것들은 세계를 위한 결정들을 내리지 않으며, 사건들을 서로 다르게 분절시켜(articulate) 명료하게 한다. ‘역사의 다른 경로’라는 관념이 일관성을 얻기 위해서는, 사변적 명제들에 부분적으로 선재하는(preexist), 실재하는 걱정들과 유효한 느낌들을 유혹하거나 사로잡아야 한다. 이 느낌들은 전투 참여자들의 기억 속에서, 문학 작품들에서, 그리고 역사가들이 전투의 전개를 묘사하는 책들에서 자라나는 전투의 느낌들이다. 이러한 물리적, 미적, 상상적 느낌들의 그룹은 전투와 관련하여 보존되는 새로운 명제들의 환경(milieu)을 형성한다. 화이트헤드의 예시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상상력이 풍부한 역사가”가 역사의 이러한 다른 경로들을 숙고할 때, 그 역사적 계기에 부착된 가능성들에 생명이 부여된다. 역사가가 전개하는 명제들, 그래서 역사가에 밀접하게 결속된 명제들은, 이 특이한 역사적 사건에 동반된 주저함들을 한데 모으면서, 중요성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명제들의 중요성은 그것들이 생산하는 분절들(articulations)의 관련성과 관계가 있다.

 

누가 명제의 이러한 관련성을 판단하는가를 묻는 것은 분명 정당하다. 한 명제가 다른 명제보다 더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전망에 따라 그 명제들이 수반하는 분절들의 정도(the extent of the articulations)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가능 세계들의 다원성이 형성되고, 만약 이 가능 세계들이 그 전투에 관해 얘기해주는 역사들에 의해 확증되거나 반박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확립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들 모두를 동등한 것으로, 즉 동일한 실존 수준, 같은 힘과 강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화이트헤드는 내가 인용한 구절에서 이 물음들에 응답할 방법을 제시한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났고, 그 결과 이 패배를 바탕으로 우리 현행 세계의 구조가 생겨나게 되었다.[20] 전투의 중요성은 전투 그 자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다소 시시한 발견일 것이다. 강화는 전투를 가로지르는 모든 주저함, 전투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 장엄함을 불안정하게 하는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다.

 

궁극적으로, 명제의 관련성은 우리 현행 세계의 구조와 관련된다. 우리는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역사의 또 다른 경로”, 즉 그러한 위크로니들을 전개하는 “상상력이 풍부한 역사가”에 의해 극화되는 이러한 대안 세계들(alternative worlds) - 이것들에는 우리 현행 세계와 그것이 계승하는 것, 우리 세계가 파생된 역사의 연약함, 그리고 계속해서 잠재적 현존(a latent presence)을 갖는 가능성들이 이해되도록 하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은 없다. 이러한 과거에 관한 조건부 진술, 즉 “~할 수 있었던 could have beens {~이었을 수도 있었던}”라는 진술은 우리의 현행 세계의 구성, 즉 주저함들, 잠재적 분기들, 경향들을 가지는 만들어지는-중인-세계(world-in-the-making)의 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떠한 확정적인 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제 사변 철학의 기능에 대한 나의 초기 정의, 즉 경험을 그 최대 지점까지 강화하는 것이라는 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중요성은 주어져 있다. 중요성은, 자신이 계승하는 우주론적 차원들의 각 요소에서 표현되는 우주에 대한 특수한 전망을 체현하는 한, 모든 실존에 속한다. 느끼고, 연결하고, 파악하는 방식들과 이것들이 띠는 중요성은 자연 그 자체를 구성한다. 한쪽에는 제1성질이 있고 다른 쪽에는 제2성질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단언하는 각기 실존하는 것들의 특정한 분절들(articulations)이 있다. 그러나 중요성이 어디에나 있더라도, 중요성을 강화하는 것, 중요성이 요구하는 모든 차원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한마디로 그것의 가치를 확립하는 것 말이다. 역사적 사건의 관점에서 사변 철학의 기능에 관한 물음이 제기되었지만, 분명한 건 그 물음이 역사와 그 유산들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그 물음이 우리의 현대적 경험과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가능성들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것{중요성을 강화하는 것, 가치를 확립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활동이다. 그 활동에 관한 격언은 다음과 같을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파괴하든 보존하든, 이를 통해 우리가 경험의 중요성 – 경험이 세계 역사 속에 들어 있는 저 구체적인 사례에 의존하고 있는 한 –을 보호하고 있다면, 우리의 행위는 도덕적이다.”[21]

 

 


각주

*저자가 직접 인용하는 구절들 중 한글 번역본이 있는 경우엔 가능한 한글 번역본을 따라서 번역하려 했으며, 그중 일부 용어나 문구를 다듬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아래 각주에서 *으로 표시한 내용은 드베즈가 인용한 자료의 또 다른 판본의 서지사항 및 페이지 또는 한글 번역본의 서지사항 및 페이지를 적은 역주다.

 

3장

 

[1]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가스뜨루(Eduardo Viveiros de Castro)의 저작들, 특히 저서 Cannibal Metaphysics (Minneapolis: Minnesota University Press, 2014)과 논문 “Exchanging Perspectives” (Common Knowledge 10, no. 3 (2004): 463–84.)을 참고하라.

*『식인의 형이상학: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박이대승·박수경 옮김, 2018, 후마니타스).

[2] Alfred North Whitehead, Modes of Though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8), 5.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4.

**『사고의 양태』, 19.

***『사고의 양태』 한국어판에서 해당 문장의 역자주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대비되는 두 관념, 즉 <중요성>의 관념과 <사태>라는 관념은 <가치>와 사실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근대 이후의 논의에서 대기 이들은 논리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들이 결코 독립된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거기에는 그것을 단순한 사실로 평가하는 가치의식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파악은 주체적 형식을 본질적 요소로 지닌다는 <과정과 실재>의 주장은 바로 이 점을 범주화한 것이다.”

[3] 브뤼노 라투르는 화이트헤드의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자연의 이분화와 사태와 “관심사”에 대한 물음(the question of matters of fact and “matters of concern”) 사이의 관계를 개괄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라투르의 “What Is a Style of Matters of Concern? Two Lectures in Empirical Philosophy” (Spinoza Lectures at the University of Amsterdam in 2005, published as an independent pamphlet, Van Corcum, Amsterdam, 2008.)을 참고하라.

[4] Whitehead, Modes of Thought, 5.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4.

**『사고의 양태』, 19.

[5] Whitehead, Modes of Thought, 11.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8.

**『사고의 양태』, 29.

[6] Whitehead, Modes of Thought, 15.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11.

**『사고의 양태』, 34.

[7] Whitehead, Modes of Thought, 15.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11.

**『사고의 양태』, 34.

[8]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ed. David Ray Griffin and Donald Sherburne, Gifford Lectures of 1927–28, corrected ed. (New York: Free Press, [1929] 1978), 256.

*『과정과 실재』, 503.

[9] Whitehead, Modes of Thought, 12.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9.

**『사고의 양태』, 29.

[10]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84. 또한 Isabelle Stengers의 Thinking with Whitehead: A Free and Wild Creation of Concept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를 보라.

*『과정과 실재』, 378.

[11]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84.

*『과정과 실재』, 378.

[12]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84.

*『과정과 실재』, 378.

[13]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84–85.

*『과정과 실재』, 379.

[14]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85.

*『과정과 실재』, 379.

[15]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85.

*『과정과 실재』, 379.

[16] 윌리엄 제임스는 주로 “현상주의(phenomenism)”에 대한 르누비에의 입장을 칭찬한다. 그 한 예로, 제임스의 에세이 “The Place of Affectional Facts in a World of Pure Experience”의 각주 18을 참조하라. 또한, 랄프 바튼 페리(Ralph Barton Perry)가 “Correspondance de Charles Renouvier et de William James”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36, no. 1 (1929): 1–35.)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제임스와 르누비에 간의 서신도 참고하라.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장 발(Jean Wahl)의 The Pluralist Philosophies of England and America (Charleston, South Carolina: Nabu Press, [1925] 2011)을 참고하라.

[17] Charles Renouvier, Uchronie: Esquisse historique apocryphe du développement de la civilisation européenne tel qu’il n’a pas été, tel qu’il aurait pu être (Paris: Fayard, 1988).

[18] 위크로니(uchronie)라는 용어는 유토피아와 연관되어 있지만,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위크로니(Uchronie)는 과거 사건의 변화를 바탕으로 역사를 재작성하는 걸 의미한다.

*문학 장르로서의 위크로니는 지난 역사적 사실을 대체할 새로운 역사를 다시 상상하는 소설을 가리킨다. 어원을 따져보면, uchronie는 ‘어느 때에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ou’(없음)와 ‘chronos’(시간)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둘을 합친 신조어라 할 수 있다. 1876년 프랑스의 철학자 샤를 르누비에가 쓴 소설에서 처음 사용되면서, 이 장르를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한 마디로 대체 역사 소설 또는 가상 역사 소설이다. 여기서 드베즈는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어떤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면 역사가 기존의 것과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하는 걸 의미하는 용어이자 장르인 위크로니를 예시로 삼아, 가능 세계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변 철학의 기능에 관해 논하고 있다.

[19]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85–86.

*『과정과 실재』, 380.

[20]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185.

*『과정과 실재』, 379.

[21] Whitehead, Modes of Thought, 20.

*『사고의 양태』, 4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