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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라클라우 읽기

비어있는 기표가 정치학에서 왜 중요한가

by 인-무브 2025. 6. 10.

 

이 글은 <Emancipation(s)>(Verso, 1996) 3장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비어있는 기표가 정치학에서 왜 중요한가

Why Do Empty Signifers Matter to Politics?

 

 

김내훈(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비어있는 기표(empty signifer)란 엄격히 말하자면 기의 없는 기표(signifer without signifed)다. 그러나 이 정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한다. 기표가 어떤 기의에도 연결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의미작용 체계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비어있는 기표가 다만 일련의 소리로서, 아무런 의미작용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면 ‘기표’라는 용어부터가 과잉일 것이다. 소리의 흐름이 특정 기의와 단절된 채 여전히 기표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비어있는 기표가 함의하는 기호의 전복을 통해 의미작용 자체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성취되는 경우다. 이 가능성은 무엇인가?

 

몇 가지 가짜 대답(pseudo-answers)은 빠르게 걸러낼 수 있다. 첫째로, 하나의 기표가 (기호의 자의성으로 말미암아) 문맥에 따라 다른 기의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기표가 비어있는 게 아니라 중의적(equivocal)인 것으로, 각각의 문맥에서 의미작용이 완전히 실현되는 경우다. 둘째로, 기표가 중의적인 것이 아니라 모호한(ambiguous) 것이라는 주장이다. 기의의 과잉결정 혹은 과소결정이 기표에의 완전한 결정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표의 부유(floating) 역시 기표를 비어있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기표의 부유함이라는 것이 우리를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에 한 걸음 가깝게 이끌기는 하지만 여전히 핵심은 피해간다. 우리가 다뤄야 할 것은 의미작용의 과잉이나 결핍이 아니라, 의미작용 과정 내부로부터 의미작용의 한계의 담론적 현존을 지시하는 무언가에 대한 정확한 이론적 가능성이다.

 

결과적으로, 비어있는 기표는 오직 의미작용 그 자체에서 구조적인 불가능성이 존재할 때, 그 불가능성이 기호의 구조를 방해(전복, 왜곡 등)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표상할 수 있을 때 등장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의미작용의 한계는 그 한계 안에 있는 것의 실현의 불가능성으로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만약 한계가 직접적으로 기호화될 수 있으면 그것은 의미작용 내부에 있는 것일 테고 따라서 더 이상 한계가 아니게 된다.

 

형식적인 수준에서의 초창기의 고찰은 이 점을 명확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소쉬르에게서, 언어(그리고 모든 기표 체계까지)가 차이들의 체계며 언어적 정체성(가치)이 순전히 관계적인 것이고 따라서 개별의 의미작용마다 언어의 총체성이 관여한다는 점을 배웠다. 이제 총체성이 본질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만약 차이들이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작용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의미작용의 가능성 자체가 바로 그 체계며 체계의 가능성이 바로 그것의 한계의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헤겔을 참고하자면, 무언가의 한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곧 그 한계 너머를 생각한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의미작용 체계의 한계라면, 그것은 스스로 기호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의미작용 과정의 중단이나 붕괴로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설을 마주하게 된다. 의미화 체계의 가능 조건을 구성하는 한계는 동시에 의미화 체계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의미작용 과정의 부단한 확장을 차단하는 것으로서.

 

이로부터 도출되는 첫 번째 그리고 핵심적인 결론은 진정한 한계란 결코 중립적일 수 없으며 항상 배제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중립적인 한계는 그것의 안쪽과 바깥쪽 양면과 본질적으로 연속선상에 있으며 양면은 단순히 서로 다를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의미화의 총체성은 정확히 차이들의 체계다. 이것은 그 양면이 모두 동일한 체계의 일부며 그 사이의 한계는 체계 자체의 한계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 대신 우리는 배제의 차원에서 진정한 한계를 이야기할 수 있다. 배제의 한계 너머가 실현되는 순간 한계 안쪽에 있는 것의 존재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한계는 항상 적대적이다. 다만 이 배제적 한계의 논리가 작동하면 그 한계 양쪽 모두에 확산되는 필연적인 효과를 수반하며 그것은 우리를 곧바로 비어있는 기표의 출현으로 이끈다.

 

(1) 배제적 한계의 첫 번째 효과는, 그 한계들에 의해 구성된 차이들의 체계 안에 본질적인 양가성(ambivalence)을 도입한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체계 내 각 요소는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로써만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다. 차이가 곧 정체성이다. 반면 다른 한편으로, 이 모든 차이는 배제의 경계의 같은 쪽에 속한다는 점에서 서로 등가적인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이 경우, 각 요소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분열적이 된다. 한편으로, 각 차이들은 차이로서 자신을 표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체계 내 다른 차이들과 함께 등가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그 차이를 소거(cancels)한다. 그리고, 급진적 배제가 있어야만 체계가 주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분열 혹은 양가성은 모든 체계적 정체성의 구성 원리라고 해야 한다. 순수한 현존으로서의 체계, 모든 배제를 넘어선 체계의 근본적인 불가능성 때문에 복수의 현행적 체계들만이 존재할 수 있다. 이제, 체계의 체계성이 배제적 한계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면, 오직 그 배제만이 체계를 체계로서 성립시키는 근거가 된다. 이 점은 결정적이다. 이 점은 체계가 실정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에 기인하며 따라서 체계가 그 어떤 실정적인 기의로도 기호화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요소들이 실정적인 속성(예컨대 특정한 국지적 범주에 속한다는 점)을 공유함으로써 체계적 앙상블이 구성된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그 실정적 속성은 다른 분별적 실정적 속성들과 차이를 띨 것이며, 차이가 차이로서 이해되는 더 깊은 체계적 총체성에 호소할 것이다. 그러나 급진적 배제를 통해 구성된 체계는 이러한 분별적 논리의 놀이를 중단시킨다. 체계로부터 배제된 것은 실정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실정성 즉 순수한 존재(Being)의 단순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모든 차이의 완전한 소거의 기표 즉 비어있는 기표의 가능성이 시사된다.

 

(2) 물론 이러한 기제가 가능하려면 다음의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배제의 경계 너머에 있는 것이 순수한 부정성으로, 즉 외부로부터 체계에 가해지는 순수한 위협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그 배제의 차원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면, 그 ‘너머’의 분별적 성격이 전면에 드러나게 되고 그에 따라 체계의 한계는 흐려지게 된다. 그 너머가 순수한 위협, 순수한 부정성, 혹은 단순히 배제된 것의 기표가 될 때에만 한계와 체계(말하자면 객관적 질서)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배제된 것 혹은 배제 자체의 기표가 되려면, 여러 가지 배제된 범주들이, 체계가 스스로를 기호화하고자 악마화하는 것들의 등가사슬의 형성으로써 서로의 차이를 소거해야 한다. 다시, 이 지점에서 차이들이 등가사슬 속으로 무너져 들어가는 논리를 경유하여 비어있는 기표가 출현할 가능성을 볼 수 있다.

 

(3) 다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체계의 체계성 혹은 순수 존재, 또는 그 반대인 배제된 것의 순수 부정성은 왜 스스로를 기호화하기 위해 비어있는 기표를 필요로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의미작용의 한계(라캉식으로는 실재)를 기호화하고자 할 때 그 의미작용의 과정을 전복하는 것 외에 직접적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통해 우리는, 직접적으로 표상될 수 없는 것(무의식)이 기호화 과정의 전복으로써만 표상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각각의 기표는 특정 기의에 부착됨으로써 하나의 기호를 구성하고 의미작용 과정 안에 자신을 차이로서 새긴다. 하지만 기호화하려는 것이 하나의 차이가 아니라, 반대로 모든 차이의 근간이자 조건이 되는 급진적 배제라면, 또 다른 차이를 더 만들어내는 방식으로는 소용이 없다. 표상의 모든 수단이 본질적으로 분별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호화가 가능하려면 기호화의 단위의 분별적 본성이 전복되어야 하며, 기표들이 그 자신의 특정 기의와의 연결을 끊고 체계의 순수 존재 혹은 순수 존재로서의 체계를 표상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러한 전복의 존재론적 근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답은 이렇다. 각각의 기호화 단위의 분열, 즉 체계가 차이의 논리와 등가의 논리가 동시에 작동하는 불확정적인 장소로서 구축해야 하는 단위의 분열이다. 이 등가성의 차원을, 분별적 성질이 거의 완전히 소거되는, 다시 말해 분별적 성질을 비워내는 지점까지 특권화해야만, 체계가 자신을 총체성으로서 기호화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비어있는 기표를 통해 표상되는 존재 혹은 체계의 체계성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존재가 아니라, 구성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존재다. 앞서 본 것처럼 모든 체계적 효과는 등가성과 차이의 불안정한 타협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구성적 결여, 칸트가 표현한바 적절한 표상의 불가능성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불가능한 대상과 마주하고 있다. 이제 여기서 처음의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 의미작용의 장 안에 비어있는 기표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어떤 의미작용 체계가 되었건, 그것의 체계성이 필요로 하는 대상의 생산의 불가능성에 기인하는 빈 장소를 중심으로 체계가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다루는 것은 논리적 모순의 경우처럼 위치 없는 불가능성이 아니라 실정적인 불가능성, 비어있는 기표가 x로 지시하는 실재적 대상이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대상이 적절한 혹은 직접적인 표상 수단을 결여한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불가능한 대상을 표상하는 역할을 맡기 위해 비워지는 기표가 항상 본질적으로 부적절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상황에서 다른 기표가 아닌 어떤 특정한 기표가 그 표상 기능을 수행하도록 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 챕터의 핵심 주제로 나아가야 한다. 비어있는 기표와 정치학의 관계다.

 

헤게모니Hegemony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자세히 살펴봤던 예시로 돌아가보겠다(Laclau and Mouffe, 1985). 로자 룩셈부르크가 설명한 바의, 장기간을 걸친 다양한 투쟁들의 과잉결정으로 인한 노동계급의 통일적 형성이다. 그녀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계급의 통일성은 정치적 투쟁이냐 경제적 투쟁이냐의 우선순위의 선험적(a priori) 판단으로 결정되지 않고, 부분적 투쟁들의 내부적 분열이 축적된 효과로 인해 결정된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그녀의 논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가진다. 극심한 탄압의 상황에서는 어떤 국지적 목표를 위한 동원도 단지 그 구체적 요구나 목표에 관련된 것으로만 인식되지 않고, 체계에 대한 저항 행위로 인식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서로 다른 여러 구체적이거나 부분적인 투쟁과 동원들을 연결시킨다.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 구체적인 목표들이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억압적 체제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등가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것들이 통일성을 구축하는 것은 실정적인 무언가를 공유함으로써가 아니라 공동의 적에 대한 반대라는 부정성이다. 룩셈부르크의 주장은 혁명적 대중 정체성이 장구한 역사적 기간에 걸쳐 다양한 개별적 투쟁들의 과잉결정으로 형성되며 어떤 혁명적 순간의 파열적 지점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개념들을 이 과정에 적용해보자. 모든 구체적 투쟁의 의미(기의)는 처음부터 내부적으로 분열된 상태로 나타난다. 투쟁의 구체적인 목표는 단순히 그 자체의 구체성으로만 의미하지 않고 동시에 체계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전자의 기의는 그 요구 혹은 동원의 분별적 성격을 설정한다. 후자의 기의는 그 모든 요구들이 공통적으로 체계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서로 등가적이라는 점을 설정한다. 이처럼 구체적인 투쟁들은 자신의 특수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폐기하는 모순적인 운동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체계를 총체성으로서 표상하는 것은 등가의 논리가 차이의 논리를 깔끔히 압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달려 있다. 다만 이 가능성은 일체의 개별 투쟁이 애초부터 항상 이미 이러한 구성적 모호성으로 관통되어 있다는 사실의 산물에 불과하다.

 

앞서서 정리한 것처럼 만약 분별적 기표들이 자신들의 분별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공동체적 공간의 순수한 등가적 정체성을 표상하려 한다면, 분별적 기표들은 그 등가적 정체성을 분별적 질서에 속한 어떤 것으로 구성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짜르 체제를 억압적인 질서로 표상하는 의도에서 다양한 인구 집단에 가해지는 억압의 여러 분별적 유형들을 원하는 만큼 나열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억압적 순간의 특수성 즉 (그것의 부정 안에서)개체들 간의 억압적 관계에 특유한 것을 구축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계에서는 억압적 권력의 각각의 심급이 피억압 부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순수 담지자로서만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만약 억압적 행위의 분별적 정체성이 단지 다른 개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구현체에 불과한 것으로 스스로를 변모시킴으로써 그 자신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한다면, 그 부정 그리고 그것의 구현체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하나의 특정한 구현체가 그러한 부정을 구현해야 한다고 필연적으로 예정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등가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다양한 개별의 투쟁들은 억압적 권력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무차별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구현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이중의 운동을 수반한다. 한편으로, 등가사슬이 확장될수록 각 구체적 투쟁은 자신의 분별적 정체성, 다시 말해 다른 분별적 정체성들과 자신을 구분 짓는 고유한 차이 안에 더 이상 고립될 수 없다. 오히려, 등가 관계는 이러한 분별적 정체성들이 단지 그들에게 공통으로 있는 무언가를 구현하는 분별성 없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등가사슬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공통으로 있는 무언가’는 더 추상적이게 되며 극한에서는 그 어떤 구체적인 현현에도 독립적인 순수한 공동체적 존재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 공동체적 공간을 구획 짓는 배제 너머에 있는 것, 즉 억압적 권력은 개별의 분별적 억압들의 수단이기를 그치고 순수한 반-공동체, 순수한 악이자 부정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등가사슬의 확장으로 인해 만들어진 공동체는 따라서, 억압 권력의 존재로 인해 실재할 수 없는 공동체적 충만함의 순수 이념이 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두 번째 운동이 시작된다. 모든 분별적 정체성들이 붕괴함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는 부재한 충만함을 표상하는 순수 등가적 기능은 고유의 기표를 가질 수 없다. 고유의 기표를 가지고 있다면, ‘모든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 분별적 정체성의 등가적 붕괴의 산물이 아니라 단지 또 하나의 차이가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공동체라는 것은 객관적 정체성의 순수한 분별적 공간이 아니라 부재하는 충만함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표상할 고유의 방법이 없으며 반드시 등가적 공간 내부에서 구성된 어떤 개체로부터 그것을 빌려와야 한다. 마치 금이 하나의 특정한 사용가치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일반적 가치를 표상하는 역할을 맡는 것과 같다. 이렇듯 특정한 기표가 그것의 고유하고 분별적인 기의를 비우는 것은 결여의 기표로서, 부재하는 총체성의 기표로서의 ‘비어있는’ 기표의 출현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앞 절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일체의 분별적 투쟁들이 하나같이 동등하게, 그것들의 분별적 정체성을 넘어서 공동체의 충만함을 표현할 수 있다면, 등가적 기능이 모든 분별적 위치들을 그 등가적 표상 앞에 비슷하게 무분별적인 것으로 만든다면, 그리고 그 어떤 것도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면, 특정한 시기에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이 보편적 기능을 떠맡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의 답은 사회적인 것의 불균등함이다. 등가성의 논리는 분별적 위치들의 중요성을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언제나 경향적인 운동일 뿐이며, 본질적으로 비평등적인 차이의 논리에 의해 항상 저항을 받는다. (자연의 상태, 즉 등가성의 논리가 완전하게 작동하여 공동체가 불가능해진 상태의 모델을 홉스가 구상할 때 인간들 사이의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평등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사회의 어떤 위치나 투쟁이, 그 내용을 바꿔서 비어있는 기표가 되는 결절점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세력의 역사적 정동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화, 즉 구조적 위치의 불균등함이 어떤 세력이 총체화 효과의 원천임을 결정한다는 입장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 불균등한 구조적 위치들(그중 일부는 권력이 집중된 지점을 표상하는)은 차이의 논리와 등가성의 논리가 서로를 과잉결정하는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분별적 구조적 위치들의 논리의 역사적 유효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운동의 법칙들을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하부구조로서의 성격을 분별적 구조적 위치들에 부과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 접근이라면, 차이/등가성이라는 형식 분석 수준에서는 어떤 특정한 차이가 등가적 효과의 장소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 여기서 특정한 국면에 대한 연구가 요구된다. 등가성의 효과는 항상 필수적이지만, 등가성과 차이의 관계가 그 어떤 특정한 분별적 내용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관계, 하나의 특정한 내용이 부재한 공동체적 충만함의 기표가 되는 관계가 우리가 헤게모니적 관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정의한 바의 비어있는 기표의 현존은 그 자체로 헤게모니의 조건이다. 그람시의 이론을 포함한 기존의 헤게모니 이론들이 반복해서 부딪혔던 한 가지 잘 알려진 문제를 통해 이 점을 명확히 할 수 있다. 어떤 계급이나 집단이 헤게모니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편협한 조합주의적 관점에 갇히지 않고 더 광범위한 대중을 위한 해방이나 질서 보장이라는 더 광범위한 목표를 실현할 존재로 자신을 제시할 수 있을 때다. 다만 이때 ‘더 광범위한 목표’와 ‘더 광범위한 대중’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정의하지 않으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로, 사회를 각자 고유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며 서로 부단히 충돌하는 이산적인 집단들의 집합으로 정의한다. 이때 ‘더 광범위한’(‘broader’ and ‘wider’)이 의미하는 것은 각 집단이 자기 정체성과 목표를 유지한 채 타협한 결과로서 불안정한 균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헤게모니’는 그러한 합의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유형의 공동체적 통일성을 시사한다. 둘째로, 사회를 어떤 선험적인 본질을 가진 것으로 가정한다. 이 경우 ‘더 광범위한’은 특정 집단들의 의지와 무관한 고유한 내용을 가진 것이 되며 ‘헤게모니’는 그 본질을 실현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 관점은 헤게모니의 작동이 항상 수반하는 우연성의 차원을 소거할 뿐만 아니라 ‘헤게모니’의 합의적 성격과도 호환되지 않는다. 이 경우 헤게모니적 질서는 미리 주어진 조직 원리의 시행일 뿐, 집단들 간의 정치적 상호작용에서 배태된 것이 아니게 된다. 이제, 우리가 비어있는 기표의 사회적 생산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 문제는 사라진다. 이 경우, 헤게모니의 작동은 한 집단의 특수성을 부재로서의, 충만하지 않은 현실로서의 공동체적 질서를 지시하는 비어있는 기표를 구현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된다.

 

이 메커니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사회 질서가 완전히 해체된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보자. 홉스가 말한 바의 자연 상태와 대동소이한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질서를 요구하게 되며, 질서의 실질적인 내용은 부차적인 문제로 미뤄진다. ‘질서(Order)’ 자체에는 내용이 없다. 질서는 현실에서 실현된 다양한 형태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급진적 무질서 상황에서 ‘질서’는 부재하는 것으로서 현존한다. 즉 그 부재의 기표로서 비어있는 기표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러 정치 세력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목표가 그 결핍을 채울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경쟁한다.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는 것은 바로 이 결핍을 채우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질서’를 예로 들었지만, 당연히 ‘통합’, ‘해방’, ‘혁명’ 등의 개념도 같은 계열에 속한다. 특정 정치적 맥락에서 결핍의 기표가 되는 일체의 용어들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사회의 구성적 불가능성이 오직 비어있는 기표의 생산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정치가 가능한 것이다.)

 

헤게모니가 항상 불안정하고 구성적 모호성에 의해 관통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로써 설명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 투쟁이 자신들의 목표를 일반적인 의미의 ‘해방’의 기표로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앞서 살펴봤듯이 가능한 일이다. 억압적 체제 아래서 일어나는 노동운동은 반체제적 투쟁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헤게모니적 승리다. 특정 집단의 목표가 사회 전체의 목표와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위험한 승리이기도 하다. ‘노동자 투쟁’이 해방 자체의 기표가 되면, 모든 해방 투쟁이 그 기표를 통해 표현되게 되며, 그 기표를 중심으로 이어진 등가사슬은 노동자 투쟁이라는 내용을 비우고 본래 연결되었던 것과의 연관성을 흐릿하게 만든다. 따라서 헤게모니적 작동이 성공을 거듭함에 따라 본래 그것의 추진자이자 수혜자였던 세력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경향이 생긴다.

 

헤게모니와 민주주의Hegemony and democracy

 

비어있는 기표와 헤게모니,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에 관한 몇 가지 성찰로 마무리하겠다.

 

일단 사회적 기표들이 근대 정치사상(그중 특히 홉스의 사상)에 기여한 바를 생각해보자. 전술했듯이 홉스는 자연 상태를, 질서 잡힌 사회의 급진적 반대, 부정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는 상태로 묘사했다. 다만 그러한 묘사의 결과로, 통치자의 질서는 그것의 내재적인 미덕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질서이기 때문에, 그게 없으면 급진적인 무질서밖에 없기 때문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가 일관성을 지니기 위한 조건은 자연 상태에 놓인 개인들의 권력이 동등하다는 가정이다. 개인들의 권력에 불균형이 있다면, 질서는 단순한 지배를 통해서도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은 두 차례 제거된다.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개인이 권력을 동등하게 공유함으로써 권력이 제거된다. 국가(Commonwealth)에서는 모든 권력이 통치자에게 완전히 집중됨으로써 권력이 제거된다. (권력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동등히 분배되어 있거나 완전히 집중되어 있으면 더 이상 권력이 아니다.) 따라서 홉스는 질서 그 자체라는 비어있는 기표와, 통치자에 의해 실제로 강제되는 질서 사이의 분열을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었지만, 계약을 통해 전자를 후자에 환원함으로써 둘 사이의 변증법적 혹은 헤게모니적 게임을 사유하지 못했다.

 

반대로, 이 구도에 권력을 다시 도입한다면, 즉 사회적 관계 안의 권력의 불균형을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민사회는 부분적으로 구조화되고 부분적으로 비구조화될 것이며 그에 따라 통치자로의 권력의 완전한 집중은 논리적 필연성을 잃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통치자가 전권을 주장할 정당성은 훨씬 덜 명백해진다. 사회에 부분적 질서가 존재할 때, 질서라는 비어있는 기표와 통치자의 의지를 동일시하는 것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그 의지의 내용이 사회의 존재양식과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며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이 동일시의 과정은 항상 불안정하고 뒤집힐 수 있는 것이 된다. 또한 동일시가 더 이상 자동적인 것이 아니게 되면서, 다양한 헤게모니적 기획들이나 의지들은 부재하는 공동체의 비어있는 기표를 헤게모니화하려 달려든다. 이러한 간극의 구성적 성질을 인식하고 정치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바로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참고문헌

Laclau, E. and Mouffe, C. 1985.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Towards a Radical Democratic Politics. London: Ver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