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아침, 페테르부르크, 권총
- 레오니드 아론존의 시 몇 편 -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오볼두예프의 시에 대한 글을 쓰고 한국을 다녀오니 12월 말이었습니다. 연말이라 술을 마시고 정초라서 술을 마시다보니 어느새 세 달이 훌쩍 지나고 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시인 레오니드 아론존의 <달력을 넘겨봄(Листание календаря)>을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라틴어식으로 월명을 붙여서 3월을 '마르트(март)'라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 슬라브어권 문화에서는 고유의 월명이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등에서는 아직도 슬라브식으로 달을 부르는데 3월은 '베레젠(березень)'이라고 합니다. 베료자(береза), 즉 자작나무 싹이 나는 달이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답니다.
아론존이라는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작년 이맘때쯤 학교에서 열린 학회에서였습니다. 이 학회는 학과에 개설된 “문학에서의 시각적인 것”이라는 세미나에서 봄마다 개최하는데, 학부생들과 대학원생들이 주축이 됩니다. 조직도 학생들이 하고 발표도 학생들이 하고 토론도 학생들이 합니다. 학회의 하루 일정이 끝날 때면 이십분 가량 ‘오늘의 총평’도 합니다. 작년의 학회 주제는 “부조리, 그로테스크, 환상”이었습니다. 이틀 동안 40개 정도 되는 발표를 오전 열시 반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합니다. 중노동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게 말린 북어 두드리듯 러시아어로 탈탈 두드려 맞는 가운데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어느 학생이 아론존의 시에서 나타나는 그로테스크 이미지에 대해서 발표한 것을 들었습니다. 귀가 솔깃해져서 학회가 끝나고 아론존의 시를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그 중에 인상 깊었던 구절이 바로 <달력을 넘겨봄>에 나오는 “부엉이와 생쥐의 대화는 / 가난한 자연 안에 맴돌았고”였습니다. 그러다 “이반 림바흐 출판사”라는 곳에서 크라우드 펀딩으로 아론존의 두 권짜리 작품집 증보판을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장 1000루블을 내고 작품집 두 권과 아론존의 사진이 커다랗게 있는 포스터, 프로젝트 담당자가 직접 쓴 감사의 손편지를 받았습니다.
다음은 아론존이 1965년에 쓴 포에마 <달력을 넘겨봄>의 첫 번째 시입니다.
Листание календаря I Как если б я таился мёртв и в листопаде тело прятал, совы и мыши разговор петлял в природе небогатой, и жук, виляя шлейфом гуда, летел туда широкой грудью, где над водою стрекот спиц на крыльях трепеща повис, где голубой пилою гор был окровавлен лик озёр, красивых севером и ракой, и кто-то, их узрев, заплакал и, может, плачет до сих пор. |
달력을 넘겨봄 I 나는 죽어서 사라진 듯 낙엽에 몸을 숨겼고, 부엉이와 생쥐의 대화는 가난한 자연 안에 맴돌았고, 딱정벌레는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가슴을 넓게 편 채 날아가고, 물 위에 뜨개바늘들 재잘거리는 소리 두 쪽 날개에 바들바들 떨며 걸려 있는데, 산맥의 푸른 톱에 갈려 피투성이 된 호수들의 얼굴, 북방의 성궤를 지녀 아름다운 호수들, 누군가 호수들을 바라보고 울음을 터뜨려 지금까지 울고 있나보다. |
이 포에마에는 총 네 편의 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시를 읽고서부터 살짝 당황스러워집니다. 달력을 넘겨보는데 왜 엉뚱하게 부엉이, 생쥐, 딱정벌레, 호수들이 나오는 걸까요? <韓國의 大自然>이라는 제목이 붙어 각 달마다 멋진 풍경을 보여주는 달력을 본 적이 있습니다. 1960년대 레닌그라드에도 이런 선진문물이 있었나봅니다. 그런데 생쥐는 달력용 사진으로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달력을 넘겨봄’이라는 제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넘겨봄을 뜻하는 러시아어 ‘리스타니예(листатние)’와 낙엽을 뜻하는 ‘리스토파트(листопад)’는 ‘리스트’라는 유사한 소리를 공유합니다. ‘리스트(лист)’는 종이를 뜻하기도 하고 나뭇잎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시적 화자가 달력을 넘기다 10월이나 11월, 즉 가을이 나오는 달을 마주하여 자연스레 낙엽을 떠올려 그 아래 몸을 숨기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달력의 종이들 아래로 들어가 풍경이 그의 몸 위로 펼쳐지도록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에 나타나는 가을의 풍경은 고요해 보이지만 사실 매우 긴장되어 있습니다. 시적 화자는 ‘죽은 듯’ 몸을 숨겨 숨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애쓰고 있고, 부엉이와 생쥐의 대화는 진전 없이 하나의 주제만을 맴돌 뿐입니다. 딱정벌레는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지만 결코 그 어느 곳에 도달하지 못한 채 날개 소리만 윙윙 거립니다. 호수는 노을을 받아 붉게 물든 것인지 피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자연의 모든 움직임들은 과거에 일어나고 있던 일로 그려지는데 움직임들의 결과가 없습니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야 시간을 인식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움직임들 자체가 고정된 시점에 갇혀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시간성이 희박합니다. 단 하나의 행위, 즉 ‘울고 있다’만 과거 완료 동사(заплакал)와 현재형(плачет)으로 쓰였습니다. ‘울음을 터뜨려 ~ 지금도 울고 있나 보다.’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갇혀있는 과거에서 울음만이 시간의 물꼬를 현재로 터줍니다. 두 번째 시에서 시적 화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극한으로 밀고 나갑니다.
II Гадюки быстрое плетенье я созерцал как песнопенье и видел в сумраке лесов меж всем какое-то лицо. Гудя вкруг собственного у кружил в траве тяжелый жук, и осы, жаля глубь цветка, шуршали им издалека. Стояла дева у воды, что перелистывала лица, и от сетей просохших дым темнел, над берегом повиснув. |
II 살모사의 잽싼 또아리를 나는 노래처럼 관조하며 숲의 어스름 속 모든 것들 사이에서 어떤 얼굴을 보았다. 자기가 소유한 우 주변에서 윙윙거리는 육중한 딱정벌레는 풀 속에서 빙글빙글 돌았고, 땅벌들은 꽃의 깊은 곳에 침을 꽂아 넣으며 먼 곳에서 꽃잎으로 바스락거렸다. 물가에는 젊은 여자가 얼굴들을 하나씩 넘기고 있었고, 둑 위에 걸린 연기는 바싹 마른 그물들 때문에 어두워져 갔다. |
첫 번째 시에서는 울고 있는 알 수 없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두 번째 시에서는 ‘젊은 여자’가 나타납니다. ‘젊은 여자’는 ‘물가에서’ ‘얼굴들을 하나씩 넘겨보고’ 있습니다. ‘하나씩 넘겨보고 있다’라는 동사 ‘페레리스티발라’에도 ‘리스트’라는 소리가 들어 있어 제목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그녀는 물가에서, 즉 ‘물 곁에서’ 얼굴들을 달력처럼 넘겨봅니다. 왠지 물은 흐르는 시간을 상징하고, ‘얼굴들을 하나씩 넘겨봄’이라는 여자의 행위는 시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듯도 합니다. 게다가 두 번째 시에서도 생물들과 사물들의 움직임은 그 진폭이 매우 작고 마치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여서 물과 여자는 더욱 시간성을 지향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봄이나 여름이 배경일 두 번째 시의 시간성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5행의 ‘우(у)’입니다. 러시아어로 ‘나는 ~을 가지고 있다’라고 할 때, ‘우 메냐 ~(у меня...)’라고 합니다. 직역하자면, ‘나에게는 ~이 있다’가 됩니다. ‘우’라는 전치사는 ‘~의 곁에’를 의미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왜 딱정벌레는 ‘자기가 소유한 우 주변에서 윙윙거리는’ 것일까요? 우선 ‘우’라는 소리는 딱정벌레가 나는 소리와 비슷하고, 딱정벌레를 뜻하는 ‘주크(жук)’와도 각운을 이룹니다. 또, 시 전체에서 ‘우’라는 모음은 열 번이나 반복되어 ‘우’라는 소리 자체가 잔상으로 남습니다.
소리의 차원을 넘어 ‘우’라는 전치사는 모든 움직임의 양태를 보여줍니다. 딱정벌레가 ‘우’ 주변에서 윙윙거리듯 젊은 여자 역시 물 ‘곁에서’(우 보디) 얼굴들을 넘겨보고 있습니다. 만약 ‘젊은 여자’가 물속에 들어가 얼굴들을 하나씩 넘겨보고 있었다면 그녀는 시간의 흐름에 푹 빠져 있는 것이겠지만 어디까지나 그녀는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어느 정도 빗겨나 있습니다.
또, ‘어두워져 가는’ 연기 역시 시간의 변화라는 착시에 빠질 수 있게 하는 덫입니다. 연기는 대기 중에 흐르지 못하고 ‘둑 위에 걸려’ 있으며 게다가 ‘그물들’이라는 장애물도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즉, 두 번째 시의 모든 것은 무언가의 ‘곁에서(우)’ ‘살모사의 또아리’처럼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III Зимы глубокие следы свежи, как мокрые цветы, и непонятно почему на них не вижу я пчелу: она по-зимнему одета, могла бы здесь остаться с лета, тогда бы я сплетал венок из отпечатков лап и ног, где приближеньем высоки ворота северной тоски и снег в больших рогах лосей не тронут лентами саней. |
III 겨울의 깊은 흔적들은 젖은 꽃처럼 신선한데, 어째서 그 흔적들에 꿀벌이 보이지 않는 걸까: 꿀벌은 겨울옷을 입고 여름부터 여기 남아 있을 텐데, 그렇다면 나는 앞발과 뒷다리의 자국들로 화환을 엮었을 테고, 그 화환에는 북방의 슬픔으로 세운 대문이 선뜻 다가와 높이 솟아 순록의 커다란 뿔에 앉은 눈[雪]은 썰매의 리본에도 스치지 않았을 텐데. |
두 번째 시는 무언가의 ‘곁에서’ 머물고 있는 움직임들, 시간이 흐르지 못하도록 또아리를 틀고 있는 자연을 보여주었습니다. 세 번째 시의 첫 구절을 보면 ‘겨울의 깊은 흔적들’이라는 말 때문에 역시나 하나의 시간적 틀 안에 무언가가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세 번째 시는 ‘깊은 흔적들’ 안에서 역동적인 시간을 보여줍니다. 우선 겨울의 ‘흔적들’이라는 말 때문에 지금은 겨울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이겠죠. 흔적들을 통해 겨울은 지나간 것이면서도 여기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며 현재로 이어집니다. 겨울의 흔적들은 봄이나 여름의 ‘젖은 꽃들’과 겹쳐지면서 겨울 다음에 올 시간들과 묶이고 꿀벌을 불러냅니다. 그런데 꿀벌은 어디까지나 잠재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합니다. 꿀벌은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지만 ‘겨울옷을 입고’ 여기에 있었을 법 합니다. 그랬다면 꿀벌은 눈밭에 자신의 흔적들을 남겼을 것이고 시적 화자는 꿀벌의 앞발과 뒷다리가 남긴 ‘자국’으로 화환을 엮겠다고 합니다. 가정법으로만 존재하는 꿀벌의 흔적들에서 ‘북방의 슬픔으로 세운 대문’과 ‘순록의 커다란 뿔에 앉은 눈’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의 시간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겨울의 깊은 흔적들’은 살모사의 또아리처럼 그 안에 다양한 시간들, 가능한 사건들을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에서는 과거에 갇힌 움직임들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뛰쳐나와 현재로 연결됩니다. 반면, 두 번째 시에서는 영원히 진행될 뿐인 움직임들이 과거에 갇혀 뭉쳐진 용수철처럼 긴장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시에서는 힘을 응축하고 있는 용수철이 나선형으로 펼쳐지듯 ‘깊은 흔적들’이 잠재적인 가능성들을 펼쳐냅니다. 이로써 왜 포에마의 제목이 ‘달력을 넘겨봄’인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시적 화자는 달력을 순서대로 넘겨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달에 갇혀 그 달 ‘곁에’ 머물러 있기도 하고, 또 어느 달이 미래 혹은 과거의 다른 달들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는 워낙 짧아서 나머지 세 편의 시들과는 다르게 시간의 다양한 양상들을 보여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IV И здесь красива ты была, как стих «печаль моя светла». 1965 |
IV 여기서도 너는 아름다웠구나, “나의 슬픔은 밝다”라는 구절처럼. 1965 |
네 번째 시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가 나옵니다. 그것도 ‘너는 아름답구나’라는 현재가 아니라 ‘아름다웠구나’라는 과거입니다. ‘너’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너’는 현재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시적 화자는 ‘너’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기서도 아름다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론존은 “나의 슬픔은 밝다”라는 구절로 새로운 시간성을 가져옵니다. 이 구절은 푸시킨이 1829년에 쓴 시에서 나옵니다.
На холмах Грузии лежит ночная мгла; Шумит Арагва предо мною. Мне грустно и легко; печаль моя светла; Печаль моя полна тобою, Тобой, одной тобой... Унынья моего Ничто не мучит, не тревожит, И сердце вновь горит и любит — оттого, Что не любить оно не может. | 그루지야의 언덕에 어둠이 내린다: 앞에는 아라그바 강이 웅성거린다. 슬프고도 가뿐하다: 나의 슬픔은 밝다: 나의 슬픔은 너로 가득하다, 너 하나만으로... 나의 비애는 그 무엇에 시달리지도, 흔들리지도 않는다. 심장은 다시 타올라 사랑을 하고 – 왜냐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에. |
모든 동사가 현재형으로 쓰인 푸시킨의 시는 오로지 현재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조지아의 언덕에 올라 아라그바 강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시적 화자가 느끼는 슬픔에 모든 구절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슬픔이라는 정서는 사실 가벼움 또는 가뿐함과는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흔히 고개를 숙이고 움츠러들어 있는 것으로 떠올려집니다. 푸시킨의 시적 화자는 오히려 높은 곳에 올라 강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슬픔은 가볍고 밝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물은 어둠에 가려지고 강물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그는 오로지 자신의 슬픔과 ‘너’에만 집중합니다. 이때, 그의 슬픔에는 그가 그리워하는 ‘너’만 존재합니다. 잡다한 것은 없고 오직 ‘너’만 있기 때문에 그의 슬픔은 ‘너’로 가득 차 있어도 가벼울 수 있습니다. ‘나의 슬픔은 밝다’라는 구절이 너를 언제나 사랑하는 것이 도리인 현재, 일종의 절대적 현재에 바쳐졌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아론존의 ‘여기서도 너는 아름다웠구나’라는 구절 역시 현재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아론존의 ‘너는 아름다웠구나’라는 과거에 대한 결론에서는 그러한 결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흔적 또는 자국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너’는 여기에 없지만 ‘너’가 남긴 자국 덕분에 ‘너’는 여전히 잔상으로 존재하며 순수한 그리움은 현재 속에서 이 흔적을 통해 지속됩니다.
이렇게 해서 ‘달력을 넘겨봄’이라는 행위는 너의 흔적들을 뒤적이며 그리워하는 것이 됩니다. ‘calendar’라는 말이 ‘불러내다, 장엄하게 부르다’를 뜻하는 라틴어 ‘calāre’에서 왔다는 것을 아론존이 염두에 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시에서 나타나듯 흔적을 통해 시간을 가로질러 너를 불러내는 행위가 공교롭게도 달력의 라틴어 어원과 비슷한 것은 신기합니다.
아론존이 직접 그린 그림
절정의 시
앞에서 본 푸시킨의 시 첫 부분에서 ‘언덕(холмы)’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사실 언덕은 아론존의 모든 시를 통틀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다음은 언덕이 나오는 시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고, 가장 유명한 시 <아침>입니다.
Утро Каждый лёгок и мал, кто взошёл на вершину холма. как и лёгок и мал он, венчая вершину лесного холма! Чей там взмах, чья душа или это молитва сама? Нас в детей обращает вершина лесного холма! Листья дальних деревьев, как мелкая рыба в сетях, и вершину холма украшает нагое дитя! Если это дитя, кто вознёс его так высоко? Детской кровью испачканы стебли песчаных осок. Собирая цветы, называй их: вот мальва! вот мак! Это память о рае венчает вершину холма! Не младенец, но ангел вечает вершину холма, то не кровь на осоке, а в травах разросшийся мак! Кто бы ни был, дитя или ангел, холмов этих пленник, нас вершина холма заставляет упасть на колени, на вершине холма опускаешься вдруг на колени! Не дитя там - душа, заключенная в детскую плоть, не младенец, но знак, знак о том, что здесь рядом Господь! Листья дальних деревьев, как мелкая рыба в сетях, посмотри на вершины: на каждой играет дитя! Собирая цветы, называй их: вот мальва! вот мак! Это память о Боге венчает вершину холма! 1966 |
아침 언덕 꼭대기에 올라간 자는 모두 가볍고 작아라. 여름 언덕의 꼭대기에 관(冠)을 씌우는 그는 얼마나 가볍고, 얼마나 작은지! 거기 누가 팔을 휘젓는가, 누군가의 영혼인가 아니면 기도 소리인가? 여름 언덕의 꼭대기는 우리를 아이로 만든다! 먼 곳의 잎사귀들, 그물에 걸린 작은 물고기 같아라, 벌거벗은 아이가 언덕 꼭대기를 장식한다! 만일 저것이 아이라면, 누가 아이를 높은 곳에 데려다 놓은 걸까? 모래밭 백양나무 줄기가 아이의 피로 더럽혀졌네. 꽃을 모으며 말 하렴: 이것은 아욱! 이것은 양귀비! 천국에 대한 기억이 언덕 꼭대기에 관을 씌운다! 젖먹이가 아니라 천사가 언덕 꼭대기에 관을 씌우면, 백양나무를 적신 피가 아니라, 풀밭에 피어난 양귀비! 아이인지 천사인지, 언덕의 포로가 누구이든, 언덕 꼭대기는 우리에게 무릎 꿇라 하고, 너는 언덕 꼭대기에서 털썩 무릎 꿇을 것이다! 거기에는 아이가 아니라 – 영혼, 아이의 육신에 갇힌 영혼이, 젖먹이가 아니라, 신호, 여기 바로 주님이 있다는 신호가! 먼 곳의 잎사귀들, 그물에 걸린 작은 물고기 같아라, 꼭대기를 보아라: 꼭대기마다 아이가 놀고 있다! 꽃을 모으며 말 하렴: 이것은 아욱! 이것은 양귀비! 신에 대한 기억이 언덕 꼭대기에 관을 씌운다! 1966 |
이 시를 읽고 나면 머릿속에 두 개의 단어만 남습니다. 바로 ‘언덕(холм)’과 ‘꼭대기(вершина)’입니다. 우리말로 옮길 때, ‘언덕 꼭대기’라는 말이 걸리적거려 문맥에 따라 ‘언덕’ 또는 ‘꼭대기’라고만 하고 싶었지만 워낙 자주 반복되는 말이라서 원문에 이 단어들이 나오는 경우 그대로 옮겼습니다. 언덕, 그것도 언덕의 중턱이 아니라 꼭대기가 이 시의 의미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시의 첫 줄 마지막과 마지막 줄 마지막에 나오는 ‘언덕의 꼭대기(вершина холма)’, 그리고 시의 중간 중간에 계속 반복되는 ‘언덕’, ‘꼭대기’라는 단어들은 시 전체를 얽는 그물 같습니다.
앞에서 본 푸시킨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언덕에 올라 강을 바라보며 자신의 슬픔에 집중합니다. 반면, 시 <아침>의 첫 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멀리 있는 언덕의 꼭대기를 낮은 곳에서 바라보며 거기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언덕의 꼭대기는 시의 배경이 아니라 시의 주제가 됩니다. 만일 언덕의 꼭대기가 배경이었다면 시의 전반부에서 한 번 언급되고 이후에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야기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에서는 오히려 언덕의 꼭대기가 전면에 등장해 거기에 오른 사람을 아이로 변화시킵니다.(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바라보면 사람이 작게 보여서 아이처럼 보이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그리고 이렇게 아이가 된 사람은 오히려 언덕 꼭대기를 위한 장식이 되는데, 반복되는 구절 때문에 아이는 천국에 대한 기억, 신에 대한 기억과 동일시됩니다. “벌거벗은 아이가 언덕 꼭대기를 장식한다”, “천국에 대한 기억이 언덕 꼭대기에 관을 씌운다”, “신에 대한 기억이 언덕 꼭대기에 관을 씌운다.” 이렇게 언덕 꼭대기는 모든 것을 천국 또는 신과 관련된 것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천국, 신, 높은 곳, 흩뿌려진 아이의 피 등의 이미지들은 왠지 희생제의를 떠올리게 합니다. 나무줄기를 적신 아이의 피는 비극적이고 끔찍하지만 이것은 곧 꽃들이 됩니다. “꽃을 모으며 말 하렴: 이것은 아욱, 이것은 양귀비.” 마치 샤먼이 사물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 이름의 사물이 되게끔 하는 것 같습니다. 또, 시의 전체적인 어조 또한 의식의 절정에 이른 샤먼의 입에서 마구 터져 나오는 말들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 전체는 언덕의 꼭대기, 절정의 상태 자체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절정에 이르기 위해 무엇을 한다가 아니라 언제나 절정에 머물러 신에 대한 기억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의 아이, 천국을 기억하는 자는 최초의 인간 아담처럼 사물을 명명할 권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시의 제목 ‘아침’ 역시 신에게 가장 가까운 언덕의 꼭대기에 이르러 존재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요?
시인 올가 세다코바는 아론존의 이 시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아론존은 아이처럼 세계를 긍정하고 즐거워하는 시적 태도를 보리스 파스테르낙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파스테르낙의 시 역시 세계와 존재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두 시인은 결정적인 지점에서 갈라집니다. 파스테르낙은 이 기쁨을 노래하기 위해 무엇이 주변에 있는지, 왜 기쁨이 샘솟는지 시에서 준비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의 서정시에는 산문적인 요소들이 많이 침투합니다. 그러나 아론존은 밑도 끝도 없이 절정에 머물며 탄성을 지릅니다. 그래서 세다코바는 ‘절정’이라는 말이 ‘언덕’과 ‘꼭대기’를 뜻하는 라틴어 ‘culmen’에서 왔다는 점에 착안해 아론존을 가리켜 ‘절정의 시인(поэт кульминации)’이라고 말합니다.
레오니드 르보비치 아론존
페테르부르크는 불행하지만 버려진 곳에 가면 얼마나 좋은지!
아론존이라는 시인에 대한 소개를 미처 못 했습니다. 레오니드 르보비치 아론존(Леонид Львович Аронзон, 1939-1970)은 1939년 3월 24일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1970년 10월 13일 타시켄트에서 죽었습니다. 1950-60년대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언더그라운드 예술가 집단으로 리아노조보 그룹이 있었다면, 레닌그라드에는 아론존을 비롯한 일군의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이 있었습니다. 역시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새로운 목소리를 찾으려는 이들이었죠. 리아노조보 그룹이 리아노조보라는 지명을 얻으며 동인의 성격을 얻었다면, 당시 레닌그라드의 시인들은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으로 크게 묶이고 그 안에서 결성한 작은 동인 모임들로 나뉩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역시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의 시인으로 출발해 나중에는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론존의 작품들로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의 성격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론존은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가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 혜성처럼 나타나 새로운 시의 방향을 보여주고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론존의 작품들은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의 시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작품 세계의 폭을 한정한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미래주의자 흘레브니코프의 실험들을 이어가며 아방가르드적 경향을 보여주기도 하고(애석하게도 이러한 작품들은 우리말로 옮길 수가 없어서 이 글에서 다룰 수 없었습니다), 전통적인 시 형식들을 엄격하게 따르며 그 안에서 나름의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특히 엄격한 시 형식인 소네트를 정말 즐겨 썼습니다. 리아노조보 그룹의 시인들이 보다 더 아방가르드적인 경향을 보인다면, 아론존은 러시아시의 전통들을 많이 활용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사실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 시인들의 흔적들을 좀 찾아보려고 1월 말에는 페테르부르크를 짧게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도착한 다음날이 레닌그라드 봉쇄 해방 70주년 기념일이어서 의미 있는 여행이기도 했지만 때마침 불어 닥친 맹추위와 그에 따른 게으름 때문에 아론존이 살던 아파트를 들르지 못했습니다. 대신 레닌그라드, 즉 ‘페테르부르크’가 나오는 시를 옮겨 봅니다.
*** Несчастно как-то в Петербурге. Посмотришь в небо — где оно? Лишь лета нежилой каркас гостит в пустом моем лорнете. Полулежу. Полулечу. Кто там полулетит навстречу? Друг другу в приоткрытый рот, кивком раскланявшись, влетаем. Нет, даже ангела пером нельзя писать в такую пору: «Деревья заперты на ключ, но листьев, листьев шум откуда?» 1969 |
*** 아무튼 페테르부르크는 불행해. 하늘을 보려 하면 – 하늘은 어디 있지? 아무도 살지 않는 여름의 골조만이 내 텅 빈 오페라글라스의 손님. 반쯤 누워야지. 반쯤 날아가야지. 거기 누가 마중 나와 반쯤 날아오려나? 우리는 서로의 살짝 벌린 입 속으로, 고개 까닥 인사하며, 날아든다. 안 돼, 천사의 깃펜으로도 그런 때엔 이런 걸 쓰면 안 돼: “나무들은 열쇠로 걸어 잠갔는데, 잎사귀, 잎사귀들의 소란은 어디서 오는 걸까?” 1969 |
이 시만큼은 세다코바가 아론존의 시를 일컬어 말한 ‘절정의 시’에 해당되지 않아 보입니다. 시 <아침>과는 다르게 시적 화자의 태도가 약간은 삐딱합니다. 무언가에 대들고 어깃장을 놓는다는 의미에서 삐딱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세계에 대한 시선 자체가 비스듬합니다. 페테르부르크는 까닭이 있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아무튼’ 불행합니다. 시 <아침>의 언덕 꼭대기가 하늘로 활짝 열려있는 것과는 반대로 페테르부르크에서는 하늘을 보려고 해도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다 근처 늪지대라서 흐린 날도 많고 안개도 자주 끼어서 그런 듯합니다. 여름인데도 아무도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있습니다. 만약 19세기 러시아 소설에 텅 빈 여름 페테르부르크가 나온다면 그건 모두들 근교의 별장, 즉 다차에서 휴가를 즐기러 떠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처럼 한가한 도시, 산책자가 사색을 하며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도시의 이미지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존에게서 텅 빈 여름 페테르부르크는 불행과 고독일 뿐입니다. 이런 공허함은 역시나 한 손으로 삐딱하게 드는 오페라글라스에 담깁니다.
아론존이 직접 그리고 쓴 시 "아무튼 페테르부르크는 불행해." 작품집 199쪽.
가장 재미있게 느껴지는 구절은 바로 “반쯤 누워야지, 반쯤 날아가야지 / 거기 누가 마중 나와 반쯤 날아오려나?”입니다. 확 드러눕는 것도 아니고, 훌쩍 날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누울까 말까, 날아갈까 말까 하는 애매한 움직임들이 시적 화자의 삐딱함 그 자체를 잘 보여줍니다. 서로를 맞이하면서도 입을 활짝 벌리지 않고 벌린 듯 안 벌린 듯 애매합니다. 반갑게 와락 껴안으며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 까닥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합니다. 이처럼 시큰둥하고 무엇을 안 하는 것도 하는 것도 아닌 불행한 페테르부르크에서 시인은 언제나 기쁜 ‘절정’을 포기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 때에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구절은 시 <아침>에 나오는 “그물에 걸린 작은 물고기” 같은 잎사귀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슨 일인지 이제는 더 이상 마냥 기뻐하며 방방 뛰고 손뼉을 칠 수가 없나봅니다.
이 시를 쓰고 다음 해, 아론존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시켄트로 여행 갑니다. 그리고 사냥총을 다루다가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공식적인 사인은 자살이지만, 부검 결과에 따르면 총을 부주의하게 다루다가 스스로를 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장난삼아 ‘반쯤’ 쏘아보려다가 그만 목숨을 잃게 된 것일까요? 방아쇠를 반쯤 당겨보았던 걸까요? 아론존이 죽기 한 달 전에 쓴 다음 시를 읽으면 왠지 그러한 정황들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 Как хорошо в покинутых местах! Покинутых людьми, но не богами. И дождь идёт, и мокнет красота старинной рощи, поднятой холмами. И дождь идёт, и мокнет красота старинной рощи, поднятой холмами. Мы тут одни, нам люди не чета. О, что за благо выпивать в тумане! Мы тут одни, нам люди не чета. О, что за благо выпивать в тумане! Запомни путь слетевшего листа и мысль о том, что мы идем за нами. Запомни путь слетевшего листа и мысль о том, что мы идем за нами. Кто наградил нас, друг, такими снами? Или себя мы наградили сами? Кто наградил нас, друг, такими снами? Или себя мы наградили сами? Чтоб застрелиться тут, не надо ни черта: ни тяготы в душе, ни пороха в нагане. Ни самого нагана. Видит Бог, чтоб застрелиться тут не надо ничего. <Сентябрь 1970> | *** 버려진 곳에 가면 얼마나 좋은지! 사람들은 버렸지만 신은 버리지 않은. 비가 오고 언덕들이 들어올린 오래된 숲의 아름다움이 젖는다. 비가 오고 언덕들이 들어올린 오래된 숲의 아름다움은 젖는다. 여기 오직 우리, 사람들은 우리 짝이 못돼. 오, 안개 속에서 마시는 술은 얼마나 복된지! 여기 오직 우리, 사람들은 우리 짝이 못돼. 오, 안개 속에서 마시는 술은 얼마나 복된지! 떨어져 날아간 잎사귀의 길과 우리는 우리 뒤를 걷는다는 생각을 기억하라. 떨어져 날아간 잎사귀의 길과 우리는 우리 뒤를 걷는다는 생각을 기억하라. 이봐, 누가 우리에게 그런 꿈들을 상으로 준거야? 우리 스스로 상을 준 건가? 이봐, 누가 우리에게 그런 꿈들을 상으로 준거야? 우리 스스로 상을 준 건가? 여기 홀로 쏘아 죽는데, 그 무엇도 필요 없어. 마음의 짐도, 권총에 담긴 화약도. 권총도 필요 없어. 신이 보고 있으니, 여기 홀로 쏘아 죽는데 아무 것도 필요 없어. 1970년 9월 |
시의 형식이 참 특이합니다. 반복되지 않는 구절은 1연의 “버려진 곳에 가면 얼마나 좋은지! / 사람들은 버렸지만 신은 버리지 않은.”과 마지막 연의 “권총도 필요 없어. 신이 보고 있으니 / 여기 홀로 쏘아 죽는데 아무 것도 필요 없어.”뿐입니다. 나머지 연들에서는 뒤에 나오는 연의 첫 두 행은 앞 연의 마지막 두 행을 받아서 반복됩니다. 그래서 앞과 뒤만 남겨 두고 이 시는 아코디언처럼 접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아론존은 이 시를 줄인 버전도 만들었는데 그것도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으로 여겼습니다.
Как хорошо в покинутых местах! Покинутых людьми, но не бобгами. И дождь идет, и мокнет красота лесных деревьев, поднятых холмами. И дождь иедт, и мокнет красота лесных деревьев, поднятых холмами,- как хорошо в покинутых местах, покинутых людьми, но не богами! <сентябрь 1970> |
버려진 곳에 가면 얼마나 좋은지! 사람들은 버렸지만 신은 버리지 않은. 비가 오고 언덕들이 들어올린 오래된 숲의 아름다움이 젖는다. 비가 오고 언덕들이 들어올린 오래된 숲의 아름다움은 젖고, - 버려진 곳에 가면 얼마나 좋은지! 사람들은 버렸지만 신은 버리지 않은. 1970년 9월 |
2연 8행으로 줄인 시는 위아래로 접은 데칼코마니 같습니다. 첫 구절이 마지막에서도 반복되어서 마치 3연에 ‘비가 오고 언덕들이 들어올린 / 오래된 숲의 아름다움이 젖는다.’라고 이어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코디언을 길게 늘인 것 같은 긴 버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신과 시적 화자만 남은 폐허에서 여러 말들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앞 연의 마지막 두 행에서 시적 화자가 말하면 신인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돌림노래처럼 받아서 부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의 울림들이 ‘버려진 곳’의 적막함을 증폭합니다.
올해 3월 14-15일에도 "문학에서의 시각적인 것" 세미나에서 학회를 열었습니다. 이번 주제는 "왜곡된 세계들의 관찰자: 시학과 수용"이었습니다. 이 세미나에서는 지난 10월부터 계속 '관찰자'에 대한 에세이들과 작품들을 읽고 있습니다. 저도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을 보고 학회에 참가해 "폭포 이미지에 나타난 시인-관찰자와 언어의 불안정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아론존에 대해 발표했던 페테르부르크 학생이 올해에도 와서 아론존의 포에마 <산책>에 나타난 관찰자에 대해 발표해 주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폴리나 로지츠카야였습니다. 한 해의 달력을 넘기다보니 작년에 왔던 폴리나가 올해에도 또 와 있었습니다.
마침 아론존에 대한 이 글을 쓰고 있던 참이라 쉬는 시간에 이것저것 물어보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폴리나는 3월 24일 아론존의 생일을 맞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흐마토바 박물관에서 조촐하게 그의 시를 읽는 행사가 열린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한동안은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로 묶이는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1월 말,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모두들 자유로워(Все свободны)’라는 이름의 독립서점에 들렀습니다. 이 서점에서 시인 아르카디 다르고모셴코의 초기작들을 모아놓은 시집 <필체(Почерк)>를 발견했습니다. 다음번에는 이 시집을 읽어보겠습니다.
P.S. 다음 시는 번역할 필요가 없으니 덧붙여 봅니다. 제목은 ‘휴지(休止)’입니다. 첫 편에서 보았던 삽기르의 <미래의 전쟁>과 비교해서 읽어볼 만합니다.
https://en-movement.tistory.com/123?category=754421
작품집 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