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어떤 사물-존재론이 필요한가
김강기명_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원글 출처: 김강기명. (2024, 9). 우리에겐 어떤 사물-존재론이 필요한가. 문화과학, 119, 249-271.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2044112
우리에겐 어떤 사물-존재론이 필요한가 | DBpia
김강기명 | 문화과학 | 2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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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화/과학』 117호(2024년 봄)에 실었던 글, 「스피노자, 혹은 관계론적 평등 이론의 탄생」의 보론 격인 글로서, 스피노자 철학의 관점에 섰을 때 오늘날 비인간을 포함하는 생태적 이론을 추구하는 일단의 이론 조류들을 상대하여 어떤 논쟁이 가능한지를 아주 일부분만 스케치해보려 한다.
이전 글에서 나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혹은 ‘우리를 살고 있는’ 근대 인류의 주류 정치관, 즉 자유주의의 두 가지 전제를 꼽았다. 하나는 ‘주체’에 대한 전제로서 ‘내’가 ‘내게 속한 것’, 즉 내 신체, 내 정신, 내 역량, 내 재산, 내 고유성들…의 주인이라는 ‘소유자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의 전제다. 다른 하나는 ‘객체’(대상)에 대한 전제로서 ‘모든 인간은 공통된 본성을 가졌고, 그런 한에서 서로 동등하게 대해져야 한다’는 인간 보편성의 전제다. 거기서 충분히 다루지 않았지만, 사실 이 두 전제는 근대 역사 속에서 한번도 평화로운 관계로 지속되지 못했다. 둘의 관계는 흔히 ‘자유와 평등의 길항관계’라는 프레임으로 나타나곤 했다. 내가 가진 성질들과 재산들(둘 모두 영어로는 properties),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권리’를 유지, 보호, 실현하고자 하는 개인의 자유는 ‘다른 이들도 같은 본성을 가진 인간이다’라는 평등 원칙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근대성의 정치적 근원을 각각 분리된 평등과 자유가 아니라 “평등 없이 자유 없고, 자유 없이 평등 없다”는 평등자유 원리에서 찾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갈등에 대한 성찰과 관련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생태적 위기와 행성적 갈등—즉 인간 간의 갈등을 넘어선 갈등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주의적인 평등자유 원리로도 담을 수 없는 차원의 문제를 보여준다. 근대의 ‘자유’와 ‘평등’ 개념이 기본적으로 앞서 말한 두 전제 바깥에서는 논의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자유는 일차적으로는 인간 개인의 자유이며, 평등은 이 개인들 사이의 질적 동일성(유사성)에 근거한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 문제는 우리가 생태주의적 관점에 서서 인간 아닌 존재물들(non-human entities)을 주체로든 객체로든 포함하고자 할 때 발생한다. 몇몇 ‘동물’ 같은 경우는 우리가 두 전제를 조금만 수정한다면 기존의 평등과 자유의 논의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기 고유한 신체(body proper)를 가지고 있고, 크고 작은 지각 능력과 욕구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그만큼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주체인 것처럼 보이고, 또 그 점에서 인간과의 공통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물은 어떠한가? 대지는? 산 같은 자연물이나, 쇼핑몰 같은 인공물, 혹은 ‘기후’ 같은 것은 어떤가. 그리고 다시 돌아가, 수많은 다른 종들과 먹이사슬로 구성된 ‘동물들’을 우리는 정말로 인간처럼 평등자유의 문제의식이 작동할 수 있는 영역으로 포함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비판이론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신유물론(New Materialism)’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이하 ANT)’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이하 OOO)’ 등은 이러한 새로운 생태적 문제설정을 그 배경으로 하여, 특히 ‘존재론’을 새롭게 구축하려는 이론적 시도들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졌다 해도 그 존재론이 향하는 방향은 이론가들마다 매우 상이하게, 때로는 정반대로 향한다는 점이다. 특히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들 현대 이론들의 참고 자료로서 이들 가운데 놓으면, 이들 인간주의 너머의 존재론을 모색하는 이론들 사이의 선명한 대립선이 보인다. 그것은 ‘실체론’과 ‘반실체론’ 사이의 대립이다. 즉, 명시적으로 스피노자주의를 표방하든(브라이도티, 베넷 등), 그렇지 않든(라투르, 버라드 등) 스피노자의 철학과 공명하며 반실체론적 관계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존재론들과, 실체론적 입장에서 근대 인간주의의 두 전제를 인간 너머 사물에 이르기까지 더욱 급진화하는 객체지향 존재론(하먼, 브라이언트)의 대립이 있다.
보론 격인 이 한 편의 글로 이들 현대의 인간주의 너머 담론들의 총체를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다시 한번 스피노자주의의 관점에 서서 무엇보다 ‘객체지향 존재론’의 주요한 철학적 개념 몇 가지를 소묘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소유자 개인주의와 인간 공통의 본성이라는 근대적 전제를 주어만 바꾸어서 ‘소유자 객체주의’와 ‘객체들의 공통된 본성’이라는 전제로 확장하고 있을 뿐인지, 그리고 스피노자의 철학적 입장에선 왜 이러한 입장이 대안이 될 수 없는지를 짧게 설명해보고자 한다.

OOO의 기획: ‘소유자 객체주의’와 ‘객체의 공통된 본성’
‘소유자 개인주의’와 ‘공통된 인간 본성’을 전제로 한 근대 자유주의 정치관은 기본적으로 인식론적·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 정신’을 그 근간에 두고 있다. 합리론이나 경험론, 인식론적 실재론과 반실재론,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현상학, 구조주의 언어학과 정신분석학 등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적 주요 철학 유파들 사이의 어마어마한 차이와 쟁론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운데서 우리가 발견하는 공통점은 생각하고 행위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모든 사유의 중심에 놓고 있다는 것이다. 객체지향 존재론(OOO)은 이러한 근대적 인간 중심주의 전부를 의문에 부치면서 저 두 전제 아래에서 이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더 오래되고, 더 뿌리깊은 형이상학적 전제로 나아가는 사유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출발한 ‘실체론’이다.
OOO는 말하자면, 실체론적 형이상학에 입각해 근대적 인간 중심주의의 전제를 비인간 존재들에게 확장한다. 첫째, OOO는 ‘소유자 개인주의’를 ‘소유자 개체(객체)주의’로 확장한다. 이는 모든 객체가 주체나 다른 객체와의 관계에서 ‘물러나 있는(withdrawn)’ 독립적 실체로서, 고유한 본질(브라이언트의 ‘잠재적 고유 존재’ 혹은 하먼의 ‘실재 성질’)을 소유하고 있으며, 객체의 이 본질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개인이 자신의 성질, 신체, 정신, 역량, 재산의 소유자라는 근대 자유주의의 소유자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다른 관계로 환원 불가능한 객체 그 자체가 갖는 본질의 실재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라는 존재론적 개체주의(individualism)로 향한다.
둘째, 이러한 실체론적 사유와 더불어 OOO는 ‘공통된 인간 본성’이라는 전제를 ‘객체들의 공통된 본성’으로 확장한다. 이는 OOO의 ‘평평한 존재론(flat ontology)’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다.1 평평한 존재론에 따르면 모든 객체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 레비 브라이언트의 말을 빌리자면, “인공적이든 자연적이든, 상징적이든 물리적이든 간에, 다른 객체들보다 더 큰 존재론적 존엄성을 갖추고 있는 존재자는 전혀 없다”.2 이는 인간과 비인간, 거대한 것과 미세한 것, 실재하는 것과 허구적인 것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를 거부하는 입장이다. 하먼은 ‘평평한 존재론’이라는 용어가 모종의 유적 동일성이나 공통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이 용어가 철학에 외부에서 미리 정해진 분류법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방식으로 기능해야 함을 주장한다. 즉 모든 객체가 그 자체로는 어떤 관계성으로도 환원되지 않고 독특하다는 점에서 평평함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그는 오늘날 철학 조류에서 관계론적 지향을 가장 강하게 보여주는 브뤼노 라투르가 사물들을 자연-문화 하이브리드로 바라보는 관점 역시 비판하며, 객체에 대한 더 강한 실재론과 더 (실체론에) 철저한 존재론을 주장한다.3 모든 객체들은 인간이건 아니건, 그것이 물러나 있는 객체로서 고유하고 존재론적으로 평등하며, 이것이 곧 한편에서는 인간주의와 주체 중심주의의 지배를 넘어선 ‘객체들의 민주주의’다.
더 나아가 OOO는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또 다른 비판적 사유인 유물론이나 관계론이 상정하는 존재론적 일자(the one)의 지배를 넘어서려는 기획으로도 스스로를 위치 지운다. 그들에게 관계론은 객체가 그것이 맺는 관계로 환원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여기서 객체는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라 관계의 결절점이나 효과에 불과하다. 특히 하먼은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을 비판하면서, 라투르가 행위자를 온전히 관계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지적한다. 만약 행위자가 전적으로 관계로 이루어진다면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관계 너머의 독자적 실재성이 있어야만 변화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 대신 하먼은 객체들의 상호작용이 새로운 합성물인 새 객체(실체)를 창발시킨다고 설명한다. 이런 입장에서 OOO는 관계보다 객체의 내적 핵심을 더 중시한다.4
하지만 스피노자의 관점에 서면 OOO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적 철학이 가진 문제를 다시금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과의 문제와 관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다른 것들이 그것에 대해 술어가 되는’ 주어 자리에 오는 명사다. 실체는 주어 자리에서 술어에 오는 것들을 갖는다. 컵이 있으니, “컵은 하얗다”가 가능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있으니 “소크라테스는 현명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주어 자리에 있으므로, 실체들의 성질과 행위 등 그것에 속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은 세계의 근원에서 작동하는 아르케(불과 물 등의 원소나 원자처럼 세계의 근원이 되는 것)나, 일자(the one), 혹은 천상 세계의 이데아 같은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있는 사물들, 그리고 지금 정신 작용을 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영혼과 신체 등을 ‘실체’라는 존재론의 토대로 놓은 혁명적 사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상의 언어를 통해 매우 기술적인(descriptive) 존재론을 구축할 때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것은, 그에게 있어 아홉 개의 범주(양, 질, 관계, 장소, 시간, 능동, 수동, 소유, 자세)로 서술되는 이 실체의 ‘실체임’ 그 자체는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물음에 대해서도 기술적 전략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체들의 생성과 변화 소멸이라는 인과 작용에 대하여 무려 네 가지, 즉 존재자의 본질을 이루는 능동적인 것으로서 ‘형상적 원인’, 존재자의 바탕을 이루는 수동적인 것으로서 ‘질료적 원인’, 실체의 변화나 운동을 만드는 ‘작용 원인’, 그리고 그 변화가 겨냥하는 목표인 ‘목적적 원인’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네 가지 원인을 다 더해도, 그래서 그 실체 자체가 어떻게 실체이냐(be)는 여전히 의문에 붙여진다. 중세를 넘어 초기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이 문제는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었다. 작용인의 인과관계를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원인(이를테면 ‘부동의 동자’나 ‘자기 원인’)을 찾거나, 사실은 실체들 간의 인과관계는 기회적인 원인일 뿐 진정한 인과작용의 원인은 오직 창조주 신일 뿐이라는 기회원인론(occasionalism), 그 자체로는 “창문이 없는” 실체들 각각이 내부에서만 갖는 인과 계열들이 가능 세계 중 최선의 세계를 창조한 신에 의해 조화를 이룬다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등, 이들 이론들은 어쩔 수 없이 세계-내-관계로는 해명이 안 되는 실체의 실체임을 위해 초월적 인과성을 설정해야 했다.
OOO가 특유의 ‘물러남’ 개념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에 비해 훨씬 더 수정적 존재론(revisionary ontology)5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해도 객체의 객체임 자체의 원인에 관해서는 똑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우선 OOO에 따르면, 객체들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불가능하다. 그 대신 그들은 라투르의 ANT에서 제멋대로 빌려 온 ‘번역(transl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객체들은 서로를 파악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객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란 언제나 일종의 ‘번역’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먼은 이런 점에서 모든 인과관계는 간접인과(vicarious causation)라고 주장한다.6
그렇다면 OOO는 어떻게 객체 그 자체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는가? 하먼은 이를 ‘창발(emergence)’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특정한 구성 요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될 때 새로운 객체가 창발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부분전체론적(mereological)’ 인과관으로, 부분들이 전체를 구성하지만 전체는 부분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7 니키 영 같은 논자는 이러한 하먼의 창발 개념을 “실재의 실재적인 존재론적 성질”로 요약한다. 전체는 부분들의 총합과는 구별되는 존재론적으로 고유한 실체이며, 모든 수준에서 객체들이 부분들로부터 창발하지만 동시에 그 부분들로 환원될 수 없다.8
하지만 OOO의 이러한 입장은 여전히 전통적인 기회원인론을 연상시킨다. 구성 요소들의 특정한 배열도 여전히 객체의 객체임 그 자체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객체를 외부의 관계로부터도 독립시키고, 구성 요소 혹은 부분들로부터도 물러나게 만들었을 때, 우리는 여전히 이름만 ‘창발(emergence)’일 뿐,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라는 관념을 뒷문으로 초청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기회원인론과의 이 유사성은 실제로 하먼이 느끼는 공포였던 듯하다. 『쿼드러플 오브젝트』의 5장에서 그는 길게 기존의 기회원인론을 비판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어떤 설득력 있는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갑자기 하이데거의 4중 구조라는 기술적 도구로 나아갈 뿐이다.
스피노자주의자로서 나의 궁금증은 이것이다. 우리는 진정 관계로부터 물러난 실체적 개체로서의 ‘객체’를 필요로 하는가? 앞서 봤듯 OOO 이론가들은 이러한 존재론이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객체가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는 일종의 존재론적 평등주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물러나 있는 객체’라는 개념이 어떻게 실질적인 민주주의적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는 완전히 불분명하다. 결국 근대 자유주의의 두 인간주의적 전제를 존재론적으로 ‘소유자 개체(객체)주의’와 ‘객체라는 공통된 본성’으로 확장할 뿐인 이러한 이론은 아담 로바스나 울펜데일 등의 논자들에 의해 실제로 “존재론적 자유주의”라고 불린 바 있는데,9 내가 보기에 객체의 고유함과 존재론적 권리에 집착하는 이 이론에 더 적절한 이름은 ‘존재론적 정체성 정치’가 아닐까 싶다. 토마스 렘케는 OOO가 자신들이 극복하고자 한 인간 중심주의와 주체주의로 회귀한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객체의 이질성과 신비로움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인간의 속성을 객체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객체를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10
OOO가 제기하는 문제의식, 즉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비인간적 존재들을 존재론적 논의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해결책으로서 OOO가 제시하는 ‘물러나 있는 객체’와 ‘평평한 존재론’은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과 비인간을 모두 포괄하면서도, 관계성과 맥락성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적 틀일 것이다. 이전 글, 「스피노자, 혹은 관계론적 평등 이론의 탄생」(『문화/과학』 117호)에서 상세히 설명했듯, 스피노자의 철학은 근대의 시작인 17세기에 위의 두 전제 자체에 대한 반대로 나아갔다. 그리고 비인간의 포함을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론적 전제들을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사유가 가진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는 이전 글에서 이미 다루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 재론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앞서 실체론적 사유에서 발생하는 인과성 문제에 대한 스피노자의 견해와, 이런 실체 혹은 객체가 아니라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 속의 여러 개별적 사물들 즉 ‘개체’들이 대체 무엇인지를 각각 설명해보고자 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인과와 변용
우선 스피노자에게 인과가 무엇인지는 『에티카』의 첫머리에 공리로서 제시되어 있다.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며 그것을 함축한다.11
스피노자는 이 공리 4를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는 명제12를 증명하는 데 사용한다.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여러 다른 실체론적 전통의 실체 개념과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자기에 의해 사유되는” 것인데, 만약 실체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있다면, 위의 공리에 따라 실체의 개념이 다른 것의 개념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모순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나 OOO와 비슷하게, 실체들 사이에서는 인과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흥미롭게도 스피노자는 이 공리를 이 책 2부에서 소위 “평행론”, 즉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은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동일하다”13는 명제를 증명할 때도 사용한다. 이 정리의 증명은 어떠한 다른 문장 없이 위의 공리만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꾸로 이 인과성에 대한 공리를 평행론에 따라 “결과는 원인에 의존하며 그것을 함축한다”(공리 4'라고 해보자)고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우리는 여전히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인과에 대한 관념에서 그렇게 멀리 와 있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공리 4와 똑같이 참인 그것의 대우명제를 구해보면 스피노자 인과론의 독특함이 보인다. “결과에 대한 인식이 원인에 대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고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원인의 결과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이 말이 왜 독특할까? 그것은 우리가 명칭들을 사용해서, 즉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주어 자리에 오는 명사들을 사용해서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금을 넣어서 국이 짜졌다”는 일상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앞선 공리 4를 적용하면 ‘국의 짬’(혹은 ‘짠 국’)은 ‘소금 넣음’(혹은 ‘넣어진 소금’)에 의존하며, 그것을 함축해야 한다. 그런데 이 문장을 다시 보자, 우리가 사용한 ‘짠 국’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해도 ‘넣어진 소금’이라는 개념을 함축하거나, 그것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짠 국은 어쨌든 짠 국이고, 소금 넣음은 어쨌든 소금 넣음으로 개념화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짠 국’과 ‘소금 넣음’이 각각 독립적인 개념으로 분리하여 고려된 경우, 즉 짠 국의 개념이 넣어진 소금의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포함하지 않게 된 경우, 이 개념들은 더 이상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평행론”에 따라 ‘소금 넣음’은 ‘짠 국’의 원인이 아니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짠 국은 짠 국이라는 실체이고, 소금은 소금이라는 실체, 혹은 소금 넣기라는 사건은 소금 넣기라는 실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스피노자는 무수히 많은 유한한 실체들로 이뤄진 세계인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의 세계를 버린다. 실체들이 실체들인 한에서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없다. 스피노자의 관점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상호의존성이 세계의 생성 변화는 물론 개체성과 차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결과는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원인 역시 결과 없이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는 통용되는 실체들 사이의 인과관계와는 차별화된 관점을 제시한다. 즉 세계 안에 실체는 없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변용들 혹은 ‘양태들’이라고 부른,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에 의해 생각되는 것”들로만 이뤄진 세계다.14 우리가 편의상 어떤 명사로서 사물들을 지칭한다 해도, 그 사물들은 그 단어의 바깥에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론적으로 그것들은 언제나 변용되기/변용하기(affect/being affected)라는 인과적 관계하에서만 어떤 것들로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개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정신이나 신체를 포함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수많은 개체 또는 개별 사물(res singularis)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피노자의 개체의 정의는 『에티카』 2부에 등장한다.
나는 유한하고 한정된 실존을 가진 것들을 개별적 사물(res singularis)들로 이해한다. 그리고 만약 여러 개체들(individua)이 하나의 작용에 함께 참여하여 모두가 하나의 결과의 원인이 된다면, 그 한에서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단일한 것으로 간주한다.15
“여러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함께 참여하여”라는 구절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자연학 소론(Physical Digression)’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는 개체에 관해 오직 연장 속성하의 사물들(‘물체들/신체들’, corpora)을 통해 설명하며, 정신적 개체들의 관계는 앞서 말한 평행론, 즉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은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동일하다”는 테제를 통해 물체들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서 다룬다. ‘자연학 소론’은 『에티카』 2부 정리 13 주석 이후의 공리, 보조정리, 요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서 스피노자는 물체들의 본성과 구별의 문제를 다룬다. 이에 따르면, 각 물체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해” 서로 구별되고 또 관련된다.16 그리고 모든 물체적 개체는 그 자체로 항상 여러 물체들의 합성체로서만 사유되는데, 이 물체들은 “서로 밀착해 있거나” “같은 정도 또는 다른 정도의 속도로 움직여서 일정한 관계로 서로 운동을 전달한다”.17 즉 합성체인 개체에서 결합이란 운동의 특정한 공통 비율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음에 인용할 보조정리들은 이 ‘개체성’을 정체성과 지속의 관점에서 상술하는 것처럼 보인다.18 개체는 우선 “형태의 어떤 변화도 없이 이전과 같은 본성을 유지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유지’라는 개념이 매우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 ‘유지’는 동시에 해당 개체의 복잡한 변이와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변이이자 유지’는 무수한 외부 개체들과의 상호작용, 연결, 분리로부터 발생한다.
보조정리 4: 여러 물체들로 구성된 물체 또는 개체에서 일부가 제거되고, 동시에 같은 본성을 가진 다른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 개체는 형태의 어떤 변화도 없이 이전과 같은 본성을 유지할 것이다.
보조정리 5: 한 개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더 커지거나 작아지더라도, 그것들이 서로 간에 이전과 같은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유지하는 그러한 비율(ratio, ‘관계’)로 변한다면, 그 개체는 마찬가지로 형태의 어떤 변화도 없이 이전과 같은 본성을 유지할 것이다.
보조정리 6: 한 개체를 구성하는 특정 물체들이 한 방향에서 다른 방향으로 그들의 운동을 바꾸도록 강요받더라도, 그들이 이전과 같은 비율로 서로 운동을 계속하고 전달할 수 있다면, 그 개체는 마찬가지로 형태의 어떤 변화도 없이 본성을 유지할 것이다.
보조정리 7: 더 나아가, 이렇게 구성된 개체는 전체로서 운동하거나 정지해 있거나, 또는 이 방향이나 저 방향으로 운동하더라도, 각 부분이 자신의 운동을 유지하고 이전과 같이 다른 부분들에게 전달하는 한, 그 본성을 유지한다.
개체의 변화/차별화와 그 형태/본성의 보존이 동시에 얽혀 있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나스나 다마지오가 제안하듯이, 스피노자는 이를 통해 개별적 물체들 또는 모든 개별적 ‘유기체(organism)’의 항상성(homeostasis)과 같은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19 예를 들어, 외부의 영양을 섭취해서 몸을 보존하는 것과 같은? 이 질문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자신의 존재 안에서의 존속하려는 노력”)20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사물의 현행적 본질에 다름 아닌 코나투스의 주체 또는 소유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탄생(시작)부터 죽음(끝)까지 단일하고 분리된 단위로서 자신의 존재 안에 머물려고 노력하는 고유한 물체/신체(body proper)인가?

『에티카』 4부 정리 39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이 보조정리들에서 개체적 물체의 “본성 유지”라는 용어로 말한 것이 항상성이나 특정 기간 동안 지속되는 고유한 신체의 개념과는 매우 다른 어떤 사태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주석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개체적 신체와 그것의 코나투스가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다는 관념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다.21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내가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다른 비율을 획득하도록 배치될 때 신체가 죽는다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비록 혈액 순환이 유지되고, 신체가 살아 있다고 여겨지는 다른 표식들에도 불구하고—인간 신체가 자신의 본성과는 전적으로 다른 본성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감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체가 시체로 변하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고 주장해야 할 어떤 이유도 나에게는 없다. 경험 자체는 오히려 다른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사람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 사람이 변화를 겪는 일이 가끔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병에 걸렸던 어떤 에스파냐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바 있는데, 그는 병에서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거의 삶을 망각한 상태에 빠져 자신이 지은 우화들과 비극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모국어마저 망각했다면 그는 분명 어른인 아이로 여겨졌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믿기 힘들다면, 유아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할까? 나이 든 사람은 유아의 본성이 자신의 본성과 너무나 다르다고 믿어서, 만약 그가 자신에 관해 추측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한때 유아였다는 것을 설득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신적인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제기할 재료를 제공하기보다는, 나는 이 논의를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는 것을 선호한다.22
스피노자에게 있어 ‘죽음’은 사람들이 보통 상상하듯이 단순히 살아 있는 유기체가 시체로 변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죽음은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다른 비율을 획득할 때” 발생한다. 앞서 보았듯이, 운동과 정지의 특정한 다른 비율을 가지는 것은 개체적 신체/물체들이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제는 우리가 보통 개별 신체라고 상상하는 것을 포함하여, 어떠한 물체도 도무지 운동과 정지의 한 불변의 비율 안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한 신체가 다른 신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양태는 변용된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변용하는 신체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기” 때문이며, 둘째로, 변용된 신체와 변용하는 신체 모두의 본성이 “다르고”, 셋째로, 그것들이 모두 “다르게 움직이기” 때문이다.23 만약 우리가 앞의 인용문에서처럼 성인이 아이였을 때의 자신과 너무나도 다르기에 그것이 하나의 죽음을 구성한다는 스피노자의 주장—그러니까 사람의 ‘성장’이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논리적으로 모든 사람이 매 순간 죽는다고, 혹은 모든 사람이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산다고, 즉 동양인에게 익숙한 불교학의 용어로 말하면 ‘찰나멸, 찰나생’ 한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해당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자신의 주장이 매우 파격적이어서 가능한 비난에 직면하여 더 이상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는 당시의 데카르트주의자들조차도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던 것 같다. ‘보존’을 말하는 보조정리들과 『에티카』 4부 정리 39 주석 사이의 이러한 긴장은 실제로 『에티카』의 ‘양태(modus)’ 이론의 난해함과 복잡성을 부각시킨다. 왜냐하면 겉보기에 모순되는 두 가지 사태가 하나의 현실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개체는 복잡한 변용하기/변용되기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유지하지만, 동시에 위 인용문의 예시들처럼 자신의 본성의 변화, 즉 죽음이나 파괴라고 불리는 사태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나의 동일한 개체가 자신의 본성의 생명과 죽음, 보존과 차별화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나 스피노자 자신은 이에 대해 어떠한 모순도 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그는 자연 속에 독립적이고 분리된, 즉 자기 자신을 통해 파악될 수 있는 실체적 개체는 없다고 확언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란, 개체가 양태인 한에서 그 정의상 불가능하다.24 스피노자는 『에티카』 2부 정리 10에서 “인간의 본질은 실체의 존재를 포함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실체는 인간의 형상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실체적 존재란 분명 “자기 안에 있고 자기를 통해 이해되는 것”25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개체적 신체를 다른 것들과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 닫힌 존재물이나 이산적인 유기체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그 신체를 양태가 아닌 실체로 간주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 자신에게 자명해 보이는 ‘내 몸’은 어떤가? 데카르트가 “특별한 권리에 의해(speciali quodam jure)” “나의 신체”라고 부르는 자신의 신체 또는 고유한 신체(body proper)의 정체성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는 결코 자명한 것으로 보장될 수 없다.26 『에티카』 2부 정리 13 주석 보조정리 4-7이 시사하는 것처럼, 개체화의 ‘과정’에서 정체성(“그 형태의 어떤 변화도 없이”)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그것이 ‘자신의 고유한 신체의 정체성’이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김은주는 『에티카』에서 홉스나 데카르트에서처럼 인간 신체의 전체와 부분에 대한 생리학적 고려가 거의 없다는 점을 올바르게 지적한다.27 예를 들어, 데카르트에게 인간의 신체는 뼈, 신경, 근육, 정맥, 혈액, 피부를 갖춘 일종의 기계인 반면, 스피노자는 단지 “딱딱한 것, 부드러운 것, 유동적인 것”만을 신체 부분으로 간주하며,28 이들의 차이는 운동의 다른 비율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신체는, 심지어 인간의 신체조차도, “피부의 경계에 의해 적절히 둘러싸인 자연의 덩어리”29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운동과 정지의 특정한 비율하에서 다른 것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마찬가지로, 신체의 부분들은 장기나 사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과 속도를 가진 운동의 특정한 비율들 그 자체를 의미한다.30 김은주는 스피노자에게 있어 신체의 부분들이 실제로는 외부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즉 “신체의 변용들”을 가리킨다고 결론짓는다.
이 부분들=변용들은 신체를 운동의 특정한 ‘비율(ratio)’로 이끌며, 동시에 그 부분들은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다른 비율로, 다른 신체들에 그들의 운동을 전달할 수 있다”.31 같은 방식으로, 이 신체 또한 특정한 운동 비율하에서 다른 더 큰 개체의 부분, 즉 “변용”이 되어야 하며, 이 더 큰 개체 역시 다른 더 큰 개체의 부분=변용이 되어야 한다. 이는 무한히 계속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결국 자연 전체가 하나의 합성된 개체가 되는데, 스피노자는 이 자연 전체가 “어떤 변이도 겪지 않으면서” 이 개체의 부분들(즉, 모든 신체들=변용들)인 모든 물체들은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변한다고 말한다.32 이쯤 되면 국지적으로든, 혹은 자연 전체로든 “어떤 (본성의) 변이도 겪지 않으면서”라는 스피노자의 말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특히 우리가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이고(A=A), 다른 것은 다른 것(A≠not A)이라는 모순율에 입각해서 사태를 바라본다면 그럴 것이다. 즉, 스피노자에게서 양태의 본성의 어떤 보존은 존재론적 동일성을 결코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스피노자는 그의 양태적 신체 이론을 통해 외부의 구성적 역할을 특징짓는다(『에티카』 2부 정리 13 주석 공리 1 및 2부 정리 16). 이것이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던 개체의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이다. 발리바르의 해석에 따르면, 이 개념은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 개체는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며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양태적 사물들의 본질이나 본성을 그들의 순수하게 내적인 규정성이나 개체의 정체성(유전자, 유기적 구조, 존재론적 경계 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체의 본질이나 형상은 우리가 ‘그 자체로’ 파악하려고 할 때는 미규정적이고 불확정적이다(“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에 의해 생각되는 것”이라는 양태의 정의를 다시 상기해보자). 즉, 사물들의 존재는 무한히 많은 변용들(차이화)에 의해서만 규정되고, 구성되며, “재생”된다.33 이 각각의 변용은 외부 신체들의 본성 또한 포함한다. 변용들은 “본질의 각각의 구성 상태”34로서, 이는 이 사물과 외부 사물들의 본성을 동시에 표현하며 때로 심지어 대립하면서 한 개체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상이한 방향으로 이끌리게 되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35
스피노자는 『에티카』 4부 정리 60에서 외부의 구성적 역할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관)개체화의 복잡성을 매우 논증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36
정리 60: 신체의 한 부분 또는 여러 부분과 관련된 기쁨이나 슬픔으로부터 생기는 욕망은, 모든 부분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전체 인간의 이로움을 고려하지 않는다.
증명: 예를 들어, 신체의 부분 A가 어떤 외부 원인의 힘에 의해 다른 부분들을 압도할 정도로 강화되었다고 가정하자[3](『에티카』 4부 정리 6에 의해). 이 부분(A)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체 부분들이 그들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자신의 힘을 잃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A]은 자신의 힘을 잃을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을 가지는 꼴인데, 이는 (『에티카』 3부 정리 6에 의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1]. 따라서 그 부분, 그리고 결과적으로 (『에티카』 3부 정리 7과 정리 12에 의해) 정신[4]도 또한 그 상태를 보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2]. 그래서 그러한 기쁨의 변용으로부터 생기는 욕망은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다. 반면에, 부분 A가 제한되어 다른 부분들이 우세하게 된다고 가정한다면, 슬픔으로부터 생기는 욕망 역시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같은 방식으로 증명된다.37
이 증명에서 스피노자는 외부 원인에 의해 어떤 신체(K라고 해보자 [Körper의 약자])의 한 부분(A)이 강화되는 것과 함께 나타나는 기쁨의 변용(변용-A)의 예를 든다. 그는 이 변용-A 또한 일종의 개체로서 자신의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1]. 즉,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며[2], A의 코나투스가 다른 모든 변용들을 압도한다고 가정된다[3].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부분적인 변용-A가 이 K 전체의 정신의 상태와 동일시된다는 것이다(“그 부분, 그리고 결과적으로 정신도”)[4]. 이는 정신-K가, 변용-A가 신체-K 안의 다른 것들을 압도하는 상태에 머무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기쁨(변용-A) 상태에 머물기를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예를 들어, 다른 외부 원인이 더 강한 변용-B를 만들 때까지, 『에티카』 4부 정리 7, 및 따름정리 참조). 그러나 변용-A는 사실 신체-K 전체가 아니고, 전체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이로부터 변용-A가 자신만의 코나투스를 위해 다른 부분들의 힘(=코나투스)을 약화시킬 수 있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전체 신체-K의 힘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에티카』 4부 정리 60). 달리 말하면, 기쁨-A는 신체-C가 가진 운동과 정지의 비율, 즉 그것의 “본성”을 다른 것(이를테면 Ca)으로 변형시켰다. 그리고 앞서 봤듯 이는 『에티카』 4부 정리 39 주석의 의미에서 “죽음”이다.
이 논의를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예를 들어 외부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해 발생하는 다른 변용들 B, C, D들도 신체-K에서 외부 원인들을 통해 변용-A와 유사하게 발생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전체-K의 본성을 변화시킨다고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변용 A, B, C, D 등 각각이 새로운 전체성 Ka, Kb, Kc, Kd 등을 구성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복합체로서의 신체-K는 이미 다양한 변용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전체성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경우도 고려할 수 있다. 더 나아가, K의 한 부분(예를 들어, 앞서 말한 변용-A)은 동시에 다른 외부 신체들과 또 다른 개체적 신체(이를테면 La, Ma, Na)를 구성할 수도 있다. A의 운동과 정지가 이러한 다른 신체들의 운동과 “특정한 고정된 방식으로” “소통”한다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말이다.38 즉 우리가 K라고 이름 붙인 이 신체는, 혹은 어떤 다른 신체, 예를 들면 컵, 리모컨, 잔디밭, 국가, 지구라고 불리는 이 모든 신체들은, 모두 그 이름만으론 설명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공시적·통시적 개체화들(변용들)을 통과하고 있는 개체들인 것이다.
이러한 개체화의 복잡성, 더 정확히 말하면 관개체화의 복잡성에 대한 설명은 앞서 살펴본 ‘자연학 소론’의 보조정리들(“본성의 변화 없이”)과 『에티카』 4부 정리 39 주석(성장=죽음)의 겉보기에 모순되는 진술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한편으로, 어떤 한 신체의 지속하는 개체성이란 그것이 여전히 외부 사물과의 인과적 관계를 통해 어떤 전체로 구성된다는 의미에서만 그 본성이 변하지 않은 것으로 사유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미시적인 차원에서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합성체인 개체 각각의 통일성이나 정체성이란, OOO처럼 물러남 혹은 순전히 내적으로 정의된 어떤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상대적이고 관계적이며 과정적인 규정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외부 원인들로 인한 신체 본성의 지속적인 변화와 차이화, 그리고 바로 그 의미에서 쉬지 않고 자기 차이화하는 전체들을 볼 뿐이다. 동일성의 관점에서는 언제나 동일한 한 전체가 보이지만, 차이의 관점에서는 단 한 순간도 같지 않은 것(들)이 보인다. 브뤼노 라투르는 그의 철학적 프로그램의 대요를 다룬 「비환원들」에서 바로 이 같은 사태를 “어떤 것도, 그 자체로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되거나 비환원될 수 없다”는 명제로 표현한다.39 우리는 그 자체로는(by itself)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고, 인식될 수도 없는 셈이다.
따라서 성인과 그들 자신의 유년기 사이의 중요한 불연속성, 즉 “죽음”은 스피노자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유인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죽음을 가장 덜 생각한다.”40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동일하고 연속적인 신체나 물체의 관념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든 외부의 것이든, 그 자체로 부적합한 관념이다. 그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우리 신체의 지속에 대해 전적으로 부적합한 지식만을 가질 수 있”으며,41 “우리 밖에 있는 개별 사물들의 지속에 대해 우리는 전적으로 부적합한 지식만을 가질 수 있다”.42 바로 그렇기에 그의 인식론적·윤리적·정치적 프로그램은 그러한 자기동일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나 객체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관계 안에서,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다르게 되어가는 개체들의 역량에 의존한다. 이 프로그램을 떠받치는 사물-존재론의 진정한 과제는 “내가 무엇인가” 혹은 “객체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어떻게 연결되어 살아가는가”를 멈추지 않고 탐구하는 것이다. 이 존재론에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공산주의’일 것이다.
1: 레비 R. 브라이언트, 『객체들의 민주주의』,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1, 6장.
2: 같은 책, 347.
3: Graham Harman, Object Oriented Ontology: A New Theory of Everything (London: Penguin Random House UK, 2017), 54-58.
4: 그레이엄 하먼, 『비유물론: 객체와 사회 이론』,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네트워크의 군주: 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철학』,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19.
5: 이는 좀 더 일상적인, 혹은 대중적인 존재론인 ‘기술적 존재론’과 좀 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존재론인 ‘수정적 존재론’을 존재론의 두 유형으로 구분한 분석철학자 P. F. 스트로슨의 유명한 도식에서 빌려 온 것이다.
6: 그레이엄 하먼, 『쿼드러플 오브젝트』, 주대중 옮김, 현실문화연구, 2019, 5장.
7: Graham Harman, “Time, Space, Essence, and Eidos: A New Theory of Causation,” Cosmos and History: The Journal of Natural and Social Philosophy, vol. 6, no. 1 (2010), 1–17.
8: Niki Young, “Object, Reduction, and Emergence: An Object-Oriented View,” Open Philosophy, vol. 4, no. 1 (2021), 83–93.
9: Adam Lovasz, “An Ontologically Nihilist Critique of Graham Harman’s Ontological Liberalism,” Open Philosophy, vol. 6, no. 1 (2023), 1–15.
10: Thomas Lemke, “Materialism without matter: the recurrence of subjectivism in object-oriented ontology,” Distinktion: Journal of Social Theory, vol. 18, no. 2 (2017), 133–152.
11: 『에티카』, 1부 공리 4. 강조는 인용자. 이하에서 스피노자 저작의 인용은 Gebhardt가 편집한 라틴어 전집(Spinoza Opera)과 Meiner 출판사의 독일어 전집(Spinoza: Sämtliche Werke Bd.1-Bd.7)을 참고하여 한국어로 번역하되 출처의 표기는 『책 제목』, 장(부) 번호 절(정의, 정리, 공리 등) 번호로 표기한다.
12: 같은 책, 1부 정리 6 따름정리.
13: 같은 책, 2부 정리 7.
14: 같은 책, 1부 정의 5.
15: 같은 책, 2부 정의 7.
16: 같은 책, 2부 정리 13 주석 보조정리 1.
17: 같은 책, 2부 정리 13 주석 개체의 정의.
18: 같은 책, 2부 정리 13 주석 보조정리 4-7.
19: Hans Jonas, “Spinoza and the Theory of Organism,” Journal of the History of Philosophy, vol. 3, no. 1 (1965), 43–57; Antonio Damasio, Looking for Spinoza: Joy, Sorrow, and the Feeling Brain (London: William Heinemann, 2003); Descartes’ Error: Emotion, Reason and the Human Brain (London: Penguin Books, 2008) 참조.
20: 『에티카』 3부 정리 6.
21: ‘물체’와 ‘신체’는 동일한 단어 ‘corpus’의 한국어 번역이다.
22: 같은 책, 4부 정리 39 주석, 강조는 인용자.
23: 같은 책, 2부 정리 13 주석 공리 1.
24: 같은 책, 1부 정의 5, “나는 양태를 (…) 다른 것 안에서 존재하고 다른 것에 의해 사유되는 것이라 이해한다.”
25: 같은 책, 1부 정의 3.
26: 르네 데카르트,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 프로그램에 관한 주석』,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2021, 107; 김은주,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민음사, 2024, 360에서 재인용.
27: 김은주,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체의 복합성과 코나투스(conatus)」, 『철학』 127호, 2016, 64.
28: 『에티카』, 2부 정리 13 주석 공리 3.
29: Antonio Damasio, Looking for Spinoza, 210.
30: 『에티카』, 2부 정리 13 주석 정의.
31: 같은 책, 2부 정리 24 증명.
32: 같은 책, 2부 정리 13 주석 보조정리 7주석.
33: 같은 책, 2부 정리 13 주석 공준 4.
34: 같은 책, 3부 정서의 정의 1 해명.
35: 같은 곳.
36: 아래 『에티카』 4부 정리 60에 대한 해석은 앞에서 거론한 김은주의 논문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체의 복합성과 코나투스(conatus)」, 67-68의 서술에서 많은 부분을 빌려 온 것이다.
37: 『에티카』 4부 정리 60과 그 증명. 번호는 필자가 붙인 것.
38: 『에티카』, 2부 정리 13 주석 정의.
39: Bruno Latour, The Pasteurization of France, tr. Alan Sheridan, and John Law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3), 158.
40: 『에티카』, 4부 정리 67.
41: 같은 책, 2부 정리 30.
42: 같은 책, 2부 정리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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