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기계들”과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문학 (2부)
저자: 발레리 포도로가 (러시아학술원 철학연구소)
번역: 김수환 (한국외대)
기계들의 퍼레이드
플라토노프의 작품(특히 20대와 30년대)에 등장하는 수많은 기계는 위치, 기능, 매개변수 등의 측면에서 각기 상이하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단일한 상상적 뿌리에서 비롯되어 서로를 반영하고 서로를 산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토노프의 기계에 관한 아래의 개요는 기계 감각이라 부를 수 있는 그의 문학적 실험의 발전 단계에 따라 구성되었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기계 미메시스의 일련의 이미지 차원이다.
기계 찬가. 첫째, 이것은 기계들의 시다. 기계들이 울부짖고 삐걱거리고 때리고 찢어진다. 고통과 고문을 거쳐 새로운 신체적 이미지를 향해 가는 이 끔찍한 희생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환희(기계를 향한 선망과 집단 거세의 공포).
둘째, 기계 감각은 기관차에 대한 플라토노프의 부성애적 숭배에서 멋지게 전개된다. 기계 토테미즘 현상(레비스트로스 2008)이 여기서 발생한다. 각각의 기계들은 온전히 전유되고 인간적 차원에 맞게 조정되어 특별한 기술적 대상들로 변모한다. 그것들의 배후에 있는 마법적 힘을 인식할 때에만 그 대상들을 조종할 수 있다.
셋째, 기계 감각은 더 나아가 기술적 상상력의 폭발에 스스로를 종속시킨다. 발명가이자 시인, 개량가이자 측량가, 지리학자이자 지질학자, 에너지학자이자 지휘자였던 플라토노프가 쓴 장단편 소설들에는 에테르 혹은 광선 기계가 전면에 등장한다 (전자기공진기 1의 발명). 바로 이 세 번째 차원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존 투쟁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킬 사명을 띤 위대한 기계를 보게 된다. 인간의 자연적 실존은 변형될 필요가 있다. 기계의 모방적이고 동물-토템적인 감각은 신체적으로 분열되어 원자화된 상태로 자기 파괴의 덫에 빠지게 된다. 이런 종류의 기계는 물질의 가장 깊은 지층에 도달하여 지구와 인간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면서 물질의 탄생과 에너지를 통제하게 된다. 전세계적인 황폐화의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자율적 창작을 통해 자연을 “부드럽고”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지향은 위의 [세 번째] 차원과 대립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작동하지 않는 기계”(들뢰즈, 가타리 2007)라고 명명했던 온갖 종류의 수공예-기계들이 발명된다. 2 유례없는 미래의 기술적 기계들을 위한 이상한 배아 형태들.
실험은 (기계 감각의 네 번째 차원으로) 더 나아간다. 플라토노프는 그의 주인공들을 통해 전혀 다른 종류의 기계, 보조 기술 장치나 에너지를 아예 필요로 하지 않는 기계를 시험한다. 기계 감각은 그 자체의 원천을 향해 방향을 튼다. 향후 자연을 지배할 수 있게 만들어줄 단초가 인간의 뇌 속에서 찾아진다. [인간의] 생각 자체가 우주의 에테르(전자기)장의 리듬을 습득함으로써 가장 위대한 기계가 되는 것이다. 가장 미약한 정신의 긴장만으로도 인간이 별의 움직임을 멈추고, 혜성의 궤적을 바꾸며, 환경, 노동 조건 및 자신의 본성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다.
1) 동력기 찬가. 증기기관사의 아들이었던 플라토노프는 기계를 열정적으로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발명가였다. 1920년대 플라토노프의 산문과 시는 미래의 기계 문명을 향한 마법 같은 숭배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인간과 기계가 하나의 이미지로 합쳐져 혁명적 세기의 상징이 되었다. 아래의 찬가들을 보자.
기계의 노예들
소란스럽다! 윙윙거린다! 하루 종일 타오르는
작업장의 연기와 먼지
기계의 순종적인 노예들
팔과 등을 구부린 채
그들은 먼지를 삼키며 몇 시간이고 보낸다.
그리고 기계 위로 고개를 숙인 채
줄줄이 피가 흩뿌려져 있다,
기억을 잃어버린 얼굴로 선 그는
그림자나 시체처럼 보인다,
손이 짓이겨진 노예처럼.
이윽고 갑자기 그가 쓰러졌다. 그의 손이 떨렸다,
기계의 호루라기 소리가 멈췄고
사방에서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어,
그 안에서 고통과 생명이 꺼져갔다.
(플라토노프 2004a[1918]: 348)
동력기
음소거된 금속의 심연의 노래,
고요하고 긴 울림.
철에서 힘이 솟아올랐다,
백만 개의 파도로 숨을 쉬며
신비한 우물에서
차의 혹 위로, 노래와 함께.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곳에서 시냇물이 솟구친다.
붉고 뜨거운 피가 맹공격으로 혈관을 따라 뛰놀고 있다!
흔들리는 벨트의 날개 아래서 바람이 불어온다,
내 동료는 조절기를 끝까지 돌려버린다.
우린 밤까지, 죽을 때까지, 차 안에서, 그것과 함께 할거야,
우린 기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고 태어난 그대로 죽는 거야
철의 얼굴 앞에서
우리의 손은 전류의 조절기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숨 쉬고 있다.
영혼 없이, 신도 없이, 기한도 없이 우리는 일한다,
전기 불꽃은 우리에게 다른 삶을 들이부었다.
하늘도 없고, 신비도 없고, 죽음도 없다,
저 위에는 굴뚝과 연기가.
우리는 아버지이자 자식이다.
우리는 폭파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겁먹은 채 살고, 낳고, 사랑했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를 만들었고, 철을 살아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신의 영혼을 죽였어.
그리고 우리는 낡은 피부를 벗겨내고
그리고 우리는 일하려 발전기에서 떨쳐 일어났지,
영원성을 잊었고, 별들은 우리 곁에 없고 우리도 아니지.
검게 그을린 손으로
우리는 어둠 속에서 의미를 만들 것이다.
(플라노토프, 2004a [1920]: 334)
최후의 발걸음
비명을 지르며 산산이 부서진 우주에서.
세계는 노동의 손길로 찢겨졌다.
우리는 마감 시간 전에 왔고, 알림 부저도 없는 우리는 즐거운 교대조다,
모든 시간은 지하로, 잊힌 시대로 흘러갔다.
그리고 태양이 더 가까이 비추면 모든 곳, 모든 곳이, 우리의 집이다,
그리고 당신은 내 친구이자 형제, 그녀는 나의 여동생, 내 여동생이다.
지구는 철로 된 기계. 천둥이 전선을 타고 기계로 흐른다.
우리는 웃고, 아침부터 아침까지 사랑을 다시 이야기하지 않는다.
죽음과 무덤을 통해 우리는 불멸을 얻어낼 것이다,
천상의 얼굴은 우리 눈으로부터 결코 숨겨지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심오한 비밀의 힘으로 불타오른다,
일은 우리의 아버지다. 우리는 아버지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고요해질 것이다. 우리는 한계까지 나아갈 것이다,
아무 곳에도, 그 누구도 없다. 기계의 동지들이 하늘을 뚫을 것이다.
별은 땅으로 날아가고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눈은 영원히 생각에 잠긴다.
죽음으로 쓰러진 자들 모두가, 우리 안에 살고 있다,
밤에 도시에서 쓰러진 사람들,
무덤에서 침묵하는 아이들.
우리는 파괴하는 최후의 발걸음이다.
(플라토노프 2004a [1920–21]: 397)
위의 찬가들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플라토노프가 기계의 세계를 양면적이고 강렬한 비극적 감정으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 기계는 인간을 무력하게 불구화하고 신체를 개조하며 생명을 앗아가는, 보편적 재앙의 가장 가까운 전령이자 묵시록적 서사의 영웅이다. 인간은 ‘작동하는 부품’이 됨으로써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권이 부재한 자동기계로 전락하면서 기계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계 없이는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이 만들어질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인류의 근본적인 재탄생이 요구된다. 시인은 현대 세계의 기계성을 매우 폭넓게 느끼고 있다. 그의 시 자체가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기계에 해당한다.
모든 새로운 기계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시다. 인간을 위해 자연을 바꾸려는 모든 새로운 위대한 과업은 정확하고 감동적인 프롤레타리아 산문이다. 우리 예술의 가장 큰 위험은 창조적 노동이 노동에 관한 노래로 변질돼버린다는데 있다. 전기화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소설이자 우리의 위대한 철로 만든 책이다. 기계는 우리의 시이며, 기계의 창조성은 프롤레타리아 시의 시작이며, 이는 인간을 위한, 우주에 대항하는 인간의 반란이다. (플라토노프 2004b: 167). 3
자연의 물질이자 모든 프롤레타리아 시의 조직화 원리로서의 기계.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기계라는 것, 우리 주변에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기계의 허리케인 리듬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프롤레타리아의 마음속에서 기계는 새로운 세계의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2) 기관차 토템. 인간의 실존 및 일상의 기계화를 향한 프롤레트쿨트(Proletkult) 이론가들의 관심은 오래된 토템주의의 형식을 갱신한 것과 다르지 않다. 문명의 온갖 기술적 사물들, 기계, 기구, 장치가 토템의 자격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동력기, 펌프, 자동차, 오토바이, 기관차, 전자기공진기, “에테르 통로” 따위가 그것들이다. (기계)토템은 그것에 운명을 위탁한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힘을 부여받은 사물들이다. 플라토노프의 주인공들의 토템이나 마술적 관행은 삶의 노동 경제에 관한 아이디어에 완벽히 조응하며,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제한하지 않는다. 인간과 기계가 접촉하는 첫 번째 장면은 기계의 마법적인 영성화, 즉 신체가 기계-몸이 되면서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기계주의의 자연적 요소로서의 기계-짐승이 될 터인데, 결과적으로 인간 신체의 변형인 것이다. 우리는 플라토노프에게서 “기계 메커니즘을 마치 자기 몸처럼 정밀하게 느끼는”(플라토노프 2011b: 413-414) 인물들을 넘치도록 발견할 수 있다. “프로시아의 남편은 전류의 전압을 마치 자신의 열정마냥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자신의 손이나 마음이 건드리는 모든 것을 활성화시켰고, 그렇게 모든 기계 장치에서 힘의 흐름에 관한 진정한 개념을 이해했고 기계적 신체인 금속의 고통스럽고 참을성 있는 저항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플라토노프 2011b: 413-414).” 혹은 “그가 기계들을 사랑했던 이유는 그가 그것들을 살아있는 것처럼, 즉 살아난 죽은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철의 부활이며 인간과 더불어 모든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온전히 살아있는 세계, 미래의 이미지(플라토노프 2000: 240). 혹은 “조보프는 주철을 자기 살결처럼, 자신의 육체보다 더 극진히 여겼다(플라토노프 2000: 106).” 그런가 하면 이런 것도 있다. 4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기관차에서 눈을 떼지 않았으며, 조용히 기관차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체험했다. 그는 볼트와 낡은 밸브, 파이프 등과 같은 기계 부품들을 자기 숙소로 많이 가지고 왔다. 그는 탁자 위에 줄을 세워 그것들을 쌓아 올렸고, 결코 외로움도 타지 않으면서 그것을 바라보는데 열중했다.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고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계들이 바로 그에게는 사람이었고, 그의 안에서 계속 감각과 사상, 욕망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코일이라고 불리는 전방 기관차 축은 자하르 파블로비치가 공간의 무한성에 대해 걱정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밤마다 일부러 별들을 바라보러 나갔다. 세상은 과연 무한한가, 바퀴가 영원히 살아가고 굴러가기에 공간은 충분한가? (플라토노프 2001a: 41; 『체벤구르』 62-63쪽)
스승은 인간의 지혜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기계 스스로의 희망에 따라서 기계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여기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반대로 자연과 에너지, 금속의 선함은 사람들을 망친다. 어떤 바보 같은 인간이라도 화로에 불을 지피기만 하면, 기관차는 스스로 앞으로 달려갈 것이다. 이제 바보 같은 인간은 다만 집이 될 따름이다. 만약 기계가 탄력을 받아 순종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사람은 자신의 의심스러운 성공 때문에 퇴화되어 녹슬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때 작업 능력이 있는 기관차로 인간들을 압박해 버리고, 이 세상에 스스로 살 수 있는 자유를 기계들에게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토노프 2011a: 42; 『체벤구르』 64쪽)
이런 종류의 사례는 얼마든지 더 열거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기계와의 최초의 마법적 접촉은 인간의 몸과 기계의 몸이 융합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이는 대체라기보다는 기계적 형태 속에 인간적인 것이 구현되는 것에 해당한다. 기계는 인간과 동등해지고 인간을 뛰어넘는 법을 배우며 미래의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혁명은 기관차와 같다. 그리고 혁명가는 기관사가 되어야만 한다.”(플라토노프, 필냐크 1928: 258). 소설 『아름답고 광포한 세계에서』의 기관사 말체프나 『비밀스러운 인간』의 주인공 푸호프가 바로 그런 유형의 인간이다. 요컨대 기계-기관차는 “따뜻한 동물”이 된다. “기관차는 높고 장엄한 몸체의 조화로운 물결 속에서 웅장하고 거대하며 따뜻하게 서 있었다. 기관사’는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무의식적인 경외감을 느끼며 집중했다.”(플라토노프 2011a: 43) 기계의 도입은 인간 존재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주는 바, 기계가 곧 새로운 자연이 된다. 기계-짐승, 짐승-기계인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은 자신의 기계 감각을 짐승과도 같은(즉 동물-자연적인) 미메시스로 변형시킴으로써 그 자체로 기계를 길들인다.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자연 현상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인간적인 것 자체가 전체로서의 기계의 일부임이 밝혀진다. 아예 기계가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이것은 달성될 수 없는 불가능한 행복이다) 부분일지언정 기계의 힘과 아름다움에 속하려는 욕망, 될 수 있는 한 최상의 존재에 속하려는 욕망이 생겨난다. 살아있는 “유기체”의 부분이 전체로서의 기계가 되고자 열렬히 소망한다. 플라토노프의 아토피아에서 기계들에 의해 대체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기술 장치와 인간 육체가 결합된 이런 특별한 종류의 생물학적 혼성체에 해당하는게 바로 기관차다. 집단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코틀로반』의 망치 곰이 전혀 신비로울 게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플라토노프 2011a). 5 그것은 동-식물 계열의 기계 메타포(이것이 바로 가축화인데)가 “기계 길들이기”로 형성되는 방식이다. 세계의 문학적 기계화의 원인은 타자가 되려는 욕망에 기인한다. 이는 모종의 정동적 상태에 도달하려는 것으로, 다양한 기술적 대상, 형태, 구조물을 통해 세계로 투사된다. 그것들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기술 진보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개별화되며(즉, 사회적 맥락에서 벗어나며) 미래의 현실이 결속된 환상적 기계가 된다. 플라토노프의 기계는 아방가르드 기계주의의 유형에 속한다. 즉 그것들 모두는 정동적(미메시스적) 장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6
- [옮긴이주] 전자기공진기(the electromagnetic resonator)란 전자기 에너지를 특정한 공진주파수에서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진동시키는 장치를 가리킨다. 철도기술자의 11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플라토노프는 10대 시절 영구구동장치를 만들려고 시도한 것을 포함해 평생 동안 이런저런 기술적 발명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전기 저울을 발명해 받은 상금으로 한동안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역시 각종 발명품을 고안한 바 있는데, 기관차에 구동 실린더를 부착하는 과정을 단순화시킨 장치로 국가 특허를 받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청년기 플라토노프 사상의 결정적 전환을 불러온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21년 가뭄으로 인한 대기근이었다. 프롤레트쿨트 문화운동의 수혜자로서 보로네시 지역 신문에 글을 기고하던 신참 작가 플라토노프는 광포한 자연의 힘 아래 참혹하게 무너져 내리는 세계의 비참을 목도한 후로 예술이 아닌 (실천적) 활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제부터 우리의 슬픔과 불타는 영혼은 예술의 형태가 아니라 물질을 변화시키고 이 세계를 바꾸는 작업의 형태 속에서 식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삶의 우선순위를 예술이 아닌 가뭄과의 투쟁, 즉 관개와 토지 개량 작업에 두었다. 지역토지관리국 보로네시 지부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1926년 봄까지 총 763개의 연못과 331개의 우물을 굴착했으며, 약 20000 에이커가 넘는 땅을 배수하고, 교량과 댐, 전력 스테이션을 건설했다. Seifrid, Thomas, Andrei Platonov: Uncertainties of Spirit (Cambridge, UK: C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6-7. [본문으로]
- [옮긴이주] 들뢰즈-가타리(안티-오이디푸스)에 따르면, 고장이 나지 않았을 때 제대로 작동하는 기술적technical 기계와 구별되는 ‘욕망하는 기계’는 작동하면서 계속 고장이 나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에만when they don't work 온전히 작동하게 된다. 그들에 따르면, 종종 이런 속성을 이용하는 욕망기계로서의 예술은 욕망하는 생산이 사회적 생산을 단락short-cut시키고 기능장애 요소를 도입하여 기술적 기계의 재생산 기능을 방해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진정한 집단적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을 지닌다. [본문으로]
- “그리고 나는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시인, 이미 자신의 노래의 철의 왕관을 짜고 있는 그 시인을 위한 회합을 제안한다. 그의 이름은 기계다. 이 기계는 볼가의 러시아 민중들처럼, 세상을 씹어서 슬픔으로부터 흥겨운 노래를 짓는다. 다만 그 노래 소리는 떨리는 말들이 아니라 변화된 세상, 춤추는 우주이다. 나는 우리의, 그리고 나의 동지인 시인-기계를 위한 회합을 열 것을 제안한다. 내가 연사로 나설 것이다” (플라토노프 2004b : 178-79). [본문으로]
- “에베스코의 다이아나는 동양의 다른 여신들이 그렇듯이 아름다움 때문에 숭배된 것이 아니다. 다이애나를 여신으로 만든 것은 힘이었다. 그녀는 모든 에너지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신비한 에너지인 생동하는 발전기, 동력기, 종족의 번식자였다. 그녀에게 요구된 것은 오로지 다산이었다.” 이 글은 헨리 애덤스의 유명한 작품인 『동력기와 성모 마리아』에서 발췌한 것이다. 애덤스는 1900년 만국박람회에서 성모 마리아 옆에 전시된 동력기를 번식의 여신과 비교하면서, 최초의 산업 혁명에 깃든 마술적 숭배에 관해 성찰했다 (아담스 1988: 459). [본문으로]
- [옮긴이 주] 『코틀로반』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곰-인간 캐릭터를 말한다. 플라토노프 특유의 환상적 리얼리티 혹은 “초현실주의의 고전적 형식”(조세프 브로드스키)에 해당하는 이 캐릭터는 “뒷발을 딛고 걸어 다니는” 진짜 곰인데, 시골 마을의 대장간에서 열성적으로 일하는 노동역군이면서 부농척결에 적극 가담하는 주역으로 등장한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 해체가 아무런 동기화 장치도 없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데, 어린 소녀 나스차는 “동물들 역시 노동계급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들어”하며, 곰은 “어린 시절 엄마 품에서 함께 잠을 자곤 했던 잃어버린 누이를 바라보듯이 나스차를 바라본다.” 나스차는 곰-인간에게 계급의 적인 부농-파리를 짓뭉개서 퇴치하라고 말하는데(“그것[파리]을 하나의 계급으로서 죽여버려!”), 곰은 실제 부농의 몸을 파리를 짓이기듯 파괴한다(“곰은 힘차게 꽉 짓누르며 부농의 몸을 껴안았다. 그리하여 부농의 몸에서는 두꺼운 기름기와 땀이 흘러나왔다”). 플라토노프 특유의 이런 환상적 리얼리즘 스타일을 가리켜 플라노토프 연구자 올가 메이예르슨은 (쉬클롭스키의 낯설게하기ostranenie 개념을 변형해) “낯설게하지않기(neostranenie)”라고 칭한 바 있다. [본문으로]
-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꽤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원시 사회의 토템주의에 관한 논쟁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사회적 객관주의(구조적 방법)의 입장을 취했다. 그가 주장하기를, 정동은 토템 신앙의 원인이 될 수 없으며,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피상적인 수반 현상에 불과하다. “정동은 인간의 가장 불분명한 측면이다. 그 자체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잊은 채로 끊임없이 그에 의거해 설명을 해보려 시도해 왔을 뿐이다. 데이터는 일차적인 것이 아니다. 만일 설명이 존재한다면 다른 차원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최악의 경우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으며 그것에 또 다른 라벨을 붙이는 것으로 만족하게 될 뿐이다.”(레비스트로스 2008: 98). 이어서 그는 완전히 정당하게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만약 제도와 관습이 원래 그것을 구성했던 것과 유사한 개인의 정서를 끊임없이 새로 고치고 강화함으로써 활력을 얻게 된다면, 그것들은 긍정적인 내용이 될 법한 끝없이 샘솟는 정서적 풍요로움을 자신 안에 담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지속적인 견고함은 대개 전통적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레비스트로스 2008: 99). 이와 대조적으로 플라토노프의 문학적 기계론은 정동적이다. 나아가 (뤼시앙 레비-브륄의 ‘참여’나 에밀 뒤르켐의 ‘그래픽적 본능’의 한 형태로 간주될만한) 이런 공감은 그에게 현실 세계와 접촉하는 유일한 형태이자 본질적으로 완전한 회화적 이미지로 남아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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