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벤저민 그레이엄의 경제사상과 건전 화폐로서의 상품준비통화(2/2)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계속)

 

4. 경제 안정의 효과들

 

더 깊은 이해를 돕기 위해 또 다른 CRC 주창자들의 논의를 이어서 소개한다. 이들에게서도 유형성과 건전 화폐가 CRC의 통화적 본질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CRC의 대표적 논자 중 2, 하이에크와 프랭크의 논의를 살펴보자. 우선, 하이에크는 1930년대 벤저민의 아이디어를 수용해 CRC를 제안했다. 또한, 완충재고 구축과 정부의 원자재 가격 관리를 제안한 케인스와도 CRC의 효과에 대해 논쟁했다. 이 논쟁에는 벤저민도 참여했다. CRC 주창자들과 케인스 사이의 논쟁은 금융통화 개혁에 관한 케인스의 아이디어와 상품준비통화론자들 사이의 차이점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와 관련해 벤저민이 케인스의 비판에 어떻게 답했는지, 벤저민의 옹호자였던 프랭크가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논쟁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도 살펴본다. 이는 CRC 계획이 목표한 경제안정의 효과가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이에크와 케인스

 

 

1) 금본위제의 취지를 지킬 것인가?

 

실제로 1943<The Economic Journal> 6~9월호에서 CRC를 둘러싸고 하이에크와 케인스 사이에 찬반 논쟁이 오갔다. 하이에크는 “A Commodity Reserve Currency”라는 글을 발표했다. 거기서 하이에크는 금본위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취지와 기능이 지닌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금을 상품 바스켓으로 대체하고 통화를 발행해 금본위제의 취지와 기능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행하자는 그레이엄의 제안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제도 설계안까지 간략히 제시한다(Hayek, 1943). 여기에 담긴 문제의식은 벤저민의 것과 동일하다. 벤저민의 주장을 하이에크가 더 엄밀한 경제학 용어와 논리로 체계화했을 뿐이다.

 

그 글에 이어서 케인스가 하이에크의 주장을 비판하는 “The Objective of International Price Stability”라는 글을 실었다. 케인스는 CRC가 금본위제와 마찬가지 한계를 지닌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경제는 생산성 향상보다 임금 상승률이 자연적으로 더 높은 경향을 띠기에, 완전고용을 유지하려면 물가가 꾸준히 상승해야 한다. 화폐 발행을 제약해 물가 상승을 억제하면, 실업을 조장하게 된다. 더욱이 국내 경제정책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해 고용 문제와 불황에 대응할 수 없게 된다(Kaynes, 1943). 이런 이유로 케인스는 금본위제와 같은 국제통화표준을 새롭게 설립하자는 하이에크의 제안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금본위제는 취지 그 자체에서부터 한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CRC 또한 국내경제를 희생시킨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이에크와 프랭크 등 CRC의 주창자들(Hayek, 1943; F. Graham, 1943; 1944a; 1944b)은 왜 금본위제의 취지를 따르고자 했을까? 하이에크가 속한 오스트리아학파의 경기변동론에서 그 답을 살펴보자(Hayek, 1943; 1996; Mises, [1936] 1996; [1949] 1998). 학자마다 세부 사항에선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 수준에서 합의된 바를 참고해보자. 오스트리아학파는 현대 경제에서 기초상품들의 가격 변동이 심해지는 이유를 현 은행·금융 시스템에서 찾는다. 핵심은 신용창조(credit creation). 대표적인 예가 상업은행이 발행하는 신용 수단이다.

 

신용 수단은 상품, 특히 금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통화다. 신용 수단으로 통화를 팽창하게 되면, 화폐 가치가 낮아져 화폐의 구매력과 상품 가격이 하락한다. 이러한 가격 변동은 실제 상품의 수요-공급 변화와 무관하기에 그 자체로 경제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 경기변동과 관련해, 신용창조를 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이자율이 변화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반대로 통화정책과 금융기관 간 연계가 제도화된 상황에서는 이자율을 조정해서 통화 발행량을 조절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에서든 오스트리아학파는 이자율 변화에 따른 경제 행위자들의 기대 조정에 주목한다. 오스트리아학파에 따르면, 이자율은 경제 행위자들의 시간 선호, 즉 경제에 대한 전망을 반영한다. 반대로 이자율에 따라 경제 행위자들의 전망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경제 행위자들이 장래 경기가 좋아질 거라 판단하면, 이자율이 하락한다. 또는 통화 팽창에 따라 이자율이 하락하면, 경제 행위자들이 이를 받아들여 장래에 경기가 좋아지리라 전망하게 된다. 그러면 앞으로 경제 상황은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

관리통화제도가 시행되는 상황에서 경기를 진작시키고자 인위적으로 이자율을 하락시키고 신용팽창을 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경제 행위자들이 이자율이 변화하기 전이라면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사업에 투자하는 일이 늘어난다. 장래 벌어들일 수익을 전보다 높게 평가함과 동시에 이자 비용도 낮아지기에 차입을 늘려서라도 투자를 확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실제 저축이 증대하거나 실물 경제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확대한 투자에서 충분한 수익을 회수하기 어렵게 된다. 투자 비용 회수와 대출금 상환이 어렵게 되고, 대출을 통해 공급된 화폐의 가치가 불안정해진다. 이미 화폐가 늘어나면서 화폐 가치 자체도 하락해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뱅크런이나 금융위기, 과잉생산으로 인한 침체 등이 발생해 경제가 급격히 침체하게 된다.

 

이렇듯 신용창조에 기반한 경제에서는 급격한 호황(boom)과 불황(bust)가 반복된다. 이러한 경제적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선, 신용 기반(fiduciary basis) 통화로 경제시스템을 구성 및 운영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실물에 근거를 둔 물리적 화폐, 즉 건전 화폐를 확립해, 인위적 통화 조절을 방지하고 실물 경제의 여건과 그 변화에 맞게 자동으로 통화량을 조절하도록 해 경제 안정성을 높이고자 했다.

 

하지만 하이에크는 벤저민과 마찬가지로, 금본위제는 역사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가격 안정을 실현하는 데 기능상 한계를 안고 있다고 본다(Hayek, [1932] 1999, 153-168; [1937] 1999, pp. 169-185; 1943; Graham, 1944a, p. 97; 1947). 그건 금이라는 상품이 지닌 독특성 때문이었다. 금은 보편적으로 누구나 원하는 상품으로 가치 척도로 적합하나, 산업적 유용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런데 금본위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고 신용 수단이 지배적인 화폐가 되자, 금은 신용 수단의 가치가 위협받을 때 축적의 대용물이 되었다. 가치를 보관하는 용도 외에 다른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지 못했다. 더욱이 경제가 침체에 빠질 때 금을 사들여 위기를 피하려는 사람들만 늘어서 경제 회복이 더뎠다. 물론 불황기에 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서 금광업자들이 이득을 봤지만, 그 효과는 경제 전체로 파급되지 못했다. 또한, 불황기를 거치며 한번 늘어난 금 재고량은 다시 줄어들지 않는다. 축적된 금은 신용을 확대하는 기반이 되어 경기 호황에 기여한다. 결국, 금본위제가 가격 안정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역으로 가격 불안정을 가중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하이에크는 금본위제의 근간이었던 건전 화폐 원칙이 유효하며, 이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평가는 프랭크 또한 공유하고 있었고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논쟁을 평가하며 하이에크의 취지는 금본위제의 쇄신에 있다고 강조한다(F. Graham, 1943). 요컨대, 하이에크와 프랭크는 금 대신 산업 전반에서 필수적인 원자재, 즉 기초상품으로 구성된 상품 바스켓으로 뒷받침할 것을 제안했다. 그럼으로써 금본위제의 결함을 개선하여, 가격 변동을 최소화하고 생산을 신속히 회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Hayek, 1943; F. Graham, 1943; 1944a).

 

그러나 케인스는 금본위제가 지향한 하드 머니, 은행 원칙은 경제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요인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Kaynes, 1943; Graham, 1944a, p. 173). 실업 문제에 대응할 정부의 정책 자율성을 제약한다고 봤다. 태환 화폐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상품량에 화폐량을 연동하는데, 그렇게 되면 상품량이 비약적으로 늘지 않는 이상 화폐량은 일정 수준 내에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그만큼 화폐가 늘어줘야 하며, 특히 노동자들의 형편을 보장하기 위해선 임금 또한 일정하게 높아져야 한다. 그러려면, 화폐 가치는 장기적으로 하락하고 화폐량이 늘어야 한다. 만약 화폐량 자체와 그 변동의 정도를 제한하게 되면, 성장과 분배를 저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효율성 임금(efficiency-wages)이 상승하는 경향이 있기에, 장기적으로는 전반적인 물가 수준이 높아질 것인데, 이를 억제하려고 하면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 압력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전환 가능성을 고수하려고 하면, 이런 정치적 갈등을 해소할 정책적 수단을 잃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케인즈는 효율성 임금 경향 탓에 CRC가 목표로 하는 물가 수준의 장기적 안정은 실현 불가능하며,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일으킬 것이라고 보았다.

 

 

 

 

2) 경제 안정의 머릿돌, 건전 화폐

 

CRC 주창자들과 케인스 간의 대립은 경제 안정의 효과에 관한 시간 지평이 어떠한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달리 말해, 장기적으로 물가가 안정되는 것에 관해 서로 다른 판단을 내렸다. 이러한 판단 차이는 화폐에 관한 서로 배치되는 관점에 토대한다. 이를 좀 더 살펴보자.

 

케인스와 하이에크 사이의 논쟁이 벌어진 뒤 1년 뒤인 1944, 벤저민은 국제통화체제 개혁안을 담은 <World Commodities and World Currency>라는 저서를 출판한다(Graham, 1944a, pp. 151-75). 본문에서 CRC의 국제 버전이 지닌 문제의식, 목표, 구체적 설계와 시행방안 등을 다룬 후, 벤저민은 그 책의 <부록 4>에서 CRC에 관한 비판을 소개하고 그에 재반론한다. 여기서 벤저민은 여러 비판 중 대표적인 글 두 편을 소개한다. 하나는 194212<Journal of Economics>에 게재된 W. T. M. Beale, M. T. JR. Kennedy, W. J. Winn이 쓴 “Commodity Reserve Currency: a Critique”라는 글이고(Beale, Kennedy and Winn, 1942), 다른 하나는 앞 절에서 다룬 1943<The Economic Journal> 6~9월호에 실린 케인스의 글이다(Kaynes, 1943). 전자의 논문에 대해서 벤저민은 CRC 제도를 포괄적으로 소개하면서 주요 논점들을 제기하고 있기에 자신의 제안을 이해시키기 위해 반론할 필요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후자의 논문에 대해서는 케인스가 물가 수준의 안정이라는 목표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가격 안정이 갖는 중요성과 그 효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CRC에 대한 그의 비판에 답변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벤저민은 <부록 4-D>에 실린 “The Objective of Long-term Price Stability”라는 글에서 케인스의 비판을 논평하고 나름대로 답변한다(Graham, 1944a, pp. 173-175).

 

벤저민은 케인스의 비판에 대해 뭐라고 답했을까? 케인스는 장기적으로 물가 수준을 안정화하는 과제는 금본위제나 상품 표 기준, CRC 등과 같은 유형성에 기초한 통화 발행 계획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지적한다. 벤저민은 임금과 같은 정치적 분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이러한 진단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중요한 건 명목 임금이 아니라, 실질 임금이라고 강조한다.

 

벤저민에 따르면, 안정적인 물가 수준이라는 틀 내에서 명목 임금이 지속해서 상승하는 건 세 가지 원인, 즉 단위 시간당 생산량 증가, 상품 단위당 생산 비용 감소, 장기 이자율 하락에 따른 이윤 폭(profit margin)의 감소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제약(liberal limits)을 벗어나서 다른 방식으로 명목 임금을 상승시키려고 한다면, 경제 전반의 물가가 불안정해져 급격히 높아질 수 있다. 그럴 경우, 명목 임금을 인상하더라도 결과적으론 실질 임금이 낮아지게 된다. 이를 가리켜, 벤저민은 자멸적인(self-defeating)’ 결과라고 불렀다(Graham, 1944a). 상쇄된 임금 인상 효과를 다시 내려면 또 임금을 인상해야 하고 다시 물가가 급격히 상승하는 악순환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멸적이라는 표현에는 안정과 분배는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안정이 복지를 뒷받침하는 전제이자 조건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경제가 안정되지 않는다면, 신용창조를 통해 단기적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무용지물이 되거나 오히려 물가 상승으로 노동자들의 화폐 구매력이 떨어지는 부정적 결과를 낳게 될 수 있다. 화폐적 측면에서 달리 표현하면, 화폐 구매력(purchasing power of money) 안정이 관건이다.

 

물론 CRC만으로 언제나 시장 가격을 완벽히 안정시킬 순 없다. 예컨대, 호황 국면에서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로 자산 가격이 상승하는 문제가 있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선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통한 유동성 관리, 금융시장 관리·감독 등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벤저민에 따르면, 기초 원자재가 산업 전반에 널리 쓰이고 경제 활동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기초 원자재 가격의 안정화는 중간재나 완성재의 물가 수준까지 간접적으로 포괄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다.

 

또한, 금이나 신용 수단과 달리 직접적으로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고, 재고로 쌓아두었기에 긴급 상황에 대처할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기초 원자재 가격이 안정되면 생산과 소비도 균형 있게 지속될 수 있어, 기초 원자재에 종사하는 생산업자와 거기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이윤과 임금 소득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을 생산해 수출하는 국가들의 부 또한 증진될 것이고 금본위제보다 전환 가능성이 크기에 환율을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서 국제수지 불균형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여기서도 벤저민은 관세와 같은 무역정책이나 외환 개입과 같은 조치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덧붙인다(Graham, 1943; 1944a; 1944b[1999]).

 

그러나 건전 화폐에 기초한 국내·국제 통화체제가 없이 다른 조치들만으로는 경제안정을 달성할 수 없다. 신용창조가 지배적인 통화체제에서는 결국에 물가가 불안정해져 다른 조치들이 목표한 효과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유하자면, 건전 화폐야말로 다른 경제정책들의 바탕을 이루는 안정성의 머릿돌(keystone)2)이라 할 수 있다.

 

 

3) 통화적 특권(monetary privileges)에 맞서기

 

마지막으로 프랭크가 벤저민과 마찬가지로 CRC에 대한 W. T. M. Beale, M. T. JR. Kennedy, W. J. Winn의 비판(Beale, Kennedy and Winn, 1942)에 반론하고(F. Graham, 1943),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논쟁(Hayek, 1943; Keynes, 1943)에 논평(F. Graham, 1944a)한 글들을 통해 CRC의 주요 논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 프랭크의 입장은 벤저민보다 엄격하고 강경하다. 그래서 CRC의 문제의식이 더 명확히 드러난다.

 

우선, 프랭크는 케인스가 제기한 생산 단위 당 화폐 임금의 자연적(natural)’ 인상 경향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그러한 경향은 주어진 시간과 장소,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랭크는 화폐 임금은 경제적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이며, 주어진 조건에서 어떻게 대처할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프랭크에 따르면, 이러한 문제가 존재한다는 걸 밝힌다고 해서, CRC가 좋은 통화 기준(good monetary standard)이라는 게 이론적으로 부정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임금이 정치적 문제라면, 경제적 타당성과는 별개로 어떤 사회세력, 집단 또는 국가가 이를 수용할 것인가를 되물어야 한다(F. Graham, 1944a, pp. 422-423).

 

프랭크는 노동자가 가능한 높은 실질 임금을 보장받는 것에는 크게 동감하지만, 임금 인상의 정도를 제한하지 않는 통화 정책을 펼치게 되면 안정적인 물가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무제한적인 인플레이션의 위험이 상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조건에서도 실업은 완전히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위험을 무릅쓸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자산과의 연결을 끊은 순수한 부채 통화를 자유롭게 발행하는 통화체제는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다. 순수한 신용화폐를 기초로 하는 통화체제에서는 누가 화폐 발행 권력을 갖는가에 따라 분배를 좌우할 수 있고, 특정 집단의 부를 보장하려고 의도적으로 다른 집단의 부를 빼앗아 나눠주거나 의도치 않게 경제 전체 물가 수준이 높아져 다른 집단들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이렇게 화폐 시스템을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은 곧 전체주의적 권력(totalitarian power)’이다. 프랭크는 특정 집단이 사회 구성원들의 동의 없이 다른 집단의 생명과 재산을 좌우하는 사태를 가리켜, ‘전체주의적이라고 규정한다(F. Graham, 1944a, pp. 425-427).

 

이런 전체주의적 경제시스템에서는 자유로운 통화 발행에 따른 부정적 효과를 제거하기 위해, 개별 가격 상품 가격 자체를 억제하는 조치를 시행하기도 한다. 이렇게 상품 가격의 변동성을 경직시키는 건 분명히 경제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랭크는 이기적인 집단의 특권(the privileges of any selfish bloc)’을 거부하는 게 경제 과정을 더 낫게 한다고 본다(F. Graham, 1943, pp. 71-72). 그렇기에 분배 측면에서 중립적인 화폐를 가지고서 자동적인 가격 조정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파괴적 결과를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벤저민처럼 CRC가 도입되어서 물가가 안정되면, 장기적으로 화폐 임금과 효율성의 관계가 안정되어 인플레이션의 위협 없이 실질 임금과 화폐 구매력이 보장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F. Graham, 1944a, pp. 426-429). 그리고 벤저민과는 달리, 그리고 더 급진적으로 국내적으로 경제의 총 신용이나 은행의 요구불예금을 통제하는 100% 준비금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F. Graham 1936a; 1936b; 1941a).

 

 

5. 나가며

 

정리하자면, CRC의 독특성은 그 통화적 본질에 있다. 상품준비통화론은 경제안정을 중요한 경제윤리로 보았다. 벤저민은 경제가 안정되려면, 유형의 실물에 기반한 화폐 발행 메커니즘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신용화폐에는 없는 중요하고도 바람직한 특성이 CRC에 있다고 봤다(Graham, 1941[1999]). 그건 건전 화폐라는 원칙이었다. CRC를 주창한 이들은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화폐 창조 자체를 제약하길 원했다. 그게 경제 불안정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드 머니와 은행 원칙을 지향하고 신용화폐를 거부했다. 즉 통화 발행을 제한함으로써 물가를 관리하자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CRC 계획은 금본위제의 취지를 따르되 금을 상품 바스켓으로 대체해 금본위제가 지향했던 경제안정이라는 목표를 제대로 실현하고자 했던, 이른바 건전 화폐 원칙을 재확립하려는 경제적, 정치적 기획이었다.

 

 

(끝)

 

 

 

각주

2) 여기서 언급하는 머릿돌은 아치형의 건축물의 최상단에 놓이는 돌을 가리킨다. 돌을 쌓아 아치형의 문이나 다리를 만든다고 할 때, 머릿돌은 돌을 쌓아가는 순서에서 맨 마지막에 놓인다. 그러나 가장 늦게 건축물의 한 요소가 된 머릿돌이야말로 아치형 구조를 떠받치는 핵심이다. 여러 개의 돌을 양옆에서 쌓아가다 최종적으로 양쪽의 돌들을 별도의 기둥 없이 공중에 떠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게 바로 머릿돌이다. 물론 머릿돌도 양쪽의 돌 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여기서는 경제 안정성, 즉 안정된 경제시스템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결정적 요소라는 의미에서 CRC의 통화적 본질인 건전 화폐를 머릿돌에 비유했다.

 

 

 

 

참고문헌

Beale Jr, W. T. M., Kennedy, M. T., and W. J. Winn., “Commodity reserve currency: a critique,”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Vol. 50, No. 4, 1942, pp. 579-594.

Graham, B., “Stabilized reflation,” The Economic Forum, Vol. 1, No. 2, 1933, pp. 186-193.

Graham, B, Storage and Stability, McGraw-Hill, 1937.

Graham, B, “Summarization of The Multiple Commodity Reserve Plan,” in J. Lowe(ed.), The Rediscovered Benjamin Graham, John Wiley & Sons, Inc, [1941] 1999, pp. 239245.

Graham, B, “The Critique of Commodity-Reserve Currency: A Point-by-Point Reply,”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Vol. 51, No. 1, 1943, pp. 66-69.

Graham, B, World Commodities and World Currency, McGraw-Hill, 1944a.

Graham, B, “Proposals for an International Commodity-Reserve Currency,” in J. Lowe(ed.), The Rediscovered Benjamin Graham, John Wiley & Sons, Inc, [1944b] 1999, pp. 233238.

Graham, B, “Money as pure commodity,” The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37, No. 2, 1947, pp. 304-307.

Graham, B, The Intelligent Investor, Revised Edition, Harper & Row, [1973] 2003.

Graham, B., and D. Dodd, Security Analysis, Sixth Edition, McGraw-Hill, [1934] 2008.

Graham, B., and S. Chatman, The Memoirs of the Dean of Wall Street, McCraw-Hill, 1996.

Graham, F. D., “Review of 100% Money, by Irving Fisher,”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Vol. 44, No, 1, 1936a, pp. 133134.

Graham, F. D., “Partial Reserve Money and the 100 Per Cent Proposal,”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26, No. 3, 1936b, pp. 428440.

Graham, F. D., “100 Per Cent Reserves: Comment,”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31, No. 2, 1941a, pp. 338340.

Graham, F. D., “Transition to a commodity reserve currency,” The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31, No. 3, 1941b, pp. 520-525.

Graham, F. D., “Commodity-Reserve Currency: A Criticism of the Critique,”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Vol. 51, No. 1, 1943, pp. 70-75.

Graham, F. D., “Keynes vs. Hayek on a commodity reserve currency,” The economic Journal, Vol. 54, No. 215/216, 1944a, pp. 422-429.

Graham, F. D., Social Goals and Economic Institution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44b.

Hayek, F. A. V., “The Fate of the Gold Standard,” in S. Kresge(ed.), Good Money, Part I: The New World Vol. 5, Routledge, [1932] 1999, pp. 153-168.

Hayek, F. A. V., “On Neutral Money,” in S. Kresge(ed.), Good Money, Part I: The New World Vol. 5, Routledge, [1933] 1999, pp. 228-231.

Hayek, F. A. V., “The Gold Problem,” in S. Kresge(ed.), Good Money, Part I: The New World Vol. 5, Routledge, [1937] 1999, pp. 169-185.

Hayek, F. A. V., 1943. “A commodity reserve currency,” The Economic Journal, Vol. 53, No. 210/211, pp. 176-184.

Keynes, J. M., “Commodity Policy,” in D. Moggridge(ed.), Activities 194046, Shaping the Post-War World: Employment and Commodities, Collected Writings of John Maynard Keynes, Vol. XXVII, Macmillan 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42] 2012, pp. 105-199.

Keynes, J. M., “The objective of international price stability,” The Economic Journal Vol. 53, No. 210-211, 1943, pp. 185-187.

Mehrling, P., The monetary economics of Benjamin Graham: a bridge between goods and money?. Journal of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Vol. 33, No. 3, 2011, pp. 285-305.

Mises, L., ““The Austrian” Theory of the Trade Cycle,” in R. M. Ebeling(ed.), The Austrian Theory of the Trade Cycle and Other Essays, Ludwig Von Mises Institute, [1936] 1996, pp. 23-32.

Mises, L., Human Action: a treatise on economics, Ludwig Von Mises Institute, [1949] 1998.

Woods, J. E., “Benjamin Graham on Buffer Stocks,” Journal of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Vol. 44, No. 4, 2021, pp. 579-599.p

댓글 로드 중…

최근에 게시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