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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Project/니 비니! нi вiйнi! (전쟁 반대!)

“더 이상 어디에도 바깥은 없어”의 안쪽을 따라서 그리는 일

by 인-무브 2025. 12. 9.

“더 이상 어디에도 바깥은 없어”의 안쪽을 따라서 그리는 일

:  『팔레스타인 시선집』(접촉면 펴냄, 2025)을 읽고

 

 

길혜민(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당신은 집에 있다.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았을 때, 느닷없이 내 이름을 부른 목소리가 자신을 “다윗입니다.”라고 소개한다. 그때, 당신은 깨달아야만 한다. 이 전화가 끊기는 순간부터 58초 사이에 나는 집으로부터 가장 멀리 뛰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화벨이 울렸고, 그 전화를 받은 뒤로 1분도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결혼식 앨범이나 내 아이의 애착담요, 또는 제출 직전의 대학 입학지원서를 챙겨서 집으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떠나야만 한다는 것에 대하여. 전화를 받기 직전까지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어떤 계획을 세웠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가장 멀리 가야만 한다. 그 전화는 「달리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낯선 이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의해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이 장면은 어떤 영화의 촉발점일까? 이 장면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스릴러 영화나 재난 영화의 서사가 아닌가. 집에서 뛰어나오는 순간 검붉게 터지는 지붕과 세간살이. 이처럼 평화와 위기가 갈라지는 급박한 서사는 상상의 결과가 아니라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너무 오래전에 벌어진 사건인 것만 같은 “가자지구 점령”은 1967년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무려 60여 년에 걸쳐 반복되고 있다.   

  리나 할라프 투파하의 작품 「달리라는 명령」에서의 전화는 폭탄을 떨어트리기 직전에 걸려온 전화이다. 본인을 다윗이라고 밝힌 목소리는 마치 “전쟁 중에 호의라도 베풀어준다는 듯이” 굴지만, 사실 화자는 “뛰어갈 곳이 없”고, 집은 “바닷가 감옥”이라는 정황을 상기시킨다. 또한 “넌 잘못된 곳에 살고 있고 지금은 도망칠 기회”라는 겁박은 “다윗입니다”라는 특정한  이름으로부터 유래했음을 폭로한다.  

 

 

 그들은 이제 전화를 걸어요
폭탄을 떨어트리기 전에.
전화벨이 울리고
내 이름을 아는 누군가가 
완벽한 아랍어로 말하죠.
“다윗입니다.”
그러면 음속폭음과 유리를 산산조각 내는 교향곡 속에
여전히 곤축 상태인 머리로
가자에 아는 사람 중 다윗이 있던가? 생각해요.
그들은 이제 전화를 걸어 말하죠-
뛰어.
전화가 끊기는 순간부터 58초.
다음은 너희 집이야.
전쟁 중에 호의라도
베풀어준다는 듯이 굴어요.
뛰어갈 곳이 없다는 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국경은 닫혔고
서류는 아무 쓸모가 없고
내가 이곳 바닷가 감옥의
무기징역수임을 알릴 뿐이며
골목은 좁고
이곳에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인간 목숨이 다닥다닥 붙어 산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냥, 뛰어.
널 죽이려는 게 아니야.
네가 우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우리가 찾으려는 사람들은 너희 집에 있지도 않고
여기엔 아무도 없다고
그저 너와 너의 아이들뿐이라고 알려줄 수 없다는 건
상관없어.
이번 주 치 마지막 빵 한 덩이를 나눠 먹으며
아르헨티나를 응원하고
전기가 끊기면 쓸 양초가 몇 개 남았는지 세어 보던 아이들-
네게 아이들이 있다는 건 상관없어.
넌 잘못된 곳에 살고 있고
지금은 도망칠 기회야.
세상에 없는 곳으로 가.
58초가
결혼식 앨범을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담요를
딸이 거의 완성한 대학 입학지원서를
신발을
집에 있는 모두를 챙기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라는 건
상관없어.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도,
네가 누구인지도.
네가 인간임을 증명해.
두 다리로 설 수 있음을 증명해.
시작.
                   -리나 할라프 투파하(문호영 역), 「달리라는 명령」(20-21쪽) 전문

 

 

  리나 할라프 투파하가 지은 작품에서 나온 “너희 집”이 있는 이 장소는 가자지구이다. 가자지구는 1967년 이후 60년 이상에 걸쳐 서안지구와 함께 이스라엘 점령하에 있으며, 2007년 이후에는 이스라엘에 의해 완전히 봉쇄되어 물자든 사람이든 이스라엘이 허가한 물건만 반입과 반출이 가능하다. 따라서 연료나 식량, 의약품 등의 생명줄에 해당하는 물건은 최소한으로만 들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자지구에서 생산하는 물건도 가자지구 밖으로 출하할 수 없게 되어 가지지구의 경제 기반은 파괴되었다. 이를 오카마리는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상태가 되어 바다로부터 하늘로부터 육지로부터” 반복적으로 공격을 받고 사회 인프라는 모두 파괴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각주:1]

 

<출처 나무위키>: 오른쪽의 작은 지도에 있는 아이보리색의 땅이 본래 팔레스타인의 땅이었다. 지금은 왼쪽의 큰 그림과 같이 팔레스타인의 아주 작은 부분이 가자지구로 팔레스타인 민족이 갇힌 곳이다.

 

 

  위의 가자지구 그림을 보면, 리나 할라프 투파하가 지은 시 「달리라는 명령」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위 시의 화자가 말하는 “이곳 바닷가 감옥”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육로가 막혀 있으며, 바깥으로의 유일한 길인 지중해에 둘러싸인 가자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팔레스타인이나 가자에 대한 어떤 지형적인 지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위의 지도를 참고하면 작품을 읽는 것이 어떤 절박함에의 요구인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또한 땅 끝에 매달린 존재, 땅 끝의 목숨이 어떤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민족의 조건을 보며, 그들에겐 “더 이상 어디에도 바깥은 없어. 그저 우리가 있는 곳”(「무제」, 44쪽)이라고 시인 수헤이르 함마드는 단언한다. 이러한 시집을 읽으며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며 문학적 지평을 기대할 수 있을까. 서럽게도 이 시집은 그 기대를 할 수 없음에서부터 쌓아올린 외침임을 미리 전제하며 읽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집단학살”임을 바로 보아주길 바라는 시인들의 외침에 모든 방어기제를 거두고 다가가야 한다. 

  그 다음, ‘바깥’이 없다는 외침에 우리는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바깥’의 위치는 어디인가? 아니 ‘바깥’은 무엇인가? 우리가 동일시하기 어려운 ‘타자’가 존재하는 곳 또는 그러한 인식론적 위치를 우리는 ‘바깥’이라 말하고는 한다. 그런데 자신이 ‘바깥’ 그 자체임을 말할 때에 그리고 그것을 말할 수 있도록 문학의 언어로 ‘바깥’을 드러내고자 할 때, 그곳은 ‘인간’의 것이라고 불린 모종의 존재가 형해화된 곳을 가리킨다. 

  『팔레스타인 시선집』에 수록된 파디 주다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들을 떠올리게 된다. 검은 그림자로 긴 시간을 기다렸던 존재들의 이야기를 길어올린 그녀의 소설들 말이다. 

 

 

갑자기 내가
“불길에” 죽었다.
갑자기 시간이
머물길 관뒀다.
갑자기 네가
내 몸을 못 찾고,
못 찾은 건
못 묻는다.
영시가 닥치기
오래전에 써 둔
내 마지막 시.
갑자기 내 목소리가,
나라가 없어
소리가 없다더니,
소란한 세상에
목소리를 주었다.
갑자기 “하얀 연.”
갑자기 나.
           - 파디 주다, 이예원 역, 「〔…〕」 (45쪽) 전문

 

 

   파디 주다가 쓴 시의 제목은 〔…〕 이다. 불길에 죽어버린 자신을 바라보는 화자가 시간 바깥에 머물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화자는 불길에 의해 사라졌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한다. 그 시(화자)는 자신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을뿐만 아니라 목소리로도 돌아갈 수 없고, 그 목소리와 함께 나라와 소리가 목소리가 사라지고 마치 “하얀 연”과 같은 재의 형상인 자신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이처럼 하얀 재가 되어버린 목소리 속에서 문득 80년 광주의 소년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작가 한강이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면서 썼던 메모,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가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인 광주를 쓰게 했고, 그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현재로 돌아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한강은 말한다.[각주:2]그런데 사실 나의 질문은 한강이 보여주었던 문학으로서의 성과에 가닿지 않는다. 내게서 끝나지 않는 질문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또한 이렇게 계속 우리는 한강을 읽어도 되는 것일까.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각주:3]

 

 

  위의 인용문은 소설 『한강이 온다』의 두 번째 화자인 정대의 목소리다. 시가지를 벗어난 트럭이 광주에서 학살된 몸들을 옮긴 곳에서 그림자이며 빛이며 어둠으로 존재하는 정대가 자신의 몸을 벗어나서 또 그곳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한강의 작품이 역사적 비극에 대해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는 이유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사실일 것이다. 또한 작가가 천착한 작업들이 쉽지 않은 성질의 것이었음을 인정하기도 어렵지 않다. 한강의 글을 통해서 우리 곁으로 돌아온 소년의 목소리를 읽어나갈 때에 우리는 그녀의 고심한 하나하나의 표현과 시적인 문장 속에서 심연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을 읽는 동안 우리는 처절하게 그 고통을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읽어나가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글을 왜 읽을까. 

  2025년을 지나며 한강의 소설이 그리고 노벨문학상이 보여준 힘은 대단했다. 약 1년이 지난 지금도 판매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 기회에 한국문학의 깊이와 능력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고 찬사를 보내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왜 한강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냉소적인 질문이 반드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한강의 작품을 재음미하기 시작한 그 순간, 그 기간동안 여전히 어딘가에서 ‘집단학살’이라는 반복되는 고통이 글이 되고 있다. 한강의 글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어떤 민족에 의한 다른 민족이 학살되어가고 있는 시간에 대한 그 글들이 번역되어 작가가 가본 적 없는 세계의 어느 구석에서 읽히고 있다. 동시에 그동안 노벨문학상은 또 다른 고통의 글을 향하여 상패를 그리고 찬사와 명예를 쥐어준다. 그러니까 노벨문학상을 가능하게 하는 어느 편의 어둠은 씻을 수 없는 집단적인 학살과 고통이 기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025년 내내 한강(작가 자신도 경계하면서 말하고자 했지만)의 책을 읽고 있는 사이에 고통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한강을 통해 고통의 문법이나 죽음에 대해 윤리적으로 말하기를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문법을 읽히는 것이 아니라 전화벨이 울리면 달려야 하는 필사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달려나갈 수 있는 곳도 없는 곳에서 무너지는 지옥에서 아직 무너지지 않은 지옥으로 달려야 하는 것이다. 

  파디 주다는 다른 작품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의 땅을 점령한 이스라엘(또는 유태인)의 과거를 언급한다. 

 

 

나를 내 집에서 내모는 당신은
당신에게 들붙은 과거를
보지 못하고
지금 당신이 내게 물리는 일을 
보지 못하지요.
미루고 좀먹는 지금,
그리해 집단 학살의 범죄가
기후 변화로 가장되고
현재가 끝나지 않도록.
하지만 난 당신보다도
당신과 가깝고
이것이, 내 대적자 벗이여,
거리의 의미랍니다.
(중략) 
내 현재 진행형 대재앙이
여전히 당신의 과거에 못 미치는 곳  
 (중략)
나는 그런 것엔 무심해요. 나는 썩고
저항하고 희망하는 심장을 가졌어요.
나도 당신처럼 파괴형 피라미드에
가입한 적 없는 유전자를 가졌어요.
(중략)
내 창문에서 본 전망이 어때요?
내 소금 맛이 어때요?
                         - 파디 주다, 이예원 역, 「〔…〕」, (18~19쪽) 부분.  

 

 

바르샤바 게토에 갇힌 유대인들이 글을 써서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이유를 남기고자 했었던 노력과 저항이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다. 다가올 집단 학살의 운명을 또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사라짐에 대항하여 글을 쓰고 흔적을 남기려고 한다. 죽음 앞에서 또는 죽음을 이후로 죽음과 함께 쓰여지는 글과 흔적이 문학이 되었을 때, 그 고통에 다가가려고 할 때, 그 길을 문학이 견디며 쓰는 자는 계속 쓸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 기록을 숭고한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고통에 다가가는 작가의 윤리라고 해야 할까. 글을 읽고 쓰고 연구하는 필자의 위치에서 노벨문학상은(그것이 디디고 있는 고통의 현존성이) 점점 불가해한 시간의 잔해물처럼 느껴진다. 

  누르 힌디는 문학적 기교를 다 버리고 눈앞의 재앙에 대해서 말한다. 

 

식민자들은 꽃에 관한 시를 쓴다
난 이스라엘 탱크에 돌을 던진 아이들이
곧장 들꽃치 되어버렸다고 대꾸한다
나도 달에 연연하는 시인이 되고 싶지만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은 감옥에서 달을 보지 못한다
달은 정말 아름다워
꽃도 참 아름답지
(중략)
죽음을 은유로 쓰는 건 귀신이 소리에 연연한다고 생각하는 시인이나 할 짓이야
내가 죽으면 꼭 귀신이 되어 널 영원히 따라다니며 괴롭힐게
나도 언젠간 꽃이 우리 것인 양 꽃에 대한 시를 쓸게
                   - 누르 힌디, 한제인 역, 「씨발 작법 같은 소리하네, 내 민족이 죽어가는 와중에」 (25쪽) 부분. 

 

 

  『팔레스타인 시선집』을 읽으며, 바깥이 없는 세계의 윤곽을 만질 수 있을까 모색해보려 했다. 이미 봉쇄된 그곳에 대하여. 하지만 감히 그 윤곽을 따라가다 보면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문학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고통의 글쓰기를 다시 읽기 시작하는 동안에 고통의 글을 읽는 그 순간에도 팔레스타인에 갇힌 사람들은 보급되는 식량이 없어서, 치료할 약이 없어서, 숨을 수 있는 천장이 없어서 인간이 될 수 없다. 2025년 다시 노벨문학상이 탄생했다. 그러나 2024년도의 한강 작가가 이룬 그 성과에 대해서 잠시 흥분했던 우리는 한강이 가리킨 곳을 봐야하지 않을까. 그것은 단지 광주나 제주도의 이야기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집단이 갇힌 채로 겪어야만 했던 고통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시집을 읽고 꽃에 관한 시를 미워하는 날을 보내길 권한다. 불안하고 초조하길 바란다. 문학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분노하길 바란다. 

 

 

  1. 오카 마리, 김상운 역, 『가자란 무엇인가』, 두번째테제, 2024, 44쪽. [본문으로]
  2. 한강, 『빛과 실』, 에크리, 2025, 21쪽.  [본문으로]
  3.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57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