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무브 Project/시각문화 읽기

삭제 표시된 흔적

by 인-무브 2025. 7. 20.

삭제 표시된 흔적 

 

 

전솔비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시각문화 연구자)

 

 

메모

 

이 글은 2022년 12월 경기도 화성에서 열린 전시에 관해 썼던 글과 이후 그 글에 붙인 짧은 메모로부터 출발한다. 별도의 레퍼런스가 필요한 이론이나 학자 이름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글이었다. 작업에 목소리로 출연한 사람 중 다수가 전시를 보러 온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네팔, 태국, 베트남 등에서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으며, 공장에서 일을 하고 돈을 모아 고향에 보내면서도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틈틈이 한국어를 배우는 바쁜 일상에 살고 있었다. 내가 늘 책을 읽고 전시를 자주 보고 동시대 이론을 잘 알고 있는 한국인을 독자로 상상하며 글을 써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그리고 그런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론을 삭제하고 정체성을 지칭하는 표현을 삭제하고 몇가지 고민거리를  삭제하고 나니, 서로 다른 국가에서 일곱 명의 사람이 한국까지 오게 된 여정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176분짜리 영화(일곱 편의 단채널 영상)를 기록하는 글이 되었다.  

 

풍경 보는 걸 좋아하는 캠라는 캄보디아에서 한국에 들어온 지 8년이 되었다. 한국어는 어려운데 반말, 사투리로 말하면 더 알아듣기 어렵다. 자동차 핸들 회사의 조립 파트에서 일하는데 8시에서 8시까지 서서 일하고 주말에도 일한다. 관두는 사람들이 많지만 캠라는 캄보디아 사람에 대한 편견이 생길 것도 생각하며 일한다. 어릴 적 캄보디아에서 11명 대가족이 모여 살던 기억이 날 때가 있다. 낚시를 해서 잡은 걸로 함께 밥을 먹던 나날들이었다.[1]

 

하지만 글을 쓰며 결정했던 여러 차례의 선택에 대해 나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 그들 중에 미술관에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한국 영화를 한국어 자막 없이 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지, 랑시에르의 책을 읽고 감동했던 사람이 있는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른다. 많은 글자를 삭제했던 것이 배려라기보다 어긋난 상상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 글 옆에는 몇 줄의 머뭇거리는 메모가 남았다. 메모는 다음의 문장으로 끝난다.

 

이 질문들은 ‘누구’를 기준으로 언어를 표기하는가의 문제로 향한다.

 

독자의 위치에 대한 좁은 상상 속에서 ‘집과 집 사이를 걷는 이야기’는 누군가의 정체성 말고 고유의 이야기로만 그를 기억하려는 시도를 재기록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이 글 뒤에 남겨진 메모는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받아적으면서 끊임없이 ‘그들’과 ‘나’(라고 적었지만 실은 무의식 속의 ‘우리’)를 구분하는 어떤 미끄러짐을 겪었던 흔적을 드러낸다. 그것은 언어적 타자의 발음을 상상 속의 표준 발음 속에 채워 넣으며 겪었던 미끄러짐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차이의 기표로 구분되어 들리는 목소리의 힘을 밀어내려 하던 시도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문장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삭제되었다. 남은 흔적 위에 또 다른 독자를 염두에 두고 다시 쓰는 이 글은 보이지 않아도 감각되는 차이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에 관한 글을 이어 쓴다. 그것은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일곱 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한국인이 아닌 목소리’를 분별하는 한국인 청자 그리고 저자와, 목소리 뒤에서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차이로 가시화되는 외국인 화자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의 종속성 문제를 사유해보는 또다른 흔적이 될 것이다. 

 

▲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 김양우, 2022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

 

김양우의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는 한국의 경기 남부 지역에 살아가는 다국적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기록한 전시이자 동명의 웹사이트 제목이다.[2] 경기 남부 지역은 수도권과 지방을 남북으로 연결하고 서남쪽으로는 항구와 밀접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예전부터 많은 산업 단지들이 자리 잡으며 급격하게 인구가 증가해 온 곳이다. 제조업 중에서도 기계 금속 공장, 전기·전자 부품 공장이 많은 이곳에는 한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로 네팔, 캄보디아, 베트남 등 남아시아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산다. 화성에 거주하며 제조업 현장의 기계적인 사운드와 화물 운송업이 만들어내는 풍경의 속도감, 리듬감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움직임에 대해 작업해 온 김양우는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작업은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데, 이곳에 접속하면 3D로 만든 가로등, 옥수수, 트룽, 전기도면, 자동차 핸들, 겨울 산, 코일, 운동화, 버스 이미지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이미지들은 다국적 이주 노동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나온 단어들로, 고향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노동 현장에서 반복해서 보는 이미지들의 집합이다. 이 흑백의 이미지들은 관객들이 타인의 이야기로 접속하는 매개체가 된다. 만약 산과 이름 모를 부품 더미를 클릭한다면, ‘사람은 할 수 없는 거는 아무거나 없어요 생각 따라서 가면 다 갈 수 있어요’ 라는 인터뷰 문장을 만나게 된다. 다시 한번 클릭하면 ‘이야기를 재생하시겠습니까?’라는 메시지가 뜨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클릭하면 마치 눈을 뜨듯 가로로 갈라지는 검정 화면이 위아래로 열리며 영상이 재생된다. 영상 속에는 차창 밖으로 경기 남부 지역의 풍경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컨테이너가 있고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공장 단지 옆으로 논과 밭이 펼쳐져 있다. 이 이야기는 네팔에서 온 디팍의 것이다. 

 

“제가 한국에 온지는 8년 되었고 지금 8년 계속 프레스 공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제품, 부품 만들고 많이 무겁지도 않고 손 많이 사용해야 되요. 기계 안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3]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는 “듣지 못했을 뿐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했던, 멀지만 가까운 이야기에 집중하고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일면 한국에 사는 이주 노동자의 삶을 소재로 삼는 여느 예술 작업들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4] 착한 선주민 되기, 이주민과 함께 살기, 다문화를 이해하기, 차별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기. 공공 기금을 운용하는 지역 문화재단에서 장려하는 사업들이 대체로 이와 비슷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다문화주의라는 말에는 한국 문화를 중심에 놓고 그 외에 다양한 문화들을 존중하겠다는 자문화 중심성이 깔려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며 그렇기에 문화간 소통을 강조하는 상호문화주의로 용어를 변경하자는 움직임도 있지만 만연한 인종차별과 혐오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한국은 여전히 다문화주의의 시간성 속에 있고 이 시간을 일단 잘 거쳐 가야 할지도 모른다.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듣게 되는 일곱 명의 이야기에서도 한국의 노동 현장에서 겪게 되는 불친절과 차별, 혐오에 대한 기억이 대수롭지 않은 에피소드처럼 툭툭 튀어나온다.

 

한편, 이 프로젝트는 이주 노동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와 그들이 보는 풍경만으로 이들의 삶을 재현함으로써, 분명 문제적인 언론보도나 순진한 예술 작업 방식과는 다른 길을 걷고자 시도하고 있다. 영상 안에 화자의 얼굴을 지움으로써 인종적/민족적 기호를 삭제하고, 이들이 바라보는 한국의 풍경과 이들의 서사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주 노동자의 얼굴이 아닌, 그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야기에 동행하는 느낌이 들게 된다. 실제로 김양우 작가는 이들의 일터인 공장과 생활 장소들에 동행하며 함께 속도를 맞추어 촬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들의 동선을 따라가며 일과를 상상하며 촬영하는 방식을 병행했다. 이때 목소리를 들으며 풍경을 보는 관객의 감각은 이주 노동자의 발이 움직이고 눈이 움직이는 위치에 맞춰지며 이동하며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의 감각을 일부 체험한다. 생생한 VR 기술과는 거리가 먼 작업이지만 오히려 그 불완전한 체험이 타인의 삶을 지켜보는 나의 위치를 끊임없이 환기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일곱 명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이러한 재현 방식도 기존의 다문화 담론 속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나요?” “당신은 어떤 일을 하나요?” “당신은 어떤 집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인터뷰에서 유추할 수 있는 작가의 질문들은 이주 노동자의 삶을 전형화할 법한 서사를 끌어내며, 국경을 넘나들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풀어내도록 의도하기에 기존의 이주 노동자 이미지를 고착한다. 결국 얼굴을 보지 않을 뿐, 관객들은 이야기 너머에서 평소에 자신이 상상할 법한 (피부색이 더 진하고 한국말이 서투르며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서 공장 일을 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다른 듯 비슷한 이주 노동자를 머릿속에 그려내게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주 노동자가 언급되는 사건이 미디어에 게시될 때마다 차별과 혐오의 심각성을 재차 확인하게 되는 한국 사회라는 현실이, 이주민의 더 많은 가시화와 더 많은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이러한 작업을 반복해서 추동한다면 이 작업이 갖고 있는 윤리적 태도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도저히 노동하는 삶과 예술을 하는 삶이 중첩되기 어려운 이주민의 현실이 당사자의 적극적인 표현과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기 어렵게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목소리 뒤에 가려진 얼굴을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일은 감상과 비평의 자리에서 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주 노동자가 정착해서 살아가는 것을 여러모로 까다롭게 제한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한국에 고용 허가제로 단기 비자로 입국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국민으로 혜택을 받거나 자신을 돌보는 삶을 만들어가기가 어렵다. 휴일에는 추가 근무를 하거나 생활에 필요한 가사 노동을 하거나 비자 연장을 위한 교육을 받으러 가는 이들에게 자기 표현을 위한 글쓰기, 그림그리기, 영화 만들기 등의 문화예술 활동은 병행하기 어려운 일상일 것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이들의 목소리, 이들이 표현하고 싶은 생각의 전달자가 필요해지는 상황이 지속되고 많은 이주민(그리고 난민)의 목소리들은 국민의 자격을 지닌 한국의 예술가에 의해 대리되고 있는 것 아닐까.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는 이러한 적나라한 현실을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작가는 자신이 대리한 일곱 명의 화자, 그리고 그것을 듣는 청자의 관계를 일시적 공동체로나마 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평 안에서도 현실에 존재하는 이주 노동자의 이미지를 바꾸려고 하거나 새롭게 제안하려고 하거나 그들 스스로 표현하도록 하는 작업의 부족함을 절감하기보다는 기존의 작업들이 재료로 삼는 현실의 모습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관객의 몸에 남기는 흔적에 대해 말할 책임이 있을 것이다.  

▲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 김양우, 2022

 

 

언어와 종족성

 

“사실 어느 나라 말을 처음에 누가 잘 알겠어요 그죠?”[5]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2022)에 등장하는 일곱 편의 인터뷰를 모두 살펴보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모든 인터뷰이들이 ‘한국어 배우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자를 갱신하려면 고용허가제 한국어 자격시험(EPS-TOPIK) 점수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해야 하기에 대부분의 이주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것만큼이나 한국어를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하지만 일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어를 배우려는 국내 외국인들은 크게 유학생, 결혼이민자, 원어민 강사, 외국인 근로자로 구분된다.[6] 이중 유학생이나 결혼이민자는 각각 대학교 어학당이나 복지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거나 학교나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익히며, 원어민 강사나 화이트칼라 외국인 근로자들도 사내 프로그램을 이용하거나 사비를 들여서 학원에 갈 수 있다. 하지만 공장에 다니는 대부분의 블루칼라 외국인 근로자들은 주말이나 야간에 시간을 내서 공부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일터이자 생활공간인 공장이 있는 외곽 지역과 교육 장소가 있는 시내 사이에는 평균 5~6시간 정도의 왕복이 필요하고, 노동 현장에서 고용주나 동료들을 통해 구어체로 습득한 일상 언어와 시험 문제로 마주하는 사회 상식 문제나 문어체 사이의 격차도 크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에서 가장 어색하고 낯선 장면 중의 하나가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을 칭찬하고 신기해하거나 높이 평가하는 장면인데, 이는 외국인에게 친근함을 느끼는 한국인의 태도에 ‘한국어 능력’이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잘 보여준다. 다국적 외국인들의 모국어를 존중하거나 그들의 언어를 배우거나 번역해서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우리’의 언어에 흡수되고 적응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태도. 이러한 민족주의적 태도에 인종주의적, 계급적 차별까지 더해지면 동남아시아에서 온 피부색이 검고 한국어를 잘 못하는 공장 노동자에 대한 고착된 이미지가 생성된다. 과거 ‘외노자’라는 혐오 표현의 등장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의 출몰과 영향력을 목격한 바 있다.

 

이때 ‘자국어 중심주의’는 인종주의로도 민족주의로도 설명이 충분치 않은 한국인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현상처럼 보인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7]은 “이 독특한 차이 영역 - 특정한 집단을 결속시키는 공유된 언어, 전통, 종교적 신앙, 문화적 관념, 관습, 의례 - 을 지칭하는 완벽하게 훌륭한 용어가 존재하며, 아마도 현재 우리가 ‘인종’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내용은 이론적으로 이 용어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8] 이때 이 용어가 바로 ‘종족성’이다. 홀은 1980년대 영국 사회에서 이민자들의 피부색에 대한 차별이 생물학적 표지로서 지속적으로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는 당대 현실과 ‘영국인다움’을 서사적으로 형성하는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민족주의 담론 사이에서 ‘종족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폐쇄적인 정체성 정치로 흘러가지 않고 개방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지 탐구했다. 인종, 종족성, 민족은 상관관계의 망 속에서 작동하며 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고 홀은 강조한다. 흑인인권운동과 흑인예술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흑인성’이 재현과 정치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영국과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 놓인 한국은 이미 전체 인구의 5퍼센트 이상이 다국적 이민자임에도 단일 인종과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진 단일 언어, 단일 문화의 국가라는 상상이 재현과 정치의 영역에서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한국은 외국인 중에서도 이주 노동자, 그리고 난민 당사자의 목소리가 부족한데, 이는 국가가 허가한 노동이라는 조건에서만 불안정한 정착이 지속되는 이주민들의 현실이 이들을 법 바깥의 영역으로 내몰고, 문화자본을 축적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며, 결과적으로 미디어나 문화 예술의 장에서 당사자가 내는 목소리를 듣기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피부색이 진한 외국인들을 향한 차별과 혐오의 사건들 속에서 드러나는 인종주의와, ‘한국어’라는 단일 언어를 이주민들에게 강요하는 민족주의의 연쇄 속에는 특정 언어와 종교, 전통을 배제하는 자문화중심주의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종족성’에 관한 담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홀은 종족성에 대한 감각이 “장기간에 걸쳐 수많은 수준에서 - 즉 세대 간에 걸쳐, 공유된 사회적 공간에 걸쳐, 공유된 역사에 걸쳐 - 통합되게 되어, 많은 사람은 이를 담론적 구성물이 아니라 마치 자연 자체와 같은 영속성을 갖춘 것인 양 경험하게 되고 상상하게 된다”고 말한다.[9] 목소리에서 드러나는 어눌하거나 서툰 한국어 발음을 들으며 작동하는 차이의 감각이 즉각적으로 차별의 감각으로 변환되는 무의식 안에는 분명 자연화된 ‘한국인다움’의 종족성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 인종과 민족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진 않지만, 일상에서 느슨하고 광범위하게 특정 집단을 차별하는 태도, 특히 한국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며 언어에 종속된 타자를 꾸준히 유지하려는 종족성은 국가적 차원의 권력뿐만 아니라 일상에 내재한 개개인의 몸속에서도 차별의 장치로서 작동하고 있다. 

 

 

사이-언어의 아카이브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는 이렇듯 언어의 식민주의적 권력과 언어의 종족성이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모국어를 기억한 채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형성 중인 다양한 목소리 풍경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이주 노동자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이동의 풍경을 느끼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강력하게 감각되는 것은 표준 한국어와 거리를 둔 목소리의 차이이다. 이주 노동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이 프로젝트는 외국어와 모국어 사이에서 만들어진 중간 언어이자 사이-언어인 불완전한 한국어의 풍경을 제시한다.[10]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터뷰이들은 대체로 뜻은 통하지만 문법적으로 오류가 있는 한국어를 구사하는데 보통 조사를 생략하거나 시제가 맞지 않거나 표준 발음에서 조금씩 어긋나있다. 이때 한국인 관객들은 언어적 타자의 발음을 자신의 상상 속 표준어 발음 속에 채워 넣으며 이로부터 튀어나오거나 모자란 소리를 수정하고 그 과정에서 조각난 의미 체계를 스스로 완성한다. 이는 무의식중에 이루어지며 아무리 외국인 화자의 신체적 특성과 습관에 따라, 그리고 모국어의 영향에 의해 변형되어 나온 언어일지라도 ‘표준어’라고 인지되는 틀은 언제나 교정의 장치로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는 이러한 무의식적인 교정 행위를 더 선명하게 가시화하기 위해 인터뷰 영상들에 모두 두 개의 자막을 사용하고 있다. 말하는 사람의 모국어와 한국어 이렇게 두 개의 자막이 두 줄로 화면에 나타나며, 모국어로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화자의 한국어를 받아적은 자막과 그것을 다시 화자의 모국어로 번역한 자막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한국인 관객은 자신이 전혀 읽을 수 없는 외국어 자막을 마치 그림을 보듯 흘려보내며, 자신이 태어난 곳의 언어와 이주한 곳의 언어 사이에서 만들어진 분열된 한국어 소리를 한국어 글자와 비교하게 된다. 자막을 보면서 어색한 발음들이 표준어 안에 안착하거나 튕겨 나오는 과정을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막은 화자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존재의 흔적을 드러내는 장치이며, 목소리를 대리하는 자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자막을 통해 목소리를 듣는 청자는 늘 두 번째 청자일 수밖에 없으며 대리하는 자가 받아적은 문자의 흔적 속에서만 전해 듣는 이야기라는 매개성을 감각하게 된다.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에서 만나게 되는 자막의 풍경은 ‘표준어로 정확하게 교정하기’와 ‘들리는 대로 받아적기’ 사이에서 흔들리던 첫 번째 청자이자 작가의 머뭇거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분명 그 언어를 어떻게 받아적을 것인가 라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교정할 것인가, 부분 수정할 것인가, 그대로 적을 것인가, 맞춤법만 고칠 것인가 등등. 이러한 고민의 결과인 자막은 뜻밖에도 맞춤법을 적절히 수정하되 화자의 말투를 살리기 위해 완벽하게 교정하지는 않은 미완의 언어로 표기되었다. 이는 두 언어 사이에서 왕복하는 사이-언어의 불완전한 받아쓰기를 가시화하며, 임시적으로는 고정되지만 언제든 또 다른 받아쓰기에 의해 변할 수 있는 사이-언어의 속성을 강조한다.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는 이렇듯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번역과 해석의 교정 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조금 다른 차이를 찾아내고야 마는 언어의 권력이 작동하는 관객의 몸을 감각하게 하고 있다. 탈식민 이론가 월터 미뇰로는 “언어들 간의 비대칭성은 한 개인이 다른 언어보다 어느 한 언어를 더 잘 알고 있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근대 세계체제의 통시적인 내적 구조와 그것의 역사적인 외적 경계지대(식민주의적 차이) 내부에서의 권력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11]

 

미뇰로는 이어서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 하이데거를 인용하며, ‘언어는 언어 사용의 집’이라고 고쳐 쓴다. ‘존재’가 지시적 언어철학의 보호를 받는 개념이고 그것이 개인이나 자아의 개별화에 따른 사유의 결과라는 점을 드러낸다면, ‘언어 사용’은 기존의 언어철학이 지닌 식민성을 지적하며 인간 간의 상호 작용 속에 우리가 놓여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12]언어는 상호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미뇰로의 목소리는 다양한 언어의 상호작용이 잘 작동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풍경과 그것을 되비추는 예술 프로젝트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2022) 다음 해에 발표된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2023)에는 경기도 화성에 사는 고려인들의 이야기가 같은 형식의 영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차이가 있다면 고려인 인터뷰이들은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는 경기도 화성에 고려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이들이 운영하는 고려인 교회나 학교 등을 통해 자신들의 언어를 유지할 수 있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사는 곳과 한국에 거주한 기간, 이름과 나이와 같은 간단한 정보만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인터뷰의 대부분은 러시아어로 진행되고 있다. 이때 자신에게 편한 모국어로 이야기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전혀 다른 감각을 제기한다. 자신에게 편하고 친숙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더 빠르고 자세하며 번역된 한국어 자막도 더 매끄러우며, 한국인 청자를 자막의 정보에 의존해서만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타자의 위치로 이동시킨다. 

 

김양우는 그간 기계가 인간이 맺는 관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몸이 어떻게 미디어와 상호작용을 하는지에 대해 탐구해 왔다. 신체의 확장으로서 기계의 몸짓을 상상하고, 기계에 적응된 신체가 자동화된 동작을 어떻게 일상에 반영하는지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에 의해 인간은 속도감이나 거리감을 어떻게 다르게 감각하는지 김양우 작가는 작업을 통해 지속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Somewhere in the World>(2014), <통근생활>(2018-), <Process>(2021) 등을 거치며 점차 확장되는 도시의 경계에서 늘어나는 이동 거리와 초단위 아래로 쪼개지는 기계적 시간 감각, 그리고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해 이어온 그간의 작업은 오늘날 경기 남부 지역에 사는 이주 노동자의 삶을 매개로 한국의 일상에서 삭제된 차이의 흔적을 초점화한다.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2022-)에서 길을 걷거나 대중교통 수단에 실려서 흔들리는 인간의 몸과 그것을 전달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동행하는 감각을 공유하려 시도하지만, 그 속에서 불완전성을 드러내며 흔들리는 목소리의 차이와 균열은 또 하나의 미디어로서 우리의 몸에 기입된 어떤 흔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차이의 스펙트럼 속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언어를 하나의 중심성으로 고정하려는 종족성의 흔적이며, 이것을 삭제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한국어 능력으로 한국에서 더 머무를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국가의 통치 권력은 이렇듯 일상에서 국민 됨의 위치를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관객들의 몸에 자연화된 차이의 감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는 이렇듯 일상에서 어떻게든 감각하고야 마는 타자의 존재와 순전히 매끄럽게만 동행할 수 없는 현실의 위태로운 공동체를 가시화하며, 각자가 자신의 몸에 남겨진 차별의 흔적을 발견하는 연습의 장소로서 작동한다. 

▲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 김양우, 2022


[1] 전솔비,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 비평글 ‘집과 집 사이를 걷는 이야기’, 2022.

[3]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2022) 디팍 반자라의 인터뷰.

[4] 김양우,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2022) 소개글.

[5]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2022) 차미카라의 인터뷰.

[6] 이광식, ““TOPIK 시험은 어불성설”… ‘블루칼라’ 외국인 근로자들 호소”, 한국경제, 2023.12.26, 검색날짜: 2025.5.10.

[7] 홀은 저명한 미디어 문화 연구자로서 영국의 계급, 국가 이데올로기, 미디어의 문제에 관한 수많은 연구를 남겼는데 특히 본인의 흑인이자 자메이카 출신 영국 유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으며 말년에는 인종과 재현의 문제에 깊이 천착했다. 무엇보다 흑인예술가들의 새로운 시도와 재현 방식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지지하며 예술가들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던 이력은 학계와 예술계와 사회운동 사이의 비평적 실천의 중요한 선례로 남아있다.

[8] 스튜어트 홀, 『인종은 피부색이 아니다 : 스튜어트 홀의 인종, 종족성, 민족 이론 강의』임영호 옮김, (서울: 컬처룩, 2024), 96. 

[9] 스튜어트 홀, 『인종은 피부색이 아니다 : 스튜어트 홀의 인종, 종족성, 민족 이론 강의』임영호 옮김, (서울: 컬처룩, 2024), 121.

[10] 이를 시각화한 것이 조혜진 작가의 <이주하는 서체> 작업이다. 그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어를 배우는 이주민들의 손글씨를 수집해 한글 서체를 만들고 이를 웹상에서 누구나 다운로드할 수 있게 했다. 받아쓰기의 기준이 되는 기존의 서체에서 벗어나 이주민 개인의 신체가 반영된 한글의 형태를 사유할 수 있게 한 작업이다.

[11] 월터 D. 미뇰로,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 : 식민주의성, 서발턴 지식 그리고 경계 사유』이성훈 옮김, (서울: 에코리브르, 2013), 381. 

[12] 월터 D. 미뇰로,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 : 식민주의성, 서발턴 지식 그리고 경계 사유』이성훈 옮김, (서울: 에코리브르, 2013),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