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도시의 주민들
빅토리아 아멜리나의 <여성과 전쟁. 우크라이나 소설가의 전쟁일기>(이수민 옮김, 파초, 2025)에 대한 서평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1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쓰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책의 만듦새, 내용, 의미 등을 살펴보고 평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뒤표지에 적힌 소개문을 보는 순간 말문이 막힌다. “2023년 7월 1일, 서른일곱의 빅토리아 아멜리나는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했다.” 위키피디아에서 검색해 보니 나와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그녀는 내가 러시아 유학을 시작하던 무렵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내가 유학을 마치던 해에는 러우전쟁의 전쟁범죄 조사원이 되었다. 모스크바와 르비우의 거리는 약 1,000킬로미터로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그녀는 내가 공부하고 추억을 쌓았던 나라가 발사한 미사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우크라이나 작가인 그녀의 책을 읽는 매 순간 러시아문학이라는 내 전공을 떠올리게 되고, 이따금 책의 내용에 관한 생각은 멈춘 채 그저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떤 자세로 읽어야 할지 고민하곤 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에 관한 국내 서평을 찾아보았다. 빅토리아 아멜리나의 <여성과 전쟁>에 관한 서평으로는 두 편이 발견된다. 하나는 책이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사이트 ‘전쟁없는 세상’에 게시된 연극창작자 류소연의 서평 「전쟁으로 사망한 작가의 빈 페이지, 그곳에서 평화와 비폭력 저항을 질문하기」1이고, 다른 하나는 올해 여성의 날 이틀 뒤, <여성신문>에 공개된 이슬기 기자의 「전쟁을 숫자 아닌 여자의 얼굴로 보는 일」2이다. 아멜리나의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두 편의 서평은 각각 전쟁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의 관점, 그리고 전장을 누비는 여성들의 삶과 통계로 소급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류소연은 ‘전쟁을 바라보는 여성을 바라보기(Looking at Women Looking at War)’라는 이 책의 원제에 착안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독자로서 아멜리나의 글에서, ‘여성적 시각’에서 쓰인 영웅서사가 아닌, 전쟁이라는 상황 속 폭력 저항과 비폭력 저항 사이에서 망설이고 협상하며 제각기 저항의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개인들의 실천과 선택을 읽어낼 수 있다.” 한편, 국제부 기자로서 러우전쟁 피해자들의 생명을 숫자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슬기는 이 책을 읽고 “또 한 번의 여성의 날을 누리지 못했던 또래 여성의 유고작을 읽으며 나는 숫자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니 숫자는 곧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새겼다”고 토로한다. 탁월한 두 서평을 읽으면서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영 난감했던 이 책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전쟁에 대한 저항, 그중에서도 전쟁을 바라보며 기록하는 여성들의 삶과 활약이었다.
2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이미 두 편의 서평이 잘 전하고 있으니 나는 다시 할 말이 없어진 셈이다. 따라서 차라리 원점으로 돌아와 러시아문학 연구자로서 이 책을 읽을 때의 복잡한 마음과 놀라움, 그리고 연대감을 전하고자 한다. 그런 관점에서 책을 다시 펼치면 우선 다음 구절이 뜻깊게 다가온다.
나는 구소련 시절에 지어진 르비우 외곽의 9층 회색 아파트에서 성장했다. 할아버지는 소련군 대령이자 전투기 조종사였다. 장기간의, 어쩌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군 복무의 대가로 소련 정권은 할아버지와 그의 가족―할아버지의 아내인 내 할머니와 딸 두 명―에게 탱크 수리 공장 근처의 작은 방 두 개가 있는 아파트를 주었다.(97)
러우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혀 교차점을 갖지 않는다는 식으로 흘러가기 쉽다. 이는 당연하다. 전쟁이 발발하기 반년 전,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일치성에 관하여」3라는 논문을 발표해 두 국민의 통합을 강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발로, 또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러시아의 폭력을 규탄하기 위해 두 국가, 두 국민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아멜리나의 책에서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두 개의 독립된 국가이고,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 역시 저마다의 국가에 속한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복잡한 과거를 분석한다. 그녀의 할머니는 러시아인이었고, 할아버지는 소련군으로서 나치에 맞서 싸웠으며, 그 공로로 소련 정부로부터 아파트를 받았다. 아멜리나 역시 1986년 소련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022년 3월 6일, 전쟁이 일어난 지 열흘 뒤, “나이가 다른 다섯 여자들―엄마, 이모, 언니, 여덟 살 조카, 그리고 나―은 추억을 안고” 할아버지의 아파트 “거실에 모인다.”(99) 여기서 여덟 살짜리 조카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한 2014년에 태어났고, 나머지는 모두 길게든 짧게든 소련 시민으로 살았다. 아멜리나는 “선반 위의 수많은 사진들을 바라”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나의 모든 선조들이 전쟁과 침략, 학살에서 생존해야 했던 게 아닌가.”(99) 그녀들을 비롯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동시에 사용하며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고, 소련을 지키기 위해 나치에 저항하기도 했다.

이렇듯 우크라이나인의 삶에서 러시아/소련은 벗어나고 싶은 과거, 그러나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는 흔적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인식은 아멜리나가 아들 로만 라투슈니를 전장에서 잃은 우크라이나 시인 스비틀라나 포발랴예바와 나눈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2013년에 나는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할지 몰랐다. <...> 그래서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길가의 소풍>의 내용을 인용했다. “모두를 위한 행복과 자유, 그리고 누구도 불만족스럽게 떠나지 않기를.”
소련 작가를 인용하는 나에 대해 스비틀라나가 느끼고 있을 감정이 궁금하다. 하지만 그녀는 완벽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나는 소설의 끝을 그녀가 아는지 묻지 않는다. 소원을 이루기 위한 희생물로 한 소년이 죽어야만 한다.(280-281)
여기서 아멜리나가 인용한 스트루가츠키의 소설은 국내에 <노변의 피크닉>(1972)으로 번역된 작품4으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만든 영화 <스토커>(1979)의 원작이다. 위에서 언급된 2013년의 시점은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친러 정책에 반대하는 유로마이단 혁명이 일어났던 때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련의 문학작품은 자연스럽게 인용되고, 그 자연스러움에 대한 복잡한 심경도 존재한다. 스비틀라나 역시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을 이 희망찬 경구에 동의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학과 현실에 걸친 비극이 숨어있다. 소설에서 주인공 레드릭은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딸의 상태를 되돌리기 위해 소원을 들어준다는 ‘금빛 구체’로 향하는데, 이때, 그 과정에서 그와 모험을 함께하는 동료의 아들 아서를 ‘미트 그라인더’의 희생양으로 삼는다. 마침내 ‘금빛 구체’를 마주한 레드릭은 아서가 죽기 전에 외친 말을 되풀이한다. “모두를 위한 행복과 자유, 그리고 누구도 불만족스럽게 떠나지 않기를.” 여기서 아서에 해당하는 스비틀라나의 아들 로만 라투슈니는 비정부기구 ‘프로타시우 야르를 보호하라!’를 설립해 키이우의 공원 ‘프로타시우 야르’를 개발자들로부터 지켜냈다. 그야말로 “모두를 위한 행복과 자유”를 외쳤던 셈이다. 그랬던 라투슈니는 결국 몇 년 뒤 러우전쟁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쟁이 소모전으로 변하는 양상을 두고 종종 ‘고기 분쇄기(meat grinder, мясорубка)’라는 비유를 사용하곤 한다.
우크라이나인과 우크라이나에 녹아 있는 러시아/소련만이 이처럼 중첩된 관계의 전부는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올하(러시아어로는 ‘올가’) 시모노바라는 어느 대원은 러시아 첼랴빈스크 출신이었으나, “러시아 시민권을 포기했고, 우크라이나 군인으로 우크라이나를 방어했다.”(218) 그 동기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러시아인으로 자랐던 자신의 과거 위에 우크라이나 군인의 정체성을 포갰다. 그리고 작전에 참여하던 중 우크라이나인으로 사망했다. 올하의 삶에서 아멜리나의 다음 말을 곱씹게 된다. “우크라이나인은 정치적인 민족이에요. 우크라이나인이 되고 싶으면 우크라이나인이 된다는 뜻입니다.”(368) 즉, 인종, 태생, 출신과 상관없이 우크라이나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고대 루시라는 뿌리, 러시아제국과 소련의 통치,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의 독립.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가로지르는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인은 형성된다는 것이다. 아멜리나는 우크라이나인의 이러한 중첩된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기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사실 저는 러시아의 어떤 것을 다시 감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영토적인 주권의 회복과 러시아 제국의 멸망이 일어난 후에야 가능할 겁니다. 러시아인들은 존재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우크라이나의 승리와 자유 진영의 승리 이후에 우리 모두는 그런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373)
아멜리나는 “러시아의 어떤 것”을 “감상”하기를 바란다. 이 “어떤 것”은 “증오를 조장하는 기계를 작동”시키거나 반대로 “반전 구호를 외쳐 부르기”만 하는 오늘날 러시아의 예술(165)은 분명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접해 온 러시아/소련의 추억과 훌륭한 유산을 마음 편히 즐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감상”은 우크라이나의 중첩된 정체성을 러시아와의 제국적 일치성으로 수렴하지 않을 때 가능해진다. 또,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민족적 우크라이나로 단순화하지 않을 때 가능해진다.
3
바로 이 복잡다단한 국가와 개인의 역사적 지평에서 아멜리나는 러우전쟁과 우크라이나 예술의 질곡을 연결 짓는다. 얼핏 보면 이 책에는 중심 서사가 없어 보인다. 전쟁범죄 조사원이 된 아멜리나가 다양한 지역에서 전쟁으로부터 소중한 것을 빼앗긴 여성들, 전쟁을 직시하며 모든 것을 기억하려는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열거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또, 책의 후반부는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보니 뚜렷한 전개의 흐름이 잡히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서문에서 이 책의 물리적 범위를 선명히 밝힌다.
이 전쟁일기는 2022년 2월 17일부터 러시아 점령군에게 살해된 동화 작가 볼로디미르 바쿨렌코를 추모하기 위해서 이쥼 부근에 모인 그날까지의 사건들을 포함한다. 그날 이쥼에 모인 이유는 내가 볼로디미르 바쿨렌코의 전쟁일기를 발견해서 소련과 러시아 정권에 의해 탄압받았거나 처형된 우크라이나 작가들을 기리는 하르키우 문학관에 건네주었기 때문이다.(19)
작가가 제시하는 열쇠를 따르면 다음과 같은 연쇄 항이 도출된다. 바쿨렌코라는 작가의 죽음- 그의 전쟁일기-이 전쟁일기가 소장된 하르키우 문학관. 그리고 이 여정에서 아멜리나는 러우전쟁의 이전과 이후의 여러 상황에 얽혀있는,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이 비극에 대처하는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만나면서 우크라이나 예술의 과거와 현재를 소환한다. 테탸나 필립추크를 만나서는 18세기 우크라이나 출신 지식인 흐리호리 스코보로다 문학관이 러시아의 공격에 불탄 소식을 접한다. 마침 러시아가 키이우로 진격한 2022년 2월 24일, 이 문학관에서는 필립추크의 기획으로 새로운 전시가 열릴 예정이었다.

아멜리나가 인권 변호사 올렉산드라 마트비추크를 만난 곳은 키이우의 1960년대 저항 예술가 박물관5이다. 이 박물관에는 마리우폴의 평화거리에 설치된 알라 호르스카(1929-1970)의 유명한 벽화 <황조롱이>(1967)의 원본이 있는데, 이 벽화는 러우전쟁 발발 이후 파괴되고 말았다. 1960년대의 예술가들 역시 소련 체제에 저항하며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하거나 소련 정권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했다. 아멜리나는 호르스카의 비극적인 죽음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한다. “2022년 지금에 이르러서야 60년대 저항 예술가들의 활동이 훨씬 잘 이해되고, 우리와 가까우며 중요한 것처럼 느껴진다.”(143)


이 60년대 저항 예술가들은 러시아의 키이우 침공 이후 2022년 2월 26일에 가까스로 이집트의 휴가지에서 르비우로 돌아올 수 있었던 아멜리나를 통해 1922년 하르키우에 설립된 베레질 극장과 연결된다. 1962년, 젊은 예술가들은 우크라이나의 천재 연극인 레스 쿠르바스와 그가 세운 베레질 극장을 기념하기 위해 키이우의 10월 극장에 모인다. 쿠르바스는 우크라이나 아방가르드 극작의 선구자 미콜라 쿨리시의 실험적인 희곡 「마클레나 그라사」를 이 극장에서 1933년에 마지막으로 공연한 뒤, 우크라이나 지식인 숙청의 일환으로 체포되어 1937년에 총살되었다. ‘베레질(Березіль)’이라는 명칭은 3월을 뜻하는 우크라이나어 ‘베레젠(Березень)’에서 왔다고 한다. 베레젠은 자작나무를 뜻하는 ‘베료자’에서 비롯되었다. 개관 백 주년을 맞이하여 이 극장에서는 자작나무에 싹이 날 무렵인 2022년 2월 26일에 쿠르바스가 올렸던 <마클레나 그라사>가 상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하르키우에는 미사일이 떨어졌고, <...> 2022년 2월 26일과 그 이후에도 초연은 열리지 못했다.”(131)

우크라이나 여성들과 아멜리나의 만남은 소련 치하 우크라이나 예술의 수난사가 러우전쟁과 교차하는 지점들을 소환해 낸다. 그리고 아멜리나는 선배 예술가들을 기념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동료들을 찾아다녔던 1960년대 예술가들의 전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직 나는 우크라이나 예술가들의 슬픈 전통에 속하지는 않았다. 죽은 동료들에게 일어난 일을 찾아다녀야 하는 전통 말이다. 나는 목격자를 찾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139)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멜리나 역시 이 “슬픈 전통”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2022년 3월 이후로 이쥼에서 소식이 끊긴 그녀의 친구 볼로디미르 바쿨렌코는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아멜리나가 속한 인권 단체 ‘트루스 하운즈’는 이 사실을 밝혀내게 된다.
4
바쿨렌코의 전쟁일기는 2024년 5월 미사일 포격으로 파괴된 하루키우의 출판사 비밧(Vivat)에서 2023년 6월에 출간되었다.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변해 간다... 점령 일기. 선별한 시들(Я перетворююсь… Щоденник окупації. Вибрані вірші)” 아멜리나가 서문을 쓴 이 책은 사실 카피톨리우카에 있는 바쿨렌코의 집 정원에 묻혀 있었다. 그녀는 “맨손으로 땅을 파서 일기를 발견”했고, “플라스틱 필름으로 감싸서 하르키우 문학관6에 전달했다.”(323) (다음 영상에서는 그가 일기를 적은 노트, 그리고 그 노트의 디지털화 작업 과정을 볼 수 있다.)

«Я вірю в перемогу»: щоденник викраденого росіянами письменника
‘바쿨렌코 찾기’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장 이후로도 책은 거의 백오십 쪽 이상 계속된다. 하지만 사실상 아멜리나가 제시한 이 책의 시간적 범위는 여기서 끝난다. 그리고 바쿨렌코의 일기를 찾고 영원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아멜리나가 이 책에서 추구한 하나의 순수한 원형적 행동이 된다. 그것은 바로 기억을 지우려는 자들에 맞서 기록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 영원한 몸짓을 위해 아멜리나는 전쟁범죄 조사원이 되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행동과 기억을 적는다. 그녀는 “영웅이 아니라 삶이 폐허로 변해버린 평범한 사람이자, 싸울 수 없고 도망쳐야 하는 보통의 우크라이나인”(230)들을 찾아다니고 이때 소송을 위한 기록은 소설 쓰기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소송하는 것은 소설 쓰는 것처럼 해야 한다. 제대로 하려면 모든 것과 모든 세부 사항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일이 벌어졌는지 소설가가 모르면 독자도 모를 것이다. 국제 판사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이보다 더 쉬울 리가 없다.(199)
통상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지어내는 것을 비아냥거릴 때 ‘소설 쓰고 있네’라는 말을 하지만, 아멜리나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모든 것과 모든 세부 사항을” 독자에게 전달해 진실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이며 소송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것은 기억을 지우려는 자들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기억의 편에 있는 모든 이에게 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아멜리나는 기억을 지우거나 덧칠하려는 행위를 저지하고 그 덧칠을 벗겨내는 작업들을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러우전쟁과 관련된 것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있다. 대표적인 두 가지만 꼽아보자.
첫째, “셰우첸코 해방되다”라는 장이다. 러시아군은 발라클리야의 어느 광고판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연합에 관한 선전물을 설치했지만, 사실 그 선전물을 벗겨내면 “그 아래에는 위대한 우크라이나 시인 타라스 셰우첸코의 초상화와 그의 시가 적혀 있다.”(285) 시의 몇 구절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영원한 얼음 속에 갇힌/ 푸른 산들이여, 그대에게 영광을!/ 그리고 영광이여, 자유의 기사들이여, <...> 명예와 자유를 위해 행진하라./ 정의는 그대의 편이다.!”(286) 점령군은 덧칠하면 기억이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겠지만, 덧칠은 어디까지나 본래의 기억 위에 쌓인 층일 뿐이다. 이 덧칠을 벗겨내고 그 아래의 층을 벗겨내는 행위 역시 독특한 방식의 기록이 된다.


둘째, 스물넷의 나이로 전장에서 사망한 로만 라투슈니가 2018년에 세운 비정부기구 ‘프로타시우 야르를 보호하자’가 그렇다. 프로타시우 야르는 키이우 중심부에 있는 언덕으로 이 녹지는 겨울이 되면 시민들에게 스키 슬로프로 사랑받는다고 한다. 2007년 키이우 시의회는 이 토지에 개발을 허가했으나 2012년 키이우 시 환경 당국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2019년 개발업자들은 프로타시우 야르에 울타리를 치고 경사면에 40층짜리 건물 세 채를 짓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라투슈니를 주축으로 하여 시민들은 ‘프로타시우 야르를 보호하자’7를 결성해 공사 중단을 위한 행동을 진행했고, 결국 2020년 키이우 시의회는 이 지대를 다시 녹지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라투슈니와 시민들은 이 장소를 지켜냄으로써 공공의 기억을 기록해 냈다. 그러나 공원의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우크라이나 건설 회사들이 아니라 러시아의 침략자들로부터 로만과 예우헤니아가 지키고 있는 그 공원.”(15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키이우의 시민들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자본가들처럼 장소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도록, 이 기억에 덧칠하지 못하도록 분투하고 있다.
5
아멜리나는 책 전체에 걸쳐 한 편의 시에 관해 몇 차례 이야기한다. 바로 도네츠크 출신 시인 세르히 자단이 2014년에 발표한 시 「새 떼 같은 검은 무리여, 그대들은 어디서 오는가?」이다. 아멜리나는 시의 한 구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년의 살인범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명령 체계의 상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일부는 권력과 부를 거머쥔 자들일 것이다. ‘나는 참회의 불가피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세르히 자단은 시를 썼다. 마리우폴의 평화 거리에 인용되어 있는 시다. 나 역시 참회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385) 편집자의 주에 따르면 마지막 문장은 미완으로 남아있다. 죽을 때까지 자신과 우크라이나의 과거를 응시하고 정의를 되찾고자 모든 것을 기록하던 아멜리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말하려던 것일까? 자단의 시 전문을 읽어 보면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 떼 같은 검은 무리여, 그대들은 어디서 오는가?”
“신부님,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의 주민들입니다.
우리는 이곳 당신께 복종과 피로를 가져왔습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그곳에는 총 쏘아 죽일 이 아무도 없다고 전해 주십시오.
우리의 도시는 돌과 철로 지어졌었지요.
이제 우리는 저마다 여행 가방 하나만 손에 쥐고 있습니다.
가방에는 총부리 아래 긁어모은 잿가루가 담겨 있지요.
이제는 꿈에서도 잿가루 타는 냄새가 납니다.
우리 도시의 여인들은 목청이 좋고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손가락은 밤이면 심연을 더듬었습니다.
우리 도시의 샘들은 살아있는 듯 깊었습니다.
교회들은 넓었고요. 우리는 교회들을 우리 손으로 불태웠습니다.
묘비들이 우리에 대해 가장 잘 얘기해 줄 겁니다.
우리와 그저 이야기 좀 나누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죔쇠를 조여 주십시오.
신부님, 당신은 고해를 듣고 성체 주는 법을 배우셨잖습니까.
왜 우리의 도시가 불탔는지 말해 주십시오.
적어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말해 주십시오.
죄지은 자는 최소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해 주십시오.
뉴스에서 말하지 않는 그 무엇 하나라도 말해 주십시오.”
“좋소, 상실이란 무릇 무엇인지 말해 주겠소.
응당한 대가는 죄지은 모든 자를 기다리고 있다오.
허나 시간이 흐르면 그 대가는 죄 없는 이들도 찾아온다오.
죄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마저 기다리고 있다오.
어떤 까닭에 그대들이 어두운 물결에 빠져들게 되었겠소?
그대들은 예언자들의 책을 주의깊게 읽어야 했소.
그대들은 지옥의 구멍을 돌아가야 했소.
속인들은 신앙의 상징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지 말아야 한다오.
예언자들이 고통과 인내에 대해 말한 것을 기억하시오?
돌처럼 도시에 떨어지는 새들에 대해 말한 것을 기억하시오?
그때 비로소 상실이 시작된다오.
종말의 때에는 매우 끔찍할 것이니 차마 말하지는 않겠소.
우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겠소? 자음과 모음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오, 단 그에게 닥치지 않을 때.
누구도 결코 이 삶에서 대가를 피하지 못하오.
나는 신도들에게 할 말이 없을 때면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오.
나는 속죄의 불가피성은 아무것도 모른다오.
나는 그대들이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모른다오.
나는 우리 모두에게 고유한 것을 말하고 있다오,
우리 모두 얼마나 운이 나쁜지 그대들이 알면 좋으련만.”

- https://withoutwar.org/?p=23493) [본문으로]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310/0000134614?sid=103 [본문으로]
- http://en.kremlin.ru/events/president/news/66181 [본문으로]
-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보리스 스트루가츠키, <노변의 피크닉>, 이보석 옮김, 현대문학, 2017. [본문으로]
- https://museum60.com/%2B [본문으로]
- https://litme.com.ua/en [본문으로]
- https://www.instagram.com/save_protas/ [본문으로]
'인-무브 Project > 니 비니! нi вiйнi! (전쟁 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더 이상 어디에도 바깥은 없어”의 안쪽을 따라서 그리는 일 (1) | 2025.12.09 |
|---|---|
| 심숀 비클러 & 조나단 닛잔, 가자에 이르는 길(The Road to Gaza) 2편 (0) | 2025.11.25 |
| 심숀 비클러 & 조나단 닛잔, 가자에 이르는 길(The Road to Gaza) 1편 (1) | 2025.11.21 |
| 캐슬린 매디언, <들뢰즈의 팔레스타인> (0) | 2025.11.17 |
| 우리는 웃어야 해서 웃는다 (0) | 2025.11.11 |
| 질 들뢰즈, 돌멩이들(LES PIERRES, 1988) (0) | 2025.11.05 |
| 토이사이드(toycide), 장난감의 학살 (1) | 2025.10.22 |
| 질 들뢰즈, 야세르 아라파트의 위대함 (GRANDEUR DE YASSER ARAFAT, 1984) (0) | 2025.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