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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이론과 이데올로기라는 문제(1/2)


백선우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들어가면서


  사실상 전혀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호네트(Axel Honneth)의 인정 이론과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주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대한 노트」에서 제시되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자본주의의 재생산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제시된다. 마르크스가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처럼, 우선 자본은 “자본관계를 재생산한다”[각주:1] 여기서 알튀세르가 주목하는 것은 노동력의 재생산의 문제이며, 그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조건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 주로 『인정투쟁』에서 제시되는 호네트의 인정 이론은 인간의 긍정적 자기관계, 성공적인 자아실현, 자유로운 인간으로의 긍정적 주체화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제시된다. 호네트는 『정신현상학』을 저술하기 이전의 헤겔(G.W.F. Hegel)의 저작들(주로 『인륜성의 체계』나 『예나 체계기획Ⅰ』, 『예나 체계기획Ⅲ』)과 헤겔의 상호주관성 개념을 사회심리학에서 발전시킨 미드(George Herbert Mead)에 관한 연구를 통해 자신의 인정 이론을 제시한다. 따라서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제시되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성공적인 자기실현의 조건에 관한 연구에서 제시된 호네트의 인정 이론이라는 전혀 다른 목표와 문제의식을 가진 두 이론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가?


  이처럼 호네트의 인정 개념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지만, 호네트의 인정 이론에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설정에 입각한 비판이 제기되면 두 사람 사이에 쟁점이 형성된다. 왜냐하면 호네트에게 인정이 성공적인 자기실현의 필수적인 조건인데 반해, 알튀세르에게 인정은 이데올로기의 중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호네트가 말하는 사회적 인정이 지배적 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비판을 제기하는 것이다.


  나는 우선 호네트의 인정 이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간략하게 요약한 뒤,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왜 호네트의 사회적 인정 개념을 비판할 수밖에 없는가를 제시할 것이다. 이어서 호네트의 인정 이론에 이와 같은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는지, 그리고 호네트는 이러한 비판에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네트와 알튀세르 사이의 쟁점(들)과 이 둘의 차이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쟁점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호네트의 인정 이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


  호네트는 자신의 주저인 『인정투쟁』에서 개인의 긍정적 자기관계 혹은 성공적인 자기실현을 위한 조건으로 사회적 인정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헤겔과 미드를 경유하여 개인의 자아형성의 조건이 사회적 인정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호네트는 개인의 긍정적 자기관계,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의식을 위한 세 가지 인정 형태(사랑, 권리, 가치부여)를 제시하고, 이에 상응하는 무시의 세 가지 형태(폭력, 권리부정, 가치부정)를 제시한다. 개인은 세 가지 인정을 통해서 자기-믿음, 자기-존중, 자기-가치부여라는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의식(긍정적 자기관계)를 획득하고, 성공적인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 무시는 바로 이러한 긍정적 자기관계와 이를 통한 자기실현의 조건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인정은 단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상호주관적 관계일 뿐만 아니라, 가족, 사회, 국가와 같은 사회적 인정의 제도적 체현물들 포함한다. 호네트는 사회적 인정이 개인들의 자기실현의 조건, 즉 “좋은 삶”의 조건이라고 말하지만, ‘좋은 삶’이라는 표현에 포함된 목적론적 성격을 배제한다. 그는 칸트주의적 도덕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윤리를 종합하는데, 이는 한편으로 칸트주의적 도덕이 갖는 보편성과 자기-제한이라는 관념 수용하고,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윤리가 갖는 “좋은 삶”과 자기실현의 추구라는 관념을 수용하는 것이다.[각주:2] 이를 통해 호네트는 사회적 인정이 좋은 삶의 조건들을 보장해야만 한다는 “형식적 인륜성”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처럼 사회적 인정이 단순히 좋은 삶이나 자기실현과 같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좋은 삶의 조건들을 보장해야한다는 도덕적 관점 또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호네트에게 무시의 경험과 이를 통한 인정투쟁은 단순히 파괴적이거나 폭력적인 것 혹은 홉스의 자기 보존과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훼손된 인정을 다시 회복하는 것, 즉 자신의 불가침성 혹은 전인성(Integrität)을 회복하려는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투쟁이며 요구이다.[각주:3]


  몇몇 비판자들은 위와 같은 호네트의 사회적 인정이 “단지 지배적 체계에 순응하는 태도를 산출”하고, “사회적 지배를 보호하는 기능”[각주:4]을 수행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호네트는 이러한 비판의 원천을 ‘인정’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의 공통적 메커니즘임을 밝혔던 알튀세르에게서 찾는다. 우선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주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서 제시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알튀세르는 생산 조건의 재생산이라는, 호네트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맑스를 언급하며, “생산의 근본적 조건은 생산 조건들의 재생산”[각주:5]이라고 말한다. 맑스가 『자본』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자본은 어느 정도 규모의 시장과 상품(생산 수단, 원료뿐만 아니라, 특히 노동력이라는 상품) 등을 조건으로 한다. 다시 말해 자본가는 일정량의 축적된 화폐(혹은 선대된 자본)를 시장에서 생산 수단, 원료, 노동력으로 전화하고, 그 다음 이것들을 사용하여 어떤 상품을 생산하고, 이 상품을 다시 시장에서 팔아 화폐로 재전화할 수 있어야 하며, 오직 이러한 경우에만, 일정량의 화폐는 자본이 될 수 있다. 자본, 즉 “자기 자신을 증식하는 가치[화폐]로서의 자본의 운동”[각주:6]은 1회적 과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자기-증식과정을 무한히 되풀이한다. 그러나 자동적 주체(automatic subject)로서의 자본의 증식과정은 앞서 언급된 생산 조건의 재생산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본이 자기-증식하는 가치이며, 이러한 자기-증식이 잉여가치를 전유함으로써만 가능하고, 또 이 잉여가치가 생산 영역에서만 발생하는 한에서, 자본의 근본적 조건은,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생산 조건들의 재생산”이다. 맑스는 『자본(Das Kapital)』 1권에서 자본의 재생산에 관해 언급한다. 그는 자본의 자기-증식, 즉 “자본의 축적과정”에 관해 설명하기에 앞서 자본이 축적되지 않고, 단순히 재생산만 되고 있는 “단순재생산”에서 이에 관해 언급한다. 맑스가 말하는 핵심은 자본이 그 자신의 조건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맑스는 재생산되는 자본의 조건 세 가지를 언급한다 : 첫째는 생산수단의 재생산[각주:7], 둘째는 노동력 소유자인 노동자의 재생산[각주:8], 마지막으로 자본관계 혹은 생산관계의 재생산[각주:9]. 마지막 두 가지 조건은 노동력의 재생산의 문제로 통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력 상품 혹은 임노동자의 재생산은 노동력 소유자로서의 개인의 재생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이러한 개인이 항상 자본가-임노동자라는 생산관계 속에서 재생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동자를 임노동자로 생산하는 것” 혹은 “노동자의 끊임없는 재생산 또는 [임노동자화의] 영구화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조건”[각주:10]이며,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끊임없는 유지와 재생산은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지속적인 조건이다.”[각주:11]


  마찬가지로 알튀세르 또한 생산 조건의 재생산을 위해 재생산되어야 하는 두 요소를 언급한다 : 하나는 생산력, 다른 하나는 기존의 생산관계. 알튀세르는 우선 생산력의 재생산에 대하여 분석하는데, 생산력은 크게 두 요소, 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바로 이 후자인 노동력의 재생산에 주목한다. 이 후자에 관해 알튀세르는 맑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맑스가 주로 신체의 재생산에 관해 언급했다면, 알튀세르는 노동력의 재생산이 단순한 물적 조건을 보장함으로써 신체를 재생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로서의 ‘자질’과 ‘태도’의 재생산 또한 필요하다고 말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자질’의 재생산은 점점 생산의 외부에서, 즉 “자본주의적 학교 제도와 다른 기관들 및 제도들”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그가 말하는 “자질”은 주로 읽기, 쓰기, 셈하기와 같은 기본적인 능력과 생산 영역에서 필요한 다양한 형태의 기술들과 지식들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이러한 지식의 습득과 함께 배우는 다른 하나는 알튀세르가 “관례의 규범”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규범”은 “노동 분할에서 모든 담당자가 자신이 차지하게 ‘되어 있는’ 직위에 따라 지켜야하는 관습”이며, “도덕, 시민적-직업적 의식의 규범, 다시 말해 노동의 사회적-기술적 분할을 준수하는 규범이고, 결국은 계급적 지배에 의해 확립된 질서의 규범이다.” 다시 말해 알튀세르의 규범은 사회적 질서에 순응하는 태도의 함양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때 사회적 질서가 ‘좋은’ 혹은 정당화된 질서가 아니라, “계급적 지배에 의해 확립된 질서”이며, 이러한 질서에 순응하는 태도는 결국 계급적 지배를 재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이러한 사실을 보다 과학적인 언어로 말한다면, 우리는 노동력의 재생산이 노동력의 자질을 요구할 뿐 아니라, 동시에 노동력이 기존 질서의 규범에 복종하는 예속의 재생산,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는 예속의 재생산과, 착취와 억압 담당자들이 지배 계급의 지배를 ‘말을 통해’서 보장해 줄 수 있도록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잘 다룰 줄 아는 능력의 재생산을 요구한다”[각주:12]고 말한다. 알튀세르는 이처럼 개인들에게 생산 영역에서 필요한 다양한 지식들을 비롯한 “자질”과 순응적 ‘태도’를 “주입시키는”[각주:13] 학교를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고 말한다.[각주:14] 그리고 그는 학교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을 언급한다.[각주:15]


  알튀세르는 우선 노동력의 재생산의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을 설명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국가 장치라고 언급했던 것들(정부, 군대, 경찰, 법원, 감옥 등)을 “억압적 국가 장치”라고 부르고, 이로부터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을 구분한다. 억압적 국가 장치는 1) 지배 계급의 통일적 권력의 지휘 아래에 있는 하나의 단일체이며, 2) 주로 공적인 영역에 속하고, 3)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차이인데) 주로 “폭력을 통해 기능”한다. 반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1) 복수(複數)이고, 2) 대부분 사적인 영역에 속하며, 3) (마찬가지로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차이인데) 주로 “‘이데올로기’를 통해 기능”한다.[각주:16] 학교, 교회, 언론, 가족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언뜻 보기에 상이한 것들로 보이지만, 이것들의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각주:17] 통일성은 이것들을 작동시키는 이데올로기가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인] 지배적 이데올로기 아래 사실상 언제나 통일”[각주:18]되어 있다는 것에서 보장된다. 알튀세르는 억압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을 구분하고, 이것들의 특징들을 언급한 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의 ‘기능’은 무엇에 부합하는가?”[각주:19]라고 자문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억압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과 이 안에서 행사되는 국가 권력)을 통해 “생산관계[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인 착취관계]의 재생산”[각주:20]이 보장된다고 자답한다. 직접적으로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수행하는 것은 대게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지만,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의 작동을 위한 정치적 조건들을 폭력과 억압을 통해 보장하는 것이 바로 억압적 국가 장치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억압적 국가 장치는 지배 계급의 통일된 지휘 아래 종속되어 있는 하나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결국 생산관계의 재생산에 있어서 국가 권력을 소유한 지배 계급과 이들의 이데올로기, 즉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매우 크게 작용한다.[각주:21]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튀세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중 학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는 노동자나 농민부터 착취담당자, 억압담당자, 이데올로기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의 아이들에게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 때문이다.[각주:22]


  이와 같은 논의를 알튀세르는 계급적 지배가 단순히 공적 영역에 속한 장치(억압적 국가 장치)에 대한 장악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에 속한 장치들(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에 대한 장악을 통해서만 안정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각주:23] 이제 우리는 이러한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장치들”에 관한 논의를 넘어서 과연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개인을 주체화시키는지, 또 이러한 주체화 과정이 어떻게 지배적 질서에 순종적으로 예속되는 주체를 생산하는지를 살펴봐야한다. 이러한 논의를 살펴본 뒤 우리는 모든 사회적 인정이 이데올로기의 기능에 종속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아마 ‘호명 테제’, 즉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각주:24]는 테제일 것이다. 그러나 호명 테제에 관해 논의하기에 앞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설명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가 비-마르크스적인 것이라고 말한다.[각주:25]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를 “순전한 꿈” 혹은 단지 “현실적 역사의 전도된 반영”[각주:26]으로서, 즉 완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데 반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관한 두 가지 테제를 제시하면서 이를 비판하고, 자신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제시한다 :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표상한다”[각주:27]는 것과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가 있다”[각주:28]는 것. 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1) 개인들이 항상 어떤 계급에 속하는 구체적인 개인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추상적인 개인 X로서, 계급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그러한 조건에 앞서 그 자체로 성립하는 개인으로서 상상적으로 표상/재현/상연”되지만, 2) 이처럼 상상적 관계의 표상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환상이나 공상이 아니고, 한편으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나 사회적 제도와의 관련된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 파스칼의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반복적인 관례나 의례에 의한 물질적 실천들이라는 점에서 “물질적인 것”이다.[각주:29]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 즉 개인이 현실적 존재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 자체가 물질적 존재를 부여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각주:30]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 개념과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는 알튀세르의 테제는 기존의 (칸트적 의미에서) 구성하는 주체를 구성되는 주체로 대체한다.[각주:31] 이를 통해 알튀세르는 주체화 이전에 존재하는 기원적 주체라는 관념을 해체하며,[각주:32] 이와 같은 주체가 단지 이데올로기의 산물, 즉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주체라는 것, 다시 말해 “계급의 지배 질서를 재생산하기 위한 메커니즘의 파생물”이라고 주장한다.[각주:33]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에 물질성을 부여하는 것이 개인들의 반복적인 의례나 관례의 물질적 실천들이라면, 반대로 개인들의 이러한 모든 실천들은 오직 이데올로기 안에서만 가능하다.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에 예속되는 것(subjected)과 주체(subject)가 된다는 것, 즉 주체화(subjectivation)는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더 이상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며, 오직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예속되는 주체화 과정을 통해 구성된 것일 뿐이다. 이러한 호명 테제에 알튀세르는 몇 가지를 덧붙인다 : 1)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는 것, 2) 이데올로기의 영원성으로 인해, 이데올로기는 언제나-이미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며, 개인은 언제나-이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된 주체라는 것, 3) 호명은 항상 호명된 자에게 도달한다는 것. 알튀세르는 경찰에 의한 시민의 호명이나 신에 의한 모세의 호명 등을 예로 제시한다. “대문자 주체”, 즉 신, 국가, 민족 등과 같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는 대문자 주체는 언제나-이미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고, 개인은 언제나 자신이 이 대문자 주체에 예속되어있음을 인정한다. 알튀세르는 이렇게 대문자 주체에 의해 호명된 주체들을 대문자 주체의 “거울들” 혹은 “반영들(reflections)”이라고 부른다.[각주:34] 대문자 주체에 의한 호명은 개인들이 스스로는 가질 수 없었던 어떤 “상상적 통일성”[각주:35](예컨대 성민(聖民), 시민, 한민족 등을) 그들에게 부여하며, 또한 이들에게 “구원” 혹은 “보상받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주체들이 ‘잘’ 예속되도록 한다.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는 이유는 바로 주체들이 이러한 복종, 예속, 종속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과 이것 외에 어떤 자유도 허락하지 않는 것과, 이를 통해 기존의 지배적 질서를 “혼자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주체들이 저절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각주:36]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주체에 예속에 의해서만, 그리고 주체의 예속을 위해서만 주체”를 남겨둔다. 그리고 이 모든 주체화 과정에서 은폐된 것 혹은 개인(혹은 주체)에게 인식되지 않는 것(méconnaissance)은 주체들의 모든 실천들, 활동들을 통해서 결국 생산관계의 재생산, 즉 착취관계의 재생산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알튀세르에게 주체화는 억압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학교를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킴으로써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개인에게 대문자 주체의 호명을 통해 어떤 통일성을 부여하고, 보상을 약속함으로, 자발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예속되고 복종하는 “저절로 움직이는” 주체로 만들어낸다. 이제 우리는 앞서 호네트에게 제시된 비판, 즉 사회적 인정이 “단지 지배적 체계에 순응하는 태도를 산출”하고, “사회적 지배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라는 비판이 제기된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입각해서 보면, 모든 주체화(알튀세르) 혹은 사회적 인정(호네트)은 결국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리고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적 질서에 대한 예속과 복종이며,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주체화된 주체들은 어떤 정체성과 보상을 보장받으면서, 자발적 예속과 이데올로기 안에서의 자유로운 실천들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은폐된 착취관계의 재생산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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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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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rx(1867), 793. 인용 및 페이지 표기는 국역본이 있는 경우 국역본을 기준으로, 국역본이 없는 경우 원전을 기준으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2. 호네트, 『정의의 타자』(문성훈, 이현재, 장은주, 하주영 역, 나남, 2009)에 수록된 「정의의 타자」 및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사이에서」 참조. [본문으로]
  3. 호네트, 『인정투쟁』(문성훈, 이현재 역, 사월의책, 2011) 참조. [본문으로]
  4. Honneth(2007), 323-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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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Marx(1867), 433. [본문으로]
  7. Marx(1867), 777 [본문으로]
  8. Marx(1867), 255 [본문으로]
  9. Marx(1867), 793 [본문으로]
  10. Marx(1867), 783 [본문으로]
  11. Marx(1867), 785 [본문으로]
  12. Althusser(1995), 350-4 [본문으로]
  13. Althusser(1995), 376 [본문으로]
  14. Althusser(1995), 374 [본문으로]
  15. Althusser(1995), 365. 알튀세르가 열거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다음과 같다 : “1) 종교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AIE)(상이한 여러 교회들의 체제), 2) 교육적인 AIE(공립과 사랍의 상이한 ‘학교들’의 제도), 3) 가족적인 AIE, 4) 법률적인 AIE, 5) 정치적인 AIE(다양한 정당들을 포함하는 정치 제도), 6) 조합적인 AIE, 7)정보의 AIE(언론, 라디오, 텔레비전 따위), 8) 문화적인 AIE(문학, 미술, 스포츠 따위)” [본문으로]
  16. Althusser(1995), 366 [본문으로]
  17. Althusser(1995), 365 [본문으로]
  18. Althusser(1995), 368 [본문으로]
  19. Althusser(1995), 369-370 [본문으로]
  20. Althusser(1995), 370 [본문으로]
  21. Althusser(1995), 370-372 [본문으로]
  22. Althusser(1995), 376.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전문 지식’(프랑스어, 산수, 자연사, 과학, 문학) 혹은 단순하게 말해 순수 상태의 지배 이데올로기(도덕, 시민 교육, 철학)”를 포함한다. [본문으로]
  23. 진태원(2011), 90 [본문으로]
  24. Althusser(1995), 393 [본문으로]
  25. Althusser(1995), 380 [본문으로]
  26. Althusser(1995), 382 [본문으로]
  27. Althusser(1995), 384 [본문으로]
  28. Althusser(1995), 387 [본문으로]
  29. 진태원(2011), 90-2 [본문으로]
  30. Althusser(1995), 389 [본문으로]
  31. 최원(2016), 44 [본문으로]
  32. 이에 관한 슬로베니아 학파, 버틀러, 지젝, 라캉, 알튀세르 등의 입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라캉 또는 알튀세르』(최원, 난장, 2016) 3장 2절 참조. [본문으로]
  33. 진태원(2011), 94 [본문으로]
  34. Althusser(1995), 402-3 [본문으로]
  35. Honneth(2007), 328 [본문으로]
  36. Althusser(1995), 4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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