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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 법: 적법한 허구들(3/3)

 

마가렛 데이비스(Margaret Davies)

김우리

 

5. 폭력을 보존하기

 

 

따라서 법 안에 박혀 있는 침묵 혹은 신비적 요소는 법 안의 결정불가능성의 계기를 표시한다. 나는 이것을 곧 더 설명하겠지만, 우선 이것이 단순히 법의 기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법을 규정하는 외재적인 힘이 아니라 법에 내재적인 힘이다. 이것은 데리다가 이 두 가지 유형의 법과 관련된 폭력 사이 벤야민의 구별을 해체하는 법의 힘2부에서 상세하게 검토한 문제이다. 여기서의 핵심은 법이 진행 중인 적법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정초적 폭력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 보다 정확히는 되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초는 약속이다. 모든 정립(즉, 법의 정립)은 ... 놓아두고 약속함으로써(en mettant et en promettant) 법의 정립을 허용하고 약-속한다(앞서-놓아둔다)(promet et pro-met). 그리고 약속이 실제로 유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되풀이가능성은 가장 난입하는 정초의 순간에 약속을 기입한다. 따라서 그것은 기원적인 것의 중심부에 반복의 가능성을 기입한다. 이로 인해, 법의 순수한 정초나 순수한 정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순수한 법 보존적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순수한 정초적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립은 이미 되풀이가능성이며, 자기를 보존하는 반복에 대한 부름이다. 정초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존할 수 있도록, 차례로 보존이 재정초된다.

 

만일 정초가 어떤 것을 정초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반복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법은 법이 되기 위한 기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르의 표시는 분류화의 본질적인 특징(defining feature)으로서 장르의 모든 예시 안에서 나타난다.) 사실 정초는 반복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되풀이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예를 들어 모든 법 안에서 자신에 대한 타자로 반복되기 때문이며, 그것은 자기 안에 동일자와 타자의 결정불가능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을 정립하는 것은 법이 되풀이될 수 있으며 따라서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을 정립하는 것이다. “정립은 이미 되풀이가능성이다.” 동시에 법의 모든 보존은 법의 정초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법관이나 법조인이 법을 적용할 때마다, 법의 권위에 대한 암묵적 의존이, 따라서 법의 정초에 대한 암묵적 의존이 놓여진다. 따라서 모든 결정은 법의 권위에 대한 재언명이기 때문에 법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만(by its bootstraps) 해낸다.

그러므로 법의 기원적 폭력과 법률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폭력 사이의 절대적인 구분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데리다의 분석은 우리가 보았듯이 모순적이긴 하더라도 타당성에 대한 질문을 멈추게 하는 하나의 중단점을 식별해내는 켈슨의 분석과 흥미로운 대조를 제공한다. 법체계에 대한 켈슨의 기술은 모든 법의 타당성의 원천인 기본 규범의 허구, 즉 의지의 주관적행위가 객관적법으로 해석되도록 요구하는 허구에 대한 의존에서 온다. 비록 논리적으로 켈슨의 기본 규범은 법체계 안 각각의 모든 규범에 형식을 부여해야(inform) 하지만, 그는 이것을 내적인 단절로 간주하지 않는다. 켈슨에게 모순은 단지 기본 규범의 수준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통일적인 적법성에 대한 가정과 따라서 그것이 수반하는 역설은 오직 한 장소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 도처에서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한데, 이는 정체성(또는 분리)의 대가는 분리를 유지하는 힘의 비통일성, 모순, 억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 점에 있어서 권위의 토대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폭력이나 힘에 대한 찬양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각주:1] 나는 이런 식의 표현을 우리가 알고 있는 법이 궁극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계시폭로로 더 이해하고 있으며, 실증적인 법이 스스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어떤 정당화와 관련하여 자신의 폭력을 가리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드루실라 코넬(Drucilla Cornell)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평화가 없을 때, 우리는 평화가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확실히 가부장적인 질서는 여성에게 평화로운세계를 제공하지 않는다. 폭력에 대한 바로 그 인식은 폭력의 완화를 향한 한 걸음으로 이해될 수 있다.”[각주:2] 젠더가 폭력적인 위계질서라거나 이성애가 강제적이라는 주장은 힘에 대한 승인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이해된 성적 관계라는 그 개념(따라서 실천) 속에 있는 폭력에 관한 사실을 계시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법이 폭력적인 단절에 기반한다는 주장은 법이 중립적이고 평화로운 중재자라거나 사회질서를 달성하는 수단이라는 법의 정통성(legal orthodoxy)의 신화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이 필연적으로 법과 폭력의 보편적인 결합을 정립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한계성에 대한 논제는 법이 자신의 현존을 법조인들(legal functionaries)이 현실적으로 결정을 내릴 때 그 안에서 반복되는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힘에 빚지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서구와 신-식민주의 실증주의적 법 개념의 폭력을 이해하는 것은 동질적인 법과 그것이 현재 배제하는 타자들 사이의 관계를 재개념화하고 다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6. ()가능한 법

 

따라서 법은 결정불가능성의 계기에 의해 조건 지어지거나 그것에 후행한다. 권위의 정초는 합법적이지도 불법적이지도않으며 정초된 것과 정초되지 않은 것 사이의 또는 토대론이나 반-토대론 사이의 대립[각주:3]을 초과한다. 게다가 우리가 법의 힘후반부에서 발견하듯이, 폭력 또는 힘을 정초하는 것은 단순히 정초가 아니라 모든 법을 이해하는 것[포괄하는 것](comprehend)이다그것은 각각의 법에서 보존적 폭력으로 반복되며, 이는 각 법과 각 적용의 순간 혹은 법을 결정하는 순간이 이 한계에 부딪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모든 텍스트성의 조건인 비순수성의 법은 법 자체의 구조로서 재표면화된다. 법은 모든 텍스트의 현상(의미가 있거나 의미화 하는 현상)처럼, 모든 법, 모든 텍스트, 모든 분류화의 비순수성과 아포리아적 본성을 말소하는 법에 의해 개시된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기술하고 있는 구조는 법이 ... 본질적으로 해체가능한 구조[각주:4]라는 데리다의 주장을 읽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법은 해체가능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해석 가능하고 변형 가능한 텍스트적 지층에 의해 구축되며, 그것의 궁극적인 토대는 정의상 정초되지 않기 때문이다.”[각주:5] 그렇다면 법이 단지 그것의 텍스트성 때문이 아니라 또한 법이라는 통념 자체가 법과 비-법 그리고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 사이의 격차(differential)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해체가능하다는 점을 반복할 가치가 있다. 동시에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해체 자체는 법, “비순수성의 법혹은 차이적 오염의 법에 대한 인식에 따라 진행되며,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해체의 가능성을 보증해주는 것은 법의 해체가능한 구조이다[각주:6]라는 데리다의 주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또는 다른 규범적 영역 속 어떤 지점에서 절대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법적 구조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법이 본질적으로 해체가능하다는 사실은 우리를 어려움으로 이끌고 간다. 만일 법의 정초가 결정불가능하다면, 어떻게 결정이나 법, 법적 체계가 가능하며, 어떻게 다른 것보다 더 정당하다거나 더 정당화되는 것이 가능한가? 비록 법의 정초가 특수한 윤리학에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단 한 번의 사회적 계약의 방식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고 연속적인 재고를 필요로 하는 근본적인 배제와 힘에 의존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법의 힘에서 분명해진 방식으로의 법의 해체가능성과 법에 대한 외재적이고 규범적인 정초에 대한 문제는 모두 법을 정치, 도덕, 문화로부터 분리하는 법에 대한 서구의 실증주의의 맥락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라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법이 그 분리된 현존을 주장하지 않고 종교나 문화, 정치, 관습의 축적에 동참했었던 상황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이것은 그 주장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닌데, 내가 말했듯이 실증주의의 전제는 주로 서양과 신-식민주의의 법체계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법의 해체가능성은 또한 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법이 특정한 사건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긴급함을 완전히 회피할 수 없는 법적 의사결정자들에게 실천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결정하기를 거부한 판사는 법적으로 지정된 직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비록 법의 정초, 따라서 법 그 자체는 궁극적으로 결정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법에 종속되는 사건은 완전히 결정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결정불가능성에 직면하여, 결정을 내려야 하며 해결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지적했던 것처럼, 결정해야 한다는 의무는 법의 힘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을 보장한다. 특정한 규범이 법을 재현하는 결정은 합법성이 정초되는 순간에 단 한 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이 단지 기존의 법 규범을 적용하는 것이든 아니면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것이든, 매순간 내려진다.

 

 

7. 공정한 해체

 

법은 해체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내가 여기서 집중해 왔던 실증주의적 법철학에서 정의는 법 외재적인 것으로 형상화된다. 법에 대한 실증주의적 이해는 정의와는 관계없이 법이 단순히 법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정의로의 접근”(이 용어로 일반적으로 우리는 법에 대한 접근을 의미한다)이나 정의의 집행”(“법의 집행에 다름 아닌)과 같은 용어로 정의라는 용어를 아예 없애버리거나 법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법학적으로 법은 정의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타당성에 의해 측정된다. 법은 자신의 척도를 지니며, 비록 법이 불공평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비판은 엄밀하게 법 바깥의 입장에서 발현하며, 보통 법의 현존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실증주의적 사고에서 법과 정의를 구별하는 이유는 이념화된 규범적 질서로서 정의를 개념화하기 때문인데, 이는 정의에 대한 확립된 철학적 접근에서 발생하는 개념화이다. 정의는 법과 같지만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 비록 법이 이 질서를 반영할 수도 있고 반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떠한 교차점도 법이나 정의의 구조나 존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각자의 질(quality)에만 영향을 미친다.

이제 데리다는 이 평행하지만 교차하는 규범적 질서에 대한 통념 사이로 길을 내면서 법과 정의에 관한 다소 다른 관계를 분명하게 표현하며, 동시에 해체와 윤리, 정치, 정의의 관계를 해명한다. 이미 매우 많은 논평가들이 도덕적이거나 정치적 함의를 결여한 접근이라며 해체를 거부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정의에 대한 규명은 아마도 다소 좀 늦은 일이었다. 나는 곧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내가 설명했듯이 데리다는 법은 해체가능하며, 그 권위의 토대는 신비적이고, 법이 자신의 동일성을 보존하는 데 필수적인 차이화(혹은 간격내기)를 유지하는 것은 기원적이고 보존적인 힘이라고 말했다. 법은 해체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그 분계선(boundary)이나 경계가 무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해체를 파괴(destruction)로 오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법은 정확히 이 합법적/불법적이고, 정초된/정초되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해석적 힘을 통해 법의 한계로서 자신의 분계선을 유지하기 때문에 해체될 수 있다. 법을 매우 특징짓는 이 한계를 유지하는 일부로서 그리고 그 결과로서 법은 계산가능한 것으로 재현된다. 따라서 데리다는 말한다.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이며, 법은 그저 있을 뿐이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하다.”[각주:7] 이것은 모순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법은 본질적으로 해체가능한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계산의 요소이다. 그러나 법이 해체가능한 이유는 정확하게 그것이 계산가능성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법은 특정한 한계 지어진 동일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자신을 발원시키고 보존하는 힘 때문에 그저 계산가능성을 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며, 법이 해체가능한 것은 이 힘 때문이다.

따라서 법은 계산가능하며, 정의는 계산불가능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복잡하고 상세한 주장을 요약하자면, 정의는 법의 간극 또는 아포리아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아무리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경험이 없이는 정의도 없다[각주:8]. 아포리아의 경험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아포리아는 길-없음이기 때문이며, 경험은 목적지를 향해 횡단하고 여행하는 어떤 것[각주:9]이기 때문이다. 법은 계산의 시도이지만 언제나 해체가능한 것이며, 이러한 맥락 안에서 이는 법의 정초, 권위, 정체성, 적용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것들을 탐구하거나 탈신비화(demystify)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는 계산불가능하며, 이는 사전에 정의를 계산하거나 정상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는 정의를 미래에 도래하는 것(à venir)이라고 말한다.[각주:10] 그렇기는 하더라도, 정의는 진공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해체와 마찬가지로 정의는 정상화된 사태에 대한, 이 경우에는 법에 대한, 일종의 태도 또는 응답이다, 그러므로 정의와 법은 대립하지 않는다.[각주:11] 그보다 정의는 특정한 경우에 있어서 법에 대한 계산불가능한 응답이다.

데리다는 법, 해체, 정의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이 문제에 흥미를 끄는, 그리고 정의의 장소나 위치(position)를 제시하는(비록 그것이 장소가 없고, 위치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포리아의 세 가지 예시 또는 계기들에 주목한다. 첫째, 어떤 사건에서 타자성은 규칙에 의해 설명되지 않으며, 정의는 규칙과 타자 사이의 어느 정도의 조화(reconciliation)를 요구한다.

 

공정하며 책임감 있는 결정이 내려지기 위해서는, 적절한 순간에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결정은 규제되어야 하는 동시에 규제가 없어야 한다. 즉 법을 보존해야 하며 또한 각각의 사건에 있어서 법을 재창안할 정도로, 최소한 법의 원리에 대한 재확인과 새롭고 자유로운 확인 속에서 법을 재정당화하고 재창안할 정도로 법을 파괴하거나 중단시켜야 한다. 각각의 사건은 다르며, 각각의 결정은 차이가 나고 어떠한 현존하는 코드화된 규칙도 절대적으로 보증할 수 없거나 보장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으로 유일한 해석을 요구한다.

 

정의는 단순히 마치 하나의 공식인 것처럼 법을 적용한다고 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법에 대한 해체주의적 태도이다. 즉 그것은 법의 위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재창안하는 법의 위반이다. 정의는 사건의 단독성과 타자성을 유념하면서 법을 재구축할 수 있는 기회이다. 둘째, 우리가 보았듯이, 법의 정초는 결정불가능하며 만일 데리다를 따라 그것은 결정이 공정하려면, 그것은 해결되거나 지양되거나 넘어서질 수 없는 결정불가능성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차연처럼그것은 영구적으로 의미 안에서 유예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의는 결정 안에서마저도 몇 마디 말로 요약될 수 없으며 무한한데,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요약(encapsulation)은 정의를 타자성과 결정불가능성에 대한 부정(따라서 정의에 대한 부정) 속에 동결시키거나 안정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법의 결정불가능성과 정의가 항상 지연된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이 내려질 필요가 있다. 법에서 결정은 전적으로 회피될 수 없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의미를 정착시킬 필요가 법에서만큼 긴급하지도 않고 중대하지도 않은 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분석과는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법의 특징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점은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결정은 유한하며 긴급하고 항상 그것을 앞서는 사법적이거나 윤리학적이거나 정치적-인지적인 숙고의 중단을 표시한다.”[각주:12] 결정은 더 이상의 질문이나 합리화를 중단시킨다. (라즈는 결정을 사안이나 사건에 대해 고려하는 가운데 더 이상의 추론이 가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있기 때문에, 배제하기 위한 추론(exclusionary reason)”[각주:13]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따라서 마지막으로, 추론의 흐름을 중단시기 때문에 결정은 광기인데, 이는 단순히 그것이 계산가능성, 합리성, 윤리적 이유들의 질서 안에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14]

이러한 성찰은 우리를 마침내 해체는 정의다.”[각주:15]라는 데리다의 주장의 핵심적인 측면으로 데리고 간다. 정의는 법의 구축에 의해 규정되거나 단순히 매개될 수 없는, 법의 실패, 불안정성, 불충분성, 비정초성(unfoundedness)의 경험을 통해 타자에게 도달하는 타자와의 관계이다. 해체는 법 내부의 타자성의 착근성(embeddedness of otherness within the law)과 순수성의 불가능성, 이 양자를 폭로하는 법 안으로의 개입이다. 해체와 정의는 불가능하지만 필연적이다.

 

 

8. 법의 정치

 

나는 법에 대한 데리다의 작업이 지니는 드넓은 함축의 일부에 관해 몇 가지 짧은 언급으로 끝맺고 싶다.

첫째, 내가 앞에서 지적했던 것과 같이, 법의 힘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힘의 불가피성을 필연적으로 암시하지 않으며,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법에 대한 사유에서 흔히 말소되는 정치와 법 사이의 이음매(juncture)를 폭로하고, 법의 타당성과 궁극적인 권위에 대한 문제와 법이 자신의 대상에게 행하는 일상적인 배제와 부과 사이의 연관성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여기서 한 사회가 많은 질서를 성취하기 위해 부과되어 있는상냥하다고 주장되는 법의 필요조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나는 법이 여성, 원주민, 레즈비언, 양성애자, 성전환자, 게이,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는 평등으로 위장한 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결정하는데 있어서 법이 행하는 중립적 원칙으로 위장한 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볼 때 법이 권력 관계를 규정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역할을 가릴 수 있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법의 힘의 합법적 말소에서 기인한다. 폭력은 법에 관한 우리의 이해 안에서 체계적이고 구조적이지만, 이 폭력은 평등, 중립성, 객관적 원칙 등의 법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한순간에 법의 일상적 폭력은 물론 그것의 궁극적인 힘까지 지워버리는 자기-정당화에 의해 가려진다. 예를 들어, 백인 성인 남성을 법인(法人)으로 정립하는 법의 힘은, 법체계를 정초하고 보존하는 법의 힘에 의해 조건지어진다.[각주:16] 달리 말해, 점점 더 비판적인 이론가들에 의해 폭로되고 있는 법의 정치적 불평등은 법 내부의 문제가 아니며, 법에 의해 또는 다른 건전한 법적 이상의 더 명확한 분절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분리된 질서로서의 법 구조 전체가 폭력에 연루되어 있다.

둘째, 법에 관한 데리다의 작업은 주류 실증주의적인 법에 관한 설명과 에두르는(oblique) 관계를 맺고 있다. 서두에서 내가 지적했던 것처럼, 법의 구조에 관해 데리다가 말하는 대부분이 실증주의 이론에 의해 수용될 수 있으며, 인정되어 왔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어디에 있으며,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우선 데리다는 많은 법 철학자와 다르게 합법적 힘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거나 얼버무리려 하지 않는다. /-법의 구별이 내적으로 평화롭거나 중립적인 구별이 아니라 폭력적인 구별임을 거듭해서 강조할 때, 자기-정당화 이야기가 지닌 이데올로기적 힘이 적발된다. 게다가, 법 보존적 힘에 대한 강조는 법적 의사결정의 수행적인 역학(dynamic)이 현재 진행 중인 법의 현존에 있어 근본적이라는 것과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사회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법의 내적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마지막으로, 그러므로 정의는 자연법/실증주의 논쟁이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단순히 법의 현존의 동일자나 타자가 아니며, 결코 단순히 내재적이지도 외재적이지도 않는다. 해체와 마찬가지로, 정의는 법에 속하지만(of), 법으로 환원될 수 없다.

 

데리다

 

  1. 예를 들어, Seyla Benhabib, “Some Comments on Deconstruction, Justice, and the Ethical Relationship,” in Cardozo Law Review 13(1991):1219, 1221 참조. [본문으로]
  2. Drucilla Cornell, “Civil Disobedience and Deconstruction,” in Cardozo Law Review 13(1991):1309, 1314. [본문으로]
  3. Derrida, “Force of Law,” 943. [본문으로]
  4. Ibid. [본문으로]
  5. Ibid. [본문으로]
  6. Ibid.,945. [본문으로]
  7. Ibid.,947. [본문으로]
  8. Ibid. [본문으로]
  9. Ibid. [본문으로]
  10. Ibid. 969. [본문으로]
  11. Ibid., 959. [본문으로]
  12. Ibid., 967. [본문으로]
  13. J. Raz, Practical Reason and Norm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ch. I, “On Reasons for Action.” [본문으로]
  14. Derrida, “Force of Law,” 969. [본문으로]
  15. Ibid., 949. [본문으로]
  16. 나는 “The Force of Law: Metaphysical or Political?,” in Cardozo Law Review 13(1991): 1325 에서 낸시 프레이저가 제시한 주장에 부분적으로 응답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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