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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Project/시각문화 읽기

“겹쳐 읽기”의 즐거움과 현기증 - 『비교의 산파술』 서평

by 인-무브 2026. 2. 26.

“겹쳐 읽기”의 즐거움과 현기증

- 비교의 산파술(김수환, 2025, 문학과지성사) 서평

 

 

 

윤영순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본 원고는 2025년 <러시아유라시아연구>에 게재되었습니다. 인용은 다음 링크와 원문을 참고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윤영순. (2025). “겹쳐 읽기”의 즐거움과 현기증:『비교의 산파술』서평 (저자: 김수환, 문학과지성사, 2025). 러시아유라시아연구, 14, 213-217.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3264937

 

“겹쳐 읽기”의 즐거움과 현기증:『비교의 산파술』서평 (저자: 김수환, 문학과지성사, 2025)

 

www.kci.go.kr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면서 에이젠슈테인을 접할 일은 적지 않지만, 벤야민은 그 독특하고 난해한 글만큼이나 다소 먼 존재였다. 그래도 『모스크바 일기』는 20년 전 마침 모스크바 유학을 끝내고 귀국했던 해 겨울 흥미롭게, 심지어는 쿡쿡 웃으며 읽었던 기억이다. 날카로운 지성으로만 인지되던 벤야민의 인간적인 면모, 심지어 지리멸렬한 면마저도 볼 수 있던 이 책은 떠나온 모스크바의 골목과 그 추위를 다시 소환했다.

 

그러고 보면 벤야민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1926년-27년의 겨울은 공산주의 유토피아 건설의 열망이 관료주의와 스탈린식 전체주의라는 녹록지 않은 현실과 충돌하던 때였다. 하지만 전체주의가 아직은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그래서 수많은 예술가가 자기 이야기를 끊임없이 뱉어내던 ‘대화와 대안의 시대’이기도 했다. 에이젠슈테인이 저 실험적 영화 『파업』, 『전함 포템킨』을 연출하고 1년이 지난 때였다. 같은 시공간에 있었고, 같은 대상에 관심을 가졌던 두 사람이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김수환 교수의 『비교의 산파술』을 읽는 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두 천재를 백년이 지나서 한 권의 책에서 만날 수 있도록 설계한 저자의 세심한 ‘조산술’에 경탄하면서도, 점점 확장되는 ‘만남’의 범주와 그를 통해 파생되는 수많은 질문으로 즐거운 ‘현기증’을 경험해야만 했다.

 

독일의 문학 및 문화이론가, 그리고 소련의 영화감독이자 이론가였던 두 사람은 각각의 영역에서 범접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둔 이들이다. 그리고 최근 우리가 경험한 것처럼, 세상을 바꿀 놀라운 기술 변화를 미리 감각하고, 그 본질을 치열하게 탐구한 천재들이다. 기존 예술의 관념을 뒤집은 복제 기술이 가져온 새로운 장르인 사진과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실험한 천재들을 ‘겹쳐’ 읽는 것은 그야말로 흥미로운 체험이었다. 급변하던 세계에서 자신들이 속한 나라와 예술의 경계를 넘어, 그 ‘너머’를 사유하던 그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과정은 또 다른 상상력을 자극했다. 두 천재의 삶의 궤적과 글을 교차시키는 저자의 ‘산파술’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때로는 과감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도래했다. 제2차 산업혁명의 달콤한 열매를 채 누리기도 전에 새로운 기술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대량 학살의 도구가 되었다. “달력이 아니라 진짜 20세기”는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시작되었다는 아흐마토바의 저 유명한 시구절은 ‘폭력’과 ‘극단’의 시대로서 지난 세기가 지닌 비극의 성격을 증언한다. 전쟁과 혁명, 파시즘과 전체주의, 기계화와 물신숭배로 점철된 20세기 전반기는 가장 끔찍한 이름들을 역사에 남겼다. 서로 적으로 만났지만, 작가 그로스만의 표현대로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쌍둥이처럼 닮은 히틀러와 스탈린은 20세기를 파국과 대량 학살의 시대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인류가, 또는 인간이라는 종이 절망적이지 만은 않았음을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낸 여러 천재의 삶과 창작이 보여주고 있다. 히틀러의 나라가 낳은 벤야민의 저작들과 스탈린이 사랑한 영화감독 에이젠슈테인이 남긴 유산은 극단의 시대가 인류에게 남긴 희망의 기호로 읽을 수 있다.

 

아마도 개별 논문으로 집필되었을 이 책의 각 장은, 그럼에도 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리 집’의 계보학을 다룬 1장은 19세기 중반부터 유럽 지식인들이 천착해 온 기술 발전과 유토피아에 대한 저 유명한 수정궁의 이야기를 영화와 건축, 문학과 철학적 사유들을 통해 펼쳐놓는다. 에이젠슈테인의 실현되지 못한 프로젝트 중 하나에서 출발한 ‘유리집’의 러시아적 계보는 체르니솁스키와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 수정궁에서 시작하여 보그다노프의 붉은 별에 나오는 ‘푸른 유리’ 지붕과 자먀틴이 창조한 단일제국의 ‘유리의 벽’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문학과 역사의 유토피아, 또는 반(反)유토피아적 전통 속에서 이어지고 확장된다.

 

같은 시대, 벤야민이 언급한 셰어바르트의 유리와 바우하우스의 강철에서 출발한 저자는 셰어하우스의 유리 유토피아를 건축에서 실현한 타우트의 프로젝트,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 그로피우스와 교수로 일했던 칸딘스키까지 유리집의 연결고리를 확장해 나간다. 유럽과 러시아의 작가와 건축가, 영화감독까지 매혹되었던 유리집은 그 투명함과 아름다움에 내재한 유토피아적 이상과 함께 사적인 삶이 불가능한 감시 체제의 도구라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상징으로 표상되었다. 에이젠슈테인의 실현될 수 없었던 유리집의 프로젝트와 벤야민의 사유를 연결 짓는 과정에서 불쑥불쑥 등장하는 20세기 예술가들의 ‘텍스트 더미’는 저자가 인용한 알렉산더 클루게의 ‘상상의 채석장’으로서 독자들에게 아찔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유리집’의 상상력이 역사의 시작과 끝으로서 유토피아라는 시공간과 연결되어 있다면 2장의 디즈니와 미키마우스는 1930년대와 40년대에 다시 사유할 수밖에 없던 인간 존재의 본질, 또는 인류를 그 출발점과 먼 미래라는 양 끝에서 이야기한다. 인간, 남성, 여성, 동물, 기계 이 모든 개념을 포괄할 수 있고,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존재로서의 미키마우스와 모든 것이 가능한 만화 속 세계는 20세기 인간이 꿈꾸는 포스트 시대와 ‘포스트휴먼’이기도 했고, 아무것도 없었던 원형의 태고이기도 했을 것이다.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20세기 세계 풍경 속에서 “왜소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몸뚱이”에 대비되는 형상으로서 벤야민이 정의한 절단되고 늘어나는 미키마우스의 파괴적-해체적 형상은 인간의 연약함과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포괄하는 존재다.

 

저자는 벤야민의 이러한 관찰을 에이젠슈테인이 ‘디즈니’ 원고에서 만화 속 캐릭터들의 변신 가능성, 그리고 세계를 마음껏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에 주목한 점에 ‘겹쳐 놓고’ 읽는다. 여기에 더해 벤야민의 파괴적 자유와 에이젠슈테인이 언급하는 플라스마적 자유가 어떻게 다른 지를 풀어낸다. 현재의 파괴가 전제된 미래 포스트휴먼의 예시로서 미키마우스를 바라본 벤야민과 달리 에이젠슈테인은 여기서 태고의 원형질로의 퇴행하는, 전(前) 인간적 존재를 찾아낸다. 하지만 독자로서 내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가 에이젠슈테인의 ‘디즈니’ 글쓰기 작업을 관통하는 일종의 몽타주적 ‘자유’에 대한 열망을 읽어내고 이를 지적한 점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적 인물과 독백의 언어로 소비에트 문화 예술이 수렴되었던 시절, 모든 시공간, 인간과 동물, 젠더의 경계를 이월하는 디즈니 만화 속 주인공들은 절망과 동시에 희망의 기호이기도 했을 테니 말이다.

 

2장이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미키마우스라는 다분히 당대로선 새로웠던 매체와 캐릭터를 다루고 있다면 3장은 벤야민과 에이젠슈테인만큼이나 흥미로웠던 한 개인, 채플린에게 주목한다. 채플린에 대한 두 사람의 고찰은 ‘웃음’의 본질에 대한 아주 오랜 논쟁을 상기시킨다. 벤야민의 채플린 논문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채플린의 웃음에 대한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논쟁을 소환한다. 채플린 현상 ‘겹쳐 읽기’ 과정은 벤야민과 아도르노, 에이젠슈테인에게로 확장된다. 웃음, 미메시스, 유아적 본질, 그리하여 유년기를 통한 인간 본질의 문제로까지 깊어지는 채플린학(學)은 두 사람의 시선이 머무는 대상이 지닌 깊은 상징성과 더불어 거대한 변혁의 시대 20세기 인간 존재의 문제를 예술과 철학에서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준다.

 

책의 4장과 5장은 얼핏 보면 3장까지의 ‘겹쳐 읽기’와 다른 맥락에서 읽힌다. 하지만 1930년대 유성 영화의 등장과 소비에트 영화 산업의 변화(또는 몰락),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을 영상으로 옮기려 했던 에이젠슈테인의 야심만만한 기획은 기술, 혁명, 자본주의, 인간, 매체 등을 다루는 앞의 문제의식과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밖에 없다. 만약 실현되었다면 영화사의 혁명이 되었을 미완의 프로젝트 자본은 저자의 전작 저서의 제목처럼 “책에 따라 살기”에 충실한, 러시아인 특유의 “불가능을 현실에 가능케 하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읽힌다.

 

이처럼 인류사의 가장 극적 시공간을 살았던 두 사람의 시대와 문화 예술에 대한 성찰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그들 텍스트와 작품 여기저기에 흩어진 생각의 파편들을 모으며, 때로 교차하고 때로는 비껴가는 시선을 뒤쫓는 저자의 ‘겹쳐 읽기’ 과정을 관찰하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거기에 독자로서의 과제는 아마도 이를 통해 발굴한 그 ‘상상의 채석장’에서 우리 시대를 읽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리라. 전쟁과 혁명, 기술 발전과 자본주의, 독재와 살육의 역사가 지배했던 시대를 살아낸, 단순히 살아낸 것이 아니라, 위대한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 창조성의 본질을 파고들었던 두 천재의 상상력과 그 상상력이 향한 지점을 ‘겹쳐’ 읽는 ‘비교의 산파술’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어쩌면 그들이 염려하고 상상했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아니 더욱 예민하고 복잡해진 시공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