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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문화 읽기"를 시작하며 

 

서교연의 동료들과 함께 "시각문화 읽기" 코너를 시작합니다. 영화, 미술, 전시, 연극, 공연, 드라마, 디자인 등등 다양한 시각문화를 다루고 있는 저작, 논문, 비평들에 대한 비판적 서평을 개시하고자 합니다. 더불어 시각문화의 재현 양식과 서사 구성이 어떻게 사회적 테마와 만나고 어긋나는지 명료한 이론적 언어, 그리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작품 읽기도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영화에 기입된 역사를 읽어내기 위한 이론적 모색(1/2):

하승우, 비교의 항해술서평

 

조지훈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이 글은 2022년 10월 2일 서교연에서 발표한 하승우 선생님의 원고에 대한 토론문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2022년 12월에 출간된 <문화과학> 112호에 실린 동명의 서평을 수정·보강한 원고입니다. 

 

 

비교의 항해술은 본격적인 영화이론서다. 이는 단순히 영화를 분석하는데 이론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거나, 혹은 영화 이론을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저자는 오늘날의 영화연구 담론의 정세 속에서 이론적 개입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당위성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의 목표는 아주 간명하다. 역사적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영화에 기입된 역사를 읽어내기. 저자는 이를 위해 기존의 영화이론이 쌓아올린 성취와 대결한다. 특히 영화 이미지의 고유함에 천착하는 독특성(singularity)의 이론은 주요한 대결 상대다. 물론 역사에 주목한다고 해서 영화를 현실의 반영물로 간주한 역사주의적 해석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전자의 이론적 성취와 싸우면서 후자로 돌아가지 않을 것. 또한 영화에 기입된 역사 읽기를, 자본주의라는 분명한 시대적 지표 속에서 수행할 것. 이러한 이중의 목표 속에서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저자가 수행하고 있는 이론적 모색이다.

 

1. 독특성과 구분되는 종별성 개념

 

이 책에서는 매우 많은 사상가와 이론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개념은 종별성(specificity)이다. 사실 종별성은 포함관계를 정의하는 아주 오래된 평범한 개념이다. 이를테면 서로 포함관계에 있는 두 개념이 있을 때 이때 포함하는 개념이 유()이고 포함되는 개념은 종()이다. 예컨대 영장류-인간이라는 개념 쌍이 있을 때 영장류는 인간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유 개념에 속하고, 인간은 영장류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종 개념에 속한다. 두 개념 쌍만 놓고 본다면 유 개념은 보편에 해당하고 종 개념은 특수에 해당한다. 따라서 보편은 특수를 포함하는데, 여기서 저자는 포함을 상위개념과 하위개념의 위계로 파악하기 보다는, 특수를 자리 잡게 해줄 수 있는 구조화의 원리로 이해한다(하승우 비교의 항해술, 오월의봄, 2022, 5. 이하 쪽수만 표기). 따라서 특수는 단지 보편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특정한 원리에 따라 보편과 함께 구조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은 영장류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계통발생이라는 구조화된 원리에 따라 영장류에 포함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특수는 보편의 한 사례가 아니라, 구조화의 원리에 따라 보편과 함께 구성되는 개념이라는 편이 타당해 보인다.

 

따라서 종별성을 다루는 작업은 보편의 범주에 속하는 특수성을 찾아내는 것만 일 수 없다. 오히려 보편성과 특수성이 함께 구조화되는 원리를 찾아낼 때야 비로소 종별성을 다룰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의 관심사는 종별성을 구성하는 원리가 아니라, 종별성에 의해 구성된 특수들 간의 관계다. 이러한 특수들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 저자는 이 책의 굳건한 이론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특수의 두 가지 양태를 구분한다.

 

“중요한 것은 특수의 형태가 발본적으로 변화된다는 점이다. 하나는 독특성이고, 다른 하나는 종별성이다(6쪽).”

 

종별성을 이해하는 핵심은 보편성과의 구분보다는 오히려 독특성과의 구분이다. 따라서 이 책의 첫 번째 이론적 경합 대상이 누구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바로 독특성의 개념으로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쓴 들뢰즈(Gilles Deleuze), 특히 시간-이미지(image-temps) 개념을 전개한 시네마 Ⅱ』(Cinéma )의 들뢰즈라 할 수 있다. 독특성은 철학사적으로 대단히 복잡한 계보를 함축하는 개념이다. 다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간명한 정의를 따라 독특성은 보통의 점과는 구분되는 모든 점들이자, “하나의 개체에 국한된 것이 아닌 개체를 발생시키는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10). 이를 시네마의 문제설정으로 옮기면 들뢰즈는 영화에서 독특성이 산출되는 계기에 주목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시간-이미지다. 이 역시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시간-이미지는 영화의 쇼트들 사이의 간격이 틈새로 전환되는 순간 출현하는 이미지라 할 수 있다(9). 이러한 시간-이미지는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는 없다. 즉 시간-이미지에는 자신을 어떤 범주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 원리가 있을 수 없다. 단지 독특한 순간에 발생하는 시간-이미지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이미지는 하나의 정형화되고 유형화된 이미지로 포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전복적이라고 들뢰즈는 평가한다.

 

저자는 이처럼 영화로부터 발생되는 독특성에 주목하는 들뢰즈에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도가 영화연구에서 역사적 맥락, 특히 불균등한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들여다보는 계기를 누락시켰기 때문이다(12). 이는 들뢰즈 당대보다 오늘날에 더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독특성마저 자신의 증식을 위해 흡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 당시에 전복적이었던 독특성이 오늘날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전복적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이러한 비판은 낯설지 않다. 이를테면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이미지의 고유한 역량을 강조하는 순수 이미지론의 귀결이 이미지의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누락시키면서, 비판적 개입을 막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역, 현실문화, 2014, 1). 이는 영화의 역사성, 특히 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영화를 해석하고자 하는 문제설정에서는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는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어려움은 이러한 비판 뒤에 따라 온다. 그렇다면 영화이론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영화 이미지의 고유한 역량을 읽어내는 시도로부터 빠져나온다고 한다면, 영화를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읽어내는 작업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런데 과연 이러한 시도를 위해서 새로운 이론이 필요할까?

 

2. 폴 윌먼이 계승한 알튀세르의 유산

 

영화이론의 역사에서 이른바 독특성의 영화이론에 대한 안티테제로 사용할 수 있는 이론들은 적지 않다. 영화의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는 이론들, 특히 알튀세르(Louis Althusser)와 라캉(Jacques Lacan)을 전유하여 영화가 생산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메커니즘을 지적한 장-루이 보드리(Jean-Louis Baudry)의 장치이론이 대표적이다. 장치이론은 영화의 독특성보다는 영화의 각 부분들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작동하는 구조화의 원리에 주목한다. 따라서 장치이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화의 이데올로기 효과를 그 어떤 이론보다 집요하게 파고 든다. 하지만 이러한 장치이론에서 언급되는 자본주의는 역사가 없다. 단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영화적 양식과 극장, 매체 등의 조합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영화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는 구조가 아닌, 역사적 자본주의가 기입되는 방식을 살펴보기 위해선 1970년대에 유행한 장치이론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여기서 저자는 영화이론에서 가장 유명한 알튀세르의 계승자라 할 수 있는 장-루이 보드리가 아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적어도 영화이론 내에서는 그 누구보다 알튀세르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폴 윌먼(Paul Willemen)을 소환한다. 한국에서는 전공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소개가 안 된 이 이론가를 무대 위에 올리면서, 저자는 윌먼의 종별성 개념의 독특함에 주목한다. 윌먼을 다시 소환하며 저자가 꾀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영화에 기입된 역사를 중층적으로 읽어내려는 윌먼의 독법을 차용하기.

둘째, 종별성 개념을 매체 이론으로 한정지으려는 기존의 영화이론과 구별하기.

셋째, 영화 이론에서 사라진  알튀세르의 유산을 윌먼을 통해 상속하기.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윌먼에 따르면 영화에서 역사를 읽어낸다는 것은 영화에 반영된 단일한 사회구성체를 짚어내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 사회구성체에서 다양한 모순들이 종별적인 방식으로 접합되는 과정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예컨대 윌먼은 내셔널 종별성(national specificity)’내셔널리즘 담론(nationalist discourse)’의 구분을 통해 영화를 하나의 내셔널리즘(nationalism)’으로 환원하는 태도와 선을 긋는다. 내셔널리즘 담론으로 영화를 파악한다면 이는 한편의 영화를 네이션 스테이드(nation sate), 즉 단일한 국가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내셔널 종별성의 관점으로 파악하게 된다면, 이는 영화를 다양한 모순들이 접합되어 있는 사회구성체로서의 네이션(nation)’에 위치시키는 일이 된다.

 

따라서 백인이 주류인 영국 사회에서 흑인 감독의 영화를 단순히 영국 내셔널리즘 담론에 포섭된 영화로 읽을 수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영국을 단일한 국민국가가 아닌 하나의 사회구성체로서, 다양한 모순이 접합되는 지점을 보여주는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다(136). 영화를 종별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은 이처럼 한 사회의 다양한 모순들이 접합되어 있는 흔적을 영화 속에서 읽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윌먼을 통해 매체 이론에 한정되는 영화연구와 구별 짓기. 매체의 고유한 특징을 중심으로 영화를 분석하는 대다수의 흐름들은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데, 특별히 윌먼은 종별성 개념을 매체적 특징으로 사용한 스티븐 히스(Stephen Heath)를 예로 들어 비판하고 있다. 히스에 따르면 종별성은 카메라의 각도, 거리, 프레이밍, 조명, 사운드와 같은 영화의 고유한 약호들이 의미화되는 방식과 관련된다(134). 이는 앞서 언급한 장치이론가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들과 달리 히스는 영화 매체가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생산하는 과정과 동시에, 이러한 과정에 종속되지 않는 이질적 흐름에도 초점을 맞춘다. 이는 독특성에만 초점을 맞춘 들뢰즈보다는 종별성의 측면에서 영화를 다룬다고 할 수 있으나, 결국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영화 그 자체의 모순이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고려되는 모순이 아니다. 이처럼 사회와의 관계를 누락시킨 채 영화 그 자체가 발생시킬 수 있는 모순만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너무 단순화시키는 꼴이 된다. 이는 영화에 기입된 자본주의의 역사를 중층적으로 읽고자 하는 저자의 기획과는 상당히 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알튀세르를 다시 영화이론에 도입하기. 알튀세르는 영화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는 1970년대의 스크린 학파 전후로 열정적으로 도입되었다가, 이후 완벽하게 망각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저히 잊혀졌다. 다만 한참 알튀세르가 수용되었을 때도 저저의 언급처럼 그의 핵심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던 과잉결정(surdétermination)에는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저자가 윌먼을 통해 도입하고자 했던 종별성 개념, 즉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모순 속에서 영화를 읽어내고자 도입했던 내셔널 종별성과 같은 개념은 사회구성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심급들이 불균등하게 맺고 있는 모순의 관계(13)”에 주목하는 알튀세르와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윌먼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과잉결정 개념은 사회 전제를 구성하는 각각의 모순이 서로 관계를 맺고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에서 종별적이라 할 수 있다(122). 따라서 윌먼의 종별성 개념은 알튀세르가 언급한 과잉결정의 함의가 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윌먼이 알튀세르와 가깝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알튀세르의 과잉결정을 끌어들임으로서 저자는 윌먼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모순들의 관계가 어떤 형태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때 다시 등장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까다로운 대목이자, 저자가 힘주어 강조하는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의 문제가 등장한다.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은 그 자체로 알튀세르의 사상 내에서도 복합적 해석과 논점을 형성하지만, 적어도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모순의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고, 위계적으로 접합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126, 175~180). 모순들은 단지 그때그때의 정세에 따라 우연적으로 접합되는 것이 아니라, 모순들 간의 전위와 압축이 적대로 전화되는 결정과정을 통해서 파악되어야 한다(128).

 

알튀세르의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을 이 짧은 서평에서 더 이상 심도 있게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가 알튀세르의 개념을 정확하게 도입했는지를 평가하는 것도 서평자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다만 최종심급의 결정을 통해 저자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모순들의 위계적 접합의 강조.

둘째, 모순들은 우연적인 외부 요인이 아니라 전위와 압축이라는 모순들의 운동 가운데 적대로 결정된다는 것.

셋째,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은 한계와 압력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어떤 행위들을 산출하도록 만드는 조건이라는 것(131).

 

따라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을 영화이론으로 도입하고자 한다면, 영화가 사회구성체의 과잉결정된 복수의 모순들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접합시키는 전위와 압축의 과정을 파악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크게 사회구성체 내에서 다양한 요소들과 접합되는 영화의 위치를 다루는 일종의 영화 사회학이나, 영화 내에서 재현되는 사회구성체의 복합적인 모순을 다루는 영화 비평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책은 두 가지 모두를 시도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영화 해석을 다루다보니 후자에 집중되고 있다. 다만 자신이 전개한 이론적 취지에 맞게 어떤 한 편의 영화가 지니는 영화사적 성취에 주목하기보다는 한국 근대영화(1, 2), 노동 다큐멘터리(3), 초국적 작가로서 박찬욱의 영화(5), 역사 영화(6), 재난 영화(7) 등등의 다양한 범주 속에서 고찰된다. 즉 한 편의 영화를 다른 영화들과 관계 지으면서 이를 한국영화 일반이라는 보편의 범주 속에서,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범주인 역사적 자본주의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 비교의 항해술은 다름 아닌 수많은 영화들을 보편과 특수의 관점에서 다양한 집합으로 구성해내고 이 속에서 종별적 차이를 짚어내는 작업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책에서 수행되는 작업에는 몇몇 예외가 있다. 이는 특히 예외적으로 단 한편의 영화만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4장 "경험적 역사와 비역사적 중핵 사이의 긴장: <괴물>이라는 급진적 예외"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예외는 이 책이 전개하는 이론적 입장과 개념의 난점과 지향점을 선명하게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세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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