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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기계들”과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문학 (1부)

by 인-무브 2025. 7. 20.

“혁명적 기계들”과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문학 (1부)

 

  

저자:  발레리 포도로가 (러시아학술원 철학연구소) 

번역: 김수환 (한국외대)

 

- 요약 -
 
이 글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저작의 핵심 중 하나인 기계의 테마를 고찰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인 기계가 아니라 혁명적인 기계, 그것의 목적이 삶과 자연, 그리고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에 놓인 기계다. 그런데 이 변화는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가? 유토피아와 안티유토피아 중 어느 일방으로 분류될 수 없는 플라토노프의 아방가르드적 성찰의 배후에 놓인 혁명의 개념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유토피아와 안티유토피아는 공히 미래와 관련을 맺고 있지만, 플라토노프의 기계가 무대에 오를 때 그 시간은 미래와도 현재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혁명적 시간, 자연이 황폐화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완결된 행성적 재앙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혁명적 시간의 주체성을 구현하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 에너지를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기계인 것이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기계의 발명가

 

기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기계는 인간 노동의 최초이자 최후의 기적이다. 기계는 노동에 의해 창조되며 노동을 창조한다. 기계는 우리의 형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등한, 경이롭고 정밀한 살아있는 인간의 형상이다. 기계는 종종 인간보다 더 우월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타락을 증명하는 순전히 자연스러운 징후, 이를테면 피로와 작업 중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곧 마모도 잊게 될 것이다) (플라토노프 2004b: 40).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우연히 무선 에너지의 전송 원리를 발견했소. 하지만 그건 단지 원리일 뿐 실현은 아직 요원하지. 시간이 나면 과학 저널에 게재할 논문을 써보려 하오(플라토노프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쓰인 플라토노프의 소설들은 흔히 안티유토피아 장르로 분류되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내가 보기에 그런 주장은 별로 정확하지 않다. 안티유토피아는 그 정의상 유토피아와 다르지 않다. 둘 모두(부정적 의미의 안티유토피아든 긍정적 의미의 유토피아든 간에) 미래를 시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세계, 곧 ‘과도기적’ 세계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바로 거기에 유토피아주의의 요체가 담겨있는 바, 실험의 목적이 오로지 미래의 기획(project)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토노프의 작품은 전혀 그런 것을 담고 있지 않다. 거기에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소설의 행위가 발생하는 특정 시간을 할당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미래의 시간도 과거의 시간도 아니다. 위대한 혁명의 시기라고 부를 법한 이 시간에 관해 알려진 것은 단지 하나 뿐이다. 그것이 시간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을 실존적 시간성의 차원에서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코틀로반(구덩이)’과 ‘체벤구르’라는 명칭 뒤에서 특정한 장소(-토포스)를 보고자 한다면 재차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토노프의 문학에는 완결된 시간과 무관하게 정의될 수 있는 그 어떤 장소도 없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끝나버린 시간, 곧 종말론적 시간은 시간 이후의 시간, 인간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모든 장소가 파괴되어버린 시간, 모든 것이 얼어붙어 세계의 침묵과 정적 속에 빠져버린 시간이다. 거기에 더는 미래가 없다. 그것은 현재가 되었다. 

삶이 그 안에서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정의를 획득하는 공간적 형식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계를 벗어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형이상학자이자 태양 숭배자인 플라토노프에 따르면, 태양은 무한한 에너지의 보고다. 

 

생명은 태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태양의 물리적 후예다. 생명이란 태양광에 의해 운반되는 것으로서, 사실상 물리적 의미에서 빛과 다르지 않다.

 

 좀 더 내려가면, 

 

최근 학설에 따르면 우주 자체는 빛이 교류하는 전자기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와 유사한 전자기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빛의 공간은 생명의 세례당이다. 모든 행성에서 생명은 빛으로부터 창조되는 바, 빛으로 연명하고 빛으로 재생된다 (플라토노프2004a: 188-89). 

 

플라토노프는 생명을 자연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생명은 무언가 진정으로 비인간동형적인 것으로, 그것 안에는 모든 다른 생명을 위한 여분의 공간이 숨겨져 있다. 생명은 박멸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그러하다면, 모든 사회 혁명의 의미는 단기적이고 유한한 목표가 아니라 우주(자연)의 모든 물질을 재구성한 이후에 그것을 기반으로 사회를 재구성하는 일에 놓여있다. 이것이 플라토노프가 도달한 궁극적 결론이다.

 

우주에 생명이 적응할 수 없는 조건이란 없다. 조건이 치명적이고 재앙적인 경우에 생명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아질 때까지 단순화된다. 그렇게 자체 안정성과 지구력을 높여 생존하는 것이다. 아마도 원자나 원자의 원자인 전자 역시 지극히 원초적인 유형의 미생물에 불과할 텐데, 그렇기에 그것들은 우주의 모든 조건을 견뎌낼 수 있다. 조건이 좋아지면 어떻게든 합쳐지고 더 복잡해지고 관계들로 진입한다. 하지만 이 조건들이 악화될 때 그것들은 구축했던 것들을 해체하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 가장 단순한 최소 구조이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 구조인 전자로 퇴행하게 되며, 파괴적인 물질(요소)들은 작동할 수 있는 극히 작고 좁은 공간으로만 남게 된다. (플라토노프 2004a: 187-88). 

 

이것은 역사가 아니라 자연의 노선이다(“우리는 자연의 힘입니다.”라고 체벤구르의 코푠킨은 말한다). 그것은 지구의 풍경을 모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우주적인 운동을 가리킨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은 자연이 스스로에게로 돌아가는 움직임, 역사가 된 자연의 움직임이다. 역사는 자연의 힘에 용해되어 스스로를 비우고, 보이지 않는 생명으로 물러난다. 

 

이렇듯 자연이 아니라 역사가 –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역시 - 우리 사유의 열정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먼 곳을 향한 시선, 완결되지 못한 운명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시간이고, 시간은 실현되지 않은 공간, 즉 미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연은 과거, 굳어진 것, 공간의 형태로 고정된 시간이다. 역사는 우리의 운명이며, 운명은 우리 힘의 지표이자 우리의 목표와 끝, 혹은 또 다른 무한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이기 때문에, 우리가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은 오로지 역사뿐이다. 우리에게 역사는 시간의 축소이자 우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과정이다. 자연은 완결된 시간이다. 완결된 이유는 그것이 멈췄기 때문이다. 멈춘 시간이란 공간, 자연의 속성, 말하자면 생명도 신비도 포함하지 않는 죽어버린 얼굴이다. 돌 스핑크스는 수수께끼의 부재에 겁을 먹는다(운명을 가진 것만이 신비롭다. 자연에는 운명이 없다). 그러나 인류가 살아가는 곳은 공간(자연)도 아니고 역사(미래 시간)도 아닌, 시간이 공간으로 변하고 자연이 역사로 만들어지는 그 사이 지대이다. 결국 시간과 공간 모두는 인간적 속성에 이질적인 바, 인류는 시간과 공간의 연결 고리에서 제3의 형태로 살아가면서 포효하는 불타는 용암, 곧 시간을 자신 속에 통과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 불타는 혼돈이 토네이도 소용돌이처럼 솟아오르는 곳을 향해 뒤를 흘끗 돌아보며 무력하게 붕괴한다. 자유와 전능함이 무능함과 한계로 변해버린다. 공간, 자연, 의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플라토노프 2011e: 43-44). 

 

인류의 역사는 그에 의한 자연의 살해인 바, 인간 주변에 자연이 적을수록 인간은 더 인간적이 되고, 그의 이름은 더 의미심장해진다 (플라토노프 2004a: 226). 

 

다른 모든 것을 소진시키는 기술의 첫 번째 계명은 이렇게 말한다. 그 자체로서의 자연을 파괴하라, 그리고 그 혼돈으로부터 스스로의 또 다른 인간적 자연을 창조하라, 그렇지 않으면 자연이 너를 파괴할지니(플라토노프 2004b: 192).[i]

 

이와 같은 아방가르드적인 성찰의 섹션에서 플라토노프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혁명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재앙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토노프의 모든 대표작들은 어떤 형태로든 혁명 이후의 사회, 지금껏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던 유대가 텔루르적인 재앙의 결과로 해체되고 재형성되는 공간을 그린다. 플라토노프는 탈역사적(ahistorical)이다. 혹은 약간 다르게 말해 그는 더 이상 인간적 시간이 필요치 않은 공간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공허(пустота;emptiness)를 증대시켜서 인간 속에서 최종적 신진대사를 향한 결정적 역량을 일깨운다. 그 신진대사란  소멸을 향한 이끌림, 가시적 세계로부터 비가시적 세계로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이동하려는 운동이다. 자연이 되살아나 스스로가 되려할 때 자연은 그렇게 될 수 있다. 인간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 다시금 비역사적인 자연적 존재가 되어 동물, 식물, 햇빛처럼 그저 세상 속에 존재하는 길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모든 것(열정, 고통, 희망, 사랑)을 자연스럽게 괄호로 묶은 인간-기계가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반 위에서 자연을 재창조하는 기능은 역사의 새로운 주체인 기계에게 부여된다. 그렇게 해서 자연(, )으로부터 역사로, 그 다음엔 다시 역사로부터 새롭게 재개된 “재창조된” 자연(, 친구)으로 전환되는 순환의 일관성이이번에는 기계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ii]

 

여기서 두 가지를 구분해야만 한다. 가시적 파괴로서의 폐허와 원자화된 잔해가 그것이다. 후자는 사물의 먼지, 즉 보이지 않는 물질에 해당한다. 바로크 시학의 감정가인 발터 벤야민은 [전자인] 폐허에 대한 공식을 제시한 바 있다. 성스러운 역사의 시간적 흐름이 자연의 공간으로 떨어질 때(, 낙하가 일어난 곳에서) 기괴한 폐허의 질서가 만들어진다(벤야민 2002:185-190). 플라토노프의 황량한 공간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곳에서 시간적인 것이 공간적인 것으로 추락하는 일, 대문자 역사가 대문자 자연으로 추락하는 것은 무한한 과정이다. 조각은 더 작은 조각으로 부서지고, 그 조각은 다시 더 작은 조각으로 부서져, 대초원과 사막의 먼지가 된다. 플라토노프에게서 역사적 시간의 종말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폐허가 아니라 먼지다. 세계 시간의 역방향의 움직임 속에서, 죽음과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영원한 존재의 연속체를 형성해내는 것이 바로 이 먼지다. 이 먼지야말로 생명의 가장 미세한 잔해,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는 어떤 것이다. 플라토노프에게 폐허는 존재의 다른 모든 결과와 능력을 이끌어내는 보편적 실존이다. 빈 서판 위에서의 시작, 파국 이후의 시간은 새로운 인간들의 시간이다.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매우 제한된 운동 반사의 세트만을 갖는 일련의 형상들에 불과한 그것은 심지어 공간에 자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유동적인 구성 형태, 그래픽적인 스케치, 윤곽선, 벽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바로 그것들이 집요한 작가적 자의식, 모든 것을 지배하는 부정적 어조인 황폐화의 어조를 배경으로 출현한다. 플라토노프의 아토피아 세계에는 인간이 없고, 인구가 없으며, 익숙하고 안정적인 것이 없다. 그것은 공허함과 정막, 모든 것과 모든 이의 황폐함이 지배하는 장소다. 하지만 어째서? 대체 무엇을 위함인까? 아마도 그에 대한 대답은 니콜라이 표도로프에게서 찾아야만 할 것 같다. 그것은 다른 세계, 오직 과학적 사유를 통해서만, 그러니까 죽음을 가져오는 자연에 저항할 수 있는 위대한 생명 기계의 발명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다.[iii] 플라토노프는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문학과 예술 발전의 아방가르드 시대에 자명해 보였던 것을 끝까지 밀어붙여 사고했을 뿐이다. 혁명은 총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인간을 대체할 미래의 인간이 [지금 모습] 그대로일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혁명’을 일으킨 모든 사람들은 역사적 무대에서 퇴장해야만 한다. 자연은 인간이라는 중재, 그가 만든 “허구의” 역사를 우회하여 스스로에게 되돌아간다. 경계의 끝자락까지 간다. 오로지 죽기 위해서 간다. 플라토노프의 파국 경험은 파국 이후의 세 가지 실존으로 존재하는 관계의 질서에 의해 정의된다. 첫째, (세계의) 황폐화devastation опустошение, 둘째, (신체의) 탈진emanciation истощение, 셋째, (영혼의) 우울boredom тоска과 권태ennui скукой가 그것들이다. 바로 이것이 체벤구르의 혁명적 시간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플라토노프식 우화의 결론이다.[iv]

 


[i] [옮긴이 주] ‘자연’의 본질과 그것이 인간/비인간(기계와 동식물) 및 역사와 맺는 관련성의 문제는 플라토노프의 창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다. 흔히 ‘프로메테우스적 시기’로 불리곤 하는 1920년대 초중반까지의 플라토노프의 자연관을 드러내는 위 인용문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자연과 의식, 자연과 역사의 대립관계다. 이 시기의 한 기사문에서 플라토노프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연은 백군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면서 “부르주아는 강아지에 불과한 바, 진짜 적은 어리석고 눈먼 시인들이 여전히 칭송하며 노래하고 있는 자연, 우주다”라고 적었다. 보그다노프와 표도로프의 현저한 영향권 아래 놓여있던 이 시기의 플라토노프에게 기술은 이성과 과학의 결정체이자 자연과의 투쟁을 위한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언뜻 전형적인 기술낙관주의로 보일 법한 입장에서조차 플라토노프 특유의 유토피아적 과잉을 읽을 수 있으며(가령, 본질상 자본주의적 에너지 형태인 석탄과 철을 사회주의식 재생에너지가 대체해야한다는 주장, 특히 행성적 풍요의 원천이자 (무차별적인 희생을 통해) 무한한 민주적 자원을 제공하는 태양(에너지)을 향한 강렬한 집착과 희망 같은), 더욱 중요하게는 그의 입장이 1930년대 들어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변화의 요체는 자연의 ‘인색함’과 ‘가혹한 배열’을 특징으로 하는 자연과 인간 세계의 대사균형(metabolic balance)을 둘러싼 사유에 놓여 있는데, 사회와 자연 전체의 빈곤상태(“가난한 삶”)로부터의 해방, 행성적 차원에서 착취와 고통에 시달리는 생명체 전부를 포괄하는 보편생태학적 전망을 향한 움직임은 이 변화와 더불어 가능해졌다. 포도로가의 본 논문은 이런 변화 이전의 플라토노프를 주로 다루고 있다.       

[ii] 소위 현대 과학과 플라토노프 문학에서 그것을 “이해”한 것 사이의 모호한 경계는 충격적이다. 오늘날 표도로프, 플로렌스키, 베르나드스키의 사유들은 전기공학, 기계이론, 일반 자연이론 분야와 관련된 플라토노프의 아이디어에 붙인 주석으로 밝혀졌다.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인간 정신과 관련된 1920년대의 최신 업적들을 향한 플라토노프의 감출 수 없는 경탄이 있다. 당대 과학의 발견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기에 철학자(그리고 과학자)들은 발견된 것에 상응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는 과제에 직접 뛰어들었다. 당대의 문학, 종교, 의사과학적 담론의 수렴이 출현한 것은 바로 이런 기대하는 것(, 상상적인 것)과 사유 가능한 것의 교차점에서였다. 즉 과학이 종교-문학적 신화의 일부가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시대에 빛의 유토피아라는 주제가 거의 강박적으로 반복되었다는 사실이다(이에 관해서는 셰메노바 1990: 363-73를 참조하라). 

[iii] 사무엘 베케트(1998, 2000) 문학에서 황폐화의 주제, 즉 ‘공간의 단순성’이라는 주제는 극도로 중요하다. 그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를 전개하는데, 세계를 텅 빈 공간이라는 제한된 틀 속에서 제시함으로써 아주 미세한 디테일을 확대하여 그것들을 최대한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모든 곳이 회색빛으로 가득 차 있고, 흐릿하고 비어 있으며, 태양이 없는 달빛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겨난다. 이 독특한 베케트식 인물의 세계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이 세계의 중심에는 모종의 재앙 이후 더 이상 아무 것에도 개의치 않으며 자신의 존재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려 애쓰고 있는 마비 상태의 주인공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재앙이 발생하면 누가 살아남게 될까? 살아남으려는 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살아남게 되는가? 부조리의 핵심은 삶이 모든 의미를 잃은 상황에서도 인간이 살아남으려 한다는데 있다. 삶의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 베케트의 세계는 포스트아포칼립스의 세계로서 그곳엔 인구가 희박하다. 그 안에서 생존을 지속하는 외로운 주인공들은 대재앙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자신의 황폐화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등장 인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들이 누워있는지, 기고 있는지 혹은 신음하고 있는지, 목발을 찾고 있는지) 뿐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입고 있는지, 어디서 자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꿈꾸는지, 친구가 누구인지 또한 보기를 원하지만 결정적으로 부재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세계다. 바로 그런 인간적 세계가 황폐화되어버린 것이다. 

[iv] 이 복잡한 감정은 심리적으로 이해할만 하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인식하면서 한계까지 가보는 것, 말하자면 혁명의 완전한 승리다. 그것은 기적과도 같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느낌의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려 애를 쓰는데, 그래봐야 앞으로 돌진하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바로 이로부터 무관심, 권태, 우울이 나온다. 모든 등장 인물이 행위의 프로그램을 영원히 상실한 채 깊고 무한한 러시아의 대초원을 배회하는, 즉 이미 죽어버린 듯한 심리자동기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소설을 무작위로 펼쳐보라. 어디서나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시체의 승리와 죽음이다. 플라토노프의 등장 인물 중 압도적인 다수는 그 자신에게만 고유한 존재의 사이클, 자신의 죽음과 삶을 갖는 각각의 몸이 되고자 애쓰는데, 그것들은 불충분하고 취약하며, 자기파괴에 이끌리면서 끊임없이 다른 몸에 합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죽었다는 것, 소진되고 탕진된 몸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잠든 사람들은 모두 죽기라도 한 양 비쩍 여위었다. 그들의 피부와 뼈 사이의 좁은 공간 속에 굵은 핏줄이 있었다. 핏줄의 두께를 보건대 그들이 노동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양의 피를 흘려보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사로 만든 그들의 상의는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심장의 느린 움직임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심장은 어딘가 가까이, 잠든 사람들의 어둡고 텅 빈 몸속에서 뛰고 있었다. 보셰프는 근처에서 자고 있던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만족을 느끼는 사람의 말없는 행복감이 그 얼굴 위에 나타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잠든 사람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고 그의 눈은 슬픈 듯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막사 안에는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꿈을 꾸는 사람도 옛 기억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에겐 생의 잉여라곤 티끌만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잠을 잘 때는 심장만이 살아 그들 각자의 목숨을 지탱해줄 뿐이었다. (Платонов 2011а: 421. 『코틀로반』 (김철균 옮김, 문학동네 2010, 20). 

 

   [옮긴이주] 여기서 “우울”이라고 번역한 러시아어 토스카(toska)는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흔히 영어로 멜랑콜리로 번역되곤 하는 이 단어는 우울, 애수, 향수, 그리움, 슬픔, 고통, 갈망, 권태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 장을 갖는다. 플라토노프의 영역자인 로버트 챈들러는 ennui와 더불어 toska를 원어 그대로 영어에 도입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외국어에서 정확한 대응어를 찾을 수 없는 이 특별한 단어에 관해 나보코프는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가장 깊고 고통스런 수준에서 토스카는 대개 원인불명의 커다란 영적 고통의 감정을 뜻한다. 덜 병적인 수준에서는 영혼의 둔탁한 아픔, 목적 없는 갈망(longing), 병적인 슬픔(pining), 막연한 불안, 정신적 고통(throe)과 동경(yearning)이다. 특수한 경우 그것은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향한 욕망, 향수, 애틋함이 될 수도 있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권태(ennui)나 지루함으로 등급이 매겨진다.(Vladimir Nabokov, Eugene Onegin, a Novel in Verse, vol. 2, Alexander Pushkin, trans. Vladimir Nabokov,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p. 141). 여기서 핵심은 단어의 다의성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그렇기에 동사형을 취할 수 있는 그것의 적극적 용법에 있다. 토스카의 범위와 사용법은 영어의 멜랑콜리와 비슷하지만 디프레션이나 멜랑콜리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대상을 취할 수 있다. 동사형으로서 이 단어는 잠재적이고 역설적인 방식으로 무언가에 대한 부족함의 성격을 강조한다. 가령, 『체벤구르』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농부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리워했던가? 나는 바로 사회주의를 그리워했던 거야(toskoval).(『체벤구르』 (윤영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1, 198)라고 말하는데, 이때 자신이 확실히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끼던 농부는 결국 그것이 사회주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토스카는 어떤 것에 관하여(about) 느끼는 우울함보다는 잃어버렸거나 혹은 아예 가져보지 못한 어떤 것을 향한(for) 적극적인 지향과 향수에 더 가깝다. 놀라운 사실은 이 특별한 감각이 ‘같은 것’을 느끼는 다른 존재자를 향할 때 (일시적이나마) ‘정지’될 수 있으며(수없이 등장하는 ‘우정’의 느낌이 가리키는 바가 정확히 이것이다), 그 존재자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나도 그 사람과 똑같아”라고 말하곤 하는 주인공 사샤는 “오래된 울타리”를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홀로 서 있구나.’ 가을에 덧문이 슬픈 듯이 삐걱거릴 때면, 사샤도 저녁마다 집에 앉아 있기가 우울해졌으며, 덧문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느꼈다. ‘그들 역시 우울하구나!’ 그리고 더 이상 우울해하지 않았다.(82). 이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Jonathan Flatley, Andrei Platonovs Revolutionary Melancholia: Friendship and Toska in Chevengur, Affective Mapping: Melancholia and the Politics of Modernism,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8, pp. 158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