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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그레이엄의 경제사상과 건전 화폐로서의 상품준비통화(1/2)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1. 들어가며

 

2022년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심화하면서 미 연준의 통화 정책이 달러 강세 기조로 전환되었다. 그로 인해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 특히 채무가 과다하고 빈곤한 국가들에서 외환 위기와 식량 위기의 위험이 커졌다. 이처럼 미국의 달러 가치 변동이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을 키우자, 기축통화에 대한 비판이 다시금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국제통화체제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점차 확산하는 것과 달리, 현재 국제통화체제의 문제점과 그 대안에 관해선 의견이 갈린다.

 

그동안 논의되었던 국제통화체제 개혁의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기축통화의 변경이다. 미국 달러가 아닌 다른 통화로 대체하는 것이다. 둘째, 국제청산연맹(International Clearing Union, ICU)과 방코르(bancor)라 불리는 국제통화의 도입이다. 이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제안한 방안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협상에서 영국 측에서 제안하기도 했다. 셋째, 상품준비통화(Commodity Reserve Currency, 이하 CRC). 이 방안의 대표적 논자는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 이하 벤저민)이다. 대공황 이후 국내 준비금 제도 개혁을 위해 제출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국제통화제도 개혁 방안으로 확장되었다.

 

통화전쟁(Currency War)이라 불리며 EU의 유로화나 중국의 위안화를 새로운 기축통화가 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첫째 방향과 달리, 나머지 두 방향에선 어느 한 국가의 통화를 기축통화로 삼는 걸 거부한다. 이들은 달러가 기축통화라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특정 국가의 화폐를 준비 통화로 삼는 것 자체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 글은 국제통화체제 개혁안 중 하나인 (그리고 국내통화체제 개혁안이기도 한) CRC를 소개한다. 그동안 기축통화 변경이나 케인스의 ICU에 관한 논의는 한국에서 여러 저술을 통해 다뤄진 데 반해, CRC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국내통화제도 개혁과 관련해서도 100% 준비금과 같은 논의에 비해, CRC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그나마 2023년에 벤저민이 자신의 국내 통화 개혁안을 국제적 차원으로 확장한 저술인 <World Commodity and World Currency>가 한국에 <세계 상품과 세계 통화>(김인정 옮김, 페이지2북스)라는 제목으로 번역 및 소개되었다. 한국에서 벤저민은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된다. 월스트리트의 대부 중 한 명이자 주식 투자하는 방법을 배우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의 저자로 유명하다. 이 글에서는 투자가로서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던, 현대 자본주의 금융통화제도 개혁가로서의 벤저민의 면모를 조명한다.

 

아래에서는 화폐와 관련한 벤저민의 경제사상을 검토하고, 그가 제안한 CRC 계획(국내, 국제 버전 모두)건전 화폐(sound money)’를 정립하기 위한 기획임을 밝힌다. 우선, 벤저민이 CRC 계획을 구상하게 된 현실적 동기와 이론적 기반을 1930~50년대에 벌어진, 즉 전간기와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 종전 이후까지 진행된 CRC 논쟁 속에서 살펴본다. 다음으로 벤저민의 경제사상, 특히 화폐와 투자에 관한 생각에 비춰 CRC 계획의 내용과 그 의미를 검토한다. 이를 통해 CRC 계획의 핵심에 건전 화폐 원칙과 그를 통한 경제안정 도모라는 목표가 있음을 확인한다.

 

 

 

. CRC 논쟁의 무대

 

CRC 논쟁은 화폐의 역사와 화폐에 관한 이론에 기반한다. 금본위제와 신용화폐에 기초한 통화체제 간의 대립과 이행이라는 쟁점이 자리하고 있다. 벤저민이 월스트리트에서 활동했던 1910~50년대는 대공황,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금본위제의 붕괴와 브레튼우즈 체제의 성립으로 대표되는 격동기였다. 그는 당시 만연했던 불황과 빈곤,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통화체제 개혁을 꼽았다. ‘가치투자를 정립한 월스트리트의 저명한 현업 투자자였던 벤저민은 정식 교육을 받은 경제학자는 아니었지만, 오랜 주식·채권 시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금융통화제도 개혁안, CRC 계획의 국내 버전을 입안하여 학계에 제안했고, 이에 학계가 응답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되었다. 벤저민은 1932년 뉴욕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던 경제 포럼(The Economic Forum)에서 자신의 계획을 발표하고 1933년 그 모임에서 출판하는 잡지 제2호에 “Stabilized Reflation”이라는 원고(Graham, 1933)를 실었다. 1937년에는 CRC의 국내 버전을 구체화하여 <Storage and Stability>라는 저서를 발표했다(Graham, 1937). 이를 계기로 워싱턴 관료의 추천을 받아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과 면담해 정책을 제안했고, 경제학자들로부터 대중 홍보 캠페인을 펼칠 걸 권유받기도 했다.

 

이후 국제 버전의 CRC 계획으로 논의가 확장되었는데, 그러면서 CRC 계획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CRC 반대자 중 가장 대표적 인물이 바로 케인스다. 벤저민은 <The American Economic Review>CRC에 대한 비판에 답하는 기고문을 실었다(Graham, 1943). 이어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 Hayek)는 벤저민의 제안에 동의를 표하고, CRC를 금본위제의 약점을 극복하고 강점을 온전히 실현하는 방안으로 평가했다(Hayek, 1943). 하지만 케인즈는 CRC에 기초한 국제통화 개혁안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Keynes, 1943). 이에 또 다른 CRC 주창자였던 프랭크 그레이엄(Frank D. Graham, 이하 프랭크)1)은 하이에크와 케인스의 논쟁에 개입하며 CRC 계획을 지지하였다(F. Graham, 1943). 그 뒤 프랭크는 자신의 저서 <Social Goals and Economic Institutions>에서도 CRC 계획을 더 구체적으로 제안했으며(F. Graham, 1949), CRC를 주제로 하는 일련의 토론회를 여러 차례 열기도 했다(Graham and Chatman, 1996, pp. 293-308). 이렇듯 1940년대 말,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통화질서의 재구축에 관한 논쟁이 국제 버전의 CRC 계획을 무대로 삼아 활발히 펼쳐졌다.

 

하이에크와 프랭크는 현대 은행의 신용창조 메커니즘과 경기변동에 관한 경제학적 논의 속에서 벤저민과 유사한 문제의식을 풀어냈다. 그들은 경제 불안정이 신용창조에 의한 화폐 발행 때문에 생겨난다고 보았다(F. Graham, 1941b; 1943; 1944a; Hayek, 1943; 1996). 현대 경제에서 기초상품들의 가격 변동이 심해지는 이유는 현 은행·금융 시스템에서의 신용창조로 상품, 특히 금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통화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통화 팽창에 따른 경제 불안정을 해소하려면, 완충재고를 마련하고 저장소를 운영하며 재고 변동에 따라 통화량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실물에 근거한 통화를 발행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요컨대, CRC를 시행하면 인위적 통화 조절을 방지하고, 실물 경제의 여건과 그 변화에 맞게 자동으로 통화량을 조절할 수 있어서 경제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벤저민, 프랭크와 하이에크를 비롯한 CRC의 주창자들은 CRC의 독특성이 통화적 본질(monetary nature)에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균형 잡힌 경제 과정이 곧 안정된 경제를 뜻한다고 정의했고, 경제를 안정시키려면 유형의 실물에 기반한 화폐 발행 메커니즘이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신용화폐에 기반한 통화체제는 자의적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 그들에겐 이게 경제 불안정의 근원이었다. 그러므로 상품준비통화론자들은 금본위제의 취지를 따르되 금을 상품 바스켓으로 대체해 안정과 성장의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벤저민의 CRC 계획은 다양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일차적 목표는 원자재를 비롯한 기초상품(basic commodity)의 가격 안정화였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영국이나 미국 등에서 전쟁 물자를 조달하고 상품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완충재고(buffer stock)와 저장소를 실제로 운영하기도 했다. 이런 현실 경험을 근거로 벤저민은 자신의 CRC 계획에 완충재고나 상품 기준 가격표(tabular standard) 포함시켰다. 그러나 벤저민의 제안에는 더 심층적인 고민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화폐문제다.

 

벤저민은 금본위제의 역사, 상품과 화폐의 관계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의를 통해 CRC의 통화적 본질을 구상했다. 벤저민(Graham, 1947)에 따르면, 화폐가 상품, 즉 실물로 뒷받침되지 않게 되면서 화폐 가치가 불안정해졌고 전환 가능성이 훼손되었다. 달리 말해, 금본위제의 규칙과 이를 운영하던 국가의 능력이 약해진 것이다. 그러자 신용 수단이 화폐로서 가치를 잃으면 금 가격이 오르고, 신용 수단이 화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면 금 가격이 내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신용 수단의 전환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과 국가들이 늘어나면서 금을 축장(hoarding)하려는 성향이 강해졌다. 금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심해져 국가 간 갈등이 커졌다. 경제 규모가 큰 국가일수록 금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었기에 국가 간 금 비축량의 불균형이 심화했고, 이는 다시 국가 간 경제력 격차로 이어졌다. 또한, 더 생산적인 데 쓰일 수 있는 경제적 잉여가 낭비되었다.

따라서 벤저민은 상품과 화폐 사이에 다리를 놓아 그 둘을 연결하는 일이 국내외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런 이유에서 단순히 완충재고 확보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 완충재고를 화폐 발행의 준거로 삼는 방식으로 제도를 설계했다. 그래서 벤저민은 CRC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Beale, Kennedy and Winn, 1942)에 답하면서, CRC의 주요 이점 중 하나로 건전 화폐(sound money)라는 점을 꼽았다(Graham, 1943).

 

이렇듯 벤저민과 그의 지적 동료들이 제기한 CRC 계획의 독특성은 경기변동을 완화하기 위해 완충재고와 화폐 발행을 연결해 자의적 화폐 발행을 제한하고 화폐량이 경기변동에 역행하는 형태로 자동조절되도록 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괴리된 실물과 화폐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여 장기적으로 경제적 안정을 실현하고자 했다.

 

 

3. 현명한 투자와 건전 화폐

 

벤저민이 제시한 CRC 계획의 독특성은 그의 경제사상, 특히 어떤 경제가 바람직한가라는 논의에서 토대를 둔다. 벤저민의 경제 윤리관은 가치투자(value investment)라는 개념을 정립한 그의 투자론에서 잘 드러난다. 아래에서는 가치투자론을 살펴보고 벤저민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경제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이어서 그러한 경제를 구성하는 화폐, 즉 벤저민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화폐에 관한 상()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1) 현명한 투자의 조건 : 유형성(有形性, tangibility)

 

벤저민이 도드(David L. Dodd)와 함께 쓴 <Security Analysis>의 중심 주제는 투기의 악(the evil of speculation)이다(Mehrling, 2011). 벤저민과 도드는 투자(investment)’투기(speculation)’를 구분해 바람직한(proper) 투자를 확립하려 했다. 그들에 따르면, 당시에 금융시장에서는 흔히 성공한 투기는 투자가 되고 실패한 투기는 투기가 된다라고 말했다고 하며, 이런 논리는 지금도 통용된다. 그러나 그레이엄과 도드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투자와 투기를 명확히 구분하고자 했다. 그건 1928~1929년 발생한 증시 거품과 뒤이은 대공황이라는 재앙을 경험했기 때문이다(Graham and Dodd, 2008, pp. 100-101).

 

대공황 이후 모든 주식이 원래 투기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벤저민은 지나치게 투기 개념이 넓게 써서 투자를 위축시킬 것을 우려했다. 반대로 벤저민은 투자를 지나치게 느슨하게 이해하여 생기는 위험 또한 피하고자 했다. 주식 시장에서 정확한 수익과 손해를 계산하지 않은 채 무모하게 투자하거나 구체적 사실에 근거해 판단하지 않고 시세나 인기 종목을 추종해서 매수하는 등의 투자 행위 전반을 투자로 이해하게 되면, 시장의 안전성이 저해되고 거품을 키울 수 있었다. 물론 투기는 불법도, 부도덕한 행위도 아니며, 주식에는 손실 가능성과 이익 가능성이 항시 공존한다. 그런 점에서 주식에 내재하는 투기 요소를 피하긴 어렵다(Graham 2003, 20-21). 그렇지만 손실과 이익을 제대로 판단하고 안전하게 적절한 수준의 이익을 내는 투자 행위(investment operation)가 보편화될 필요가 있다. 투기와 투자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게 거품이 터져 공황이 발생하고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는 걸 예방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벤저민에게 투자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standards)은 바로 안전(safety)이다. 벤저민은 투자와 투기의 일반적인 구분법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눠서 차례로 검토한다. 그중 안전과 위험(risk)의 구분이 본질적인데, 그건 나머지 구분들이 안전이라는 기준을 전제하지 않고는 부정확한 설명에 머무르고 말기 때문이다. 차례로 기존 구분법의 한계를 살펴보자.

 

첫째 기준에선 채권을 투자, 주식을 투기라 부른다. 투자 대상의 본질적 속성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원금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 채권 투자가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전형적인 투기다. 반대로 시세차익만을 노리더라도 자산 가치가 충분한 보통주를 사는 투자 행위는 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둘째와 셋째 기준은 투자 방법과 의도로 구분하는 것이다. 둘째 기준에선 현금으로 매수하는 건 투자이고 대출받아 신용 매수하면 투기라고 본다. 하지만 엄격한 금융 논리를 따르면, 돈을 빌리면 갚아야 할 채무가 있기에 안전한 대상에 투자하는 게 적합하다. 또한 정부가 채권을 발행해 공공사업을 하는 것을 가리켜 투기라고 하진 않는다. 결국, 빌려서 매입하는 투자 행위 그 자체를 투기로 볼 순 없다. 더욱이 셋째 구분인 장기 투자와 단기 매매도 부정확하다. 1년 이상을 장기로 보는 건 편의적인 기준일 뿐이며, 실제로 손실을 메우기 위해 장기 투자하는 일이 빈번하며 단기 투자도 널리 행해지고 있다. 넷째 기준인 이자 배당은 투자고 시세차익은 투기라는 견해는 투자 동기에 집중하는데, 이 또한 부정확하다. 장래 기업이 점차 성장해 현재 가치보다 미래 가치가 높아지고 그에 따른 시세차익을 보기도 한다. 한편, 이자 배당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투기적일 수 있다. 해당 기업의 수익이 증가함에 따라 배당금이 커지는 걸 추구하는 걸 투자라고 하면, 실적 대부분을 배당으로 지급해버려서 이익 잉여금을 충당하지 못하거나 필요한 기업 활동 재투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 또한 투자로 봐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Graham and Dodd, 2008, pp. 101-105).

 

문제는 다섯째 기준인 안전과 위험의 구분이다. 결과를 보고 안전을 판단하면, ‘성공한 투기는 투자라는 통속적 구분으로 되돌아간다. 이를 피하려면 사전에 안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 증권 매입자의 주관적 판단에 좌우될 여지가 크다. 따라서 안전이 투자와 투기를 구분하는 유용한 기준이 되려면, 증권 매입자의 심리적 요인이 아니라 명백히 실재하는 어떤 것(something more tangible)’을 근거로 안전한지 위험한지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유형성(tangibility)’이 안전 여부를 판단하는 조건이다. 현실에서 감각할 수 있는 유형(有形)의 것들, 달리 말해 주식을 뒷받침하는 실물 경제에 기초해 주식의 가치와 가격 그리고 그 변동을 평가하는 증권분석이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벤저민과 도드에게 투자는 곧 증권분석과 다를 바 없다(Graham and Dodd 2008, p. 105). 한 마디로 투자는 증권분석의 결과가 일정 기준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고 기대한 기업 가치가 일정 시간이 지나서 실현되는지를 점검하는 일련의 투자 행위다.

 

벤저민은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 다음과 같이 투자와 투기의 개념을 정의한다. “투자 행위란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원금의 안전과 만족할 만한 투자수익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행위는 투기다(Graham, 2003, p. 18; Graham and Dodd, 2008, p. 107).” 여기서 말하는 철저한 분석(thorough analysis)’은 안전과 가치라는 정립된 기준으로 사실(fact)’을 분석한다는 뜻이다. ‘안전은 절대적이고 완벽하게 안전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정상적이거나 합리적으로 있을 수 있는 상황 또는 변화를 상정하고서 그런 일이 생길 때 손해를 입지 않는 걸 의미한다. ‘만족할 만한 수익(satisfactory return)’은 주관적인 표현이어서 투자자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수익률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만족할 만한 것이며, 이자와 배당 수입뿐만 아니라 시세차익도 포함한다(Graham and Dodd, 2008, pp. 106-108).

 

벤저민과 도드는 앞서 제시한 일반적인 다섯 가지 구분들 중 네 가지 구분은 자신들이 중시하는 안전이라는 기준과 상충한다고 지적한다. 안전이란 기준을 따르게 되면 투자 개념에 속하는 투자 행위의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대신 벤저민과 도드는 투자 행위가 투기로 빠지지 않기 위해선, 적합한 분석을 근거로 만족할 만한 안전성을 확보하는 게 투자에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Graham and Dodd, 2008, p. 108). 결국, 투기와 구분되는 투자의 본질은 안전이다. 그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선 명백히 실재하는 사실에 근거해 적합한 방식으로 증권의 내재적 가치를 철저히 분석하는 게 필수적이다.

 

 

2) 경제 안정의 조건 : 하드 머니와 은행 원칙

 

벤저민은 <The Intelligent InvestorSecurity Analysis>이라는 책에서 현명한 투자자의 상과 현명한 투자자의 투자 방법을 각각에서 설명하였다. 안전한 투자, 향후 정립된 용어로는 가치투자라 불리는 일종의 규범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 기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주식 시장에서 투자자 개인들의 적절한 투자 행위가 보편화되어 투기적 붐을 제약하고 불황이 예방될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개별 행위를 규제한다고 해서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미시경제적 차원에서 경제 행위자들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규율하는 것과 함께, 거시경제적 차원에서 경제 제도를 개혁하는 게 필요했다. 그러면 무엇이 경제 공황을 일으키는 구조적 요인인가? 이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 벤저민은 1920~30년대에 여러 차례 공황을 겪은 경험에서 위기의 원인을 진단했고, 전쟁 중 변화한 금융기관과 제도 및 정책에서 대안을 발견했다.

 

벤저민이 경험했던 1921~22년 대공황은 주로 재고와 상품 가격을 지속 불가능한 수준으로 몰고 간 전후 투기 붐에 의해 야기되었고, 1927년 이후에도 다시 한번 투기적인 가격 상승이 일어나 1933년에 이르러 불황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전 대공황과 달리, 1933년에는 자산 가격 폭등이 특징적이었고 가격 붕괴 이후에는 통화적 문제(monetary problem)가 두드러졌다. 경제 전반에서 상품 가격 하락해서 오랜 시간 안정을 회복하지 못했다. 달리 말해, 화폐 가치가 급격히 상승했다 하락하면서 경제가 불안정해진 것이다(Graham and Dodd, 2008; Mehrling, 2011, pp. 287-288).

 

그래서 벤저민은 1933“Stabilized Reflation”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해 CRC의 초기 아이디어를 밝혔다. 상품 가격과 경제적 안정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새로운 통화와 이를 뒷받침할 제도를 제안했다(Graham, 1933). 1920년대에는 1913년 설립된 연방준비제도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이 펼쳐졌다. 전시 경제를 운영하려면 기업들의 경제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했는데, 이에 필요한 자금을 신용 수단을 발행해 충당할 수 있도록 연방준비은행이 통화정책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벤저민은 연방준비은행이 적극적 경기조정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존 주장과는 달리, 신용이 아니라 상품 바스켓에 근거해 새로운 연방 지폐를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품의 명목 가격이 실제 상품에 내재한 실질 가치에 비해 하락하면 상품을 저장소에 사들여 재고를 늘리고, 반대로 상승하면 제고를 줄이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 상품의 매도와 매입에 필요한 자금을 저장소의 상품재고에 근거해 화폐를 발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CRC의 국내 버전에 관한 구상은 1937년 출판된 <Storage and Stability>에서 더 구체화 되었다(Graham, 1937). 이 책에서 그는 CRC를 운영하는 연방준비은행의 모습을 가리켜, ‘무제한의 은행 돈뭉치(an unlimited bank roll)의 축복으로 기초상품을 장기적으로 운영하는 기민한(shrewd) 운영자의 역할(Graham, 1937, p. 39)’이라고 묘사했다. 달리 말해, 벤저민은 연방준비은행에게 마치 주식 시장의 현명한 투자자처럼 행동할 걸 요구했다. 그렇다면, 연방준비은행이 경제를 관리하는 기준 또한 안전이라 할 수 있다.

 

CRC 제도에서 연방준비은행은 실재하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 근거해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경제 상황에 대한 사실을 철저히 분석하고, 다른 한편으론 감지할 수 있는 유형의 상품을 준거로 가격 변동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투자에 관한 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CRC의 구상에서도 벤저민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투자, 바람직한 화폐의 기준은 바로 안전이다.

 

안전이라는 기준을 성립시키는 건 실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벤저민의 구상에는 감각할 수 있는 유형의 어떤 것이 적합한 판단과 바람직한 행동의 근거로 자리하고 있다. 그것들 없이는 주관적 심리에 좌우될 것이며 종잡을 수 없게 행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미시적 차원의 투자자 개인뿐만 아니라 거시적 차원의 정부와 금융기관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새로운 통화인 CRC도 실체가 있는 상품, 실제 삶에서 유용한 가치가 내재해 있는 물질적 상품에 근거하도록 제안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통화 또한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인위적으로, 즉 자기 멋대로 발행될 가능성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현명하지 못한 투자로 인해 주식 시장에서 투기 붐이 커진다면, 또는 거시경제적 차원에서 금융기관, 특히 연방준비은행이 현명하지 못하게 행동한다면, 무슨 문제가 생길까? 벤저민은 19475<The American Ecnomic Review>“Money as Pure Commodity”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화폐의 역사적 변화를 상품에 뒷받침되는 화폐에서 어떠한 실물에도 기초하지 않는 화폐로 바뀌는 과정으로 설명한다(Graham, 1947). 그런데 이때는 벤저민이 CRC의 구체적 설계를 이미 마친 뒤였고, 국내외에서도 CRC와 관련한 논의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진척된 상황이었다. 그는 왜 자신의 세부적 구상이 정립된 지 한참 지나서야, 화폐에 관한 추상적인 논의로 되돌아간 것일까?

 

여기서 상기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다. 1947년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로, 19447월에 열린 브레튼우즈 회의 이후 금-달러 본위제로의 전환이 본격화하던 시기라는 점이다. 완전한 형태의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점차 신용 수단과 같은 형태의 화폐로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비록 CRC가 실현되지 못했을지라도 이런 전환기에 맞서고자 화폐에 관한 이론적 검토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 ‘하드 머니(Hard Money)’를 지지하는 벤저민의 태도에 비춰볼 때, 당시 진행 중이던 달러 본위제로의 전환이 지닌 한계를 비판하고 더 바람직한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그러니 CRC의 취지를 화폐 문제의 측면에서 다시 한번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3) CRC의 통화적 본질 : 상품과 화폐의 연결

 

1947년 원고인 “Money as Pure Commodity”에서 벤저민은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통화가 금 보유량에 비해 더 많이 발행되는 사태에 관해 우려를 표했다. 이미 전쟁을 거치면서 통화의 비평행적인 팽창에 관한 요구(the unparalleled expansion of monetary claims)가 커졌다. 그 결과, 이제는 미국 달러가 금에 의해 뒷받침되기보다는 반대로 금이 미국 달러에 의해 뒷받침되었다(Graham, 1947). 이러한 역설이 함의하는 바는 화폐가 더는 실물에 토대를 두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화폐와 상품 간 전환이 불가능하게 되고, 화폐 가치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종국에는 전반적인 가격 불안정이 일어나 경제 전반이 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이러한 평가는 벤저민이 견지한 화폐에 관한 입장과 긴밀히 연관된다. 화폐 문제를 대하는 벤저민의 태도는 지폐와 같은 소프트 머니(Soft Money)와 정화 또는 태환화폐와 같은 하드 머니 중 후자에 긍정적이었다. 벤저민은 1937년에 출간한 <Storage and Stability>의 파트 3, “Monetary Aspects of The Reservoir Plan”에서 자신의 CRC 계획이 은행 원칙(the banking principle)에 기초하고 있다고 설명한다(Graham, 1937, pp. 117-165). 이 원칙에 따르면, 화폐는 어떠한 유형적 가치의 수단(some medium of tangible value)으로서 의심할 여지 없이 전환 가능성(convertibility)이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1933년 당시 금태환이 중지되고, 금 보증 대신 자기청산(self-liquidating)을 하는 상업어음으로 대체가 되면서, 미국의 모든 통화는 수탁적 기반(fiduciary basis)’에 기초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달러는 오직 발행인의 선의(the good of the issuer)에만 의존할 뿐이었고, 그걸 뒷받침하는 유형적 가치의 양은 희소했다. 그렇기에 벤저민은 달러의 전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평가했다(Graham, 1937, pp. 125-126).

 

화폐가 상품, 즉 실물로 뒷받침되지 않게 되면서 화폐 가치가 불안정해졌고 전환 가능성이 훼손되었다는 얘기를 국제적 차원으로 확대하면 다음과 같다. 그건 금본위제의 규칙과 이를 운영하던 국가의 능력이 약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탁적 기반에 기초해 모든 통화가 발행되자, 신용 수단의 가치와 금 가격 사이의 역 관계가 성립되었다. 신용 수단이 화폐로서 가치를 잃으면 금 가격이 오르고, 신용 수단이 화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면 금 가격이 내리는 현상이 나타났다(Graham, 1947, pp. 305-306). 신용 수단의 전환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과 국가들이 늘어나면서 금을 축장하려는 성향이 강해졌다. 국제적으론 금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심해져 국가 간 갈등이 커졌다. 경제 규모가 큰 국가일수록 금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었기에 국가 간 금 비축량의 불균형이 심해졌고, 이는 다시 국가 간 경제력 격차로 이어졌다. 또한, 더 생산적인 데 쓰일 수 있는 경제적 잉여가 낭비되었다.

 

따라서 CRC의 통화적 본질에 비춰보면, 상품과 화폐의 연결을 회복하는 게 국내외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벤저민은 CRC물리적 화폐(physical money)’이며, 고전적인 금본위제의 전통과 그 규율을 따른다고 규정했다(Graham, 1944a, p. 97). 즉 국내외 통화체제 개혁에서 상업은행의 원리를 일반화시키는 게 아니라, 금본위제의 원칙을 쇄신하는 방향이 더 이상적(Graham, 1944a, p. 87)이라고 보았다. 그런 이유에서 벤저민은 단순히 완충재고 확보에만 그쳐서는 안 되고 화폐 발행과 완충재고를 긴밀히 연관시키는 방식으로 제도를 설계하고자 했다. 과거와 같이 화폐에 금이라는 상품의 가치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상품 바스켓에 통화적 가치를 부여하는 새로운 접근을 취했다. 따라서 벤저민의 CRC 계획은 은행 원칙과 하드 머니의 입장에 기반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뒤에서 다룰 하이에크의 용법으로 표현하면, CRC의 도입은 곧 건전 화폐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앞서 검토한 현명한 투자자에 관한 벤저민의 논의와 연결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CRC 계획에서 중앙은행이 CRC를 안전하게 운영하여 만족할 수준으로 가격을 조정하려면, 건전 화폐를 도입하는 게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안전한 투자는 유형성에 기초하며, 경제 전반의 가격 변동과 재고 변동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가격을 관리하는 일에는 언제나 화폐가 필요하다. 상품 매입에 필요한 화폐를 발행한다고 할 때, 그 화폐는 유형의 것에 근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화폐 발행에 따른 부정적 영향으로 가격 붕괴와 같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따라서 현명한 투자자로서의 중앙은행이라면, 건전 화폐를 토대로 안전한 투자를 실행해야 한다. 불건전 화폐로는 가격 안정을 실현할 수 없다.

 

물론 벤저민은 신용 수단의 유용성을 전부 부정하진 않는다. 반대로 CRC가 모든 경제적 불안정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이는 다른 CRC 주창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한 건 중앙은행이 신용창조에 기초해 자율적이고 인위적으로 경기를 조절하는 방식, 즉 관리통화제도(managed currency system)는 화폐 가치를 무너뜨릴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그래서 벤저민을 필두로 한 CRC의 주창자들은 신용 수단에 의한 경기대응책은 보조적으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본다. 신용 수단(fiduciary media)이 경제 전반에 통용되어 지배적인 화폐 형태가 된다면, 가격을 안정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준비통화론에 따르면, 경제위기를 막는 데 있어 현명한 투자의 규범적 확립(개인적 차원)만큼이나 불건전 화폐(unsound money)를 대신해 건전 화폐가 보편화될 수 있도록 경제 제도를 전환하는 일(구조적 차원)이 중요하다. 이게 CRC가 제시하는 통화개혁의 방향이다.

 

(계속)

 

 

각주

1) 본 논문에선 혼동을 피하기 위해, 벤저민 그레이엄을 인용할 때는 Graham으로, 프랭크 D. 그레이엄을 인용할 때는 F. Graham으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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