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데리다와 법: 적법한 허구들(2/3)

마가렛 데이비스(Margaret Davies)
김우리

2. 법의 법의 법


서구 법 이론에 대한 이러한 입문적 요점을 염두에 두면서, 나는 이제 소설(아마도 허구)로 시작하는 데리다의 법에 대한 성찰을 자세히 설명하고 싶다. 데리다는 『법 앞에서』의 서두에서 몽테뉴(Montaigne)를 인용한다. “우리의 법마저 적법한 허구들을 가지며, 그 위에 자신의 정의의 진리의 기반을 둔다.”[각주:1] 적법한 허구의 수수께끼(enigma)는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재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켈슨 또한 전체 법질서를 하나의 허구로, 적절한 허구로 적법화하는 기본 규범을 기술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적법한 허구가 법의 권위의 아포리아를 메운다(fill)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시작에서부터, 최소한 법의 권위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에서부터 출발하려고 시도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데리다는 기원과 법 자체를 향한 이러한 충동(compulsion)은 억누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충동에 저항하는 것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 데리다의 읽기의 대상인 소설에서 카프카의 시골 사람은 법 앞에 있으며 접근을 모색하는 반면, 문지기는 “아직 아니다(not yet)”라고 말한다. 입장(entry)이 절대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지연되며 ㅡ드러나는 바와 같이ㅡ 영원히 지연된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각의 법에서 은폐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은 따라서 추정컨대 법 그 자체일 것이며, 이것이 이 법들을 법들로 만드는 것, 즉 이 법들의 법-임(being-law)을 만드는 것이다. 질문과 탐색은 불가피한 것이며, 법의 장소와 기원을 향한 여정을 억누를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각주:2]

이 억누를 수 없는 여정의 몇 가닥(several strands)이 있으며, 그 완수(fulfillment)의 불가능성은 여기서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시골 사람에게 법은 단지 존재한다. 즉 데리다의 말처럼 법은 “절대적이며 어떠한 기원으로부터 분리된 절대적으로 출현하는(emergent) 질서”[각주:3]로 스스로를 현시한다. 그것이 우리를 법인(法人. legal person)으로 인정할 때, 법은 우리에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떠한 선택권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 앞에 서 있지만, 그 뒤를 보거나 그것의 역사나 원천, 권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비록 그것이 투명성과 접근성에 대한 약속을 내민다고 할지라도, 법의 권위는 절대적으로 비판을 넘어서 있으며, 이는 모든 실제적인 경우에 있어서 법이 스스로 정하는 개혁의 수단(channel)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법에 대해서도 질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법이 비합리적이거나 불공평하고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법이다. 아마도 법 앞에 있는 사람은 법으로 하여금 자신을 투명하게 정당화하라는 모든 요구가 지연된다는 것(아니면 때로는 노골적으로 거부된다는 것)과 더불어 이러한 인식(결정, 간파)이 다소간 낯설고 불안정하다는 것을 저절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들 중 어떤 것도 법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제도 내에서, 법은 자신의 정초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배제하며, 이는 ㅡ법원과 의회 밖에서ㅡ 법에 대한 역사적, 토착적, 여성주의적, 인종적, 계급적 비판이 법의 유지에 그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이다. 이와 같은 비판들은 법의 역사적이고 맥락적인 위장들(pretence)을 완전히 기만적인 것으로서 폭로하기 때문이다. 법을 정초하고 보존하는 모든 순간은, 정치적으로 책임이 부과되며 법이 근거 있는 중립성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사회 속 권력 관계에 대한 함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식으로 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법 자체에 대한 탐색은 억누를 수 없지만, 그 완수는 끝없이 지연되고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법의 장소와 기원을 향한 이 억누를 수 없는 여정의 두 번째 측면은 법 철학자들에 의해, 그리고 실제로 이론을 통일된 전체적인 또는 근본적인 설명 원리로 확고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모든 로고스중심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실천된 것이다. 법철학의 탐구는 법의 법을 향한 것이며, 합법성의 어떤 근본적인 기준이나 원칙을 향한 것이다. 내가 가리켜 온 바와 같이, 법의 폐쇄적인 체계에 대한 사상에 의해 수반되는 정지하는 지점(stopping point)은 언제나 동어반복(tautology)나 모순에 의해 그 기반이 약화되어왔다.
왜 이와 같은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장르의 법칙』에서 제시된 주장을 간단히 생각해볼 수 있다. 문학에서 “장르”는 또 다른 유형이나 방식과는 개념적으로 분리되는 표현의 유형 혹은 방식이다. 소설에 대한 발상(idea)은 시에 대한 발상과 개념적으로 분리된다. 데리다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분리성(separateness)은 한계(limit)를 수반하는데, 한계는 법의 경계긋기(demarcation)를 함의한다. “‘장르’라는 단어가 소리 나는 순간, 들리는 순간, 누군가가 그것을 착상하는 순간, 한계가 그어진다. 그리고 한계가 확립될 때, 규범과 금지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not far behind).”[각주:4] 데리다가 해석한 장르의 법칙은 장르가 어느 정도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장르와 혼합되거나 혼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술한다. 이 지점에서 법 실증주의 이론의 전체 기획이 법의 분리 또는 분리 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이라는 것, 즉 법이 비-법과 분리되거나 분리 가능하다는 것, 법이 고유한 하나의 장르라는 것을 확립하는 것이었다는 걸 기억하라. 예를 들어, 조셉 라즈(Joseph Raz)는 분리는 법을 법으로 분류하는 것을 보장하는 어떤 방법을 요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했다. “나는 ‘법의 한계’라는 테제를 통하여, 법과 법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시험이 있다는 입장을 의미한다.”[각주:5] 모든 장르처럼, 법의 분리는 한계, 즉 경계긋기의 법에 의해 설립되어야 하며 유지되어야 한다. 데리다가 “법의 법” 혹은 “법의 법-임”으로서 지칭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 이 한계이다.
이제 데리다는 장르의 법칙이 자기 고유의 법(“장르의 법칙의 법”[각주:6])을 지닌다고 제안하는데, 그 결과가 그렇게 쉽게 담길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은 도식적으로 기술될 수 있다. 법의 한계라는 테제에 따라 각각의 법이 “법”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는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처럼, 각각의 장르는 적어도 하나의 본질적인 정의를 내리는 특징이나 표시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장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규정하는 표시 자체는 그 장르 안에 있지 않다. 그 장르 안에서 학술 기사(scholarly article)를 만드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자체는 학술 기사가 아니다. 법을 합법적으로 만드는 것 자체는 법이 아니라(그것은 예를 들어 추정이다), 개념적으로 앞서는 법의 조건, 법과 비-법의 경계를 유지하는 법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표시는 자신이 정의하는 범주에서는 부재한다는 것으로 “두드러진다(remarkable).” 하지만 그것은 이런 식으로 부재하기는 하지만 또한 현전하는데, 왜냐하면 그 장르 안의 각각의 대상이 그것에 의해 표시되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또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장르 내의 모든 사물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표시는 바깥쪽의 끝(outer edge)일 뿐만 아니라 안쪽의 각인(imprint)이며, 이는 안이 그것을 통해 타자의 흔적을 운반하기 때문에 범주나 체계의 밖과 안의 분명한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속의 재표시(remark)는 소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소속 없이 소속된다.”[각주:7] 그러므로 현전하면서 동시에 부재하며 동일자인 동시에 타자인 또 다른 법이 장르의 법칙에 박혀있으며, 이 또 다른 법은 법, 장르, 분류 체계의 바로 그 가능성을 야기하는 이 “비순수성의 법”이다. 무엇이 순수하게 법인지를 규정하는 이 비순수한 법 없이, 법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장르의 법칙』이 수록되어 있는 데리다의 저서 『문학의 행위』 

3. 풍부함, 초과, 비순수성, 오염

그렇다면 우리는 켈센이 그랬던 것처럼, 실증적인 법체계의 형식을 부여할(inform) 뿐만 아니라, 알 수 있거나 확인할 수 있는, 텍스트적인(textual) 모든 것의 법인 기본 법(basic law)과 마주하게 되는가? 다시 『장르의 법칙』에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여기에서 매우 신속하게, 일찍이 내가 언급했던 풍부함의, 과잉의 법이, 회원들이 없는 참여의 법, 오염의 법 등이 있다. 그것은 당신에게 빈약하게 보일 것이고, 심지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추상적일 것이다. 그것은 그 개념의 엄격한 의미에서 장르나 유형, 방식, 어떤 형식과도 특수하게 관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 법에 종속될 영역이나 대상이 어떠한 표제 아래 위치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일반적인 텍스트성의 한계 없는 영역일 것이다.[각주:8]

법은 하나의 장르이든, 법체계이든 아니면 지식 분야이든 자신이 규정하는 영역보다 풍부하며 그것을 초과한다. 법은 그 자신은 속하지 않으면서 참여의 규범을 설립한다. 따라서 법은 한계를 설정하고 순수성을 확보하는 한편 자신의 타자를ㅡ따라서 비순수성의 법, 또는 순수의 오염의 법을ㅡ 모든 법의 중심부에 단단히 자리 잡게 한다. 그러한 법 자체는 정초적이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정초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고(나는 이 지점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다른 체계나 분류 체계에 대해 타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토대론이 놓여 있는 조건이다. 비순수성의 법은 범주를 분리하거나 대상들의 한 부류에 형식을 부과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켈슨의 법철학과의 비교는 많은 방식에 있어서 단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춰주는 것이 있다. 우리는 기본 규범이 단순히 법체계를 위한 정초가 아니라, 법체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단절이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타자의 배제를 통해 전적으로 자기-적법화(self-legitimation)에 의존하는 “순수한” 법 이론은 이 지점에서 타자가 된다. 내부와 외부는 결정될 수 없으며, 우리는 비순수성의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 순수성과 적법성의 조건이 그 자체로 “비순수성의 법”이라면, 그렇다면 모든 법도 또한 비순수성에 의해 표시되지 않는가? 켈센을 넘어서서 우리는 한계 지어진 법이라는 통념이 억누르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 즉 각각의 법, 법체계 전체가 자신이 배제하는 타자성에 의해 표시된다는 사실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러한 폐쇄성의 결여가 사실상 실증주의적 법사상에 의해 어느 정도 인식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개 법체계에 내적인 문제로 인정되기보다는 반영(半影)의 문제로, 열린 구조(open-texture)로, 아니면 법의 가장자리에 있는 어려운 경우로 격하된다. 그러므로 '핵심'이라기보다는 주변부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큰 중요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이는 실증주의가 법의 비순수성의 이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거부될 수 있거나 반드시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데리다 작업의 다른 영역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기서 함축되고 있는 것은, 이 개념적 비순수성이 순수성에 대한 주장의 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는 것과 이것의 정치적이고 윤리적 결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법에 대한 일반적인 수용이 법의 한계성(객관성, 전체성, 중립성)에 대한 주장이 어떤 의미에서 정당화되었다는 추정에 의지한다면, 그리고 이 주장이 배재나 망각, 억압의 행위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 이데올로기적이고 이론적인 배제의 행위를 반복하기보다는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 지점에서 이러한 장르의 법의 법 또는 비순수성의 법이 엄밀하게 법 분석에 한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범주 구성의 중심부로, 따라서 철학과 의미 자체의 중심부로 이어지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은 합리적으로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것은 데리다의 사유 안에서 의미작용(signification)보다 앞서고 그것의 조건을 설정하는 차연(différance)의 또 다른 계기(moment)이다. 차연은 의미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차이남과 지연됨, “공간내기(spacing)”와 “시간화(temporization)”[각주:9]를 명명한다. 모든 의미는 자신의 타자와의 대조 속에서 다르게 정의되며 지탱된다. “고양이”의 의미는 “새”의 의미와는 떨어져서 유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다를 뿐 아니라, 의미의 과정에 의해 다르게 유지된다.[각주:10] 이와 유사하게, 곧 내가 설명하겠지만, 법의 한계라는 테제에 대한 실증주의자의 주장은 단지 법이 달리 존재할 뿐만 아니라, 다른 것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차이가 법적 절차를 통해 유지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차연”은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권위적인 의미가, 울타리(closure)를 얻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에 대하여 “아직 아님(the ‘not yet’)”으로서 지연되는 과정을 가리킨다.[각주:11]법적, 문학적, 과학적, 철학적 “분과학문(들)”에 의해 그와 같은 탐구가 끊임없이 배제되고 있다 하더라도, 법의 권위에 관한 더 많은 질문들이 항상 가능하며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에 관한 더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며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데리다의 비순수성의 법과 차연이라는 그의 개념은 모두 동일자와 타자 사이 공간을 유지하며, 의미의 현전을 영원히 유예하는 힘을 조건으로 하는 울타리의 구조를 제시한다. 실정법과 관련하여, 이러한 유지 작업은 법의 분리성을 가정하고 실행하는 판사, 법관, 법인(法人)에 의해 날마다 수행된다.
여기서 우리는 법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법의 구조로서 의미작용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법적 분석도 변호사나 법철학자들이 일상적으로 자신들의 적적한 대상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 즉 실정법에만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법이 자신의 의미를 입법할 수 있는 권한을 어느 정도까지 부여받았다 하더라도, 법은 자신이 의미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역으로 의미 자체는 적법성이라는 쟁점과 그것을 설명하는 “법”에 의존한다.[각주:12] 우리는 “법”이 의미작용이나 담론에 내재적인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의미작용과 담론은 스스로 일종의 법에 의해 조건지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해체적 스타일의 연구가 법(droit)의, 법과 정의라는 문제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정상적이고 예견할 수 있으며 바람직한 것이다. ... 이는 심지어 그것들(만약 이러한 것이 존재한다면)에게 가장 고유한 장소이다.”[각주:13]라고 언급한다.
비순수성의 “법”, 오염, 초과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정확하게 단독성과 동질성이 비-단독적이고 이질적인 조건이나 계기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리다의 주장과 대립하는 단독성 또는 동질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일상적으로 “법”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러한 단독성을 가정한다. 즉 적법한 것과 비-적법한 것, 합법적인 것과 비-합법적인 것을 분리하는 가로지를 수 없는 경계나 단순한 한계, 분명한 한계를 말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사유에서 한계는 결코 그런 단독적이고 단순한 현존을 상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역설이나 모순, 침묵의 장소이다. 한계는 결코 밖과 안을 분리하는 경계그리기(delineation)의 선이 아니라, 밖과 안의 구분을 초과하는 표시, 즉 내적인 타자이다.
따라서 특정한 심급에서 한계로서 “법”의 본성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그것이 논리가 지고인(supreme) 장소가 아니라 논리가 실패하는 장소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법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확립된 법에 대한 가정과 실천에 대한 거대한 질서의 도전을 예고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이해는 우리를 결론으로, 혹은 차라리 법의 자의성, 폭력, 해체불가능한 본성의 출발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개념적으로 투과할 수 없는(impermeable) 경계에 의해 정의되는 단독적이고 동질적인 법의 우위가 힘(force)을 제외하고서는 지탱될 수 없으며, 그것을 페미니스트, 토착민, 다른 활동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윤리적 기반은 없다고 덧붙일 것이다. 사실상 정의는 법이 자기-반성에 착수할 것을, 그리고 그 결과 이 “타자들”에 의해 요구되는 변형에 착수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내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법의 법에 대한 탐구에 착수한 이후 주류 법 이론은 법의 주권과 극한 상태(ultimacy)에 대한 도전을 금지하는 법적 전선(맞섬)[(af)front]의 비판자가 되기보다는 옹호자가 되었다. 불확실성과 역설과 마주하기보다는 법의 절대적 권위를 위치시키고 기술하고자 하는 법철학은 적법성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법에 걸맞은 중립성이라는 이름 안에서, 그리고 “법의 법-임”을 향한 여정에 착수하고 난 후, 철학은 법의 시작인 이 여정의 끝을 허구화하며, 그 결과는 법의 법성(legality)을 신비화하는 것이다. 놀랄 것도 없이, 추정상 발견되고 기술된 보편적인 법의 본성은 “민주주의적인” 서양의 합법적 영역과 현저한 유사성을 지닌다.[각주:14] 어쩌면 이러한 무절제한 주장들이 더 충분히 설명될 수 있도록, 이 가정된 법의 기원의 장소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H.L.A. Hart 『Concept of Law』

4. “예외적인 수행문”[각주:15] : 법의 힘

데리다가 법 그 자체 또는 실정법, “소위 제대로(properly)” 법에 관해 가장 명백한 것은 『법의 힘』에서이다. (나의 논평의 대부분은 이 작품의 시작에서부터, 데리다가 암시하기를 전적으로 시작은 아닌 장소로부터 끌어내질 것이라는 걸 덧붙여야 한다.)
그로 하여금 영어로 말하기를 요구하는 법과 이 법을 따라야 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입장을 언급한 이후(이는 글의 주제를 특징적으로 반영하는 도입부에서의 제스쳐이다), 데리다는 『법의 힘』을 이 작업에 이름을 붙인[자격을 부여하는(entitle)] 문구에 대한 몇 가지 관찰로 시작한다. 규범이 “법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법적 힘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은 항상 권위를 부여받은 힘이다.”[각주:16] 법 규범은 실제로 집행되지 않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될 수 있다(enforceable).
이는 힘과 법 사이 관계에 대한 몇 가지 쟁점을 야기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하나의 쟁점만을 다루려고 한다. 어떻게 법의 적법한 힘, 법을 창안하는(originate) 폭력 또는 힘과 구별될 수 있을까?[각주:17] 먼저 데리다가 법의 기원적 폭력, 법에 의해 권한이 부여되지 않은(mandated) 폭력을 강조한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데리다가 폭력을 법에 의해 금지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법이 지닌 어떤 것으로 제기하는 것은 아마도 법의 적법성을 유지하는 데 헌신하는 실증주의적 법과 법 이론에 관해 우리가 기대하는 맥락에서는 다소간 깜짝 놀랍고 대립적인 것일 것이다. 불법적 폭력에 기반하고 있는 법은 적법성에 대한 우리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실증법 체제 안에서, 우리가 법의 한계에 도달하는, 법적 정당화가 단순히 바닥나는 어떤 지점에서 법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실패한다는 사실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이 장소는 역사적이고 개념적인 현존을 모두 지닌다. 법률 체계의 적법한 역사는 특정한 행위의 적법성이나 불법성을 결정할 수 없는 정지하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공적인 쿠데타는 기존의 법질서 하에서는 불법적이었던 행위가 소급적으로 모든 합법성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된다.[각주:18] 지금 불법적인 행위(즉 혁명적인 순간에)는 미래의 어떤 때에는 모든 합법성의 근원이었던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 이것이 “적법한 허구”이다. 이와 유사하게, 내가 앞에서 설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켈슨의 개념적 체계는 시민들에게 마치 법이 적법성을 지닌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본질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기본 규범, 적법성의 허구로 틀지어진다. 기본 규범이 입법부나 판사 또는 공직자의 다른 “주관적인” 의지의 행위를 “객관적” 법적 지위와 일치할 것을 요구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개념적이거나 해석적인 폭력을 구성한다.[각주:19]
이러한 이유로, 법의 개념적이고 역사적인 기원에는 폭력 또는 힘이 있다. 자신이 정의한 규범들이 적법성과 일치한 것을 요구하는 것, 법의 주권에 도전하며 그 근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단순히 중단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데리다는 여기서 우리가 단순히 특정한 지배적 이데올로기나 힘의 동작주(agent)나 그것들의 창조로서의 법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그것은 모든 것을 지배적인 문화나 정치적 힘에 종속된 것으로서 법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내면적이고, 보다 복잡한”[각주:20] 관계에 관한 것이다. 힘은 그렇지 않았다면 자족적(self-contained)으로 남아 있었을 법에 단순히 권위를 주는 것이 아니다. 차연의 차이화[미분화](differentiation)에 함축된 힘의 요소처럼, 법의 힘은 그것의 동일성[정체성]에 매우 중요한 법과 비-법 사이의 공간내기(spacing)를 설립하고 유지한다. 게다가, 이 공간내기를 법에 관한 미리 주어진 사실로 간주하는 모든 법 이론은 유지의 작업 안에 연루되어 있다. 즉 법와 법의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환경 사이의 강제된 거리 안에 연루되어 있다.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데리다는 법 정초적 폭력만이 아니라, 법을 보존하는 폭력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 둘은 구별할 수 없다.) 정초의 순간은 비결정적이며, 합법적이지도 불법적이지도 않다.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역사의 동질적인 조직 안에 기입된 순간일 수 없는) 법의 정초나 제도화의 순간, 법(droit)의 설립과 발족, 정당화를 구성하는 작용, 즉 법을 만드는 작용은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된 앞선 순간의 어떠한 정의나 어떠한 앞선 법도 모순되거나 입증할 수 없는 수행적인,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각주:21]

법체계의 기원에서 기술되는 연속적인 역사적 발전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보다는 과거의 실천과의 단절, 새로운 체제를 출범시키는 단절이 있다. 데리다가 여기에서 그것이 수행적이고 해석적인 폭력이라고 말한다는 것에 주목하자. 법을 설립하는 힘은 예를 들어 새로운 법을 선포하고 제정하는 수행적 행위에 의해 구성되지만, 그것은 또한 자신에 대한 그리고 일반적으로 법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주로 그것이 적법하다는 해석을 명령한다는 점에서 해석적 힘이기도 하다. 로고스(logos)는 해석적 비결정성을 부정하는 해석적 힘에 의해 확립된다.[각주:22] 데리다는 계속해서 (질문에 대한) 한계와 침묵을 발견하게 되는 곳이 여기라고 말하며, “이것이 내가 여기서 신비라 부르기를 제안하는 것이다.”[각주:23]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법에 외재하는 한계나 침묵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법에 속하는(of) 것이기 때문에, “벽에 둘러싸인, 벽에 둘러싸여 있는데, 왜냐하면 침묵은 언어에 외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각주:24]. 즉 그것은 법을 법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1. “Before the Law,” 183에서 데리다가 인용하는 바와 같이 Montaigne, Essays II, 12, [본문으로]
  2. Derrida, “Before the Law,” 191-92. [본문으로]
  3. Ibid., 135. [본문으로]
  4. Derrida, “The Law of Genre,” 203. [본문으로]
  5. Joseph Raz, “Legal Principles and the Limits of Law,” Yale Law Journal 81 (1972): 823, 842. [본문으로]
  6. Derrida, “The Law of Genre,” 206. [본문으로]
  7. Ibid., 212. [본문으로]
  8. Ibid. [본문으로]
  9. Derrida, “Différance” in Margins of Philosophy (Brighton: Harvester Press, 1982), 7-8. [본문으로]
  10. 의미화하는 용어들 사이 공간내기(spacing)를 유지하는 힘은 G. Bennington in “Derridabase” in G. Bennington and J. Derrida, Jacques Derrida (Chicago University Press, 1933), 71에서 강조되고 설명된다. [본문으로]
  11. Derrida, “Différance,” 8. [본문으로]
  12. 책의 제목은 이 지점을 밝혀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Postmodern Jurisprudence (London: Routledge, 1991), by Costas Douzinas, Ronnie Warrington, Shaun McVeigh 그리고 The Law of Text in the Texts of Law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것은 법의 텍스트성과 법 텍스트가 텍스트적 법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텍스트 또한 법에 종속되기 때문에, 이 관계를 텍스트성에 의해 요약될 수 있는 법 중의 하나로 개념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문으로]
  13. Derrida, “Force of Law,” 929. [본문으로]
  14. 이는 특히 H.L.A. 하트의 작업에서 그러하다. “문명화된” 법에 대한 그의 기술은 “원시적” 법과 그것을 차별하는 것에 의존한다. Hart, Concept of Law, 5장 참조. [본문으로]
  15. 다른 곳에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근본적인 법은, 법적으로나 사실적으로, 법을 설립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전제하는 것을 단순히 앞설 수 없으며, 그것을 투사하고 반영할 수 없다. 그것은 서명이 사인할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한 마디로, 선재하는 법의 보증 없이 스스로 자신을 적법화하는 예외적인 수행보다 결코 앞설 수 없다.” Derrida, “The Laws of Reflection: Nelson Mandela, In Admiration,” 20. [본문으로]
  16. Derrida, “Force of Law,” 925. [본문으로]
  17. Ibid., 927. [본문으로]
  18. 많은 경우에 있어서, 혁명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법의 타당성을 규정하기 위해 법원이 요구되어 왔다. 이러한 경우들, 그리고 법의 초-법적(extra-legal) 기원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은 1979년 그레나다(Grenada) 쿠데타에서 발생한 사건에서 기술되고 광범위하게 논의된다. Mitchell v. DPP (1986) LRC(Const) 35. 또한 Derrida, “Force of Law,” 993 참조. [본문으로]
  19. Kelsen, General Theory of Norms, 254-55. [본문으로]
  20. Derrida, “Force of Law,” 941. [본문으로]
  21. Ibid., 941-3. [본문으로]
  22. Derrida, “Plato’s Pharmacy,” in Dissemination (London: Athlone Press, 1981) 참조. [본문으로]
  23. Ibid., 943. [본문으로]
  24. Ibid. [본문으로]
댓글 로드 중…

최근에 게시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