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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Project/니 비니! нi вiйнi! (전쟁 반대!)

굶주림의 울부짖음 아래

by 인-무브 2025. 8. 22.

굶주림의 울부짖음 아래

Beneath the Howl of Hunger

 

 

알라 알카이시 Alaa Alqaisi

번역: 서제인

 

 

*원문 출처: https://arablit.org/2025/07/23/beneath-the-howl-of-hunger

 

Beneath the Howl of Hunger

“And though the world may have looked away, let this much be remembered: we named the hunger. We bore it. We endured. Let that remain.” – Alaa Alqaisi

arablit.org

 

 

배고픔은 몸을 집어삼키기 훨씬 전부터 언어의 뼈대를 풀어헤치고, 명료함을 지워버리고, 리듬을 해체하고, 생각의 허약한 찌꺼기들만 남겨놓는다. 처음에 일관성 있는 문단으로 시작했던 것은 곧 조각조각 흩어지고, 결국에는 너무나 굶어서 의미를 계속 붙잡아두지 못하는 정신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는 현상만 남을 뿐이다. 그렇기에, 내 언어가 나를 완전히 저버리기 전에, 나는 이 글을 쓴다. 이해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적이라도 남겨두기 위해. 생각이 스르르 녹아내려 침묵이 되어버리기 전에 그 형태를 남겨두기 위해.

 

나는 작업에 몰두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의 봉쇄된 작은 도시를 휘감고 있는 이 고통을 잠깐이라도 잊어 보려고. 이 고통은 단지 정신적 고통이나 비통함만은 아니다. 그 둘 다 여기엔 수도 없이 많지만 말이다. 그건 몸 안에서부터 사람을 갉아먹는 육체적이고 가차 없는 배고픔이다. 낮고 끊임없는 울부짖음과 함께 치솟아 또 하나의 심장박동처럼 온몸에 고동치는 배고픔. 그건 너무 많이 속삭여서 이제는 풀 수 없는 저주처럼 내 갈비뼈에 달라붙어 있다. 아무리 정신을 딴 데로 돌리려고 해봐도, 똑같은 셔츠를 접고 또 접고, 익숙한 문장을 번역하고, 그러면 뭔가 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휘저어봐도, 배고픔은 조용한 권위를 지닌 채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다. 마치 마룻바닥의 보이지 않는 금 사이로 스며드는 연기처럼. 화면의 글자들이 흐릿해진다. 한때는 쉽게 휘둘렀던 단어들이 이제는 나를 피해 간다. 손닿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간다. 마치 그것들 역시 이 장소에서 도망치려 애쓰기라도 하는 것 같다. 나는 기도를 하려고 일어선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날카로운 현기증이 나를 붙잡더니 내 목을 휘감아 쥔다. 몸 아래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나는 너무 텅 비어 신 앞에 서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걸까.

 

배고픔은 자신만의 언어를 키워낸다. 조용하게 사람을 갉아먹는 언어를. 그것은 극적으로, 혹은 요란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둘 다 흐물흐물해지고, 구부러지고, 닳아 없어지게 만든다. 배고픔은 생각 위에, 기억 위에, 피부의 연약한 껍질 위에 먼지처럼 내려앉는다. 한때는 나와 상관없는 시공간에 속해 있는 듯 보였던 조지 오웰의 말들이 이제는 내 안구 뒤쪽의 은밀한 현기증에 직접 말을 걸어온다. “굶주림은 사람을 완전히 등뼈도 뇌도 없는 것 같은 상태로 전락시킨다… 마치 해파리로 변해버린 것처럼.” 한때는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게 느껴졌던 저 비유가 이제는 정확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내가 변해버린 모습이다. 구조 같은 거라곤 없이 떠다니는 존재. 생각을 의도에 고정해놓을 능력이 없는 존재. 나는 생각을 향해 손을 뻗지만, 그건 붙들기도 전에 흩어져 버린다. 한때는 명료함 속에 존재했던 것의 희미한 인상만 남겨놓고서.

 

가자가 하나의 도시라기보다 다른 누군가가 꾼 악몽의 잔여물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멀리서 구경하던 그 누군가는 이 도시를 꿈으로 꿔서 존재하게 해놓고는 깨어나야 한다는 걸 잊어버린 것 같다. 이곳은 이 세상에 속한 곳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은 다른 도시들이 강이나 나라들이나 시간에 연결되듯 그렇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마치 어떤 평행우주의 각본에 꿰매 붙여진 것 같다.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지켜보는 이들을 위해 끝없이 상연되고 또 상연되는 신화의 각본에. 하지만 신화와는 달리 이 각본에는 도덕적 기승전결도, 카타르시스도 없다. 공포에는 끝도 없고, ‘서서히 암전’ 같은 것도 없다. 이곳의 아이들은 한 번도 자라 보지 못한 채 계속 늙는다. 노인들은 다른 곳의 노인들이 먼저 간 연인들에 대해 말하듯 빵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항상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냐고 묻는 관객이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결말 같은 건 없다. 그저 침묵 속에서 천천히, 매일같이 멀어져 가는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봉쇄는 언어 자체를 무겁게 짓누른다. 이제는 내 문장들마저 그 아래서 괴로워한다. 문장 구조는 텅 빈 위장의 압박에 무너져 내리고, 문법은 절망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나는 키보드 앞에 앉아 한때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던 것을 불러내려 해보지만, 말들이 중간에 흩어져버린다. 마치 깜짝 놀란, 나는 법을 잊어버린 새들 같다. 이건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침식당하는 것이다. 내가 내 것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꾸준히 풀려 나가 버리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나는 계속한다.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침묵은 더 심각한 형태의 패배가 될 테니까. 비록 금이 가고 불확실할지언정 내가 여전히 줄 수 있는 선물은 증언뿐이다. 증언을 내 안에 가둬 놓는 건 이 굶주림이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목소리까지 먹어치우게 놔두는 일이 될 테니까.

 

가자에서 살려면 이제 부재로 이루어진 안무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걷는 게 아니라 떠내려간다. 먹는 게 아니라 찾아 헤맨다. 자는 게 아니라 계속 경계를 늦추지 못한 채 우리를 뛰어나가게 할 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인다. 살아남는다는 건 아무것도 제공해주지 않는 세상에 적응해가는 의식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이 무너진 일상 한복판에서도, 나는 여전히 우리의 굴하지 않는 인간다움을 상기시켜 주는 순간들과 마주친다. 한 여인이 마지막으로 남은 납작한 빵을 반으로 갈라 이웃에게 내준다. 한 아이가 불길과 검댕으로 시커메진 벽에 환한 색 꽃들을 그려넣는다. 어느 할머니는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위로 쿠란의 첫 장인 알 파티하를 읊는다. 냄비에 더 넣을 재료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이런 몸짓들은 헛된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저항의 행위다. 제도와 체계가 무너져내린 곳에서 신성함을 유지하는 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건네지는 인간의 몸짓이다.

 

굶주림은 아무도 원치 않는 진실들을 드러낸다. 위안이 되는 모든 환상을 벗겨버리고, 잃을 게 더는 아무것도 없을 때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동안 나는 존엄이 소유가 아니라 실천 속에 있다는 걸 배웠다. 존엄은 사람이 무언가를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견뎌 내는 방식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기억 역시 저항의 한 형태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성실하게 기록하는 것은 지워지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나는 동정을 구하지 않는다. 동정은 상대방을 납작하게 만든다. 그것은 가자를 하나의 대상으로, 교훈을 주는 이야기로, 너무도 자주 반복되어 더는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는 머리기사로 바꿔버린다. 내가 구하는 것은, 내가 끝끝내 고집하는 것은 기억이다. 단지 굶주림만이 아니라, 그것이 지금껏 흐려놓은 정신들에 대한, 마지막으로 남은 차 한 잔을 마시며 떨리던 손들에 대한, 별들이 아니라 포화의 조짐을 찾아 하늘을 훑던 시선들에 대한 기억이다.

 

이곳에서 은유는 부서져 나간다. 이곳에서는 아름다움마저 상처에 섞여 온다. 그럼에도 우리 골목에 서 있는 사이프러스나무에는 여전히 도발하듯 새빨간 꽃이 핀다. 그럼에도, 아이는 재로 뒤덮인 웅덩이들을 깡충깡충 뛰어 건너며 콧노래를 부른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쓴다. 이 폐허 어딘가에는 의미가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정당화할 설명은 없으니 설명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기록으로서의, 있음으로서의, 잊히기를 거부함으로서의 의미다. 우리가 여기 있었다. 우리는 사랑했고, 애도했으며, 생각했다. 우리는 무너진 것들로 언어를 만들었고, 재를 가지고 이야기들을 빚었으며,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기억을 붙잡으려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이 페이지를 넘길 때면,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세상은 가자가 침묵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입 속에 흙이 가득 들어찬 채로도 말을 했다. 깨진 잇새로도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부러진 무릎으로도 기도했다. 그리고 세상이 외면했을 수는 있겠지만, 이것만큼은 기억되게 하자. 우리는 이 굶주림에 이름을 붙였다. 이것을 참아 내고 견뎌 냈다. 그것만큼은 남아 있게 하자.

 

 

*작가 소개

알라 알카이시는 팔레스타인의 번역가, 작가, 연구자로 문학과 언어, 그리고 여러 문화를 연결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증언하는 이야기의 힘에 깊은 열정을 지니고 있다.

 

 

*본 번역문은 서제인 님의 SNS 계정에 먼저 게시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연대하고 가자를 기억하기 위해, <니 비니> 코너에 기꺼이 번역문을 보내주신 서제인 님께 감사드립니다.


 

**드리는 말씀**

이 글을 읽은 독자들에게 요청드립니다. 감히 상상하지 못할 기근과 집단학살을 겪고 있는 가자의 주민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십시오. 현재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이 '사단법인 아디'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가자지구 4차 피해주민 긴급구호(아래 링크 참고)에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