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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정치》

: 들뢰즈의 루소 강의

 

 들뢰즈 지음

황재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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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자 서문

1.  가지 자연 상태 개념

2. 《신엘로이즈》 :미덕, 객관성, 위계적 단계들

2.1. 단계 1 : 영혼(â̂me; soul) 기원적 선의

2.2. 단계 2 : 자연적 선의 또는 미덕에 대한 사랑

2.3. 단계 3 : 미덕  자체

2.4. 단계 4 : 지혜

3.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평행하다

4. 자연 상태

5. 루소에게서 자연 의미

6. 자연 상태는 현실인가, 허구인가?

7. 루소 저작의 통일성 (I)

8. 어떻게 자연 상태를 벗어나는가?

8.1. 자연 상태에서 야생의 상태로

8.2. 도덕성과 자유의 도래

8.3. 기만, 악의, 양도/소외

8.4. 이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는가?

9. 루소 저작의 통일성 (II)

10. 사회 계약

10.1. 주권자는 환원 불가능하다

10.2. 주권자는 어떻게 분할 불가능하게 되는가?

10.3. 계약의 실정적 특성은 무엇인가?

10.4. 의무, 총체성, 즉각성

10.5.  주권자가 일반 의지를 구성하는가?

10.6. 일반 의지는 무엇을 바라는가?

10.7. 루소의 시민법 이념

 

 

 

 

 

 

 

 

 

1. 가지 자연 상태 개념

 

자연 상태에 관한 가능한 가지 개념화가 있다.

 

1) 고대적 개념화 = status naturae.

이는 중세에까지 이어진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키케로,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 상태는 자연권과 결부되며, 항상 완전성들의 질서에 어울리도록 정의된다. 자연 상태는 합목적적인 발동이다. 요컨대, 자연권 = 자연에 대한 순응이다.

자연 상태에 속한 사회성 사회는 자연권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완전성의 질서 속에서 자연적으로 정의된다. 자연 상태를 ()시민적이나 ()정치적 상태로 생각해서는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키케로의최고선악론》을 참조할 .

그렇다면 사회의 문제는 계약이나 기타 다른 것에 의한 사회의 창설이라는 문제는 결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상적으로는 가장 나은 통치를 추구한다. 그것은 현자들의 통치라 있다. 허나 사실적으로는 현자들이 인간들을 통치하길 바라지 않으며, 인간들도 현자들을 원하지 않는다. 현자들을 대신해 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이로부터 가장 좋은 체제라는 문제가 나온다. (플라톤의법률》을 참조할 . 노모스(νομος) 지혜의 현실적 대체물로서 필요하다.)

이러한 개념화는 근대 정치 철학 속에서도, 그러니까 철학자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이론가들ㆍ법학자들에 의해서 계속된다.

 

2) 홉스를 통한 새로운 의미

 

- 자연 상태는 힘들로 움직이는 기계 장치로 정의된다. 이제 자연적인 것은 완전성들의 질서가 아니라 권력 체계로서 이해된 권리이다. 권리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대한 반발이라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다. 자연 상태는 각자를 심판자로 허락하게 된다. 지혜의 특권이 폐기되는 셈이다.

 

- 이제부터 사회는 기원에 따라 좌우된다. 기원이란 자연 속에서 확립되며, 동시에 자연적인 것의 극한을 표시한다.

개인들 간의 갈등은 기계적인 측면에서 개인 내부의 갈등(, 변사에 처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야심(ambition) 간의 갈등) 끌고 온다. 어떤 종별적인 행위 = 계약을 통해 그러한 모순을 제거할 유일한 수단으로서 사회가 나타나는 것이다.

 

루소는 위와 같은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변형시킬까? 루소는 사회성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점에서 홉스에 동의한다. 그러나 루소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연 상태로부터 빠져 나오게끔 하는 모순들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홉스에 반대한다.

계약은 무엇으로 성립하는가? 계약의 법적 정의는 당사자들 간의 관계로 이뤄진다.

- 계약은 규정된 시간 동안 쌍방을 이루는 권리와 의무를 가진 각각의 당사자에 관계한다.

- 계약은 자발적인 것이다.

- 계약은 3자에 대해 항변할 없다.

 

루소의 사회 계약이라는 통념은 바로 이러한 정의에 손질을 가하는 것이다. 무규정적인 시간, 3자에 대한 적용 등등.

 

그러나 계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저자들은 자발적 측면을 강조한다. 의지의 철학으로서 정치 철학.

 

누가 계약의 당사자들인가? 신민과 주권자? 이는 법학자들의 관점이다. 그렇다면 계약이 준수되고 있는지는 누가 판단할 것인가? 권력의 원천이 이중화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한 판단을 위해 3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3자는 주권자일 수밖에 없다. (이는 홉스의 이의 제기인데, 우리는 이를 루소에게서 재확인하게 된다.)

홉스에 있어 계약 관계는 장차 신민이 자들끼리만 이뤄진다. 각자들끼리 이뤄지는 일련의 계약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한 계약에 따라 각자는 계약에 가담하지 않는 3자에 대해 신민으로서 구성된다. (타인을 위한 약정을 담은 계약인 이것의 근대적 유형으로는 예컨대 생명보험이 있다.)

 

루소는 계약과 관련한 앞선 설명에 대한 홉스의 비판을 계승하지만, 홉스의 해법 자체는 거부한다.

 

계약에서 생겨나는 의무는 무엇인가? 이는 계약의 목적성이라는 문제이다. 이때 목적성은 계약의 산물 속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18세기 정치 철학의 공통의 장소는 고대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시민이라는 이중성의 발견이다. 인간은미덕(vertu)’ 지닐 능력이 있었다. 근대적 사실은 이중성이다. 인간은 사적 인간이자 시민이 되었다.

사실상 사적 인간은 시민이 능력이 없고 시민의 규정으로서의미덕 불가능하다. 오로지 사적인 미덕만 남는다.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류를 얻는 대신 미덕을 잃어버렸다.” (Carnets)

 

이유들 : - 이데올로기적 이유 = 종교 기독교

- 경제적 이유 = 재산 소유의 발전

 

루소가학문예술론》에서 말하길, “고대 정치가들은 명예와 미덕에 대해서만 말했다. 우리들의 정치가들은 거래와 돈에 대해서만 말한다.” {김중현 옮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한길사, 2007, 52. 들뢰즈는 단어 하나를 잘못 옮겼다. 루소 원문은명예(honneur)” 아니라습속(mœurs)”으로 있다.}

주네브 시민들 가운데 가장 덕망 있는 자들과 로마인들 가운데 가장 변변치 못한 자들 간의 본성의 차이도 여기서 비롯한다.

 

헤겔 역시 이러한 정치 철학의 비관주의를 공유한다. 민주정이 가장 좋은 체제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펼칠 능력이 없다. 이러한 이중성을 감축시킬 매개가 필요한 것이다.

《에밀》의 도입부 참조. 교육의 유형엔 2가지가 있다. 시민 양성과 사적 인간의 양성. 그러니까 선택을 해야 한다.

시민은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자신이 속한 국가에 놓이며, 사회에 대해 자유를 요구한다. 사적인 인간은 국가에 대해 안전, 다시 말해 자신의 소유권에 대한 보장을 요구한다.

계약은 어떻게 이에 응답할 것인가?

 

나는 나의 자연적 자유( 전부 내지는 일부) 교환한다. 그리고 주권자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는다. 홉스에게서 계약의 자유는 확실한 안전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몇몇 권리들은 양도 불가능하게 남아 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에게 저항할 권리 .

 

스피노자는 시민적 상태 속에서 자연 상태에서와 같은 자유를 보존한다. 나는 단순한 필요성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근대 세계에 보존된 이러한 새로운 자유는 사고의 자유일 것이다.

 

루소는 자유를 양도 불가능한 권리들과 결합시킨다. 법을 제정할 권리가 그것이다. 헤겔은 루소를 질책한다. 우리는 이상 시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사회계약론》에 대해서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루소 저작 전체를 놓고 본다면 틀린 말이다.

 

18세기의 한복판에서 솟아오른 자연 상태에 관한 번째 개념화 유형도 있다. 바로 공리주의적ㆍ실증주의적 개념화이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론 고대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적 계약 통념을 반대하는 것이다. (흄과 벤담을 참조할 .)

흄의 가지 논증이 있다.

 

- 자연 상태의 전면적 부정. 자연 상태는 권리의 상태가 아니라 필요의 상태이다. 그러니까 자연 상태는 부정적으로만 정의될 있는 것이다.

 

- 사회는 언제나 자연적 권리들의 제한 행위일 수밖에 없는 계약을 기원으로 갖지 않는다.

사회를 구성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실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에게 필요한 것은 (예컨대 젖는 이들 간의 조화와 같은) 묵계(convention)이다. 

벤담에게 이러한 묵계의 목적성은 안전에 있다.

반면 스피노자, 루소, 칸트는 계약의 옹호자들을 위해 자유를 요구한다.

 

 

 

자연상태의 법앞에서 ( >_<)

 

 

 

2. 《신엘로이즈》 : 미덕, 객관성, 위계적 단계들

 

루소가 골몰한 것이 정치 제도들이긴 하지만, 루소의 계획에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어떤 주제에 관한 권의 책을 쓰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루소가 책에 붙일 제목은감각적 도덕 또는 현자의 유물론이었다. 책은 물론 미완으로 그쳤지만, 우리는 그러한 발상을신엘로이즈》에서 접해 있다.

뷔르줄랭의 가설 : 《신엘로이즈》의 주인공들 속에서 파이드로스 신화에 대한 예증을 있다. {Burgelin, Pierre (1952). La philosophie de l’existence de Jean-Jacques Rousseau. PUF.}

생프뢰 : 검은

쥘리 : 마음/의욕 (coeur)

볼마르 : 지성 (noû̂s)

 

{《신엘로이즈》(서익원 옮김, 한길사, 2, 2008)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출신 성분을 가진 생프뢰가 귀족의 쥘리의 가정교사로 들어온다. 생프뢰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데, 쥘리는 당혹스러워하며 그의 사랑이 잘못된 것임을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결국 쥘리는 생프뢰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생프뢰와 딸의 관계가 못마땅한 쥘리의 아버지는 생프뢰를 멀리 쫓아내고 볼마르와 결혼시키고자 한다. 생프뢰가 다시 찾아와 쥘리는 그와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되고 임신까지 하게 된다. 사실을 알게 아버지는 쥘리를 때려 쥘리가 유산에 이르게 된다. 한편 쥘리와 생프뢰 사이에 오고간 편지가 쥘리의 어머니에게 발각되고 이로 인한 충격에 어머니는 병에 걸려 죽는다. 이후 생프뢰는 떠나고 쥘리는 볼마르와 결혼해 아들의 엄마가 된다. 볼마르는 사람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생프뢰를 가정교사로 불러들인다. 생프뢰는 쥘리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쥘리는 거부하면서 볼마르의 아내이자 아이의 어머니로서 남는다. 그러나 우연한 사고로 죽게 쥘리는 임종 직전 자기가 사랑한 유일한 이는 생프뢰임을 고백한다. 옮긴이}

 

루소가 보기에 쥘리와 생프뢰는 아주 어울리는 한쌍이다. 왜냐하면 모두 미덕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미덕을 지니는 것에 대해 장애를 이루는 객관적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쥘리는 그러한 갈등을 겪는다. 쥘리는 미덕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미덕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다. 그녀는 생프뢰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쓴다.

저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덕에 대한 사랑이 볼마르에게 있기에 부모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식 날에 어떤 사실이 폭로된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은 변하게 마련이고 그러한 상황들이 또한 우리를 거슬러 우리 마음의 변용을 규정한다”(3 편지 20).

그런데 우리가 악의적 존재일 있는 것은 그러한 특정한 객관적 상황들 속에서다. 어떻게 미덕과 사회의 이익을 조화시킬 것인가? “우리는 존재에 관련한 이익을 가지는 한에서 악덕을 가질 있고 악의적일 있다.”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변화를 바라는 것은 루소가 보기에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영혼(âme) 객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의지는 자체가 상황의 객관적 요소로서 개입함으로써 상황을 변화시킬 있다. 쥘리는 볼마르가 죽는다 할지라도 생프뢰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정치 철학 상에서 아주 흔한 하나의 관념―곧 사람들이 이상 악의적 존재일 없는 상황을 창출하는 것―의 사적인 전위(transposition)이다. 흄에 따르면, 정치 철학의 문제는 정의와 이익이 화해할 있는 객관적 상황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적인 삶에서는 상황에 속한 객체적 요소로서의 강한 의지를 개입시키는 것이 된다.

볼마르가 가진 구상은 신체적 존재자를 실재(choses) 복종토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쥘리와 생프뢰를 위한 치유책이다.

 

4부에서 생프뢰는 이제 쥘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생프뢰더러 돌아오라고 청하는 것은 볼마르이다. 볼마르의 의도는 인간들을 관찰하는 , 인간들을 실험하는 것이다. 볼마르는 애초 미덕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수로 그것을 잃어버린 쥘리가 치유되길 원한다. 

편지 12 : 나무숲(Bosquet) 치유법 ( 나무숲은 생프뢰가 쥘리를 껴안은 장소이자 그녀가 결코 다시 찾을 없었던 장소였다.) 

쥘리, 이제 이곳을 두려하지 마세요. 이곳은 이제 성스러운 곳이 아닙니다.” 달리 말해 고립된(désocialisé) 공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편지 18 : 볼마르는 그들이 사랑을 나누던 당시 생프뢰가 추방당해 머물렀던 곳에 쥘리와 생프뢰를 두고 간다.

 

볼마르의 계획. 그들은 과거 속에서 사랑하고 있다. 지금의 쥘리는 그때의 쥘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제 미덕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프뢰는 그걸 알지 못한다. “그의 기억을 지워 버리세요. 그의 사랑은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 생프뢰가 혼란에 빠져 잘못 생각하는 것은 시간을 혼동하는 따른 겁니다.” 생프뢰는 고착된 상태이다. (이는 정신분석학적 고착이다.)

 

- 볼마르의 계획은 결국 생프뢰가 이러한 고착을 자각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쥘리는 현재의 쥘리가 아니다. 자각을 통한 치유법인 셈이다. 그러나 볼마르는 여전히 쥘리가 아주 위험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자각으로는 치유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현재의 쥘리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가 가진 시간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하는 편이 낫다. 이렇게 되면 생프뢰 자신이 애지중지한 관념들을 다른 관념들이 교묘히 대체하게 됨으로써 그는 그러한 기억을 잊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대체 조작인 셈이다. “저는 현재를 가지고 과거를 덮어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젊은 처녀 쥘리에 대한 사랑을 성인이 여성에 대한 지속적인 우정으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다.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는 전이가 바로 이것이다.

 

관건은 상황을 변화시켜 미덕을 지닌 이가 되는 것이다. 현자는 미덕을 획득하기 위해 결정론을 피하는 자이다. 우리는 의지를 통해 상황을 바꿀 있다. 이것은 쥘리가 취한 방법이다. 볼마르는 상황 자체 속에서의 실행을 선호한다. 전이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자의 유물론이다.)

 

루소는고결한 영혼 취하는 위계적 단계들이라는 구상을 내놓는다. 상이한 가지 단계들은 아래와 같다.

1) 영혼의 기원적 선의

2) 자연적 선의 또는 미덕에 대한 사랑

3) 미덕 자체

4) 지혜

 

2.1. 단계 1 : 영혼의 기원적 선의

 

이는 자연 상태에서의 영혼의 선의를 말한다. 이러한 선의의 긍정은 결정론의 긍정과 구별되지 않는다. 상황들이 우리의 변용을 규정한다. 영혼은 무엇보다 느끼는 능력이다. 이성이 아니다.

우선 분명한 것은 이것이 자연적인실재들에 대한 의존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긍정은 자연 상태에서 우리의 모든 변용들이 선하다는 것이기에, 객체에 적합하다는 것이기에, 기원적 선의에 대한 긍정을 끌고 온다. (달리 말해서 이는 실재성 = 완전성이라는 개념화의 자연주의적 옮겨 쓰기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선의 속에서 각자는 자기에 대하여 전체로 존재하며, 실존감을 가진 하나를 이룰 뿐이다. 그렇지만 기본 능력들의 차이에서 오는 영혼의 자연적 다양성이 있다.

쥘리의 영혼 : 활력, 상태를 변화시키는 데서의 안이함, 내면적 감수성.

생프뢰 : 내면적 감수성. 약한 영혼.

볼마르 : 감수성 부족. 냉철한 영혼, 이성에 대한 취미.

클레르 : 충동적. “광적인 사람.”

 

그럼에도 각각의 영혼은 기원적 선의를 갖는다. 수준에서 가능한 악의는 없다. 왜냐하면 직관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의 이러한 유형에 따라 각각의 영혼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자리를 갖는 것이다.

 

2.2. 단계 2 : 자연적 선의 또는 미덕에 대한 사랑

 

이는 악의의 발생이라는 문제와 관련 있다. 사회가 등장함과 함께 비로소 악덕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상황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의 선의를 가로막고, 우리 안에 악의적 존재가 갖는 이익이 펼쳐지도록 하는 새로운 관계들이 사회와 더불어 나타난다.

새로운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실재와 더불어 있는 각자의 자기에 대한/대자적 관계였다. 사회가 창출하는 의존 관계는 서로서로에 대한 것이다. 각자는 이상 전체로서가 아닌 상대방으로 취급된다. 이는 유년기부터 시작하는 관계이다. 잘못 자란 아이란 남들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는 법을 배운 아이다. “남들이 순순히 응해주는 것을 하나의 권리로 만들어냄으로써 아이들은 거의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 상태에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신엘로이즈》 5 편지3. {서익원 옮김, 한길사, 2, 2008, 235.}

 

《에밀》의 목표 : 의지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의존인 교육을 되찾는 .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실재들에 대해 무기력하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사회와 더불어 각자는 항상 누군가에 대해서 주인이 되고 노예가 된다. 이러한 인위적 관계가 바로 악덕을 발생시킨다. 이제부터는 악의적 존재가 갖는 이익이 걸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원적 선의는 존속한다. 자연적 선의란 이와 같은 새로운 관계들 하에서 존속하는 한에서의 기원적 선의이다.

- 정도 차가 존재한다. 잡다한 사회적 관계들에 의해 기원적 선의가 지워진다. (이런 의미에서 고독을 좋아하는 것이 선의의 기준이다.)

- 중간 매개들이 존재한다. 선한 영혼은 자신의 사회적 관계들을 경계하고 선별한다. 그러나 선한 영혼은 상황으로부터 허를 찔릴 있으며, 결정론에 떠밀려 자기 자신의 선의에 반작용할 있다. (이것이 자신의 경우라고 루소는 말한다.)

 

미덕에 대한 사랑이란 상황을 무릅쓰고 자신의 선의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 선의는 미덕이 아니라 미덕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이신엘로이즈》의 문제이다. 쥘리는 아주 선하다. 그의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객관적인 사회적 상황들 탓에 그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생프뢰를 사랑할 없다. 그녀를 사랑함에 있어 생프뢰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바로 미덕에 대한 사랑뿐이다.

 

2.3. 단계 3 : 미덕 자체

 

이는 미덕에 대한 사랑이 악의적 존재가 갖는 이익보다 우세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미덕이란 미덕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는 수단인 것이다. 「소피에게 보내는 편지」 참조. “우리는 잡다한 인위적 관계들에 쏟으면서 선의를 잃어버린다. 그때까지 나는 선했다. () 이제 나는 미덕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루소는 투쟁으로서의 미덕의 효능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그는 미덕에 대한 사랑과 이익 간의 투쟁에 대해선 믿어 의심치 않지만, 결말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미덕은항상 전쟁 상태이다.”

 

- 이때 투쟁은 플라톤적 도주(쥘리) 스토아학파적 도주(에드워드 )라고 만한 까다로운 투쟁이다. 왜냐하면 물리쳐야 적이 이성 자체일 있기 때문이다.

 

- 쥘리는 결혼 이후 하나의 방법을 찾는다. 직접적 투쟁은 이상 아닌 의지를 통한 상황의 전환이 그것이다. 간접적으로 악덕을 제거해야 한다. 루소는 경우에도 회의주의적이다. 의지가 상황 속에 개입한다 하더라도, 무엇이 변화가 확정적임을 보증할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쥘리는 실패한 것이다.

스토아주의와 기독교의 오류는 의무와 미덕을 과장한다는 있다.

지혜는 우리의 의무가 지닌 난점을 떨쳐 내는 있는 것입니다. () 무릇 탁월한 자란 선행을 하는 자가 되는 만족함으로써 미덕을 가질 있다고 하는 그런 필연성 속에 머물지 않는 법이죠.” (Lettre de janvier 1764 à Carondelet.)

 

2.4. 단계 4 : 지혜

 

미덕은 상황이 그것을 요구한다는 그러한 내에서의 투쟁이다. 지혜는 미덕이 무익한 상황들을 창출한다. 오직 지혜만이 루소가 꿈꾼 우리 안에서의 미덕과 이익 간의 통일의 재창출로 이끌 있다.

지혜는 향락/주이상스(jouissance) 분리할 없다.

지혜는 무엇보다 볼마르의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아닌, 상황 자체 속에서 실행되는 선별에 기대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의 선별이다.

시간 : 현재를 가지고 과거를 덮어버리기.

장소 : 성스러운 곳을 친숙한 곳으로 만들기.

진정한 행복은 내가 있는 곳에 내가 온전하게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성립한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루소가 강조하는 것은 실존감이다.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미래를 과거를 소환해서 미래를 예상한다는 , 다시 말해 우리가항상 지속하면서도 자신의 지속을 표시하지 않고 연속의 느낌이 없는현재를 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실존감 : (“신처럼 자기에 대하여 만족한다는이유에서 영원성, 신적인 상태와 닮은) 스쳐가는 순수 현재.

 

볼마르는 현재의 요소들을 선별하려고 한다. 이행으로서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 계기에서 대체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선별의 방법은《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까지 이어진다.

수준에서 존재하는 것은 시간을 이식시키는 객체들의 선별이 아니라, 객체들의 모든 연속을 박탈당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실존하기의 수월함이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 우리는 실재들에 대한 의존 관계를 이용하지 않으면 되었다. 루소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가서 이러한 의존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긍정한다. 공백을 창출해야 함을 긍정한다.

 

현자의 유물론에서 관건은 상황의 결정론을 이용해 그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다. 볼마르는 객체들을 통제한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방법일까? (《신엘로이즈》의 결말 부분을 참조할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루소는 행복을 위해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루소는 그것을 대신해 객체들이 우리에 대해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에 시간의 순수 이행과 일치할 있게 하는 몽상을 내세운다.

《고백》 9 : 루소는 자신의 감각적 도덕 담길 테마들을 여기서 되풀이하고 있다.

 

 

3. 《사회계약론》과에밀》은 평행하다

 

시민이라는 평면 위에 있는사회계약론》은 사적인 평면 위에 있는에밀》과 평행을 이룬다. (교육자와 입법자도 평행하다. 루소는 이들이 신화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이들이 현실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미덕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과에밀》 사이에는 본질적 연속의 관계가 있다. 《사회계약론》 교육 받은 양성된 사적인 인간을 전제한다.

《에밀》에서 루소는 가지 교육이 있다고 말한다.

- “우리가 가진 능력들 기관들의 내적 발전으로서 자연에 관한 교육

- 자연의그러한 발전에 관여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관례(usage)”로서 인간에 관한 교육

- 실재들에 관한 교육

 

《에밀》의 흐름에서 보면, 이러한 교육들은 가지로 축소된다.

- 가정 교육 내지는 자연에 관한 교육

- 각각의 인간이 당사자로서 관계들을 맺는 것과 관련된 공교육

 

번째 교육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인간을 고려한다. 따라서 이는 자연인에 대한 교육이다. 이때 자연인이 관계 맺는 것은 실재들 동류들인데, 이들 각각은 대자적 전체를 이룬다.

번째 교육은 시민으로서의 인간을 고려한다. 다른 당사자들과 관계하는 당사자로서의 인간.

가지 교육은 모순된다. 현행하는 사회 안에서 우리는 가지를 동시에 바라면서 어느 것에도 가닿지 못한다. 인간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본성의 차이를 의식해야 한다. 루소의 : 이제 공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적 교육의 길로 들어서야 하며,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일단 끝에 이르게 되면 공교육의 재창출이 가능한 것인지를 묻게 것이다. 요컨대, 《사회계약론》 《에밀》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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