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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현재성에 관한 테제들

 

한상원(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스탈린,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20세기를 특징짓는 사건들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시대 억압적인 전체에 맞서 소멸해가는 개별성을 구하고자 시도했고, 인간과 그 사회적 관계 그리고 자연을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근대적 사회체제를 격렬하게 고발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필자는 아도르노 철학이 오늘날 현대 사회이론과 정치철학에 제시할 수 있는 교훈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보려 한다.

 

 

1. 변증법에 관하여

 

20세기 중후반 이래 이른바 서구 맑스주의라고 불리는 이론적 흐름에서 변증법은 일종의 뜨거운 감자였다. 소련의 타락과 전 세계 공산당 운동의 퇴보 이후 이론 진영에서는 이른바 정당 맑스주의에 대한 반감이 크게 확산되었다. 특히나 소련의 국가철학이자 도그마적 맑스주의의 정설 교리로 전락해버진 변증법적 유물론을 철학적으로 극복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등 독일어권 비판이론 진영과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 노선이 지니는 차이 역시 두드러진다. 후기구조주의 철학이 지닌 특징은 이러한 정당 맑스주의에서 주창되어온 변증법적 유물론 기획의 원형을 헤겔 변증법에서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칠게 묘사하자면) 후기구조주의는 헤겔의 자리에 스피노자를 세운 뒤 결국 변증법이라는 기획 자체를 폐기하는 방향을 택한다.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들뢰즈/가타리 그리고 네그리/하트로 이어지는 이러한 반변증법적 방향선회는 공통적으로 변증법을 차이모순적대로 환원하며 궁극에 가서는 종합 속에 각각의 개별 요소들을 통합하는 동일성의 논리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이들은 변증법에서 제기하는 부정성개념에 의문을 제기한 뒤 이를 긍정의 철학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20세기 초중반 아도르노와 비판이론이 택한 길은 그와 정반대의 길이었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전통적인 변증법에 대한 표상이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부정성을 강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부정의 부정을 통한 긍정의 총체성을 형성하고 이로 인해 사유의 부정적 운동이 애초에 가졌던 비판적 성격이 소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아도르노가 택한 길은 반변증법긍정의 철학이 아니었다. 거꾸로, 아도르노는 더 많은 변증법부정성의 철학을 주장한다.

 

이러한 변증법과 부정성 개념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의 과정에서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철학사를 지배해온 변증법에 대한 표상 부정의 부정과 긍정의 산출 을 전복하려 했던 시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허위적인 종합과 통일을 거부하면서 부정이 부정을 산출하는 새로운 형태의 변증법을 제안한다. 부정 변증법은 동일성 원칙이 스스로 비동일자를 산출하지만 그것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동일성이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점을 고발하고, 전통적 사유에 의해 배척된 말할 수 없는 것비개념적인 것에 고유한 인식론적 지위를 인정하려는 시도였으며, 또 그것은 인식론적 동일성 원칙을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동일성 원칙을 내부로부터 전복하려는 시도였다.

 

여기서 드러나듯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사유의 총체성에 저항하려는 후기구조주의적 사유와 유사성을 지니지만, 이를 변증법적 문제틀 속에서 사유함으로써 변증법의 부정주의적 전회를 촉구한다. 아도르노는 변증법을 변증법을 통해 구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최후의 변증법 이론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전히 변증법인가? “허위적 상태의 존재론으로서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부정성에 대한 사유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의 고통에 대한 인식을 모색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결국 사태 속에서 자기모순을 포착하려는 변증법의 시선이 지닌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성격을 급진화하려는 기획으로 읽힐 수 있다.

 

나아가 동일성 원칙이 어떻게 비동일성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는가를 포착하는 가운데, 아도르노는 비동일성을 동일성 원칙을 구성하는 불가피한 타자성으로 규정함으로써 동일성의 한계를 드러내며 이를 통해 동일성의 자기반성을 촉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이 동시에 타자성과 구성적 외부라는 후기구조주의적 문제틀과 어떻게 조우할 것인가는 여전히 이론적 과제로 남아 있다.

 

 

2. 신자유주의적 합리성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사회적 현실은 아도르노가 겪었던 세계의 고통과 매우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아도르노와 그의 동료들이 국가자본주의(뉴딜정책, 국가주도형 계획경제)”라고 부른 경제 체제는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적 모델로 이행했다. 국민국가의 제약을 넘어선 자본의 무제한적 팽창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는 아도르노가 비판했던 사회적 특징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수직적인 위계질서 하에서 개별자의 특수성을 억압하는 총체적 사회구조는 수평적이고 다원적인 사회로 재편되었다는 믿음이 사회 전반에 파져 있다. 또한 개인의 자기이해관계 추구를 사회의 궁극원리로 삼는 신자유주의적 사회는 개인의 소멸이라는 아도르노의 시대적 진단과 모순을 빚는 것처럼 보인다. 동일성 원칙, 도구적 이성, 이성의 자율성 상실, 개인의 소멸과 같은 아도르노의 현실진단은 변화된 세계질서 하에서 여전히 유효성을 갖는가?

 

그러나 우리의 시야를 확장해보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놀라우리만큼 아도르노가 비판한문화적 동일성 현상이 만연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정보매체의 발전과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진보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 문화적 동일성의 확산은 전 세계적으로 개인의 삶의 스타일을 동질화하고, 이를 선택의 자율성이라는 외피로 숨기고 있다. 급속한 세계화는 동시에 동일성의 세계화였다. 물론 우리는 세계화의 동일성효과를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사고해선 안 된다. 문화적 동일화와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전은 양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 편에서 전 세계 인구의 문화적 통합과 보편적 가치관 창출에 이바지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의 긍정적 잠재력은 오늘날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도르노가 계몽을 비판할 때 취했던 입장, 즉 계몽이 그 내부적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하고 신화체계로 퇴보했으며, 따라서 계몽의 계몽, 계몽의 자기반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은 세계화 현상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다른 한 편,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이후 반복되는 실업과 경제위기로 인해 경제적 효용성 논리가 개인의 삶을 더욱 강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우리는 도처에서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라는 맑스의 표현이 개인의 삶 속에서 구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 불안정노동의 보편화, 그리고 무한경쟁체제는 개인을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쟁에 내몰고 있으며, 개인의 삶의 전체적 경제 체제에 대한 종속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것은 묵과할 수 없는 역설이며 현 시대의 논리적 모순이다. 시장 외적 개입과 강제를 최소화하고 개인의 자율성 이익 달성을 극대화하려는 현재의 경제 시스템은 외려 개인의 예속을 강화하고 있다. 이것은 극단적 개인주의의 시대 개인의 소멸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최상의 원칙으로 삼음으로써, 인간의 반성적 사유능력을 이러한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바라보게 만들어 결국 개인의 주체적 반성능력을 퇴보하게 만든다. 나아가 상품 교환의 무제한적 팽창은 교환원칙을 동일성 논리의 사회존재론적 기반으로 생각했던 아도르노 동일성 비판 모델의 현재화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관철되고 있는 사회적 동일성 원칙을 과거의 그것과 무차별적으로 동일시할 수 없다. 전체주의 시대의 동일성 원칙은 타자성과 이질성을 제거, 박멸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동일하지 않은 것은 으로 간주되어 폭력적으로 억압되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타자성과 이질성은 제거되지 않는다. 한편에서 그들은 점진적 소멸과정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다른 한 편에서 그것들은 관리되는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사람들은 타자성과 이질성을 제거하기 보다는 그것을 즐기는 전략을 택한다. 관리의 대상으로서 타자성과 이질성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동일성을 강화한다. 동일성은 타자를 억누르고 추방하는 힘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권위 속에 포괄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동일성 원칙은 20세기의 전체주의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관철되고 있다.

 

이렇게 변화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아도르노의 동일성 원칙 비판이 적용되는가? 오늘날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동일성원칙을 확인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고통으로서 인식이라는 아도르노의 기획, 즉 인식비판을 통해 사회비판을 정초하려는 아도르노 비판이론의 이념이 현 시대에 갖는 의미에 대해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회비판이 인식비판에서 출발할 때 불안, 고통, 공포와 같은 개인의 동일화될 수 없는 경험이 사회비판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는 불안정한 주체로서 프레카리아트의 등장 이후 현 시대에 새로운 주체이론의 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3. 민주주의의 위기

 

2019년 사후 50주년을 맞이한 아도르노의 1967년 강의 신극우주의의 양상들(Aspekte des neuen Rechtsradikalismus)이 출간되어 독일 출판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바 있다. 이때 <슈피겔>지의 온라인 저널 <벤토Bento>어째서 그레타 툰베리 세대가 아도르노를 읽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낡은 이론가로 치부되었던 아도르노가 다시 독일에서 광범하게 읽히게 된 배경 중 하나는 독일 내에서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그 직전 총선에서 원내 제3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2023년 여름인 지금 AfD의 지지율은 집권 사민당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뿐만 아니라 무솔리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극우 정치인 조르자 멜로니가 총리로 집권한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의 우익 포퓰리즘과 극우세력은 해마다 선거에서 약진하며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핀란드에서 극우 정당 핀란드인당이 연정에 참여하고, 스페인에서도 극우 정당 Vox의 연정 참여가 논의되고 있다.

 

서유럽에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있다면 동유럽에는 헝가리와 폴란드 등 권위주의적 유형의 극우 정권들이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탄압과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 난민 배제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들 정권들은 여전히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미국과 영국에서도 트럼프 집권과 브렉시트 투표 등을 경험하면서 우익 포퓰리즘은 새로운 시대의 흐름으로 등장했다. 서구사회뿐만 아니라 에르도안의 이슬람 권위주의 정권이 장기집권하고 있는 튀르키예, 두테르테에 이어 마르코스 2세의 집권을 경험한 필리핀, 힌두 근본주의 모디 정권의 인도를 비롯해 21세기의 차르로 불리는 러시아의 푸틴과 홍콩 시위를 잔인하게 탄압한 시진핑의 중국 등 사실상 전 세계가 극우화 또는 권위주의화의 물결을 겪고 있다.

 

전체주의를 경험한 아도르노의 현대 사회 비판은 민주주의가 근본에서 언제나 내부에서 붕괴될 수 있는 취약한 체제라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호르크하이머와 공저한 계몽의 변증법은 철학적 전체주의 분석이라는 과제를 수행했는데, 1940년대 저술된 이 책의 여러 테제들은 여전히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기 위한 통찰들을 제공한다. 또한 아도르노는 2차대전 이후 서독의 민주주의 재건이라는 과제를 철학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수많은 라디오 강연을 했으며, 그의 철학적 주저 부정변증법은 서독에서 나치즘이 붕괴된 이후 최초로 극우 정당인 독일국민당(NPD)이 주의회에 진출하고 유대인 회당에 테러가 일어나는 등 전후 독일에서 다시 등장하는 나치즘의 유령에 대항하는 철학적 표현이었다. ‘비판(Kritik)’위기(Krise)’는 모두 κρίνειν(krinein)이라는 고대 그리스어를 어간으로 하고 있다. 이 단어는 구분하다’, ‘결정하다’, ‘판단하다라는 뜻을 갖는데, 결국 위기란 기존의 상태를 가르는 하나의 분기점이며, 비판이란 그러한 분기점을 이루는 상황에 요청되는 결정적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판이론은 위기에 대한 이론이다.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시대적 진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21세기 현재의 위기와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민주주의가 반지성주의와 결합된 권위주의적 형태의 집권세력들에 의해 혹은 우익 포퓰리즘에 의해 포위되고 있는 현재의 지배질서에 대한 통찰을 위해 커다란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교훈 중 하나는, 지배에 저항하는 주체의 역량이 어떻게 무기력해지는가에 관한 통찰이다. 정치적 선전(프로파간다)이나 조작이 대중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은 오늘날 탈진실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대중의 지적 소외와 소비주의가 민주주의에서 반지성주의를 낳는다는 그의 통찰은 오늘날 민주주의에 필요한 주체로서의 데모스의 역량이 어떻게 침식되는가에 관한 성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전후 서독의 민주주의 재건을 주장하며 아도르노가 칸트를 따라 제시한 성숙(Mündigkeit)’에 대한 요청은 이렇게 주체적 역량의 관점에서 독해될 때 급진민주주의적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아도르노의 이론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서 민주주의의 민주화와 급진화라는 기획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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