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픈데 어떻게 글을 쓰지?
How Do I Write I'm Hungry?
후삼 마루프 Husam Maarouf
번역: 서제인
*원문 출처: 이 글은 Raseef22에 처음 게재되었습니다. (2025. 07. 19)
https://raseef22.net/english/article/1100358-how-do-i-write-when-im-hungry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건 작가로서가 아니었다. 직업이 문학인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할 생각 같은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건, 내게는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기 같은 것이 글쓰기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내게 글쓰기는 하루하루를 체계화하고, 내 안에 무질서하게 넘쳐나는 감정들을 정돈하고, 끝없는 폭풍 한가운데에서 잠시나마 고요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내게 글쓰기는 세상을 향해 난 창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난 창이었다. 그리고 내 언어라는 걸 갖게 되자, 마치 이 잔인한 행성에서 마침내 친구 한 명이 생기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 주는, 사라져버리지 않는, 이 세상이 잠시나마 그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해주는 친구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 이 친구가 목소리를 잃게 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글쓰기를 그만두기로 해서가 아니라 더는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바람에 그렇게 되리라고는.
왜냐고? 배가 고파서다.
가자에서 집단학살이 시작된 뒤로 나는 모든 것을 다시 검토하고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왔다. 심지어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가치도 흔들리고 있다.
나는 심지어 글쓰기조차- 그동안 두려움에, 추방에, 그리고 상실에 맞서기 위해 내가 몇 번이고 거듭 의지할 수 있었던, 내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이 숨겨진 힘조차-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해체되고, 녹아내리고,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게 되었다. 재앙이 나를 압도해버리면 그렇게 될 거라고.
전쟁은 이상한 생명체라서, 집들을 부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건 우리 발밑에 있던 확실함이라는 러그를 확 잡아 빼버리고, 우리가 위안을 삼기 위해 방 안에 놓아둔 조그만 안도감을 지워버린다. 그런데 굶주림은 무슨 일을 하는지 혹시 아는지?
나는 나 자신에게 묻곤 했다. 아직도 글쓰기에 어떤 가치 같은 게 있니? 건물 잔해 밑에 시신들이 누워 쌓여 있는데 문장들을 쌓아올리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니? 우리를 계속 굶기고, 우리의 고통에 계속 무관심한 세상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에 관해 쓰는 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럼에도 내 안의 무언가는 이런 붕괴에 맞섰다. 나는 그동안 많은 글을 썼다. 추방된 삶의 한가운데서, 굉음을 내는 폭탄들 아래서. 나는 잃어버린 아이들에 관해, 수의도 없이 죽은 사람들에 관해, 먼지로 변해버린 집들에 관해 썼다. 피로에도, 슬픔에도,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글을 썼다. 하지만 한 번도 배가 고픈 상태로 글을 써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2025년 3월이 되었고, 굶주림이 내 몸 안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문을 노크한 게 아니라, 내 가슴을 강제로 열어젖히고 그 안에 영구히 자리를 잡아버린 것이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굶주림은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당신이 지금 상상하는 어떤 것과도 다르다. 그저 뱃속이 텅 빈 느낌이 다가 아니다. 그건 내장에서 시작되어 뇌까지 기어올라가는 압도적인 마비의 감각이다. 굶주림은 기억을 혼란에 빠뜨리고, 시야를 흐려지게 하고, 모든 생각을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완전히 지쳐버린 머리로는 그렇게 파고드는 작업을 더는 수행할 수가 없다.
굶주림은 당신에게서 가장 기본적인 능력들을 박탈한다. 집중력, 인내심, 감정,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욕망 같은 것들을. 생각은 사치가 되고, 말들은 품고 있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으로 변해버린다.
내가 지금 그 안에 누워 있는 굶주림은, 나를 통째로 삼키고 있는 굶주림은, 그저 안도감과 내적인 평온함을 깨끗이 비워내는 과정일 뿐이다. 자아가 새롭게 직면해야 하는 청산 과정이라고 할까.
얼마 전, 나는 <Raseef22>의 편집자 아스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무엇을 쓸지 아이디어도, 제안할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바늘에 더는 실을 꿸 수가 없다고.
나는 아스마의 조언을 받아들여 정신적으로 희박해져 가는 이 과정을, 이 연약함을, 내 머릿속이 어떻게 무너져가는지를 글로 써보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새로 제안한 글쓰기 주제가 되었다. 나의 고통, 내가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이 고통이.
나는 한 문장을 쓴 다음 멈춘다.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줄을 이어 쓸 기력이 없어서다. 굶주림은 당신을 천천히 찌부러뜨린다. 마치 누구도 밟아 건너간 적 없는 사막에서 혼자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더는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앉아서 책을 읽을 수도 없다. 한때는 나를 단단히 지탱해주었던 글쓰기도 이렇게 느리게 진행되는 붕괴의 면전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당신은 굶주림 속에 갇혀 혼자 죽는다. 굶어 죽어가는 당신 주위에 있는 타인들은 전혀 위안이나 심리적 지지가 되어주지 못한다. 반대로 굶주림이 집단적인 것이 되면, 그건 주위에서 도와주던 손이 모두 잘려 나갔다는 거고, 아무도 당신을 도와주러 오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하지?
내가 사는 가자 북부에는 지난 3월부터 밀 한 톨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시장은 텅 비었고, 얼마 되지 않지만 그나마 있는 물건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달고 있다. 감시하는 눈도, 부끄러움도 없이 말이다. 지난달 내내 우리가 먹은 거라곤 렌틸콩, 쌀, 그리고 콩 통조림뿐이었는데, 그중 어떤 것으로도 배고픔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때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식품이었던 렌틸콩이 이제는 원수 같다. 그 맛을 계속 되풀이해 느끼자니 토할 것 같았다. 그런 것들 속에는 기력도 희망도 없다. 하지만 이제는 그 렌틸콩조차 없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지내왔다. 가자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끼니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단백질도 칼슘도 없는 식사. 빵도 없고, 아무런 맛도 없는. 영양만큼이나 의미도 결여되어 있는 식사.
그리고 그럼에도, 나는 날마다 탈진할 것 같은 업무들을 수행해야 한다. 장작을 나르고, 멀리 있는 배급소에서 물을 받아오고, 계단을 5층까지 오르고, 미국 달러로 20달러 하는 밀가루 1킬로그램을 찾아, 혹은 조그마한 정어리 통조림 하나를 찾아 몇 시간이나 돌아다녀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아는 한 내 평생을 통틀어 가장 기력이 바닥인 채로 해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글쓰기는 더는 저항의 행위가 되지 못한다. 불가능한 행위가 되어버릴 뿐이다. 몸은 더 이상 나를 지탱해주지 못하고, 정신은 흐릿한 어지러움 속에서 길을 잃었다.
글 한 편을 쓰기 시작하려고 해보지만, 내 머릿속은 이 도시의 물류 창고들처럼 텅 비어 있다. 존재하는 아이디어도, 나를 앞으로 끌고 갈 열정도, 창조를 하라고 밀어붙이는 내적인 감각도 없다. 내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마치 굶주림이 한때 내 말들이 자라났던 토양을 쓸어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 굶주림의 가장 지독한 점은 이것이 당신을 당신 자신에게 낯선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당신은 세상에 대한 공감능력을 잃는다. 무감각해진다. 쪼그라든다. 자신의 삶을 마치 타인처럼 지켜보게 된다. 자신이 두려워지고 걱정스러워진다. 음식은 존재론적인 개념이 되고, 신화에 나오는 환영이 된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맛들이 기억난다. 기호도 변한다. 참치통조림 한 캔이 당신이 꿈꾸는 최고의 음식이 되고, 그걸 감자 한 조각과 타히니(참깨를 갈아서 갠 것) 약간과 함께 불 위에 올려놓고 익힐 때면 마치 왕이 되어 연회라도 열고 있는 듯 기뻐하게 된다.
이 글은 그저 비극에 관한 텍스트가 아니다. 발가벗겨진다는 것에 관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굶주림이 당신의 연약한 자아, 약해진 몸, 그리고 부재하는 언어 말고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을 때. 세상 사람들의 눈에 당신이 보이지 않고, 그 귀에 당신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으며, 당신이 살아 있는지 죽어가고 있는지 아무도 아무 관심도 없다는 느낌이 들 때.
절멸의 전쟁 속에서 강제된 이 굶주림이라는 상태는 육체적인 결핍을 뛰어넘는다. 이것은 자아가 해체되는 과정이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서서히 꺼져가는 상태다. 당신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배가 찼다고 느끼는 것도 불가능한데 글쓰기에 무슨 가치가 있지? 더는 기억을 되살릴 수도 없는데 기억이라는 게 무슨 소용이야? 매일매일이 음식 같지도 않은 한 끼를 확보하려고 시도했다가 좌절되는 게 단데, 살아 있다는 것에는 또 무슨 의미가 있는데?
오늘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자니 마치 내 몸 바깥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말들은 내 것이 아니라 한때 나였던 사람의 잔여물인 것만 같다. 그저 정신을 배고픔에서 딴 데로 돌리기 위해 글을 쓰는 느낌이다.
글쓰기는 완전히 진 빠지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 작업은 내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애를 쓸 것을 요구하는데, 나는 그렇게 애를 쓰는 일을 더는 할 수가 없다. 굶주림은 당신에게서 언어를 벗겨 간다. 잠과 휴식, 그리고 희망을 벗겨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가장 나쁜 건, 이 세상이 전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나를 죽이고 있는 굶주림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나는 작가다. 아니, 적어도 한때는 작가였다.
이제 굶주림은 내 모국어가 되었다. 나는 배가 고프고, 이 배고픔은 이제 언어보다도 힘이 세다. 기억보다도, 나의 인식 능력보다도, 기록하고픈 욕구보다도 강력하다. 이것은 글쓰기를 그만두겠다는 말이 아니다. 글을 아예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내게는 더 이상 나 자신을 표현할 도구가 없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몸도, 온전한 문장을 끝까지 써낼 정신도 없다.
내가 나 자신의 죽음에 관해 쓰기 전에 죽게 될까 두렵다.
말들이, 언어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내 안에 갇힌 상태로 남게 될까 두렵다.
나는 굶주림이 죽음보다 두렵다. 왜냐하면 그건 당신을 한 단계씩 천천히 데려가면서 점점 희미해지는 그림자로 바꿔놓고, 당신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조용히 사그라지게 되니까.
누군가가 이 글을 읽기는 할까? 어떤 작가가 먹을 게 단 하나도 없어서 더는 글을 못 쓰게 되었다고 하면, 그걸 믿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굶어 죽어가다 결국 정신이 조용히 스러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 세상 어느 한구석에 있는 어떤 누군가는 신경이라도 쓰게 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글을 썼다.
글쓰기는 몸이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떨리면서도 끈질기게 버티는 몸들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 소개
후삼 마루프는 가자에서 활동하는 팔레스타인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출판사인 ‘가자 퍼블리케이션스’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시집으로 『죽음에선 유리 같은 냄새가 난다 Death Smells Like Glass』와 『죽은 고객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발사 The Barber Loyal to His Dead Clients』, 장편소설로 『숫양의 끌 Ram’s Chisel』이 있다.
**드리는 말씀**
이 글을 읽은 독자들에게 요청드립니다. 감히 상상하지 못할 기근과 집단학살을 겪고 있는 가자의 주민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십시오. 현재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이 '사단법인 아디'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가자지구 4차 피해주민 긴급구호(아래 링크 참고)에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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