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와 '공산주의'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 서영표 | 사회학자
이 번역은 (‘『『자본』을 읽자』와 『마르크스를 위하여』: 50년 후’라는 주제로 기획된) CRISIS AND CRITIQUE Volume 2, issue 2(2015-11-23)에 첫 번째 글로 실린 에티엔 발리바르의 'Althusser and "Communism"'(조셉 세라노(Joseph Serrano) 번역)을 기본 대본으로 하되, 이 글의 원문이자 (‘알튀세르, 25년 후’라는 주제로 기획된) la pensée 382 (Avril/juin 2015)에 역시 첫 번째 글로 실린 'Althusser et «le communisme»'을 참고하였다.
영역본 초록
이 논문은 알튀세르와 공산주의의 관계, 즉 그가 공산주의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과 더불어 그 관계의 수준과 심급도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알튀세르 자신에 의해 이해되었고 이론화되었던 공산주의의 가능성들을 탐색한다.
주제어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이론, 정치
나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 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통지의 성격을 갖는 몇 가지 전제조건을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첫 번째는, 지금부터 언급하려는 역사를 외부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에는, 내가 이 역사에 너무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다. 최근 니콜-에디트 테브난(Nicole-Édith Thévenin)이 말한 것처럼, 주체가 대상의 일부로 얽혀 있다는 것이 장점일 텐데, 이는 단지 객관성에 대한 염려에 그치지 않는, 진실에 대한 이해관심을 의미한다. 단점으로는 이 질문에 대한 나의 관념이 피할 수 없이 부적합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나의 관념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단편적이고 혼동된’ ‘1종의’ 인식이라는 뜻인데, 대부분 기억에 의존하고 있고, 특히 나 자신이 몇몇 사실과 사건의 동시대인이던 까닭에 간직할 수 있는 착각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이들 사실과 사건 대부분이 나의 통제에서 빠져나갔으며, 아마 늘 빠져나가는 중일 것이다. 무엇보다 알튀세르의 여러 행적, 의도, 게다가 강박이 그렇다. 1961년부터 그의 사망 시[1990년]까지 나는 알튀세르의 학생이었고 가까운 친구였지만, 그를 속속들이 알던 것은 전혀 아니며, 개중에는 그의 정치적·철학적 저의 일부도 포함된다. 막대한 분량의 유고를 포함한 출간된 문헌들은 나의 불확실함을 부분적으로 규명할 따름이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문서고에 있는 자료들을 연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억은 방해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두 번째 전제조건이다. 알튀세르와 ‘공산주의’의 관계에 대한 모든 성찰은 정의상, 역사 속에 기입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서의 공산주의가 무엇이고 [과거에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우리의 현재적 생각에 준거하지만, 동시에 이 생각을 밝히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찰은 알튀세르 자신의 공산주의관에 토대를 두면서도,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공산주의관을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두 가지 생각, (각각 진화 중인) 우리의 생각과 그의 생각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어긋남(décalage)이 있으며, 이는 우선 시간적 어긋남이지만 결국 지적 어긋남으로 이어진다. 알튀세르에게 있어 ‘운동’(이 용어의 함의에 관해서는 후술할 것이다)으로서의 공산주의는 현재 속에서, 라이프니츠가 말한 것처럼 동시에 ‘미래를 잉태한’ 현재 속에서 스스로를 사고했다. 이 현재가 혼탁하고 불확실하며 모순적일수록, 현재의 실재성은 더욱 뚜렷해졌고 어떤 면에서는 감각되기까지 했는데, 이는 모순이 현재의 진정한 특징으로 간주될 수 있었고, 심지어 현재가 담지하고 있을 미래의 양상들을 특정하는 데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에게(여기에서 ‘우리’라는 순진한 외양은 독자들을 구속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당파성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공산주의는 현행적 운동이 아니라, 기껏해야(하지만 이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간난신고를 견디는 희망, 즉 이념이나 주관적 신념이다. 1989년을 전후한 시기, 우리가 목격했거나 상속한 역사의 ‘의미/방향’(sens)은 공산주의를 향한 ‘이행’, 어쨌든 마르크스주의가 상상한 형태의 이행이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비록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내건 단수 또는 복수의 운동과 정치가 역사에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긴 했지만, 가령 세계의 권력관계와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단계 및 새로운 헤게모니를 준비하는 등, 그 목표에 비추어 볼 때 완전히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공산주의가 기입되어 있는 시기를 [공산주의의] 쇠락과 해체가 가속화된 시기이자, 당시의 국지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모순들’이 [쇠락과 해체의] 전조였을 것이라고 회고적으로 해석하는 한편, (대문자로 된) 노동자운동(Mouvement Ouvrier)과 마르크스주의 이론(Théorie Marxiste)의 융합이 비가역적 성격을 지녔다거나, 제국주의가 단말마 단계에 접어들었다거나, 대중들을 사로잡고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무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알튀세르가 반복적으로 확언한 것을 죄다 비장한 착각이라고 정반대로 기재하고 싶은 강력한 유혹이 생겨난다. 1978년 베니스에서 발표한 문헌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에서조차, 곧 마르크스주의는 자기 자신의 역사를 이해하고 자신이 역사에 편입된 고유한 방식을 이해할 능력이 없었으며, 그가 보기에 이 같은 무능은 외인적인 한계나 단순한 ‘부족’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과학적 포부의 핵심부에 타격을 준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문헌에서조차, 알튀세르는 이 위기의 발현(동시에 이 위기의, 비록 ‘우발적’이지만, 해결가능성)이 우리가 동시대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유례없는 대중운동의 힘’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을 고수한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 이후의 모든 마르크스주의자가 예외 없이 그랬던 것처럼, (비록 그 수단이 사고와 이론뿐이긴 했지만) 그가 개입하려던 역사의 실제 추이에 완전히 기습당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사고는, 새장을 감싼 유리벽에 충돌하는 새처럼, 실제의 역사에 저항하는 방어적 반응을 구성하고, 사고가 발휘하곤 하는 (‘변증법적’이든 아니든) 보물 같은 독창성은 실제의 역사에 한층 비극적인 차원을 부여할 따름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아주 어렵다. 사태를 정반대로 읽으려는 시도 역시 가능한 게 사실이다(우리가 열고 있는 학회나 참석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이런 종류의 의도가 깔려 있을 것이라는 점을 나는 배제하지 않는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뿐만 아니라, 보다 심각한 역사적 공산주의의 위기에 맞서 싸우면서, 그리고 위기를 추동하는 힘의 전진적 이해를 추구하면서, 알튀세르가 어떤 ‘부재하는 원인’―실재성이 모자라지 않은―을 예리하게 제시하는 한편, 지배 양식들의 역사 안에 사로잡힌 개인들에게 [역사의] 경로를 변경할 수 있는 집합적 역량―공산주의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을 (매우 ‘우발적으로’) 이따금 부여하는 ‘마주침들’이나 ‘결합들’의 어떤 혼란스러운 기제를 예리하게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면, 어제까지 그의 약점이었던 것이 오늘이나 내일의 자원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두고 보면 알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언급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역사를 (과거 공산주의적 상상계와는 반대로) 다소 긴 시간 지연된 쇠퇴와 해체의 역사로 제시하는 것을, 사실에 의거해 교정할 절대적 필요성―알튀세르 자신의 저작을 해석하기 위해서라도―을 나는 자각하고 있다. 정의상 애매한 ‘종말/목적’(fin)을 앞선 과정에 투사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하나의 역사적 신화를 조목조목 다른 신화로 전도하는 것이 기만적인 것처럼 말이다. 자기 시대 ‘공산주의’의 장에서 알튀세르가 벌인 정교화와 개입을 해석함에 있어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거대한 질문은, 말하자면 1960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 그러니까 ‘유로공산주의적’ 전망이 ― 단기간 동안 ― 윤곽을 드러낸 과도기에, 자본주의에 대한, 보다 일반적으로는 지배적인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이 재개되었는지, 오늘날 우리가 더는 생각지 못하는 역사적 대안들의 담지자가 등장했는지 하는 것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스탈린주의 유형의 소비에트 체제가 기성 질서에 대한 급진적 도전의 외피 아래 기성 질서의 내재적 일부를 이루고 있었음을 인정할 경우, ‘탈스탈린주의화’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복원이라는 전망을 연 것에 불과했던가? 그리고 아랍권에서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서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반(反)제국주의 운동이 사회적 불평등의 극단적인 양극화에 기초하는 것과는 다른 발전의 길을 발명할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경우, 이들 운동에게 허용된 유일한 결말은 군사독재와 정치적-금융적 부패 아래 분쇄되는 것뿐이었던가? 이들을 분쇄하기 위해 활용한 수단들의 폭력성은, 갈등이 존재했고 결말이 숙명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줄 수 있다. 1968을 전후한 시기 서유럽의 (노동자와 비노동자를 아우르는) 사회운동에 관해 유사한 질문이 제기된다. 쉽게 말해, 나의 세대와 심지어 약간 연배가 높은 공산주의자들 다수가 이 시기 공유했던 감정, 곧 우리가 혁명의 새로운 계절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이 계절은 혁명의 양상들 면에서의 변화―이를 (쿠바의 지도자들이 정통파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그들과 긴밀히 협력했던) 레지스 드브레는 ‘혁명 안의 혁명’(이것의 지향에 대해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이라는 유명한 말로 불렀다―가 일어날 시기이기도 할 것이라는 감정에 대해 오늘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대답을 예정하지 않은 채 이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동시에 알튀세르의 궤적을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제안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나의 주제에 이르렀는데, 재차 주의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극히 다가적(多價的)이며, 다의적이기까지 하다. 공산주의는 여러 사태를 지칭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아주 높은 추상 수준에서조차, 공산주의를 단일한 이념의 단순성으로 귀착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설사 그런 이념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를 적용하거나 실현하는 단계에서 ‘산산조각난다.’ 알튀세르와 공산주의의 관계를 판단하려면, 서로 다른 이질적 수준들에 그의 개입을 위치시켜야 하는데, 그렇다고 이 수준들이 근원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닌바, [이질적인 수준들이 결합한 결과] 발생하는 변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알튀세르가 포로 경험과 당시 만들어낸 마주침이라는 준비단계를 거쳐 전쟁 직후 ‘전향’한 순간부터, 그가 공산주의의 세계에 완전히 사로잡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알튀세르가 되었다는 점에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산주의의 세계는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그에게 훨씬 더 총체적 경험이었는데, 반복해 말하거니와 이 총체성은 서로 다른 [복수의] 수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용어의 일상적인 의미에서 주관적이라고 부를 첫 번째 수준에서는, 높은 긴장이 작동하는 단락(短絡, court-circuit) 안에 체험과 종말론적 희망을 동시에 위치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알튀세르는 우애라는 어휘로써 양자의 통일성을 회복하곤 했다. 현재 시점, 특히 일상에서 체험하는 우애는, 우리가 모두 아주 다양한 틀 안에서 체험하는 그것인데, 이 여러 틀 중에서 알튀세르에게 중요했던 것은 분명 당 세포의 동지들과 함께 한 전투적 활동의 틀로서, 당시의 당 구조에서는 예외적으로 대학을 배경으로 했던 이 동지들은 지식인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위험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이 수준에 그의 아내 엘렌과의 융합적인 동시에 갈등적인 관계―이 관계는 1980년에 비극적으로 종결된다―를 동등하게 기입하고 싶다. 엘렌은 끝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이유 때문에 프랑스가 해방된 후 당에서 축출되었는데, 알튀세르에게 있어 엘렌은 (인민전선과 레지스탕스로 상징되는) 영웅적 시기의 전투적 우애와 맺은 상상적 유대(그만큼 더욱 강한 유대)를 표상했다. 하지만 우애는 알튀세르의 종말론적 희망이 기입된 기호이기도 하다. 이 희망이 지향하는 것은 상품형태로부터 자유로워진 사회 및 사회적 관계들로, 이는 분명 ‘부정적’ 정의이지만, 알튀세르의 문헌에서 사회조직의 양식 아니 형태로서의 ‘공산주의’에 관해 찾을 수 있을 가장 정확한 정의다. 생의 마지막에, <현대출판기록연구소>(IMEC) 문서고에 보관된 1987년의 ‘6월 테제’ 같은, 섬망의 산물로 보일 수 있는 문헌들에서(하지만 섬망은 주체의 진실이 언표되는 형태 중 하나가 아닌가?), 일상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테제 안에서 합류한다. ‘공산주의는 이미 거기에 있다’, 우리의 사이에, 비가시적이거나 감지할 수 없는 상태, 즉 이러저러하게 명명되지 않은 상태로, ‘자본주의 사회의 틈새’ 안에, 사람들이 비시장적 활동들 안에서 연합하는 곳에서는 어디에나. 분명 이 테제와, 다른 관점에서 자주 언급되는 테제 사이에서는, 적어도 자구 상으로는, 아주 강력한 긴장이 나타난다. 스스로에 대해 투명한 사회는 없고,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테제가 그것이다. 단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데, 아마 반(反)알튀세르적이지 않을 이 생각에 따르면, 우애는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자체이고, 게다가 우애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공산주의인데, 여기서 이데올로기란 마침내 계급적 기능에서 해방된 사고와 삶의 매질(媒質, milieu)이다.
어쨌든 여기에서 내가 두 번째 수준이라고 부를 이론의 수준으로 이동하려면 도약이 필요한데, 이론의 수준에서 중요하게 말할 것은 우선, 다시 한 번, 부정적이다. 알튀세르에게 있어(이는 점점 분명해질 것이다) 이론(여기에서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제유(提喩)적 관계다)은 공산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으며, 자본주의의 모순, 즉 계급투쟁에 각인되어 있는 공산주의의 가능성과 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마침 알튀세르가 ‘현존하는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적 운동’이라는 유명한 정식을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나름대로 계승했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이 정식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주지하듯 알튀세르가 이 정식에서 계급투쟁 과정의 결정론적 표상을, ‘최종심급에서’라 할지라도, 이식하는 위험을 보기 때문이다. 그가 점점 더 중시한 용어는 ‘경향’―단 이 용어에 곧바로 반경향이라는 용어를 추가한다는 조건 하에서―인데, 이는 동일한 문제설정 안에 계급투쟁의 부침이 표상하는바 공산주의 실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모두를 새겨 넣기 위한 것이다. 이론화할 필요가 있는 대상은 그것인데, 이러한 이론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아주 역설적인 특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곧바로 드러난다.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는데, 오늘은 불행히도 자초지종을 파고들 수 없어 세 가지 문제만 지적할 것이다. 첫째, 가능성은 전략적인 것으로, 그리고 불가능성은 말하자면 ‘전술적’인 것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러나 정치는, 특히나 알튀세르가 계급투쟁의 당대적 형태에 맞게 적응시키려는 연구를 거듭하면서 특권을 부여한 마키아벨리적 관점―이는 계급투쟁의 당대적 형태를 위해 고안되지 않았다―에서 보면, 전술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에 따라, ‘최종 목적’인 공산주의의 실현이, 그 역사적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내용 면에서, 공산주의를 낳는 계급투쟁의 ‘전술적’ 부침의 영향을 어느 정도까지 받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두 번째 문제가 접목되는데,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상속받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범주 사이의 절합이라는 문제가 그것으로, 이는 『고타강령비판』에 대한 아주 편향된 독해에서 시작되어, 혁명적 이행에 대한 스탈린의 진화주의적 해석을 통해 신성시되었는데, 탈스탈린주의 운동은 이를 문제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면적으로 확장하였다. 알튀세르 자신도 아주 최근까지 이 용어법 안에서 추론한다. 따라서 사회주의가 자율적인 생산양식이나 사회구성체로서 실존하지 않고, 자본주의로의 경향(즉 자본주의의 재생산, 심지어는 자본주의의 적응이나 현대화로의 경향)과 공산주의로의 경향(하나의 생산양식이라기보다 사회적 관계의 형태들의 존속에서 식별되는) 사이의 대결이 이루어지는 정황의 다중성을 특징짓는 이름에 불과한 것을 표상한다는 내용의 테제(오늘날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 예컨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등이 공유하는)가 알튀세르에게 도입된 시점을 정확히 특정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테제가 1976년 ‘프롤레타리아 독재’ 논쟁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싶은데, 이 논쟁의 와중에 알튀세르와 ‘레닌주의’, 즉 노골적으로 말하면 스탈린의 유산 사이의 관계가 아주 모순적이고, 따라서 아주 폭력적인 일종의 행동화(acting out)로 표출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정식이 돌발한다. “공산주의는 우리의 유일한 전략이다 (…) 공산주의는 오늘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 오늘 시작한다. 아니 공산주의는 이미 시작하였다.”(22차 당대회) 이러한 정식이 『『자본』을 읽자』가 생산양식 간 ‘이행’을 이론화했던 방식과 사뭇 멀리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하는데, 물론 『『자본』을 읽자』에서도 진화주의와 역사적 실증주의를 피하기 위해 ‘과잉결정’의 요소들을 증대시키긴 했지만,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를 시기구분한다는 문제설정에 그 어느 때보다 매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기(繼起)와 시기구분의 문제설정을 현재의 문제설정(그리고 경향과 반경향의 현재적 미분(différentielle)의 문제설정, 또는 현재의 자기 자신에 대한 비동시대성의 문제설정)으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아무리 멀리 간다 하더라도, 분명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역사의 동력이 계급투쟁이라는 생각, 필요하다면 온갖 종류의 다른 수준들과 관행들/실천들로 ‘복잡화되’고 ‘보강되며’,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의 사용역(registres)에 따라 분배되지만(비록 근원적으로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적, 즉 정치-경제적, 정치-이데올로기적, 정치-정치적이지만), 결국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자리를 차지한다는 생각이다. 알튀세르가 해방운동들의 일의성(univocality)을 다시 문제 삼던 페미니즘의 방식, 우리가 사회적 관계들을 변혁하는 과정, 또는 지배들을 다시 문제 삼는 과정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돌이킬 수 없게 ‘다원화’하던 방식에 완전히 눈과 귀를 닫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68의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반란’(‘반란’이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그가 쓴 이 표현은 아직 적절한 데가 있다. 훗날 랑시에르는 사소한 변형만으로, 랭보의 말로 하자면, ‘논리적 반란들’로 되돌아간다.)이 사회적 토대를 갖고 있지만 그 의미가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와 경험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반(反)권위주의 투쟁의 형태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에 대해, 말하자면 선제적으로, 극히 난폭하게 반발했다.
결국 (그 발전 단계가 서로 다른) 알튀세르의 명제들을 재독해하려는 모든 시도가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되는 딜레마가 그 윤곽을 드러낸다. 만일 이 명제들이 ‘계급투쟁의 우위’를 단언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면, 그리고 만일 계급투쟁의 우위가 마르크스주의를 공산주의에 절합시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역사적인 현재적 순간 안에 새겨 넣길 원하는 ‘경향들’을 사고하기 위해, 새로운 정의를 대가로 치른다 할지라도, 이 장치 전체를 계속 보존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 장치의 어떤 요소들은 억제하거나 상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해야 하는가(이 경우 이 요소들은 무엇인가)? 어떤 방식을 택하든 이게 가능한 일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로써 우리는 알튀세르의 ‘공산주의’, 또는 알튀세르가 비판적 내부성의 관계라고 부를 법한 것을 유지한 공산주의의 세 번째 수준에 이르렀다. 이 수준은 공산주의적 조직으로, 이는 개념의 수준에서 원리에 따라 고려된 정치적 행위의 기획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여건이다. 비록 이 여건이 모순적일지라도(그리고 모순들이 점점 더 여건에 내재적이고 구성적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몇 가지 용어들을 활용해야만 한다. 그 중 하나는 물론 ‘당’인데, 여기에는 동시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사회, 계급투쟁, 사상, 철학 안에서 편을 정하거나 입장을 정하는 것을 의미하고(마침 알튀세르는 1960년대 초, ‘이론주의’의 정점에서, ‘개념의 당’을 말하는데, 그는 이 말을 마르크스에게서 찾아냈다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조직을 의미하는데, 이는 ‘프랑스공산당’, 1943년 해산한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지부로서, 알튀세르가 자기 세대의 다른 활동가들처럼 코민테른에 향수를 가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알튀세르는 이 당(‘대문자 당’(le Parti))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지만, 이는 당을 변혁하고, 당을 ‘편향’으로부터 지켜내며, 심지어는 당에 내적 쇄신의 길을, 최소한 간접적인 방식으로라도, 처방하고 싶어서다. 따라서 당에 대한 관념은 양분된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한편에는 말하자면 경험적인 공산당이 있고(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스스로가, 이방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모난 존재라고 느낀다), 다른 한편에는 이념적/이상적 공산당이 있다(알튀세르가 충성을 바친 참된 대상은 이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는 일관된 특징이 있는데, ‘사회주의적 인간주의’에 관한 거대한 대결을 둘러싼 1960년대의 ‘공세적’ 전투들뿐만 아니라, (유로공산주의의 일반 이념에 반대한 것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소위 ‘공동강령’ 전략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편향이라고 그가 본 것에 반대하는 1970년대 말의, 절망적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수세적’인 전투들에도 적용되는 이 일관된 특징은, 당을 변혁하기 위한 투쟁은 당 안에 있는 ‘세력들’에 근거하여 내부로부터 추진될 수 있고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만일 당 외부로부터 추진될 경우 실패하고 목표한 바에 반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다. 말하자면 이념적/이상적 당은 현실의 당의 한 단면으로,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게 하고 이념적/이상적 당을 앞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알튀세르는 ‘분리파’(dissidence)의 길에 가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는바, 이에 관해서는 내가 개인적으로 증언할 수 있다. 특히 1978년에 소책자 『공산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의 작성에 동참한 것은, 알튀세르로 하여금 몹시 고통스러운 노력을 대가로 치르게 하였으며, 그의 정신상태의 최종적 악화에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은 알튀세르의 담론에서 공산주의적 조직이라는 문제가 우리에게 제기되는 이름이나 형태 중 하나일 따름이다. ‘당’의 수준을 벗어나는 다른 것들이 있고, 이에 대해 나는 외연적이고 내포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어느 쪽이든 노동자운동이라는 관념과 관련이 있다. 우선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관한 질문이 있는데, 이는 정확히 마르크스주의 이론과의 ‘마주침’, 그 다음에는 ‘융합’으로부터 혁명과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구성되어 출현할 노동자운동의 한 형태(심지어 세계 수준에 있는, 우월한 형태)로 간주된다. 알튀세르가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국가들의 지정학적 대립 속에 점점 더 뒤얽히고 분열된 이 운동의 구성요소들 간의 잠재적 통일성이라는 이념을 고수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인데, 알튀세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세계적 제국주의라는 유일한 적에 완강히 맞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라는 문제를, 사회주의 나라들―중국과 소련, 이후에는 경향적으로 브레즈네프가 이끄는 소련과 서양의 ‘유로공산주의’ 당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분할을 운동의 내적 모순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무능이라는 견지에서 제기하는 방향으로 알튀세르를 인도하기도 했다. 충성과 개인적 우정 이외에도 이 같은 신념이, 알튀세르가 ― 핵심적으로 1965년에서 1967년 사이 ― 몇 년 동안 한편으로 공식적으로 친소련적이고 어쨌든 분명하게 반(反)중국적인 프랑스공산당, 다른 한편으로 (알튀세르의 영향력과 그가 그들을 위해 정교화한 전략을 벗어나, (비록 아주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북경의 직접적 영향력 하에서 공산당과 노동총동맹(CGT)에 대면하여 운동을 끌어들이는 거점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했던) 그의 옛 제자들이 창출한 마오주의 조직 사이에서 알튀세르가 ‘줄타기’(double jeu)를 시도했던 근원적인 이유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줄타기는 정치적 견지와 정서적 견지에서 그에게 극히 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는데, 왜냐하면 양 측에서 동시에 공격당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떠받치던 신념(혹자는 다시 한 번 착각이라고 부르겠지만)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갈라진 지체들(membra disjecta)은 조만간 다시 합체되어야만 하고, 바로 이 때에 ‘개입 속에 소멸할’(Lenin et la philosophie, 1968), ‘사라지는 매개자’, 즉 ‘철학자들’이 홀연히 나타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상층의 협정을 협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같은 재정초의 역사적 조건과 전망을 ‘사고’하기 위해서였다.
조직화된 정치와의 관계 속에서 알튀세르가 이론에 대해, 더 정확히 말하면 철학에 대해 품은(동시에 그가 이론적으로 ‘정초’하려고 한) 구상의 전략적 — 나는 문체적/스타일적(stylistique)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 상수였다고 내가 믿는 것이 여기에서 예증될 것이다. 이는 (철학이 사전에 정의된 정치 노선에 복무하는) 성직자적 또는 ‘교회적’ 구상이 아니고, 더 이상은 — (스탈린주의와 탈스탈린주의화와 함께 사라진 종류의) 위대한 ‘이론가 지도자들’(레닌, 그람시, 마오)에 대한 알튀세르의 공언된 존경에도 불구하고 ― 지도적이고 의사 ‘주권적인’ 구상도 아닌데, 이 구상은 사회적 총체에 대한 ‘과학적’ 인식으로부터 정치적 실천/관행을 연역하는 발상에 상응한다. 알튀세르의 구상은 교육(학)적인 동시에 비판적인 것으로, 항상 정치적 결정의 근처(또한 정치적 결정에 대한 간격, ‘내적인 거리’나 ‘취해진 거리의 공백’)에 기입되는 것을 추구한다. 내가 보기에 이 구상은 교회 전통―알튀세르가 자신의 지적 성장 과정과 몇몇 친구를 통해 교회 전통과 대단히 친근한 상태를 유지했다―이 간접권한(potestas indirecta)이라고 부른 것과 아주 가까운데, 이는 정치 권력을 대신하지 않지만 정치 권력을 과잉결정하고, 따라서 일정한 방식으로 정치의 정치적인 것(le politique de la politique)을 특징짓는 ‘영적 권력’ 또는 ‘지적 권력’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늘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은 알튀세르에게서 ‘당 형태’ 자체의 질문이 — 실은 정확히 이 용어로 정식화된 적은 없지만 — 생겨난 방식이다. ‘당 형태’라는 질문은 스탈린이 구축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상관관계가 있는 소위 ‘민주집중제’와 관련되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경제적 계급투쟁’과 ‘정치적 계급투쟁’의 위계적 구별이라는 발상과 관련되는 것인데, 이 발상은 당과 노조 사이의 조직적 구별로 물질화되고, 여기에서 노조는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체의 ‘전달벨트’ 체계의 일부가 된다. 전달벨트는 스탈린의 웅변적인 정식으로, 모든 공산당에서 계승되지만, 1968년 파업에 의해, 그리고 최소한 이탈리아에서는, 공장의 투쟁들과 기층의 ‘평의회적’ 조직 형태들의 출현이나 재돌발에 의해 심각한 동요를 겪는다.
이곳이 스탈린주의뿐만 아니라 그람시에게도 있는, 레닌의 모순적 유산의 심장부다. 흥미로운 것은 알튀세르가 ‘위기’의 시기에 발표한 문헌들(특히 베니스 토론회에서 발언한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1977년 11월))에서,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내재적 한계로 제기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점인데, 마르크스 자신에게 기원을 둔 이 한계를 알튀세르는 ‘회계적/가산적(comptable) 잉여가치관’이라고 부르고, 노동력의 가치와 그 생산적 활용에 의해 보존되거나 창출된 가치 사이의 양적 차이로 규정한다(알튀세르는 『자본』에서 이것의 책임을 헤겔적 설명의 유명한 순서에서 찾는데, [헤겔은] 다시 한 번 오류의 뿌리에 있다). 왜냐하면 알튀세르에 따르자면, 이 잉여가치관은 한편으로 자본 축적 및 그 논리,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이 체험하는 바의 잉여노동의 착출과 착취의 구체적 형태들 사이의 절합을 주변부로 내모는바, 이것이 바로 조직의 수준들 사이의 분열의 기원에 있거나, 최소한 이 같은 분열의 영속화에 맞서 싸우는 것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보이는 무능력의 기원에 있을 것이며, 더욱이 계급투쟁 및 계급투쟁의 간부들을 조직하는 장치들의 코퍼러티즘적 이해관계가 이를 떠받치기 때문이다(분명 여기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판사이면서 당사자[자신의 이해가 얽힌 문제를 자기가 결정짓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상의 고찰은, 우리가 (내가 앞서 상기시킨 것처럼, 알튀세르 자신이 완전히 젖어 있던) 당 관련 구상 및 조직화 공식을 두고 벌이는 후위 전투[옮긴이: 질 것을 알면서도 하는 전투]를 목격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잠정적 결론으로서, 외양상 진부하지만 아주 끈질긴 정식, 알튀세르가 주기적으로 호소했던 정식 하나를 개입시켜, 이러한 인상에 미묘한 변화를 주고 싶다. 이 정식이 제기하는 바, 마르크스주의(따라서, 최소한 이상적으로는, 그것이 요청하는 ‘공산당’)는, 이중적 의미의(그러나 양자는 분명 연관되어 있다) ‘정치의 다른 실천/관행’(autre pratique de la politique)의 기원에 있어야만 하는데, 이는 한편으로 역사 안에 이미 존재했던 것들에 비할 때 새로운 실천/관행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지를 발명해 냈던 것들에 비할 때 이질적인 실천/관행을 의미한다(후자에 관해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말한 (알튀세르가 보기에는 극히 애매한) 정식은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부르주아지는 구체제의 군주제와 봉건제에 승리를 거두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세력, 곧 대중운동을 얻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동원이 필요했던 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정치를 교육’시켰다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언제나 되돌아 온 이 ‘정치의 다른 실천/관행’, 어떤 면에서는 공산주의에 특정적일 이 실천/관행은 무엇인가? 나는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가설을 정식화할 수는 있는데, 이 가설들은 1978년 우리가 겪은 분기의 용어들이, 사후적으로, 나에게 분명해진 방식에서 부분적으로 유래하며, 정확히 베니스에서 개최된 토론회에 이어 『일 마니페스토』(Il Manifesto)가 개시하고, 로산다의 질문에 대해 「‘유한한’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라는 제목으로 알튀세르가 제시한 답변으로 시작된 논의의 일환이다. 알튀세르는 두 가지를 주장했는데, 그 중 하나는 프랑스에서는 좌파 연합에 의해서, 이탈리아에서는 ‘역사적 타협’에 의해서 검토된 연립정부 참여 기획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론적으로 좀 더 사정거리가 긴 것이었다. 첫 번째는, 그러한 연합들이 요구하는 장치들의 타협하는 실천/관행(「당내에서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될 것」에서 알튀세르가 ‘계약적’이라고 부른)과, 최근 ‘대중노선’이라고 불렀던 것(Kenta Ohji), 자율적인 방식으로 기층의 대중들, 특히 노동자 대중들을 동원하되 공식 정치를 지원하는 세력으로서가 아니라 중재하는 세력으로서 동원하는 실천/관행의 대립을 세우는 데 있다(알튀세르는 수 차례에 걸쳐 1936년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의 말을 인용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장관들이 없지만, 대중들의/대중부(大衆部) 장관은 있다.”) 보다 사정권이 긴 두 번째 주장에 따르면, ‘공산당’은 정의상 ‘국가 외부의’ 당인데, 이는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거나 종속되지 않는다는 발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흐루시초프에 대한 반대에 근거를 제공하던, 따라서 (분명 많은 사람들이 스탈린주의 자체의 잔재라고 이해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좌익적 비판’ 기획을 (그리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떠받치던 것의 연장선상에서, 알튀세르는 단서도 달지 않은 채 당과 국가의 ‘융합’은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그리고 사실 공산주의)의 스탈린적 편향, 다른 한편으로 제도적 영역에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보다 일반적으로는 ‘부르주아’ 정당 사이의 정치적 동맹의 구축으로부터 출현할 수 있는 ‘사회주의’ 정치의 공통 요소라고 설명한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게임의 규칙을 충실히 지키지 말아야 하는 까닭인데, 그렇게 하면 노동계급을 잃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다른 당들과 같은 당이 아니’며,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다른 모든 당들의 안티테제다. 당시 나는 이 테제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론이 ‘당’이 무엇인지 사고할 수 있게 해 주는 방식과 양립불가능하다고 반대했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도 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론이 계급투쟁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양상들을 분석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뜻일 것이다. 이는 적어도 「철학의 전화」를 주제로 한 <그라나다 강연>과 미완성 수고 「자신의 한계들 속에 있는 마르크스」(1978)와 같은, 비록 그 어느 때보다 논리적 궁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한 문헌들이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논점이다. 특히 「자신의 한계들 속에 있는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기이한 테제를 옹호한다. 국가장치는 바로 부르주아지의 관점에서 계급투쟁을 지배할 수 있기 위해서, 계급투쟁의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풀란차스는 같은 시대에, 유로공산주의를 정초하기 위해, 정확히 반대로 이야기했다). 이에 상응하는 테제는, 공산당은, 국가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 그리고 국가에서 가능한 한 벗어나기 위해, 계급투쟁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 특히 그 문은 ‘경제투쟁’, 곧 착취의 장소들 자체로 통하는 투쟁들이라는 것이리라. 일부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특히 마리오 트론티(Mario Tronti))이 제안한 ‘정치의 자율성’에 반대한 이유가 이것이다. 또한, 아마도, ‘공산주의 정치’의 아포리아가 나오는 곳도 여기일 텐데, 공산주의 정치는 군주가 할 것처럼, 지도(하거나 방향을 정)해야만 하고, ‘세계를 변혁하기’(적어도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삽입되어야 하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찾아야만 하는 동시에, 대중들에게(알튀세르가 자주 쓴 1930년대 프랑스공산당 풍의 용어는, ‘인민대중들’에게였다) 정치적 역량을 되돌려줘야만 하는데, 이 정치적 역량은 대중들이 즉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모든 종류의 장치들이 끊임없이 대중들에게서 빼앗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