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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네그리 <탈근대적인 전지구적 협치와 비판법학 기획> (2/3)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영문 번역 : 쥴리아 크리소탈리스(Julia H. Chryssostalis), 패트릭 하나핀(Patrick Hanafin)
한글 번역 : 연구공간L 박성진, 이승준





* 출처 : Law and Critique, 2005, no. 16, pp. 27–46.
* 영문 제목 : ‘Postmodern global governance and the critical legal project’[각주:1]

 

 

II

 

따라서 우선 우리 논의의 초점은 뉴딜 질서의 내부적 위기가 될 것이다. 즉 이 위기는 (포드주의적인) 물질적 헌법의 고갈 및 그 절차들의 변형과 동시에 발생하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생산적이자 헤게모니적인 주체들이 탈근대 안에서 사법적으로 형성되고 규범화된다.’ 여기서 관건은 정치적사회적 대의(representation)의 위기이다. 하지만 이 위기는 어떻게 알려지게 되는가?

법 이론이 이 위기를 설명(하고 해법을 제공)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령 법적 변형에 대해 제도주의적 현실주의가 내리는 해석을 특권화하는 오랜 전통을 생각해 보자. 제도주의적 현실주의의 토대가 되는 생각은 체계 안에는 위기가 있는 것이 정상이다라는 확신이다. 왜냐하면 삶과 그것을 규제하는 법 사이에는 늘 비대칭성이 있으며, 따라서 법은 위기와 혁신의 대안적 수단을 통해 사회적인 것의 구조에 스스로를 끼워넣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법은 그것의 제도적 형태 안에서 어떤 기능항상 해석을 하고 또 간혹 법을 만들어내는을 구성하고 그러한 기능을 [법의] 연속성 안으로 확대한다. 사법적 삶의 여러 형태[법장치]들이 누리는 위엄은 법이 제도발전에서 차지하는 이러한 창조적 지위에 있는 것이다. 일상의 수준에서 하급법원에 의한’/‘을 통한법 제정의 연속성을 포함하는 판례에서부터, 어느 정도는 기업 편에 서서 새로운 균형상태(비록 종종 법적 유토피아가 이러한 계약적 합의의 수준에서 다중의 고유한 목소리가 회복될 것을 주장하긴 하지만)를 규정하는 계약형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무수한 다른 형태를 통한 권리에서부터 헌법의 개혁적 활동비록 상급법원의 법관에게 위임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활동은 사회들의 삶 안에서 회복된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다. 따라서 현실주의적해석을 통해 법 구성의 기능이, 관습 및 그 밖에 자격이 없으며다소간 암묵적인사회적 생산의 원천에 의거함으로써, 규범의 엄밀한 사회적 맥락을 아무리 뛰어넘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공통행위의 지평을 구성하는 사회적 활동이 있음을 인정하는 일에, 그리고 판사의 활동이 이러한 점에서 근본적인 것행정과 []집행과 관련해서 뿐만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해석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법 제정과 관련해서도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에 묶여 있다.

이 모든 점에서 보면, 내가 법현실주의를 제도주의, 즉 이미 유럽에서 한 세기 넘게 잘 알려진 현실주의적인 폐쇄적법 체계론으로 환원할 의도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와는 반대로 그리고 개방적법체계의 엄청난 판례 생산에 대해 인식하는 여러 학자들과 나란히, 우리는 제도주의에 대해 분명 부정적 판단을 부과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나 또한 현실주의의 편에 선다고 해도, 사태가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다는 점이 추가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법현실주의를 가장 개방적’(즉 제도에 대한 역사적 해석학을 지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참조함으로써 닳아 없어지지 않는)이고 우상파괴적인 심급으로 받아들일 때조차도, 우리는 법 현실주의가 역사적 연속성의 경직성을 쉽게 파괴할 수 없으며, 체계 진화의 산물로 나타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엄밀한 역사적 존재론은 패러다임 이행에 직면하여 법 현실주의를 가역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더욱이 점진적인 법 구성은 현재 법문화의 모델이 겪고 있는 근본적 변화에 유독 저항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법현실주의가 개혁과는 잘 맞고 혁명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이와 동일한 것을 에드먼드 버크는 단호하게 말했던 바 있으며, 또한 비록 위로부터이긴 하지만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혁명이다. 그 결과 법현실주의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미 일어난 근본적인 사회적정치적 변화에 직면하여 처음에는 당혹해했고, 이후에는 무력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의 마지막 질문에 히스테리적인 어조가 담겨있음을 인정하겠다. 그러나 명확히 하기 위해 묻자. 법에 대한 현실주의적관점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이 공유된 감정에 포함된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대륙의 제도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법현실주의의 논리적 구조 자체가 우리가 목격한 패러다임 이행에 의해 근본적으로 의문에 붙여졌다는 것은 정말 사실인가?

법현실주의가 가진 문제의 뿌리로 되돌아가 보자. 여기서 핵심은 사회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단순화하고 또한 근대 사회과학이 계몽주의 이래로 위치시킨 너무나 익숙한 모든 형태에서 그 관계를 되찾아옴으로써, 구조의 두 집합하나는 구조의 바닥에 있는 이른바 토대’, 다른 하나는 구조의 상단에 있는 이른바 상부구조을 사회의 규제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는 논증이다. 바닥의 ​​것인 토대는 살아 있고 진보적이며 따라서 늘 죽은 것을 파괴할(그리하여 등 뒤에 남겨둘) 필요가 있으며, 그것의 담론 및 그것의 공적 제도 전체에서 사회적인 것의 변화에 ​​적합한 방식으로 이라 불리는 특수한 상부구조를 생산할 필요가 있다. 이제 분명한 것은, 사회를 지배하는 자는 상부구조에 의해서, 이 경우에는 법에 의해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관철시킨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현실주의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 법은 계속해서 변화하며, 스스로를 갈등에 개방하며, 삶의 교체(permutation)에 따라서 개혁된다. 등등.

이 시점에서 우리의 선택지로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주장들에는 새로운 것이 없고 대체로 진부하다고 말하기, 그게 아니라면 법의 (이른바) ‘현실주의적정당화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꾸지 못하고 더 악화시킬 뿐이라고 말하기가 그것이다. 요약해보자. 우리는 의문 속에서 아니 오히려 의심 속에서 법현실주의의 논리적 구조 자체즉 법현실주의가 법이 경제적사회적인 혹은 어쨌든 집단적인 구조(여기에서는 이것의 구체적 성격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는다)의 살아있는 진보적 상부구조라는 주장을 포함하는 한에서를 논했다. 왜냐하면 오늘날 법에 대한 우리의 공유된 현상학적 경험에서는 이러한 안과 밖’, 이러한 연속적인 교환, 이러한 법의 역동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몽의 변증법의 내파를 선언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완전히 옳다. 실제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신자유주의의 (탈근대적?) 국가는 규범성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규범성을 확실히 사회적인 것으로 되돌려 놓았고, 그래서 갈등이나 변증법에 대한 모든 진보적 소환을 폭력적으로 끊어버리는데, 이는 분명 사회적인 것에게서 공동체의 희망이나 혁명의 기억을 퇴출시키기 위함이다.[각주:2]

이 오래된 20세기의 이분법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인정하자. 법현실주의의 논리적 형태가 위기에 처한 이유는, 국가가 사회적인 것을 통해 말하고 사회적인 것이 스스로를 법적인 것으로 위장한다면, 다시 말해 현실의 삶정치적구조화라는 역설이 확인된다면 법현실주의는 기껏해야 이성의 배리(背理/paralogism)가 되기 때문이다. 법현실주의의 외부에 대한 이야기, 상부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법현실주의의 사회적 변증법에의 의존은 허상이다. 법현실주의는 외부가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법현실주의는 숲의 진짜 곰과 하늘의 큰곰 별자리를 계속해서 혼동하며, 통제 규범의 효율성과 이제는 불가능한 장치의 생산을 혼동한다. 법현실주의가 얼마나 편했던가! 약간의 상상력과 관대함으로도 어떤 구조를 보장하거나 변형할 기반을 찾는 일이 늘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은 사회화되어야 했으며, 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했으며, 아담에게로 되돌아가야 했으며.

근대성은 높고 낮음, 이전과 이후가 있다는 환영에 계속해서 의존했다. 이제 이 환영은 사라졌다. 이분법의 논리적 형식은 사용할 수 없다. 탈근대(즉 앞에서 설명했듯이 동의/비동의의 장치 또는 더 일반적으로는 이분법의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 외부가 없고, 오로지 내부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규제의 논리를 위한 기준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면(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현실주의의 실패라는 무게에 질식당하지 않을 법학을 발명할, 따라서 변형에의 열정을 되찾을 기회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가?

 

거짓 딜레마 (黑白論理,  영어:  false dilemma 혹은  거짓 이분법 (false dichotomy)는 어떠한 문제 상황에 제3의 선택지가 존재함에도 이를 묵살하고 2개 선택지만 있는 것처럼, 이른바 잘못된  흑백논리 로 상대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으로, 참 또는 거짓과 같은 명제의 진릿값이 존재하거나 양자택일이 명확한 논제를 두고 거짓 딜레마라고 하지 않는다. [출처: 위키피디아]

 

 

III

 

규범 논리의 관점에서 그리고 초월주의의 연속성 내에서 다른 것 중에서도 특히 법에서 현실주의적 접근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율적이고 생산적인 형태를 회복하려는 최후의 시도가 해체주의적담론에서 어떻게 발견되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거기에는 탈근대의 강력한 동어반복(더 이상 담론의 외부는 없고 오로지 [담론의] 순환만이 있다’)의 종식, 말하자면 주어진 질서에 대한 비판 혹은 변형의 힘이 위치지어질 수 있는 다른장소를 명명하기 어렵다는 점의 극복이 비판 담론의 목적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그러한 장소는 완전히 한계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해체주의자들에 의해서는 규정될 수 없는 반면에, 그러한 장소가 만들어지는 것은 오로지 극단적 필연성만이 존재하는 일종의 천재(prodigy)를 포함한다. 사법적 행위를 위한 새로운 지평인가?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고 있긴 하지만, 벤야민의 [새로운] ‘천사를 숙고함으로써 혹은 데리다의 여백’(margin) 위에 그러한 장소를 시도 및 건설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뒤틀리고 파멸될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면, 재구축의 관점에서 사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 덧없는 어떤 토대를 가진 척 가장한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 이 대괄호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다. 법체계의 여백으로부터 출발하는 강력한 현실주의적 대안을 재구축할 가능성이 없다면, 바로 이 여백을, 즉 명령(자본에 의한 사회의 물질적 포섭)으로 인해 꽉 채워진 세계의 틈새를, 저항의 지점으로 또는 단순히 말해 분해할 수 없는 존재론적 주름으로 아니면 심지어 전략을 회피하기 위한 실마리로 사고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한가? 그러한 환영이 개혁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던 시절 동안, 즉 대처에서 블레어, 레이건에서 클린턴 시대 동안 지식인들과 법조인들에 의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펜시에로 디볼레’(pensiero debole[약한 사유])의 시절에 지하로 숨어들었던 몇몇 이들은 (해커들이 인터넷에 잠입하듯) 저항의 개별적 사례들이 이 체계에서 사보타지의 일반적 효과를 여전히 생산할 수 있고, 거부의 몸짓과 전술이 대안적 전략을 열어낼 수 있다고 희망했다. 이 중 어느 것도 실현최소한 가시적인 방식으로는되지 않았다. 복지주의의 파괴 및 민영화의 규범적 논리가 효력을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조차, 법원의 복고적 판결이 공개적으로 승리하지 못한 곳에서조차 민주주의적 법절차가 무력화되고 해방의 제헌권력을 질식시키는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즉 중단될 수 없는 듯 보였고 또 중단될 수 없음을 증명했던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뭔가가 일어났다. 그것은 저항자들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전체주의적 융합의 용광로에서 일어난 불사조 같은 불길이 되돌아오는 일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사실은 이렇다. 즉 법이 자본의 사유화 명령에 흡수되는 탈근대적 과정이 진행 중일수록, 그리고 새로운 협치 테크놀로지가 특수한 것(the particular)을 관리하고 그것을 다시 명령 체계로 이끄는 데 효과적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폭력적 이행의 다양성과 장애물의 복수성이는 어느 정도는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고, 주체성을 생산할 수 있으며, 또한 늘 증식할 수 있으며 등등의 시작을, 아니 적어도 그 출현을 목격하게 된다. 왜냐하면 틈새가 늘어나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격했던 것은 법 생산 지점들 간의 체계적 상호 의존성이 띠는 다소간 자생적인 전복인데, 그래서 가령 법 사상의 핵심적 문제설정과 관련해서 보면 해석의 이론은 점점 더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되고(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능성들에 잠재적으로 열려 있게 되고), 입헌적 측면에서 주체들의 정의가 점점 더 파편화되고 분산되고 광범위해지며, 체계의 통일성이 일종의 자연발생적인 연방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우리는 이 현상들을 과대평가할 수 없는데, 이 현상들은 그 자체로 고려했을 때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현상들은 종종 논의를 개방적이게 만들면서도 예외적으로 비판과정을 함께 모으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여성게이레즈비언 및 여타 집단들과 같이 실질적인 이해관계와 주체적 권리들이 이러한 틈새 장치 바깥에서 발전하고 성숙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중 어느 것도 충분하지 않다. 틈새에 대한 법 전략이 내세우는 주장은, 그것이 긴장을 확산하는 데 얼마나 열려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사법적 지평을 확립할 수는 없다. 중요도에 비해서는 수적으로는 적긴 하지만, 혁신적인 순간들이 명령구조의 심연 안으로 들어간다. 어떤 점에서든 여기에는 또 다시 공허함만 남는다.]

 

법현실주의의 위기가 우리에게 남긴 텅 빈 공간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이론적 관점을 되찾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방식에서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법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다시 손 안에 잡아둘 수 있는가?

분명 우리는 우리 자신을 떠올림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 이론이 이미 외부의 부재를 천명하지 않았던가? 체계 이론이 이미 탈출구를 확인하고, 그것을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는 체계의 능력 안에, 균형상태자기생산’(autopoiesis)할 수 있는 체계의 능력 안에 위치시켰을 때, 규범 논리를 고장나게 하는 것에 관해 이제 막 천명하기 시작한 이 거대한 새로움은 무엇인가? 확실히 우리는 체계 이론을 움직이지 않는 역설적 기계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존 롤스의 절차적 계약주의비록 어떤 의미에서는 루만의 것과는 정반대 입장에서 나온 것이지만가 이와 동일한 관심사에 응답한다는 점을, 즉 그 자신 안에 완전히 갇혀 있는 체계에 새 생명을 부여하라는 정언명령에 응답한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롤스는 다음과 같이 진행한다. 첫째, 그는 신자유주의적 혁명에 반발해서 계약의 다원주의에 기반한 제헌과정을 수립한다. (이미 칸트에 앞서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가 신성로마제국의 해체 속에서 이 방법을 시도했던 바 있다.) 다음으로 그는 제헌적 충동의 수렴과 그와 중첩하는 (행정적) 규범 기계를 통해서 사법적 쇄신의 무궁무진한 원천을 확립한다. 이 점에서 탈근대의 동어반복을 깨부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으로 가정되는 것은 계약의 내재적 구성주의(칸트의 형식주의 전통과 접합된)이다.

그러나 나는 이 황혼의 실험[근대의 황혼에서 벌어진 실험]이 법현실주의에 대한 애도에서 우리를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루만과 롤스의 이 두 이론적 모험(일단 이들의 견해가 충돌한다고 간주되지 않으면 둘 간의 독특한 유사성과 연결점을 확인하는 일이 가능해진다)에는 파괴적인 이중나선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글의 서두에서 강조했던 바이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중나선은 우리가 출발했던 그리고 옛 질서의 모순적 내파를 나타내는 그러한 역설(복지국가의 위기, 즉 갈등을 설정한 법[diritto nel conflitto]의 위기와 그 이후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한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침공에 관한 역설)을 역으로 반영한다. 그런데 이 이중나선은 (그리고 여기에 그것의 첫 번째 의미가 있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법 발전을 산 노동의 배제, 즉 모든 갈등적이고 제헌적이며 어쨌든 적대적인 사회적 장치의 배제로 생각하는 쪽으로 이끈다. 이 이론들에서는 입헌체계와 입헌질서의 발전이, 개방적인 미국적 형태든, 해석학적인 대륙[유럽]적 형태든 상관없이, 매우 협소하게 구축된 계보학을 포함하거나 아니면 강제된 중첩(superimposing)을 포함한다. ‘역사의 종말에 대한 불만을 흡수했던(아니 더 올바르게는, 예상했던) 지식의 한 분야가 있다면, 그것은 법 이론 분야이다. 실제로 잘 알려져 있듯이, 탈근대적인 루만주의적인 인식인지 아니면 롤스주의적인 인식인지 상관없이, 현실과 규범성, 역사와 방향설정 사이에 있는 장치의 창조적 의미는 완전히 무효화되고, 법현실주의는 희석될 뿐만 아니라 또한 파괴된다. 그런 점에서 오이겐 에를리히와 조르주 귀르비치 등등이 무덤 속에서 살아 돌아올 뿐만 아니라 근대적 개혁주의 전통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이 무력한 표면에서 중요한 기능을 떠맡는 두 번째 나선, 즉 효율적이지만 평평하고 잡식성이며 늘 통제 안에 있는 방식으로 새로운 규제를 확산시키는 광범위한 기계가 있다. 이것으로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입헌과정(질서화에 맞춰진 것이든 헌법화에 맞춰진 것이든)에서 산 노동을 계획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법체계와 그것을 헤게모니화하는 당국의 전능함을 긍정하는 것과 나란히 나아간다는 점이며, 또한 이것이 모든 것을 침범한다는 점이다. 정치-사법적 이름붙이기’, 그리고 (도덕적인?) 자기생산적 정당화는 자기 자신의 필요에 따를 것이다. 전지구화 속에서 법적 가치의 이러한 독립적인 이름붙이기가 가치를 화폐적금융적 용어 등으로 등록하는 것과 너무나도 유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연구 노선을 계속해서 따른다면, 우리는 의미화의 -공간에 사로잡혀 있다는 감각, 즉 이름과 현실 사이에 어떠한 의미 있는 관계도 없이 세계 안으로 휩쓸려가는 감각을 강화하는 것 이외에 어떠한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 이중나선은 여기서 그것의 완전한 파괴력으로 나타난다. 첫째, 이 이중나선은 산 노동이 질서 안에 모순을 도입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둘째, 이 이중나선은 우리에게 동일자의 영원회귀로서, 권력의 정태적 장소로서의 질서를 회복시킨다.

 

우로보로스 ( 그리스어:  ουροβóρος )는 "꼬리를 삼키는 자"라는 뜻이다. 고대의  상징 으로 커다란  뱀  또는  용 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키는 형상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으로 주로 나타난다. 수세기에 걸쳐서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이 상징은 시작이 곧 끝이라는 의미를 지녀  윤회사상  또는 영원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왔다. 시대가 바뀌면서 우로보로스는 점차 많은 개념을 함께 지니게 되었는데, 특히 종교적·미신적 상징으로 중요한 상징의 하나로 특히 중세  연금술 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고 현대에서도  칼 융 과 같은 심리학자들에 의해 인간의 심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종류의 생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념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1. [영역자주] 이 글은 원래 20019월 영국 켄트대학법학부가 주최한 <비판법학 컨퍼런스>에서 제출된 것이다. 이 행사는 켄트대학 법학부의 마리아 드라코풀루(Maria Drakopoulou)가 조직하고, 하음 셰펠(Harm Schepel)이 진행시킨 로마의 비디오링크를 통해 성사되었다. [본문으로]
  2. [영역자주] 이 문장은 안드레아스 필립포풀로스 미할로풀로스(Andreas Philippopoulos-Mihalopoulos)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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