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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Project/현대시 읽기

바깥으로부터, 행성으로까지 : 신해욱 시 읽기 (1)

by 인-무브 2026. 7. 20.

바깥으로부터, 행성으로까지 : 신해욱 시 읽기 (1)

 

 

 

 

길혜민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본 원고는 지난 2025년 강좌 <반성하지 않는 여성/시 읽기>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103번 국도에서: 오염, 지방성, 미생물들

 

  신해욱의 첫 시집인 『간결한 배치』의 <자서>는 “이곳은 희박하거나 과도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는 “바깥이 보일 것이다”라고 했다. 모리스 블랑쇼는 예술이 ‘바깥’과 관계하고 있다고 했다.[각주:1] 그런데 이때 ‘바깥’은 죽음의 경험과 가장 유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죽음’이 ‘바깥’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바깥’이 되는 ‘죽음’이 되려면 그것만의 맥락이 필요하다. ‘바깥’으로서의 ‘죽음’은 살아있는 세계와 어느덧 침범하는 ‘죽음’일 때 ‘바깥’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죽었을 때 우리는 ‘그가 바깥으로 갔다’라고 하지 않는다. ‘바깥’은 ‘죽음’과 같이 우리와 단절되는 동시에 그 행로를 알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여기에 있었던 힘에 대한 의문과 함께 ‘여기’에 남아있음이라 생각해보자. 이처럼 블랑쇼의 ‘바깥’은 어떤 물질성을 담보하는 공간적인 개념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절되는 동시에 여기에 남는 것은 공간적인 개념만으로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바깥’의 위상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신해욱 시인이 말한 ‘바깥’은 그의 작품 안에 있을 것이다. ‘바깥’은 언제나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불현듯 우리에게 다가오는 힘이기도 하다. ‘바깥’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때는 갑자기 다가온 ‘붕괴’, 실존적인 ‘재난’ 상태와 같지 않을까.

 

 

 

시야가 지워졌다.

나는 가파르게 정지했다.

비가 없지만
나는 젖어가고

돌아보면 까마득한 벼랑.
그리고 나에게는 등이 없다.

하룻밤쯤
이곳에서 묵어야 할 것 같다.

                    - 「103번 국도」 전문[각주:2]

 

 

“시야가 지워졌다”는 문장을 읽는다. 갑자기 눈이 멀었거나, 길에 있어야 하는 가로등이 갑자기 꺼졌다거나, 운전하고 있었다면 앞차의 테일라이트 또는 다가오는 차의 헤드라이트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일 수 있다. 이처럼 갑자기 시야가 지워지는 상황은 사고와 바로 연결되는 순간이다. 시야가 지워지게 되자 “가파르게 정지”하고, 비가 내리지 않아도 식은땀으로 젖어버린 화자. 이 화자는 “돌아보면 까마득한 벼랑”이라고 하며, “나에게는 등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 시야가 지워졌다는 상황과 연관될 것일 테다. 제목과 같이 “103번 국도”를 주행하고 있었다면, 그 가파르게 정지한 상황과 땀으로 다 젖어버린 몸은 더는 주행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한 것이다. 더 나아갈 수 없고, 이제까지와 같이 몸을 기댈 수 있었던 ‘직전’이라는 상황이 불분명해졌다. 이 조건이 ‘재난’이나 ‘붕괴’의 감각으로서 이 작품집이 품은 큰 그림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제까지 앞을 보장했던 길이 보이지 않는 사건. 그래서 전방도 후방도 없게 되어버린 붕괴. 길이 없기 때문에, 또는 전망이 없기 때문에 멈춰야 하는 103번 국도는 신해욱의 시집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신해욱의 자서에서 서술된 “이제 나는 뒤를 돌아본다.//바깥이 보일 것이다.”와 연결되며 103번 국도에서 마주한 길의 실종, 멈춤, 전망 없음이 곧 ‘바깥’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103번 국도」에 이어지는 작품 「某某(모모)」, 「모르는 노래」, 「가장 마른 사람」, 「오래된 익사체」, 「전복」,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103번 국도에서 시야가 사라진 사람 이후의 이야기이다. “모르는 노래가/내 입 안에 가득 고여 있어.(중략)그렇지만 이건 이미/내가 있기 오래전에 끝난 노래들.//나를 지우고/나를 흉내 내는 /무서운 선율”(「모르는 노래」)[각주:3], “그때부터 오늘까지/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오랜 부식을 증거하기 위해/당신의 그림자는 없고/길가의 고인돌만이 공들여 낡아갈 뿐이다”(「전복」)[각주:4], “모텔 첼로가 있는 오랜 벌판엔 이따금/낡은 짐승들이 배회하고 있었고/어두운 객실에서 당신이 죽을 때마다/인디언 인형을 사라져갔네 (중략) 당신의 죽음은 열두 번 계속될지니, 라는 낮은 속삭임 사이 (중략) 당신의 죽음은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었네/그리고 아무도 없었네”(「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각주:5]로 이어지는 작품들의 이음은 인간의 형상이 형해화 되는 시간의 흐름이라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103번 국도는 모텔 첼로로 이어지면서 형해화된 것들과 함께 존재하는 버려진 지방 국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모텔이 도시 중심부와 지구화하는 것들과는 상반된 형상을 보여주는 ‘바깥’의 장소로써 무대가 되어간다. 연이어 “모텔 첼로”의 내부가 소개되고, 시적 발화는 오염과 미생물에 대한 진지한 천착에서 이뤄지고 있다. ‘바깥’과 관련하여 모리스 블랑쇼는 ‘말’이 아니라 말의 잔향인 ‘메아리’, ‘웅얼거림’이 작가의 글쓰기라고 한다. 이 목소리는 청각적 효과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의미로 규정될 수 없는, 의미화에 실패한 소리이다.[각주:6] 이 웅얼거림은 언어의 구조물 내부에서 고유의 장소를 지니지 못하고 떠도는 것, 세계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강요된 모든 규범적 작동을 방해하는 것. 이러한 목소리를 타자성의 울림이라고 보자. 실제로 신해욱의 작품집은 일관적으로 ‘귀’가 시각을 대체하는 중요한 감각적 기표로 등장하기도 한다. 

 

 

 

제미나이가 생성한 103번 국도와 모텔 이미지

 

 

 

굴곡이 없는 물렁하고 끈끈한 거울에/ 바로 선 채로 몸을 반만 묻으세요./얼굴이 얼굴 속으로 들어가/귓바퀴가 포개지길 기다리십시오./ (중략) 등뒤의 축축한 세계는 앞으로 당신의 소유입니다. (「안내인 –102호」부분)[각주:7]


내가 움직인 것이 아니다/벽지의 어떤 무늬가 내 목덜미로/얼룩져 왔다//나를 가두기 위해 번식하며/귓속으로/입술 사이로/기어드는/차갑고 축축한 벌레들 (중략) 얼마쯤 파묻힌 걸까/내가 움직인 것이 아닌데/안팎에서 어떤/지독한 회전이/그리고 잠기는 소리가. (「변신 –107호」 부분) [각주:8]
 


생각 속에서 어떤 손이/불쑥 나타나/이유 없이/오래도록/내 얼굴을 만진다.//나는 자꾸 사실 바깥으로 벗어나고 있다. (「벽 –B110호/B111호」 부분) [각주:9]

 

 

인용 작품들은 “모텔 첼로”라는 챕터 안에 있는 (말하자면)연작시에 해당한다. 「안내인 –102호」에서는 시각적 세계인 거울 안에서 ‘귀’의 효용만이 남는 동시에, 촉각적 세계로서 축축한 습기와 미생물의 세계가 지배적인 감각을 제시한다. 「변신 –107호」에서는 ‘나’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다. 이 상상은 ‘나’가 움직일 수 없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벽지의 어떤 무늬”, “얼룩”이라는 것을 알린다. 인간의 생물성이 아니라 미생물성에 기댄 ‘나’의 존재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지독한 회전과 잠기는 소리를 통해 위치성을 재조정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벽 –B110호/B111호」에서는 앞의 ‘나’가 평면에 잠식당하고 있는 과정을 통해서 “사실 바깥으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에 해당한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한 지방 건물의 노쇠의 이야기라 보기에 충분하다. 이 노쇠의 이야기는 건물을 다녀가면서 남긴 인간의 이야기가 자리를 잃게 되는 것과 동시에 진행되는 미생물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역사가 아니라 흔적들, 서로 다른 저마다의 미생물이 경합하면서 모텔의 시간으로 확장되는 이른바 ‘곰팡이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해욱의 작품이 가리키는 것이 ‘바깥’이라는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면, 인간의 이해가 닿을 수 없는 얼굴은 무엇인가라는 사유에 우리는 가까워지게 된다. 나아가 2005년에 우리에게 도착했던 신해욱의 상상력은 인류를 중심으로 두는 상상의 무능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포스트 휴머니즘의 상상력이 인간의 주체상을 재고하는 것이라면 신해욱은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 형상을 중심에 두지 않은 상상력의 제시를 시도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류중심주의를 버리고, 다른 행위자들의 집합과 더 복잡한 정서적 반응을 추구해보는 것이 포스트휴머니즘의 도전이라고 할 때[각주:10], 인간성의 바깥에 있을 것 같은 ‘계’와 이 세계는 어떻게 같이 구축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하는 것이 신해욱의 도전이 아니었을까. 전승민이 평한 것처럼 신해욱의 시는 대상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보다는 대상 자체로부터 떠나는 것.  더 복잡한 반응으로 향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암행(暗行)이지 않을까. [각주:11]

 

 

 

나-오염, 나-투명

 

  “모텔 첼로”는 지하의 암실에서부터 1층에서부터 3층까지 제시되는 건물이다. 각 층에서는 모종의 사건들의 결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건물에 대해 서술되고 있는 시간의 불분명성은 인간의 형상에 대한 새로운 숙고를 요청한다. 

 

변경에선 언제나 당신이 중심이다./얇은 얼굴들이 떠돌다가/겹겹으로 당신에게 스미고/오랜 시간을 두고 얼굴선은/조금씩 부드러워진다.(중략)조금씩 부드러워지는 얼굴들은/이 방의 습기를 흡수한 채로/깨끗하게 말라간다//보관은 내게 맡기시길/가운데 서랍엔 잘 접힌/얼굴로만 가득하니까. (「이방인 –101호」 부분) [각주:12]

굴곡이 없는 물렁하고 끈끈한 거울에/ 바로 선 채로 몸을 반만 묻으세요./얼굴이 얼굴 속으로 들어가/귓바퀴가 포개지길 기다리십시오./ (중략) 등뒤의 축축한 세계는 앞으로 당신의 소유입니다.  (「안내인 –102호」 부분) [각주:13]


내가 움직인 것이 아니다/벽지의 어떤 무늬가 내 목덜미로/얼룩져 왔다//나를 가두기 위해 번식하며/귓속으로/입술 사이로/기어드는/차갑고 축축한 벌레들 (중략) 얼마쯤 파묻힌 걸까/내가 움직인 것이 아닌데/안팎에서 어떤/지독한 회전이/그리고 잠기는 소리가.(「변신 –107호」 부분)  [각주:14]


생각 속에서 어떤 손이/불쑥 나타나/이유 없이/오래도록/내 얼굴을 만진다.//나는 자꾸 사실 바깥으로 벗어나고 있다. (「벽 –B110호/B111호」부분) [각주:15]

 

 

“모텔 첼로”의 101호는 계속해서 스치는 얼굴들이 스미는 곳이다. 스민 얼굴은 낡아가는 모텔의 자국이다. 언젠가는 새로운 것이었던 건물이 이방인이라는 흔적을 흡수하고, 그 흡수한 자국들이 이 모텔의 생애의 무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모텔의 ‘자연성’을 이루고, 그것을 켜켜이 쌓은 것을 “서랍”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안내인 –102호」는 ‘안내인’이라는 제목이 있으나 인격으로서의 ‘안내인’이라기보다 이 모텔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목소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목소리는 어떻게 모텔의 무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모텔은 어떻게 무늬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상상해보자면, 거울에 자신을 비추는 존재, 거울에 비친 존재가 끈끈하게 연결된다. 비춘다는 것은 상호간의 필연적인 연결성을 확인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거울은 끈끈해진다. 얼굴을 가진 존재는 자신의 반영성을 거울에서 확인하고, 하나의 세계가 자신의 얼굴과 겹쳐지면서 또는 그것을 반영하면서 존재함을 알게 될 것이다. ‘안내인’은 그렇게 세계가 어떻게 얼굴과 함께 다른 세계와 연결이 되는지 알려주며, 이는 “등뒤의 축축한 세계”와도 연결된다. 축축한 세계란 이미 낡아가고 있는 모텔이라는 시간-장소이다. 동시에 이방인들이 흔적을 남기고 무늬를 만든 이 모텔의 생애와 장소성이 축축한 세계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으로 읽는다면, “등뒤의 축축한 세계는” 이 거울의 자연이며, 그러한 ‘낡음’의 생성이 목소리를 통해 전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안내인’이다. 더하여 카프카의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변신 –107호」은 더 이상 인간의 형상을 가지지 못한다는 느낌, 인간성의 해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우리가 국도를 지나가다가 스친 자연처럼, 쇄락한 건물을 펼치는 103번 국도이다. 그 길은 인간적인 것의 형해화 과정, 탈-인간화 과정을 알고 있다. 모텔 건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도 “벽지의 어떤 무늬가 내 목덜미로 얼룩져”가게 된다. 한때는 인간의 무늬를 스미게 했던 이 벽지는 곰팡이나 자연의 무늬가 얼룩지는 곳이다. 건물을 가두는 것은 벌레나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이며, “모텔 첼로”는 죽은 공간이 아니라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생명의 무늬가 새겨지면서 파묻히고, 생명 안으로 잠길 수 있는 조에의 공간이 되어간다.[각주:16]

  「벽 –B110호/B111호」에서의 “나”는 ‘바깥’의 목소리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런 점에서 제목인 “벽”은 이 목소리의 주인일지도 모른다. 벽은 생각한다. 벽은 자신의 손을 부른다. 벽의 얼굴을 만지면서, 벽은 자신이 모텔이라는, 어떤 내부라는 사실의 바깥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이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진실이 아닐까. 혼종의 순간, 이젠 자신이 건물이라는 내부성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세계에 속하게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모텔 첼로”가 지워가는 것이 인간의 무늬들일 때, 이 챕터의 작품에서 구문으로 존재하는 ‘나’는 나-오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신체가 벌레들에 의해서 몸이 잠식당하거나, 쇄락과 부패의 무늬들로 장식되어가는 ‘나’는 모두 ‘나’가 ‘오염’이라는 또는 ‘나’가 하찮은 생명성과 연결되는 ‘조에’적인 것에 접속된 채로 구문을 완성하고 있다. 그렇기에 “모텔 첼로” 챕터는 ‘나-오염’의 신체가 내는 겹침의 발화이다. ‘나’는 굉장한 이물감을 가진 미지가 될 수도 있다. 또는 ‘나’는 연결성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각주:17]

  신해욱의 작품에 대한 포스트휴먼 이론적 읽기와 접근은 초기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집 『무족영원』은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집이라 분석되고는 한다.[각주:18]신해욱의 시가 “기계 기술을 통해 개조(변형)되는 인간의 문제를 부각시키고”, “다른 종의 유전자가 이식된 신체나 다른 존재의 기억을 학습하는 기계전 존재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고 읽을 수 있다는 것. 인간이 인간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종의 유전자와 얽혀 있는 생명이 되면서, 인간에 종속되지 않음으로써 단일한 인간종에서 벗어날 출구라는 체현체가 되는 것이 『무족영원』이 보여주는 어떤 생명이라는 것이라면, 인간의 자국을 지우는 곰팡이에 대한 천착은 이미 그의 시집 초기에서부터 보여준 인간 바깥에 대한 극한의 사고실험이다. 

  ‘나-오염’이라는 구문이 가능한 것은 ‘나’를 나 아닌 것과 연결하여 읽는 방식이라면, ‘나-투명’도 가능하다.  「동구 밖」에서는 가시나무의 아래에서 어떤 손금이 되는 투명성이 나타난다. 이를 인간의 손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는 몸의 깊이가 상실되는 일이 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바람이 불 때, 손금은 손등에 닿기 때문이다. 가시나무의 뻗어나가는 가지와 뿌리의 뻗어나감이라는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주며, 거리감이 상실된 신체성을 제시한다. 신체를 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은 거리감을 상실하는 일이될 수 있기에 ‘나-투명’의 구문은 ‘나-오염’과 마찬가지로 연결에 대한 횡단적 상상력의 표현이 된다. 

  이와 같은 ‘바깥’의 이야기는 극지로 가는 실험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문학적인 인식론의 돌파구가 된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당대의 새로움이란 시야가 지워졌을 때, 우리는(문학으로) 무엇을 하고, 그 인간의 상실 대신에 어떤 문학적 유희를 찾을 수 있는가에 가닿기도 하면서 다른 문에 접속하게 된다. 이는 신해욱의 ‘나’의 여러 연결성을 만드는 성실함의 조건을 이해할 수 있게도 한다. ‘재난’을 어떻게 새로운 인간을 사유하는 계기로 둘 것인가. 그때 사라진 문학적 구문의 ‘나’는 해체되면서, 새로운 구문을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이 기존의 서정의 자리를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자리이다. 

 

  1. “이곳은 희박하거나 과도하다.//몇몇의 얼굴을 스쳐 갈 것이고/작은 학교와 구멍가게와 오래 고인 연못을/또 골목의 집들을 보게 될 테지만/그러는 사이 어쩌면/숨이 막힐는지도 모른다.//이제 나는 뒤를 돌아본다.//바깥이 보일 것이다.” [본문으로]
  2. 신해욱, 『간결한 배치』, 민음사, 2005, 14쪽.  [본문으로]
  3. 신해욱, 같은 책, 2005, 16쪽.  [본문으로]
  4. 신해욱, 같은 책, 2005, 21쪽. [본문으로]
  5. 신해욱, 같은 책, 2005, 22쪽. [본문으로]
  6. 서지형, 「모리스 블랑쇼와 탈주체의 글쓰기 -‘목소리’와 ‘불안’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5쪽.  [본문으로]

  7. 신해욱, 앞의 책, 2005, 26쪽. [본문으로]
  8. 신해욱, 앞의 책, 2005, 30-31쪽. [본문으로]
  9. 신해욱, 앞의 책, 2005, 38쪽.  [본문으로]
  10. 로지 브라이도티, 김재희·송은주 옮김, 『포스트휴먼 지식』, 아카넷, 2022, 26쪽.  [본문으로]
  11. 전승민,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봄날의책, 2024, 132-133쪽. [본문으로]
  12. 신해욱, 앞의 책, 2005, 25쪽. [본문으로]
  13. 신해욱, 앞의 책, 2005, 26쪽.  [본문으로]
  14. 신해욱, 앞의 책, 2005, 30-31쪽.  [본문으로]
  15. 신해욱, 앞의 책, 2005, 38쪽. [본문으로]
  16. “모텔 첼로”는 비오스에서 조에의 모델로 넘어가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제안한 ‘비오스’와 ‘조에’의 형상을 비유한 것. 로지 브라이도티는 이 개념에 착안하여, 비오스는 인간에 특권화된 생명을 가리킨다면, 조에는 탈-인간화된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 인간-아닌 것의 생명을 가리키는 개념. 이처럼 조에는 인간 안에서의 새로운 균열들, 인간과 인간-아닌 것의 새로운 연결들을 이해하는 개념이 될 수 있다.  [본문으로]
  17. 인간-아닌 행위자들을 끌어들이는 횡단적 동맹을 ‘포스트휴먼 주체성’이라고 한다. 이는 포스트휴먼 주체가 지구 ─땅, 물, 식물, 동물, 박테리아─와, 기술적 행위자들 ─플라스틱, 전선, 셀, 코드, 알고리듬─과 동시에 관계 맺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로지 브라이도티, 앞의 책, 78쪽 참조) [본문으로]
  18. 김순아, 「현대시에 수용된 포스트휴먼기술 담론과 비주체의 윤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제104집, 202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