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이사이드(toycide), 장난감의 학살
박용준 (역사교사ㆍ대학원생)
가자의 어린이들‘에게도’ 인형이 있다. 전쟁과 학살 중에 찍힌 그들의 손과 품에는 인형들이 소중히 안겨 있다. 그래서인지 더욱 위태로워보이는 이 인형들을, 공습이나 포격이 벌어지면 놓치기도 한다. 그러면 잠시의 틈을 찾아 어린이들은 그것들을 되찾으러 온다.
손을 잃어버린 아이는 다른 손으로 그걸 주워 올리고, 저만큼 날아가서 따뜻한 피가 쏟아지고 있는 아이의 인형은, 이윽고 곧 죽게 될 다른 아이가 주우러 오는 것이다. 무수한 인형들이 포탄 한 발, 총알 한 발마다 떨어졌다가 주워지고, 다시 떨어지길 반복한다.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수많은 학살과 파괴에 비하면, 인형과 장난감들의 ‘죽음’이란 정말로 ‘사소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학살과 파괴 그 자체가 아닐까.
토이사이드(toycide)[1], 어쩌면 이렇게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학살의 틈새의 학살, 장난감 학살 자체를 보자는 것이다.
학살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장난감을 학살한다. 학살의 부재를 증명한다는 그들이 장난감을 죽임으로써, 학살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학살의 존재와, 그것이 부재한다고 주장하는, 존재와 부재의 틈 사이는, 학살당한 장난감들로 가득 차 있다.
공습과 포격에 죽은 아이들을, 그들은 인형이라 부르며 조롱했다. 그리고 학살당한 장난감은, 죽은 아이들의 상징이자, 아이들의 죽음 그 자체인 것이다.
그것은 증언이었다. 이미 완벽하게 무기력한 것들의 죽음, 아니, 애초에 그런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장난감들에 대한 학살이었다. 이미 완벽하게 무력한 존재들이 학살당했음을, 그것이 가자임을 말해 준다.
장난감이 학살된 그곳에 놀이는 존재할 수 없다. 장난감이 목매달린 그 좁디좁은 방, 가자는 방 하나하나까지 모두 학살의 현장이 되었다. 이제 아이들이 내몰린 곳은 죽음을 무릅쓰고 다가 간 구호 트럭 앞이다.
아이들의 놀이, 즉 장난감은 완전히 학살자들의 놀이로 대체되었다. 학살자들의 놀이는 곧 학살이었다.
학살자들에게는 그것조차 불필요한 행위일 것이다. 아이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미 다 죽였으므로, 모조리 남김없이 파괴했으므로, 장난감들은 대살(代殺)되었다.
“다음엔 너희 목이 매달릴 거야,” 인형을 통해 속삭인다. 그때까지 인형에 ‘목숨이 붙어 있었다면’, 아마도 그 때 끊어졌을까?
학살당한 인형을 매달아, “어서 이 모습을 보러 오려무나” 하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올 수 있었던 아이들마저 이미 날아가 버렸을지 모른다. 가자의 아이들에게 보여주려던 메시지는, 아이들이 죽자 대신 보여줄 아이들을, 숨어서 살아 있는 아이들을 찾아, 네트워크를 타고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다.
학살은 명령이었다. 그렇다면 인형의 목을 매다는 것은 학살이었을까? 그것까지는 아니었으리라. 이것은 도처가 학살이 된 가자에서, 학살 위에 학살이 넘쳐 흐름을 의미한다. 가자엔 식수가 부족하지만, 학살자들이 인형마저도 죽여 쏟아붓는 피 덕분에 가자에는 학살의 양동이들이 흘러넘친다.
낡은 인형의 어설픈 재봉은, ‘가자’와 ‘삶’, 가자의 아이들에겐 너무도 당연했으나, 도저히 어울리지 않게 보이고 말게 된 그것들을 이어 주는 마지막 의지처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학살당한 뒤, 새로운 저주와 학살의 수단이 되었다. “다음 학살에서는 너희를 죽일 거야.”
장난감마저 살해할 만큼, 더 이상 학살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으며, 장난감 학살은 다음 학살을, 그들을 결코 살려두지 않고 절멸시키려는 의의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번역하거나 해석하는 게 애초부터 가능했던가?
저항군과 민간인을 가릴 필요조차 없었던 그들, 인간을 비인간화했던 그들은 인형마저도 가리지 않고 공습하고 포격하며, 총으로 쏴 죽이고 차에 매달거나 목을 매단다. 장난감-애초에 생명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무생물조차도 학살당한다.

[1] '토이사이드'는 장난감을 의미하는 'toy'와 살해ㆍ학살을 의미하는 'cide'를 결합한 것으로, 필자는 이 글과 별도의 논문을 통해 "전쟁 또는 이제 준하는 폭력적인 상황에서 아동들의 장난감 또는 인형들을 실제 인간을 학살하는 양상으로 오용, 훼손, 또는 파괴하는 행위"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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