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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이론과 이데올로기라는 문제(2/2)


백선우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인정의 이중적 성격과 이데올로기적 인정


  이에 따라 호네트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인정」에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는 인정, 즉 이데올로기적 인정에 관해 고찰한다. 인정이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인정의 토대」에서 라이티넨(Arto Laitinen)과 이케헤이모(Heikki Ikäheimo)가 제시한 두 가지 인정 모델에 대한 호네트의 응답과 관련되어 좀 더 명확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호네트는 두 가지 인정 모델에 대해 검토한다 : 하나는 부여적(attribuitv)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인정의 수용적(rezeptiv) 모델 혹은 지각 모델(Wahrnemungsmodell)[각주:1]이다.[각주:2] 우선 부여 모델(Attributionsmodell)은 인정을 “인정 행위를 통해 다른 주체에게 동시에 새로운 긍정적 속성이 부여되는 것”으로 이해하며, 이때의 인정은 인정받는 주체에게, 그가 기존에 소유하지 않았던 어떤 새로운 가치 있는 지위 혹은 속성을 부여하는 “생산적 인정”이다. 반면에 지각 모델은 인정을 “이미 존재하는 개인의 속성이 이차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강화되거나 공개적으로 알려지는 것”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이 경우에 인정은 기존에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소유하고 있는 가치 있는 속성을 지각하는 것으로, “재생산적 인정”이다.[각주:3] 두 인정 모델은 각각 장단점을 가진다. 우선 부여 모델은 인정받는 주체에게 어떤 새로운 가치 있는 속성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사회에서 기존에 인정받지 못했던 어떤 속성이나 지위가 인정받게 되며, 이는 기존의 사회적 인정 질서의 확장에 관해 언급하기 위해서도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만약 이처럼 가치 있는 속성이나 지위가 단지 어떤 인정 행위를 통해 주체에게 부여되는 것이라면, 부여 모델은 이러한 인정 행위가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기준을 가질 수 없다. 반면 지각 모델은 “이미”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가치 있는 속성을 소유한다고 간주하므로, 어떤 인정 행위가 옳은지 혹은 적절한지를, 이 행위가 이미 소유된 속성에 대한 적절한 반응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부여 모델이 가지는 상대주의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다. 하지만 부여 모델이 인정 행위를 새로운 속성의 부여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미-소유된 어떤 속성을 가정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어떠한 종류의 가치실재론으로부터도 자유로운데 반해, 지각 모델은 더 이상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가치실재론에 의존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부여 모델과 지각 모델 모두 어떤 불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호네트는 부여 모델이 갖는 상대주의의 위험을 수용하기 보다는, 지각 모델이 갖는 가치실재론의 부담을 수용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호네트는 지각 모델에 함축된 “인정을 계속해서 ‘근거들의 공간(space of reasons)’에 위치”[각주:4]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네트는 라이티넨이 주장한 지각 모델을 옹호하며, 이것이 가지는 가치실재론의 부담을 해명하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 호네트는 두 가지 전략을 통해 이와 같은 가치실재론을 해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 하나는 가치들을 생활세계라는 경험적 지평에 정박(anchor)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여기에 ‘진보’의 이념을 결합시키는 것. 이에 따르면, 우선 호네트는 자신이 옹호하는 가치실재론이,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이미-소유된 가치 있는 속성들이 객관적이고 초-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러한 가치들을 “제2의 자연”으로서 생활세계라는 경험적 지평에 위치시킨다. 이로써 호네트는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생활세계에서 개인이 사회화를 통해 제2의 자연, 즉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일련의 규범들을 습득함으로써, 그가 다른 개인들에서 지각해야만 하고, 또 그에 따라 적절하게 반응해야만 하는 가치 있는 속성들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호네트는 첫 번째 전략을 통해 소박한 가치실재론이 아니라 “절제된[온건한] 가치실재론(moderate value realism)”을 주장한다.[각주:5]


  그러나 호네트가 가치들을 생활세계의 지평에 위치시키기 때문에, 이러한 가치들은 단지 어떤 특정한 문화에서만 타당하게 되고, 다른 문화나 생활세계에서는 타당하지 않게 되는 (호네트가 앞서 피하고자 했던) “인정 개념의 규범적 목적과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상대주의의 위험성”[각주:6]이 재발한다. 호네트는 이러한 상대주의를 회피하기 위해서 “확고한 진보 개념”을 결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호네트는 진보를 역사철학적 맥락과 분리시켜 ‘형식적 진보’ 개념을 제시한다. 호네트가 말하는 진보는 가치 있는 속성들의 분화가 증가함으로써, 주체의 능력 혹은 인정받을 수 있는 속성이 다양화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주체가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각주:7] 호네트는 이와 같은 진보의 이념을 지각 모델과 결합시킴으로써 절제된 가치실재론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대주의의 위험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충에도 불구하고, 지각 모델은 여전히 문제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각 모델은 어떤 인정 행위의 정당성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이 기존의 인정 질서 혹은 생활세계에 제2의 자연으로서의 가치 있는 속성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국 인정 행위는 기존의 인정 질서에 포함된 평가적 가치들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며, 이는 기존의 인정 질서를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기존의 인정 질서가 재생산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예컨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기존의 인정 질서에 충분히 통합되어 있어서, 긍정적 자기관계를 달성하고, 적극적인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기존의 인정 질서가 재생산되는 것 자체를 문제시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정은 현실적으로 항상 좋은 삶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문성훈에 따르면, 사회적 인정 질서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그는 푸코의 권력 개념을 통해 인정의 이중적 성격을 제시하는데, 푸코에게 권력은 “인간에 대한 지식을 근거로 우리 자신을 이른바 ‘참’된 존재 방식에 묶어둠으로써 우리의 존재 구조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때 권력과 결합되는 지식이 바로 푸코가 분석하는 정신병리학, 교도 행정, 성의 관리 등이다. 푸코는 권력과 지식이 결합된 것을 “사회적 진리 게임”이라고 부른다. “사회적 진리 게임이란 우리가 발견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미지의 진리를 인식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 행위 그리고 정체성과 관련하여 올바른 말과 틀린 말을 구분하고, 올바른 말에는 진리의 권위를 부여하고, 틀린 말은 허위로 단죄하는 담론의 절차”이다. 따라서 개인은 권력과 지식의 결합을 통해 작동하는 사회적 진리 게임에서의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배우고, “정상적” 인간상에 복종함으로써 인정을 받고, 이로써 주체가 되고자 한다. 푸코의 사회적 진리 게임의 결과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구분의 체계”이다. 지금 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적 인정 질서는 인정받을만한 가치 있는 속성들과 그렇지 않은 속성들을 구분하는 체계, 즉 “절대화된 표준적 인간상에 따라 누가 한 사회의 주체로, 즉 정상적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누가 사회적 인정에서 배제되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이원적 인정 질서”이다.[각주:8] 만약 사회적 인정 질서가 위와 같은 이중적 성격을 갖는 것이라면, 개인들은 인정받은 주체가 되기 위하여 사회적 인정 질서에 포함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 따른 “정상적 인간상”에 복종하며, 이로 인해 기존의 사회적 인정 질서가 재생산되고, 기존의 권력관계 혹은 지배적 질서 또한 재생산될 것이다.


  인정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의 비판은 여기서 제시된다. 즉 이처럼 사회적 인정이 단지 “정상적 인간상”에 복종하는 것이라면, 사회적 인정은 지배적 질서에 순응하는 태도를 산출하는데 기여하며, 이를 통해 개인은 자발적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업무(task)나 의무를 수행하고 지배적 질서를 재생산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각주:9] 호네트는 기존의 지배적 질서를 재생산하는 인정을 “이데올로기적 인정”이라고 부른다. 호네트는 이데올로기적 인정의 사례로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의 자발적 예속에 대한 “엉클 톰(Uncle Tom)”이라는 표현, 여성들을 젠더적으로 특수한 지배적 질서에 적응시키는 좋은 엄마(혹은 좋은 주부)라는 표현,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전장으로 가는 영웅적 군인(heroic soldier) 등을 제시한다.[각주:10] 현재의 “규범적으로 더 진보된 관점”에서 노예제 사회나 젠더적 억압 등을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규범적으로 더 진보된 관점”을 소유할 수 없다면, 예컨대 지금 작동하는 어떤 인정 형태들을 판단해야 하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정당화된 인정 형태와 이데올로기적 인정 형태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까? 호네트는 정당화된 인정 형태와 이데올로기적 인정 형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물질적 충족(material fulfillment)”[각주:11] 여부의 확인을 제시한다. 호네트에 따르면, 우리는 “물질적 조건들(prerequisites)을 제공하지 못하는 구조적 무능력”과 같은 어떤 결함을 통해 어떤 인정 형태가 이데올로기적 인정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호네트는 프레이저(Nancy Fraser)와의 논쟁에서 프레이저의 인정과 분배의 이원론에 맞서 “인정으로서의 분배”, 즉 인정에 따른 분배를 주장했었다. 이에 따르면 인정의 세 가지 형태 중 업적과 성취에 따른 사회적 가치부여는 한 사회 안에서 사회에 대한 개인의 기여에 따른 인정이다. 그리고 호네트는 사회적 가치부여를 단순히 “말이나 상징적 표현들”의 수준이 아니라, 이를 재화의 분배와 연결시킨다. 즉 개인이 사회에 대한 개인의 업적이나 성취만큼의 분배를 받았을 때, 그 개인은 스스로 인정받았다고 느끼며, 우리는 그가 인정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인정은 상징적 인정과 물질적 충족 사이의 어긋남을 그 특징으로 한다. 예컨대 호네트가 제시하는 “창조적 기업가”라는 예시는 이데올로기적 인정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호네트에 따르면, 현대의 기업 관리에서 피고용인은 더 이상 단순히 임노동자나 노동력으로 취급되지 않고, 오히려 “노동력의 자기-고용인” 혹은 “창조적 기업가”로 불리며, 기존에 유보되었던 “자율성, 창조성, 유연성”을 요구받는다. 이렇게 ‘인정’된 피고용인의 (외관상) 더 큰 자율성은 사실상 아무런 물질적 충족도 제공하지 않는다. 호네트의 주장은 이처럼 “평가적 약속과 물질적 충족 사이의 심연”을 통해 우리는 이와 같은 예시를 이데올로기적 인정이라고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12]


  이에 따라 호네트가 『인정투쟁』 이후 제시해왔던 기존의 인정 투쟁 모델에 수정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호네트는 긍정적 자기관계 혹은 성공적인 자기실현의 조건으로서 인정, 비인정 혹은 무시의 경험, 그리고 무시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투쟁, 즉 “무시의 사회적 동학”을 제시해왔다.[각주:13] 따라서 기존의 호네트가 제시한 인정 투쟁 모델은 1) 무시의 경험과 이에 대한 집단적 해석과정, 2) 인정 투쟁, 3) 새로운 인정 질서의 수립의 단계로 도식화될 수 있다.[각주:14] 그러나 이제 이데올로기적 인정의 문제가 포함된다면, 기존의 호네트의 인정 투쟁 모델에서 모든 사회적 변혁의 기초가 되는 무시의 경험이 불확실하게 된다. 무시는 명확하게 현상되지 않으며, 이에 따라서 주체도 무시를 명확하게 경험하지 못한다. 사회적 인정 질서의 이중적 성격은 주체들에게 기존의 인정 질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지”[각주:15]하도록 하며, 이러한 인정 질서에 포함된 배제의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한다. 따라서 인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으로 인해 발생하는 무시의 은폐는 기존의 투쟁 모델의 출발점을 새롭게 정의할 것을 요구한다. 이제 이데올로기적 인정에 대한 고찰에서 밝혀진 바처럼, 이데올로기적 인정이 평가적 약속과 물질적 충족 사이의 불일치를 은폐하며, 이 때문에 개인들이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를 경험할 수 없다면, 인정 투쟁의 새로운 출발점은 바로 이 인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식별할 수 있는 (호네트가 제안한) “물질적 조건의 확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인정 개념을 경유해 재구성된 인정 투쟁 모델은 1) “물질적 조건의 확인”, 2) 이를 통해 개인들이 기존에 은폐되어 경험할 수 없었던 무시를 경험하고, 이에 대한 집단적 해석과정을 거쳐서, 3) 인정 투쟁, 4) 새로운 인정 질서 수립의 단계로 도식화될 수 있다.[각주:16]




호네트와 알튀세르 사이의 쟁점(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제기된 인정 이론에 대한 비판은 주로 인정이 수행하는 지배적 질서의 재생산의 기능에 대한 비판이었다. 호네트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주체화(subjectivation)”가 가지는 두 가지 의미, 즉 주체(subject)라는 의미와 예속화(subjection)라는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이데올로기 개념을 제시한다. 주체화는 예속을 통해서만, 즉 개인이 사회로부터 부여받는 실천적 규칙들과 역할-귀속(role-ascriptions)을 통해 사회적 질서에 예속됨(subjected)으로써, 그리고 오직 이를 통해서만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인정’은 이데올로기의 중심적 메커니즘이 되며, 이를 통해 주체는 성공적인 자기실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만적인 예속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각주:17] 따라서 언뜻 보기에 호네트는 이데올로기적 인정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인정과 무시를 모두 포함하는) 기존의 지배적 인정 질서에 순응하는 주체의 생산과 이를 통한 질서의 재생산에 대해 말하고,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작동하며, 이에 기능적으로 통합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을 제시함으로써, 생산력의 재생산과 생산관계의 재생산 그리고 이를 통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둘이 제시한 이데올로기적 인정 개념과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개념은 상당히 유사한 내용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네트는 인정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해가 “일차원적”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인정의 옳음과 옳지 않음 사이의 혹은 정당화된 형태와 이데올로기적 형태 사이의 어떠한 구별도 허용하지 않았고, 결국 모든 인정이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다고 지적한다.[각주:18] 반면 호네트는 개인을 주체화하는 인정이 항상 지배적 질서의 재생산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인정을 정당화된 인정 형태와 이데올로기적 인정 형태로 구분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네트의 답변이 제기된 비판에 대한 ‘충분한’ 답변인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호네트는 이데올로기적 인정에 대해 논하면서도, 여전히 ‘이데올로기적’보다는 ‘인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호네트가 인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인정의 이중적 성격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이는 “합당한 인정의 결여가 만들어낸 현상”[각주:19]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이처럼 호네트는 이데올로기적 인정이 여전히 ‘인정’임을 강조하는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설정에서 제시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해결한다. 요컨대 호네트는 “물적 조건의 확인”이라는 방법을 통해 인정의 이데올로기적 형태와 정당화된 형태를 구분함으로써, 결국 다시 인정 질서의 규범적 진보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호네트와 알튀세르의 차이는 무엇인가? 무엇이 그 둘 사이의 쟁점이 될 수 있을까? 우선 드러나는 것은 이데올로기 속에서의 변혁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라는 쟁점이다. 알튀세르의 논의가 주로 재생산의 문제, 즉 어떻게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 순종적이고 자발적으로 예속되는 주체들을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어떻게 기존의 지배적 질서를 재생산하는가를 설명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가 제시한 국가 장치(들)의 기능주의적 성격 때문에, 알튀세르는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에서 어떠한 변혁의 가능성도 제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각주:20] 만약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는 바깥은 없다”면, 또 모든 개인들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을 통해 예속적 주체가 된다면, 알튀세르는 이와 같은 기능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하나의 대문자 주체에 의해 호명된 다수의 주체들이 어떻게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반역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기능주의에 관한 비판은 당대에 이미 알튀세르에게 제기되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대한 노트」에서 이에 대해 반론하고 있으며, 또한 최근의 몇몇 연구들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 안에서 변혁의 가능성(즉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가능성”)이 제시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참고하면, 알튀세르가 기능주의자라는 비판은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발리바르는 “어떤 사람들은 알튀세르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에 맞서 반역할 가능성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분명 오류이다”라고 말한다.[각주:21] 또한 최원은 알튀세르의 이론 내에서 “구조” 개념의 의미의 변화로 인해, 알튀세르에게서 “초월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너머’를 가정하지 않으면서도 [불충분하지만] 전복의 가능성을 인식할 수”[각주:22]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변혁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라는 쟁점은 호네트와 알튀세르의 차이를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


  다음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변혁적 ‘주체’와 관련된 쟁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호네트는 이데올로기적 인정 개념에 대한 고찰 이후에도 여전히 주체의 투쟁 모델을 유지하고 있다. 호네트의 “물적 조건의 확인”이라는 방법은 은폐된 무시를 드러내고, 이를 주체에게 인지시키고, 이를 통한 무시의 경험을 다시 투쟁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장성빈에 의해 제시된 이와 같은 도식화된 투쟁 모델에 따르면, 결국 이데올로기적 인정 개념을 통해 수정된 인정 투쟁 모델 역시 기존의 인정 투쟁 모델과 마찬가지로 주체적 변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앞서 제시된 알튀세르에 대한 관점에 따르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 내에서의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가능성은 어떤 주체를 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전통적인 기원적 주체라는 관념 ...... ‘무의식의 주체’라는 관념 ...... 잉여-주체 [등] ...... 모든 주체의 관념을 이토록 완강하게 기각”하면서도, 구조 외부의 ‘주체’가 아니라, “구조 내부에서, 이데올로기의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요컨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비-주체적 변혁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에 따라 우리는 호네트와 알튀세르의 차이를 주체적 변혁 모델과 비-주체적 변혁 모델이라는 쟁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호네트와 알튀세르의 차이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쟁점이 알튀세르에 대한 관점의 변경에 의해 실패했었다면, 두 번째 쟁점은 호네트에 대한 관점의 변경에 의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호네트의 인정 이론은 흔히 주체적 변혁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주체의 무시의 경험을 투쟁과 사회적 변혁의 근거이자 동력이라고 주장하는 호네트의 인정 이론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이해 방식이다. 하지만 호네트가 제시하는 무시의 다양한 양상들을 고려한다면, 문제는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무시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주체에게도 항상 명료한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기 때문이다. 호네트는 「도덕의식과 사회적 계급지배」에서 무시의 경험 혹은 “불의 의식(Unrechtbewußtsein)”이 어떤 체계적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를 보여준다.[각주:23] 데란티(Jean-Philippe Deranty)는 르노(Emmanuel Renault)의 저서에 대한 서평에서 사회적 고통이 단지 “오직 혼란스러운 형태로만” 사회의 병리적 현상과 그에 대한 규범적 혹은 정치적 요구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각주:24] 이어 컴프리디스(Nikolas Kompridis)는 우리가 호네트의 인정 이론을 “고통의 현상학”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이에 따르면, 사회적 고통은 주체들에게 명시적으로 경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 모든 사회운동의 의제들이 항상 공론장의 언어나 어휘를 사용함으로써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과 의제가 될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공론장의 담론 권력의 문제로 인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처럼 호네트가 제안하는 무시는 단순히 주체에게 확실하게 경험되는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스러운 형태를 가진 무시의 객관화-사회화된 형태, 즉 “사회적 무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시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주체라는 자리는 이제 사회적으로 해석된 혹은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무시를 겪는 주체가 대체한다. 


  또한 호네트는 이러한 무시 혹은 사회적 고통이라는 현상이 전-이론적, 전-정치적 차원에 위치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호네트의 주장을 더 급진화시키면, 전-이론적 차원이라는 호네트의 주장은 단순히 객관화되지 않은 주관적 감정을 지시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공론장에서 언어화되거나 사회운동으로 발전되지 못한 어떤 배제의 영역을 지시하는 것, 혹은 항상 배제되는 영역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승인과 그러한 배제의 영역이 가지는 규범적 잠재력을 인정 이론의 ‘구성적 외부’로 남겨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사회적 고통의 현상학”이 모든 사회운동이나 인정 투쟁으로 포괄되지 않는 어떤 것, 혹은 사회적 인정 질서에 포함되지 못하는 배제된 어떤 것을 인정 이론 안에 구성적 외부로서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회적 인정 질서의 규범적 진보의 가능성과 타당성 확장 경향에 대해서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회적 인정 질서 내의 일종의 잔여를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항상적인 인정 투쟁의 가능성, 가치 있는 속성의 더 다양한 분화와 이를 통한 진보의 가능성 또한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적 고통이 주체에 의해 체험되는 것과 이론을 통해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사회적 고통의 현상자 혹은 체현자로 발견되는 가능성 모두를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호네트가 여전히 주체라는 영역을 변혁의 주요한 요소로 남겨두고 있지만, 이는 단순히 구체적인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소박한 주체적 변혁 모델은 아니다. 이에 따라 두 번째 쟁점, 즉 주체적 변혁 모델과 비-주체적 변혁 모델이라는 쟁점 역시 호네트와 알튀세르의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내기에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변혁의 가능성의 문제와 변혁의 주체의 문제를 제외하면 무엇이 호네트와 알튀세르 사이의 쟁점이 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검토하고자 하는 쟁점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라는 쟁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쟁점이 호네트와 알튀세르의 차이를 규정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자본에 대한 호네트의 입장은 프레이저와의 논쟁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호네트는 프레이저와의 논쟁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자본과 인정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 “루만이나 하버마스처럼 자본주의가 “무규범적인” 경제적 진행 체계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물론 투쟁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항상 일시적으로 확립된 가치 원칙에 따라 물질적 분배가 이루어지며,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존중, 사회적 가치부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각주:25] 이처럼 호네트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또는 경제와 문화의, 또는 자본과 인정의 이분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명시적으로 “‘체계 통합’에 대한 ‘사회 통합’의 우선성”[각주:26]과 “인정으로서의 분배”[각주:27]를 주장하며, 경제가 무규범적인 체계가 아니라, 항상 생활세계의 규범적 요구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특히 세 번째 인정의 영역, 즉 개인의 업적과 관련해서 사회적 인정 질서는 개인의 업적과 기여에 따라 사회적 가치 부여와 이에 상응하는 “약속”, 즉 업적에 상응하게 분배(임금)하는 것이다. 만약 개인이 자신의 업적이나 기여에 상응하는 분배를 받지 못했을 때, 그 개인은 이를 자신에 대해 가치 절하, 즉 무시로 경험하게 될 것이며, 약속된 보상을 제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인정 투쟁이 경제의 분배의 원칙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결국 자본은 자기만의 독자적인 원리를 통해 작동하면서, 개인들의 행위나 의지와 무관하게 이를 기능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통합의 규범들, 특히 개인의 업적과 관련된 정당한 분배에 대한 인정 요구에서 완전히 독립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이라는 유사-체계가 상호주관적 규범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알튀세르는 오히려 자본의 체계적 성격을 더 강조했던 것 같다. 이는 알튀세르의 “과소결정을 해명하려는 시도”[각주:28], 즉 왜 혁명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자본주의에 반하는 혁명이 불가능한지 혹은 실패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이데올로기 이론에서 드러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혁명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가졌던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자본주의가 혁명적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질서에 순응하는 주체들을 만들어내는 국가 장치(들)을 통해 계급 지배를 재생산함으로써, 결국 자본 자체를 재생산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알튀세르의 관점은 결국 자본의 자기 생산적(auto-poietic) 성격과 체계적 성격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이와 같은 체계적 성격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의 기능들과 작동에 대한 계급 투쟁의 우위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대한 노트」에서 이를 반복해서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계급투쟁의 완결된 사실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끊임없는 계급투쟁의 목표물이며 장소이자, 그것의 결과라고 말한다.[각주:29] 또한 이는 “국가 권력의 단순한 장악 때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을 확립했기 때문”이다.[각주:30]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단순히 지배 계급의 지배 도구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헤게모니”를 행사해야하는 것, 따라서 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이기 위한 조건이다.[각주:31] 따라서 자본주의 역시 안정적으로 재생산되지 않으며, 항상 치열한 계급투쟁의 결과로서만 재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연관된 하나의 쟁점이 나타난다. 우선 호네트에게 자본의 모순은 한편으로 생활세계의 규범들에 예속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본 자신의 성격에 따라 이러한 규범들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는 것 사이의 모순, 다시 말해 자본과 상호주관적 규범들 사이의 모순이다. 반면 알튀세르에게 자본의 모순은 한편으로 자본의 재생산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통한 생산관계의 재생산(즉 착취관계의 재생산)을 요구한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여기서 재생산되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적대적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계급투쟁이 바로 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을 통한 안정적 재생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사이의 모순이다. 이에 따라 고전적인 질문이지만, 자본주의에서의 변혁과 투쟁은 자본과 사회적 규범 사이의 모순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 근거한 것인가를 다시 물어야한다.


결론을 대신하여


  호네트와 알튀세르 사이의 유사성과 여러 쟁점(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어떤 생산적인 논의를 더 할 수 있을까? 흔한 말이지만, 전부 아니면 전무가 아니라면, 우리는 두 이론을 대면시킴으로써 두 이론을 보완할 수는 없을까? 필자는 마지막으로 두 이론 사이의 생산적 비교를 위해 호네트의 인정 이론을 중심으로 알튀세르의 문제제기들을 참조할 수 있는 지점들에 대해 간략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데올로기 개념에 입각해서 제기된 비판 외에도, 이미 호네트에게 지배의 문제, 권력의 문제, 자본의 유사-체계성과 노동의 조직화를 통한 자본의 지배의 문제가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특히 우리의 논의의 맥락에서 이브코비치는 매우 유의미한 논증들을 제공한다. 이브코비치에 따르면, 『권력비판』이나 「도덕의식과 사회적 계급지배」 등에서 초기 호네트는 사회적 하층민들의 불의의 경험이 체계적으로 왜곡되고 있음을 분석한다. 그러나 그는 호네트가 초기 저작들에서 가지고 있었던 권력과 계급 지배에 관한 통찰들을 『인정투쟁』 이후에 제시된 성숙한 자신의 테제들과 적절하게 종합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정투쟁』 이후에 호네트는 공론장에서 의제화되지 못하는 사회적 고통의 문제와 이러한 공론장이 가지고 있는 담론 권력에 관한 고찰들을 제시하지만, 사회적 인정 질서 혹은 “주체화 양식”에 내재한 권력과 계급 지배의 문제에 관해서는 소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브코비치는 “계급투쟁과 사회적 지배의 메커니즘에 관한 맑스주의적 이론화를 재정의하는 것”[각주:32]이 상호주관적 비판이론이 나아가야할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권력과 계급 지배에 관한 초기 호네트의 테제들과 성숙한 인정 이론의 테제들을 매개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이데올로기적 인정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의식과의 조우 속에서 호네트는 이데올로기적 인정 개념에 대해 고찰하면서, 초기의 그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권력관계나 계급 지배와 같은 문제들을 다시 사고할 기회를 얻었으며, 초기의 저작인 『권력 비판』과 중기의 저작인 『인정투쟁』 사이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절을 이데올로기적 인정 개념을 통해 매개할 수 있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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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네트는 지각 모델에서 ‘지각’이라는 표현에 의해 생길 수 있는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 지각 모델은 “‘인정’의 실천적 특징을 강조할 목적으로 ‘반응적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며] ...... 즉 우리는 인간 다양한 관점에서 이미 지니고 있는 가치 있는 속성에 올바로, 혹은 적절하게 반응하기 위해 인정 행위를 수행한다는 것”(Honneth(2003), 361)을 강조하는 것이다. 호네트는 처음에 수용 모델 혹은 지각 모델이라고 불렀던 것을, 후에 반응 모델(response mode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문으로]
  2. Honneth(2003), 360 [본문으로]
  3. Honneth(2003), 360-361; Honneth(2007), 331 [본문으로]
  4. Honneth(2007), 332 [본문으로]
  5. Honneth(2003), 364 [본문으로]
  6. Honneth(2003), 364 [본문으로]
  7. Honneth(2003), 334; 368-9 [본문으로]
  8. 문성훈(2005), 134-7. 호네트는 초기 저작인 『권력 비판(Kritik der Macht)』을 쓴 이후에, 인정 이론을 제시하면서 권력이나 사회적 관계의 비대칭성을 시야에서 놓치는 것 같다. 이는 추후에 다시 논의할 것이다. [본문으로]
  9. Honneth(2007), 323 [본문으로]
  10. Honneth(2007), 325-6 [본문으로]
  11. 호네트는 ‘물질적’이라는 표현을 임금이나 재화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할 뿐만 아니라, 법이나 제도와 같은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사용한다. [본문으로]
  12. Honneth(2007), 343-6 [본문으로]
  13. 호네트의 『인정투쟁』 및 『정의의 타자』 「무시의 사회적 동학」 등 참조. [본문으로]
  14. 장성빈(2017), 21 [본문으로]
  15. 장성빈(2017), 25 [본문으로]
  16. 장성빈(2017), 48 [본문으로]
  17. Honneth(2007), 324 [본문으로]
  18. Honneth(2007), 328 [본문으로]
  19. 장성빈(2017), 34 [본문으로]
  20.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다양하게 설명된다. 먼저 서관모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 우선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테제가 혁명을 수행할 역사적 주체와 혁명을 통한 미래에 대한 보증을 해체한다는 것과 다음으로 개인들이 동일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동일한 주체로 호명된다면, 피착취자의 능동적 역할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는 기능주의라는 비판에 대한 알튀세르의 답변 역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서관모(1999), 14) 그리고 진태원은 이데올로기가 갖는 1) 주체를 구성하는 “구성적” 성격과 2) 이것이 의식의 한 형태가 아닌 “세계 그 자체”인 것처럼 나타나는 “실정성”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부정성, 곧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할 필연성에 대해 사고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말하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의 이러한 한계가 우발성의 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든다고 말한다.(진태원(2011), 94-6) 최원은 몇몇 연구자들이 말하는 호명 너머의 있는 라캉의 ‘무의식적 주체’와 같은 관념을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개념, 즉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라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최원(2016), 347-8) [본문으로]
  21. 최원(2016), 333 재인용 [본문으로]
  22. 최원(2016), 334 [본문으로]
  23. Honneth(2000), 139-165 [본문으로]
  24. Deranty(2008), 243 [본문으로]
  25. Fraser, Honneth(2003), 218 [본문으로]
  26. Fraser, Honneth(2003), 375 [본문으로]
  27. Fraser, Honneth(2003). 2장 호네트, 「인정으로서의 분배」 [본문으로]
  28. 진태원(2011), 100 [본문으로]
  29. Althusser(1995), 329-330 [본문으로]
  30. Althusser(1995), 409 [본문으로]
  31. 진태원(2011), 95 [본문으로]
  32. Ivković(2014), 2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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