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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Writing/인-무브 서교연

커먼즈의 이론적 지형

by 인-무브 2025. 7. 17.

커먼즈의 이론적 지형

 

권범철 (문화/과학 편집위원,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이 글은 <문화/과학> 101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인용 시 해당 호를 참고바랍니다.

 

 

오늘날 커먼즈(commons)와 그 언저리에 있는 말들이 많은 주목을 받는 건 분명해 보인다. 커먼즈를 비롯한 그 주변 영역은 국내에서 주로 공동, 공통, 공유 등과 -재, -자원, -장, -체, -경제, -도시 등이 조합되어 다양한 말로 불린다. 그것은 단순히 명칭의 차이만은 아니다. 공동자원, 공동체, 공통재, 공통장, 공통체, 공통도시, 공유재, 공유경제, 공유도시 등 저 어휘들을 적절히 조합하면 전 세계의 수많은 풀뿌리 운동이 수용하는 원리부터 나스닥에 상장된 어느 유니콘 기업이 지향한다는 경제까지 아우를 수 있다. 이 모든 개념들과 실천, 정책, 심지어 사업 수단들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이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등에 따라 그 모든 커먼즈들—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은 차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가 커먼즈를 둘러싼 다양한 이론적·실천적 지형의 굴곡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지형의 굴곡이 바로 이 글에서 미흡하게나마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커먼즈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해에서 시작해보자.

 

 

1. 공유지, 주인 없는 땅?

커먼즈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해는 그것을 다수가 공동으로 이용하는, 혹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재화로 생각하는 것이다. 경제학자 새뮤얼슨과 머스그레이브는 재화 분류를 위해 각각 경합성과 배제성이라는 기준을 도입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경제학 교과서에서도 여전히 쓰이는 분류법의 기초가 된다.[1] 즉 경합성과 배제성의 유무에 따라 2×2의 표로 재화를 분류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합성은 한 사람의 소비가 다른 이용자가 이용할 수 있는 전체 양을 차감하는 정도를 말한다. 내가 이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면 당신이 먹을 수 있는 부분은 줄어든다. 배제성은 사람들을 재화의 소비에서 배제하는 정도를 말한다. 광장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으므로 배제성이 없지만 누군가의 담장 안에 있는 마당은 마음대로 이용하기 어려우므로 배제성이 있다.



표 1. 재화의 한 유형으로서의 커먼즈

  이용의 차감성
높음(‘경합’재) 낮음(‘비경합’재)
잠재적 수혜자 배제성 높음 사유재: 음식, 옷, 자동차 등 요금재(클럽재): 극장, 프라이빗 클럽, 어린이집, 케이블 텔레비전
낮음 공동자원(Common-pool resources): 지하수층, 호수, 관개 시스템, 어장, 숲 등 공공재: 공동체의 평화와 안보, 국방, 지식, 소방, 일기 예보 등
자료: Ibid., 38.

 

이러한 기준을 척도로 삼은 분류법에 따르면, 배제성과 경합성이 모두 낮으면 공공재, 배제성이 높지만 경합성이 낮으면 클럽재(혹은 요금재라고도 부른다), 배제성은 낮지만 경합성이 높으면 공통재화(common goods),[2] 배제성과 경합성이 모두 높으면 사유재다. 경제학 교과서는 이러한 재화 분류법을 기술한 뒤 일반적으로 그 유명한 ‘공유지의 비극’을 소개한다.[3] 그 비극을 그린 하딘의 사고 실험에서 공유지는 주인 없는 목초지로 등장한다. 주인이 없기 때문에 배제성이 없고, 목동들은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가능한 많은 양을 데려온다. 그 결과 구름 떼처럼 모인 양들이 결국 목초지를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이 공유지의 비극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첫째, 이 목동들이 원자화된 개인으로 전제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다는 가정은 경제학자들에게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관련하여 둘째, 이 재화 분류법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이용자들이 서로 간에 혹은 재화와 맺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재화 자체의 속성이다. 주인 없는 땅의 풀은 배제성은 없지만 경합성은 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만(배제성 없음) 누군가의 소비는 자원의 전체 총량을 차감하여 다른 누군가의 소비를 제한한다(경합성 있음). 호수의 물고기는 누구나 낚을 수 있지만 그 결과 다른 누군가가 잡을 수 있는 물고기는 줄어든다. 그러므로 이 물고기는 배제성이 없고 경합성이 있는 공통재화다. 도시의 대표적인 공공 공간으로 이야기되는 광장은 어떤가? 광장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내가 이용하더라도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으나) 다른 누군가가 이용할 수 있으므로 경합적이지 않다. 따라서 광장은 배제성과 경합성이 없는 공공재다. 어쩌면 우리는 이 두 척도를 사용하여 세상의 모든 재화를 <표 1>에 있는 네 개의 칸 속에 깔끔하게 집어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적 맥락을 소거한 이러한 분류법을 우리는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재화들을 (그것의 속성이 아니라) 그 재화를 이용하는 주체들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고할 때 이 분류법은 완전히 흔들릴 수 있다. 그리고 2×2의 표 안에 그어진 구분선은 넘을 수 없는 담이 아니라 다공성을 지닌 막으로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데 안젤리스는 우리가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엄격한 가정을 완화하고 사회운동과 커먼즈의 관습을 따른다면 공공재와 클럽재와 공동자원(CPR)의 구별은 흐릿해진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공통재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부분집합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 사유재의 경우에도 그러하다.”[4] 가령 유럽의 보건 서비스의 경우,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사람들을 배제하기 어려우며 내가 치료를 받아도 다른 사람이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경합성이 낮다. 즉 우리는 그것을 공공재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국가 보건 체계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은 보편적인 서비스에 요금을 부과하거나 보장성을 낮추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공공재가 사유재의 성격을 조금씩 갖추면서 그에 가까운 형태로 점점 변하는 모습이다. 다른 한편 전기 드릴은 내가 이용하면 당신이 이용할 수 없고, 나의 창고에 있다는 점에서 사유재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공구를 다른 방식으로 공유할 수도 있다. 마을회관에 공동 물품으로 비치된 전기 드릴은 여전히 동시에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시간의 차원을 늘리면(그러니까 차례를 기다리면) 함께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인터넷에서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여러 비물질 재화를 본다면 기존의 구분법은 더 설득력을 잃는다. 인터넷에서 우리가 이용하는 대부분의 재화는 배제하기 어렵고 차감성이 거의 없다. 음악 파일은 그 자체만 보면 거의 아무런 비용 없이 복제할 수 있기에 배제와 경합의 의미가 없다.[5] 그렇지만 그것이 상품(사유재)이 될 수 있는 것은 지적 재산권으로 대표되는 인위적인 법적 장치 때문이다.

 

요컨대 어떤 재화가 공공재, 사유재, 클럽재 혹은 공통재화가 되는 것은 재화의 속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놓인 사회적인 맥락 때문이다. 우리가 그 재화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서로 어떤 가치를 창출하느냐에 따라 사물은 사유재도 클럽재도 공공재도 공통재화도 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물이 객관적인 지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 어떤 쓸모를 가진 사물이 있다. 그러나 그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고립된 사물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특정한 관계 속에 있고 그 속에서 성격을 부여받는다. 즉 우리 앞에 있는 재화는 어떤 객관적인 사용가치를 제공하면서도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주관적인 성격 또한 갖는다.

 

공통재화 역시 마찬가지다. 맑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상품을 부의 기초라고 생각한 것과 유사하게 데 안젤리스는 탈자본주의 사회의 부는 공통재화의 집합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우선 공통재화가 다수에 대한 사용가치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것은 탈자본주의적 의미에서 공통재화를 정의하기에 충분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도 다수를 위한 사용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통재화와 상품의 차이는 이 ‘다수’에서 생겨나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이용하는 다수가 수동적인 이용자라면 탈자본주의적 의미에서 이 다수는 소유권(property rights)과는 다른 의미에서 재화에 대한 주인의식(ownership)을 갖는 복수의 공통인(commoner)들이다. 이렇게 공통재화를 이중적으로—한편으로는 사용가치로(객관적),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관리하는 공통인들과 관계 맺는 것으로(주관적)—사고함으로써 공통재화를 체계의 한 요소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 “다수가 주인의식에 대한 주장을 지속하는 만큼, 공통재화는 공통 체계, 즉 간단히 말해서 커먼즈의 한 요소로 전환된다.”[6] 이렇게 데 안젤리스의 논의에서 공통재화(common goods)와 커먼즈(commons)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전자는 후자를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이다. 따라서 커먼즈는 단순히 재화로 축소될 수 없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그것은 공통의 재화와 그것을 둘러싼 집합적 주체(공통인) 그리고 공통재화를 함께 생산하고 유지하는 활동, 즉 공통하기(commoning)가 어우러진 사회 체계다. 그러므로 커먼즈는 다수가 이용하는 공동의 ‘재화’가 아니다.

 

 

2. 공동자원 관리 제도

하딘은 공유지(커먼즈)를 주인 없는 땅으로 생각했지만, 그래서 누구나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지만 볼리어에 따르면 이것은 커먼즈가 아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딘은 커먼즈와 개방접근 체제를 혼동하고 있다. 하딘이 생각한 것은 아무나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개방접근 체제이고 커먼즈에는 그와 달리 재화를 관리하는 공동체와 규약이 있다는 것이다.[7] 따라서 그는 현실의 커먼즈에서 하딘이 머릿속으로 상상한 비극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중세 영국 장원의 커먼즈는 개방접근 체제와는 다른 작동 모습을 보여준다. 중세 장원의 커먼즈, 특히 숲의 작동 방식을 간단히 살펴보자.[8]

 

중세의 자급자족 경제 단위인 장원에서 숲 커먼즈는 중요한 경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중세 연구자 비렐에 따르면 당시 나무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널리 사용되었다. 나무는 건물을 짓고 가구를 만들며 불을 지피고 요리를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토탄과 석탄이 연료로 이용되긴 했지만 나무에 비하면 이용량이 매우 적었고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 또한 나무는 경작지에 울타리를 치거나 삽, 갈퀴, 괭이, 도리깨 같은 도구를 만드는 데도 필수적이었다. 숲이 농촌 공동체에 제공한 가치는 목재의 공급에 그치지 않았다. 숲은 말과 소, 양을 방목하기 위해 필요한 초지를 제공했으며, 도토리와 너도밤나무 열매가 있는 돼지 먹이의 공급처이기도 했다. 이처럼 숲은 무수한 필요에 부응했다.[9] 숲의 “나무가 바로 에너지의 원천이었다.”[10] 그렇다면 이 자원에 대한 접근은 어떻게 이뤄졌는가?

 

12세기와 13세기에 이미 오랜 시기에 걸쳐 작동하던 공통권(common rights)이 그러한 접근을 보장했다. 일반적으로 영주가 숲이 있는 공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공통인들은 이 권리에 따라 숲의 산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기록으로 명시되기보다 대부분 관습에 따라 운영된 그 권리는 세 가지 기본적인 필요, 즉 건축과 울타리 치기와 땔감을 위한 나무를 보장했다. 이것은 각각 집수리권(housebote), 산울타리권(hailbote), 땔감권(firebote)으로 불리며, 일반적으로 에스토버스(estovers)로 통칭되었다.[11] 즉 에스토버스는 집을 짓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불을 지피기 위해 필요한 목재를 취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데, 코크에 따르면 “생계 자급, 영양 섭취 및 섭생”을 뜻하기도 한다.[12] 따라서 에스토버스란 “관습에 따라 숲에서 채취하는 것을 가리키며 종종은 생계 자급 일반을 가리킨다.”[13] 숲의 가치가 목재의 공급에만 한정되지 않은 것처럼 공통권 또한 집, 울타리, 땔감에 대한 권리에 국한되지 않았다. 삼림지대에서 중요한 두 번째 공통권은 동물 방목과 돼지 먹이에 대한 권리로 이뤄졌다. 숲과 삼림지대 목초지는 보통 1년 내내 (게걸스러운) 염소를 제외한 모든 가축에게 개방되었다. 이렇게 13세기 소작인의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목재와 삼림지대 목초지에 대한 접근은 관습적인 권리에 따라 보장되었다.[14]

 

그러나 그러한 접근권은 무제한적이지 않았다. 삼림지대를 지속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관리가 필요했고 그에 따라 에스토버스의 행사는 관습이나 규칙에 따라 제한되었다.

 

그에 따라 특정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나무의 종류는 보통 명시되어 있다. 특히 참나무는 울타리를 치거나 땔감으로 허비하기에는 너무 귀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대개 건축 목재로만 사용하도록 지정되거나 에스토버스에서 완전히 제외될 수도 있었다. 오리나무, 버드나무, 가시나무, 호랑가시나무처럼 건축 목재로는 다소 부적합하고 저목림 작업에 적합하며, 상당히 빠르게 다시 자라는 흔한 나무들이 보통 울타리 치기나 땔감으로 지정되었다. 땔감을 위해 녹림을 이따금씩 벨 수 있긴 했지만 땔감권은 보통 죽거나 바람에 떨어진 나무로 한정되었다. 물론 정당하게 ‘죽은’ 혹은 ‘바람에 떨어진’ 나무가 무엇인지는 장작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란과 해석의 대상이었다. 그에 따라 남용을 제한하기 위해 정교한 조항이 발달하기도 했다.[15]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소작농의 삶의 재생산에 필수적이었던 커먼즈는 아무런 규칙 없이 작동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볼리어의 말을 빌리면 “커먼즈에는 경계, 규율, 사회적 규범, 무임승차에 대한 규제가 있다.” 하딘은 커먼즈를 “주인 없는 땅”과 혼동했으며 그에 따라 커먼즈를 실패한 자원 관리 패러다임으로 오도했다.[16] 하지만 역사 속 커먼즈의 모습은 주인 없는 땅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즉 모두가 주인인 시스템에 가까워 보인다.

 

엘리너 오스트롬은 수많은 경험 연구를 통해 이것을 입증한 인물로 이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그는 주로 연안 어장, 소규모 목초지, 지하수 지대, 관개 시설, 그리고 지역 공동산림 등의 사례를 조사해 하딘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비극’을 실제 사례로 반박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또한 여러 사례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자원 제도를 위한 디자인 원리를 제시한다.[17]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스트롬의 관심사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혹은 공정하게 관리하는 방안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원 관리 모델로서 국가냐 시장이냐의 이분법을 거부했고 사람들이 공동으로 자원을 관리할 수 있음을 입증했지만 커먼즈 바깥의 상황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카펜치스는 오스트롬과 그의 동료들이 자본주의적 축적에 적대적이고 전복적인 체제와 자본주의적 축적과 양립 가능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를 구별하는 문제에 무관심하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공동자원 체제가 자본주의 체계의 맥락에서 수행된다고 가정하며, 실제로 그들 논의의 대부분이 상품생산 커먼즈—바닷가재 어장에서 알프스 산의 목초지까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18]

 

즉 그들의 관심사는 특정 영역 안에 있는 자원을 어떻게 잘 관리할 수 있는가에 있다. 커먼즈가 어떻게 자신을 에워싼 자본주의에 대안적인 체계로 자라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공통자산 체제의 내생적인 변수에 집중한다. 공통자원의 규모, 그 자원 단위를 측정하는 비용, 자원의 재생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 비공통인을 배제하는 비용 등등. 이들에게 어떤 자산 체제가 커먼즈로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커먼즈 외부와의 힘 관계가 아니라) 이와 같은 내생적 변수에 달려 있다. 요컨대 카펜치스는 이들이 커먼즈를 좋은 제도 설계의 문제로 이해한다고 주장한다.[19] 그 설계가 더 넓은 사회적 맥락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의 문제에는 무관심한 채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오스트롬에게서 커먼즈가 외부와 맺는 관계나 상이한 사회적 세력 간의 적대 같은 정치의 문제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중세 장원의 숲 커먼즈가 보여주는 것은 커먼즈 내부에서 공동으로 이뤄지는 규약과 자급만이 아니다. 공통인들이 자원을 소유하지 않았음에도 관습적으로 그리고 집합적으로 그것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주들과의 오랜 투쟁을 통해 그러한 권리를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즉 커먼즈는 그 투쟁을 통해 ‘생산’되었다. 디자인 원리나 내생적 변수만으로 커먼즈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이제 우리는 커먼즈를 단순히 자원 관리 제도가 아니라 좀 더 넓은 사회적 전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들의 논의를 두 부문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3. P2P 협력 생산 모델

오스트롬에게 커먼즈가 주로 자원을 관리하는 제도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면 오늘날 많은 운동 진영에서 이야기하는 커먼즈는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된다. 예를 들어 ‘커먼즈 전략 그룹(The Commons Strategies Group)’을 함께 설립하여 『커먼즈의 부(The Wealth of the Commons)』 『커머닝의 패턴(Patterns of Commoning)』 같은 책을 출판하고 콘퍼런스나 프로젝트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온 데이비드 볼리어, 실케 헬프리히, 미셸 바우웬스가 그렇다. 이들에게 커먼즈는 자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자원 관리 체계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볼리어는 자신의 책에서 다양한 커먼즈를 소개하는데 여기에는 원주민들의 자급 공유토지, 문화, 지식 등을 비롯하여 디지털 커먼즈(자유 소프트웨어와 이를 둘러싼 라이선스 CCL, GPL 등), 사회 커먼즈(시간 은행, 혈액 및 장기 기증 시스템 등), 보다 큰 규모와 관련된 국가 신탁 커먼즈와 전 지구적 커먼즈, 지각과 존재 방식으로서의 커먼즈까지 포함된다. 이처럼 그의 논의에서 커먼즈는 자원 관리 체계를 넘어서 “문화적 정체성”이자 “삶의 방식”,[20] “윤리와 내적 감성”의 문제로 확장된다.[21] 그뿐 아니라 커먼즈는 “지적인 틀과 정치 철학” “사회적 태도와 헌신” “실험적인 존재 방식이자 심지어는 정신적 성향” “가장 중요한 세계관”으로까지 정의된다.[22]

 

데 안젤리스가 커먼즈를 주체와 재화와 활동이 어우러진 사회 체계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게, 볼리어 역시 커먼즈를 자원과 공동체와 사회적 규약이라는 세 가지가 상호 의존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통합된 패러다임으로 정의한다.[23] 바우웬스가 정의하는 방식도 거의 같다. 그는 커먼즈를 협력의 대상(즉 공유된 자원)과 활동(즉 자원을 유지하고 공동 생산하는 공통하기)과 거버넌스 양식(즉 자원을 보호하고 사용량을 할당하는 결정을 내리는 방식)의 조합으로 정의한다.[24] 이들이 커먼즈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로 이해하는 것은, 조금씩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같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집합적인 주체(혹은 거버넌스)와 공통의 재화 그리고 이 둘을 잇는 활동(규약 등을 포함한 공통하기)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구성 요소들이 결합한 무언가를 ‘사회 체계’로 정의하는 것과 ‘패러다임’ 혹은 ‘조합(combination)’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커먼즈에 대한 상이한 시각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데 안젤리스의 논의에서 하나의 체계로 정의된 커먼즈는 상이한 가치를 지향하는 다른 체계들(국가, 자본 등)과의 길항관계 속에 있다. 그의 논의에서 커먼즈는 미리 정의되지 않으며 그 관계를 통과하는 투쟁 과정에서 출현한다. 이와 달리 ‘패러다임으로서의 커먼즈’는 그러한 힘 관계보다는 새로운 인식 틀에 기초한 이상적인 모델 수립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바우웬스는 그러한 모습을 강하게 드러낸다. 먼저 그의 논의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바우웬스는 커먼즈가 주목받게 된 계기로 두 가지를 든다. 환경 위기와 새로운 디지털 커먼즈의 출현이 그것이다. 오스트롬이 실제 현실의 커먼즈가 환경을 잘 보존해왔음을 보여준 이래 자연자원 커먼즈라는 아이디어가 다시 부활했고 디지털 커먼즈는 P2P 방식으로 커먼즈의 경험을 선사했다. 그는 P2P 생산이, 커먼즈가 중심이 된 사회의 미래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25] 그에 따르면 커먼즈 기반 P2P 생산의 생태계는 생산 공동체와 커먼즈 지향 기업 연합(commons-oriented entrepreneurial coalition) 그리고 호혜 협회(for-benefit association)의 세 기관으로 구성된다. 생산 공동체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기여자들과 그들이 일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커먼즈 지향 기업 연합은 생산 공동체와 이들이 생성하는 커먼즈 자원에 기초해 시장을 위한 부가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이윤이나 생계를 확보하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업가가 공동체 혹은 커먼즈와 맺는 관계가 생성적이냐 추출적이냐 하는 것이다. 추출적인 기업이 생산 공동체와 어떤 이익도 공유하지 않으면서 이윤 극대화에 주력한다면(바우웬스는 페이스북, 우버, 에어비앤비를 예로 든다) 생성적인 기업은 공동체와 커먼즈를 중심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이들의 생성과 유지에 복무한다. 마지막으로 호혜 협회는 협력 인프라를 지원하고 커먼즈 P2P 생산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독립적인 거버넌스 기관이다. 이 기관은 대부분 비영리 단체로서 위키피디아 재단이나 자유/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재단 등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전통적인 비정부 기구가 희소성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것에 반해 호혜 협회는 풍요의 관점에서 운영된다. 협력 인프라를 유지하면서 더 많은 기여자들이 P2P 생산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바우웬스는 이렇게 커먼즈 기반 P2P 생산의 세 가지 요소, ① 생산 공동체, ② 커먼즈 지향 기업 연합, ③ 호혜 협회를 사회라는 거시적 차원으로 확대 적용한다. 그 결과 이 세 가지 요소는 사회적 차원에서 각각 ① 시민사회, ② 시장 사업체, ③ 국가로 정의된다. 이때 시장과 국가는 기존 기능과는 달리 커먼즈의 유지, 확대에 복무하는 형태로 정의된다. 현재의 국가는 기업의 이익에 복무하는 “시장 국가”지만, 커먼즈 기반 P2P 생산으로부터 출현하는 사회운동들이 국가를 다른 형태로, 즉 “파트너 국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불평등한 계급사회에 살고 있는 한 국가 기반의 메커니즘은 거의 틀림 없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26]

 

요컨대 바우웬스는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출현한 P2P 생산의 사회적 확장에 주력한다. 그가 말하는 P2P 생산은 단지 온라인상에서의 활동만은 아니다. 그는 지식 커먼즈와 분산된 네트워크가 “사회적 자율과 집단적 조직화의 강력한 도구”이긴 하지만 우리가 지식을 먹을 수는 없기에 그것만으로는 생계의 재생산을 담보할 수 없으며, 그에 따라 디지털과 물리적인 것(the physical)이 결합한 피지털(phygital)의 단계로 나아가야 하고 그것이 도시 커먼즈라는 형태로 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27] 즉 도시 커먼즈는 온라인 P2P 생산이 물리적인 옷을 입고 나타난 형태다.

 

이처럼 바우웬스는 P2P 협력을 통해 현재의 시장 중심 제도를 커먼즈 중심 사회로 재편하려고 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방안들은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전략적이다. 그는 실제로 벨기에 겐트 시의 커먼즈 이행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 계획에서도 나타나듯이, 기존의 제도를 끌어안으면서 커먼즈 활동의 인프라를 확장하려 하는 그의 전략[28]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방안처럼 보인다. 그의 계획이 우리에게 커먼즈가 중심이 된 사회의 어떤 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수립한 겐트 시 커먼즈 이행 계획이 새로운 연립정부 아래서 묻혀버린 것처럼 파트너 국가라는,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함께 해나가는 상대로서의 국가라는 관계 설정은 과연 현실적인 방안일까? ‘파트너’라는 용어가 시사하듯이 바우웬스의 커먼즈는 사회 세력들의 역동적인 역학관계보다는 그 세력들의 안정적인 관계 수립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사회의 발전을 적대적인 사회관계들의 산물이라기보다 이상적인 모델을 수립하고 그것을 도입하여 시행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데 안젤리스가 지적하듯이 이것은 “역사가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다. (…) 생산양식의 발전 역사는 대안 체계(모델)의 ‘시행’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체계는 시행되지 않으며, 그것의 우위가 출현한다.”[29] 물론 그 우위의 출현은 상이한 사회 세력들의 힘 관계에 달려 있다. 바우웬스가 커먼즈와 그 외부의 관계를 주로 ‘협력’의 관점에서 사고하면서 어떤 모델 수립에 집중할 때 그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해 보이는 방안들은 오히려 타당성을 상실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는 디지털 협력의 물질적 기반을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그가 이야기하는 P2P가 인터넷상의 활동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활동이 인터넷에 크게 기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터넷상의 ‘협력’ 활동은 광물 추출과 물 소비에 크게 의존한다. 카펜치스가 지적하듯이, “우리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수단들(대표적으로 인터넷)이 커먼즈의 파괴를 필요로 할 때 우리는 어떻게 커먼즈에 기반한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30] 이것은 중요한 물음임에도 불구하고 커먼즈 논의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로 연결될수록 우리의 존재 기반이 파괴되는 상황에 있는데도 말이다. 물질과 비물질을 아우르는 확장된 커먼즈 관점이 필요한 이유다.

 

 

4. 대안적인 생산양식의 씨앗

지금까지 언급한 볼리어, 바우웬스 등과 유사하게 커먼즈를 정의하면서도 좀 더 급진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는 자율주의와 페미니즘 계열에 속한 이들 중에서 카펜치스와 데 안젤리스 그리고 페데리치를 중심으로 논의한다. 이들의 논의가 앞서 다룬 이들과는 다른 커먼즈에 대한 이해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카펜치스는 우리가 커먼즈 담론이 불가피하게 반자본주의적이라고 잘못 가정함으로써 커먼즈 담론이 이중적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에 따른 혼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① 자본주의적 축적과 양립 가능하며 그것에 힘을 더하는 친자본주의적 커먼즈와 ② 자본주의적 축적에 적대적이고 전복적인 반자본주의적 커먼즈를 구별하면서 이 구별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논의한다. 그에 따르면 협력이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 사용된 것처럼 “커먼즈도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31] 그는 이러한 전유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주기 위해 맑스를 인용한다.

 

자본가는 단지 100명의 개별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하는 것이며, 100이라는 결합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하는 것은 아니다.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노동자들은 제각각인 사람들이며, 그들은 동일한 자본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서로 간에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들의 협업은 노동과정에 들어가면서부터 비로소 시작되지만 노동과정에서 그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소유자가 아니다. 노동과정에 들어감과 동시에 그들은 자본과 합쳐진다. (…)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은 노동자가 일정한 조건에 놓이면 무상으로 발휘되는데, 이런 조건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자본이다.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은 자본에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는 것이고, 또 다른 한편 이 생산력은 노동자의 노동 그 자체가 자본가의 소유가 될 때까지는 노동자에 의해서 발휘되지 않기 때문에 자본의 타고난 생산력, 즉 자본의 내재적인 생산력으로 나타난다.[32]

 

여기서 “무상으로 발휘되는”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은 협력으로 생산되는 공통의 부이면서, 자본이 전유하는 자본의 커먼즈라고 할 수 있다. 카펜치스는 이렇게 자본이 노동자들의 협력이 지닌 생산력을 차지하듯이 커먼즈의 공동체적 힘을 흡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오스트롬을 자본주의적 커먼즈의 이론가로 이해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오스트롬이 연구한 커먼즈 사례들은 자본주의 체계 안에 있으며, 그 커먼즈들은 시장의 작동과 어떤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오스트롬이 제시한 공동자원 설계 원리는 일종의 기업이 사용하는 규칙으로 이해된다. 즉 카펜치스가 이해하기에, 공동자원 관리 체계로서 오스트롬의 커먼즈는 비자본주의적인 실천이 아니라 최대의 효율성을 위해 선택된 자원 관리 양식일 뿐이다.

 

자본에 의한 커먼즈의 보다 명시적인 흡수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위기에서 비롯된다. 신자유주의적 사유화가 초래한 저항들(멕시코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 봉기와 볼리비아 코차밤바의 물 전쟁은 이 저항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로 인해 세계은행 같은 신자유주의의 첨병은 커먼즈를 재평가하기 시작한다. 카펜치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사고팔 수 있는 사유재산을 신자유주의적으로 편애하는 NAFTA와 WTO 협정이 마무리되어가던 1990년대 중반에, ‘대안은 없다(TINA)’던 세계은행은 내가 ‘플랜 B’라고 부르는 대안을, 다시 말해서 토지 사유화에 대한 적대적인 대응이 너무 강력하고 공격적이 되면서 그것을 모면하기 위한 정치적 입장을 신중하게 알아보고 있었다. 이 대안의 핵심 요소는 농지나 숲 커먼즈를 최소한 임시방편으로, 즉 땅이 없는 이들의 봉기나 숲의 황폐화가 영토나 인구의 보편적인 착취를 불안하게 만들 때 과도 제도로 승인하는 것이다.[33]

 

여기서 커먼즈는 신자유주의가 촉발한 자기파괴적인 경향으로부터 자본주의를 구출하기 위해 동원되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즉 자본을 넘어서는 대안이 아니라 자본이 선택한 대안으로 말이다.

 

페데리치 역시 카펜치스처럼 커먼즈의 자본주의적 전유를 우려하면서 재생산의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룬다. 그는 임금노동과 상품생산만이 아니라 재생산 노동(특히 여성들이 가정에서 수행하는)을 강조함으로써 자본이 의존하는 부불노동의 전체 범위와 투쟁의 새로운 지형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인 노동력을 무상으로 (재)생산하는 비임금 가사노동에 의존한다. 그것이 무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이 집안일이 생산적이지 않은, ‘여자가 하는 일’로 자연화되어 경제 영역 아래로 비가시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자본은 엄청난 양의 노동을 무상으로 흡수할 수 있고, 어마어마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페데리치는 이러한 흡수와 절감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34]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인클로저를 통한 토지 사유화와 더불어 새로운 성적 분업이 형성되었는데, 그 분업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은 인클로저 때문에 남성 노동자가 상실한 토지의 대체물이자 가장 기초적인 재생산 수단이 되었으며, 또 누구나 뜻대로 전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동재화(communal good)가 되었다. (…) 모든 여성이 공동재화로 변했다. 일단 여성의 활동이 비노동으로 정의되자 여성의 노동은 마치 우리가 숨쉬는 공기나 마시는 물처럼 누구나 마음껏 쓸 수 있는 천연자원으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35]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이뤄진 가장 (어쩌면 공유토지에 대한 것보다도 더) 거대한 인클로저는 여성을 (다른 무엇도 아닌) “어머니·아내·딸·미망인”[36]으로 가두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여성에 대한) 인클로저는 (공유토지에 대한) 인클로저로 땅을 잃은 남성을 위해 “새로운 커먼즈”[37]를 생산했다. 카펜치스가, 맑스가 이야기한 생산과정의 협력이나 공동체의 관리를 자본의 커먼즈로 논의했다면 페데리치에게는 재생산 노동이 그러한 자본의 커먼즈로 나타난다. 따라서 페데리치의 전략은 자본이 기대고 있는 재생산 노동을 다르게 재구성하여 자본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재생산 노동의 재구성은 자본주의를 그 뿌리에서 뒤흔드는 일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페데리치는 맑스주의와 페미니즘과 커먼즈를 함께 다룬 글에서 반자본주의적 페미니즘에는 여전히 맑스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맑스를 넘어서야 할 필요 또한 분명하다고 단언한다. 이것은 맑스의 시대 이후 일어난 사회경제적 변화 때문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이해에서 나타나는 한계 때문이다. 물론 이 한계는 재생산 영역과 관련이 있다.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이, 맑스가 일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에 본질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특징, 즉 산업화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맑스가 가사노동을 무시했다고 본다. 그러나 집안일은 노동력 상품을 (재)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정말로 생산적인 노동[38]일 뿐 아니라 본성상 기계화할 수 없는 일이다. 그에 따라 페데리치는 우리가 맑스의 혁명 이론을 재고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대상은 ①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모든 일이 산업화될 것이라는 가정, ② 자본주의와 근대 산업은 착취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가정이다.

 

첫 번째 가정과 관련하여 페데리치는 이 재생산 노동의 자동화는 일부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아이를 씻기고 포옹하고 위로하고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는 일을,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혹은 환자나 노인 그리고 자급자족할 수 없는 이들을 돕는 일을 어떻게 자동화할 수 있을까?”[39] 이 자동화의 불가능성은 그 불가능한 일의 양이 “행성에서 대부분의 일을 이룰” 만큼 엄청나다는 점에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산업화 비전을 재고하도록 이끈다.

 

두 번째 가정과 관련하여 페데리치는 맑스가 감탄했던 “이른바 고도로 생산적인 산업 체계”가 실제로는 지구상의 기생체였다고 주장하면서 근대 산업을 인간 해방의 전제로 삼는 가정을 문제화한다. 맑스도 농업의 산업화가 토양을 고갈시킨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장악하면 그것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페데리치는 우리가 “자본주의적 산업과 과학과 기술을 장악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 생산수단이 만들어지게 된 착취라는 목표가 그 수단들의 구성과 작동 양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40]

 

그에 따라 페데리치가 내리는 결론은, 재생산 노동은 산업화하기 어렵고 자본주의적 생산수단은 재전유할 수 없으므로 맑스주의 계획은 “스스로 붕괴한다”는 것이다. 페데리치는 이러한 맥락에서 좀 더 집합적인 재생산 형태와 재생산 커먼즈 창출에 대한 관심과 실험이 늘어가고 있다고 본다. 즉 그의 논의에서 커먼즈라는 정치적 기획의 중심에는 재생산의 재구조화가 있다. 이것은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이나 생산의 기계화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특유의 지식과 기술을 재가치화하면서 좀 더 협력적인 재생산 노동 형태를 창출하는 것이다. 요컨대 커먼즈는 “새로운 사회의 배아적 형태”로서 그 배아 형태 속에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사회적 관계를 재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을 재현한다.[41]

 

카펜치스에게 커먼즈는 반드시 반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니며 그 성격은 외부와 맺는 관계에 달린 문제다. 페데리치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여명기 이래 자본의 커먼즈로 이용되어온 비임금 재생산 노동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카펜치스와 페데리치 모두 커먼즈가 자본과 맺는 관계에 주안점을 두고 전자가 후자를 넘어설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한다. 데 안젤리스는 이러한 논점을 좀 더 분명하게 이론화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세계, “우리의 사회적 관계들의 체계는 자본주의가 아니다.”[42] 우리의 세계는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거대하며, 자본주의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어떤 것, 즉 사회적 재생산 체계에 속한 하나의 하위 체계에 불과하다.” [43]

 

공동체 관계, 선물 교환, 서로 다른 유형의 가족 및 친족 관계, 연대와 상호부조 관계, 존재하는 것뿐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것까지, 이 모든 것들은 사회적 협력과 생산 체계들을 이룬다. 이것들은 함께 있고, 다양한 정도로 종종 교차하며,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여기는 사회적 협력과 생산 체계에 흡수되거나 그것과 직접적인 갈등을 빚는다. 이 모든 체계들의 집합뿐 아니라 그 체계들의 절합이 우리가 지구에서 살림살이를 재생산하는 방식을 정의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전체가 아니다.[44]

 

즉 자본주의는 “우리의 세계의 부분집합”[45]이며, 커먼즈도 역시 우리의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하위체계, 즉 부분집합이다. 각각의 사회 체계는 상이한 가치를 지향하면서 상이한 세계를 실현한다. 그 과정에서 각각의 체계들은 서로 충돌하고 전유하고 흡수하고 때로는 연결된다. 우리의 세계는 바로 그러한 체계들이 상호 작용하는 세력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 안젤리스는 커먼즈가 자본의 ‘외부’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카펜치스와 페데리치 그리고 데 안젤리스는 커먼즈와 자본의 길항관계에 주목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커먼즈란 언제나 투쟁을 통해서 생산된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세계 곳곳의 광장과 거리와 공동체의 실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그러한 투쟁이 품고 있는, 혹은 발현하는 가능성에서 새로운 사회의 씨앗을 찾는다. 이렇게 자본주의 이후가 아니라 자본주의에도 불구하고 발현되는 그 씨앗이 바로 그들이 이야기하는 커먼즈라고 할 수 있다.

 

 

5. 자본의 커먼즈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데 안젤리스는 커먼즈와 자본주의를, 상이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 체계로 설정한다. 그러나 카펜치스가 보여준 것처럼 자본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커먼즈를 이용할 수 있다. 공동자원을 관리하는 마을의 공동체 활동이 자본에 흡수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목초지나 어장이 있는 농·어촌 마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가령 아래의 기사를 보자.

 

‘협업’이라는 미명으로 지역의 배송직원 30명을 1개 조(캠프)로 묶어둔 것도 혁신적 노무관리 중 하나다. 조원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한 마음이나 조원들보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마음이나, 주어진 할당량을 무리하게 완수하도록 강제한다는 데서 차이는 없다. 마감 시각인 아침 7시가 다가오면 회사는 15분에 한 번씩 지역 내 남은 배송량을 조원들에게 전송한다. 본인의 할당량을 넘긴 배송을 처리하면 1건에 고작 700원을 더 받는다. 하지만 조원 내부에서 조장이 상대평가로 점수를 매길 때 이런 점이 참조되면 ‘레벨업’이 되어 월급에 반영된다. 손이 느려 할당량을 처리하지 못하는 이가 있어도 쿠팡이 배송직원 1명당 할당량을 꾸준히 높여올 수 있었던 까닭이다.[46]

 

[부산지하철 청소용역업체 소속 노동자인] 차귀순과 그의 동료들은 주 6일, 하루 두 끼를 지하철 역사 내 휴게실에서 먹는다. 어두컴컴한 휴게실에 밥상을 펴고, 각자 준비해 온 반찬통을 꺼낸다. 차귀순과 ‘언니들’이 각자 담아 온 총각김치, 김치, 무생채, 멸치볶음이 전부다. 사 쪽은 수저 하나도 사준 것이 없다. 반찬통을 꺼내다 차귀순의 동료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나 사주는 게 없으니까, 수저도 다 집에서 가져왔지. 광택 내는 세제나 부품비도 청구하는 대로 안 사주고….” 직원들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 무관심한 회사 대신 서로가 서로를 보듬으며 산다.[47]

 

첫 번째 사례에서 택배회사는 직원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감정과 성과급을 연결하여 배송 효율을 높인다. 다시 말하면 직원은 동료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협력) 혹은 더 나은 평가를 받겠다는 마음(경쟁)을 갖게 되고 이 상이한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 나타나는 결과는 어쨌든 생산성 향상이다. 즉 자본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통의 감정을 생산을 촉진하는 채찍으로 흡수한다. 두 번째 사례에서 청소 노동자들은 회사가 제공하지 않는 노동 비용(식비)을 “서로를 보듬으며” 해결한다. 그러나 이 서로를 돌보는 ‘연대’는 자본이 무상으로 노동력을 충전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자본의 커먼즈로 전유된다. 다양한 재생산 영역을 직접적인 축적의 장소로 전환해온 신자유주의에서 우리는 이러한 자본의 커먼즈를 아마도 무수히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혹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과정에 커먼즈가 전유되는 사례지만, 자본이 좀 더 적극적으로 커먼즈의 작동 방식을 모의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실리콘밸리로 통칭되는 기술기업들의 사업 방식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유지상주의가 이들을 지배할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프랭클린 포어에 따르면 기술기업들의 세계관은 그와는 무척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그에 따르면,

 

기술 대기업들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며 집단적으로 존재하도록 태어났다고 믿는다. 이들은 네트워크와 집단이 가진 지혜, 그리고 협업을 기꺼이 신뢰하며, 원자화된 세상을 복구하려는 깊은 열망을 품고 있다. 세계를 연결하면 문제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고.[48]

 

여기서 기술 대기업을 설명하는 핵심어들, 즉 ‘사회적인 존재’ ‘네트워크’ ‘협업’ ‘연결’은 커먼즈를 특징짓는 단어들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기술기업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커먼즈와 매우 유사한 지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스티브 잡스가 자기 세대의 바이블이라고 칭한 “실리콘밸리의 기원이 되는 문서”, 즉 『홀어스 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를 1960년대 대항문화의 분위기 속에서 제작한 스튜어트 브랜드는 테크놀로지에 “짜릿한 이상주의”를 불어넣었다. 그는 테크놀로지만이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도구가 개인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전 지구’(홀어스)라는 카탈로그의 이름이 시사하듯 카탈로그를 읽는 독자들이 “생태적인 사고를 하기 바랐고,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렇게 연결된 생명의 그물망 안에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기를 바랐다.” 요컨대 그가 꿈꾼 것은 “세상이 테크놀로지로 치유되고 평화로운 협업 모델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49] 포어는 이러한 이상(‘세계는 하나’)이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에서 왜곡된 방식(독점)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연결된 존재라는 브랜드의 생각은 커먼즈에서도 핵심적이다. 법학자이자 커먼즈 연구자인 우고 마테이는 기계론적 사고에서 시스템적 사고로의 전환을 커먼즈에서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는데, 이 시스템적 사고란 바로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커먼즈는 질적 관계를 표현한다. 우리가 공통재화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환원적인 진술이 될 것이다.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환경, 즉 도시 또는 농촌 생태계의 일부인 만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커먼즈인가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주체는 객체의 일부다. 이러한 이유로 커먼즈는 서로 분리 불가능하게 관계 맺고 있으며, 개인과 공동체와 생태계 자체를 이어준다.[50]

 

포어가 전해주는 브랜드의 바람, 즉 “생명의 그물망 안에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아는 것과 마테이의 주장, 즉 “우리 자신이 얼마나 커먼즈인가를” 아는 것은 표현 자체만 나란히 놓고 보면 아무런 차이도 없어 보인다.[51] 그리고 포어의 말처럼 브랜드의 이상이 오늘날 기술기업에 이어져오고 있다면, 커먼즈라는 오래된 유산이자 새롭게 부활한 투쟁의 원리도 그 기업들에 전수되고 있다고 봐도 좋을까? 정말로 그 기업들은 세계를 기술로 치유하고 하나로 연결하는가?

 

브랜드는 데 안젤리스와 달리 세력장에서 일어나는 체계들의 힘 관계를 기술의 문제로 치환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가 보기에 “정치는 인류를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컴퓨터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52] 이렇게 기술로 정치를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오늘날 기술기업들에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오늘날 기술 스타트업들은 전통적인 기업과는 달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주체로 여겨진다. 소위 공유경제(sharing economy) 기업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정보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플랫폼이라는 장에서 효율적인 연결을 통해 우리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라 공유경제, 공유도시, 공유주택, 공유자전거, 공유주방, 재능공유, 지식공유, 공간공유… 쏟아지는 공유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아무런 갈등 없이 아름다운 협력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예의 바른 행동주의”[53]를 만난다. 공유는 누가 들어도 좋은 말처럼 여겨진다. “공간, 물건, 정보, 재능, 경험 등 자원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사회적·경제적·환경적 가치를 창출”[54]한다는, 소박하며 천진한 이 제안을 누가 거부할 것인가? 공유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놀라운 기술과 선한 의지로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는 이들이 점점 보편적으로 채택하는 용어가 되고 있다. 도시 문제는 한낱 기술적 사안에 불과하다. ‘카셰어링으로 환경 오염과 교통 체증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술을 통한 공유는 도시 문제의 새로운 해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같다.

 

여기서 이 공유의 물질적 기반이 커먼즈를 파괴한다는 점을, 그리고 여러 문헌에서 다룬 플랫폼의 문제점들을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이 지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많은 문제가 남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연결’에 대한 것이다. 커먼즈는 결국 다른 이들과의 연결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가를 다룬다. 소외되지 않는 우리, 수평적이며 자율적인 우리, 그래서 조금은 더 강한 우리. 따라서 세계의 수많은 특이성들이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로 연결될 수 있는가는 커먼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커먼(common)의 역어로 쓰이는 공통(共通)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커먼즈는 “자원을 평등주의적 방식으로 공유하는 실천이 아니라 집합적 주체를 창출”[55]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그 연결의 장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룬 여러 이론가들, 활동가들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 같다. 맑스가 협력이 이뤄지는 생산과정을 연결의 현장으로 생각했다면, 바우웬스에게 그 장은 P2P 기반 협력 과정이다. 그리고 공유경제 플랫폼에서 연결은 자동화된다. 이 각각의 연결은 매우 상이한 성격을 갖지만 기술을 기반으로 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과 달리 카펜치스와 데 안젤리스 그리고 페데리치는 원주민, 여성 등의 공동체 활동에서 연결을 찾는다. 특히 페데리치는 재생산 노동을 협력의 무대로 설정하면서 연결을,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동의 문제로 파악한다.[56] 이것은 우리가 연결의 문제를 조금 더 폭넓게 바라보도록 이끈다. 그는 점거 운동을 다룬 글에서 흔히 나타나는 디지털 기술(트위터, 페이스북 등)에 대한 분석, 즉 그 기술이 전 지구적 혁명을 전달할 뿐 아니라 ‘아랍의 봄’과 광장 운동의 도화선이었다는 분석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터넷이 조력자일 수는 있지만, 변화를 이끄는 활동은 온라인을 통한 정보 공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캠핑을 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요리하고, 청소 팀을 짜고, 혹은 경찰에 맞서는 것을 통해 촉발된다”.[57] 이러한 주장은 기술을 부정하고 원시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전환은 재생산 활동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바우웬스의 말처럼) 온라인 정보 공유만으로 우리를 재생산할 수는 없으므로 물리적인 자원에 대한 접근권에 기초를 둔 함께하기(재생산 활동)가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를 집합적 주체로 구성할 공통감각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동들은 되기들이다”[58]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처럼, 우리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기술보다는 정동과 더 얽힌 문제로 보인다.

 

연결이 기술만으로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임금은 노동과 자본이 대치하는 지형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사이에서 불평등한 권력관계와 위계를 창출하기 위한 도구다. 임금의 유무가 ‘생산적인’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을 나누고, 그에 따라 후자를 수행하는 이들을 전자에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임금 가사노동이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임금 수준에 따른 위계도 있다. 재생산 노동이 사회화된 경우에도(즉 집 밖에서 이뤄질 때에도) 그것의 가치 절하로 인해, 사무실에서 소위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쓴 식기를 닦고 그들이 사용한 화장실을 청소하고 그들이 먹는 밥을 만드는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임금을 받는다. 이러한 위계와 분할 때문에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협력은 결코 노동계급 통합에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계급투쟁은 맑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59]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인터넷이나 플랫폼을 통해 연결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바우웬스를 다시 불러내면, 그가 말하는 P2P 공통하기—바우웬스는 노동 대신 협력이라는 용어를 선호하지만 이것은 결국 사회적 노동의 과정이다—를 통한 협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임금이 창출한 위계와 분할을 가로지를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기술 발달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에 의해 심화되는 노동의 고립과 비가시화[60]에 대한 인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플랫폼을 통한 연결은 협력과는 거리가 멀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를 점점 자동화된 관계로 바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계획할 수 없는 자본의 요소”[61]인 노동계급은 예측 가능한 소비자로 재구성된다. 우리가 선택하고 보고 먹는 모든 것들이 각각의 데이터가 되어,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통합된 개체(individual)가 이제 나누어질 수 있는(dividual) 정보 조각이 되어 기술기업의 서버에 저장되고 알고리즘을 보완한다. 자본은 이 모든 조각과 그것을 생산한 우리의 ‘노동’을 무상으로 취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일 자체가 자본의 커먼즈가 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6. 나가며

우리는 일반적으로 커먼즈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그곳이 점거한 빈 집이든 자동화된 플랫폼 세계든, 집이든 공장이든, “자본의 조직 내부에 있든 외부에 있든”[62] 말이다. 커먼즈는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만들고 유지하고 창조하고 나누거나, 문제를 해결할 때 생겨난다. 그러므로 커먼즈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함께 행하는 것이다.[63]

 

그러나 그 함께하기는 잘 닦인 일방통행로에서 홀로 달리는 일과는 다르다. 그 함께하기의 세력은 자신의 외부와 맺는 특정한 관계 속에 있다. 그 관계에 연결된 각각의 관점에 따라 커먼즈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가령 우리가 앞서 살펴본 택배·청소 노동자들의 커먼즈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앞에서는 그들의 협력과 연대를 자본의 커먼즈라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자본의 시각에서만 그러하다. 우리가 커먼즈를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힘들이 각축하는 과정으로, 즉 전장으로 본다면 어떤 커먼즈도 자본의 커먼즈일 수만은 없다. 그들의 협력과 연대가 지금은 자본이 비용을 절감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더라도 그것이 다르게 발현할 수 있는 잠재력은 언제나 그들의 관계 속에 흐르고 있을 것이다. 역사 속의 많은 운동들이 그러했듯 말이다. 그리고 그 힘은 또 다른 관계와 만나서 더 확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큰 ‘우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도 흔히 부패한 커먼즈를 경험한다. 페데리치와 카펜치스가 빗장(gated) 커먼즈[64]라고 부른 빗장 공동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실 한국에서 보편화된 주거 양식(아파트 단지)이다. 그곳에는 외부인을 차단하는 담장과 외부인이 이용할 수 없는 그들만의 ‘공통’시설이 있다. 또한 사회에 만연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차이에 닫힌, 폐쇄적이고 경직된 ‘우리’를 보여준다.

가장 중대하면서도 무너져 내리는 공통적인 것은 자연 그 자체일 것이다. 문자 그대로 ‘불타는’ 지구는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이 이제 공통의 부가 아니라 위협이 되어가는 징후로 보인다. 그에 따라 우리는 불가능한 과제를 수행하려 한다. 자연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연을 거부하려는 과제 말이다. 우리는 미세먼지와 바이러스가 떠다니는 공기를, 자연을 거부한다. 마스크는 대표적인 거부의 상징이 되었다. 최근 유행하는 바이러스 국면에서 나타나는 모습, 즉 자연과 타인 자체를 위협으로 여기고 거부하려는 모습은 오늘날 커먼즈의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우리는 커먼즈로 존재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커먼즈를, 자연과 타인과의 연결을 부정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과 타인이 위협이(라고 생각) 될 때, 그것은 우리 외부에 있는 위협이 아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스스로에 대한 위협으로 변해간다.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다만 다른 ‘우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전에 시급한 것은 우리 자신이 위협이라는 자각이다.



[1] Massimo De Angelis, Omnia Sunt Communia: On the Commons and the Transformation to Postcapitalism (London: Zed Books, 2017), 37.

[2] 공통재가 아니라 굳이 공통재화라고 것은, 다른 여러 글에서 공통재가 커먼즈의 역어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글에서 공통재화와 커먼즈는 분명하게 구별되며 전자는 후자의 요소로 이해된다.

[3] 가령 경제학 교과서로 널리 쓰이는 『맨큐의 경제학』을 보라.

[4] Massimo De Angelis, op. cit., 45.

[5]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안에서 온라인의 비물질 재화들, 음악, 영상, 이미지 등은 비경합적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용에 영향을 주지 않고 동시에 재화를 사용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많은 데이터를 원활하게 처리할 있는 물리적인 시설의 용량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세계 가입자 수가 1 명이 훌쩍 넘는 넷플릭스가 비경합적으로 운영되려면 얼마나 많은 서버와 케이블과 에너지가 필요할까? 우리의 기기에 즉각 영상을 스트리밍하기 위해 데이터 센터는 엄청난 전기를 소모한다. 예측에 따르면 넷플릭스를 비롯한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의 데이터 센터들이 2030년이 되면 세계 전기의 4.1퍼센트를 소비할 것이라고 한다(Paul Ratner, “Online video streaming should go green, say experts,” BIG THINK, 30 October, 2019. https://bigthink.com/surprising-science/netflix-binge-watching-makes-climate-change-worse).

[6] Massimo De Angelis, op. cit., 30.

[7]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역, 갈무리, 2015, 51.

[8] 이어지는 중세 커먼즈 내용은 권범철, 「도시 공통계의 생산과 전유」, 서울시립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9, 19-20을 발췌한 것이다.

[9] Jean Birrell, “Common Rights in the Medieval Forest: Disputes and Conflicts in the Thirteenth Century,” Past & Present, no. 117 (November 1987), 22-49.

[10] 피터 라인보우, 『마그나카르타 선언: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 정남영 역, 갈무리, 2012, 64.

[11] Jean Birrell, op. cit.

[12] Edward Coke, The Second Part of the Institutes of the Laws of England (1642); 피터 라인보우, 앞의 책, 70에서 재인용.

[13] 피터 라인보우, 앞의 책, 70.

[14] Jean Birrell, op. cit.

[15] Ibid.

[16] 데이비드 볼리어, 앞의 , 51.

[17] 이에 대해서는 엘리너 오스트롬,  『공유의 비극을 넘어』, 윤홍근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10의 3장을 참조.

[18] George Caffentzis, “A Tale of Two Conferences: globalization, the crisis of neoliberalism and question of the commons,” Borderlands, Vol. 11, No. 2 (September 2012).

[19] Ibid.

[20] 데이비드 볼리어, 앞의 책, 64.

[21] 같은 책, 231.

[22] David Bollier & Silke Helfrich, “Introduction: The Commons as a Transformative Vision,” in The Wealth of the Commons: A World Beyond Market and State (Amherst, MA: Levellers Press: 2012). http://wealthofthecommons.org/essay/introduction-commons-transformative-vision

[23] 데이비드 볼리어, 앞의 책, 40.

[24] Michel Bauwens & Vasilis Niaros, Changing Societies through Urban Commons Transitions (P2P Foundation and Heinrich Böll Foundation, 2017), 13.

[25] Michel Bauwens, “The new triarchy: the commons, enterprise, the state,” P2P Foundation blog, 25 August, 2010, https://blog.p2pfoundation.net/the-new-triarchy-the-commons-enterprise-the-state/2010/08/25

[26] 미셸 바우웬스 외, 『커먼즈 전환과 P2P: 입문서』, 박형준 역, 지식공유지대 e-Commons, 2018. https://www.ecommons.or.kr/book/1000000000005

[27] Michel Bauwens, “The History and Evolution of the Commons,” P2P Foundation blog, 28 September, 2017, https://blog.p2pfoundation.net/the-history-and-evolution-of-the-commons/2017/09/28

[28] 바우웬스는 겐트 시 커먼즈 이행 계획에서 겐트 시에 이미 존재하는 도시 지향 생태 농업 모델을 다른 분야로 확장하여 커먼즈 이행 플랫폼을 구상한다(Michel Bauwens & Yurek Onzi, Commons Transition Plan for the City of Ghent [Ghent, Belgium: City of Ghent and P2P Foundation, 2017]).

[29] Massimo De Angelis, op. cit., 269.

[30] George Caffentzis, “commons,” in Kelly Fritsch, Clare O’Connor & A. K. Thompson, ed., Keywords for Radicals: The Contested Vocabulary of Late-Capitalist Struggle (California: AK Press, 2016).

[31] George Caffentzis, “The Future of ‘The Commons’: Neoliberalism’s ‘Plan B’ or the Original Disaccumulation of Capital?” New Formations, no. 69 (Summer 2010), 23-41.

[32] 카를 마르크스, 『자본 I-1』, 강신준 역, 길, 2008, 462; Ibid.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의 것.

[33] George Caffentzis, “The Future of ‘The Commons’: Neoliberalism’s ‘Plan B’ or the Original Disaccumulation of Capital?”

[34]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황성원 역, 갈무리, 2013을 보라.

[35]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황성원·김민철 역, 갈무리, 2011, 157. 강조는 원저자의 것.

[36] 같은 곳.

[37] 같은 곳.

[38] 셀마 제임스는 맑스를 인용하며 이렇게 쓴다. “석유 노동자의 아내는 그 노동자만큼 생산적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매일 ‘노동력 자체를 직접 생산하고 양성하고 성장시키고 유지하며 재생산하기’ 때문이다”(Selma James, Sex, Race, and Class -The Perspective of Winning: A Selection of Writings, 1952-2011 [Oakland, CA: PM Press, 2012], 103).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에서 이렇게 썼다. “생산적 노동은 상품을 생산하거나 노동력 자체를 직접 생산하고 양성하고 성장시키고 유지하며 재생산하는 노동이다”(Karl Marx, Theories of Surplus Value [London: Lawrence & Wishart, 1969], 172; Selma James, op. cit., 103에서 재인용).

[39] Silvia Federici, “Marxism, Feminism, and the Commons,” in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Oakland, CA: PM Press, 2019).

[40] 라니에로 판치에리는 기술적 힘들이 중립적인 과학적 진보의 논리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 추출 형식을 공고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발전했다고 본다. 따라서 “생산수단에 대한 ‘집단적 소유권’은 기계가 계속해서 자본주의적으로 작동하는 것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니콜래스 쏘번, 『들뢰즈 맑스주의』, 조정환 역, 갈무리, 2005, 226). 판치에리는 이렇게 썼다. “생산관계는 생산력 속에 내재한다. 그리고 생산력들은 자본에 의해 ‘주조’되어왔다. 생산력들의 확장이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후에도 자본주의 발전이 영속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Raniero Panzieri, “Surplus value and planning: notes on the reading of ‘Capital’,” tr. Julian Bees, in CSE, ed., The Labour Process and Class Strategies [London: Stage 1, 1976], 12; 니콜래스 쏘번, 앞의 책, 227에서 재인용. 강조는 원저자의 것).

[41] Silvia Federici, op. cit.

[42] 맛시모 데 안젤리스, 『역사의 시작: 가치 투쟁과 전 지구적 자본』, 권범철 역, 갈무리, 2019, 80-81. 강조는 원저자의 것.

[43] 같은 책, 87.

[44] 같은 곳.

[45] 같은 책, 86.

[46] 「‘로켓’처럼 날고 뛰는 밤샘배송 9시간… 콜라가 밥이었다」, 『한겨레』, 2020. 1. 2.

[47] 「화장실 걸레 옆 쌀 씻는 설움 “청소만 한다고 인격도 없나요”」, 『한겨레』, 2020. 1. 8.

[48] 프랭클린 포어, 『생각을 빼앗긴 세계: 거대 테크 기업들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는가』, 이승연·박상현 역, 반비, 2019, 13.

[49] 같은 책, 26-34.

[50] Ugo Matei, “First Thoughts for a Phenomenology of the Commons,” in The Wealth of the Commons: A World Beyond Market and State (Amherst, MA: Levellers Press: 2012). http://wealthofthecommons.org/essay/first-thoughts-phenomenology-commons. 다음 번역글을 참고했다. 「공통재의 현상학에 관한 주요한 생각들」, 은혜 역. 2016. 4. 3. https://failbetter.tistory.com/13

[51] 마테이와 함께 『최후의 전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커먼즈와 생태법』(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을 쓴 프리초프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범양사, 1999)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다.

[52] 프랭클린 포어, 앞의 책, 26.

[53] 리차드 디인스트, 『빚의 마법: 화폐 지배의 종말과 유대로서의 빚』, 권범철 역, 갈무리, 2015, 168.

[54] 「서울특별시 공유 촉진 조례」, 2019. 12. 31. 서울특별시조례 제7423호.

[55] George Caffentzis & Silvia Federici, “Common against and beyond capitalism,” UPPING THE ANTI, issue 15 (September 2013), 83-91.

[56] 이것은 물론 재생산 노동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페데리치는 재생산 노동이 완전히 자동화되기 어렵고 정동적 특징을 갖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한 대담에서 2011년 점거 운동이 자기 재생산과 관련된 문제를 부각시켰으며, 이 재생산 운동의 특징은 “변신을 거듭함으로써 실제로 지속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속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정확히, 지속성은 사람들의 욕구와 관계를 조직화의 핵심으로 삼는 역량이기도 하죠. 마찬가지로, 이러한 지속성은 당신이 느낌(affectivity)이라고 언급한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공간을 공유할 때 생깁니다. 또한 음식을 준비하고 야간에 토론하고 텐트에서 같이 자는 것처럼, 재생산 능력을 공유할 때 나타납니다. 공동으로 구호를 만들고 창의력을 모을 때 출현하지요. 이 모두는 운동에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크리스토프 부르너·크리스티안 마라찌·실비아 페데리치·조지 카펜치스, 「부채와 정동, 그리고 자기 재생산하는 운동」[2012. 5. 25], 크리스티안 마라찌, 『금융자본주의의 폭력』, 심성보 역, 갈무리, 2013).

[57]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Technology, the Body, and the Construction of the Commons,” in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Oakland, CA: PM Press, 2019).

[58]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Mille Plateaux (Paris: Editions de Minuit, 1980), 313, 486; 김은주,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 에디투스, 2019, 86에서 재인용. 김은주가 풀이하는 들뢰즈의 “되기”는 페데리치가 이야기하는 집합적 주체의 형성과 매우 유사하다. 그에 따르면 들뢰즈는 신체의 변화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적 힘을 제시하는 정동을 통해 되기 개념을 설명한다. 또한 그는 되기 개념을 새로운 집합적 행위자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브라이도티를 참고하면서 그 개념을 이렇게 정의한다. “되기는 지속하는 힘을 상승시키고, 신체의 능력을 증대하는 결합관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이러한 되기는 한 신체에게만 유리한 관계를 모색하지 않고, 결합된 각 신체들의 역량 모두를 강화할 수 있는 연결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의미한다”(같은 책, 113).

[59] Silvia Federici, “Marxism, Feminism, and the Commons”.

[60] 고립과 비가시화의 환경에 있는 것은 가사노동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유령 노동”이라는 말로 디지털 경제의 비가시화된 노동을 설명하는 메리 그레이·시다스 수리, 『고스트워크: 긱과 온디맨드 경제가 만드는 새로운 일의 탄생』, 신동숙 역, 한스미디어, 2019을 보라.

[61] 해리 클리버, 『자본론의 정치적 해석』, 권만학 역, 풀빛, 1986, 90.

[62] Massimo De Angelis, “Crises, capital and co-optation: Does capital need a commons fix?” in The Wealth of the Commons: A World Beyond Market and State (Amherst MA: Levellers Press, 2012). http://wealthofthecommons.org/essay/crises-capital-and-co-optation-does-capital-need-commons-fix

[63] “공통인들은 먼저 권리 증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땅을 어떻게 경작할 것인가?”(피터 라인보우, 앞의 책, 75).

[64] 이 내용이 담긴 글이 이번 101호 『문화/과학』 에 같이 실렸다. 실비아 페데리치·조지 카펜치스, 「자본주의에 맞선 그리고 넘어선 커먼즈」, 권범철 역,『문화/과학』 101호, 202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