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위키피디아 사전의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 일부 부정확한 사실에 대해서는 역자가 번역 과정에서 수정을 가하기도 했다. 위키피디아는 대중적 지식백과인 만큼 엄밀한 이론적 서술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읽어주기를 부탁드린다(원문 링크: https://en.wikipedia.org/wiki/Frankfurt_School)
프랑크푸르트 학파(독일어: Frankfurter Schule)는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의 사회 조사연구소와 관련된 사회이론 및 비판철학 학파다. 유럽 전간기(1918~1939년)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년)에 설립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처음에는 1930년대 현대 사회경제 체제(자본주의, 파시스트, 공산주의)에 불만을 품은 지식인, 학자 및 정치적 반체제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이론가들은 사회이론이 20세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격렬한 정치적 파벌주의와 반동 정치를 설명하는 데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와 맑스-레닌주의를 모두 철학적으로 유연하지 못한 사회 조직 체계로 비판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연구는 사회와 국가의 사회적 발전을 실현할 수 있는 대안적인 길을 제시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적 고찰의 관점(개방적이고 자기 비판적인)은 프로이트, 맑스주의 및 헤겔주의 관념론 철학의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20세기의 사회적 문제들을 강조하지 못한 19세기 고전 맑스주의의 누락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반실증주의 사회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실존주의의 방법을 적용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학 연구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칼 맑스(Karl Marx),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막스 베버(Max Weber),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과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의 주제별 관련 연구들을 종합하여 도출되었다.
칼 맑스와 마찬가지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합리적인 사회 제도를 통해 사회 변화를 실현할 수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관심을 가졌다. 사회이론의 비판적 구성 요소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칸트 비판 철학과 그 계승자인 독일 관념론 – 주로는 물질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파악에 내재해 있는 지적 속성들로서 변증법과 모순을 강조한 헤겔 철학 – 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실증주의, 유물론, 결정론의 이념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파생되었다.
1960년대 이후 사회조사연구소의 비판이론 연구는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의사소통 합리성, 언어적 상호주관성, '근대성의 철학적 담론'에 관한 연구에 의해 주도되었다. 최근에 ‘3세대’ 비판 이론가들인 니콜라스 콤프리디스(Nikolas Kompridis), 레이몬드 고이스(Raymond Geuss),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하버마스의 명제에 반대하면서 그가 이성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 사회적 해방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의 분석,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같은 비판이론 문제의 본래적인 사회 변혁의 목적을 훼손했다고 주장하였다.
역사
사회조사연구소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용어는 1923년 빈 대학 맑스주의자 법학 교수였던 칼 그륀베르크를 초대 소장으로 설립된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 부속 조직인 사회조사연구소(Institut für Sozialforschung)의 학자 및 지식인을 지칭한다. 그것은 독일 대학 최초의 맑스주의 연구 센터였으며 부유한 학생 펠릭스 바일(Felix Weil, 1898-1975)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바일의 박사 학위 논문은 사회주의 실현의 실천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1922년에 그는 맑스주의의 다양한 경향을 일관되고 실천적인 철학으로 종합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제1차 맑스주의 작업주간(Erste Marxistische Arbeitswoche)을 조직했다. 첫 번째 심포지엄에는 죄르지 루카치, 칼 코르쉬(Karl Korsch), 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 그리고 프리드리히 폴록(Friedrich Pollock)이 포함되었다. 제1차 맑스주의 작업주간의 성공은 영구적인 사회조사연구소의 공식적인 설립을 촉발시켰고, 바일은 교육부와 협상을 통해 대학의 교수를 사회조사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함으로써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공식적으로 대학 기관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하려 했다.
코르쉬와 루카치는 칼 코르쉬의 『맑스주의와 철학』(1923)의 연구를 포함하고 있었던 이 작업주간에 참여했지만, 그들의 공산당 당적은 그들의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코르쉬는 이 학파의 출판 사업에는 참여했다. 게다가 공산당은 루카치로 하여금 그의 저서 『역사와 계급의식』(1923)을 부인하도록 강요했는데, 이때 공산당이 제기한 정치적 올바름은 공산당으로부터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지적 독립이 지식 생산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 조건임을 보여주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 전통 – 사회과학의 학제간 통합 – 은 1930년 소장에 취임한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관련이 있으며, 그는 테오도르 W.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철학자, 사회학자, 음악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정신분석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철학자) 등의 지식인을 영입하였다.
유럽에서의 전간기(1918-39)
바이마르 공화국(1918-33)에서 전간기(1918-39)의 지속적인 정치적 혼란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철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학자들은 특히 1918-19년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맑스가 예언한) 독일 혁명의 실패와 파시즘의 독일적 형태인 나치즘(1933~45)의 부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한 반동적 정치를 설명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학자들은 20세기 유럽에서 반동적 사회경제학(19세기의 맑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유형의 정치경제학)의 기원과 원인을 해석, 조명 및 설명하기 위해 맑스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선별을 적용했다. 학파의 계속적인 지적 발전은 1930년대, 칼 맑스가 맑스주의 철학의 토대로서 헤겔주의와의 논리적 연속성을 보여준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1932)와 『독일 이데올로기』(1932)의 출판에서 비롯되었다.
나치즘의 반지성적 위협이 정치적 폭력으로 확대됨에 따라, 연구소의 설립자들은 사회조사연구소를 나치 독일(1933-45)의 외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 연구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제네바로, 그리고 1935년 뉴욕시로 이전하였고 이곳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컬럼비아 대학교에 합류했다. 학파의 학술지인 「사회연구지(Zeitschrift für Sozialforschung)」는 「철학과 사회과학 연구(Studies in Philosophy and Social Science)」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때부터 학파의 맑스주의 비판이론에서의 중요한 작업이 이뤄진 시기가 시작되었다. 미국과 영국의 학계 내에서 연구비와 조사 방법이 받아들여졌다. 1950년대에 학문적 경로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그리고 폴록으로 하여금 서독으로 돌아가도록 이끌었고, 반면 마르쿠제, 뢰벤탈 그리고 키르히하이머는 미국에 남았다. 1953년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 사회조사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정식으로 재창립되었다.
이론가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일반적으로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레오 뢰벤탈, 프리드리히 폴락 등의 지식인을 지칭하는 용어다. 처음에는 학파의 내부 서클에 속해 있던 위르겐 하버마스는 호르크하이머의 연구 프로그램에서 가장 먼저 분기점을 형성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성원: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테오도르 W.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프리드리히 폴록(Friedrich Pollock)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오토 키르히하이머(Otto Kirchheimer)
레오 뢰벤탈(Leo Löwenthal)
프란츠 레오폴트 노이만(Franz Leopold Neumann)
헨릭 그로스만(Henryk Grossman)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관계자들:
지그문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
알프레트 존 레텔(Alfred Sohn-Rethel)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적 이론가들: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클라우스 오페(Claus Offe)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오스카 넥트(Oskar Negt)
알프레트 슈미트(Alfred Schmidt)
알브레히트 벨머(Albrecht Wellmer)
한스-위르겐 크랄(Hans-Jürgen Krahl)
종교적 연관성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종교적 연관성은 변화, 연속, 반복으로 가득 찬 역사를 촉발했으며, ‘문화 맑스주의’류의 반유대주의 음모론[맑스주의가 서구 문화를 전복시키기 위한 유대인의 음모라는 식의 음모론으로 최근 미국에서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 역자]의 지지자들은 이를 그들의 견해가 타당하다는 ‘증거’로 삼았다. 사회조사연구소 창립 심포지엄의 참가자들은 창립자 칼 그륀베르크와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루터교 신자 또는 냉담 중인 개신교도들이었다. 프리드리히 폴록도 예외일 수 있지만, 그러나 전에 유대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예상과 달리 폴록을 유대교 신앙으로 키우는 것을 거부했다. 역사학자 피터 고든(Peter Gordon)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거의 모든 핵심 멤버들은 믿음이나 실천 면에서까지는 아니더라도, 혈통 면에서는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반적인 유대주의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합류로 인해 “복잡해졌다.” 아도르노가 일곱 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이탈’하였으며 […] 아도르노의 어머니 마리아는 가톨릭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부계 성을 따르는 데 동의했지만, 아도르노는 “1903년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어머니의 신앙에 따라 세례를 받았다. 얼마 후 그는 개신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미국 시민권 신청을 마칠 무렵, 아도르노는 아버지의 성에서 어머니의 성인 “아도르노(Adorno)”로 개명했다. 그러나 고든은 “아도르노가 그의 부계 혈통에 관한 사실을 감추려 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1956년 아도르노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박사논문 지도교수가 되었다. 하버마스는 이전의 10대 시절 ‘독일 청년단(Deutsches Jungvolk)’의 청년단장을 역임했으며, 하이데거주의를 “나치즘 운동의 내적 진실과 위대함”이라고 비난하는 서평을 공개 출판했다. 하버마스는 특히 그가 공동 지도교수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벌인 논문을 둘러싼 투쟁에서 아도르노가 이를 온전히 중재하는 데 실패한 이후, 여러 전선에서 그의 지도교수[아도르노]를 비판했다. 그러나 역사학자인 명예교수 마틴 제이는 이전에 하버마스가 “아도르노가 호르크하이머에 비하면 […] 철학적 비판의 계몽적 권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부정하면서도 내부로부터 빛을 내는 동일성 논리의 역설 속에서 그의 사유가 순환하도록 허용했다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아도르노의 후회가 남는 지도를 해명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하버마스는 그러한 ‘동일성’에 대한 부정과 조명이 아도르노로 하여금 “통찰의 독립적 원천[들]”로서 그의 분석 레퍼토리를 지탱해 준 “미학 이론”과 같은 더 많은 “모티프”를 덧붙이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1970년부터 하버마스의 자칭 “방법론적 무신론” 하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소위 ‘2세대’와 ‘3세대’의 종교적, 영적 연관성은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기독교, 여러 정파의 개신교, 여러 정파의 이슬람교에서 출발해 무신론, 불가지론 그리고 유대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연관성은 불교와 같은 전 세계의 다양한 신앙들과의 갈등, 합의, 참여를 배제하지도, 항상 포함하지도 않았다.
비판이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작업은 비판이론의 지적인 목적과 실천적인 목적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전통이론과 비판이론」(1937)에서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비판이론을 독단적이지 않은 계몽을 통해 사회학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지적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비판이라고 정의했다. 비판이론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현실세계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왜곡하는지, 자본주의가 인간의 지배를 어떻게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부르주아 사회에서 파생된 지배적인 이해(지배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의미를 분석한다.
문화적 헤게모니의 실천 속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바로 규범이라고 설명하는 지배계급의 서사적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적 이해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는 사회에 대해 은폐할 뿐만 아니라 드러내기도 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임무는 19세기에 맑스가 논의하지 않은 사회적 관계 영역,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양상들 관한 사회학적 분석과 해석이었다.
호르크하이머는 비판이론을 전통이론에 대립시켰는데, 전통이론에서 이론이라는 단어는 현실 세계에 대한 과학적 법칙(일반화)을 발견하고 확립하는 순수 관찰 방식이라는 의미에서 과학주의의 실증주의적 의미로 적용된다. 사회과학은 과학적 일반화가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연과학과 구분된다. 사회적 경험에 대한 연구자의 이해는 항상 연구자의 마음에 있는 편견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지게 된다. 연구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실험 중인 이론의 결과는 경험에 적합한 사실보다는 연구자의 관념에 부합할 것이다. 호르크하이머는 「전통이론과 비판이론」(1937)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감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실은 지각되는 대상의 역사적 성격과 지각하는 기관의 역사적 성격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수행된다. 양자는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양자는 인간의 활동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러나 개인은 지각 행위 속에서 자신을 수용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호르크하이머가 보기에 사회과학에 적용할 수 있는 조사 방법은 자연과학에 적용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을 모방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증주의와 실용주의, 신칸트주의와 현상학의 이론적 접근은 그들의 적용을 사회과학으로 국한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넘어서는 데 실패했는데, 이는 이론과 실제 삶을 분리하는 그들에 내재해 있는 논리-수학적 편견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러한 조사 방법들은 그들의 연구 속에서 현장에서의 지속적인 인간 활동에 대한 고려 없이, 그러한 고려와 무관하게 언제나 진리인 논리를 추구한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딜레마[실증주의와 실용주의 vs. 신칸트주의와 현상학 – 역자]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비판적 맑스주의 이론의 개발이라고 생각했다.
호르크하이머는 “우리는 단지 과학자뿐만 아니라 지적인 개인 전체를 재고해야한다”는 식의 인식론적인 태도가 문제라고 보았다. 비판과 행동을 정형화시키는 정통 맑스주의와 달리, 비판이론은 자기비판적이며, 절대적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판이론은 물질(유물론)이나 의식(관념론)에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인식론은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연구 내에서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판이론은 전통이론의 철학적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사유의 방식으로서 그리고 인간성의 자기-앎을 회복하기 위한 방식으로서 비판이론은 연구의 원천과 방법을 맑스주의에서 끌어낸다.
변증법적 방법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변증법을 구체적인 연구 방법으로 재정식화했는데, 이는 이념의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양상들 사이의 갈등의 결과로 이념이 그 자체의 부정으로 넘어간다는 헤겔 철학에서 도출된 것이다. 사물을 추상적으로, 각각 그 자체로 고정된 속성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았던 이전의 사유 방식과 달리, 헤겔 변증법은 이념을 시간 속에서 사물의 운동과 변화에 따라, 상호 관계와 상호작용에 따라 고찰한다.
헤겔의 관점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변증법적 방식으로 진행되고 진화한다. 현재는 과거의 모순의 종합인 합리적 지양(Aufheben)을 구현한다. 이는 인간 활동의 지적 과정, 즉 세계정신(Weltgeist)이며, 그것은 특수한 인간의 조건을 향한 진보의 이념, 곧 합리성을 통한 인간 자유의 실현이다. 그러나 헤겔에게서 철학은 오로지 사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므로, 철학은 처방을 내리거나 규범적일 수 없으며, 미래의 우발적인 문제(미래에 대한 고찰들)은 헤겔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역사 연구는 과거와 현재의 인간 현실에 대한 설명으로 국한된다. 헤겔과 그의 계승자들(우파 헤겔 주의자들)에게 변증법은 필연적으로 현상 유지의 승인으로 이어지며, 따라서 변증법 철학은 기독교 신학과 프로이센 국가의 토대를 정당화한다.
칼 맑스와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이러한 관점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헤겔이 ‘절대 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지나치게 빠져 ‘현실적인’ - 즉 바람직하지 않고 비합리적인 - 프롤레타리아트의 삶의 조건에 주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을 뒤집고 자신의 변증법적 유물론 이론을 발전시켜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의식이 아니며,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 맑스의 이론은 생산력의 발전이 역사적 변화의 주요 원동력이라는, 역사와 지리적 공간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을 따른다. 자본주의에 내재된 사회적, 물질적 모순은 자본주의의 부정으로 이어져 자본주의를 새롭고 합리적인 사회 형태인 공산주의로 대체할 것이다.
맑스는 변증법적 분석을 사용해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 그리고 이와 결합된 사회적 관계에서의 모순들을 폭로하여, 기저에 놓인 대립하는 세력 간의 투쟁을 밝혀냈다. 오로지 권력을 툴러싼 투쟁 속에서 이러한 대립하는 세력들에 관한 변증법(즉 계급 의식)을 지각하게 됨으로써만 인간은 지성적으로 자신을 해방하며 사회 과정을 통해 현존하는 사회 질서를 변혁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변증법적 방법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을 때에만, 즉 변증법적 연구에 대한 이전의 잘못된 해석을 수정할 수 있는 자기-교정적 방법을 채택할 때에만 그것이 채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비판이론은 정통 맑스주의의 역사주의와 유물론을 거부했다.
서구 문명 비판
- 『계몽의 변증법』과 『미니마 모랄리아』
프랑크푸르트 학파 비판이론의 두 번째 단계는 주로 두 작품, 즉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1944)과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1951)에 집약되어 있다. 저자들은 이 두 저작들을 연구소가 미국으로 망명해있는 동안 작성했다. 이 저작들은 맑스의 분석의 상당 부분을 유지하면서도, 『오디세이아』를 부르주아 의식 분석의 패러다임으로 사용하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주의 비판에서 서구 문명 비판으로 강조점을 전환했다. 이 저작들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사회적 사고를 지배하게 된 여러 주제들을 제시한다. 서구 문명에서 도구적 합리성의 중심적 특징으로서 자연지배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생태학과 환경주의가 대중적인 관심사가 되기 오래 전에 이루어졌다.
이성에 대한 분석은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서구 문명의 합리성은 지배와 기술 합리성의 융합으로 나타나 외적 자연과 내적 자연의 모든 것을 인간 주체의 힘 아래로 가져온다. 그 과정에서 주체는 삼켜지고, 주체가 스스로를 해방할 수 있게 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유사한 사회적인 힘은 식별될 수 없다. 따라서 『미니마 모랄리아』의 부제는 ‘상처받은 삶으로부터의 성찰’이다.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단계에서 역사적 운동의 압도적 객관성은 아직 새로운 주체를 낳지 않고 오직 주체의 해체로만 구성되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역사적으로 비난받은 낡은 주체에 기반을 두며, 이는 여전히 대자적으로 존재할 뿐 더 이상 즉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여전히 자신의 자율성을 확신하지만, 강제수용소가 주체에게 보여준 무효성은 이미 주체성 자체의 형태를 넘어서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실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된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 비판 이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주체적 경험의 변증법적 모순을 탐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의 진리를 보존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진보조차도 “그 진리 또는 비진리는 방법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에서의 지향성에 내재한다”고 의심을 받는다. 이러한 지향성은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향해야 한다. “절망에 직면하여 구속력 있게 실천하려는 유일한 철학은 모든 것을 구원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관조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아도르노는 정통 맑스주의의 ‘낙관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사유에 대한 이러한 요구 외에 구원[즉, 인간 해방]의 현실성 또는 비현실성에 대한 질문 자체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작품에는 사회적 지배의 궁극적 원천 또는 기초에 관한 양가성, 즉 인간의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비판 이론의 ‘비관주의’를 불러일으킨 양가성이 내포해 있다. 이러한 양가성은 작품이 처음 서술된 역사적인 상황, 특히 전통적인 맑스주의 사회학의 용어로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사회 지배로서 나치즘, 국가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부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보기에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은 자본주의에서 ‘생산 관계’와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 사이의 긴장, 즉 전통적인 맑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내에서의 주요 모순을 구성하는 긴장을 효과적으로 폐지했다. 이전의 (‘무의식적’ 재화 분배 메커니즘으로서) ‘자유’ 시장과 맑스 시대의 ‘거역할 수 없는’ 사유재산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 기업 수준에서의 조직 위계질서와 국가 수준의 거시경제적 개입이라는 보다 중심적인 역할로 진적으로 대체되었다. 맑스가 현대 사회의 해방을 예측했던 변증법은 효과적으로 실증주의적인 지배의 합리성에 종속되면서 억압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 두 번째 ‘국면’에 관해서 철학자이자 비판이론가 니콜라스 콤프리디스(Nikolas Kompridis)는 이렇게 서술한다.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역사관에 따르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은 1930년대에 상당히 과감한 상호학제간 유물론적 연구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일반적인 목표는 규범적 사회 비판을 구체적인 역사적 과정에 잠재된 해방적 잠재력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후, 역사 철학의 전제를 재검토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도발적이고 자의식적으로 전체 프로젝트를 회의적인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 그들은 ‘주체의 철학’의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갇혔고, 원래의 프로그램은 암묵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규범적 이상을 회피하는 부정주의적 비판의 실천으로 수축되었다.
콤프리디스는 이 “회의적인 막다른 골목”이 “이전에 말할 수 없고 전례 없는 유럽 파시즘의 야만성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도달한 것이며, “계몽주의의 희망과 홀로코스트의 공포가 치명적으로 얽혀 있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몽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할 명확한 출구 (Ausgang)” 없이는 벗어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콤프리디스에 따르면, 이 출구는 이후에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상호주관적 기반에 대한 연구가 출현하기 전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분석에 따르면 소비 문화와 대중 매체는 가부장적 가족에서의 부성 형상(father figure)을 대체했다. 그러나 이는 가부장적 권위로부터 사회를 해방시키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단지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권위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크리스토퍼 라쉬(Christopher Lasch)는 1960년대 이후의 해방 운동이 이러한 역학 관계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나르시시즘의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비판했다. 라쉬는 “후기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정치적 비판을 권위주의적 성격과 같은 정신병리적 진단에 너무 많이 근거를 두는 경향이 있다고 믿었다: “이 절차는 판단과 논쟁이라는 어려운 작업에서 그들을 면제해주었다. 그들은 반대자들과 논쟁하는 대신 정신병리적 근거로 그들을 기각했다.”
예술과 음악 비평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은 미술사와 영화 연구의 표준적 텍스트다. 벤야민은 상품화된 예술 작품이 급진적인 정치적 관점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도입할 수 있는 잠재력에 관해 낙관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문화산업의 부상이 사유의 동질성을 촉진하고 기존 권위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보았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처음에 프린스턴 라디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에 왔지만, 그의 이론적 성향이 여론 조사에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금새 명백해졌다. 아도르노의 연구비는 최초 2년 이후에도 갱신되지 않았고, 그는 처음 독일로 돌아갈 기회를 만나기 전까지 미국에서 나머지 기간 동안 사회조사연구소에 고용되었다. 라디오 프로젝트에 고용된 동안 (숙련된 클래식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아도르노는 『신음악의 철학』(1949)에서 대중음악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산업의 일부가 되었고 사회 지배에 기여하는 허위의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급진적인 예술과 음악이 인간 고통의 현실을 포착함으로써 진리를 보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급진적 음악이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미화되지 않는 고통이다 [...] 트라우마적 충격의 지진과 같은 기입은 동시에 음악의 기술적 구조 법칙이 된다. 그것은 연속성과 발전을 금지한다. 음악적 언어는 극단에 따라 양극화되는데, 한편으로 신체적 경련과 유사한 충격의 몸짓을 향해,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이 얼어붙게 만드는 인간의 존재의 결정화된 정지 상태를 향해 [...] 신음악은 절대적인 망각을 목표로 삼는다. 그것은 난파선에서 띄우는 절망의 생존 메시지다.
현대 예술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해버린 전통적인 미적 형식과 전통적인 미의 규범을 부정함으로써만 진리를 만들어낸다고 보는 이러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아도르노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특징이다. 그것은 현대 사회를 아름다움과 조화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과 이미지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허위적 총체성으로 보는 관점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비판받았다. 특히 아도르노는 재즈와 대중음악을 경멸하며 문화 산업의 일부로 고찰하면서, 자본주의를 “미적으로 즐거움을 주며”, “동의할만한” 것으로 만들어 자본주의의 현재 지속 가능성에 기여한다고 생각했다. 마틴 제이는 재즈에 대한 공격을 아도르노의 미국에서의 작업 중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다른 사람들이 미국에 정착했을 때, 벤야민은 그 대신에 파리에 갔으며, 파리의 건축은 벤야민이 자신의 걸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독일어 원제목은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 - 역자]』에서의 핵심이었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이 작품에 명백한 맑스주의 적 관점을 불어 넣도록 격려했지만, 보들레르에 대한 작품의 중심 장의 초고를 읽었을 때 아도르노는 벤야민이 맑스주의적인 은어를 사용했다고 비판하면서, 그가 “일종의 검열 속에서 자신의 가장 대담하고 생산적인 사유를 스스로 거부”했다고 썼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에게 미국에서 함께 일할 것을 권유했고, 연구소는 그를 위해 취업 비자를 발급했지만, 벤야민은 프랑스를 떠날 수 없을 것이라는 오해 섞인 믿음으로 1940년 생을 마감했다.
아도르노의 미디어 비평은 아동 복지와 학교에서의 인종분리 철폐에 관심을 가진 정신과 의사 프레데릭 워섬(Frederic Wertham)를 위한 배경이 되었다. 워섬의 다른 업적은 만화 황금기를 종식시킨 만화검열국(Comics Code Authority) 설립에 기여한 그의 역할로 인해 가려졌다. 이후 1980년대 사회주의자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자본주의 문화 이론이 대중문화에 대해 경직되고 결정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며, 이로 인해 대중문화가 사회 비판을 전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이 배제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EC 코믹스[Entertaining Comics의 약자로, 1940년대와 50년대 미국에서 호러, 모험 만화를 출판한 회사를 말한다]가 종종 그러한 문화적 비평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증주의 논쟁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인식론적 측면은 20세기의 철학적, 과학적 사유의 현장에 칼 포퍼가 출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철학에 대한 포퍼의 답변은 반증주의에 직면하여 비판이론과 과학적 사고의 위기 사이의 연결을 제시한다. 사회적 학문들의 경계는 비판적 지식과 변증법적 이성에 대한 논쟁의 개정판에도 관련되었다. 아도르노, 한스 알버트, 위르겐 하버마스와 같은 저자들의 유산은 또한 이 논쟁을 다룬 텍스트인데, 그것은 두 번째 방법론 논쟁(Methodenstreit)의 긍정으로 절정을 이룬다.
2020년 철학자 칼 작스(Carl Sachs)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그리고 단순히 포퍼의 지지자들이 아니라 ‘빈 학파’가 논쟁의 양측을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프랑크푸르트 사람들”은 빈 학파가 어떤 주체성도 없는 순수한 객관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고 믿었다. 빈 학파 구성원들, 특히 포퍼는 마찬가지로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역사주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점진적 개혁에 대해 폭력적인 혁명의 순간을 밀어붙인다고 믿었다.
그러나 빈 학파는 주체성의 역할을 경시하기보다는, 그 개념적 토대를 완전히 무시하고 주체성에 관한 연구를 “과학에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대신 빈 학파는 “수학적 또는 상징적 논리” 안에서 “주체성”을 배제하고 “누구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는 “선언적 확언의 형식적 의미론”을 설계하고 싶어했다.
반대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구성원들은 잠재적으로 “비합리성과 근시안성”을 전개할 수 있는 “언어 철학”의 전제를 포함하여 “신자유주의”의 개념적 토대를 비판하려 시도했다. 작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합리적 주체성이 갖는 사회적 병리들에 대한 비판”이 오히려 “객관성에 대한 순전히 형식적인 설명”에 대한 빈 학파의 노력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의사소통 행위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의 재구성”은 철학자 니콜라스 콤프리디스에 의해 “주체 철학의 딜레마와 근대성의 자기 확신 문제를 너무 잘 해결”하면서, 자유주의 정의론과 사회의 규범적 질서에 너무 가까운 비판이론의 자기 이해를 만들어 냈다고 비난 받았다. 그는 “이것은 자유주의 이론에 대한 도전이 될 만큼 충분히 다르지만 비판이론의 과거와 충분한 연속성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자유주의 정의론의 중요한 현대적 변종을 만들어 냈지만, 비판이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의도하지 않게 때 이른 해체를 개시했다”고 주장했다.
실천
프랑크푸르트 학자 1세대는 일반적으로 이론에 종사했으며 전후 시기에 정치적 책무나 실천을 회피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서독 정부로부터의 지원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연구소 출판물에서의 어떤 혁명적인 수사에도 반대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특히 벤노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의 살해 이후 학생 운동에 약간의 공감을 표했다. 그러나 그는 거리의 폭력이 변화에 영향을 미칠 잠재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1969년 사망하기 전에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유의 이론적 모델을 확립했습니다. 사람들이 화염병으로 그것을 실현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어떻게 예상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안젤라 데이비스는 1960년대의 급진적인 운동에서 일하는 비판적 이론가들이 “라디오 기술자가 되기로 결정한 미디어 연구 학자와 비슷하다”고 아도르노가 그녀에게 들려준 조언을 회상했다.
『소설의 이론』(1971)에서 조르쥐 루카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부 구성원들(아도르노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었다)을 포함한 “독일의 주도적 인텔리겐차”가 ‘심연이라는 그랜드 호텔(Grand Hotel Abyss)에 묵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심연, 즉 그 너머의 세계를 편안하게 분석하는 은유적 장소를 말한다. 루카치는 이 모순적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은 “심연, 무, 부조리의 가장자리에서 모든 안락함을 갖춘 아름다운 호텔에 묵고 있다. 그리고 훌륭한 식사나 예술적 유흥 사이에서 매일 심연을 관조하는 것만이 제공되는 미묘한 안락함의 향유를 고양시킬 수 있다.”
이에 대한 유일한 예외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신좌파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였다. 마르쿠제의 『1차원적 인간』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능성을 사라지게 하는 물질적 소비와 대중 매체에 의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억제력을 묘사했다. 마르쿠제는 1964년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이러한 비관적인 상황을 기정사실로 여겼지만, 거의 즉시 시민권 운동이 강화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심각한 반대가 시작되자 놀라움과 기쁨을 금치 못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회(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와 같은 학생 활동가들도 마르쿠제와 그의 저작들에 관심을 보였다. 이전에는 무명의 학자 이민자였던 그는 ‘신좌파의 구루’로 알려진 논쟁적인 공적 지식인이 되었다. 마르쿠제는 편협하고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문화에 대한 ‘위대한 거부’와 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혁명’을 목표로 삼았다. 마르쿠제는 민주적 시위 운동에서 정체된 노동자 계급을 대체하고 제3세계 공산주의 혁명가들과 연합할 수 있는 변화의 주체를 보았다.
마르쿠제는 미국 학생들과 서독 학생 운동의 학생들과의 이벤트들을 조직하면서 신좌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언론의 자유와 폭력 사용에 관한 1965년 논문 「억압적 관용」에서와 유사한 사상을 표현했다. 마르쿠제는 서구 사회가 해외에서 제국주의에 참여하고 국내에서는 소수자들을 억압했기 때문에 저항에 대한 “자연권”을 정당화하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과는 달리 현상 유지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표현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아이디어에 대한 정치적 우파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으며 또한 좌파의 다소간의 반대도 있었다. 더글러스 켈너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수사가 당국이 급진적 저항을 억압하는 데 자주 사용된 것이라고 논평했다. 루디 두취케 같은 독일 학생 지도자들은 마르쿠제를 그들의 활동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폭력에 대한 두취케의 호의적 태도는 위르겐 하버마스에 의해 “좌파 파시즘”으로 비판받았는데, 이 발언은 오스카 넥트와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버마스는 나중에 1977년 ‘독일의 가을’[독일 적군파가 일으킨 일련의 테러가 연쇄적으로 일어난 시기] 동안 [좌파] 파시즘이라는 비난을 철회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대한 마르쿠제의 관계는 학생 운동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긴장을 빚었다. ‘사회주의 독일 학생 연합(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은 정치적 참여 부족을 이유로 아도르노를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그의 강의를 방해하려고 했다. 시위 참여를 거부한 어느 학생의 방이 쓰레기로 가득 찼을 때, 아도르노는 “실천은 도덕적 구속을 행사하기 위한 이념적 구실로 봉사한다”고 썼다. 나아가 아도르노는 그것이 권위주의적 성격의 현시라고 말했다. 아도르노의 학생 한스-위르겐 크랄(Hans-Jürgen Krahl) 또한 아도르노의 비활동적인 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969년 1월 크랄이 한 무리의 학생들을 이끌고 방을 점거했을 때 아도르노는 경찰에 전화를 걸어 이를 진압하도록 했으며, 이는 학생들을 더욱 화나게 했다. 마르쿠제는 경찰에 전화하기로 한 아도르노의 결정을 비판했다,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론이 무매개적으로 실천으로 번역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하지만 저는 실천에 의해 이론이 더욱 밀려나는 상황과 순간, 즉 실천과 분리된 이론이 그 자체로 비진리가 되는 상황과 순간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도르노는 학생들의 행동이 스탈린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마르쿠제가 하버마스의 ‘좌파 파시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공격한 것에 대해 그를 조롱했다.
“그러나 당신은 변증법주의자입니다. 그렇죠? 마치 그러한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렇지만 하나의 운동이 그에 내재된 이율배반들의 강제에 의해 스스로를 그 대립물로 전도시킨다면 어떡합니까? 나는 현재 형태의 학생 운동이 그들이 막고 싶다고 주장하는 대학의 기술관료화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1970년대에 신좌파의 한계를 인식한 마르쿠제는 미국의 사회적 쟁점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제3세계와 혁명적 폭력을 덜 강조하였다. 그는 환경주의와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주변부의 다른 운동들을 사회주의를 위한 인민전선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그의 초기 저작 『에로스와 문명』의 반향을 보면서 여성 해방에 관해 열정적으로 언급했다. 1960년대의 혁명적 순간이 끝난 것을 관찰하면서 마르쿠제는 학생들에게 테러에 관해서는 암시조차 피하라고 조언했다. 대신 그는 “제도들을 통한 장기전”을 옹호하고 교육 제도를 미국의 급진파를 위한 피난처로 추천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정통 맑스주의, 프락시스 학파, 프란츠 파농의 영향과 함께 비판적 교육학의 구상에서 파올로 프레이리(Paolo Freire)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프레이리의 연구는 브라질과 제 3세계에서 문해력을 높이는 데 큰 진전을 이루었으며, 이를 프레이리는 계급의식의 고양을 향한 핵심적인 발걸음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