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번역/대체: 하버마스, 스피노자를 읽다
마르틴 자르(Martin Saar)
번역: 김강기명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원문: Saar, Martin. “Üb/ersetzung der Religion: Habermas liest Spinoza.” In: Annette Langner-Pitschmann / Tobias Müller / Michael Roseneck (Hg.), Den Diskurs bestreiten. Religion im Spannungsfeld zwischen Erfahrung und Begriff (Festschrift für Thomas M. Schmidt). Baden-Baden 2025: Nomos, S. 195–213.
제목에 관한 역주 — 원제 „Üb/ersetzung”은 빗금으로 Übersetzung(번역)을 갈라 그 안에 숨은 ersetzen(대체하다)을 드러낸 말놀이다. 논문의 마지막 절은 바로 이 이중성 — 종교가 이성의 언어로 번역되는가, 아니면 그 번역 속에서 대체되어 사라지는가 — 을 핵심 논점으로 회수한다. 한국어로는 「번역/대체」로 옮기고 이 각주로 대신한다.
초록: 위르겐 하버마스가 스피노자를 본격적이고 명시적으로 다룬 것은 그의 마지막 대작에 이르러서였는데, 그때까지 스피노자를 누락한 것은 꽤나 의아한 일이다. 왜냐하면 종교비판가 스피노자는 —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 세속적 이성(säkulare Vernunft)을 그것의 모든 경멸자들에 맞서, 그러나 또한 그것의 몇몇 독단적 애호가들에 맞서 열정적으로 옹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의 짧지만 밀도 높은 스피노자 독해를 꼼꼼히 읽어보면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두 철학적 기획의 놀라운 수렴이,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 일반의 자율성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깃든 어떤 다의성(Mehrdeutigkeit)이 그것이다. 두 저자 모두 이 다의성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지만, 둘 다 그것을 해소하지는 않았다.
주제어: 하버마스, 스피노자, 세속적 이성, 신앙과 지식
위르겐 하버마스의 긴 이력에서 바뤼흐(혹은 베네딕투스 혹은 벤투) 스피노자의 저작과의 씨름은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았다. 자연법 및 사회계약 전통의 역사에서 그가 갖는 중요성이나, 칸트와 독일 관념론자들에게 중요한 선구자이자 참조점이라는 통상적 언급들을 제외하면, 그의 사회이론적 주저들에서도, 수많은 소규모의 정치적·철학적 개입들에서도 뚜렷한 독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로써 하버마스의 사유 여정 또한 특수하게 독일적인 전후 시기 이념사의 전형적 경로를 확인해 준다. 그 시기에는 그 전(라이프니츠에서 칸트, 헤겔, 니체를 거쳐 레오 스트라우스에 이르기까지)까지 대단히 강렬하고 연속적이었던 이 유대적-이단적 사상가에 대한 독일 내부의 참조가 사실상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
따라서 하버마스가 긴 연구자적 생애의 맨 끝에 이르러 결국 스피노자와 마주쳤고, 후기 저작의 정점을 이루는 종교철학적 저서 『이것 또한 철학의 역사다(Auch eine Geschichte der Philosophie)』의 짧지만 중요한 한 장에서 그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는 사실은 적잖은 흥미를 갖고 주목할 만하다. 이 만남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이 책의 주제, 즉 서구 정신사에서 신앙과 지식(혹은 종교와 이성)의 관계였다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며, 이것이 접근 방식의 특징 역시 규정한다. 그리고 책 전체의 전개에서 스피노자와의 이 조우가 다분히 일시적이고, 전체 논증과 체계에서 하나의 경유지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2
이 독해에서는 이중적 종류의 애매성(Zweideutigkeit)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종교 문제에 관한 하버마스의 구체적인 스피노자 해석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다의적인데, 이는 그 대상[스피노자] 자체에도 기인한다. 다른 한편 — 적어도 이렇게 제안하고 싶은데 — 이 양가성에는 어쩌면 종교와 철학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고 체계적으로 해석해 내려는 하버마스 자신의 후기 종교이론적 기획의 어떤 문제성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맞다면, 책 안에서는 다분히 주변적인 이 독해가 징후적 성격을 얻게 되며, 이는 그것이 해석으로서 얼마나 근거 있고 지지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훨씬 넘어서서, 도대체 오늘날 후기 근대적 사유의 조건 아래서 어떻게 종교를 바라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1.
하버마스의 텍스트에서 스피노자라는 이름은 무엇을 대변하며, 『이것 또한 철학의 역사』 제2권의 부제인 「신앙과 지식에 관한 담론의 흔적들」을 엮어내는 서사 속에서 그에게는 어떤 역할이 주어지는가? 간략한 홉스 논의에 이어 하버마스는 스피노자를 홉스와 “동일한 문제”3와 씨름한 인물로 평가한다. 곧 인간이 만든 법률의 정당성과 규범성을 비신학적 조건 아래서 어떻게 해명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하버마스는 스피노자 기획의 “일원론적”4 지향을 기록한다. 그 기획에서는 신체와 정신 사이에도, 자연과 신 사이에도 존재론적 분리가 있어서는 안 되며, 그것들 사이에는 오히려 내재성 혹은 동일성의 관계가 성립한다. 인간의 동기에 관한 문제에서도 스피노자는 구조적으로 유사한 논증을 전개한다. 그의 관점에서 효용을 추구하는 자기이익(Eigeninteresse)과 이성에 따른 공동선 지향(Gemeinwohlorientierung)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질 경우 이 둘은 서로에 의해 귀결된다. 인간의 이성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또한 적어도 특정한 차원에서는 이성적이고 가지적(intelligibel)이다. 그리고 신이라는 이름은 아주 추상적으로 이 전체 연관을 지칭할 수 있다.
신에 대한 물음을 탁월하게 철학적인 문제로 만드는 이 반(反)유신론적(혹은 반신학적) 도발은, 비록 여기서 여러 역사적 요인들이 아직 어둠 속에 있긴 하지만, 젊은 스피노자를 암스테르담 공동체에서 축출하게 만든 계기들의 일부였음이 분명하다.5 하버마스가 “이 행위 속에” “철학의 자기이해의 변화”가 응축되어 있고 “그 이후로 […] 철학과 신학의 길이 새로운 방식으로” 갈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수사적 과장일 것이다.6 그러나 1670년의 『신학정치론』이 급진적인 종교비판 모델을 담고 있으며, 그것이 대부분의 선구자들보다 더 일관되게 “철학과 과학(학문, Wissenschaft)을 신학적 사유로부터 탈결합”7하는 일을 수행한다는 것은 분명 옳다. 일종의 영역 분리를 통해 그는 진리능력을 갖는 이론적 언명들의 영역 — 그 경험적 부분은 과학이, 형이상학적 부분은 철학이 관할한다 — 을 올바른 삶의 영위와 복종에 관한 물음, 즉 종교에 배당되는 물음으로부터 분리한다. 이때 신학은 이 문제들을 분절하는 특수한 한 방식을 점유할 뿐, 엄밀한 의미에서 타당성 주장(Geltungsanspruch)을 갖춘 대안적 이론 층위를 점유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진리와 관련해서는 신학의 권위를 다투지만 도덕과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으며, 체계적으로 수행된 그의 성서비판에서 이는 심지어 내재적으로, 곧 권위 있는 텍스트들 자체로부터의 특정한 독해를 통해 명백해져야 한다.
스피노자는 종교 자체에 감추어져 있는 진리내용(Wahrheitsgehalt)을 재구성하기 위해 성서적 전승을 그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 최초의 철학자다. 스피노자는 종교에게 그 자신의 이성적 핵심에 대해 가르치려 한다.8
이 작업을 해명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문제가 없지 않은 레오 스트라우스의 도식을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철학적 독해는 “밀교적(esoterisch) 내용을 [드러내는데], 물론 스피노자는 그것을 철학적으로 입문하지 않은 독자 대중에게 권하지 않는다.”9 그리고 하버마스는 실제로 다소 기이해 보이는 관념, 즉 스피노자가 종교적 외피를 두른 일종의 사변적 핵심 도덕, 곧 참된 종교(vera religio)를 식별해 낼 수 있다고 믿는다는 관념도 그렇게 이해한다. 그 도덕적 함의는 그 자신의 『에티카』의 함의에 근접한다. 말하자면 종교는, 원칙적으로는 추상적으로도 정식화될 수 있는 근본 통찰들 — 올바른 인간적 공존에 관한, 궁극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는 통찰들 — 에 일종의 세계관적-동기적 혹은 서사적 착근(Einbettung)을 마련해 준다.
이성적 종교비판과 나란히 있는 스피노자의 두 번째 근본 동기가 하버마스를, 그 이전의 많은 동시대적·고전적·근대적 해석자들과 마찬가지로 매료시킨다. 곧 사회계약 구상의 전제들로부터 민주주의적 지향을 획득해 내는 그의 작업이다. 물론 그가 “[근대 초기] 철학자들 […] 가운데 민주주의를 위한 최초의 — 그리고 이후 한 세기 동안 유일한 — 투사”10였다는 진술은 아주 잘 알려진 이름들에만 초점을 맞출 때에만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동시대인들보다 더 체계적으로 자연상태 허구의 평등 요소를 정치적인 것으로 전위시켰고, 모든 국가권력의 기원이 다중의 역량(Macht der Menge)에 있다는 정리를 통해 정치적 지배 주장과 정당성 주장을 만인의 역량에 결부시켰다는 것은 옳다.11 이 구성은 분명 복잡하고, 많은 전제들로 이뤄져 있으며, 하필이면 유대 민족의 정치사에서 신정(神政) 시기를 부각하는 『신학정치론』의 아이러니한 전략 — 거기서는 모두가 똑같이 신의 지배 아래 있다(따라서 어떤 개인이나 어떤 지배 카스트 아래에 있지 않다) — 은 얼마간의 역사적 맥락화를 필요로 한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물리쳐야 할 적수로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칼뱅주의 신학자들 편에서 나온, 이 역사에 대한 일련의 준(準)군주제적 혹은 준성직자주의적 해석들일 것이다.12 하버마스를 매료시키는 것은 — 정당하게도 — 다음과 같은 철학적 강령이다. 즉 “[성서에서 직접 취한] 종교사, 그가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개념들로 재구성하는 종교사를 실마리 삼아”13 종교의 동기부여적이고 문명화하는 역할을 밝혀내는 동시에, 이 역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독단적으로 격상하려는 모든 시도를 인식적 권위를 부당하게 참칭하는 것으로, 즉 세속적인 철학적 이성의 비판적 시선 앞에서는 존립할 수 없는 참칭으로 비판하는 강령이다.
따라서 여기서 진리와 신앙은 아주 가까워지지만, 철학과 신학은 완전히 갈라선다. 관할 영역 간의 이 경계 긋기를 수행할 권리를 부여받은 것은 철학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철학적 이론은 종교적 캡슐에 싸인 진리들을 해독하는 훈련을 한다.”14 스피노자가 — 어느 정도 국가 교리이기도 했던 개혁파 신학의 공식적이고 꽤 권위주의적인 형태가 되었든, 또 자유사상적이고 이단적인 판본이 되었든 — 알게 되었던 프로테스탄티즘이 스피노자의 지각 속에서 이미 그런 관점을 스스로 준비해 놓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그럴듯한 추측이라 하겠다. “어쨌든 스피노자는 그처럼 도덕화되고 지성화된 종교적 신앙의 형태들 속에 아직 감추어져 있는 진리내용들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5
2.
하버마스의 스피노자 독해는 적어도 세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담고 있다. 첫째, 몇몇 분명한 중요성 정식과 파토스 정식이 주목할 만한데, 이는 하버마스가 여기서 무언가가 내깃돈으로 걸려 있음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그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그리고 제1권에서도) 이 실마리를 더 좇지 않고, 이 독해가 그 자신의 구성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귀결도 남기지 않는다 해도 그러하다. 그의 전체적인 구성은 주요 표어들을 다른 원천에서 가져오며, 칸트와 헤겔이 다시금 훨씬 더 중요해진다. 스피노자의 종교비판이 갖는 급진성이나 신학적 발언의 타당성 주장에 대한 합리주의적 제한을 높이 평가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급진적 계몽주의적이고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스피노자에서 출발해 역사적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고, (이론적) 근대의 역사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강조점을 제공할 수 있을 모티프들의 가닥을 더이상 좇지 않는다.16 하버마스가 이 역사에서 스피노자가 갖는 탁월한 위치를 심지어 예감하는 듯 보임에도, 이 제안은 여기서 채택되지 않는다.
둘째, 『이것 또한 철학의 역사』의 인식관심과 그것을 지탱하는 서사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독해가 본질적으로 『신학정치론』을 다루면서 스피노자의 체계적 주저인 『에티카』의 많은 논증들을 옆으로 밀쳐 둔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고 의미가 있다. 스피노자는 훨씬 더 개입주의적이고 시사적인 저작의 작업을 위해 『에티카』의 완성을 수년간 중단했었고, 거기서야 비로소 당대의 신학소(Theologem)들에 맞세워질 세속적 형이상학이 완성된 형태로 발견된다. 그런데 이 저작들의 체계적 관계는 복잡하며, 상당한 주해적 수고를 들여야만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다면, 하버마스가 거의 지나가듯 도입하는 하나의 해석소(Interpretament)는 분명 의문스러워질 것이다. 곧 스피노자가 대중에게는 감당되지 않는 밀교적 가르침을 현교적(exoterisch) 서술 형식에 담아 제시했다는 관념 말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신학정치론』의 특정한 수사적 층위들을 이 관점 아래서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지만, 이 텍스트의 기능과 의도에 관한 보다 일반적인 테제로서 그것은 여전히 불충분하다.17 그것은 이 저작의 명백히 민주주의적인, 나아가 급진민주주의적인 지향과 모순된다. 이 저작은 바로 다수의 이성적인 사람들의 인식적 자기역량강화(Selbstermächtigung)에 기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다소 불투명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명시적으로 개진된 스피노자의 확신, 즉 성스러운 텍스트에 실제로 일종의 인간학적 개시력(Erschließungskraft)이 부여되어 있다는 확신을 은폐한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스피노자가 성서의 세부와 표현들에 관여하는 것이 종교적 대중을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데려오기 위한 단순히 전략적인 결정이 아니라 종교의 의미와 계시에 대한 철학적 태도이기도 하다는 점을 거의 강조하지 않는다.
셋째로 — 그리고 이는 방금의 논점을 확장하는데 — 구체적인 정식화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 짧은 절들에서 하버마스 자신이 이미 스피노자의 기여를 자신의 기획에 얼마나 강하게 동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가 위에서 인용했듯 스피노자가 종교사를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개념들로 재구성한다”18고 쓰면서 바로 이것을 스피노자에게 확인해 주기까지 한다는 사실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짧은 장에서 두 번 등장하는 종교의 감추어진 진리내용이라는 표현은, 신학이 철학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고 무엇일 수 있으며 무엇은 아닌가라는 『신학정치론』의 물음을, 하버마스 후기 저작을 이끄는 직관 — 여기, 종교적인 것의 역사적 장에서 근대의 세속적 이성을 위해 여전히 번역할 만하고 번역 가능한 모티프들과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직관 — 으로 어느 정도 전위시킨다.19
우선은 다음만을 언급해 두고 싶다(이 주제로는 다음 절에서 돌아온다). 스피노자에게는 여기서 — 물론 완전히 다른 이념정치적 맥락, 즉 신학적 권위의 압도적 우세에 대해 애초에 거리를 두고자 했던 맥락을 배경으로 하지만 — 번역과 상이한 언어들의 문제 보다는 타당성 영역들과 권위들의 문제가 전면에 놓인다. 신학이 헤게모니를 쥔 시대에 세속적 이성을 옹호하는 것은 방어적이고 반(反)헤게모니적인 제스처다. 그것은 철학 또한 세계 해석의 쟁론에서 자율적인 목소리를 가지며, 그 목소리가 독단적 종교가 주장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인식적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쓰인다.20 하버마스가 눈에 띄는 호의를 갖고 전하는, 종교에 대한 스피노자의 준(準)근대적이고 객관화하는 태도 — 종교를 그 세계관적 내용에서 추상하여 사회통합적이고 동기부여적인 힘으로 분석하는 태도 — 는 여기서 한쪽 면일 뿐이다. 다른 한 면은 — 이 역시 『에티카』에서 더 분명할 텐데 — 특수한 전승 자산들로부터 대체로 자유로운, 철학적이고 이성적이며 준보편적인 선(善)의 구상을 전개하는 데 있다. 이 구상 또한 이미지와 서사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을 문화적으로 배타적인 원천에서 가져오려 하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아 이미 성서 텍스트 자체가 하나 이상의 전승 전통에, 곧 서로 상이한 유대적 해석 관습들과, 저희끼리도 충돌하는 상이한 기독교적 해석 관습들에 속한다는 것은 스피노자의 성서비판이 여러 대목에서 불꽃을 일으키는 사태이며, 이는 그에게 이 역사에서 특수하게 유대적인 정체성의 요소들을 축소하고 심지어 배반한다는 비난을 안겨주었다.21
그러나 이 다성적 대화를 그려내는 일은 번역 기획이 아니라 상이한 발화방식들, 언어게임들, 타당성 맥락들을 구획하고 분리하는 연습인 것으로 보인다. 신학적 발언은 철학적 발언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이질적이다. 이 경계를 철학이 자기 편에서 긋고, 신학이 세계 인식에 아무런 이론적 기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학에게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은 철학이 가진 주권의 귀결이다. 그러나 통상적인 인간학적 조건 아래서 통찰의 역량은 그 자체로는 약하며 그것이 습관적·정서적·물질적 연관과 실천 속에 착근되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통찰하는 일은 이성의 겸손에 속한다. 그러한 착근의 산출을 역사적·기능적으로 담당했던 것은 (신학이 아니라) 종교적 실천이었고, (스피노자가 보기에는) 언젠가는 순전히 세속적-계몽된 문화가 많은 이들에게 그러한 일을 함에 있어 충분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측면에 관계하고 그것을 이를테면 추상적인 (이성)도덕의 형태로 형식화하는 일은 결코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고,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도 아니며, 하나의 현실이 갖는 여러 차원들의 차이를 승인하는 것이다.
3.
스피노자가 벌인 그의 시대의 권위들과 담론들의 쟁론에 대한 개입에 대한 동기를 밑받침했을 이 상황들을 상기해 보면, 우선 다음이 드러난다. 그것들은 극심한 시대착오(Anachronismus)라는 대가를 치를 때에만 오늘날의 의식 상태에도 여전히 척도가 되는 것으로 그대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의식 상태에서는 — 적어도 서구의 의식상태에서는 — 세계관적으로 파편화되고 분화된 사회들에서 세속적 이성이 거둔 승리의 행진이 유일하게 지배적이고 항상적인 후기 근대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 사이의 전근대적 혹은 근대 초기의 영적 공통 뿌리에 다시 이어 붙기 위해 스피노자의 기획에 접속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 근본적으로 상이한 출발 상황들을 놓치고 만다(그리고 이는 두 기획에 대한 하버마스의 다소 가벼운 동화[Assimilation]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다음도 분명해진다. 여기서 분명하게 명명된 혁명적이고 대담한 분리의 운동 — 그 속에서 순수하게 철학적인 이성의 근대 초기적 자기주장과 자기권능화가 수행되며, 이 점이 홉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서로 크게 다른 기획들을 하나로 묶는다 — 조차 어떤 다의성을 드러내며, 그것은 종교나 신학에 대한 그들의 경계 짓기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때문에 마치 이 분리의 그림자가 여전히,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근대적·계몽주의적 기획들 위에 드리워져 있고, 그중 보다 반성적인 기획들에 의해 전유된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곧 화해되지 않음(Unversöhntheit)을 행위로 표출하거나 심지어 승인하는 지점에서, 내가 옳게 보고 있다면, 그토록 멀리 떨어진 스피노자와 하버마스의 철학적 열망들이 다시 서로 맞닿는다. 체계적 구성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공유된 양가성에서, 곧 순전히 세속적인 이성의 자율성(을 확언하는 것)과 타율성(을 시인하는 것) 사이의 동요에서 말이다. 급진적 계몽주의적인, 어떤 의미에서 모더니즘적인 충동과 다원주의적인,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모던한 충동 사이의 긴장이 스피노자의 종교비판과 하버마스의 후기 철학 둘 다를 특징짓는 것처럼 보인다. 다소 추상적인 층위에 놓여 있는 이 수렴을 마지막으로 적어도 소묘해 보고자 한다.

4.
스피노자에 관한 해석의 스펙트럼은 넓고, 수용사는 이미 모든 선택지를 다 실험해 보았다. 많은 동시대인과 그 이후 세대들에게 그가 모든 종교적 토대를 부정하는 이단자의 화신, 혹은 덕 있는 무신론자의 화신이었다면, 독일적 맥락에서 정신사적으로 그 다음에 오는 저명한 찬미자 집단은 “그에게는 신이 너무 많다”22고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일원론적 존재론은 여전히 신 개념을 가지고 작업하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정치론』과 관련해서는, 이미 시사했듯 실제로 하나의 분명한 양자택일이 제기 된다.
첫 번째 가능성에 따르면 초기 스피노자의 강령은 명백히 급진적 계몽(radikale Aufklärung)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아직 창출되어야 할 평등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즉, 자유주의적 생활방식 속에서 모든 종교적·전통적 권위 형태를 남김없이 지양하는 데로 나아간다.23 이게 맞다면, 이 책에서 길게 이어지는 성서주해적이고 종교 내적인 문제들에 대한 작업은, 홉스에게서와 유사하게, 아직 신앙하는 이들의 진영에도 가닿기 위한, 그리고 그들에게 적어도 이단적이지 않으면서 규범적 골자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최소한 자기 나름의 정당성을 갖는 삶의 형식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시범해 보이기 위한, 다분히 실용적 혹은 전략적 동기의 시도들일 것이다.
형이상학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인 이 기획은 (만프레트 발터의 개념으로는) 철두철미 반(反)신학으로 남는다. 그것이 언어와 참조점에서 신학적 발언에 접근하거나 신학을 그 지형 안에서 공격하는 경우에도 그렇다.24 그렇다면 『에티카』에서 수행된 의미론적 자리바꿈(Umbesetzung)들은 이 프로그램의 철학적 실행일 것이다. 신과 자연의 존재론적 등치, 인식의 최고 형태를 신에 대한 지적 사랑(amor dei intellectualis)으로 규정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놓인 구원(혹은 구제)의 재정의 — 세계 안에서 도달 가능한 지식과 사랑의 수렴으로서의 구원 — 은 신학을 철학으로 대체한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거의 플라톤적인 음조”25를 듣는다. 추상적인 이성도덕은 지금까지 종교적으로 동기부여되었던 모든 근본적 지향들을, 궁극적으로 수정처럼 맑은 이상 — 자유롭고 타자와 자연 전체를 향해 사랑으로 돌아선 현자(賢者)의 이상 — 속으로 지양한다.
두 번째 가능성에 따르면 스피노자에게 당대의 종교는 신학정치적 비판의 기획을 위한 한갓 우연적인 착수점이 아니라, 그 비판의 가장 탁월한 적수다. 이는 독단적인 신학적 타당성 주장, 권위주의적 통치방식, 그리고 특정한 가치와 사회적 실천에 대한 문화적 자기구속의 뒤얽힘이 통찰이나 계몽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복합체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 복합체는 우선 그 개별 부분들로 분해되어야 한다. 곧 신학에 인식적 권위를 부여하는 특정한 문제적 귀속(스피노자는 이를 철학적 수단으로 치워버린다)과, 개별자들의 정치적 정당성이라는 문제적 관념(스피노자는 이를 급진민주주의적 함의를 지닌 존재론적 논증으로 다툰다)이 그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떼어내기 어려운 잔여가 남는다. 곧 이 두 (준이데올로기적) 오류의 교정만으로는 아직 개혁되지 않는 구체적인 삶의 형식들이다.
말하자면 이 미충족 과제(Desiderat)는 『신학정치론』의 맥락에서, 여러 상이한 신앙체계들이 나란히 존립하도록 허용하는 자유주의적·다원주의적 사회라는 암묵적 관념을 형성한다.26 그리고 그것은 『에티카』에서 스스로를 계몽해 가는 개인들의 공동체에 어울리는 이미지와 모티프의 세계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모든 합리주의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대체로 이성적인 세계관계조차 상상적 결속과 정서적 점유(Besetzung)를 필요로 하며 오히려 그런 것들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철학적 개인들의 구체적인 생활 실천조차 완전히 객관화될 수도 학문화될 수도 없는 층위에서 수행된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27 사회적 삶은 개인의 삶의 영위와 마찬가지로 정서적-상상적 공간 속의, 동기부여하고 구조화하는 이미지들에 의존한 채 남는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신학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강력한 이미지들과 상상계들이다(결코 아무것도 필요 없지 않다). 이 종교비판은 성상파괴(Bildersturm)가 아니라, 다른, 민주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상상적인 것(das Imaginäre)의 수립을 요구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여전히 종교적 실천의 결속력과 통합력에 의지하며, 다만 그것을 잘못 인도된 신학적 해석으로부터 대체로 해방하고자 할 뿐이다.
이 두 해석 방식은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며, 둘 다 다양한 단서들에 호소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텍스트들이 이런 분기 속에서 해석 가능하다는 것은 그 텍스트들에 외적인 사정이 아니다. 급진적 계몽주의적 독법과 상상이론적-반성적 독법은 그 자체로 그의 사유 안의 미결정성 혹은 열려 있음을 가리키며, 이는 어떤 정직한 해석으로도 완전히 제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이 사유 자체에 불안하고 긴장으로 가득한 성격을 귀속시키는 것은 그저 무력한 제스처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남김없는 계몽과 그 타자, 말과 이미지, 정신과 신체가 환원 불가능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급진적 계몽은 자기 자신의 한계까지 함께 사유하는 것임을 허용한다.
5.
하버마스에 관련하여, 그의 가장 예리한 해석자들은 오래 지속된 편견에 맞서 그의 후기 저작에서 신학적 혹은 종교적 전회를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해 왔다.28 종교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는, 실제로 놀라운 방향 전환은 물론 새롭다. 종교는 지금까지 그의 저작에서 기껏해야 본질적으로 근대화이론에 입각한, 강한 베버적 특징을 지닌 시대진단의 부수적 요소이거나, 비판이론의 유대적 원천을 해석하는 맥락 혹은 초월이라는 토포스에 접근하는 맥락에서 다분히 다루기 까다로운 모티프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증대한 관심 — 세계관적으로 다원주의적인 사회들과 거기에 필요한 중첩적 합의라는 물음들에 대한 관심, 존 롤스의 후기 철학이 정치철학의 탁월한 주제로 확립했고 하버마스가 매우 강하게 대결하고 또 제휴했던 그 관심 — 은 종교를 시대진단의, 나아가 근본철학적 반성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밀어 넣었다. 왜냐하면 서구 사회들에도 — 그리고 유럽보다 미국에 분명 더 강하게 — 종교적 결속이 여전히 그 구성원들의 가치 살림을 규정한다는 것이 타당하다면, 철학이 규범적 준거점의 정의에 관한 자기 자신의 제안들을 오직 한 가지 방식으로만, 곧 더 전통적인 세계관적 준거체계들과는 대체로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세속적 이성의 차갑고 객관적이며 추상적인 언어로만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철학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29
롤스는 여기서 절차적 제안들을 내놓았는데, 그것들은 자유주의적 틀을 배타적이고 차별적으로 작동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하버마스가 보기에 이성이론적 관점에서 세계관 다원주의를 거의 지나치게 많이 허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텍스트들에서 정교하게 다듬은 야심적인 의사소통적 합리성(kommunikative Rationalität) 개념과 그것이 도덕이론에 대해 갖는 보편주의적 함의, 그리고 법이론적·민주주의이론적 함의를 이 지형에서도 옹호하는 것을 아마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요제프 라칭거와의 대결에서부터 『이것 또한 철학의 역사』의 성립기 텍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이 주제에 관한 수많은 텍스트들은 자주 논평되어 왔고, 나는 이 독해의 틀 안에서 스피노자 해석과의 연결을 유익한 방식으로 예시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모티프 상황만을 부각하고자 한다. 이 후기 텍스트들에서 (강한 의미의) 종교적 전회를 확인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이 앞선 수십 년의 이성 낙관주의와 규범적 보편주의를 철회하기 보다는 반성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스피노자의 경우처럼 두 가능성 사이의 양자택일 혹은 긴장을 낳는다.
한편으로 종교적-신학적 문제성과 관련해서 역시 하버마스의 후기 철학은 계몽주의적 혹은 모더니즘적으로 남는다. 그것은 롤스의 숙고와 충분히 일치하게 자유주의적-세속적 규범성의 토대를 처분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인격에 대한 무조건적 존중으로 표현되는 도덕적 보편성, 그리고 법적 지위에서 어떤 특수주의적 비대칭이나 등급도 인정하지 않는 탈인습적(postkonventionell) 도덕이론은 근대 도덕의 협상 불가능한 토대다. 전통 종교들이 이에 모순되는 곳에서, 이를테면 성별 관계의 문제에서나 그들 내부 규범에서 벗어나는 삶의 형식들에 대한 차별에서, 그들은 이 도덕에 위배된다. 세속 사회 측에서 이에 상응하는 종교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정당하다. 비록 이것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에 걸친 문화적·법적 협상 투쟁을 낳는다 해도 그렇다(그리고 독일 사회를 포함한 많은 서구 사회가 여러 점에서 결코 온전히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다고 분명 논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는, 그것이 근대 도덕에 상응하거나 그 안에 통합되거나, 자신의 동기부여하는 힘, 사회통합적인 힘을 그것이 다른 원천[이를테면 도덕과 이성]에 의해서도 동기부여될 수 있을 영역에 투입하는 곳에서만 근대 도덕을 뒷받침한다. 다소 퉁명스러운 여러 대목에서(가령 라칭거와의 교환에서) 하버마스의 후기 칸트적 불가지론에 놓인 이 자신에 찬, 꺾이지 않은 근대적 태도가 비쳐 나온다. 종교의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온갖 존중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양보와 화해는 없다.30 관할과 법 영역의 분리선은 날카롭게 그어진 채 남는다. 그렇다면 종교의 특수성은 롤스가 기술한 자유주의적-세속적 보편주의 도덕의 중첩적 합의 바깥에 놓여 있는 것에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럼으로써 종교는 철학에게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어떤 타자가 될 것이다. 철학이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그것과 어떻게 지낼 수도 없기 때문에, 곧 근대 속에 남은 전근대의 잔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텍스트들에서 또 다른 경향도 발견된다. 어조에서나 사안에서나 다소 조심스러운 경향, 어쩌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이념정치적·철학적 투쟁에서 나온, 이성의 옹호와 정초의 여러 자신에 찬 어조에 대한 회고적 자책의 표현이기까지 한 경향이다. 그 투쟁에서는 (서구적, 남성적) 이성의 보편성에 대한 의심이 어쩌면 지나치게 성급하게 반(反)모더니즘과 반계몽이라는 비난을 받았다.31 자연주의와 종교의 관계에 관한 그의 텍스트들에서 이제 종교는 동맹자로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의 인간상(人間像)을 위한 자리지기(Platzhalterin)로 등장한다. 적어도 완전히 과학주의적이지는 않은, 따라서 인간 삶을 남김없이 소진시키고 성공지향적으로 최적화하라는 문화적 명령들 앞에서 적어도 완전히 무방비이지는 않은 인간상 말이다.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의 자유주의적 주류는, 특히 공리주의적 기호 아래서, 여기서 대항할 자원을 별로 갖지 못하는 반면, 종교적으로 밑칠된 윤리들은 이러한 기능주의화에 한계를 긋기가 더 수월하다. 이 측면에서 보면 종교는 여기서 성가신 이데올로기적 잔재라기보다는, 삶의 가치를 점점 더 편재하는 가치화(In-Wert-Setzung)에 내어주는 과잉상업적·과잉기술적 문화에 맞서는 여전히 강력한 요인으로 나타난다.32
『이것 또한 철학의 역사』의 이념사적 서사에서 (모든 점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은) 이 시대진단적 모티프들은 사실상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구 이론사에서 신앙과 이성의 형제자매 관계 및 점증하는 분리의 긴 역사에서 무엇보다 분명해지는 것은, 후기 근대의 세속적 이성이 스스로에게 다음을 시인해야 한다는 점이다. 곧 그것이 지금의 그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것이 이 뒤얽힘을 지닌 이 특수한 역사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종교로부터의 그것의 해방은 수백 년에 걸친 종교와의 결합 덕분이라는 것, 달리 말해 그것의 자율성은 그것의 타율성 덕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 역사가 어떤 해방으로도 이어지지 않았다거나 세속적 이성이 완전히 자립적이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이 역사의 원천 가운데 하나가 종교 자체라는 것, 그리하여 철학은 더 이상 종교이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을 때 될 수 있었던 바로 그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여러 기능들(지향, 이해, 정초)이 그 종교적 기원을 승인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을 맥락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의존과 지시(Verwiesenheit) 관계에 대한 중심 은유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 “아직 다 길어내지 못한 의미론적 내용들(unabgegoltene semantische Gehalte)”33의 번역이라는 은유이며, 이는 결국 한갓 “영감을 주는 힘”34을 넘어선다. 따라서 종교적 언어에서 속(俗)의 언어 혹은 세속적 언어로의 전환은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리는 지양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는다.35 번역이라는 수행은 다른 텍스트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 두 번째 텍스트에 이미 들어 있지는 않은 것을 활용한다. 이 이미지는 세속적 이성과 관련해, 사람들이 통상 하버마스에게 귀속시킬 법한 것보다 다소 더 회의적인 함의를 담고 있을 것이다. 세속인들의 사유조차 그들 자신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언어로부터의 자극과 추동을 필요로 하지만, 그 언어의 “내용”36을 그들은 자기 자신의 언어로 재정식화할 수 있고 또 재정식화해야 한다. 이것이 이 이성을 더 약하거나 더 의존적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그것은 이성을 자기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서 가리킨다.
이것이 이성의 도덕에도 타당하다는 것, 삶에 대한 세속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존중이 사유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물음들도 건드린다는 것은 하버마스가 비판이론 1세대의 대표자들, 특히 아도르노 및 벤야민과 공유하는 직관이다. 이 직관에서 볼 때 근대에서 특정한 형태의 합리성이 거둔 사실상의 승리에 대한 관계는 승리주의적일 수 없다. 올바른 삶에 관한 물음이 올바른 사유에 관한 물음을 넘어서며 실존의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관계한다는 승인은 이성의 주권성을 깎아내리지 않지만, 이성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허용한다.37
6.
이로써 하버마스에게서도, 스피노자에게서와 유사하게, 서로 어긋나는 모티프들이 발견된다. 경계 허물기와 경계 짓기, 성상파괴와 이미지 욕구, 자율성들과 의존성들이 그것이다. 두 저작이 여기서 어떤 다차원성을 공유하며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어쩌면 계몽의 참으로 급진적인 수행에서 나오는 필연적 귀결 — 그 수행에서는 불가피하게 계몽 자체의 한계와 타자에 관한 물음이 떠오르므로 — 이라는 것은 잠정적인 결론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도식을, 인정하건대 매우 간략한 하버마스의 스피노자 독해에서 붙잡아내고 그것을 징후적인 것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스피노자에게서 서로 어긋나는 모티프들을 언급하지만 그 긴장으로 가득한 관계를 논평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가 스피노자의 기획을 자기 자신의 개념틀로 재정식화하는 동안 긴장은 다시 사라진다. 마치 종교를 (이성)도덕으로 번역하는 가운데 종교가 완전히 대체되고 그럼으로써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지나치게 단순한 해법을 그 자신의 입장도 시사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후기 텍스트들 이후로 거기에는 묵직한 반대 충동이 나란히 서 있다. 그것은 번역의 장면 자체를, 서로에게로 흡수되지 않는 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만든다. 그 힘들은 서로를 바로 대체하지 않는 만큼 번역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유사한 긴장이 두 철학적 저작 모두를, 종교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 각인한다.
철학적 제스처에서의 이 다분히 예상 밖의 유사성이 다른 많은 비유사성과 양립불가능성을 축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다음의 징표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곧 종교와의 경계를 고집하는 두 철학자가 여기서 서로 다르지만 수렴하는 방식으로 종교의 물음을 쉽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 물음이 철학 자체까지도 하나의 한계로 데려간다는 것을 그들이 허용했다는 징표 말이다.
각주
1: 이 이념사에 관한 상세하고 권위 있는 논의로는 Walther (2018)을 참조.
2: 두 저자의 성좌(Konstellation)에 대해서는 이미 Buddeberg (2021)과 Bormuth (2024)도 논평한 바 있으나, 다른 결론에 이르고 있다.
3: Habermas (2019), Bd. 2, 151.
4: 같은 곳. 이 구성을 “범신론적”(같은 곳)이라고는 이제 분명 부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정신과 신체의 실체들의 통일”(같은 책, 152)이라는 표현도 스피노자와 관련해서는 온전히 정확하지 않다. 데카르트적 존재론의 수정은 바로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있을 수 있다는 증명에 있기 때문이다. 『에티카』 맨 앞의 해당 정리들을 참조. Spinoza (2006), 제1부, 정리 1–9, 9–18.
5: 연구 현황에 관해서는 Israel (2023), 67–78을 참조.
6: Habermas (2019), Bd. 2, 153 이하.
7: 같은 책, 154.
8: 같은 책, 156.
9: 같은 책, 157.
10: 같은 책, 154.
11: Balibar (2001), Hindrichs (2006), Saar (2013a), 36–44를 참조.
12: 이에 관해 상세히는 Nelson (2010)과 James (2012)를 참조.
13: Habermas (2019), Bd. 2, 160.
14: 같은 책, 162.
15: 같은 책, 162 이하.
16: 대표적으로 Norris (1990), Israel (2001), Goetschel (2004), Negri (2004)를 참조.
17: 스트라우스적 해석의 뒤늦은 반향은 오늘날까지도, 특히 『에티카』에 대한 스피노자 해석들을 개인주의적 해석과 사회이론적·정치적 해석이라는 양자택일로 양극화하는 데서 발견된다. 가령 Yovel (1985)과 James (2008)를 참조.
18: Habermas (2019), Bd. 2, 160.
19: 이에 관해 간명하게는 Buddeberg (2021), 34–86을 참조.
20: Saar (2021)을, 그리고 번역이라는 토포스에 대한 다소 급진적인 해석으로는 Goetschel (2016)을 참조.
21: Lévinas (1992)의 날카로운 입장 표명을, 그리고 이 논쟁의 이념사적 틀에 관해서는 Dunkhase (2013)을 참조.
22: Hegel (1979), 163.
23: 급진적 계몽과 근대의 대안적 역사서술을 둘러싼 방대한 논쟁에 관해서는 Israel (2001), Walther (2007), Yovel (2009), Mack (2010), Saar (2013b), 그리고 가장 최근의 Bernstein (2023)을 참조.
24: Walther (1971)을 참조.
25: Habermas (2019), Bd. 2, 153. 스피노자의 신 개념에 관한 논의 현황으로는 Carlisle (2021)을 참조.
26: 이에 관해서는 Bartuschat (2010)을 참조.
27: 상상력의 역할에 관해서는 척도를 세운 Gatens (2009, 2010)와 James (2010)의 기여를 참조.
28: Schmidt (1994, 2020), Buddeberg (2021), 특히 28–33, 243–258을 참조. 일찍부터 시작된 논쟁에 관해서는 Reder/Schmidt (2008)을 참조.
29: Habermas (2009b), 특히 388–407, 그리고 Schmidt (2011)을 참조.
30: 종교 물음과 관련한 칸트로의 소급에 관해서는 Habermas (2005b)를 참조.
31: 근대를 둘러싼 이 대결들의 대표적 예로는 Habermas (1990, 2009a)를 참조.
32: 이에 관해서는 이 맥락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에 대한 Schmidt (2006)의 맥락화하는 논평을 참조. (역주: 원문 각주는 “Schmidt (2006)”으로 표기하나, 참고문헌 목록에는 해당 항목이 없고 Schmidt (2009)가 실려 있다. 원문의 오기로 보인다.)
33: Habermas (2019), Bd. 2, 807. 이 대목에서 중요한, 아도르노에 대한 지시 및 이 맥락에서 해당되는 Gordon (2023)의 책에 대한 지시와 함께.
34: Habermas (2005a), 13.
35: 유사한 지향으로는 Schmidt (2012)를 참조.
36: Habermas (2019), Bd. 2, 157.
37: 해방과 타자성의 관계와 관련해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은 논증을 최근 Menke (2022)가 제안한 바 있다. 하버마스에게서 중심 모티프로서의 양가성 내지 변증법에 관해서는 Saar (2019)를 참조.
참고문헌 (Literaturverzeichnis)
- Balibar, Etienne: Potentia multitudinis, quae una veluti mente ducitur, in: Marcel Senn / Manfred Walther (Hrsg.): Ethik, Recht und Politik bei Spinoza, Zürich 2001, S. 105–137.
- Bartuschat, Wolfgang: Die Freiheit zu philosophieren. Baruch de Spinozas ‘Theologisch-politischer Traktat’, in: Merkur 64 (2010), H. 9/10, S. 751–758.
- Bernstein, Richard J.: The Vicissitudes of Nature. From Freud to Spinoza, Cambridge 2023.
- Bormuth, Matthias: Ambivalenz der Freiheit. Eine Heidelberger Spurenlese zu Auch eine Geschichte der Philosophie, in: Stefan Müller-Doohm / Smail Rapic / Tilo Wesche (Hrsg.): Vernünftige Freiheit. Beiträge zum Spätwerk von Jürgen Habermas, Berlin 2024, S. 74–104.
- Buddeberg, Eva: Vernunft und Religion. Überlegungen zum Verhältnis von Kritik und Aneignung im Denken von Baruch de Spinoza, Pierre Bayle und Immanuel Kant. Habilitationsschrift (Goethe-Universität), Frankfurt am Main 2021.
- Carlisle, Clare: Spinoza’s Religion. A New Reading of the Ethics, Princeton 2021.
- Dunkhase, Jan Eike: Spinoza der Hebräer. Zu einer israelischen Erinnerungsfigur, Göttingen 2013.
- Gatens, Moira: The Politics of the Imagination, in: dies. (Hrsg.): Feminist Interpretations of Benedict Spinoza, University Park 2009, S. 189–210.
- Gatens, Moira: Spinoza’s Hard Path to Freedom, Assen 2010.
- Goetschel, Willi: Spinoza’s Modernity. Mendelssohn, Lessing, and Heine, Madison 2004.
- Goetschel, Willi: Translation and the Text’s Alterity. Spinoza to Derrida, in: Catriona MacLeod / Bethany Wiggin (Hrsg.): Un/Translatables. New Maps for Germanic Literatures, Chicago 2016, S. 63–77.
- Gordon, Peter E.: Migrants in the Profane. Critical Theory and the Question of Secularization, New Haven 2023.
- Habermas, Jürgen: Die Moderne – ein unvollendetes Projekt [1980], in: ders.: Die Moderne – ein unvollendetes Projekt. Philosophisch-politische Aufsätze 1977–1990, Leipzig 1990, S. 32–54.
- Habermas, Jürgen: Einleitung, in: ders.: Zwischen Naturalismus und Religion, Frankfurt am Main 2005a, S. 7–14.
- Habermas, Jürgen: Die Grenze zwischen Glauben und Wissen. Zur Wirkungsgeschichte und aktuellen Bedeutung von Kants Religionsphilosophie, in: ders.: Zwischen Naturalismus und Religion, Frankfurt am Main 2005b, S. 216–258.
- Habermas, Jürgen: Konzeptionen der Moderne. Ein Rückblick auf zwei Traditionen [1996], in: ders.: Philosophische Texte. Studienausgabe in fünf Bänden, Bd. 3, Frankfurt am Main 2009a, S. 197–242.
- Habermas, Jürgen: Die Revitalisierung der Weltreligionen. Herausforderung für ein säkulares Selbstverständnis der Moderne?, in: ders.: Philosophische Texte. Studienausgabe in fünf Bänden, Bd. 5, Frankfurt am Main 2009b, S. 387–407.
- Habermas, Jürgen: Auch eine Geschichte der Philosophie. Bd. 1: Die okzidentale Konstellation von Glauben und Wissen. Bd. 2: Vernünftige Freiheit. Spuren des Diskurses über Glauben und Wissen, Berlin 2019.
-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1837], Werke in zwanzig Bänden, Bd. 20, Frankfurt am Main 1979, S. 157–197.
- Hindrichs, Gunnar: Einleitung. Die Macht der Menge – der Grundgedanke in Spinozas politischer Philosophie, in: ders. (Hrsg.): Die Macht der Menge. Über die Aktualität einer Denkfigur Spinozas, Heidelberg 2006, S. 13–40.
- Israel, Jonathan I.: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 Oxford 2001.
- Israel, Jonathan I.: Spinoza, Life and Legacy, Oxford 2023.
- James, Susan: Democracy and the Good Life in Spinoza’s Philosophy, in: Charlie Huenemann (Hrsg.): Interpreting Spinoza. Critical Essays, Cambridge 2008, S. 128–164.
- James, Susan: Narrative as the Means to Freedom. Spinoza on the Uses of Imagination, in: Yitzhak Y. Melamed / Michael Rosenthal (Hrsg.): Spinoza’s Theological-Political Treatise. A Critical Guide, Cambridge 2010, S. 250–267.
- James, Susan: Spinoza on Philosophy, Religion, and Politics. The Theologico-Political Treatise, Oxford 2012.
- Lévinas, Emmanuel: Der Fall Spinoza, in: ders.: Schwierige Freiheit. Versuch über das Judentum, Frankfurt am Main 1992, S. 104–108.
- Mack, Michael: Spinoza and the Specters of Modernity. The Hidden Enlightenment of Diversity from Spinoza to Freud, London 2010.
- Menke, Christoph: Theorie der Befreiung, Berlin 2022.
- Negri, Antonio: Postface – to conclude. Spinoza and the Postmoderns, in: ders.: Subversive Spinoza. (Un)contemporary Variations. Hrsg. von Timothy S. Murphy, Manchester 2004, S. 113–117.
- Nelson, Eric: The Hebrew Republic. Jewish Sources and the Transformation of European Political Thought, Cambridge 2010.
- Norris, Christopher: Spinoza and the Origins of Modern Critical Theory, Oxford 1990.
- Reder, Michael / Josef Schmidt (Hrsg.): Ein Bewußtsein von dem, was fehlt. Eine Diskussion mit Jürgen Habermas, Frankfurt am Main 2008.
- Saar, Martin: Die Immanenz der Macht. Politische Theorie nach Spinoza, Berlin 2013a.
- Saar, Martin: Notwendige Geschichte – Zur Debatte um „radikale Aufklärung”, in: Christian Schmidt (Hrsg.): Können wir der Geschichte entkommen? Geschichtsphilosophie am Beginn des 21. Jahrhunderts, Frankfurt am Main / New York 2013b, S. 42–59.
- Saar, Martin: Ultimate Grounds, Political Power, Philosophical Intervention. Inheriting the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in: Crisis & Critique 8 (2021), H. 1, S. 354–362.
- Saar, Martin: Selbstverständigung und Verselbstständigung. Zum 90. Geburtstag von Jürgen Habermas, in: Leviathan 47 (2019), H. 3, S. 274–285.
- Schmidt, Thomas M.: Immanente Transzendenz und der Sinn des Unbedingten. Zur Bestimmung des Verhältnisses von Religion und Philosophie bei Jürgen Habermas, in: Linus Hauser / Eckhard Nordhofen (Hrsg.): Im Netz der Begriffe. Religionsphilosophische Analysen, Altenberge 1994, S. 78–96.
- Schmidt, Thomas M.: Menschliche Natur und genetische Manipulation – Die Zukunft der menschlichen Natur. Auf dem Weg zu einer liberalen Eugenik?, in: Hauke Brunkhorst / Regina Kreide / Cristina Lafont (Hrsg.): Habermas-Handbuch, Stuttgart 2009, S. 282–290.
- Schmidt, Thomas M.: Vernünftiger Pluralismus – irrationaler Glaube? Säkularisierung und die Zukunft der Religion, in: WestEnd. Neue Zeitschrift für Sozialforschung 8 (2011), H. 2, S. 90–100.
- Schmidt, Thomas M.: Austauschbarkeit und Übersetzung. Philosophie als Vermittler und Interpret von Religion, in: Johannes Arnold (Hrsg.): Sind Religionen austauschbar? Philosophisch-theologische Positionen aus christlicher Sicht, Münster 2012, S. 135–150.
- Schmidt, Thomas M.: Die Konstellation von Glauben und Wissen. Zur Genealogie des nachmetaphysischen Denkens bei Jürgen Habermas, in: Communio. Internationale Katholische Zeitschrift 49 (2020), H. 2, S. 192–205.
- Spinoza, Baruch de: Ethik in geometrischer Ordnung dargestellt [1677]. Hrsg. von Wolfgang Bartuschat. Werke, Bd. 2, Hamburg 2006.
- Spinoza, Baruch de: Theologisch-politischer Traktat [1675]. Hrsg. von Wolfgang Bartuschat. Werke, Bd. 3, Hamburg 2013.
- Walther, Manfred: Metaphysik als Anti-Theologie. Die Philosophie Spinozas im Zusammenhang der religionsphilosophischen Problematik, Hamburg 1971.
- Walther, Manfred: Spinoza and Radical Enlightenment. Some Remarks on Three of Jonathan Israel’s Claims, in: Laurent Bove (Hrsg.): Qu’est-ce que les „Lumières Radicales”? Libertinage, athéisme et spinozisme dans le tournant philosophique de l’Age Classique, Paris 2007, S. 299–308.
- Walther, Manfred: Spinoza in Deutschland. Von G. W. Leibniz bis zu Carl Schmitt. Philosophie – Wissenschaft – Ideologie (Spinoza-Studien 3), Heidelberg 2018.
- Yovel, Yirmiyahu: Spinoza. The Psychology of the Multitude and the Uses of Language, in: Studia spinozana 1 (1985), H. 1, S. 305–330.
- Yovel, Yirmiyahu: The Other Within. The Marranos. Split Identity and Emerging Modernity, Princeton 2009.

'인-무브 Translation > 스피노자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민주주의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스피노자의 『정치론』에서 민주적 집합체의 작동 변증법 (0) | 2026.03.12 |
|---|---|
| 스피노자, 혹은 관계론적 평등 이론의 탄생 (1) | 2025.06.02 |
| 잭 스테터, <스피노자와 전쟁> (0) | 2025.06.02 |
| 네그리, 『스피노자와 우리 시대』 2장 역능과 존재론: 하이데거 혹은 스피노자 (1) | 2025.04.15 |
| 댄 테일러, <스피노자와 관계성> (0) | 2025.04.13 |
| 네그리, 『스피노자와 우리 시대』 1장 스피노자: 내재성과 민주주의의 이단아 (0) | 2025.03.17 |
| 마이클 델라 로카, <엘리엇의 스피노자: 클레어 칼라일이 편집한 조지 엘리엇 번역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대한 비평적 고찰> (1) | 2024.10.21 |
| 마리 부트, <스피노자와 인종적 상상계: 내러티브의 정치적 힘> (0) | 2024.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