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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으로부터, 행성으로까지 : 신해욱 시 읽기 (2)

by 인-무브 2026. 7. 20.

바깥으로부터, 행성으로까지 : 신해욱 시 읽기 (2)

 

 

 

 

길혜민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본 원고는 지난 2025년 강좌 <반성하지 않는 여성/시 읽기>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제미나이를 통해 그린 사라지는 지구

 

사라지는 지구

  신해욱의 첫 시집인 『간결한 배치』는 인간의 형해화, 그리고 형해화의 과정은 어떤 문제와 함께 상상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시한다. 이러한 신해욱의 시집은 『생물성』, 『syzygy』, 『무족영원』,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타자성의 지평을 열어낸다. 이제 ‘행성적인 것’이라는 시각에서 타자로서의 인간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객체적 상상력을 권해야 할 시간이다. 

  신해욱의 첫 시집이 나온 2005년의 편혜영의 소설 『아오이가든』을 생각해본다. 소설을 보면 두 작품의 동시성은 어떤 지점을 겨냥한다. 기후위기와 더불어 인수공통감염에 대한 상상력이 펼쳐지면서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는 생명으로서 주인이 아니라 소수자일 수 있음을 제시했던 것이 신해욱과 편혜영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덕분에 미생물은 생명 형식의 다수자를 구성한다고 반성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1] 우리 몸속에서 벌어지는 대사 작용들은 미생물에 기대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만을 봐도 쉽게 미생물의 다수성을 부분적이나마 상상할 수 있다. 인간의 동일성에 종속되지 않는 미생물의 비동일성의 세계는 우리의 지식과 통제를 초월한다. 최근에 겪은 팬데믹의 장기화는 미생물과의 공존 속에서 생명에 대한 전환적 사고를 요구하는 계기였다. 제인 베넷은 “비인간의 생기를 식별하는 능력을 계발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지각적으로 열려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길 권유한다. 우리는 이처럼 비인간 생기, 비동일성의 생기적 물질성에 인간이 참여하고 있다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각주:2]  미생물과의 공존, 인간의 객체성, 비동일적 생기적 물질성에 대해서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시적 발화와 연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 신해욱의 시를 읽기와 관련한 모색이 될 수 있다고 말하려 한다. 그런 염두를 두고 아래의 작품을 읽어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내가 속한 시간과/나를 벗어난 시간을/생각한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며/누군가의 웃음을/대신 웃으며
나는 낯선 공기이거나/때로는 실물에 대한 기억
나는 피를 흘리고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전문)[각주:3]

 

 

 

위의 작품에서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요구받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인격이 아니라 ‘감정’의 통로, ‘정동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종합적 이성을 가진 능동적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물’을 통해 흘러가는 운동성에 기대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공포를 겪는 얼음의 해빙, 이야기를 움직이는 흐름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인간적인 과정에 넣을 수 있는 목록이 없다. 흐름으로서 무언가가 흐를 수 있도록 하는 객체이기 때문에 몇 번씩 얼굴을 바꾸고 속한 시간을 벗어나는 것이 ‘나’의 정체의 전부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흐름이라는 객체적 시간 속에서 주고받는 것의 스케치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의 정동체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인간’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이루는 것인 정동, 힘의 이동, 흐름들을 보내는 객체적 존재의 이야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어서 지구의 주인이나 주체로 존재하지 않고, 사물로서 놓인 객체로서 우연히 존재한다고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박수 소리가 들린다.
무신론자의 꿈속에 두 무릎으로 기어들어가 나는 기도를 한다. 주여. 저는 울고 싶습니다. 울고 싶은 마음으로 0에다가 0을 더하며 어깨를 들먹인다. 아멘.
그렇다면 그건 사실 지구에 작별을 고하는 건데.
*

나는 머리를 든다.
산산조각이 난 지구의들이 더미를 이루고 있다. 국경이 무너져 있다. 물이 새고 있다. 나의 무릎이 젖고 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사는 곳을 알아본다.
그래도 나는 숨을 쉰다.
그래도 여기에는 하나의 달이 뜬다.

*
더미를 뒤져
나는 파편들을 맞추어보고 있다.
지구의를 복원해보고 있다.
발이 저린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코에 바르며 나는 나의 역할을 맡을 신자의 마음으로 우러러 하늘을 본다. 저는 벌을 받고 있는 겁니까.앞으로 받게 됩니까.
그렇다면 그건 이미
실물 크기의 지구의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건데. (「복제지구의 어린양」)[각주:4]

 

 

아마도 ‘어린양’으로 불릴 수 있는 존재 ‘나’는 무신론자의 꿈속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는 모양이다. 박수 소리에 따라서 들어간다는 것은 신을 믿는 ‘어린양’이 박수 소리에 맞춰서 무신론자의 꿈으로 들어갈 때 어떤 행위가 시작되는 무대가 열리는 것이라 생각해보자. 무신론자의 꿈에 들어가서 기도를 한다는 것, ‘울고 싶은 마음’, 무너지는 마음이지 않을까. 신의 자리가 없는 곳에 들어가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언어의 지시 대상이 없는 곳에서 무용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건 사실 지구에 작별을 고하는 건데.”라는 목소리는 ‘어린양’과는 다른 위치에서 내려온 개입의 목소리로 읽게 된다.

   무신론자의 꿈은 ‘지구’라는 완결된 신적인 약속의 세계 바깥의 무대이다. 지구에 대한 생각을 복제하는 것은 ‘지구의’이고, 꿈은 재난 속에서 발생하는 국경의 무너짐을 발견할 수 있는 무대공간이다. ‘나’는 무신론자의 꿈속에 있기 때문에 ‘지구의’가 산산조각이 났을지라도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무신론자의 꿈에 바쳐진 희생양인 어린양은 자신이 생존하는 대신 ‘지구의’의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제 돌아갈 ‘지구’나 ‘지구의’는 없다. 이게 ‘벌’이라 생각을 하게 된다면, ‘지구의’의 죽음이 아니라 ‘지구’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탓이다. 하지만 무신론자의 꿈에서 조각난 ‘지구의’가 ‘지구’의 붕괴라 여기는 ‘어린양’의 착각은 지구를 다시 재활성화한다. ‘지구의’를 통해 지구와의 ‘어린양’의 배치가 우연적임을 깨달아야 하는 그 순간에서 다시 ‘지구’로 회귀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면 그건 이미/실물 크기의 지구의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건데.”로 표현되는 것이다. 

  위의 작품을 통해서 ‘지구의’로 표현되는 ‘지구’에 대한 전망이란 무신론자의 꿈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신해욱에게 있어서 ‘지구’라는 약속이 도저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일체로서의 상상이라는 것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이미 신해욱이 바라보는 지구는 산산조각이 나고, 국경이 무너지고 물이 새는 것이죠. 무신론자의 마음 속에 있는 일망의 희망 같은 것이 계속해서 지구를 되살리고 싶어하지만, 그러한 지구는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로 되돌릴 수 없는 균열상태임을 볼 수 있습니다. 

  「복제지구의 어린양」은 지구의 무사안일함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는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지구의 무한성의 종말에 대한 상상은 『무족영원』 작품집에서도 나타난다.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이사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옥광산을 지나
생태계를 넘어
늦었지 이미. 늦은 것이다. 그렇지만.
(중략)  
누가 밟은 것이 무엇이어서
어디까지 무너지겠다는 듯이
저절로 열리는 문과
저절로 닫히는 문과
(중략)
누가 버린 것이 무엇이어서
어디까지 사로잡히려는 듯이
구전되어오는 자연수와
무지개의 초월곡선과
누군가의 손가락을 빠져나간
어딘가의 모래와 예감의 간지러움과
열과 오를 맞추어
무소속을 유지하며 한 칸씩
지구는 둥글고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네 (「어디까지 어디부터」부분)[각주:5]

 

 

 

위의 작품은 역사라 불릴 수 있는 흐르고 있는 시간대인 ‘생태계’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면 또하나의 시간은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이사 행렬”이라고 말한다.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 생태계의 시간도 또는 이사 행렬의 시간도 이미 늦었다고 말해볼 수 있겠다. 누가 밟았고 누가 임계점을 넘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문이 열리고 과거의 문은 닫힌다. 자연수라든지 초월곡선이라든지 불리던 질서도 같이 어디론가 흩어질 예정이다. 어디까지 또는 어디부터 시작된 지 알 수 없는 가장자리로의 이동, 또는 가장자리의 이동이 이 작품이 호도하여 드러내는 것이지 않을까. 이 작품 외에도 「영구 인플레이션에서의 부드러운 탈출」도 이러한 역사 시간이라는 규격을 “여기까지”라고 말하며, “세계의 심장”을 건넨다. 

 

 

 

신해욱의 행성. 다시 생각하는 타자성 

  

  2025년 8월, 제주도에서 가야트리 스피박은 “우리는 이 행성에 내던져진 존재입니다.”라고 말했다. 제주도? 행성? 행성은 무엇인가? 섬도 행성인가? 이른바 ‘행성’이라는 단어를 비롯하여 지난 여름, 스피박은 스캔들이 되었다. 스피박을 향한 여러 정동의 발현 속에서 신해욱의 작품집을 다시 들여다본다. 뜨거운 여름, 한복판에서 여름의 가장자리를 들여다볼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스피박의 단언과 같이 신자유주의의 지구화 이후의 문제제기의 단위는 ‘행성’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행성에 내던져진 존재’인 우리는 지구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는 생각 안으로 걸어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성’이라는 말은 ‘타자성’에 대한 경험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행성’은 우리가 ‘지구화’라고 말했던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자본의 전지구화, 금융화 등의 현상과는 다른 위치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개념이다. 나아가 우리는 ‘내던져진 존재’로서 타자성의 위치에 있음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 ‘행성성’이 우리에게 건네는 전환의 지점이다. 역사학자 차크라바르티는 자연의 손상을 ‘인위개변적 기후변화’라고 설명한다. ‘인위개변적 기후변화’라는 생각은 지질학의 문제의식과 만나서 ‘인류세’라는 지질학적 연대를 제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지구에서 인간은 주인이 아닌 우연적인 존재라는 인식적 전환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인간 역사의 인간주의적’ 시각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으로 보도록 한다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행성’은 인간의 타자(성)됨을 급진적으로 밀어붙이는 용어가 된다. 

  이러한 밀어붙임에 신해욱을 겹쳐서 읽어봐야 한다. 『무족영원』이라는 작품집이 ‘지구’에서 ‘행성’으로의 개념 전환과 같이 시적 주체에서 객체로의 전환으로 가는 흩어짐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우리는 언제부턴가 우리도 모르게 쌓이고 무너지고 흩어진 것들임을 신해욱의 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시간성을 파괴하면서 나아가는 기록임을 신해욱은 또한 그 자리에서 기록한다. 

 

 

삼복염천에. 누가 삼각자를 들고. 무더위의 모서리를 찾아 헤매는 것 같습니다.
가자. 가까운 데로. 가장 가까운 데로. 더 가까이, 맨발로. 스텝을 밟고. 턴을 하고.
골목이 있다. 문이 있다. 문턱이 있다.
벽은 없다. 산은 높다. 들판은 넓다. 
발끝으로 서서. 누가. 삼각자로 잰 높이, 무릎걸음으로, 삼복염천에. 삼각자로 잰 길이. 삼각자에는 각이 있다. 눈금이 있다. 닮은꼴이 있다. 원점의 원점으로부터. 높이의 높음. 넓이의 넓음. 삶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영혼은 무기질로 이루어져 있다.
(중략)
넘어지는 것 같습니다. 누가. 삼각자로 재야 하는 기울기. 두 번. 세 번. 네 번. 삼각자가 더듬는 깊이. 힘을 준다. 다시 두 번. 다시 세 번. 짚이는 데를 짚고. 각은 날카롭다. 눈금은 치밀하다. 찾지 못한 깊이. 들킬 수 없습니다. 삼복염천에. 잘못 찾은 깊이. 삼각자에 찔려 경험론자의 경험이 대신 찢어지고 경험의 틈이 벌어지고
벌어진 틈으로 미지의 액체가 콸콸 흘러 흙이. 숲이, 습함이. 병듦이.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여름은 비참하게 길고 병듦이. 붉음이. 시듦이. 슬픔이,
보잘것없는 상념이, 건조불멸의 시름이, 어지러운 빈혈의 마음이.
깜부깃병에 휩쓸린 보리밭이. 개구리밥에 뒤덮인 연못이. 향토색에 찌든 자연이.
바람이 분다. 삼복염천에.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바람.
나무가 있다. 삼복염천에 이글이글 타 죽은 나무.
(중략)
삼복염천에. 누가 잡초를 움켜쥐고. 통곡을 하는 것 같습니다. (「파훼」 부분) [각주:6]

 

 

 

삼각자를 들고 무더위의 모서리를 찾아간다는 표현에는 어떤 생각을 해볼 수 있을까? 무더위 안에서 끝없이 오르는 습기의 자리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삼각자의 모서리는 겨울의 모서리보다 더 극한의 경험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끝없이 모서리를 찾아낼 수 있다면 이 더위는 끝없는 습도와 온도로 살아있는 것들에 영향을 미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누구’라고 하는 것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골목, 문턱, 벽, 산, 들판을 활보하면서 그 모서리를 찾아헤맨다. 삼각자로 잰 것들을 통해 모든 것에는 그것의 ‘각’이 있음을 확인한다. 만약 그 ‘각’이라는 더위의 어떤 부분들이 또는 기후의 어떤 부분들이 계속해서 인간에게 각인된다면 그 기후에서 인간은 쉽게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겨울의 매서운 각이 있듯이, 여름의 혹독한 습도와 온도의 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상이나 경험을 벗어난 “잘못 찾은 깊이”가 된다면, 우리 경험론자들은 경험의 틈이 벌어지게 되면서 내상을 입게 된다. 이 삼각자를 휘두르는 존재, 또는 삼각자라는 이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 극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사태가 머지 않았기에 통곡하는 것이 아닐까. 

  지진, 화재, 폭발, 전염병 등이 아니라 단지 삼각자의 예리한 각이 휘두르는 폭력으로 인해 사람들의 경험은 무화되고 병들고 비참하고 시들게 된다. 그 사소한 각이 갈피를 알 수 없게 한다는 것. 우리가 스스로 파괴하는 그 안에 이미 들어있음을 깨달으면서 신해욱의 시 안에서 ‘행성’을 발견하게 된다. 삼복염천에 나무는 타죽고, 호주의 나무가 타올라 산성화된 토양, 건조화가 심해진 나무들이 다 타버리게 되는 연쇄적인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지구’에서 삼각자 하나만으로 지구를 태워버릴 수 있다. 

  차크라바르티는  ‘지구’가 ‘행성’을 만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인위개변적 기후 변화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를 따르자면, ‘삼각자’는 ‘행성’을 만나게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비가 왔다 곡우였다
거름은 나무의 것
모이는 새의 것
우리는 먹이를 먹었다
자연의 가장자리에 들어
먹이는 우리의 것
우리의 먹이를 먹었다
촉촉하구나 촉촉하다
촉촉한 등은 개구리의 것
촉촉한 흙은 지렁이의 것
미끄러지며 목을 넘어가는
먹이는 우리의 것
누가 먹던 우리의 것
우리는 기분이 들떴다
우리는 잇몸도 들떴지
혀는 요망하고
보드랍구나 혀에 닿는
혀 밑의 부끄러운 것
곡우였다 흡족했다
거름은 나무의 것
삶은 자연의 것
못물은 모의 것
촉촉한 혀는 우리의 것
우리는 입술을 훔쳤다
우리는 입을 벌렸다
넘치는 못물에 대견한 마음을 비추며
혓바늘이 돋은 혓바닥을 자랑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전문)

 

 

 

‘시’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 나오는 것이기에 인간적인 무엇의 극치임에도 불구하고 신해욱 시인은 자신의 시가 ‘인간’의 목소리로 환원되기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그의 시적 주체가 인간이 아니면 무엇이어야 할까? 분명히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상상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 신해욱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의 자리이다.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를 일어보자면, ‘우리’의 일부인 화자가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는 ‘곡우’가 내리고 있고, ‘곡우’가 내린다면 먹이를 먹어야 하는 존재는 먹이를 먹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생태에 기대어 있는 ‘우리’는 누가 먹던 것을 먹는 “자연의 가장자리”의 존재이다. 누군가가 먹던 것을 먹는 “자연의 가장자리”는 미생물의 자리가 아닐까. 무엇인가가 먹고 그 남은 것을 먹어 자신의 세와 몸을 불리는 “자연의 가장자리”에 있는 객체를 통해 ‘곡우’의 이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횡단적 상상이 아닐까.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에는 어떤 정형도 있지 않다. 새에게는 모이는 새의 먹이, 지렁이에게는 흙, 나무에게는 거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가 먹고 남긴 것이 ‘우리’의 먹이인 곡우 속에서 “우리는 기분이 들떴다”고 하는 입만 있는 존재. 촉촉한 혀만 있는 존재가 나타난다. 이 세계의 나머지를 흡수하는 자연의 가장자리를 표현하면서 신해욱의 자연사는 객체적 존재와의 연결을 통해 ‘모이’를 먹는 다는 일이 비가 내리는 일과 연관됨을 보여준다. 

  우리는 못물을 마시며 또는 흡수하며 생태계의 가장자리가 ‘시’의 자리일 수 있음을 신해욱의 시에서 확인한다. 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그녀의 첫 시집 『간결한 배치』로부터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까지 계속된 모색의 여정에서 우리는 ‘미지’로 가는 헤엄을 해왔다. 그러나 그녀의 첫 시집 이후 2026년에 이르러 우리는 그 ‘미지’가 미리 만났던 ‘미래’였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신해욱을 믿어야 할까. 무신론자를 믿는 것만이 가능한 믿음일까. 자연의 가장자리가 끝나는 곳에서 신해욱의 타자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무참한 가속의 믿음을 다시 지워주길 기다린다. [각주:7]

  1. “미생물은 지금까지 대지 위에서 가장 풍부한 생명 형식이다. (중략) 바다는 지구 표면의 65퍼센트를 차지하며, 바닷물 1리터당 100억 개에 이르는 바이러스가 존재하므로 바다 전체에는 약 4x10³⁰개의 바이러스가 존재하는데, 그것들을 나란히 놓으면 천만 광년 거리에 이른다” 그에 더하여 미생물들은 “대지 위 생명 유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다에 떠다니는 플라크톤 개체군은 바이러스, 박테리아 고세균, 진핵생물로 이루어져 있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이신철 옮김, 『하나의 행성 서로 다른 세계』, 에코리브르, 2022, 66-67쪽) [본문으로]
  2. 제인 베넷, 문성재 옮김, 『생동하는 물질』, 현실문화, 2020, 61쪽.  [본문으로]
  3. 신해욱,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 10-11쪽.  [본문으로]
  4. 신해욱,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 28-30쪽. 
    [본문으로]
  5. 신해욱, 『무족영원』 문학과지성사, 2019, 29-31쪽. [본문으로]
  6. 신해욱, 『무족영원』, 문학과지성사, 2019, 16-19쪽. [본문으로]
  7. 신해욱,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봄날의책, 2024, 129-130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