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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Analyse Opinion Critique에 처음 게시되었으며, David Broder가 영어로 번역해 Verso Books 블로그에 업로드한 것을 다시 한글로 옮겼다.


*원문 링크 https://www.versobooks.com/blogs/4237-jacques-ranciere-on-the-gilets-jaunes-protests

 


자크 랑시에르노란 조끼를 말하다

Jacques Ranciere on the Gilets Jaunes Protests



자크 랑시에르

번역자: 박상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설명할 수 없음의 미덕- 노란 조끼에 관하여

 

노란 조끼 시위를 설명해 보라고? 무슨 목적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그 일이 어째서 벌어졌는지 이유를 대보려고? 사실 납득할 만한 이유는 댈 수 없다. 동시에 노란 조끼 운동을 설명하는 수 없이 많은 이유가 있다. 교통 등 공공 서비스로부터 소외된 주변부에 살고 있었다거나, 동네에 가게가 전혀 없다거나, 통근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거나, 안전하지 않은 직장, 생계유지를 못할 정도의 임금, 쥐꼬리 만한 연금, 부채, 입에 풀칠할 정도로밖에 벌지 못하는 빠듯함 등등…….


확실히 수없이 많은 고통의 이유들이 있다. 하지만 고통은 단일하면서도 너무나 제각각이다. 심지어 서로 대립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이 봉기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고통의 면면들은 모두 동일하게 어떤 것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 이러한 존재 조건에 예속된 개인 모두에겐 반란을 꾀할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다는 것을.

 

모든 이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이 운동[의 발생]에 대해서는 그러한 정상적인 질서가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 말고는 다른 이유를 들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운동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은 동일하게 왜 사람들이 봉기하지 않는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설명적 이성의 논리이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전대미문의 사태는 아니라고 보는 입장은 이 운동이 일어날 합당한 이유가 없다라는 우파 쪽으로 기울어진 결론을 내리게끔 만든다. 동시에 이 입장은 이 운동이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하지만 불행하게도 적절하지 못한 시기에 일어났고 인민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그런 좌파적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늘 그렇듯이 똑같은 두 무리가 있다: 왜 인민들이 봉기하는지 알지 못하는 부류, 그리고 인민들의 앎을 대신하고 있는 부류.

 

때로는 상황을 거꾸로 봐야 한다. 신중하게 시작해보자. 봉기를 일으킨 이들에겐 그럴 이유 보다는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다. 그럴만한 이유는 종종 거의 없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출발점에서는 봉기의 무질서가 우리에게 어떤 질서를 가져올 수 있을지를 생각해선 안 된다. 차라리 이러한 무질서가 지배적인 사물의 질서 및 이에 동반되는 설명의 질서에 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최근 다른 운동들과 비교해 봤을 때 노란 조끼 시위는 대체로 움직이지 않던 이들이 들고 일어난 운동이다. 규정된 사회 계급으로 대표되지 않는 이들이거나 전통적인 계급투쟁이 알지 못했던 집단이 그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매일같이 거리에서, 공사장에서, 주차장에서 만나왔거나 만나게 될 중년 남녀들이다. 이들을 식별케 해 주는 유일한 징표는 모든 운전자들이 갖고 있어야 하는 것[노란 조끼]이다. 이들이 봉기하게끔 만든 것은 지구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문제, 바로 기름값[노란 조끼 시위는 유류세 인상안 때문에 시작되었다]이다. 기름값은 헌신적인 대량 소비의 상징이자, 고고한 지식인들의 속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이는[대량 소비] 또한 정상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의 통치자들이 조용히 잠을 자며 쉬고 있다는 정상성 말이다. 여기서 쉬고 있는 통치자란 침묵하는 다수, 어떠한 집단적인 표현 형식도 가지지 못한 채 산포된 개인의 집합, 이따금씩 있는 여론조사나 투표 결과로 집계되는 것 이외엔 다른 목소리, 다른 의사표시가 불가능한, 그런 이들을 말한다.

 

봉기는 이유(reason, 이성)가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논리가 있다. 그것은 정확히 어떤 문제틀을 깨부수는 것이다.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질서와 무질서를 가르는 이성의 틀-그리고 이를 판단하는 사람들의 위치-가 그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다양성(diversity)을 강조하고 있는 이 비정치적(apolitical)’ 노란 조끼 시위는 구식운동에서 분노하는 젊은이들의 행동 양식을 차용하고 있다. 학생운동이 파업 노동자들로부터 빌려왔었던 형식, 바로 점거농성이 그것이다.

 

점거하기란 어떤 장소의 정상적인 사용, 그러니까 생산, 유통 등등의 용도를 다른 것으로 전환시키면서 투쟁하는 공동체인 누군가가 현존해 있음을 주장하는 양식이다. 노란 조끼는 익명의 운전자들이 매일같이 빙빙 돌고 있는 어떤 비-장소(non-place)인 로터리들을 점거했다. 그들은 선전물을 제작하고 농성용 천막을 설치했다. 마치 10여 년 전 광장을 점거했던 익명인들이 했던 것처럼 말이다.

 

점거는 어떤 특수한(specific) 시간을 생산하기도 한다. 일상적인 활동이 둔화되는 시간, 그러므로 일상적인 사물의 질서가 제거되는 시간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인민에게 응답을 강제하는 운동의 동역학을 가속화시키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시간의 이러한 이중 변환은 사유와 행위의 정상 속도를 변화시킨다. 그와 동시에 사물의 가시성을, 그리고 무엇이 가능한지에 관한 감각을 전화시킨다. 수동적으로 고통 받던 것들은 불평등(injustice)이라는 새로운 가시성을 획득한다. 어떤 세금을 거부하는 일은 불공평한 세금 체계에 대한 인식으로, 더 나아가 전지구적으로 불평등한 질서에 대한 인식으로 되어간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집합이 정상적인 시간과정을 중단시키고, 그곳에서 디젤유류세라는 현안이나, 혹은 최근에 있었던 대학 선발, 연금, 고용법 개정 등과 같은 새로운 맥락을 파고들기 시작할 때, 이윤 법칙에 의해 통치되는 전지구적 불평등 구조의 촘촘한 그물망 전체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개별적인 요구들과 운동의 논리 사이에 있는 간극이 벌어지면서, 이 두 세계가 대립하고 있다. 협상할 수 있었던 사안이 그렇지 않게 되었다. 협상이란 대표자를 내보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노란 조끼 시위는 권위주의적인 포퓰리즘경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위 말하는 프랑스 정신(France profonde)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급진적인 수평성의 주장을 수용해왔다. 이는 오큐파이 운동과 ZAD운동[zone a defender, 개발에 맞서 공원을 지키자는 운동] 에서 볼 수 있었던 젊고 낭만적인 무정부주의와 같은 것이다. [운동에 있어서] 등가적인 인민들의 집합이라는 형태와 지도적인 몇몇의 역량이 운동을 지휘하는 형태는 타협이 불가능했다. 이는 곧 후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개별특수한 주장을 내세우는 형태가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승리는 운동이 스스로 발전함에 따라 이 봉기가 원하는것이 무엇으로 밝혀지는지의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작은 것이었다. 바로 대표자들’, 그리고 타자를 위해 활동하고 사유하는 모든 이들의 권력을 끝장내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욕망이 스스로 어떤 요구의 형식을 취할 수 있음은 진실이다. 바로 시민 발의 국민투표제도.[각주:1]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합리적인 주장 이면에는 두 가지 민주주의 사이의 급진적인 대립이 숨어있다. 한편으로 요청사항에 응답하기 위하여, 그리고 응답에 대립하여 득표수를 계산하는 것은 과두제가 편재하게 됨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에는 민주주의의 개념이 있다. 그들 스스로 문제를 공식화하고자 하는 모든 이가 능력이 있음을 확언하고 선언하는 집단행동 그 자체가 그것이다. 민주주의란 다수 개개인이 선택하는 일에 그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나 능력을 부여하기, 그러니까 입법이나 행정에 적합성없는 이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행위가 바로 민주주의인 것이다.

 

 

봉기는 언제나 미완성

 

평등한 이들의 역량과 통치에 적합한이들의 역량 사이에는 언제나 충돌, 협상, 타협이 있어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평등의 논리와 불평등의 논리 사이의 협상 불가능한 심연이 있다. 이는 봉기가 언제나 미완성에 그치게 되는 이유다. 그리고 이는 전략이 없었기에 실패로 귀결한 것이라 선언하는 학자들에겐 대단한 만족 혹은 불만을 선사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전략이란 이미 주어진 세계에서 행위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전략 없음의 상태는 두 세계 사이에 있는 간극 위로 가교를 설치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끝까지 갈 것이다라고 매일같이 말한다. 하지만 그 결말이 어떤 특정한 목적지로 정해져 있지는 않다. 특히 공산주의 국가들이 혁명의 희망을 피와 흙탕물 속에 익사시켜버린 이래 설정된 목적지 말이다. 아마도 이는 우리가 1968년의 슬로건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 투쟁은 계속되리라.’ 이 때 시작된 것들은 아직 결말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들은 여전히 중도에 멈추어 있다. 하지만 이는 다시 시작하는 일을, 행위자가 바뀔지라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기란 봉기의 현실주의(realism), 해석이 불가능한 사실주의(realism)이다. 가능한 것들은 이미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권력의 공식에 의해 제거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 시민발의 국민투표제도는 노란 조끼 운동의 핵심 주장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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