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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질문들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장진범 | 사회학도

   이 글은 2011년 10월 14~16일 미국 뉴욕 쿠퍼유니온대학에서 버소 출판사가 조직한 국제학술대회 <공산주의, 새로운 시작?>에서 에티엔 발리바르가 발표한 'Communism as Commitment, Imagination, and Politics'(이 발표문은 버소가 2013년 출간한 The Idea of Communism 2: The New York Conference에 같은 제목으로 수록되었다)을 증보한 불어본('Les Questions du Communisme') 결론 부분을 발췌번역한 것이다.

  앞서 공개한 바 있는 논문 「공산주의와 시민성: 니코스 풀란차스에 대하여」 결론 부분에서 발리바르는 “모든 정치 운동,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그 급진성으로 인해 서로 환원 불가능한 해방의 이해관계들의 복수성과 다양성을 “대표한다”, 곧 실천한다.”고 말한 바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발리바르의 최근 해석의 핵심 논지 중 하나를 집약하는 결정적인, 그러나 너무 압축적인 이 문장의 논지를 상술한 것이 'Les Questions du Communisme'의 결론 부분이다. 특히 해당 부분에서 발리바르는 맑스·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 2부 초입에 나오는 ‘공산주의자들은 별도의 당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문구를 재해석하는데, 이 재해석 역시 여기에서 처음 제시된다. 논문 전체 중 해당 부분을 발췌번역하여 우선 소개하는 까닭이다.

시작할 때 언급한 세 번째 질문에 관해, 끝으로 몇 마디 해 보자. 정치적 노선이나 계획 같은 무언가를 불러일으킬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차라리 ― 내가 보기에는 중요한 어감 차이인데 ― ‘우리가 하는 것’이라는 질문이 그것인데, 여기서 우리란 ‘세계의 변혁’의 계기들로 만들고 싶은 정치적 투쟁들과 과정들에 가담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말한다. 어떤 갈래genre의 활동이나 지향성이 우리의 것인가. 무엇이 우리의 ‘방법’인가.

나는 아주 간단한 고찰에서 출발할 것인데, 이는 ‘관념론/이상주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실재론/현실주의’에 속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고찰은 파도바 대학에서의 내 발표에 이어 로산다가 제안한 관찰에 부합하는데, 로산다의 관찰은 세기적 투쟁과 참여의 최전방에서 보냈고 이념에 대한 불굴의 충실성과 동시에 실천/관행에 대한 비타협적이고 비판적인 명석함을 특징으로 하는 그녀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정치적 경험에 입각한 것이다. 단지 공산주의자들의 저 고귀한 욕망에 도달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규정된 사회적 상황에 맞서고 그들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정치적 대안들 속에서 ‘입장을 정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예컨대, 일국사회주의에 ‘찬성할지 반대할지’, 반파쇼 인민전선에 ‘찬성할지 반대할지’, 민족해방전쟁들에 ‘찬성할지 반대할지’, 인도주의적 내정간섭 권리에 ‘찬성할지 반대할지’, 사회국가의 제도들에 ‘찬성할지 반대할지’, 핵에너지에 ‘찬성할지 반대할지’, 유럽연방주의에 ‘찬성할지 반대할지’, 정교분리에 ‘찬성할지 반대할지’ 등), 따라서 특정한 실천적 투쟁들에 참여하고 이를 지지하며 심지어 ‘지도’하거나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 특히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공산주의자들로 포함시킨다면 ― 오직 사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정의상 공산주의자들은, 결국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또는 [실현불가능하지만] 원하는 것)은 알지만, 자신들이 하는 것은 단지 매우 불완전하게 알거나, 그 효과와 의미를 사후적으로 알아차린다…. 정의상 결코 도래하지 않을 ‘더 좋은 시기’(왜냐하면 실제 역사의 고유한 속성은 기대를 좌절시키는 것, 그리고 상상력의 도식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를 기다리면서 내면적인 망명지로 피신하는 것이 주체적 참여의 논리와도, 역사적 예견의 지적 절차와도 절대적으로 모순을 빚을 것이라는 데 문제의 첨예함이 있다. 그리고 정치적 질문의 용어를 그것이 권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강제’하겠다고 우기는 것은, 사악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소로운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지배의 구조를 파괴하는 운동일 뿐만이 아니라, 잔혹과 극단적 폭력의 형태들에 저항하는 운동이기도 한 해방과 사회변혁의 정치운동[각주:1]의 모순들이나 ‘내재적 차이들’을 전개·해석·급진화하거나 (다시 바디우를 모방해 말하자면) ‘강렬화intensifiées’시켜낼 수 있는 입장들이나 관점들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이 투쟁들과 갈등들, 운동들에 개입하는 정치적 양상들을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나, 경향/분파를 막론한 선배 공산주의자들의 역사에서 교훈을 끌어내는 가운데)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는, (‘다수파적’이든 ‘소수파적’이든) 극단적인 중앙집중화에서부터 봉기적 사건들의 극단적인 다변성多變性과 현 시기 이러한 사건들의 ‘소멸’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상황에 따라 이미 모든 것이 다 시도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논점에 관해서도 입장을 정해야 한다.

그래서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의 마지막 장[각주:2]을 다시 읽으면 극히 흥미로운데,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이 보기에 직결되어 있는 두 가지 사항을 동시에 강조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공산주의자들은 별도의 당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것, 또는 괜찮다면, 그들이 형성하는 ‘당’은 기성 질서에 맞서 싸우고 세계의 변혁을 추구하는 현존하는 당(파)들의 공통 이익과 ‘전체/일반 운동mouvement général’을 구현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당들’ 대신에, 아마도 오늘날에는 훨씬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해방적인 목표들을 향한 ‘운동들과 캠페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3]. 명확히 하자면, 권리들을 요구하든, 지배들을 다시 문제삼든, 당들과 조직들과 운동들과 캠페인들이 있어야 하지만, 공산주의자로서의 우리는 그들에 맞서 경쟁하려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과업은 다른 곳에 있고, 당들과의 관계는 수직적이기보다는 횡단적이다.

『선언』의 두 번째 발상은, (『선언』이 공산주의 정치의 주체로 만든)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나의 계급을 이루는 건 분명하지만, 이 계급이 역설적인 의미, 본질적으로는 전도된 의미의 계급이라는 사실이 ‘전체/일반 운동’의 수렴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그리고 그에 앞선 사회들)의 모든 다른 계급들처럼 자신들의 특수 이익을 부과하려 들면서 자신을 정의(하고 분리)하는 대신,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오로지 그것이 부정하는 대상에 의해 자신을 정의한다는 것인데, 이 대상은 한편으로 (일정한 법적 형식으로서만이 아니라, 어떤 이들의 노동과 활동을 다른 이들이 전유하는 원리, 따라서 수탈 또는 ― 오늘날 데이비드 하비가 말하듯 ― ‘강탈’하는 원리로서의) 사적 소유[각주:4],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적 편견이다(보다시피 이는 민족주의적 편견과 민족적 이념 자체 또는 [민족적 이념의] 절대적인 것으로의 격상 사이의 구별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구별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미해결 상태로 내버려 둔다). 이 같은 근거 위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전 세계 수준에서 단결한 ‘공산주의자들’과 ‘프롤레타리아트’는 유일하고 동일한 집단적 주체, 또는 이 주체를 낳는 다형적 역량을 가리키는 두 가지 명칭이 될 따름이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전의 시론에서 내가 주장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이 언표행위의 기반이 되는 메시아적 확신―여기에서 역사적 측면과 예언적 측면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일체를 이룬다―을 잃었다[각주:5]. 하지만 투쟁들과 봉기들의 마주침 및 공통 공간이라는 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바로 이로부터 내가 끌어내는 결론이, ‘공산주의자들은 별도의 당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발상을 되찾고 재정식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 발상에 나는 의도적으로 도발적인 다음과 같은 형태를 부여할 것이다[각주:6]. 아마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특정한 조직들(그리고 다소간 조직된, 특정한 캠페인들)에 참여하고, 조직된 투쟁들과 캠페인들과 운동들에서 주도성을 발휘하려고 특히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구체적 목표에 따라 조직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심지어 교회와 군대, 국가조차 조직 형태의 하나로 포괄될 수 있다), 조직들이 없다면 정치도 없기 때문이다. 코뮌과 여타 자주관리 전통들의 모델에 영감을 얻은 ‘평의회’(이와 관련하여 로산다는 평의회의 소멸이 소비에트의 비극에서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정당하게 상기시킨다) 자체도 분권화된 조직이다(하지만 그 강제력이 반드시 덜한 것은 아닌데, 평의회의 가능조건 중 하나는 늘 참여자 간 높은 정도의 정서적 ‘융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어떤 본래적 의미의 조직도, 심지어 ‘비밀’ 조직도 구축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것은 차라리, 현존하는 조직들, 즉 우리가 구성원 및 활동가로 속한 조직들 자체를 흔들어놓는 것désorganiser, 아니 탈-조직하는 것dé-organiser이다. 이는 물론 이들 조직을 내부에서 약화시키거나, 전쟁의 최고조에서 우리의 친구와 동지를 ‘배신’하거나 ‘저버릴’ 궁리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집의 형태, 동맹의 타당성과 실행가능성, 서로 다른 유형의 투쟁들과 운동들 간의 간극이나 (‘친구’와 ‘적’의 상상계로 투사되는 경향을 늘 갖기는 하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양립불가능성의 필연성을 늘 문제삼(고 반성에 부치)고자 노력한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완수하고자 하는 기능은, 이것이 긍정적/적극적 참여의 일부를 이루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부정적’이다.

이 기능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명명할 것인가?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른 영역[각주:7]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역에서도, 프레드릭 제임슨이 ‘역사적 이행’을 이론화함에 있어 맑스와 베버의 사상적 유사성을 궁리하여 이끌어낸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용어를 전유하고자 했다[각주:8]. 이 우유寓喩/allégorie에 호소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다. 특히 지젝도 그렇게 한다. 이 우유는 시간성이나 역사성의 수사로 해석할 수 있지만, 공간성과 소통, 헤테로토피아의 수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리적일 수 있지만 또한 문화적이거나 (국민)정치적일 수도 있는 경계들을 가로질러 돌발하고 사라지는 여행자/나그네가 아니라면, 또는 번역불가능한 해방의 ‘방언들’ 및 양립불가능한 조직의 논리들 사이에 자리잡은 번역자가 아니라면, 무엇이 ‘사라지는 매개자’이겠는가? 이를 달성하기 위해 그[사라지는 매개자]는 따라서 수시로 사회나 공간 내 자리를 바꿔야 하는데다, 언어를 바꾸거나 심지어 이름을 바꿔야 한다. 게다가 나는, 이름을 바꾼다는 발상을 논하는 것, 그리고 이름을 바꾸는 것과 ‘[이름을] 부인하는 것’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오늘날 ‘공산주의 정치’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관련하여 중요할 것이라고 믿는다. 대개(아마 십중팔구) 이런 곳에서 공산주의 정치가 그처럼 강력하게 선포되지 않는가? 또한 대개 공산주의 정치는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장소들과 형태들에 깃드는바, 이 때문에 사람들은 공산주의 정치를 보지 못하고 공산주의 정치가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믿는다…. 대개 공산주의 정치는, 실제로는, 사람들이 믿거나 말하는 것보다 덜 ‘희귀’하거나 덜 ‘보기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 우유의 이론적 이점을 모두 간직하는 가운데, 나는 이 우유와 분명 친화적인 또 다른 참조점 역시 염두에 두고 있다(비록 이 참조점이 향하는 것은 다른 논리로, 여기에서는 이론, 그러니까 지성과 합리적 예상이 알다시피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말이다). 알튀세르가 ‘철학자들’에 대해 말했던 것을 떠올려 보자. 그에 따르면 철학자들의 운명은 ‘개입 속에서 소멸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개입은 ‘대상’의 생산이나 인식 자체가 아니라, 분계선의 전위나 차이의 재획정이며,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정치적 질문/과제의 오랜 용어들이 ‘변경’되기 때문이다.[각주:9] 사실 여기에서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공산주의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더 심원하게는 그 철학적 기능이라는 견지에서 고찰된 공산주의자들 그 자체였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오직 이 ‘소멸’만이, 그들의 개입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효과적이라는 것은 인정받는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을 (그 귀결들을 펼쳐내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영원히 애쓰는) [공산주의적] 가설에 대한 충실성에 따라 식별하는 관념과 외양상 아주 멀리 있다. 양자의 실천적 효과들이 반드시 아주 다르다는 것은 아니다. 정치에서 늘 그렇듯, 어찌 될 것인지는 정황과 입장 채택, 세력관계와 반경향에 달려 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준거하는 저작의 계통은 바뀌었다. 플라톤이나 성 바울보다는 마키아벨리와 파스칼로…. 하지만 앞서 나 자신이 말한 것과 관련해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여기서 문제는 아마도 해석의 차이라는 점 역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상이한 두 해석]은 하나의 동일한 현안actualité 내부에서의 두 가지 주체적 입장들이다.



  1. 따라서, 내가 다른 곳에서 제안했던 명칭에 따르자면, ‘시민다움’의 운동들이다. E.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ouvr. cit. [일부 국역: 난장, 2012];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in La crainte des masses. Politique et philosophie avant et après Marx, Editions Galilée, 1997 [국역: 도서출판b, 2007]. [본문으로]
  2. [옮긴이] 정확히는 『공산주의자 선언』 2부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시작 부분이다. [본문으로]
  3. 운동과 캠페인의 구별을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제안한 사람은 리처드 로티이다. Richard Rorty, 'Movements and campaigns' (1954), Achieving Our Country,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재수록), Appendix, 111~124. [본문으로]
  4. David Harvey: The New Imperialism,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국역: 한울, 2005] [본문으로]
  5. Cf. Etienne Balibar, 'Remarques de circonstance sur le communisme', Actuel Marx, n° 48, septembre 2010. [옮긴이: 이 글의 번역본 역시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다.] [본문으로]
  6. 적어도 특정 전통에서 보자면 그런데, 이 전통에는 혁명당 이념에 관한 ‘스탈린적’ 변종은 물론 ‘그람시적’ 변종도 속하는바, 양자는 역사적으로 분해된 레닌주의의 두 지류 같은 것이다. [본문으로]
  7. 세속주의의 영역이 일례인데, 관련하여 세속주의가 세계시민주의cosmopolitisme와, 따라서 공산주의와 정말로 구별되는 것인지 새로이 자문해야 할 것이다. cf. Etienne Balibar: Saeculum. Religion, culture, idéologie, Editions Galilée 2012. [본문으로]
  8. Fredric Jameson: "The Vanishing Mediator, or Max Weber as Storyteller [1973]", in The Ideologies of Theory, Essays 1971-1986, Volume 2, Syntax of History, Routledge 1988, 3-34. 제임슨의 분석에서 비교하는 두 지점은 근대 부르주아 국가의 구성에서 자코뱅(과 공포정치)의 기능에 대한 맑스의 분석, 그리고 유럽의 기업자본주의 구성에서 칼뱅주의의 기능에 대한 막스 베버의 해석인데, 양자의 공통점은, (구 질서가 신 질서를 ‘분만’함에 있어 필수적인) 언어, 정치적 의식, 제도적 형태들 모두가 늘 구 질서의 구조들에 의존하고, 따라서, 알튀세르가 말했던 것처럼, ‘개입 속에서 소멸’할 운명이라는 점이다. [본문으로]
  9. L. Althusser, Lénine et la philosophie (1968) [국역: 그린비, 2008]. Cf. mon commentaire dans Ecrits pour Althusser, La découverte, 1992 [국역: 이론, 199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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