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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그 이름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번역: 현우식(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Populism and the Mirror of Democracy』(Verso, 2005)에 수록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논문 「Populism: What’s in a Name?」을 번역한 글입니다. 

 

 

모든 정의는 정의되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론적 격자(grid)를 전제로 한다. 정의(definition)라는 개념의 뜻이 그러하듯이 대상의 의미는 정의된 용어와 그러한 정의가 배제하는 다른 것들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다시 이러한 차이들을 사고할 수 있게 하는 지형(terrain)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어떤 운동, 이데올로기, 정치적 실천을 ‘포퓰리즘적’이라고 말할 때 이 지형은 종종 명확하지 않다. 포퓰리즘적 운동/이데올로기를 유사한 층위에서의 ‘파시즘적’,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적’ 운동/이데올로기와 구분하려고 할 때 우리는 복잡하고, 결국에는 자가당착에 이르는 문제에 직면한다. 그 문제란 다른 특징들과 구별되는 ‘순수한’ 포퓰리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회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포퓰리즘적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수많은 예외 사례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퓰리즘이라는 용어에 부여되는 실제 의미는 언어적 관행에 의해 이미 전제되어 있으며 정의 가능한 방식으로 번역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우리는 이 의미를 소진하는(exhaust) 어떤 식별가능한 지시체(referent) 조차도 제시할 수 없다.

 

만약 분석 단위를 운동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치적 실천으로 바꾼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모든 것은 이 변화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변화를 이데올로기나 정치 운동의 차원에서 구성되는 통일된 주체의 차원에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무엇이 포퓰리즘적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 있어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주체의 관점에서 포퓰리즘을 정의하게 되면 구체적인 분석에 있어서 정치적 실천이 주체의 내적 본성이 단순하게 표출된 것으로 재생산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있다. 정치적 실천이 사회적 행위자의 본성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실천이 행위자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실천이 행위자보다 존재론적(ontological)적으로 우선한다고 가정할 경우, 행위자는 단지 정치적 실천의 역사적인 침전물(percipitate)에 불과하게 된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우리의 분석에서 실천은 집단보다 더 기본적인 분석의 단위가 된다. 집단은 사회적 실천이 접합된 결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접근이 맞다면, 어떤 운동이 포퓰리즘적인지의 여부는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드러나는 내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간에 어떤 접합의 논리(logic of articulation)를 따르냐에 달려있게 된다.

 

이 부분은 우리의 핵심 주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접합’이라는 범주는 지난 30~40년 동안 특히 알튀세르 학파와 그 자장 안에서 이론적 언어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알튀세르주의가 발전시킨 접합 개념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접합 과정과 관련한 존재적(ontic) 내용에 한정되어 있었다.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 ‘상대적 자율성’과 같이 접합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이론화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지만, 이 개념들의 형식적 논리는 특정한 범주의 존재적 내용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예컨대,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은 오직 경제라는 범주와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국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존재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애초부터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한계로 인해 포퓰리즘의 정치 논리는 사고될 수 없었다.

 

아래에서 나는 세 가지 이론적 주장을 제시할 것이다. (1) 포퓰리즘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치적 차원이든, 이데올로기적 차원이든) 집단보다 작은 범주의 분석 단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2) 포퓰리즘은 존재적 범주가 아니라 존재론적 범주이다. 즉, 포퓰리즘의 의미는 특정한 집단의 실천을 기술하는 과정에서의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내용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갖던 간에 어떤 접합 양식(mode of articulation)을 따르는가에 달려 있다. (3) 내용과는 독립적인 접합의 형식은 주로 재현 양식(modes of representation)의 수준에서 구조화 효과(structuring effect)를 산출한다.

 

 

사회적 요구들과 사회적 총체성

 

우리가 주장했듯이, 우리의 출발점은 집단보다 작은 단위를 식별하고 접합의 사회적 논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이러한 사회적 논리 중 하나이다. 우리의 분석은 전체로서의 공동체(‘사회’)와 그 속에서 사회적 행위자들이 움직이는 방식 사이에는 비대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어떤 사회적 행위자도 전체로서의 사회가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과 동일하게 움직일 수는 없다. 루소는 근대 사회에서 일반의지(general will)의 구성이 – 그는 민주주의의 조건이 일반의지의 구성에 있다고 보았다 -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사회가 분화되고 이질적이 되면서 재현(representation)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헤겔은 이 문제를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구분을 통해 접근하고자 했다. 시민사회는 특수성과 이질성의 영역(욕구의 체계, the ‘system of needs’)이며, 정치사회는 총체성과 보편성의 계기를 뜻한다. 마르크스는 조화로운 사회에서의 보편 계급의 역할을 통해 집합의지와 공동체적 공간이 완전히 일치하는 유토피아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우리의 논의는 정치적 의지와 공동체적 공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궁극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바로 그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시도가 사회적 정체성이 정치적으로 접합되는 과정의 특수성을 규정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우리가 전체로서의 공동체와 사회적 행위자의 실제적이고 부분적인 의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행위성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방법론적 개인주의 접근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개인들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자기규정적인(self-defined) 총체라고 전제한다. 나아가 사회적 상호작용은 명확한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구성된 정체성을 갖는 행위자들 사이의 협상으로 이해된다. 이와 달리 우리는 완전하게 자기결정적인(self-determined) 총체로서의 사회라는 개념에 담겨 있는 충만함에 대한 약속이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전체론적(holistic) 접근을 채택한다. 따라서 복수의 집단적 의지들로부터 공동체적 공간을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코 계약의 형태를 띨 수 없다. 계약은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이해관계와 자기결정적인 의지라는 개념을 전제로 한다. 충만함이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은 총체로서의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들에게도 적용된다. 개인들은 일관된 총체가 아니며 일련의 지역화된 주체 위치들(subject position)로 분할되어야 하는 참조적인 정체성일 뿐이다. 서로 다른 주체 위치들 사이의 접합은 개인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이다. 우리의 접근에서 ‘개인’이라는 개념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집단보다 작은 단위는 무엇인가? 우리는 요구(demand)라는 범주를 사회적 연결을 구축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영어에서 ‘요구’라는 단어의 의미는 모호하다. 한편으로는 요청(request)을 뜻하며 조금 더 능동적인 의미에서는 (설명을 요구하다(demanding an explanation)라는 표현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요청을 부과하는 주장(claim)을 뜻한다. 스페인어와 같이 다른 언어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두 단어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스페인어에서 두 번째 의미에 상응하는 단어는 reivindicación(요구)이다. 비록 우리의 분석에서 ‘요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두 번째 의미에 보다 주목하지만, 두 의미 사이의 모호함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왜나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요구라는 이론적 개념에는 두 의미 사이의 결정불가능성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두 의미는 각각 두 가지 서로 다른 정치적 접합의 형태와 상응한다. 또한 두 의미 모두에는 공통의 숨겨진 전제가 있다. 그것은 요구는 스스로 충독될 수 없으며, 요구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요구가 원래 생겨난 것과는 다른 심급(instance)으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확한 요구의 예를 들어 보자. 한 지역의 이웃들이 일터로 이동하기 위하여 버스 노선이 도입되는 것을 원하고 있다. 이들은 시청에 이를 요청했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졌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구조적인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사회적 필요는 요청의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요청은 스스로 충족될 수 없으며, 결정 권한이 있는 다른 심급에 호소하는 과정을 통해 충족된다. (2) 요청이 제기된다는 것은 보다 높은 심급이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 의문시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요구의 첫 번째 의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3) 요구는 명백하고 그 자체로 온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요구는 공식화되지 않은 다양한 사회적 요구들의 상징이거나 빙산의 일각이 아니다. 이 세 가지 특징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다. 명백하게 여겨지거나 개별적으로 충족되는 이런 방식의 요청은 사회적인 것 내부에 어떠한 간극 혹은 경계를 구축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회적 행위자들은 이 모든 과정의 암묵적인 전제로 각 심급들의 정당성을 받아들인다. 각 심급은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적 내재성(social immanence)의 한 부분이거나 구별되는 지점들이다. 이렇게 제도화되고, 변별화된(differential)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논리를 우리는 차이의 논리(logics of difference)라고 부를 것이다. 차이의 논리는 사회가 분열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정당한 요구는 적대적이지 않은, 행정적인 방식으로 충족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차이의 논리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유토피아적 사회에 대한 주장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디즈레일리주의자들(Disraelian)의 ‘하나의 국민(one nation)’ 개념[각주:1], 복지국가 또는 생시몽주의자들의 슬로건인 ‘인간의 통치에서 사물의 관리로(From the government of men to the administration of thing)’ [각주:2]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제 우리의 사례로 다시 돌아오자. 이번에는 요청이 거절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회적 좌절은 의심의 여지 없이 어떤 결정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만약 충족되지 않은 요구가 단 하나만 존재한다면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인해 충족되지 않은 요구들이 매우 많이 존재한다면, 이 집합적인 좌절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회적 논리를 촉발할 것이다. 예를 들어, 더 나은 교통수단에 대한 요청이 좌절된 한 지역의 사람들이 그들의 이웃들의 안전, 물 공급, 주택, 교육과 관련한 주장이 자신들과 똑같이 좌절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들 사이에는 일종의 연대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여전히 충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유할 것이다. 요구들은 이제 실정적(positive)이고 변별적인 성격을 넘어서 부정적(negative) 차원을 공유하게 된다.

 

요구들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차원에서 재결합되는 경향을 보이는 사회적 상황은 우리가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접합 양식의 (유일한 전제조건은 아닌) 첫 번째 전제 조건이다.

 

(1) 이전에 논의한 제도적 해법이 차이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등가의 논리(logic of equivalence)라고 부를 수 있는 정반대의 상황에 도달했다. 개별적으로 구별되는 모든 요구들은 재결합되면서 우리가 앞으로 등가 사슬(equivalential chain)이라고 부르게 될 것을 형성한다. 이는 각자의 개별적인 요구가 구성적으로 분할된다는 것을 뜻한다. 요구는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특수한 것으로 남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등가적 연결을 통해서 특수한 요구와는 다른 총체적인 요구로 향한다. 앞서 이야기한 이미지적인 비유를 활용하자면, 각각의 요구들은 실제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요구들은 각각 고유하고 특수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더 광범위한 사회적 주장들 중에 하나로서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2) 두 가지 경우에서 요구의 주체는 다르다. 첫 번째 사례에서 요구의 주체는 요구와 같이 명백하다. 특수한 요구로서 변별되는 요구의 주체를 우리는 민주적 주체(democratic subject)라고 부를 것이다. 두 번째 경우에서 주체는 더 광범위하게 정의된다. 주체성이 복수의 민주적 요구들이 등가적으로 결합된 결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구성된 주체를 우리는 인민적 주체(popular subject)라고 부를 것이다. 이런 방식의 설명은 인민적 주체성이 출현하고 사라지는 조건을 명확히 보여준다. 사회적 요구들이 성공적인 제도적 체제 안에서 변별적으로 받아들여질수록 등가적 연결은 약해질 것이며, 인민적 주체성은 구성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복수의 충족되지 않은 요구들이 존재하고 제도적 체제가 그러한 요구들을 변별적으로 받아들일 역량이 부족할 경우 포퓰리즘적 파열(populist rupture)의 조건이 마련된다.

 

(3) 이상의 분석 결과 우리는 내적인 경계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인민적 주체성이 출현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등가성은 오직 결핍의 차원에서만 정의되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부정성의 원천이 식별되어야 한다. 등가적 연결을 바탕으로 하는 인민적 담론은 이런 방식으로 사회를 권력자(power)와 도전자(underdog)라는 두 진영으로 나눈다. 이로 인해 요구들의 성격이 변화한다. 요구들은 단순한 요청(request)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투쟁적인 요구(reivindicaciones)가 된다. 다시 말해, 요구는 이제 두 번째 의미로 이동한다.

 

등가성, 인민적 주체성, 내적 경계를 둘러싼 사회의 양분. 우리는 이제 포퓰리즘을 정의하기 위한 모든 구조적 특징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차원이 누락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이 차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어있는 기표와 떠다니는 기표

 

우리는 그동안 포퓰리즘적 파열이 출현하기 위한 (서로 구조적으로 연결된) 두 조건들을 인식하고자 했다. 하나는 내적 경계로 인해 사회적 공간이 양분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충족되지 않은 요구들 사이에서 등가 사슬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조건들은 서로 다른 두 조건이라기 보다는 같은 조건의 두 가지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적 경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등가 사슬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서도 등가 사슬은 반제도적인(anti-institutional) 특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등가 사슬은 요구들의 특수하고, 변별적인 성격을 뒤집는다. 특정 시점이 되면 ‘체제’에 대한 요구와 체제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역량 사이에 단락(short-circuit)[각주:3]이 생긴다. 우리는 이제 이 단락이 요구 그리고 총체로서의 체제의 성격에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등가적 요구는 우리에게 등가적 계기의 특수성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요구들은 언제나 각각의 특수한 요구들이기 때문에, 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의 등가성은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장은 등가적 계기를 재현하기 위한 첫 번째 전제 조건이 인민의 의지를 구성하는 요구의 총체와 대립하여 권력자들이 (의미작용을 통해) 총체화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등가 사슬이 사회 안에 경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어느 한 쪽을 대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이든, 과두제, 지배세력(the Establishment) 혹은 그 어떤 것이든 적(enemy)을 담론적으로 구성하기 전에는 포퓰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중에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지금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등가성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경계를 바탕으로 민주적 주체 위치가 인민적 주체 위치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등가성은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는가? 우리가 주장했듯이, 등가적 계기는 요구들에 잠재하는 어떤 실정적인 특징으로부터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정적인 차원에서 각각의 요구들은 서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등가는 어떠한 등가적 요구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계 너머의 권력자들에 대한 반대항으로서만 드러날 수 있다. 그렇다면 등가 사슬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내가 다른 곳(이 책의 3장)에서 주장했듯이 등가 사슬의 재현은 특수한 요구들이 자신의 특수성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채 총체로서의 사슬을 재현하는 기표로서 기능하기 시작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는 금이 하나의 특수한 상품임과 동시에 자신의 물질성을 가치의 보편적 표현으로 변환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특수한 요구가 자신과 통약불가능한 등가 사슬을 재현하는 과정을 우리는 헤게모니(hegemony)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1980년대 폴란드 노동운동에서 연대(Solidarnoś)[각주:4]에 대한 요구는 그단스크(Gdansk) 지역의 특수한 노동 계급 집단의 요구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억압적인 사회에서 좌절된 많은 사회적 요구들과 연결되면서 사회를 양분하는 담론에서 인민 진영의 기표가 되었다.

 

포퓰리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차원에서 인민적인 의미과정을 구축하는 과정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등가 사슬이 확장될수록 등가 사슬과 보편적 재현의 기능을 떠맡는 특수한 요구 사이의 연결은 약화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분석에서 매우 중요한 결론이 도출된다. 인민적 주체성의 구축은 오직 경향적으로 비어있는 기표(empty signifiers)를 담론적으로 생산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포퓰리즘적 상징의 소위 ‘빈곤’함은 정치적 효능의 조건이기도 하다. 비어있는 기표의 기능은 매우 이질적인 현실을 등가적인 동질성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특수한 내용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종국에 이러한 과정은 비어있는 기표의 동질화하는 기능이 (리더의 이름과 같은) 순수한 이름에 의해 수행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중요한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첫 번째는 등가의 논리가 ‘인민’과 ‘권력자’들을 적대적으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도입하는 특정한 종류의 뒤틀림(distortion)에 관한 것이다. ‘인민’의 경우 우리는 등가 논리가 ‘비우기(emptying)’의 과정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우기는 풍부해지기(enriching)와 부족해지기(impoverishing)라는 두 가지 과정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풍부해지기는 기표가 등가 사슬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모든 연결을 포괄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기의에만 부착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내용을 지시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반면 부족해지기는 (잠재적으로 보편적인) 넓은 지시 범위로 인해 기표와 특정한 내용 간의 연결이 급격하게 약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를 논리적으로 구분한다면, 우리는 확장(extention)에 성공할수록 그 의도(intention)는 약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권력자들의 축이 구축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한다. 권력자들의 축은 그 변별적인 내용의 물질성을 바탕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 변별적인 내용이란 단지 (인민적 요구의 좌절로 인한) 인민적 축의 부정을 담지할 뿐이다. 그 결과 우리가 이제까지 구분했던 다양한 계기들을 가로지르는 본질적인 불안정성이 생겨난다. 특정한 요구의 내용이 차이의 논리 또는 등가의 논리를 통해 접합되는 방식은 역사적 맥락에 달려 있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으며, 특정한 요구가 등가 사슬의 확장과 구성에 관여하는 방식 역시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인민/권력자 이분법의 두 축의 실제 정체성과 구조는 모두 논쟁에 열려 있으며 언제든 재정의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중세 시대부터 식량 폭동이 있었지만 당시 폭동은 원칙적으로는 군주제를 적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18세기에 이르러 식량에 대한 요구가 정치 체제 전체를 겨냥하는 혁명적 등가 사슬의 일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기까지는 복잡한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19세기 말 미국 농민들의 포퓰리즘은 실패했다. 왜냐하면 좌절된 집단들의 요구들을 통합함으로써 인민적인 등가 사슬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포퓰리즘적 호명보다 더 강한 것으로 판명된 일련의 구조적이고 차별적인 한계로 인해 결정적인 장애물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흑인과 백인 농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의 어려움, 농민들과 도시 노동자들 사이의 상호 불신, 민주당에 대한 남부 농민들의 뿌리 깊은 충성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제부터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리는 이제까지 두 개의 적대적인 등가 사슬을 분리하는 경계선이 사실상(de facto) 존재한다고 단순하게 가정해 왔다. 우리는 이제 이 가정을 문제시할 것이다. 사실 우리의 접근은 이 가정을 문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만약 특정한 요구가 특정한 등가 사슬 혹은 변별적 접합과 관련되어야 할 선험적 이유가 없다면, 우리는 적대적인 정치 전략이 정치적 경계를 만드는 다양한 방법을 바탕으로 할 것이며 이로 인해 정치적 경계는 불안정성과 변형에 노출될 것이라고라고 예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전제는 어느 정도 수정되어야 한다. 각각의 담론적 요소는 상호 모순적인 접합의 시도로 인하여 구조적 압력에 노출될 것이다. 비어있는 기표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이론화에서 이 기표의 가능성은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내부의 경계를 포함하는 등가 사슬의 존재에 달려 있었다. 1940년대와 5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고전적 포퓰리즘은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포퓰리즘의 정치적 동학은 내부의 경계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과정에 의존한다. 언어학에 비유하자면, 제도주의 정치 담론은 언어의 결합체적(syntagmatic) 축을, 포퓰리즘 담론은 언어의 통합체적(paradigmatic) 축을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합체적 축이란 조합 관계에 의해 접합된 서로 다른 지점들을 의미하며, 통합체적 축은 두 개의 계열체적 위치를 둘러싸고 통합되는 서로 다른 요소들(우리의 경우에는 요구들) 사이의 대체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포퓰리즘적 담론의 토대인 내부의 경계는 전복될 수 있다. 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하나는 특수한 요구들이 개별적으로 충족되면서 특수한 요구들 사이의 등가적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포퓰리즘 정치는 쇠퇴하고, 내부의 경계는 흐려지며 제도적 체제는 더 높은 수준으로 통합된다. 그람시는 이 과정을 변형주의(transfromit operation)라고 불렀다. 대략적으로 이 과정은 디즈레일리의 ‘하나의 국민’ 프로젝트 또는 정치를 행정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제3의 길(Third Way)와 혁신 중도(radical centre)[각주:5]를 자처하는 동시대 이론가들의 시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내부의 경계가 전복되는 두 번째 방식은 완전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 그 방식이란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경계의 정치적 기호가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인민적 담론의 중심 기표가 경향적으로 비워짐에 따라, 특정한 내용과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연결이 약화되게 된다. 그 내용은 다양한 등가적 재접합에 완전히 개방된다. 이제 비어 있는 인민적 기표들은 사회를 두 진영으로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급진성을 유지하지만, 포퓰리즘적 작동이 정반대의 정치적 기호를 획득하게 될 경우 그것들이 통합하는 등가 사슬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20세기의 역사에서 우리는 이런 반전을 무수히 목격했다. 미국에서 뉴딜 시기 좌파를 연상시켰던 ‘인민적 급진주의(popular radicalism)’라는 기표는 이후 조지 월러스(George Wallace)에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에 이르까지 극우파에 의해 전유되었다. 프랑스에서 공산당이 담당해 왔던 급진적인 ‘호민관 역할(tribunical function)’은 국민 전선(National Front)에 의해 일부 대체되었다. 양차대전 사이에 이루어진 파시즘의 전반적인 확산은 혁명적 전통에 속하는 주제와 요구들이 우파들에 의해 재접합되었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재접합 과정의 형태와 유형을 파악하는 것이다. 재접합은 인민적인 급진주의의 중심 기표들을 부분적으로 작동시킴과 동시에 많은 민주적 요구들을 서로 다른 등가 사슬에 기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방식의 헤게모니적 재접합이 가능한 이유는 어떤 사회적 요구도 처음부터 선험적 형태로 기입될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각주:6]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헤게모니적 경쟁에 달려 있다. 요구가 복수의 적대적인 프로젝트에 접합되기 시작하면 일종의 무인지대(no-man’s-land)가 되면서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자율성을 획득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인민적 기표와 그러한 기표가 접합하고자 하는 요구들의 모호성을 언급하기 위해 떠다니는 기표(floating signifiers)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떠다니는 기표를 구성하는 구조적 관계의 종류는 우리가 비어있는 기표의 작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비어있는 기표가 등가 사슬에 의해 완전히 발달한(fully fledged) 내부의 경계와 관련이 있다면, 떠다니는 기표는 모든 경계와 비어 있는 기표가 궁극적인 안정성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발생하는 모호성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구분은 주로 분석적이다. 실제로는 비어 있는 기표와 떠다니는 기표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내부 경계가 전복되거나 바뀌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사회란 존재하지 않으며, 전복적인 경향에 의한 안정성의 위협이 무제한적으로 일어나는 유기적 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포퓰리즘, 정치, 재현

 

포퓰리즘 개념에 대한 일관성 있는 서술을 위해 지금까지 했던 주장을 엮어 보자. 개념을 정교화하기 위해 다양한 차원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과정은 분산된 특징들을 단순히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전체로서 이론적으로 접합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인민적 주체를 구축하고자 하는 정치적이고 담론적인 실천이 존재하는 경우에만 포퓰리즘을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주체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았듯이 사회 공간을 두 진영으로 나누는 내부의 경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분할의 논리는 요구의 변별적 성격에 비해 등가적 계기가 우세한 상황에서 사회적 요구들 사이에 등가 사슬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좌우된다. 마지막으로, 등가 사슬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으며, 등가 사슬을 전체로 의미화함으로써 일관성을 부여하는 요소에 의해 통합되어야 한다. 이 요소를 우리는 비어 있는 기표라고 불렀다.

 

나의 관점에서 이것들은 모두 포퓰리즘의 범주를 정의하기 위해 고려되어야 하는 구조적 특징들이다. 알다시피, 내가 제안하는 포퓰리즘 개념은 엄격하게 형식적이다. 왜냐하면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모든 특징이 그러한 형식과 접합되는 실제 내용과는 무관한 특정한 접합의 양식, 즉 차이의 논리를 넘어서는 등가 논리의 우위와 배타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장의 시작 부분에서 ‘포퓰리즘’이 존재적 범주가 아니라 존재론적 범주라고 주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포퓰리즘을 정의하려는 대부분의 시도는 특정한 존재적 내용으로부터 그 특수성을 찾고자 했으며 결과적으로 넘쳐나는 예외로 인해 경험적인 내용을 선택하거나 개념적 내용으로 번역할 수 없는 ‘직관’에 호소하는 두 가지 예상 가능한 결과로 자멸했다.

 

개념화의 수준을 내용에서 형식 수준으로 대체하는 것은 정치적 형식을 사전에 구성된 집단의 통일성으로 환원하는 나이브한 사회학주의(sociologism)을 피할 수 있다는 명백한 장점 외에도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우리는 포퓰리즘이 만연하게 나타난다는 문제, 즉 포퓰리즘이 사회-경제적 구조의 어느 지점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반복되는 문제를 대처할 수 있게 된다. 포퓰리즘이 등가의 논리의 우세와 도전자를 호명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정치적 경계라는 특징에 의해 정의된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러한 접합 논리를 토대로 하는 담론은 사회-제도적 구조 안의 어느 장소에서도 - 후견주의적 정치 조직, 정치 정당, 노동조합, 군대, 혁명 운동 등 어디에서도 - 만들어질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이런 방식을 통해 동시대 정치의 장면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무언가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완전히 반대되는 정치적 기호들의 운동 사이에서 급진적인 저항의 기표들이 순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해방전쟁(1943~45) 동안 이탈리아에서 마치니주의(Mazzinism)와 가리발디주의(Garibaldianism)의 기표가 순환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기표는 이탈리아에서 리소르지멘토(Risorgiemnto)로 거슬러 올라가는 급진적인 저항의 기표였다. 파시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이 기표를 그들의 담론에 접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이 기표들은 다양한 정치적 접합의 형태와 관련하여 부분적인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기표들은 급진주의적 차원을 여전히 유지하지만 그러한 급진주의가 좌파적 혹은 우파적 방향으로 이동할지는 사전에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들은 우리가 논의했던 의미에서 떠다니는 기표들에 해당한다. 누군가에게 어떤 사회 집단이 이런 포퓰리즘적 상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느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포퓰리즘적 상징이 형성하는 등가 사슬은 많은 사회적 영역을 가로지르며, 이들이 의미화하는 급진주의는 정반대의 정치적 운동의 기호와 접합될 수 있다. 포퓰리즘이 접합의 형식적인 원칙으로 여겨질 경우에만 이런 기표의 이동을 설명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정치적 국면에 구현된 특정한 내용 배후에 존재하는 원칙을 도출하는 방식으로는 이런 이동을 설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포퓰리즘 문제를 형식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라면 다루기 힘든 문제들을 다룰 수 있게 한다. 어떤 운동이 포퓰리즘적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애초에 잘못된 질문이다. 우리는 대신에 어디까지를 포퓰리즘 운동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알다시피, 이 질문은 어느 정도까지 등가의 논리가 담론을 지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같다. 우리가 설명한 정치적 실천들을 스펙트럼 내의 다양한 지점이라고 본다면, 스펙트럼의 한쪽 극단은 순수한 차이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제도주의 담론이 될 것이며, 다른 쪽 극단은 등가 논리가 전혀 도전받지 않는 포퓰리즘 담론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극단은 실제로는 도달할 수 없다. 순수한 차이만이 존재한다면 사회는 행정에 의해 지배될 것이며 사회적 요구들은 모두 개별화되어 내부의 경계를 둘러싼 투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도 없을 것이다. 순수한 등가만이 존재한다면 ‘사회적 요구’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를 잃을 정도로 사회적 연결이 소멸될 것이다. 이는 19세기 텐(Taine), 르 봉(Le Bon), 시겔레(Sighele)와 같은 19세기 ‘대중 심리학(mass psychology)’ 이론가들이 묘사했던 ‘군중(crowd)’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여기서 순수한 차이와 순수한 등가라는 두 가지 극단의 불가능성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등가 논리에 의한 차이의 전복은 차이의 완전한 제거를 의미하지 않는다. 등가 관계는 모든 차이들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용해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이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등가 관계가 제거하는 것은 요구들 사이의 분리이지, 요구들 자체가 아니다. 만약 교통, 주택, 고용과 관련된 일련의 요구들이 충족되지 않았다면, 요구들 사이의 등가 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 결과 인민적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이런 관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요구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등가는 서로 다른 차이들을 접합하는 특정한 방식에 해당한다. 등가와 차이 사이에는 복잡한 변증법과 불안정한 타협이 존재한다. 다양한 역사적 상황들은 등가와 차이 모두의 존재를 필요로 함과 동시에 양자 사이의 긴장을 전제한다.

 

(1) 제도적 체계가 사회적 요구들을 개별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이 점점 줄어들수록 사회 내부의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두 개의 적대적인 등가 사슬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람시가 ‘유기적 위기’라고 불렀던 형태의 위기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포퓰리즘적 혹은 혁명적 파열을 의미한다.

 

(2) 포퓰리즘적 파열로 인해 만들어진 체제는 서서히 제도화되며, 다시의 차이 논리가 우세해지기 시작한다. 이제 등가적/인민적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입에 발린 소리(langue de bois)가 될 것이며 정치는 점점 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에서 인민적 주체는 초기에는 데스카미사도(descamisado, sans-culottte와 유사한 의미)[각주:7]이었지만 점차 ‘조직화된 공동체’(la comunidad organizada)라고 불리는 것을 토대로 하는 제도화된 담론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등가 담론이 국가의 입에 발린 소리가 될 경우 등가 담론과 실제 요구들 사이의 비대칭을 의미하는 또 다른 변형을 발견했다. 그것은 실제 사회적 요구와 지배적인 등가 담론 사이의 간극이 거질 경우 사회적 요구의 좌절과 등가 담론의 폭력적인 강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많은 아프리카 정권들은 이런 패턴을 따랐다.

 

(3) 일부 지배 세력은 반제도적 담론을 통해 내부의 경계를 끊임없이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일반적으로 실패한다. 프랑스에서 자코뱅주의(Jacobinism)에서 총재정부(Directorie)로 이행하는 과정, 그리고 중국의 ‘문화 혁명’의 다양한 주기를 떠올려 보자.

 

어떤 운동 혹은 이데올로기(혹은 이들 모두를 포함하는 담론)은 그 내용이 등가의 논리에 의해 접합되는 정도에 따라 더 포퓰리즘적이거나 덜 포퓰리즘적이다. 이것은 어떤 정치 운동도 포퓰리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경계를 만들고, 적에 대항하여 인민을 호명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완전히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 포퓰리즘적 특징은 공동체의 미래를 둘러싼 투쟁이 균형 상태에 있는 정치적 이행기에 특히 잘 드러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포퓰리즘의 정도는 정치적 대안들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깊냐에 따라 달려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만약 포퓰리즘이 주어진 사회의 미래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공동체 공간 내에서의 다양한 급진적이고 대안적인 시도가 이루어지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면, 포퓰리즘은 정치와 동의어가 아닌가? 우리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포퓰리즘은 도전자들을 역사적 행위자로 만듦으로써 제도적 질서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행위자는 현재 상황이 조건지어진 방식과 관련하여 타자인(other) 행위자이다. 정치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현 상태를 체제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거나 반대로 기존의 잠재적인 대안들에 대항하여 체제를 방어하는 경우에 정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포퓰리즘의 종말과 곧 정치의 종말이 동의어인 이유이다. 공동체가 하나의 총체로 여겨지고, 그러한 총체성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서로 구별될 수 없을 때 정치는 종말한다. 이 경우 내가 이 장에서 주장했듯이 정치는 행정으로 대체되고 사회적 분열의 흔적은 사라진다. 절대군주의 분열되지 않은 의지인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계급 없는 사회에 관한 마르크스의 보편적인 주체라는 정 반대의 기호는 똑같이 정치의 종말을 의미한다.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적인 국가와 국가의 소멸은 모두 사회적 분열의 흔적을 없애는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의 가능성 조건과 포퓰리즘의 가능성 조건은 같다. 그것은 모두 사회적 분열을 전제로 한다. 정치와 포퓰리즘 모두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한 부분(도전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적대적인 방식으로 공동체 전체를 표현하는 모호한 존재인 데모스(demos)를 발견하게 된다.

 

이 결론은 우리를 마지막 고려 사항으로 이끈다. 정치가 존재하는 한(그리고 또한 우리가 맞다면 정치의 파생어인 포퓰리즘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사회적 분열을 겪을 것이다. 사회적 분열은 필연적으로 공동체 내의 한 부분이 공동체 전체를 표현하고 재현함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정치적인’ 사회에 있는 이상 이 간극은 제거될 수 없다. 이는 ‘인민’이 오직 재현 관계의 지형에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인민’을 출현하게 하는 재현의 망(matrix)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이 망은 (1) 보편적 재현의 기능을 가정하는 특정한 특수성, (2) 등가 연쇄의 구축을 통한 이러한 특수성의 정체성의 뒤틀림, (3) 스스로를 전체로서의 사회로 재현하는 대체의 결과로 등장하는 인민 진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고려 사항은 몇 가지 중요한 결과를 초래한다. 첫째로, 포퓰리즘 담론에서 작동하는 ‘인민’은 일차적인 소여(datum)가 아니라 구성물이다. 포퓰리즘 담론은 단순히 특정한 유형의 고유한 인민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정체성을 구성한다. 둘째로, 결과적으로 재현 관계는 다른 곳에서 구성된 일차적인 사회적 현실을 단순히 반영하는 이차적인 수준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사회가 구성되는 일차적인 지형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종류의 정치적 변화는 재현 과정에 참여하는 요소의 내적인 전치에 의해 일어날 것이다. 셋째로, 공동체 공간의 보편성과 실제로 존재하는 집합의지의 특수성 사이의 간극이 커지는 결과 재현은 루소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더 이상 차선책(second best)가 아니다. 반대로 공동체 전체와 집합의지 사이의 비대칭은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흥미로운 게임의 근원이며, 우리는 거기서 한계 뿐만 아니라 가능성도 발견한다. 궁극적인 보편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로 인해 많은 중요한 결과가 초래된다. 그 중에서 ‘인민’의 출현은 특히 중요하다.

 

 

 

  1. [역자주] 디즈레일리는 1867년 영국 보수당 당수로 당선되어 13년간 보수당 개혁을 주도한 정치인이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 귀족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두 국민(two nations)으로 나눠져 있다고 진단하면서 보수당이 두 국민이 아니라 하나의 국민을 대변해야 한다는 일국 보수주의(One Nation Conservatism)를 주장했다. [본문으로]
  2. [역자주] 생시몽은 산업이 발전한 미래 사회에서 정치 영역은 사라지고 경제 영역만 남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미래 사회에서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사라지고 사물에 대한 인간의 관리만이 남는다. 그렇게 되면 모든 학문은 경제학으로 환원되고 정치 기구인 국가도 소멸하게 된다. [본문으로]
  3. [역자주] 전기 회로가 합선되었다는 뜻으로 (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주체가 언어의 질서 안에서 안정된 의미를 얻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단절 혹은 대타자와의 간극을 의미하는 개념으로도 쓰인다. [본문으로]
  4. [역자주] 1980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시작된 노동조합 운동은 최초에는 그단스크에서 일하던 여공 안나 발렌티노비즈(Anna Walentynowicz)의 복직을 요구하는 투쟁으로 시작하였으나 이후에 노동자의 임금 이상과 노동자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대규모의 연쇄 파업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연대(Solidarnoś)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독립자치노동조합의 이름으로 이후 폴란드 노동운동의 상징적 단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5. [역자주]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제3의 길을 주장하면서 좌파와 우파의 전통적인 관계를 혁신하는 혁신 중도를 표방하였다. 블레어는 radical을 기존의 전통 좌파의 ‘급진’과 구분되는 ‘혁신’의 의미로 활용하였다. [본문으로]
  6. [역자주] ‘명백한 운명’은 프로테스탄트의 기독교 정신과 건국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북미 대륙 전체로 확장하라는 것이 신의 계시이며, 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미국인의 운명적 과업이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용어이다. 1845년 뉴욕의 칼럼니스트였던 설리번(John O’ Sullivan)이 칼럼에서 처음 사용했고 이후 미국의 정복전쟁과 팽창주의를 상징하는 용어로 활용되었다. [본문으로]
  7. [역자주] 데스카미사도란 스페인어로 ‘셔츠를 입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초기 페론주의의 지지층인 노동자 계급을 지칭하는 용어로 활용되었다. 프랑스혁명 당시 귀족들이 자주 입었던 퀼로트를 입지 않은 민중 세력을 의미하는 단어인 상퀼로트(sans-culotte)와 유사한 방식의 표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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