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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과 공동체의 전복(2/2)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이승준 옮김(연구공간 L)

잉여 가치와 사회적 공장

그러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통 맑스주의가, 특히 이른바 맑스주의 정당들의 이데올로기 및 실천에서 늘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던 특정한 관점의 근거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그 관점이란 이렇다. 여성들이 사회적 생산의 외부 즉 사회적으로 조직된 생산 순환의 외부에 있을 때, 그들은 또한 사회적 생산성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여성들의 역할은 가정 바깥에서 주변적으로 고용된 경우를 제외하면, 언제나 생산 외부에 있는 심리적으로 종속된 자의 것으로, 즉 본질적으로 가정에서의 일련의 사용가치를 공급하는 자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맑스의 관점인데, 그는 공장들에서 노동하는 여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하고는 여성들은 도덕적으로 더 높은 삶의 형태로 지내는 가정에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주부의 역할이 지닌 진정한 본성이 맑스에게는 결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관찰자들은 한 세기가 넘게 랭카셔(Lancashire)의 여성 면직노동자가 성적으로 더 자유롭고 가사 허드렛일에서 남성들에게 더 도움을 받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다른 한편 가정 바깥에서 일하는 여성의 비율이 낮은 요크셔(Yorkshire)의 탄광 지역 여성들은 남편이라는 인물에게 더 많이 지배받는다. 사회화된 생산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착취를 규정할 수 있었던 이들조차, 가정에서 착취당하는 여성들의 지위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남성들은 그들이 여성과 맺는 관계에서는 너무나 타협적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여성들만이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고, 또 여성 문제로 넘어갈 수 있다.

우리는 임금 안에서 가사노동이 사용가치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잉여가치의 생산에도 본질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각주:1]. 이는 육체·심리·직업 등과 같은 모든 수준에서 종속된 인격성으로서의 여자의 역할 전체에 대해 진실이며, 여자의 역할은 자본주의적 노동 분업에서, 사회적 수준에서의 생산성 추구에서, 명확하고도 필수적인 자리를 차지했고 현재까지도 계속 그렇다. 사회적 생산력의 원천, 즉 잉여 가치 형성의 원천으로서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자. 먼저 가족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살펴보자.


A. 비임금노예에 기초한 임금노예의 생산성

임금 노동에 대한 정의에서, 가사 노동을 하는 여성은 생산적이지 않다고 종종 주장된다. 자본주의적 조직화가 개별화된 활동으로 변형시켜 주부들의 등에 떠맡긴 엄청난 양의 사회적 서비스를 생각한다면, 사실상 정확히 그 반대가 진실이다. 가사노동은 본질상 “여자의 일”이 아니다. 한 명의 여성이 세탁과 청소에서 한 명의 남성보다 더 잘 능력을 발휘하거나 덜 고단한 것이 아니다. 그 일들은 여성들이 노동력 재생산에 기여하는 한에서 사회적 서비스들이다. 그리고 자본은 바로 자기의 가족 구조를 제도화함으로써 남성을 이러한 기능에서 “해방시켰으며”, 그래서 그는 직접적 착취에 대해 완전히 “자유롭다.” 그래서 또한 남성은 여성이 그를 노동력으로 재생산하기에 충분한 “돈을 버는 일”에 대해 자유롭다[각주:2]. 그리하여 자본은 이러한 서비스들을 가족 안의 여성에게 할당하는 데 성공하고 동일한 과정에 의해서 여성들의 노동 시장으로의 유입을 통제하는 정도까지, 남성들을 임금 노예로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가정에 필수적이며 자본은 여전히 이러한 가족형태를 필요로 한다. 현재의 발전 수준에서 자본은 일반적으로 유럽 그 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에서 여전히 자신의 노동력을 —  미발전 지역들에서 온 수백만 명의 남성들의 형태로 — 사들이는 것을 선호하는 한편 그와 동시에 여성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낸다[각주:3].

그리고 여성들은 임금도 받지 않고 파업하러 나가는 일도 없이 가사노동을 수행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항상 경제 위기로 자신의 일자리에서 주기적으로 쫓겨나 가정으로 돌아온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본에게] 유용하다. 가족, 즉 필요할 때마다 항상 보호하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 이 모성적 요람은 실업자가 즉각적으로 파괴적인 외부자 무리가 되지 않게 하는 사실상 최고의 보증서였다.

노동계급 운동의 조직된 정당들은 가사노동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려고 조심해 왔다. 그들이 항상 여성들을 더 낮은 종류의 삶의 형태로 취급했고, 심지어 공장들에서조차 그렇게 취급했다는 사실을 제하고서도, 이러한 가사노동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조직인 노조의 전체 기반에 도전하는 것이겠다. a) 공장만을 다루는 조직, b) 측정되고 “지불된” 노동일만을 다루는 조직, c) 우리에게 주어진 임금의 측면만을 다루고, 삭감된 임금의 측면, 즉 인플레이션은 다루지 않는 조직. 여성들은 항상 노동계급 정당들에 의해 자신들의 해방을 어떤 가설적인 미래로 미루도록 강요당해 왔으며, 이들 정당들에 의해 투쟁의 범위가 제한된 남성들이 “그들 자신들을” 위해 획득한 결과물에 의존하게 했다.

실제로 노동계급 투쟁의 모든 국면은 여성들의 종속과 착취를 더 높은 수준에 고정시켜 왔다. 주부연금[각주:4](우리는 이것이 왜 임금이 아닌지 의아하다) 법안의 제출은, 여성들을 주부로, 남성들(그리고 여성)을 임금 노예로 더욱 제도화하고자 하는 정당들의 온전한 의지를 보여주는 데 기여할 뿐이다. 

이제 우리 중 그 누구도 탈거(emancipation)와 해방(liberation)이 노동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노동은 가정 안이든 밖이든 여전히 노동이다. 임금 소득자의 독립은 남성 못지않게 여성에게도 자본을 위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노동계급 여성의 해방이 그녀가 가정 밖에서 일자리를 얻는 데 있다는 점을 옹호하는 이들은 문제의 일부를 볼뿐,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일관 작업대로의 예속이 곧 부엌 싱크대로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또한 일관 작업대의 예속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여성들이 어떻게 착취되는지 모른다면 남성들이 어떻게 착취되는지를 정말로 알 수 없다는 점을 다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너무나 중요해서 우리는 그것을 별도로 다룰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하려는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세계에서 생산을 하고 있는데도 임금을 지불받지 못함에 따라 사장이라는 인물은 남편이라는 인물 뒤로 감춰진다는 점이다. 남편은 가사 서비스의 유일한 수혜자인 것처럼 나타나고, 이것은 가사노동에게 모호하고 노예 같은 성격을 부여한다. 남편과 아이들은 자신들의 애정어린 참견, 애정어린 협박을 통해 이러한 노동의 첫 번째 감독관, 직접적인 통제자가 된다.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자기처럼 일하러 나가서 그와 함께 집에 올 때조차도 신문을 읽으면서 자신의 저녁식사가 요리되고 제공되기를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 분명히 가사 노동이 드러내는 특정한 착취 형태는 그에 상응하는 특정한 투쟁 형태, 즉 여성의 가족 안에서의 투쟁을 요구한다.

정확히 이러한 가족이 자본주의적 노동 조직화의 바로 그 기둥임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가족을 단지 상부구조로 간주하고, 변화를 위해서 오로지 공장들에서의 투쟁 단계들에만 의존하는 실수를 범한다면, 우리는 계급투쟁에서의 기본적인 모순 그리고 자본주의적 발전에 기능하는 모순을 항상 영구화하고 악화시킬 절름발이 혁명으로 옮겨갈 것이다. 달리 말해서, 우리 자신을 단지 사용가치의 생산자로만 생각하고 주부를 노동계급에 외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영구화하는 것일 수 있다. 주부들을 계급에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한, 계급투쟁은 매순간 모든 지점에서 지연당하고 좌절당하며, 또한 자신들의 행동의 완전한 범위를 찾아낼 수도 없다. 이것을 더 자세히 상술하는 것은 여기서 우리의 과제는 아니다. 하지만 가사노동이 생산적 노동의 은폐된 형태임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것은 여성 투쟁의 목표와 형식 모두에 관한 일련의 문제를 제기한다.


고립된 노동자의 투쟁을 사회화하기

이어지는 우리의 요구, 즉 “우리에게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라”는 요구는, 현재 이탈리아에서의 세력관계에 비춰보면 마치 우리가 가사노동 조건과 더불어 생산되는 제도화된 노예제의 조건을 더 견고히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요구는 실제로 대중을 동원하는 목표로는 거의 쓸 수가 없다[각주:5].

그러므로 문제는 투쟁 형태, 즉 주부가 집에 평화롭게 있으면서 한 푼도 지불되지 않을 임금을 기다리면서 기껏해야 가끔 있는 거리 시위에 참여할 준비나 하도록 방치하지 않는 투쟁 형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가사노동을 완전히 거부하고, 주부로서의 우리의 역할과 우리 실존의 게토로서의 가정을 거부함으로써 가사노동의 전체 구조를 즉시 깨부수는 투쟁 형태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문제는 이 노동을 중단하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부의 모든 역할을 박살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출발점은 가사노동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아니라 이러한 투쟁에서 주인공으로서의 위치를 어떻게 찾느냐에 즉 가사노동의 더 높은 생산성이 아니라, 투쟁에서의 더 높은 전복성에 있다.

가사노동으로 주어진 시간과 가사노동으로 주어지지 않은 시간의 관계를 즉시 뒤엎자. 매일 침대시트와 커튼을 다리고, 광이 날 때까지 마루를 닦거나 먼지를 터는 데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그렇게 한다. 분명 그것은 여성이 우둔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앞서 했던 평균이하 학급과의 비교를 떠올려보자. 앞에서 말했듯 자본이 여성들을 사회적으로 조직된 생산의 과정과 차단시키기 때문에, 여성들은 실제로 이러한 노동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화된 생산에서 차단된다고 사회화된 투쟁에서 차단된다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은 가사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시간을 필요로 하고 동시에 전에는 가정이라는 게토 수준에서만 정체성을 찾았던 여성에게 대안적인 정체성을 제공한다. 여성들은 투쟁의 사회성에서 자신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부여하는 어떤 힘을 발견하고 실행한다. 새로운 정체성은 새로운 등급의 사회적 힘이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사회적 투쟁의 가능성은 가정에서의 여성노동이 지닌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성격에서 나온다. 현 시점에서 가정에서 제공되는 사회적 서비스가 여성의 역할과 동일시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사회적 서비스만이 여성의 역할을 사회적으로 생산적이게 만드는 유일하고 주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은 기술적으로 이 노동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 적어도 이탈리아에서 자본이 당분간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핵가족의 중추인 주부의 위치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가사노동의 자동화를 기다리는 것은 헛수고인데, 왜냐하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핵가족의 유지는 이러한 서비스의 자동화와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실제로 이 서비스들을 자동화하려면 자본은 우리가 아는 그런 가족을 파괴해야 할 것이다. 즉 자본이 [사회적 서비스를] 완전히 자동화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사회화를 추동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서비스의 사회화가 의미하는 것을 아주 잘 안다. 즉 그것은 항상 아무리 못해도 파리 코뮨의 정반대이다!

자본주의적 재조직화가 이뤄낼 수 있고 또한 우리가 이미 미국과 선진 자본주의 나라 일반에서 감지할 수 있는 새로운 도약은, 협동노동을 통해 자본주의적 평등 및 그 지배를 더 가깝게 반영하는 가족을 구축함으로써 가정에서의 전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즉 자유롭지 못한 전자본주의적인 여성을 그 중추로 삼아 가정에서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불완전성”을 넘어서는 것이고, 또한 가족이 그 형태에서 자본주의적인 생산기능인 노동력의 재생산을 더 가깝게 반영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러면 우리가 앞서 말했던 것, 즉 스스로를 가정과 동일시하는 여성과 주부들은 자신들의 노동에서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 모두는 “당신은 항상 집에서 할 일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너무나 잘 안다.

그들은 그들이 갇힌 사방면의 벽 너머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전자본주의적인 노동 양식으로서의 주부의 상황과 그 결과 그녀에게 부과된 이러한 “여성성”은 그녀로 하여금 이 세계 및 타자들을 보게 만들며, 또한 모호하고 본질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또 알 수도 없고 그렇게 살아본 적도 없는 어떤 것으로서의 노동의 전체 조직화를 보게 만든다. 이는 날마다 집을 나가 이것과 만나는 남편의 어깨 뒤에 그림자로만 인식된다.

그래서 우리가 여성들이 가사노동 시간과 비가사노동 시간의 관계를 뒤엎어야만 하고 가정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한 바는 이웃 및 친구일 뿐만 아니라 또한 노동의 동료 및 노동에 반대하는 동료인 다른 여성들과 함께 하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주부의 역할을 파괴하려는 바로 이 의지가 그들의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온갖 경쟁 관계를 지닌 개인화된 여자라는 전통을 깨부수고, 여성들 간에 진정한 연대를, 즉 방어를 위한 연대가 아니라 공격을 위한, 투쟁의 조직화를 위한 연대를 재구축해야 한다.

노동의 공통 형식에 맞서는 공통적인 연대. 같은 방식으로 여성들은 아내나 어머니로서만 자신들의 남편과 아이를 만나는 것을, 즉 그들이 바깥 세상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 갖는 식사시간에만 만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가정 바깥의 모든 투쟁의 장소는, 바로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모든 영역이 가정을 전제하기 때문에, 여성들에 의한 공격의 기회를 제공한다. 공장 회합, 반상회, 학생 총회, 이들 각각은 여성투쟁을 위한 합법적 장소인데, 여기서 여성들은 남성을 여성 대 남성으로,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어머니 대 아버지나 아들 대 딸이기보다는 개인들로서 만나고 대면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자본이 가족 안에서 내파하기를 원했던 모순들 및 좌절들을 집 밖에서 폭발시킬 모든 가능성들을 제공한다.


계급투쟁을 위한 새로운 나침반

여성들이 노동자 총회에서 밤에는 잠자는 것 외에도 사랑을 하고 싶기 때문에 야근을 금지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이것은 그럼 여성들이 낮에 일한다면 낮 동안 사랑하고 싶어할 거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의 사회적 조직화에 맞서 여성으로서 그녀들 자신의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며 남편과 자녀에게 불만을 품는 어머니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개입과 대면에서 여성들은 또한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그들이 들어온 것처럼 계급의 이해관계와 분리되고 소외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정당들 특히 좌파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은 노동계급 투쟁의 영역을 규정하고 한정해 왔다. 사랑하는 것 또 사랑하려고 야근을 거부하는 것은 계급의 이해관계 안에 있다. 왜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남성들이 아니라 여성들인가를 탐구하는 것은 계급의 전체 역사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것이다. 

학생 총회에서 당신의 아들, 딸을 만나는 것은 다른 개인들 속에서 말하는 개인들로서 그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한 명의 개인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은 낙태를 해 왔고 또 아주 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해 왔다. 의과대 학생 총회에서 왜 그들이 우선 여성들—그들이 학생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다—로 자신들의 관점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우연히 한 예로 의학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강당과 진료실에서 유독 제3계급 환자들만이 실험용 쥐의 신세가 되는 것만이 아닌 노동계급에 대한 거듭된 착취를 볼 수 있다. 유독 여성들은 실험의 일차적 대상이 되며, 또한 의사들의 성적 모욕, 사디즘, 전문가랍시고 떠는 거만함 등을 감내해야 하는 일차적 대상이다.)

요약해 보자. 바로 이러한 여성운동의 폭발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그러한 폭발은 가족의 자본주의적 조직화로 인해 지금껏 모든 연계들로부터 거세되어온 여자의 이해관계들이 지닌 특수성을 표현한 것이다. 전체 계급 착취가 여성 착취라는 특정한 매개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폭발은 바로 그러한 이해관계의 억제에 기초를 둔 이 사회 모든 곳에서 벌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의 여성 운동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착취가 위치해 있는 모든 지역을 정확히 타격해야 한다. 즉 우리는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여자의 이해관계가 지닌 모든 특수성을 되찾아야 한다. 

모든 기회는 좋은 것이다. 즉 퇴거 위협을 받는 가족들에서의 주부들은 그녀들의 가사노동이 자신들이 못낸 몇 달 치 집세를 메우고도 남는다고 반박할 수 있다. 밀라노 교외 지역의 많은 가족들이 이미 이러한 투쟁 형태를 채택해왔다. 

가전제품들은 갖고 싶은 멋진 물건이지만 그것을 만드는 노동자들에게는 많이 만들수록 시간을 소모하며 자신을 고갈시키는 것이다. 주어진 임금으로 이 모든 가전제품들을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또한 모든 아내가 이 모든 제품들을 혼자 다뤄야 한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그녀가 보다 더 기계화된 수준에서 가정에 붙박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나 복받은 노동자이며, 복받은 아내인가!

문제는 공동 식당을 갖추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자본이 먼저 노동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피아트 자동차를 만들고 나서야 그들의 구내식당을 만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이웃에게 공동 식당을 요구하는 것, 이 요구를 노동조직화와 노동시간에 반대하는 투쟁 실천에 통합하지 않은 채 요구하는 것은, 공동체 수준에서 여성들을 단지 몇몇 매혹적인 일에 편성하여 그 뒤 우리가 점심시간에 공동식당에서 단체로 똥물을 먹을 가능성이 농후한 어떤 새로운 도약에게 추진력을 줄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알기를 바란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공동식당이 아니며, 또한 동일한 수준의 놀이방이나 탁아소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님을[각주:6]. 우리 역시 공동식당, 탁아소, 세탁기, 식기세척기를 원하지만, 또한 우리는 선택[자체]를 원한다. 즉 우리가 원할 때 몇몇의 사람들과 사적으로 식사하고, 우리가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서 아이들, 노인, 아픈 사람 등과 시간을 갖는 일을 말이다. “시간을 갖는 것”은 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 노인, 아픈 사람과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당신이 아이들이나 노인이나 병약자를 맡겨놓은 주차장에 잠깐 방문하러 뛰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배제된 첫 번째 사람인 우리가 이러한 투쟁에서 주도권을 쥐고 다른 모든 배제된 사람들, 즉 아이들, 노인, 환자가 사회적 부를 재전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그들이 우리와 재통합되고 또 우리 모두가 의존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우리 여성이 스스로 원한 만큼 자율적으로 남성과 재통합되게 하는 것인다. 왜냐하면 배제된 이들이 우리처럼 직접적인 생산적 사회과정으로부터, 사회적 실존으로부터 배제된 것은 자본주의적 조직화에 의해서 야기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 거부 

그러므로 우리는 여성의 노동인 가사노동을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발명한 적이 없고 또 임금을 지불받아 본 적도 없이 우리에게 부과된 노동이다. 이 노동은 우리를 가정에 머물도록 강제하기 위해서 터무니없는 시간인 하루 12-13시간 동안을 감당하도록 우리에게 강제되어 왔다.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는 가정을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여성들과 단결하기를 원하며, 여성들이 집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모든 상황들에 맞서 싸우기를 원하며, 간호실, 학교, 병원, 요양원, 또는 정신병원이든 어디든 게토들에 있는 모든 이들의 투쟁들에 우리 자신을 연결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떠나는 것은 이미 하나의 투쟁 형태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가 거기에서 수행하는 사회적 서비스들은 그러한 조건들에서 수행되기를 그칠 것이며, 그래서 가정 밖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지금까지 우리가 졌던 짐을 그것이 속한 곳인 자본의 어깨에 정확히 던질 것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투쟁에 의한 이러한 변화는 여성들 쪽에서의 가사노동의 거부가 격렬하고 대규모이고 결정적일수록 더욱 더 격렬할 것이다.

노동계급 가족은 깨부수기가 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이 노동계급의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로지 노동자로서일 때만 버팀목이며, 바로 그 이유로 자본의 버팀목이다. 계급의 부양, 계급의 생존은 바로 이 가족에게 달려 있다. 단 여성을 희생시키고, 계급 자체에 맞서면서. 여성은 임금 노예의 노예이며 그녀의 예속은 그녀가 남성에게 예속되는 것을 보장한다. 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가족은 노동자를 보호하지만, 또한 그 그리고 그녀가 오로지 노동자로 있을 수밖에 없도록 보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가족에 대항하는 노동계급 여성의 투쟁이 중요한 이유이다.

가정 안팎에서 일하는 다른 여성들을 만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투쟁의 기회를 갖게 한다. 우리의 투쟁이 노동에 대항하는 투쟁인 한 그 투쟁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적 노동에 맞서 벌이는 투쟁에 각인된다. 그러나 가사노동을 통한 여성의 착취가 핵가족의 생존과 연결된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갖는 한, 이러한 투쟁의 고유한 과정은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에 의해 세워진 핵가족의 파괴를 통과해야만 계급투쟁에 새로운 차원을 덧붙일 수 있다.



B. 수동성의 생산성


그러나 가족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임금을 받지 않는 사회적 서비스의 숨겨진 공급자라는 역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했듯이 여성을 순전히 보충적인 기능들에 유폐시키고 그녀들을 핵가족 안에서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것은, 그녀들의 신체적 온전함의 발육 장애를 그 전제로 삼는다. 그녀를 항상 열등한 존재로 규정했던 가톨릭교회의 성공적인 지원을 받는 이탈리아에서 여성은 결혼 전에는 성적인 금욕을 강요당하고, 결혼 후에는 아이를 갖는 것으로만 운명 지어졌으며, 그녀에게 아이를 갖는 것을 의무로 부과한 억압된 섹슈얼리티를 강요당한다. 그것은 “영웅적 어머니와 행복한 아내”라는 여성상을 창조해 냈는데, 그 여성상에서 보면 그녀의 성적 정체성은 순수한 승화(昇華)이고, 그녀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 표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녀는 가족 갈등의 완충물이다. 그래서 여성의 불감증으로 정의되었던 것은 성 기능에서도 마찬가지로 강제된 수동적 수용성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족에서의 여성의 이러한 수동성은 그 자체로 “생산적”이다. 첫째, 여성의 수동성은 그녀를 남성들이 집밖 세계에서 겪는 모든 억압들의 배출구로 만들고, 동시에 자본주의적 노동 조직의 지배가 남성들에게 이식한 권력에 대한 허기짐을 채울 대상으로 만든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성은 자본주의적 조직화에게 있어서는 생산적인 것이 된다. 즉 그녀는 자본주의적 조직화가 야기한 사회적 긴장들의 안전밸브로 행동한다. 둘째, 여성의 인격적 자율성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 그녀로 하여금 그녀가 겪는 좌절을 언제나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연속된 욕구들 속에서 승화시키게 하는 한, 즉 그녀가 가사노동에서 강박적인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것과 정확히 병행하는 일종의 소비주의로 승화시키는 한 여성들은 생산적이 된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무엇을 가져야만 하는지를 그녀들에게 말해주는 것은 분명 우리의 과제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정의할 수 없다. 우리의 관심사는 이러한 승화를 불필요하게 만들 투쟁을 조직하는 데에 있다. 


죽은 노동과 섹슈얼리티의 고통

우리는 의도적으로 “승화”라는 말을 쓴다. 단조롭고 하찮은 허드렛일로 인한, 그리고 성적 수동성으로 인한 좌절감들은 단어들로만 분리할 수 있다. 성적 창조성과 노동에서의 창조성은 모두 인간의 욕구가 요구하는 영역들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선천적 활동과 후천적 활동을 상호작용”[각주:7]시킬 자유의 여지를 준다. 여성들에게 있어 (그리고 그에 따라 남성들에게 있어서도) 선천적 능력과 후천적 능력은 동시에 억압된다. 여성들의 수동적인 성적 수용성은 강제적으로 깔끔떠는 주부를 만들어내고 단조로운 일관 작업대를 치유하게 만들 수 있다. 가사노동 대부분이 가진 사소함과, 똑같은 일을 매일, 매주, 매해 행하고, 휴일에는 두 배로 행하는데 요구되는 훈육은, 금지되지 않은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순교를 위한 준비기이다. 우리는 하얀 시트 보다 더 하얀 곳에서의 깨끗한 섹스에서 행복을 얻으라고 교육받으며, 섹슈얼리티와 다른 창조적 활동을 동시에 희생시키라고 교육받는다. 

지금까지 여성 운동은 가장 두드러지게는 질 오르가즘의 신화를 파괴함으로써, 여성의 성적 잠재력을 남성들에 의해 엄격하게 규정되고 제한되게끔 하는 신체적 메커니즘을 폭로해 왔다. 이제 우리는 섹슈얼리티를 창조성의 다른 측면들과 재통합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고, 우리가 하는 노동이 우리와 우리의 개인적 능력들을 불구로 만든다면, 그리고 우리가 성관계를 맺은 사람이 우리의 주인이거나 또한 그의 노동에 의해서 불구가 된 자라면, 우리의 섹슈얼리티가 항상 억제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질 신화를 폭파하는 것은 종속과 승화에 대립되는 여자의 자율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클리토리스 대 질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양자[클리토리스와 질] 대 자궁의 문제이다. 질은 우선 상품으로 팔리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통로, 즉 자궁의 자본주의적 기능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자연적 능력들, 우리의 사회적 소양의 일부이다. 결국 섹슈얼리티는 가장 사회적인 표현이며 가장 깊은 인간의 소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섹슈얼리티는 자율성을 소멸시킨다. 노동계급은 계급으로서의 자신을 초월하기 위해 하나의 계급으로 조직을 꾸린다. 그런 계급 안에서 우리는 자율성을 초월할 기반을 창조하기 위해서 자율적으로 조직을 꾸린다.   

   

여성들에 대한 ‘정치적’ 공격

그러나 우리의 존재 방식과 투쟁에서 우리 자신을 조직하는 방식을 찾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의 운동을 형성할 때조차도 너무나도 열렬히 여성들을 공격하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 공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망각되지 않으려고 노동과 소비를 통해 그녀 자신을 방어하는 여성은 계급 단결을 깨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 고발되는 죄의 일부를 목록으로 만들어 보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1. 여성은 예를 들어 자신의 옷과 자녀의 옷을 사려고 그녀의 남편이 더 많은 임금을 받기를 원한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남편의 생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이 가져야 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생각에 근거해서 말이다. 남편은 돈을 벌려고 열심히 일한다. 아내는 더 많은 부, 더 많은 임금을 위해 싸우는 남편의 투쟁을 돕기보다는 단지 그들의 부족한 부를 나누는 또 다른 종류의 분배를 요구할 뿐이다. 

2. 여성은 다른 여성들 보다 더 매력적이려고, 다른 여성들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걸 가지려고, 자기의 이웃집 보다 더 깨끗하고 더 잘 정돈된 집을 가지려고, 다른 여성들과 경쟁한다. 그녀는 계급에 기반해 다른 여성들과 연대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3. 여성은 스스로 자기 집에 처박혀 그녀의 남편이 생산 라인에서 하는 투쟁을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남편이 파업하러 나갈 때 남편을 뒷바라지하기는커녕 심지어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이다. 그녀는 보수당에 투표한다. 


이것들은 여성을 반동적이거나 기껏해야 후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심지어 공장투쟁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남성들, 그리고 자신들의 전투적 행위 때문에 사회적 지배자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처럼 보이는 남성들이 제시한 몇 가지 이유들이다. 그들이 후진적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여성을 비난하는 것은 남성들에게는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그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준 여성의 종속적 지위로부터 혜택을 받았다는 것을 덧붙이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그래서 어머니와 여동생, 딸들이 “자신들의” 남자에게 봉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반면에 엄격하게 “정치적인” 것처럼 보이며 계급을 위해서만 개시되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공격을, 타고난 남성 패권과 분리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어렵다. 

이 문제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1. 소비자로서의 여성

가정을 소비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은 여성들이 아니다. 소비 과정은 노동력 생산에 필수적이며, 여성들이 쇼핑하기(즉 소비하기)를 거부하면 이것은 파업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긴 해도, 우리는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조직된 노동으로부터 차단되기 때문에 자신들이 부정되는 그러한 사회적 관계를 종종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보상하려 한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그것이 사소한 것으로 판단될지 어떨지는 판단자의 관점과 성별에 달려 있다. 지식인들은 책을 사지만 어느 누구도 이러한 소비를 사소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책 내용의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이 사회에서 책은 여전히 자본주의 보다 더 오래된 어떤 전통을 통하여 남성 가치를 나타낸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여성이 존재하는 유일한 증거가 가정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그들 자신들의 가정을 위해서 물건을 산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검소한 소비가 바로 해방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자본주의만큼이나 오래 되었으며, 또한 항상 노동자의 처지를 노동자 탓으로 비난하는 자본가들에게서 나온다. 수년 동안 할렘의 거주자들은 그들에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자유주의자들에게서 흑인이 캐딜락을 (금융회사가 그것들을 반환받을 때까지) 몰고 다니는 것만 중단한다면 색깔[인종]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투쟁의 폭력―유일하게 적절한 대응―이 사회적 권력의 척도를 제공할 때까지, 그 캐딜락은 그 권력의 잠재력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방식 중 하나였다. “실천적 경제학”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의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우리가 자유로웠다면, 우리 중 누군가가 구매하는 그 어떤 것도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중독시킨 음식도, 우리를 계급, 성별, 세대로 분류하는 옷도, 그들이 우리를 가둔 집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또한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코 충분히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가하는 압력은 임금을 방어하라는 것이지 공격하라는 것이 아니다. 여성들이 임금노예의 노예라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남성들은 임금을 그 자신의 것과 전체 가족의 비용으로 나눈다. 여성들이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전체 가족의 생활수준은 인플레이션의 충격을 흡수했을 정도로 떨어졌을 것이다. — 물론 여성은 임금 없이 지낼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이다. — 그러므로 여성들이 [소비를 위한 임금을] 요구하지 않는 한, 우리가 앞에서 나열했던 것들에다 하나 더 추가한다는 의미에서 가족은 자본에 기능적이다. 즉 가족은 노동력 가격이 하락하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각주:8]. 그러므로 소비자로서의 여성은 여성들이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방어할 수 있는 가장 물질적인 진행 방식이다. 더욱이 여성들이 정치 집회에 나간다면, 여성들은 훨씬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할 것이다!  


2. 경쟁자로서의 여성

여성들이 “경쟁관계”라는 것과 관련해,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제3세계에서 계급이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인종주의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 왔다. 그에 따르면, 피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들에 맞서 조직되지 않을 때면 서로를 공격한다. 더 많은 소비에 대한 여성의 요구는 종종 경쟁관계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요구는 우리가 앞에서 말했듯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보호한다. 이것은 여성들의 성적 경쟁관계와는 다른데, 성적 경쟁관계는 그들이 남성들에게 경제적·사회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에 뿌리를 둔다. 여성들이 남성들을 위해 살고 남성들을 위해 옷을 입고 남성들을 위해 일하는 한, 그들은 이런 경쟁관계를 통해 남성들에게 조종당한다[각주:9]. 

여성들의 가정을 둘러싼 경쟁관계에 관해서 보자면, 여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깨끗하고 잘 정돈된 가정에 집착하고 그것에 마음이 사로잡히도록 훈련받는다. 그러나 남성들은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그것[깨끗하고 잘 정돈된 가정]을 가질 수 없다. 즉 남성들은 사적인 하인을 보유할 특권을 계속해서 누릴 수 없고, 그 결과 사적 하인을 보유하는 효과에 대해서 계속해서 불평할 수 없다. 남성들이 계속 불평한다면, 남성들이 우리를 경쟁관계라고 공격하는 것이 실제로는 우리를 예속시키는 구실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피식민지인들 간의 불화는 그들의 낮은 조직화 수준의 표현이라는 파농의 주장이 옳지 않다면, 적대는 자연적 무능력의 신호이다. 우리가 가정을 게토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을 간접적인 지배에 의해 통치되는 식민지라고 부를 수 있고 그것이 정확한 것일 수 있다. 피식민지인이 서로 적대하는 것에 대한 해법은 자율적 투쟁에 있다. 여성들은 투쟁하는 남성들을 뒷바라지하는 일에서 단결하기 위해서 경쟁관계보다 더 큰 장애물들을 극복해 왔다. 여성들이 덜 성공적이었던 곳에서는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할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냄으로써 투쟁의 계기를 변형하고 심화시키는 중에 있다. 자율적 투쟁은 문제의 방향을 바꿔놓는다. 즉 “여성들은 남성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단결할 것이다”가 아니라, “남성들은 여성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단결할 것이다”로.  

  

3. 분란자로서의 여성

이전에 여성들의 정치적 개입을 막아 온 것은 무엇인가? 왜 여성들은 파업에 반대하는 특정한 상황들에 이용될 수 있는가? 달리 말해서 왜 계급은 단결되지 않는가? 이 글 서두에서 우리는 사회화된 생산으로부터의 여성들의 배제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러한 배제는 공장과 사무실에서는 협업적 노동을, 가정에서는 고립된 노동을 두는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객관적 성격이다. 이것은 산업 노동자들이 공동체와 분리되어 조직되는 방식에 의해 주체적으로 반영된다.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성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정에서 그리고 투쟁에서 남성들을 뒷바라지하고, 그들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가? 심지어 여성들로 이루어진 노동조합 예비군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러한 분할 그리고 이런 방식의 분할이 계급의 역사이다. 투쟁의 각 단계에서 생산 순환에 가장 주변부에 있는 자들은, 중심부에 있는 자들이 주변에 있는 자들을 무시하는 한, 중심부에 있는 자들과 싸우는데 이용된다. 이것이 노동조합의 역사인데, 예를 들어 미국에서 흑인 노동자들이 파업 파괴자로 이용되었을 때—그렇다고 백인 노동자들이 믿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자주 이용되었던 것은 아니다—가 그랬다.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흑인들은 곧바로 정체확인이 가능한데, 그래서 파업 파괴 보고서들은 다음과 같은 객관적 분업으로부터 생기는 선입견들을 강화한다. 즉 일관 작업대에서 일하는 백인과, 그의 발 주변을 청소하는 흑인. 혹은 일관 작업대에서 일하는 남성과, 그가 집에 왔을 때 그의 발 주변을 빗질하는 여성.

남성들은 자신들이 노동을 거부할 때 스스로를 전사(戰士)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거부하면 이 똑같은 남성들은 우리를 불평을 늘어놓는 아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정치적 투쟁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우리 중 일부가 보수당에 투표하면, 남성들은 우리를 후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남성들은 우리가 바닥깔판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존재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당에 투표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그리고 우리 모두)을 배신했다.



C. 훈육의 생산성

가족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지닌 세 번째 측면은, 앞에서 논의했듯 특정한 종류의 인격성의 발육 장애로 인해 여성이 억압적 인물, 즉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군기반장이 된다는 것이다. 여성은 그녀의 남편의 압제, 그녀의 가정의 압제 하에 살 것이며, 그녀의 모든 실존이 “영웅적인 어머니와 행복한 아내”라는 이상을 거부할 때면 그러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일의 압제 하에 살 것이다. 압제 당하고 권력이 부족한 이들은 새로운 세대들을 그들이 태어난 후 첫 몇 해 동안에 교사가 학교에서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유순한 노동자이자 어린 압제자로 만들어낸다. (이 점에서 여성은 그녀의 남편의 편에 가담한다. 부모-교사 협회들이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동력 재생산에 책임이 있는 여성들은, 한편으로 내일의 노동자가 될 아이들을 훈육하며, 다른 한편으로 오늘 일하는 남편을 훈육한다. 왜냐하면 남편의 월급만이 노동력이 재생산에 필요한 돈을 지불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 *

여기서 우리는 여성의 가정 내 생산성을 생각하려고 시도했을 뿐이며, 그것의 심리학적 함의들에 관해서는 자세히 논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는 (여성이 급료 없이 떠맡는 짐인 현실적인 가사노동에 덧붙여) 여성이 하는 역할의 복잡성을 관통하는 것으로서 여성의 가정 내 생산성을 규명했으며, 그 본질의 윤곽을 그려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우선 여성들을 서로 분리하고 그들을 남성들과 아이들로부터 분리하기를 원하고, 또 각자가 자기 자신의 일에 갇혀 자본을 위해 실을 남기며 죽어가는 고치 속 번데기처럼 그녀의 가족 안에 유폐되기를 원하는 이러한 역할을 깰 필요성을 제기한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이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은 주부들이 자신들을 또한 하나의 계급 분파로, 임금을 지불받지 않기 때문에 가장 낮은 지위의 분파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들의 투쟁 전반에서 주부의 위치는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주부의 투쟁은 자본주의적 노동조직화를 떠받드는 바로 그 기둥인 가족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 보충적인 이 인물, 즉 주부에 반대하여 여성들의 개인성을 긍정하는 경향을 지닌 모든 목표들은 이 역할의 지속 및 생산성을 전복하는 어떤 목표로 제기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생산적 창조성과 함께 첫 번째로 강탈되는 성적인 기능을 출발점으로 삼아, 여성의 기본적 신체기능의 온전함을 여성에게 회복시켜 주는데 기여할 수 있는 모든 요구들이 아주 긴급하게 제기되어야 한다.

출산 통제에 대한 조사 연구가 아주 느리게 발전했고 낙태가 전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금지되어 있거나 최종적으로 “치료상의” 이유로만 인정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선 이러한 요구들로 나아가는 것은 고분고분한 개량주의가 아니다. 이 문제들에 대한 자본주의적 관리는 계급 차별을 그리고 특히 여성차별의 문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제기한다. 

왜 이러한 조사연구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들, 제3세계 여성들이 실험용 쥐로 사용되었는가? 왜 출산 통제 문제는 계속해서 여성들의 문제로 제기되는가? 이 문제들에 대한 자본주의적 관리를 뒤엎는 투쟁을 시작하는 것은 계급적 토대로 그리고 특히 여성적 토대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을 오로지 여성들의 책임으로 인식되는 모성에 반대하는 투쟁과 연결시키는 것, 여성 노동으로 인식되는 가사노동에 반대하는 투쟁과 연결시키는 것,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남성 역할의 추악한 복사판에 불과한 여성 해방의 사례라고 우리에게 제시한 모델들에 반대하는 투쟁과 연결시키는 것은, 노동 분업 및 노동 조직화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여성들 그리고 노동하지 않기 투쟁

요약해 보자. 주부(그녀의 고립 뒤에는 사회적 노동이 숨겨져 있다)의 역할은 파괴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지는 엄격하게 제한된다. 다른 사람의 임금에 의존하고 그에 따라 다른 사람의 의식에 의해 형성된 이러한 고립된 여성에 뿌리를 둔 ‘여성이 무능력하다’라는 신화는 지금까지는 단 하나의 행동에 의해서만 깨져 왔다. 그 행동이란 여성 스스로 임금을 벌어 개인적인 경제적 의존의 고리를 깨고, 가정 밖 세계에서 그녀 자신의 독자적 경험을 쌓아 공장이든 사무실이든 사회화된 구조에서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면서 거기서 전통적 계급 형태를 따라 그녀 스스로 사회적 반란 형태에 착수하는 것이다. 여성 운동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선택지를 거부하게 한다. 

자본 자체는 노동 인구를 늘어나는 여성들의 수로 개조하는 어떤 운동—수백만의 여성들에 의한 여성의 전통적인 자리에 대한 거부—을 창출했던 것과 동일한 추진력에 사로잡혀 있다. 여성 운동은 이것에 반대할 때에만 발전할 수 있다. 자신의 현존과 함께 여성운동은 여성들이 ‘노동을 통해 해방된다’는 신화를 거부하는 행동과 점점 더 결합하는 방식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제기되어햐만 한다.

우리는 지금껏 충분히 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껏 수십 억 톤의 면화를 땄고, 수십 억 개의 접시를 닦았으며, 수십 억 번 마루를 닦았고, 수십 억 글자를 타이핑했으며, 수십 억 번 라디오 선을 꽂고, 수십 억 개의 기저귀를 손으로 기계로 빨래했다. 그들이 몇몇 전통적인 남성 군락지(enclave)에 “우리를 들여보낼” 때마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새로운 수준의 착취였다. 여기서 다시금 우리는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제3세계의 저발전과 대도시의 저발전,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대도시의 부엌을 상응시킬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적 계획은 제3세계에게 “발전하라”고 제시한다. 즉 제3세계의 현재적 고통들에 더해, 산업적 반혁명의 고통 또한 겪으라고 제시한다. 대도시의 여성들도 동일한 “원조”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다른 어떤 선택지가 없어서든, 용돈을 벌기위해서든, 경제적 독립을 위해서 일하려고 집을 떠났던 우리는 집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즉 ‘인플레이션은 우리를 이 핏빛 타이핑 인력시장에, 아니면 이 일관 작업대에 고정시켰다. 거기엔 어떤 구원도 없다’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발전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일하는 여성의 투쟁은 가정의 고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종종 월요일 아침마다 호소될지도 모르지만. 또한 주부의 투쟁은 집에 구금되는 일을 책상이나 기계에 붙들려 매이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종종 12층 마루바닥의 고독과 비교될지도 모르지만.

여성들은 그녀 자신의 가능성들을 최대로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양말을 수선하는 것도 원양어선의 선장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아진 게 있다면,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하는 걸 바랄 수는 있게 되었다는 것이긴 해도, 이제 이런 일들은 자본의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에도 놓일 수 없다.

여성 운동의 도전은 여성들을 가정에서 해방시키면서도 또한 이중 노예제를 피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정도의 자본주의적 통제 및 그 규율체제를 막아내는 투쟁의 양식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여성 운동 내에서의 개량적 정치학과 혁명적 정치학의 구분선이다. 

여성 천재들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여성들은 사회적 과정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성 천재들이 존재할 수 없었고, 그들이 어떤 문제에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지도 알 수 없다. 이제 문제는 투쟁 그 자체에 있다.

프로이드 또한 모든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페니스 선망으로 고통을 겪는다고 말했다. 그가 망각한 것은, 이러한 선망의 감정은 여성이 어떤 식으로든 페니스를 갖는 것이 권력을 갖는 것임을 의미한다고 지각한 바로 그 순간 시작된 것임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더더구나 그는 남성과 여성의 분리가 자본주의적 분리가 되는 바로 그 순간 전통적인 페니스 권력이 완전히 새로운 역사에 들어선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우리의 투쟁이 시작하는 곳이다.  


(끝)





  1. 영국에서 이 글의 최초의 독자들 중 일부는 이러한 여성노동에 대한 규정이 더 엄밀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엄밀하게 의미하고자 한 것은 바로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이 맑스가 말한 그 의미 그대로 생산적이라는 것, 즉 잉여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곧 이어 뒤에서 여자의 역할 전체의 생산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여성이 지닌 생산성을 여성의 노동과 여성의 역할 전체 둘 다와 관련해서 더욱 분명하게 만드는 일은, 우리가 지금 작업하고 있는 이후의 글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 글에서는 전체 자본주의적 회로의 관점에서 여성의 자리가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본문으로]
  2. 노동력은 “이상한 상품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은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삶을 소비하는 인간에게만 있다. … 노동력의 기본적인 생산 및 재생산을 서술하는 것은 여성들의 노동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셀마 제임스의 「서문」을 보라. [본문으로]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떤 특정 부문의 산업에 여성들을 끌어들이는 정반대의 경향에 의해 상쇄되고 있다. 동일한 지리적 부문 안에서 자본의 상이한 요구들은 다르면서 심지어는 대립하는 선전 및 정책들을 생산해 왔다. 과거의 가족에서 안정성은 상대적으로 표준화된 신화(한결같으면서 공식적 이견이 없는 정책 및 선전)에 기초해 있었던 반면, 오늘날 다양한 자본의 부문들은 서로 모순되고, 또한 가족을 안정적이고 변하지 않으며 “자연적인” 단위로 규정하는 바로 그 정의의 토대를 허물어 버린다. 이것의 고전적 사례로 출산 통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및 재무 정책들을 들 수 있다. 영국 정부는 최근 이러한 목적으로 산아 제한의 기금 할당량을 두 배로 늘렸다. 우리는 이러한 정책이 어느 정도까지 인종주의적인 이민정책, 즉 성숙한 노동력의 원천에 대한 조작과 연결되는지, 그리고 실직당하고 지원을 받지 못한 엄마들의 운동을 야기하는 노동 윤리의 점증적인 침식과 연결되는지, 즉 자본의 순수성을 혁명적인 아이들로 오염시키는 출산을 통제하는 일과 연결되는지를 검토해야만 한다. [본문으로]
  4. 이것은 여러 정당들 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책으로, 이들은 지난 몇 년 간 55세 이상의 집에 있는 여성들인 주부들과 독신 여성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이탈리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결코 통과되지 않았다. [본문으로]
  5. 오늘날 가사노동 임금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며 이탈리아나 그 밖의 여성 운동들 내에서의 반대도 줄어들고 있다. 이 문서의 초고가 쓰여진(71년 6월) 이래로 논쟁은 더 깊어지고 그 토론의 상대적 새로움으로 인한 여러 불확실성들은 떨쳐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필요의 무게가 운동의 요구를 급진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운동의 요구를 진전시키는 더 큰 힘과 확신을 주었다. 1년 전 이탈리아에서 이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국가가 특히 연금에 의지했던 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게 이전에 했던 것처럼 가사노동에 매달 7-8리라의 수당을 “지불”함으로써, 가사노동에 반대하는 여자의 반란을 손쉽게 짓누를 수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제 이러한 불확실성들은 대체로 소멸되었다. 그리고 가사노동 임금에 대한 요구는 처음부터 하나의 토대이자, 여자가 당하는 억압·종속·고립을 그것들의 물질적 기초인 여자가 당하는 착취로 곧장 연결시키는 데에 본질적인 이점이 있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는 것은 어쨌든 분명하다. 현 시기에 이것은 어쩌면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요구가 지니는 주요한 기능일지 모른다. 이것은 억압과 착취, 그리고 신분 및 계급의 상황이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투쟁의 지표를 제시하며 동시에 조직화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러한 관점을 실천적이고 지속적으로 번역하는 일은 이탈리아와 다른 지역에서 운동의 당면과제이다. [본문으로]
  6. 오늘날 가사노동 임금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며 이탈리아나 그 밖의 여성 운동들 내에서의 반대도 줄어들고 있다. 이 문서의 초고가 쓰여진(71년 6월) 이래로 논쟁은 더 깊어지고 그 토론의 상대적 새로움으로 인한 여러 불확실성들은 떨쳐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필요의 무게가 운동의 요구를 급진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운동의 요구를 진전시키는 더 큰 힘과 확신을 주었다. 1년 전 이탈리아에서 이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국가가 특히 연금에 의지했던 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게 이전에 했던 것처럼 가사노동에 매달 7-8리라의 수당을 “지불”함으로써, 가사노동에 반대하는 여자의 반란을 손쉽게 짓누를 수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제 이러한 불확실성들은 대체로 소멸되었다. 그리고 가사노동 임금에 대한 요구는 처음부터 하나의 토대이자, 여자가 당하는 억압·종속·고립을 그것들의 물질적 기초인 여자가 당하는 착취로 곧장 연결시키는 데에 본질적인 이점이 있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는 것은 어쨌든 분명하다. 현 시기에 이것은 어쩌면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요구가 지니는 주요한 기능일지 모른다. 이것은 억압과 착취, 그리고 신분 및 계급의 상황이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투쟁의 지표를 제시하며 동시에 조직화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러한 관점을 실천적이고 지속적으로 번역하는 일은 이탈리아와 다른 지역에서 운동의 당면과제이다. [본문으로]
  7. Karl Marx,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 Band 1, Berlin, Dietz Verlag, 1962, p. 512. “대공업은 비참한 가용 노동 인구라는 저 괴물을 자본의 변화하는 착취 요구를 위해 준비되게끔 대체하고, 변화하는 노동 요건들을 위해 이것을 개인의 절대적 이용가능성으로 대체하며, 단지 사회적인 미세한 기능의 담지자에 불과한 부분적인 개인을, 선천적 활동과 후천적 활동을 상호작용시키는 양식들을 다양화된 사회적 기능들로 지닌 충분히 발전된 개인으로 대체하는 것을 사활이 걸린 문제로 삼는다.” [한글판] 칼 마르크스, 󰡔자본론 1(하)󰡕,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2, 제 2개역판, 653쪽. [본문으로]
  8. “그러나 우리가 다음 장들에서 전개할, 그 밖의 보다 근본적인 반대는, 실질 임금의 일반 수준이 임금 협상의 성격에 의해 직접적으로 결정된다는 가정을 우리가 반박한다는 데서 나온다. … 우리는 주로 실질 임금의 일반적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특정한 다른 세력들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가 이러한 점에서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해 근본적인 오해가 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John Maynard Keynes,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N.Y., Harcourt, Brace and World, 1964, p. 13. [한글판] J. M.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김두희 옮김, 민중서관, 1970, 21쪽. 위에서 “특정한 다른 세력들”이란 우리가 관점에서는 우선 여성들이다. [본문으로]
  9. 1917년 이후 많은 볼셰비키들이 자신의 여성 배우자를 재산을 몰수당한 귀족 중에서 찾았다는 점이 주목되어왔다. 국가수준에서든 개인적 관계에서든 권력이 계속해서 남성들에게 있을 때, 여성들은 계속해서 “약탈물이자 공동체의 욕정의 시녀”이다. Karl Marx, Economic and Philosophic Manuscripts of 1844, Progress Publishers, Moscow, 1959, p. 94. [한글판] 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 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2006, 126쪽. “새로운 짜르” 종족은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1921년 “제3차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회의의 결정문” 1부에서 우리는 “여자들 간의 일”에 대해 읽을 수 있다. “제3차 코민테른 회의는 혁명적 맑스주의의 기본 명제를 다음과 같이 확정한다. 즉 ‘여성 특유의 문제’나 ‘고유한 여성 운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적 타협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의 배반적 전술에 대한 여성 노동자들의 모든 지지와 더불어, 부르주아 페미니즘과 여성 노동자들이 맺는 동맹 일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을 잠식시킨다. … 여성의 노예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의 새로운 공산주의적 조직화를 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론이 남성적이라면, 실천은 “중화하는” 것이었다. 창립자들 중 한 사람의 말을 인용해 보자. 1922년 3월 26일 있었던 이탈리아 공산당 제1차 여성 공산주의자 전국회의에서, “그람시 동지는 프롤레타리아 여성 대다수를 구성하는 주부들 사이에서 특별한 행동이 조직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가 특별한 조직을 수립함으로써 어떤 방식으로든 주부들을 우리 운동과 관계 맺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 노동이 지닌 특성과 관련해서 보면, 주부들은 장인(匠人)들과 유사하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주부들을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주부들이 노동자들의 배우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어느 정도 노동자들의 삶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공산주의에 매료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전은 이러한 주부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즉 주부들을 우리 조직에 배치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선전은 그들이 노동자들의 가능한 투쟁에 방해되지 않도록 중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 기관지, 󰡔꼼빠냐Compagna󰡕, 여자들 간의 일에 관하여, YearⅠ, No.3[April 2, 1922], p.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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