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자본주의>, 제9장 미국의 권력, 석유, 그리고 글로벌 금융
아담 하니에 (Adam Hanieh)
번역: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이 글은 Adam Hanieh, Crude Capitalism: : Oil, Corporate Power, and the Making of the World Market (Verso, 2024)의 Ch.9 US Power, Oil, and Global Finance를 번역한 것이다.***
*저자 소개: 아담 하니에(Adam Hanieh)는 엑서터 대학교(University of Exeter)의 정치경제 및 세계 개발학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SOAS 중동연구소(SOAS Middle East Institute) 소장을 맡고 있다. 주로 중동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관심을 갖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시각에서 걸프 지역의 자본 축적과 글로벌 금융 시스템 사이의 연결을 분석한다. 걸프와 중동이라는 지역에서 세계 자본주의 전체를 다시 읽는, 이른바 '스케일' 방법이 특징이다. 그의 문제의식을 일관되게 엮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걸프는 세계체계에서 주변부나 예외가 아니며, 현대 자본주의의 중심 회로를 구성한다. 둘째, 석유·금융·국가권력·제국주의가 결합해 하나의 축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셋째, 중동을 이해하려면 지역 내부 정치나 지정학적 각축만이 아니라 세계시장, 달러 질서, 계급, 기업 권력의 변화를 함께 보아야 한다.
*책 소개: Crude Capitalism에서 하니에는 석유를 “자원의 저주”나 “국가 간 쟁탈 대상”로 다루는 통념을 넘어서려고 시도한다. 그와 같은 접근은 사안을 협소하게 만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의 통찰을 따라, 19세기 말부터 오늘날의 생태적 재앙에 이르기까지 석유가 어떻게 자본주의라는 유기체의 물질적 토대이자 세계 시장을 조직하는 근본 원리로 자리 잡았는지를 추적한다. 석유가 어떻게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세계질서의 부상, 반식민 투쟁, 달러 헤게모니, 금융 부채, 군사주의, 그리고 합성(synthetic) 소비의 변화와 얽혀 현대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구성했는지를 살펴본다.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석유 기업들이 법적·제도적 혁신을 통해 어떻게 이윤을 극대화했는지, 페트로달러 환류가 어떻게 글로벌 금융을 지탱해 왔는지, 어떻게 석유가 플라스틱과 비료 등 일상의 필수재로 변모하며 인류의 삶을 합성 소비의 궤도에 고착시켰는지 등을 분석한다. 기후 위기와 전쟁으로 대표되는 다중 재난 시대에 우리가 마주한 기술적·경제적·정치적 난관이 자본주의 구조 문제임을 밝힌다. 그의 연구는 화석 연료와의 결별이 단순히 에너지원의 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지난 한 세기 동안 구축된 글로벌 자본주의 지배 구조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는 걸 시사한다.

1970년대는 두 차례 중대한 유가 충격으로 시작하고 끝맺었다. 하나는 1973~74년 위기였고, 다른 하나는 이란 이슬람 혁명 직후인 1979~80년에 발생한 두 번째 대규모 유가 급등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두 차례의 충격은 평범한 서구 소비자들에게는 상당한 고통을 안겨주었으나,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활동하던 대형 석유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실질적으로 훼손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의 조치는 이들 기업의 국제적 업스트림(upstream) 지위에 훨씬 더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석유 매장량과 세계 원유 생산 중 산유국 정부의 직접 통제 아래로 편입되는 몫이 점점 더 커졌기 때문이다. 1970년만 하더라도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를 비롯한 서구 석유회사들은 미국과 소련을 제외한 국제 석유 매장량의 90%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1970년대 말이 되면 그 비중이 3분의 1 이하로 하락했다(표 9.1 참조). 1970년대 초 세계 최대의 석유 수출국으로 부상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정부가 1974년 아람코(Aramco) 지분 60%를 취득했고, 1980년에는 회사를 완전히 국유화했다. 이로써 서구 기업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글로벌 차원에서 더이상 원유 생산의 지배적 주체가 아니게 되었다.

유가 상승과 결합된 이러한 업스트림 국유화는 주요 OPEC 국가들의 집단 소득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중동 OPEC 회원국들만 해도 1965년부터 1986년 사이에 석유 판매를 통해 약 1조 7천억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이 가운데 40% 이상을 사우디아라비아가 차지했다(그림 9.1 참조). 곧 ‘페트로달러’(petrodollars)로 불리게 된 이 막대한 자금 풀은 세계 부의 분배 구조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였다. 이전까지 세계체계(world system)에서 주변에 머물던 소수의 옛 식민지와 국가들이, 주로 자본주의 중심 국가들로부터 유입된 자금을 통해 형성된 거대한 자본을 갑작스럽게 통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의 이전은 역사적으로도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많은 산유국, 특히 중동 걸프 지역 국가들의 경우, 석유 판매로부터 발생한 막대한 수입을 국내 경제 안으로 흡수하기에는 경제 규모가 지나치게 작았다. 그 결과 이들 국가는 주요 자본 수출국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갖게 되었고, 이 변화는 전 세계적 차원에서 자산의 소유 및 통제 패턴을 재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축적의 지리(geographies of accumulation)가 형성되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점에, 다른 정치적·금융적 긴장들도 함께 가시화되고 있었다. 치솟는 유가는 대부분의 석유 수입국들에 대규모 재정적자를 초래하였고, 그로 인해 아프리카·아시아·중동의 신생 독립국들이 추진하던 발전 전략에 중대한 위협이 제기되었다. 산업화된 서구에서는 많은 국가가 높은 인플레이션과 저성장이 결합된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이러한 금융적 긴장과 더불어 새로운 지정학적 균열 역시 출현하고 있었다. 이 시기 내내 소련의 영향력은 과거 식민지 세계의 광범한 지역에서 빠르게 확대되었는데, 여기에는 서시베리아의 막대한 에너지 매장량이 촉발한 석유 붐이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the US state)과 미국의 거대 기업들은 여전히 전 세계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서유럽과 일본에 기반을 둔 강력한 다국적기업들을 중심으로 경쟁 블록들 또한 공고화되고 있었다. 1971년 달러-금 본위제(dollar-gold standard)의 붕괴 역시 미국의 금융 헤게모니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 달러는 전후 호황기 미국의 우위를 떠받치는 핵심 기둥이었으나, 변동환율제라는 새로운 국제 통화체제 아래에서도 그 역할이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은 미국 지배의 지속 가능성 자체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페트로달러 환류(petrodollar recycling)을 둘러싼 결정들, 즉 OPEC 흑자를 어디에 투자할 것인지, 누가 그것을 통제할 것인지, 어떤 통화로 보유할 것인지에 관한 결정들이 1970년대 내내 자본 흐름의 복잡한 재배치를 추동하였다. 그 결과 새로운 글로벌 금융체계가 형성되었는데, 그 정점에는 미국과 서유럽 금융시장을 잇는 대서양 횡단적 연결성(the transatlantic connectivity)이 자리하고 있었다. 앵글로-아메리칸(Anglo-American) 금융기관들이 지배한 이 새로운 글로벌 금융 아키텍처는 정치적·경제적 불확실성이 극심한 시기에 아메리칸 국가(the American state)와 미 달러의 우위를 제도적으로 다시 심는(reembed) 데 기여하였다. 동시에 그것은 특히 석유 충격 이후 등장한 부채 사슬(chains of debt)을 매개로 전 세계 곳곳에서 부를 추출하고 거기에 의존하는 새로운 양식들을 가능하게 했다. 석유를 이처럼 글로벌 금융과 미국 권력(US power)의 더 넓은 변형 과정 속에 위치시킬 때, 비로소 1970년대와 이른바 OPEC 혁명의 실제 유산이 분명해질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에서 석유가 자리하는 장소 역시 더 선명해질 수 있다.
중동 내에서 미국의 권력
주류 경제학 문헌 대다수는 1970년대를 세계가 간단한 기술적 도전에 직면했던 시기로 파악한다. 즉, 세계 한편의 흑자와 다른 편의 적자를 연결함으로써 글로벌 금융 불균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의 문제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은 경제적 결정을 사회적 권력의 현실들로부터 추상화함으로써 주요 산유 지역 전반에 걸쳐 서구 국가들이 미치는 지속적 영향력을 가린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물론 전후 반식민 투쟁 가운데 공식적인 식민 통치가 무너졌고, 서구 기업들이 업스트림 원유를 직접 소유하는 것 역시 대부분의 경우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반제국주의·민족주의·좌파 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산유국들, 특히 중동의 산유국들은 부패하고 사익을 추구하며 독재 정권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 국가들은 업스트림 석유를 장악한 국가 엘리트들과 새로운 동맹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 정권들에 선택적으로 지원을 제공하고 그들을 지배 권력 블록 내 종속된 위치에 편입시켰다. 그럼으로써 직접적인 식민 통치는 간접적인 영향력 행사와 통제의 형태로 대체되었다. 페트로달러의 흐름은 이처럼 불평등하지만 상호 이익이 되는 배열을 공고화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등장하였다.
여기서 중동 내 미국 권력이라는 현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첫 번째 석유 충격이 발생할 무렵, 미국은 이미 이 지역에서 주요 외부 세력이 되었고, 그 결과 걸프의 핵심 산유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걸프에서 미국이 갖는 존재감의 중심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1979년 이전의 이란, 곧 알사우드 왕가(the Al Saud)와 팔라비 왕조(the Pahlavi dynasty)와의 동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두 전제 군주정은 OPEC의 확고한 리더들이었지만, 동시에 보다 넓은 지역에서는 전반적으로 깊은 반감을 샀으며, 국내에서 봉기가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영국 식민주의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미국이 제공하는 지원은 이 군주정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한편, 그들을 미국의 지역적·세계적 우위 아래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적어도 1979년 혁명 이전의 이란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외 다른 걸프 산유 토후국(sheikhdoms)들 역시 미국의 필수 동맹국들이었다. 이들 국가는 모두 1971년에 독립했는데, 영국과의 강한 연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곧이어 미국 정책의 핵심축으로 편입되었다. 걸프 외부에서 중동 내 미국 권력의 또 다른 중심 축은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1967년 이집트·시리아·요르단과의 전쟁에서 아랍 민족주의에 맞서는 주요 세력으로서 자신의 유용성을 입증하였다.
첫 번째 석유 충격 이후, 페트로달러의 순환은 미국과 걸프 군주국들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미국 정부는 한편으로 의식적으로 페트로달러 투자를 유치하려 했고, 공동 경제·기술·상업 프로젝트들을 통해 미국산 재화와 서비스의 구매를 장려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걸프의 석유 판매 수입은 다시 미국 기업들과 더 넓은 미국 경제로 환류되었고, 침체된 경제 환경에서 중요한 세계적 수요의 원천을 제공했다.[1] 동시에 걸프 군주국들 역시 자국 투자 자산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기반한 달러 표시 자산으로 보유함으로써 미국 경제의 안정과 지속적 성장에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제적 연계가 걸프의 지배 왕가들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인 정치적 지지와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걸프 군주국들을 중동 내 서구의 영향력을 대변하는 주요 대리인으로 간주하던 민족주의자들과 급진 좌파의 선동이 지역 전반을 뒤흔들던 상황에서, 이와 같은 암묵적인 정권 생존 보장은 필수였다.
이러한 ‘페트로달러 상호의존성’(petrodollar interdependencies)의 중심에는 미국산 무기와 군사 장비의 판매가 있었다.[2]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 수출은 1972년에서 1978년 사이 10배 이상 증가하여, 그 기간 동안 사우디가 구입한 전체 무기의 80% 이상을 차지했다.[3] 더 중요한 것은 팔라비 왕조가 전복되기 직전인 1973~1978년 사이 이란의 샤(the shah of Iran)에게 수출된 미국 무기인데, 그 총액은 83억 달러에 달했다.[4] 이란은 1974년 한 해에만, 과거 어느 해보다도, 다시 말해 그 전의 어떤 연도에서든 세계 나머지 모든 국가의 미국 무기 구매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무기를 구매하기로 합의했다.[5] 이러한 무기 판매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배 왕정들과 국내에서 이들을 지지했던 협소한 엘리트 집단에게 미국의 단호한 지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무기 거래를 주선한 정권의 측근들과 왕가 내부 인사들에게 리베이트(kickbacks)와 수수료를 통한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무기 수출은 걸프의 페트로달러 흑자의 상당 부분을 미국 군수산업 상층부의 주머니로 흘러들게 했다. 이러한 ‘웨폰달러-페트로달러’ 연합(weapondollar–petrodollar coalition)은 오늘날에도 석유 경제의 내부 구성요소로 남아 있다.[6]
군사 수출은 걸프 내부의 국가형성 경로에도 직접적이지만 흔히들 간과하는 결과를 남겼다. 군사 장비의 판매는 필연적으로 기술 감독, 훈련, 장비 수리와 업그레이드, 그리고 미국이 걸프 전역에 구축한 더 넓은 안보 우산 속에서 각국 무기체계의 상호운용성을 보장하기 위한 지속적인 미군 주둔을 수반하였다. 그 결과 군사력 이전은 단순한 일회성 거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 관리들과 자문단을 걸프 국가기구(state apparatus)의 핵심에 뿌리내리게 하는 수단이었다. 국방과 안보에 관한 결정 - 피해망상에 시달리던 걸프 통치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던 - 은 미국이라는 존재와 분리될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걸프 군부의 최고위층은 미국 국가에 긴밀히 융합되었다.[7] 이러한 방식으로 무기 판매는 베트남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지정학 전략을 전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국가들은 미국의 지역적 이해관계를 대리 수행하는 프록시들(proxies)로 재배치되었고, 미국의 군사 개입은 일정한 거리 두기를 가장한 군사력 이전이라는 장막 뒤에 가려져 미국 대중들의 감시를 피해갈 수 있었다.[8]
이러한 국가 간 연결은 페트로달러 환류의 다른 경로들, 특히 미국 국채 매입이라는 경로를 열어주었다. 여기서 사우디아라비아가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미 세계 최대 산유국이자 OPEC 내 최대 페트로달러 흑자 보유국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1974년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미국 대통령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과 그에 뒤이은 윌리엄 E. 사이먼(William E. Simon) 재무장관이 이끄는 사절단의 추가 파견 이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가 통상적인 국채 입찰 절차 바깥에서 수십억 달러 규모의 미국 재무부 채권(US Treasury bonds)을 매입하도록 하는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9] 1977년 말이 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 밖의 중앙은행들이 보유한 전체 미국 재무부 어음과 국채의 5분의 1을 보유하게 된다.[10] 이처럼 놀라운 수준의 사우디 국채 매입은 미국 정부에 ‘막대한 외국 자본 풀’에 대한 접근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달러의 세계적 지배를 떠받치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1] 스피로(Spiro)가 지적하듯, “그처럼 많은 자금을 달러에 투자하기로 동의한 이상, 사우디는 이제 달러를 국제준비통화(international reserve currency)로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를 함께하게 되었다. 1979년 사우디 정부 수입의 90%가 달러로 구성되었고, 대략 같은 시기 사우디의 투자자산 가운데 83%가 달러 표시 자산이었다.”[12]
이러한 방식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금융 잉여는 1971년 달러-금 태환 중지 이후 미국 달러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동시에 미국 달러가 주요 국제준비통화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석유 자체가 달러로 가격 표시되고 거래되었다는 사실과도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달러 표시 석유 거래는 결코 예정된 결과가 아니었다. 국제 석유 거래의 약 5분의 1은 영국 파운드화로 이뤄졌고(5장을 참고하라), 몇몇 OPEC 회원국들은 석유 가격 책정 통화로 달러를 대체할 보다 다변화된 통화 바스켓의 도입을 희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사우디아라비아 관계가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정적이었다. 사우디 관리들이 제다( جدّة, Jeddah)에서 미국 대표단과 비밀 국채 매입 협정을 최종 조율하던 바로 그날, 사우디아라비아는 더 이상 석유 판매 대금으로 파운드화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13] 이 시기가 일치한 게 그저 우연이었는지는 여전히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 후 몇 달 동안 사우디아라비아는 OPEC 내부에서의 영향력을 이용해 달러 이탈 시도를 저지했고, 1975년이 되면 모든 OPEC 회원국이 달러 단일 통화로 석유 거래를 하기로 결정했다. OPEC 전체로 보면, 달러로 보유한 외환보유액의 비중은 1973년 57%에서 1978년 93%로 상승했다.[14]
세계 석유 거래가 이제 전적으로 달러로 이뤄지게 되면서, 모든 국가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대규모 달러 보유고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15]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 - 이러한 방식으로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다른 걸프 국가들 사이의 동맹을 통해 매개된 - 는 변동환율제의 세계에서 미국 달러 헤게모니를 견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달러에 대한 국제적 수요가 미국 내의 필요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에, 미국은 다른 나라들의 지출 정책들을 제약하던 인플레이션이나 환율의 압박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면서, 해외에서 벌어들인 것보다 더 많이 지출할 수 있었다. 요컨대 미국 달러의 국제 보유자들이 미국이 해외로 제국적 팽창을 하는 데 드는 비용을 사실상 조달하고 있었던 셈이다. 세계무역에서 주요한 가치저장 수단이자 필수적인 구매 수단임이 확실해지자, 달러는 미국에 막강한 지정학적 권력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었다. 미국은 단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고, 제재를 가하거나 미국 은행 시스템에서 배제하겠다는 위협만으로도, 한 나라의 경제를 마비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가 글로벌 금융에서 새롭게 획득한 체계적 중요성은 1978년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집행이사회(Executive Board) 상임 이사국 지위를 부여받으면서 확인되었다. 이로써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 서독, 일본, 프랑스, 영국과 더불어 IMF 이사회에서 단독 의석을 가진 유일한 국가군에 합류하였다. 이 임명 여부는 미국의 지지에 달려 있었는데, 미국은 IMF의 모든 중대 결정에 대해 자국이 지속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투표 규칙이 변경되자 반대를 철회했다.[16]
이 모든 방식에서 알 수 있듯, 1970년대 미국의 중동 정책은 페트로달러 부(petrodollar wealth)의 미국 자산 및 금융시장으로의 순환, 군사적 보호 제공, 여러 정치적·경제적 유대에 바탕을 두고서, 이 지역 산유 군주국들과의 상호의존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초기에 이 전략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를 모두 포괄했으나, 1979년 팔라비 왕조가 전복된 뒤, 특히 아바단(Abadan) 정유소의 석유 노동자들이 결정적 역할을 한 혁명 이후에는, 걸프에서의 미국 동맹 프레임워크가 석유 부국 아랍 군주국들 쪽으로 확고히 이동했다.[17] 미국과 걸프 군주국들 사이의 이러한 전략적 동맹이 없었다면, 미국 (혹은 미국 달러)가 1970년대 글로벌 금융시장의 핵심을 차지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미국의 이해관계를 이 지역 국가들에게 외부로부터 일방적으로 강제한 결과가 아니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걸프 군주국들은 빈곤한 지역 내에 얇은 층으로 존재하는 극도로 부유한 자들을 대표했고, 바로 그러한 계급적 취약성, 즉 1979년 이란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그 취약성이야말로 미국과의 관계를 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18] 걸프 군주국들은 미국 권력에 자신들을 연루시킴으로써 미국 중심의 정치·금융 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보장받고자 하였다. 그들은 이 체계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걸었고, 그 과정에서 미국 권력 자체의 생산에도 기여했다.
유로마켓과 글로벌 부채 위기
이러한 미국의 재화와 서비스, 주식, 채권에 대한 중동의 투자는 1970년대 페트로달러의 세계적 순환을 이루는 한 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 외부에서도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다른 구성요소들이 등장하고 있었고, 이들 역시 중동의 금융 잉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유로마켓(Euromarkets)이었다. 이는 은행과 기업이 자국 시장과는 다른 통화로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한, 규제가 느슨한 유럽의 금융시장들이었다. 이 유로마켓들 중 가장 큰 곳은 런던시티(City of London)의 유로달러(Eurodollar) 시장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미국 밖에서도 달러 표시 거래, 예컨대 대출, 채권 발행, 예금 등이 이뤄질 수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영국 금융시장의 규제 완화 이후 본격적으로 출범한 유로달러 거래의 기원에는 냉전기의 경쟁 구도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 소련은 미국 내 금융기관에 달러를 예치하지 않고도 국제적으로 달러 유동성을 운용할 장소로 런던시티를 활용하였다. 이후 유로마켓은 미국 밖으로 달러를 반출하는 데 따르는 규제를 우회하려는 미국 기업들에게도 매력적인 공간이 되었다. 오늘날 역외 금융지대들(offshore financial zones)과 마찬가지로, 런던시티는 사법권역의 차원에서 영국 국내경제와 일정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통화통제, 세금, 최소예치금, 금리 규제 등과 관련하여 거의 제약 없이 운영되었다.[19]
유로마켓의 규모는 1968년 250억 달러에서 1980년 5,750억 달러로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20] 이 성장의 상당 부분은 페트로달러 부에 의해 견인되었고, 1970년대 내내 OPEC 흑자의 약 3분의 1이 유로달러 은행들에 예치되었다.[21] 이러한 석유 자금은 주로 런던·파리·제네바에 본사를 둔 컨소시엄 은행(consortium banks)들을 통해 중동에서 유럽으로 이동했다. 이들 은행 가운데 다수는 영국의 옛 걸프 식민 지배와 연결된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며, 과거 ‘스털링 오일’(Sterling Oil) 판매 수입을 영국 소재 계좌로 흘려보내기 위해 설립된 곳들이었다. 여기에 더해 주요 미국계·영국계 은행들도 1975년 역외 은행 시스템(offshore banking system)을 연 바레인(Bahrain)의 해외 지점을 통해 페트로달러를 유로마켓으로 유입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해안에서 불과 60km 떨어진 바레인은 곧 내전 상태에 빠진 레바논을 대신해 중동의 금융 중심지로 부상했다.
중동의 페트로달러 잉여와 유로마켓 성장 사이의 연결은 1970년대 글로벌 자본주의의 재편에 필수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느슨한 규제를 가진 유로마켓은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국경 간 금융 자유화의 핵심 촉진자였다. 정부의 감독이 미약한 가운데, 유로마켓은 기업들이 더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환전 및 거래 비용을 줄이며, 다양한 시장·통화·금리 조건을 가로질러 자신들의 글로벌 활동을 조정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단지 은행과 금융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 최대 다국적기업들을 포함한 비금융 기업들의 국제화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유로마켓에서 공급된 신용은 해외 사업 확장을 추진하던 기업들의 국경 간 활동에 연료를 제공하였다. 실제로 다국적기업들은 1972년 한 해에만 전체 유로달러 거래의 50%를 차지했으며, 이후 10년 동안 그 비중은 계속 증가했다.[22] 이러한 차입의 상당 부분은 본국에서 자본 수출이 제한되었지만 유로마켓 차입을 통해 자본통제를 우회할 수 있었던 미국 기업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기 다국적 활동의 엄청난 국제적 팽창의 직접적 원인은 유로마켓의 폭발적인 성장이라 할 수 있다.
다국적기업들과 더불어 유로마켓의 또 다른 주요 차입자는 가난한 석유 수입국들이었다. 두 차례의 석유 충격과 장기화된 세계적 경기침체에 직면하면서, 이른바 개발도상국 중 비산유국들(developing non-oil countries)의 총적자는 1973년 110억 달러에서 1980년 890억 달러로 꾸준히 증가했다.[23] 현금이 고갈된 정부들은 유로마켓에서 활동하는 상업은행들로부터 대출을 구하는 것 외에 별다른 선택지를 갖지 못했다. 1979년이 되면 상업은행 대출은 제3세계 부채 금융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1974년에는 그 비중이 약 25%에 불과했다).[24] 이 대출은 산유국들을 대신해 보유하고 있던 흑자를 수익성 있게 운용할 투자처를 찾고 있던 소수의 민간 은행들에 의해 공급되었다. 중요한 점은 이 대출 대부분이 상업 거래 조건(commercial terms)과 변동금리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1970년 이전 국제대출이 대체로 양허 조건 아래 외국 정부나 IMF와 같은 기관에 의해 제공되던 패턴과는 뚜렷이 다른 것이었다.[25] 특히 이 시기 국제 은행대출의 절반을 단 20개의 대형 은행이 담당했는데, 그 다수가 미국 또는 영국 소유의 금융기관들이었다.[26]
페트로달러의 흐름과 증가하는 달러 신용 공급에 힘입어, 유로마켓은 미국 금융기관들이 자국 국경 밖에서도 지배적 위치를 점하는 새로운 국제 금융 아키텍처를 공고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주도성은 영국 은행들과 런던 시티와의 긴밀한 결합 속에서 발전하였다.[27] 런던 시티는 미국 금융시장과 나머지 세계 금융시장 사이의 최우선 중개자로 기능하였다. 케이먼 제도(Cayman Islands), 바레인, 버뮤다(Bermuda), 저지(Jersey)와 같은 역외 지역들, 그리고 영국 보통법(English Common Law) 아래 운영되는 각종 영국 해외영토 및 왕실령들의 ‘거미줄’과 연결된 런던 시티 덕분에 세계 최대 금융기관들은 다국적기업과 정부의 글로벌 차입과 대출을 총괄할 수 있었다.[28] 이것은 단순히 미국의 금융 명령이 런던 시티에 일방적으로 강제된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 권력은 영국과의 ‘대서양 횡단적 상호작용’(transatlantic interactivity)을 통해 형성되었다.[29] 영국은 세계 곳곳에서 자본을 흡수하여 그것을 미국 금융시장·금융기관·달러 표시 자산으로 다시 흘려보냄으로써, 미국 금융권력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동시에 그 권력의 성격을 함께 형성하였다.
미국 금융 우위와 국제 부채 구조에서 유로마켓이 차지하던 중심적 위치의 결과가 전면에 드러난 것은 1980년이었다. 당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던 폴 볼커(Paul Volcker)는 미국 금리를 20% 이상으로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볼커 쇼크는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다른 통화들에 대한 달러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조치였다.[30] 그러나 이러한 국내적 효과를 넘어서, 볼커 쇼크는 변동금리 조건으로 유로마켓에서 차입한 가난한 석유 수입국들에게 파괴적인 충격을 가하였다. 이들 국가의 부채는 대부분 비양허 조건의 달러 표시 부채였기 때문에, 금리 인상은 곧 부채상환 부담(debt service payments)의 급격한 증가를 의미하였다. 전체 제3세계 부채는 1971년 900억 달러에서 1983년 8,170억 달러로 불어났고, 부채상환액은 1971년 110억 달러에서 1982년 말 1,313억 달러로 치솟았다.[31] 사실상 이 부채 상환은 가난한 나라들로부터 부를 빨아들여 유로마켓에서 활동하던 주요 앵글로-아메리칸 은행과 금융기관에 축적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지불불능 직전까지 몰렸을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석유 충격의 여파로 신음하던 중채무국들은 상업은행들과 채무 일정 재조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상환 연기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IMF와 세계은행(World Bank)이 설계하고 감독하는 경제정책 패키지를 수용해야 하였다. 여기에는 무역 자유화, 민영화, 외국자본 유입 개방, 사회지출 삭감, 노동시장 규제 완화 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들이 훗날 IMF와 세계은행이 채무국들에 강제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표준 요구사항이 된다. 다시 말해, 부채는 가난한 나라들이 산업·금융·상업 부문을 국제자본에 개방하도록 강제하는 무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시작된 글로벌 임금과 사회적 조건에 대한 지속적 공격은 자본과 노동의 상대적 힘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고,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전개될 세계시장의 확장과 재편을 위한 토대를 놓았다. 후대의 비판자들이 이를 신자유주의 ‘혁명’의 탄생 순간으로 부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1970년대에 형성된 석유와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깊은 상호의존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0년대 경기침체와 유가 붕괴
볼커 쇼크 이후의 경제 변화는 세계 석유산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장 즉각적으로는 금리 인상이 1980~82년의 세계적 경기침체를 촉발하였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깊은 경제 불황이었다. 서구 주요 국가들에서 공장과 기업들이 대거 문을 닫으면서, 1979년부터 1983년 사이 세계 석유 소비는 10% 감소했다.[32] 특히 북미와 서유럽에서 17%라는 놀라운 감소가 나타났는데,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수요 붕괴조차 능가하는 역사상 가장 크고도 가장 장기적인 세계 석유 소비 감소였다.[33] 이 전례 없는 수요 감소와 동시에 1980년대 전반에는 비OPEC 산유국들의 신규 생산이 시장에 유입되면서 공급도 증가했다.[34] 그 상당 부분은 여전히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앞지르던 세계 최대 산유국 소련에서 나왔지만, 여기에 멕시코와 영국, 특히 북해 해상 유전을 보유한 영국이 새로운 비OPEC 공급원으로 부상하였다. 이 두 나라는 1970년대만 하더라도 미미한 산유국이었지만, 1984년이 되면 중동의 주요 수출국들을 제치고 세계 4위와 5위 산유국이 된다. 전체적으로 비OPEC 생산은 1979년에서 1985년 사이 15% 증가했다.[35]
공급 증대와 수요 감소의 결합은 석유 거래구조의 중대한 변화와 겹쳐졌다. 1980년대 초가 되면 점점 더 많은 석유가 이른바 현물시장(spot markets)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OPEC의 공식 기준가격에 연동된 장기계약이 아니라, 매수자와 매도자가 일회성 거래를 포함한 단기 현금 가격을 유연하게 협상하였다. 서유럽의 독립 정유사들과 일본·브라질·인도와 같은 나라의 신규 구매자들은 서구 메이저를 통해 원유를 조달하는 것보다 현물시장이 더 저렴하고 유연하다고 보았다.[36] 산유국 정부들 역시 메이저들과의 장기계약에서 벗어나, 정부나 독립 정유사들과 직접 거래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표 9.1를 보라).[37] 그 결과 산유국들은 새로운 유형의 석유 중개자, 즉 전문 원자재 거래회사(specialised commodity-trading firms)들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이들은 산유국 정부로부터 원유를 구입해 전 세계 현물시장에서 판매함으로써, 메이저들이 구축해 온 거래망을 대체했다. 이 모든 변화는 1970년대 동안 석유산업의 행위자 수와 종류가 극적으로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석유의 순환은 더이상 메이저들의 수직적으로 통합된 채널 안에서 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1979년에는 세계 석유의 절반 이하만이 그러한 방식으로 유통되고 있었다(표 9.1).[38]
요컨대, 1980년대 경기하강 시점에 이르면 OPEC과 서구 메이저들은 사실상 업스트림 공급과 다운스트림 수요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현물시장의 비중이 커지면서 소수 OPEC 회원국의 협조된 결정에 기반한 가격체계를 유지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1980년대 경기침체는 이러한 긴장을 폭발 임계점으로 끌고 갔다. 수요 급감과 공급 증가가 결합되면서 유가는 강한 하방 압력을 받았다. 처음에 사우디아라비아는 1980년 하루 1,020만 배럴이던 생산을 1985년 360만 배럴까지 줄이면서 가격 방어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다른 OPEC 및 비OPEC 산유국들이 계속 증산했기 때문에, 이 노력은 대체로 헛수고에 가까웠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얻은 것은 가격 방어가 아니라 시장 상실이었다. 세계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4년 약 15%에서 1985년 6%로 떨어졌고, OPEC 전체 수익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 몫도 급락하였다(그림 9.1). 결국 1985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는 가격 방어 전략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국내 재정적자가 빠르게 불어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시장점유율 하락을 감수하며 유가를 떠받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공급 조절을 통한 가격 방어를 포기하고 대신 생산을 늘렸다. 그 결과 원유 가격은 1985년 배럴당 27.56달러에서 1986년 14.43달러로 거의 50% 폭락하였다.
이후 낮은 유가는 1980년대 내내, 그리고 1990년대 대부분 동안 지속되었고, 소련을 포함한 주요 산유국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소련은 감소한 석유 수입과 함께 장기간의 혼란을 겪다가 결국 1991년 붕괴에 이른다. 그러나 이 가격 폭락의 의미는 단지 재정수입 감소에 있지 않았다. 1985~86년의 역유가 충격(price countershock)은 20세기 초 이후 유지되어 온 관리가격 체제, 처음에는 세븐 시스터즈 아래, 이후 1973년 이후에는 OPEC 아래 작동하던 가격체제의 최종적 종언을 의미하였다. 몇 년간의 실험 끝에 1988년 무렵 새로운 시장기반 유가결정 체제가 등장하였다.[39]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이 체제에서 석유의 기준가격은 뉴욕상업거래소(New York Mercantile Exchange, NYMEX)와 인터컨티넨털거래소(Intercontinental Exchange, ICE)에서 거래되는 선물계약(futures contracts), 곧 일종의 금융파생상품의 가격에 연동되었다. 이처럼 소위 ‘종이 배럴’(paper barrels) 거래에 결박되면서 석유는 물리적 소비 여부와 무관하게 매매될 수 있는 금융자산으로 변형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는 석유를 투기적 자본 흐름의 주요 표적으로 만들었고, 그러한 특징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40]
아메리칸 권력의 새로운 성좌들
다양한 차원에서 볼 때, 중동의 석유 잉여가 새롭게 부상하는 글로벌 금융체제 안으로 편입된 과정은 전후 호황이 끝난 뒤 미국의 우위가 갖는 성격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브레턴우즈 체제, 즉 달러-금 본위제의 붕괴 이후, 이러한 잉여들은 유로마켓과 기타 역외 금융지대 전반에서 새로운 형태의 달러 우위를 제도화하는 데 기여했다. 세계적 예금과 대출 활동을 지배하던 앵글로-아메리칸 금융기관들은 이러한 시장의 발전을 촉진하고 추가적인 금융 자유화를 밀어붙이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가능해진 글로벌 금융의 무제한 성장은 다국적기업의 국경 간 확장과 나란히 진행되었는데, 그 확장 역시 석유로부터 촉발된 부채위기 이후 세계 각국 경제가 개방되면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석유 충격은 한편으로 세계시장을 열어젖히는 지렛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세계적 팽창을 떠받치는 금융적 중추를 만들어내는 계기였다. 그리고 이 두 과정은 대체로 미국 국가의 감독 아래 전개되었다.
이 모든 것은 미국과 세계 다른 지역들 사이의 동맹 구조 또한 새롭게 그려 놓았다. 1974년 석유 금수조치(embargo) 직후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중동 정책에 대한 대응축으로 독자적인 유럽-아랍 대화를 제안하였으나, 당시 유럽 석유산업의 중심이던 네덜란드의 친대서양 노선 때문에 이 시도는 좌절되었다. 1970년대 중반이 되면 영국·서독·프랑스에서는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지지하는 세력이 집권하였고, 미국은 페트로달러와 금융체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둘러싼 대서양 횡단 논의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앞서 본 것처럼, 이 새롭게 형성되는 대서양 동맹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페트로달러 재순환과 국제 대출의 중심지가 된 런던 시티였다. 그러나 이른바 ‘특별한 관계’의 기원을 단지 언어와 영어권 문화의 공유에서 찾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영국은 중동에 대한 식민 지배의 유산 덕분에, 석유의 금융 흑자가 처음에는 스털링을, 나중에는 달러를 떠받치는 특권적 통로가 될 수 있었다. 석유와 달러 헤게모니의 결합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미영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이 시기 미국 권력의 또 다른 핵심 차원은 물론 걸프 산유국들과의 관계였다. 처음 이 관계는 1953년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핵심적 개입의 유산 속에서 이란의 샤 체제에 대한 지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지만, 1979년 혁명으로 이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 이후 미국의 지역 지배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라비아반도의 소규모 걸프 국가들에 기반하게 되었고, 이들은 1981년 걸프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 GCC)라는 지역 블록을 결성하였다. 미국의 안보 우산 안에 통합되고, 걸프 군주국들에 대한 끊임없는 무기 판매로 뒷받침된 GCC는 이후 중동 전역에서 미국의 군사력을 투사하는 중심축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미국 육군 및 해군 기지의 네트워크가 여러 걸프 국가들에 상시 배치되어 있으며, 미국-사우디아라비아 관계는 여전히 중동에서 미국 전략의 핵심을 이룬다.[41]
군사적·외교적 차원을 넘어, 이 전략적 동맹의 지속성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하지만 자주 간과되는 이유로 걸프 특유의 계급 및 사회구조가 있다. 1979년 대중 시위와 노동자 파업에 의해 전복된 이란의 팔라비 군주제와 달리, 1970년대 이후 걸프 군주들의 지위나 미국과의 동맹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대규모 국내 정치운동은 등장하지 않았다.[42]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GCC 각국의 노동계급 다수가 남아시아와 중동의 더 가난한 나라들에서 유입된 비시민권 이주노동자(non-citizen migrants)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높은 비율의 노동력이 권리가 없는 임시 이주노동자로 이루어진 사회는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고도로 인종화된 시민/이주민 분할은 정치적 동원을 어렵게 만들고, 파업과 시위는 금지되며 추방으로 처벌된다. 독재적이고 강하게 안보화된 국가들이 이러한 계급구조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며, 동시에 걸프의 자본가계급을 이루는 소수의 거대 기업집단이 그 구조를 떠받치고 있다.[43] 걸프 군주국들의 내부적 안정성은, 왕가 내부의 잦은 파벌 갈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이 사회구조에 의존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걸프 자본주의의 사회관계는 세계적 수준에서 미국 권력의 재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페트로달러 잉여의 경제학이 지닌 이처럼 철저히 정치적인 차원을 밝혀낼 때에만, 현대 금융의 형성 이면에 놓인 지속되는 제국적 윤곽이 드러난다. 화폐 형태의 변화와 유로마켓의 부상, 국제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지위, 앵글로-아메리칸 금융기관의 지배, 부채의 사슬,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통의 부상은 북미와 유럽 중심의 건조한 경제 메커니즘이 자동으로 산출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석유의 지정학과 중동 내 미국의 존재와 분리할 수 없게 얽혀 있었다. 1970년대 새로운 국제 금융체제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적 뿌리들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석유 통제를 사고하는 통상의 방식 또한 바꿀 수 있다. 석유 통제는 단지 영토 권력이나 해외 유전의 소유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석유가 만들어내는 부(wealth)에 대한 통제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 초 영국과 미국 석유기업들이 벌였던 다툼 못지않게,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국의 모험적 기획(imperial venture)의 일부로 남아 있다.
[1] 이러한 구상들에 대한 논의는 다음을 보라. David M. Wight, Oil Money: Middle East Petrodollars and the Transformation of US Empire, 1967–1988,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2020, 특히 3장을 참고하라.
[2] 같은 책.
[3]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SIPRI), Military Expenditure Database, sipri.org.
[4] Leslie M. Pryor, ‘Arms and the Shah’, Foreign Policy 31, 1978 Summer: p. 56–71, 57.
[5] US Government General Accounting Office, ‘Issues Related to U.S. Military Sales and Assistance to Iran’, Department of Defense, Report to Congress, 1974, 38.
[6] Jonathan Nitzan and Shimshon Bichler, ‘The Weapondollar-Petrodollar Coalition’, in The Global Political Economy of Israel, London: Pluto Press, 2002.
[7] 영국 역시 걸프 지역 군대들과 강한 연계를 계속 유지했다. 특히 1971년 영국이 이 지역에서 철수한 뒤 독립한 더 작은 걸프 토후국(sheikhdoms)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이는 특히 바레인(Bahrain), 아랍에미리트(UAE), 오만(Oman)에서 두드러졌다.
[8] 이 전략은 1969년 이른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으로 제도화되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을 보라. Andrew Scott Cooper, The Oil Kings: How the US, Iran and Saudi Arabia Changed the Balance of Power in the Middle East, London: Simon & Schuster, 2011.
[9] 이러한 합의는 처음에는 데이비드 스피로(David Spiro)의 선구적 연구에서 문서화되었고, 이후 2016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US National Archives)에서 공개된 외교 전문들을 통해 다시 확인되었다. 다음을 보라. David Spiro, The Hidden Hand of American Hegemony Petrodollar Recycling and International Markets,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Andrea Wong, ‘The Untold Story behind Saudi Arabia’s 41-Year US Debt Secret’, bloomberg.com, 30 May 2016.
[10] Spiro, The Hidden Hand, p. 112.
[11] 같은 책, p. 110.
[12] 같은 책, p. 122–123.
[13] 국-사우디 관계를 둘러싼 논쟁과 문서 보관소 자료, 그리고 이 회동과 사우디의 달러 전환 결정이 이루어진 ‘우연의 일치’를 명료하게 정리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하라. Duccio Basosi, ‘Oil, Dollars, and US Power in the 1970s: Re-viewing the Connections’, Journal of Energy History/Revue d’Histoire de l’Énergie 3, 28 May 2020, energyhistory.eu.
[14] Congressional Budget Office (CBO), The Effect of OPEC Oil Pricing on Output, Prices, and Exchange Rates in the United States and Other Industrialized Countries, Washington, DC: CBO, 1981, 35.
[15]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만약 석유 가격이 다른 통화로 표시되었다면 주요 산유국들이 자국 투자를 미국 이외의 목적지로 돌리거나, 미국 국채 및 기타 주식 외의 다른 자산으로 이동시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16] IMF 규정상 주요 정책 사안에 관한 표결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85%의 특별다수(supermajority)가 필요하다. 미국은 IMF 투표권의 15% 이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이러한 지위를 가진 유일한 국가다). 1978년 이전에는 특별다수 기준이 70%였으므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상임이사직(executive directorship)을 얻게 되면 미국은 거부권을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비율은 사우디의 참여를 둘러싼 협상의 일부로 85%로 상향되었다. David Spiro는 이것을 사우디의 석유 가격결정과 직접 연결시키지만, 이를 입증하는 결정적 문서 자료는 아직 없다. Spiro, The Hidden Hand, p. 104.
[17] 다음을 보라. Peyman Jafari, ‘Fluid History: Oil Workers and the Iranian Revolution’, in T. Atabaki, E. Bini, and K. Ehsani (eds), Work ing for Oil: Comparative Social Histories of Labor in the Global Oil Industry,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8, 69–98.
[18] 미국-걸프 관계의 주요 전환점 가운데 하나는 20세기 가장 파괴적인 분쟁 중 하나였던 이라크-이란 전쟁(Iraq–Iran War)이었다. 이 전쟁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지속되었고, 최대 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Toby Jones는 이 전쟁이 중동 지역의 군사화(militarisation)에 결정적 단계였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은 이를 ‘유용한 분쟁’으로 보았고, ‘교전 당사자들을 봉쇄하고 따라서 걸프의 다른 지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양측 모두에게 의도적으로 ‘무기, 자금, 정보’를 공급했다고 말한다. 미국은 또한 쿠웨이트 유조선에 대한 해군 보호를 제공하고 그들이 미국 국기를 달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란 군함들과 반복적으로 교전을 벌이는 등 직접적인 당사자이기도 했다. Toby Craig Jones, ‘America, Oil, and War in the Middle East’, Journal of American History 99, no. 1, 2012: 208–18, 215.
[19] 이러한 시장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를 보려면, 다음을 참고하라. Gary Burn, ‘The State, the City and the Euromarkets’, Review of 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 6, no. 2, Summer 1999: 225–61.
[20] Youssef Cassis, Capitals of Capital: A History of International Finance Centres, 1780–2005,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221, 236.
[21] Basosi, ‘Oil, Dollars, and US Power’.
[22] Ernest Mandel, Late Capitalism, London: Verso, 1972, 470.
[23]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Annual Report, 1983, 18.
[24] H. Gibson, The Eurocurrency Markets, Domestic Financial Policy and the International Instability, London: Macmillan, 1989, 242. 1970년대에는 상업은행들이 지배적 대출자였지만, 페트로달러 재순환에서 유로마켓의 역할을 보완하는 다른 메커니즘들도 발전했다. 예를 들어, IMF는 두 개의 ‘오일 퍼실리티’(oil facilities)를 설치하여, 고유가 충격으로 흔들리던 국가들에 OPEC 잉여를 전달했다. 첫 번째는 1974년 6월부터 12월까지, 두 번째는 1975년 4월부터 1976년 3월까지 지속되었다.
[25] 1979년까지 제3세계 전체 부채의 77%는 비양허성(non-concessional) 부채였는데, 이는 1971년의 40%에서 급증한 수치였다. David McLoughlin, ‘The Third World Debt Crisis and the International Financial System’, Student Economic Review, Trinity College Dublin, 1989: 96–101, 97.
[26] Paul Mentre, ‘The Fund, Commercial Banks, and Member Countries’, IMF, 1984, 6. 이들 은행의 다수는 미국과 영국 은행이었으며, 상위 20개 은행 가운데 각각 7개와 4개를 차지했다.
[27] 이 관계의 자세한 역사는 다음을 참고하라. Tony Norfield, The City, London: Verso, 2016.
[28] 영국의 이른바 ‘거미줄’(spider-web)에 대한 논의는 다음 책의 5장을 참고하라. Nicholas Shaxson, Treasure Islands: Tax Havens and the Men Who Stole the Worl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2.
[29] Jeremy Green, ‘Anglo-American Development, the Euromarkets, and the Deeper Origins of Neoliberal Deregulation’, Review of International Studies 42, 2016: 425–49, 428.
[30] 볼커 쇼크(Volcker Shock)와 그것이 미국 권력 형성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전면적 논의는 다음을 보라. Leo Panitch and Sam Gindin, The Making of Global Capitalism: The Political Economy of American Empire, London: Verso, 2012. 엄밀히 말하면, 연방준비은행은 연방기금금리(federal funds rate)를 인상한 것이다. 이는 상업은행들이 초과지준(excess reserves)을 하룻밤 빌릴 때 서로에게 부과하는 금리다(법적으로 상업은행들은 예금의 최소 비율을 연방준비은행에 보유해야 한다). 은행들은 다른 고객들에게 적용할 금리를 보통 연방기금금리보다 약간 높게 설정한다. 볼커가 시행한 조치의 공식 목표는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낮추고 다른 통화들에 대한 달러의 가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미국 국내에서 깊은 경기침체(1980–82)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실업률을 초래했다. 이는 볼커가 명시적으로 의도한 목표이기도 했다. 그는 1979년에 “평균적인 미국인의 생활수준은 하락해야 한다”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S. Rattner, ‘Volcker Asserts US Must Trim Living Standards’, New York Times, 18 October 1979, A1.
[31] McLoughlin, ‘Third World Debt Crisis’, 96. 동구권 국가들, 특히 폴란드와 헝가리 역시 1970년대 내내 서구 은행들로부터 대규모 차입을 하면서 유사한 부채위기에 직면했다. 관련해, 다음을 참고하라. Mazen Labban, Space, Oil and Capital, New York: Routledge, 2008, 106.
[32] BP, Statistical Review of World Energy, 2022. 이 자료에 기초해 계산하였다.
[33] 지난 60년 동안 세계 소비의 연간 감소가 크게 나타난 시기는 추가로 세 번 있었다. 1973–75년에는 석유 소비가 2.2% 감소했고, 2008–09년에는 1.3% 감소했으며, 2019–21년에는 9.1% 감소했다. 관련해, 다음을 참고하라. BP, Statistical Review of World Energy, 2021.
[34] 1973년 OPEC은 세계 생산의 51%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1985년에는 이 비중이 28% 이하로 떨어졌다. Bassam Fattouh, ‘An Anatomy of the Crude Oil Pricing System’, Oxford Institute for Energy Studies, January 2011, 18.
[35] 1978년부터 1984년 사이 석유 생산은 멕시코에서 122%, 영국에서 135%, 소련에서 6.6% 증가했다. 이러한 비OPEC 석유가 가져온 효과 중 특별히 짚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유럽과 북미에서 중동 산유국들의 시장점유율을 잠식했다는 점이다. 새로운 비OPEC 산유국들로부터의 단거리 운송 석유는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오는 장거리 운송 석유보다 더 빠르고 더 저렴하게 운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중동 걸프에서 유럽까지 유조선으로 석유를 운반하는 데는 약 6주가 걸린다). 이러한 긴 운송기간은 특히나 가격 변동성이 클 때 문제가 되었는데, 석유가 구매자에게 도착할 무렵에는 실제 시장가격이 크게 달라져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산유국 정부들이 가격 변동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물시장(spot markets)의 활용을 늘리도록 자극했다. 다음을 참고하라. Jonathan Stern and Adi Imsirovic, ‘A Comparative History of Oil and Gas Markets and Prices: Is 2020 Just an Extreme Cyclical Event or an Acceleration of the Energy Transition?’, Oxford Institute for Energy Studies, April 2020.
[36] 앞선 장들에서 지적했듯이, 독립 정유사의 수가 증가한 것은 부분적으로 소련 석유 수출과 기술 전문성의 효과 때문이었다.
[37] 1979년 이란 혁명은 이러한 전환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슬람 정권은 샤 체제가 전복된 직후 메이저들과 맺고 있던 이란의 장기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Fattouh, ‘An Anatomy’의 17쪽을 참고하라. 또한 1979년 4월부터 1980년 4월까지, 곧 두 번째 오일 쇼크(the second oil shock) 동안 세계 유가가 두 배로 상승한 뒤, 현물시장에서의 유가는 장기계약 가격을 훨씬 상회하게 되었다. 다음을 참고하라. Brian Levy, ‘World Oil Marketing in Transition’, International Organization 36, no. 1, 1982: 113–33, 123. 이는 산유국들이 메이저들과의 장기계약을 종료하고 더 높은 현물가격으로 고객들과 직접 거래하도록 더욱 부추겼다. 구매자 측에서도 많은 석유 소비자들(정부와 정유사 모두)은 중동의 석유 공급에 추가로 차질을 빚을 것을 우려하여, 석유 조달을 메이저에 의존하기보다 산유국 정부와 직접 거래하려 했다.
[38] 중요한 예외가 하나 있었는데, 이른바 ‘아람코 어드밴티지’(Aramco Advantage)였다. 이것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람코 조차권 보유 4개사, 즉 엑슨(Exxon), 모빌(Mobil), 텍사코(Texaco), 셰브런(Chevron) 사이의 관계를 가리킨다. 1979년부터 1981년 사이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양허기업들에게 현물시장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계속 석유를 판매했다. 미국 기업들은 이 석유를 더 낮은 가격으로 자사 해외 정유시설에 내부 이전했고, 그 결과 해당 자회사들은 석유를 정제해 당시의 높은 시장가격으로 판매하면서 수십억 달러의 이익을 얻었다(엑슨의 정유시설은 아람코 어드밴티지 덕분에 1979년부터 1981년 사이 추가로 45억 달러의 이익을 얻었다). 이 이익은 메이저 석유기업의 해외 자회사들이 벌어들인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 국세청(Internal Revenue Service, IRS)의 과세를 회피할 수 있었다. 1991년 IRS는 40억 달러가 넘는 미납세금을 청구하기 위해 엑슨과 텍사코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소송은 석유기업들의 승리로 끝났다.
[39] 유가 폭락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순수입가격(netback prices)이라는 새로운 가격결정 메커니즘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이 시스템 운송·정제 및 기타 비용을 제외한 정제제품 가격을 기준으로 원유 가격을 정하고, 정유사들에게는 보장된 마진을 제공하는 방식을 따랐다. 이 시스템은 대략 1988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무렵 현재의 시장가격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유가 형성의 진화 경로에 대한 포괄적 설명은 다음을 보라. Fattouh, ‘An Anatomy’.
[40] 이 문제에 관한 더 상세한 논의는 다음을 보라. Adam Hanieh, ‘The Commodities Fetish? Financialisation and Finance Capital in the US Oil Industry’, Historical Materialism 29, no. 4, 2023: 70–113
[41] 1980년대와 마찬가지로, 이 관계의 또 하나의 주요 전환점 역시 이라크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체제 하에서 이라크는 1990년대 내내 파괴적인 제재의 대상이 되었고, 2003년에는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직접적인 군사 침공을 겪었다. 2003년 침공과 뒤이은 점령은 이라크 사회의 구조를 파괴했고 수십만 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전쟁은 이라크 석유를 탈취하려는 전쟁이라기보다는 걸프 군주국들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토비 존스(Toby Jones)가 지적하듯, “석유와 유전을 장악하여 석유에 대한 직접적 혹은 제국적 통제를 확립하는 것은 미국의 전쟁 전략 논리에 포함되지 않았다. 실은 석유, 산유국, 그리고 석유의 흐름을 보호하는 것이 그 전략의 일부였다. 이 둘을 구별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Toby Craig Jones, ‘America, Oil and War’, 217.
[42] 걸프 군주국들에 대한 마지막 주요 위협은 도파르 반란(Dhofar rebellion)이었다. 이는 걸프 국가 중 하나인 오만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창하며 일어난 좌익 반란으로, 강한 세력을 갖추고 1963년부터 1976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반란은 아라비아반도 전역의 다양한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 운동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나, 결국 (미국제 헬리콥터 및 기타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과 이란군의 지원을 받은 오만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다음을 참고하라. Abdel Razzaq Takriti, Monsoon Revolution: Republicans, Sultans, and Empires in Oman, 1965–76,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43] 이 과정들, 특히 걸프의 이주 문제에 대한 분석은 다음을 참고하라. Adam Hanieh, Capitalism and Class in the Gulf Arab States,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1; and Adam Hanieh, Money, Markets, and Monarchies: The Gulf Cooperation Council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Contemporary Middle Eas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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