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디즘의 그림자
-미셸 마페졸리, 『부족의 시대』(1988/2017, 문학동네) 서평
박기형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1. 미셸 마페졸리의 전반적 문제의식
『부족의 시대』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미셸 마페졸리의 삶과 그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의 논의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마페졸리가 위치한 마주침과 헤어짐의 맥락을 쫓아가면서 그의 저작을 관통하는 전반적인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마페졸리는 1944년 프랑스 남부 그레스삭의 광산촌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여러 이유들로 이주해온 이탈리아인들, 폴란드인들, 포르투갈인들 그리고 그 후 알레지인들과 모로코인들이 공존하는 마을이었다. 이와 같은 조건은 마페졸리가 ‘노마디즘’, ‘역동적 뿌리내림’ 등의 주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광산촌에서 빈번히 벌어졌던 사고들에 대한 경험 속에서 삶과 연결된 ‘죽음’, ‘비극’이라는 테마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마을의 관습과 일상적 삶을 통해 ‘체화된 지식’을 중시하게 되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김무경 2007, 10-11).
이러한 어릴 적 경험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68혁명을 전후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상황주의자로 활동했다는 점과 1970년대에 그르노블로 가서 질베르 뒤랑의 지도를 받았다는 점이다. 1960년대는 프랑스에서 앙리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일상생활비판론이 크게 주목받은 시기였다. 일상생활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적 실천을 주도했던 그룹이 바로 기 드보르가 이끄는 <국제 상황주의자(International Situationist)> 단체였다. 국제 상황주의자들은 동구권이나 제3세계와 달리 서구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오히려 반동적인 흐름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질문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상생활을 문제 삼았고, 문화와 도시, 정신과 감정이라는 주제에 주목했다.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문화가 정신을 왜곡시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저항예술들 마저도 구경꺼리로 전락해버리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서구 유럽에서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상황주의자들은 현대 사회의 스펙타클의 구조를 분석하여 보여주려 했다. 나아가 일상생활과 문화에서의 변혁을 이루어 스펙타클에 의한 분리 상태, 즉 현실보다 환상을 쫓는 소외된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이영빈 2010).
질베르 뒤랑 또한 일상생활에 대한 분석이 중요함을 지적했다. 하지만 뒤랑은 국제 상황주의자들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 서있다. 뒤랑은 현대 문명과 서구 사회의 보편 원리, 특히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문제 삼았다.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미지들의 범람은 수량화, 기계화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그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자기동일성의 논리가 작동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사라진 의미들, 본래적 의미의 이미지와 상징을 복원하기 위해선 새로운 인식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가 말했던 배타적 이분법이 아니라 제3자의 논리를 제시했다. 제3자의 논리는 A와 not A가 단순히 분리 및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 중개자인 B를 통해서 A와 not A가 갈등과 긴장 속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랑의 제3자의 논리는 서구의 전통적 합리성에 반발하면서 새로운 인식론을 제시하고 가치의 다원성을 강조하려는 시도였다(박치완 2010). 이렇게 볼 때, 마페졸리가 상황주의자들과 질베르 뒤랑과 만나면서 일상생활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과 이론적 논의를 만들어나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상황주의자들로부터는 현대 사회에서 일상생활이 갖는 모순적 지위의 중요성을, 질베르 뒤랑으로부터는 제3자의 논리를 통한 인식론적 접근을 배워나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추가적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바로 게오르그 짐멜과 현상학의 영향이다. 마페졸리는 짐멜이 주창한 형식 사회학의 ‘형식’을 참고하면서, 앙리 르페브르 및 국제 상황주의자들과 대립각을 세운다. 형식 사회학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강조한다(마페졸리 저·박재환 역 1994, 47). 다시 말해, 구체적인 것, 실제적인 것에 대한 이론적 분석이 갖는 한계를 인정하고, 현상이 유일한 실재라는 인식론적 기초 위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일상생활과 같이 우리 삶에서 가장 가까운 것들을 특정한 지식의 형식을 통해 또는 그 형식 속에 통합해내려 한다. 현상학의 표현을 빌리면, 현실의 다양성과 실재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현상 자체에 침전하여 현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것들, 소규모의 상황과 집단들, 진부하다고 치부된 것들 모두를 조명하고자 한다. 예컨대, 사회운동을 이론이나 조직이 아니라 인민들이 주도한 것으로 이해하고 인류 역사의 동력을 인민들의 공통된 경험에서 찾으려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마페졸리가 말하는 형식이 단순히 언어학에서 말하는 시그니피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뒤랑이 지적했듯이, 시그니피앙과 시그니피에의 관계를 전통적이지 않은 방식, 즉 (탈)구조주의의 방식으로 사유하게 되면 시그니피에가 말소되고 종국에는 시그니피에와 시그니피앙의 관계 자체도 해체되고 만다. 예컨대,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를 시그니피앙들만 교환되는 사회로 규정했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에서 역사, 윤리, 삶 등은 모두 기호화 가능한 하나의 시뮬라르크에 불과하다. “시그니피앙이 시그니피에 선행하고 기호가 대상에 선행하며 파생 실재가 실재에 선행한다. 복사본이 원본을 대체하고 지도가 영토에 우선한다(박치완 2010, 137).” 이와 달리, 뒤랑은 시그니피에 주목하면서, 시그니피에와 시그니피앙의 관계를 전통적이지도 해체적이지도 않은 방식, 즉 제3자의 논리 속에서 재규정하려 한다. 시그니피에의 의미는 수없이 다양하며 항상 살아 움직인다. 하나의 시그니피에나 특정 시그니피앙으로 환원할 수 없다. 물론 시그니피앙은 종합보다는 분리, 전체보다는 부분에 기초한다. 따라서 시그니피에를 있는 그대로 담아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와 not A의 공통토대를 이루는 B가 있다(박치완 2010). 시그니피에와 시그니피앙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토대가 있는 것이다. 뒤랑에게선 상징, 신화, 이미지, 원형 등이 거기에 위치한다면, 마페졸리에게선 일상생활이 그 자리에 놓인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마페졸리는 일상생활을 빌프레도 파레토의 ‘잔기(residues)’ 개념과 연결시킨다. 파레토의 잔기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유사하다. 의식 이외의 것들, 현대성에 포함되지 못하고 남겨진 것들이다. 바로 비합리성, 감정, 쾌락, 육체, 본능 등이다. 하지만 파레토는 이것들이 오히려 사회적 삶의 토대를 이룬다고 지적한다. 합리성, 이성, 도덕, 정신, 논리 등은 잔기의 ‘파생체(derivations)’다. 여기서 장 보드리야르의 말을 재전유한다면, 아마도 일상생활이라는 실재가 사회라는 파생 실재에 선행한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마페졸리가 볼 때, 다양한 일상생활의 면면들은 다원적이고 역동적인 시그니피에이고 일상생활 그 자체는 인간 삶의 근원적 토대인 잔기다. 일상생활과 그 면면들은 주어진 그대로 바라보면 포착될 수 있다. 하지만 특정 시그니피에에 의해 정렬되는 과정이나 시그니피앙에 담기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배제되거나 제약된다. 그러나 일상적 삶의 역동성은 시그니피앙과 시그니피에의 관계 아래에 항상 놓여있다. 삶의 역동성이 지하에 있다가 일상생활이라는 틈을 통해 끊임없이 표출된다. 이를 통해 사회적 삶이 매순간 (재)구성된다. 따라서 일상생활은 창조적인 가능성, 변화의 가능성을 늘 함축한다. 그리고 일상생활은 쾌락적인 축제, 야만적인 형태, 종교화된 의례, 육체적인 교감 속에서 향유된다.
여기서 마페졸리와 르페브르 간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사회 전체의 구조 속에서 일상생활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대중의 현재적 삶을 있는 그대로 주어진 대로 받아들인다. 르페브르는 일상의 존재양식은 자본주의 구조가 드러나는 한 징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일상생활은 기술발전 단계와 사회 전체 구조에 의해 크게 제약된다고 주장했다. 르페브르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한 소외에 주목한 것이다. 하지만 마페졸리가 보기에 그러한 논의는 일상생활을 이론적으로 재단한 것에 불과하다. 질베르 뒤랑의 인식론적 논의를 참고한다면, 개인과 사회, 일상생활과 사회 구조를 대립시키는 것은 전통적인 이분법에 근거한 접근이다. 비록 르페브르가 기존의 사회학에서 무시했던 일상생활이라는 영역을 주요한 논의 대상으로 끌어올렸지만, 일상생활에 대한 접근이 여전히 전통적인 이원론, 합리성, 계몽주의 등 서구의 보편적 원리에 입각해 있다고 평가한다. 이에 반해, 마페졸리는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다양한 몸짓들이 삶 자체를 구조화하며 삶 속에서의 사회적 교환을 이루어낸다고 본다. 달리 말해, 일상생활의 형식과 내용은 사회에서 사람들이 공존하는 원인이자 결과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러한 일상생활은 비합리적, 종교적, 야만적, 자연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를 분석하는 것이 마페졸리의 주요한 과제다.
나아가 마페졸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일상생활이 이끌어낼 변화에 주목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현대 사회의 스펙타클에 포획되어 있다는 국제 상황주의자들의 비판을 수용하되, 일상생활이 오히려 변혁의 계기로 활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생활을 주어진 그 자체로 바라볼 때, 일상생활을 통해 우리는 기존의 사회학에서 설명하던 사회계약의 논리, 합리성에 근거한 조직 원리에서 포착하지 못한 다양한 집합적 주체의 생성과 해체의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다원화된 가치, 다양한 삶의 양태가 분출하는 양상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역사적인 시기를 구분하자면, 수단과 목표를 중심에 두는 합리적 사고와 일원화된 가치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교의체계가 강조되는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 현대 사회의 변화는 이러한 모더니티의 시기를 벗어나 포스트모너니티의 시기로 이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상이한 체계 간의 이질성과 긴장이 강조되는 시기, 가치들의 다신교가 회귀하여 여러 가지 집합적 모임들(스포츠, 음악, 댄스, 섹스, 협회, 소규모 모임 등)이 다양한 영역 속에서 활발해지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상의 논의들의 연장선에 서서 그리고 새로운 사회 변화에 주목하면서, 마페졸리는 『디오니소스의 그림자』(1982), 『일상적 지식』(1985), 『부족의 시대』(1988), 『노마디즘』(1997), 『영원한 순간』(2000) 등의 여러 저작을 통해 일상생활의 긍정성, 비생산적 삶의 의미, 지금 여기의 순간적 삶에 대한 체험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다양한 양태들, 실증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지식사회학, 다문화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삶 등에 대해 논의를 펼친다.
2. 『부족의 시대』의 주요 논지
그렇다면, 마페졸리가 『부족의 시대』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모더니티 사회에서 포스트 모더니티 사회로의 이행과 그 의미다. 모더니티가 규정하는 사회는 프로메테우스적이다. 합리성, 개인주의 또는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 사회계약, 정당, 국가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기계적 구조다. 모더니티에서 말하는 사회적 것(le social)들은 연속적 배제의 과정, 생명력 없는 획일화를 특징으로 갖는다. 특정 가치들을 중심으로 배열되며, 정상성과 도덕을 강제하며, 기획·관리·규율·통제라는 기제를 통해 작동한다. 이러한 사회는 고정불변하며 불가역적이다. 이에 반해, 마페졸리가 주목하는 포스트모더니티 사회는 사회적 삶으로 구성된다. 지하의 중심성(centralité souterraine), 지하의 역능이 회귀한다. 사회성(socialité) 사교성(sociabilité)에 기반 하여 유기적 연대(solidarité organique)가 이루어진다. 유동적이며 가역적이다. 도덕이 아니라 윤리(비도덕주의)가 중시된다. 사회성의 역능(puissance sociétale)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집합적 주체가 출현한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사회에서는 모더니티의 에너지론, 즉 물질, 부, 생산이라는 목적을 지향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비생산적 삶을 영위한다(마페졸리 저·이상훈 역 2013). 진보적인 서사가 아니라 연극이 상연되는 무대에서 무목적적인 놀이 또는 유희가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기능적으로 배치되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가(progressa)지 않고 들어간다(ingressa). 외적 외연의 확대가 아니라 내적인 포화를 통해 다양한 집합적 주체 속에 참여한다. 개인과 사회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사라진다. 영원 회귀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사회적 삶에의 결합이 드러난다. 이러한 결합은 셸러가 말하는 ‘사회적 공감’ 또는 마페졸리가 명명한 ‘감정이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포스트모더니티 사회에선 ‘디오니소스의 그림자’가 드러난다. 당위적인 도덕이 쾌락적인 윤리에, 합리적 이성이 광란적인 감성에 자리를 내준다. 감정이입은 바타유나 사드가 말했던 성교 없는 섹스, 에로티즘이다. 목적 없이 쾌락 자체를 즐기면서 집합적 육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감정이입은 자기 자신의 파멸이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새로운 것, 사회적 몸체(le corps social)가 탄생한다(마페졸리 저·이상훈 역 2013). 그럼으로써 주체와 타자의 대립이 사라지고 보편적 공감의 형성이 가능해진다. 일상생활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숱한 집합적 행위, 사회적 행동들은 바로 이러한 형식의 토대 위에서 영위된다.
마페졸리는 이러한 사회성의 형식(Forme), 소속의 메커니즘을 신화와 상징, 의례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그럼으로써 시원적인 것, 야만적인 것, 동물적인 것이 돌아왔다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마페졸리는 시원적인 종교들에서 말하는 영원한 여성성이 포스트모더니티 특징이라고 말한다. 고대 신화에서 여성성은 물과 같이 재생, 생명력, 자연, 동물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여성성은 풍부한 삶의 가능성을 무한하게 열어젖힌다(마페졸리 저·신지은 역 2010, 215-217). 나아가 마페졸리는 고대 다신교에서 말하는 자웅동체의 에로스에 주목한다. 최초의 남녀 양성, 영원한 아이는 일상생활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자웅동체는 우주적 융합의 특성, 죽음과 재생하는 삶의 순환을 가리킨다.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표현을 빌리면, 연극, 축제나 의례와 같은 신성한 것에의 참여를 통해 개인적 경험이 우주화 된다. 반대되는 것들의 일치하게 되고 모든 개개인이 세계의 사물들의 질서 속에 통합된다(마페졸리 저·신지은 역 2010, 219-223). 다시 말해, 다문화주의 속에서 사회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마페졸리는 개인주의의 쇠퇴와 신부족주의의 도래를 선언한다. 무목적적인 상호교통 속에서 다양한 가치가 인정되고 현재라는 매순간 다원화된 집단들이 무한하게 창조되는 공동체 사회 말이다. 21세기에 이르러 우리는 노마디즘으로 특징되는 사회에 대해 목가적으로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3. 마페졸리의 ‘현재주의’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적 시간성과 실천(praxis)의 문제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그렇게 낭만적인가? 다양한 사람들이 상호교통하면서 수평적 관계를 이루어 살아가는 네트워크의 네트워크가 정말 존재하는가? 어쩌면 마페졸리의 인식론적 방법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어진 그 자체를 경험한 바대로 인식하는 것은 사태를 새롭게 조망해줄지 모르지만,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사태를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마페졸리가 베르그송을 경유하면서 말하는 직관이 가능하기 위해선 면밀한 분석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의 개념을 빌어서 말했듯, ‘인식론적 단절’이 요청될 수 있다. 달리 말해, 3종 인식에 2종 인식이 선행한다. 경험 그 자체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관념들의 재배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경험한 바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현대 사회의 유동성, 유기적 삶,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집합체들의 분출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마페졸리가 비판적으로 넘어서려 했던 기 드보르와 앙리 르페브르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의 스펙타클, 자본주의의 구조는 마페졸리의 논의에서 배제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상황주의자의 실천적 전략 중 하나는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시도했듯이, 영화라는 스펙타클의 주요 매체를 혁명적인 방식으로 재전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황주의자의 논리를 따라, 현대인들의 삶을 소외시키는 일상생활의 기제들을 새롭게 전유하여 일상생활의 형식이 가진 창조적 힘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페졸리는 일상생활을 재전유할 수 있는지, 재전유할 수 있다면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 등을 전혀 논의하지 않는다. 오직 현대 사회가 포스트모더니티 사회로 변화했다는 전제 위에서 논의를 펼칠 뿐이다. 정말 사회가 변화한 걸까? 아니면, 마페졸리 개인의 낭만적 바람에 불과한 걸까?
이미 우리는 시민사회, 거버넌스, 네트워크 사회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경험했다. 마페졸리를 따라 사태를 있는 그대로, 경험한 대로 들여다보자. 이때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불평등의 심화, 혐오의 분출, 인종주의의 회귀 등이다. 따라서 마페졸리야말로 이원론적 도식에 사로잡혀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합리성에서 비합리성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합리성과 비합리성 모두가 어떤 틀 내에서 또는 어떤 토대 위에서 상호작용하고 있는건 아닐까? 제3자의 논리에서 말하는 B의 항에는 일상생활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위치해야 하는 게 아닐까? 예컨대, 놀이와 유희, 감성과 육체는 자본의 무대이자 놀이터다. ‘욜로(Yolo)족’과 ‘트레바리’ 같은 사교 모임은 도대체 뭔가? 그게 마페졸리가 꿈꾸던 사회적 삶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자본의 빛이 디오니소스의 그림자를 모두 잠식한 듯 보인다.
< 19세기의 Treadmill >
이와 관련해 특히 문제를 삼고 싶은 것은 마페졸리의 '현재주의'다. 마페졸리는 일상생활의 형식의 한 특징으로 ‘지금 시간(Jeztzeit, now-time)’의 카이로스(Kairos)적 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적인 폭력, 창건적인 죽음과 삶의 영원회귀를 말한다. 무목적적 시간성, 선형적 시간의 무화야말로 일상생활을, 포스트모더니티 사회를 특징짓는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 사회의 시간성은 목가적인 공동체 사회를 가능하게 해주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을 축적하는 새로운 방식이 아닐까? 무엇보다 최근 플랫폼 자본주의, 타임 푸어, 과로 사회 등으로 명명되는 자본주의의 여러 측면들은 자본이 시간을 새롭게 포획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주의적 착취는 노동자라는 대상과 세계 시장이라는 공간만으로 설명 될 수 없다. 맑스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는 상대적 잉여가치 착취를 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압축시킨다. 추상적인 시간 단위 당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즉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이 전형적이다. 이때 노동자가 경험하는 구체적인 시간이 더욱 압착된다. 이러한 경향은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에 따라 유동성이 증가하는 것과 만나면서 더욱 심화된다. 언제 어디서나 접속 가능하게 되자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하게 된다. 여가와 노동의 경계가 무너진다. 주5일 근무와 주말이라는 일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것이다. 더욱이 노동의 형태에서도 임금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는 공동체적 관계와 쾌락적 윤리를 실현시키기 보다는 자본의 축적을 실현시켜준다. 모든 현재, 매 순간, 일분일초가 자본이 이윤을 이끌어낼 기회를 제공하는 창구가 된다. 잠이라는 가장 신비적인, 무의식의 심층에 자리한, 가장 내밀한 의 삶의 영역이 위험에 처하기에 이른다(조너선 크레리 저·김성호 역 2014). ‘지금 여기’ 또는 ‘영원 회귀’라는 현재주의, 영속적 무시간성은 부족주의가 도래하는 순간도,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간도 아니다. 모이쉬 포스톤이 말했듯(Moishe Postone 1993), 트레드밀(Treadmill), 즉 다람쥐 쳇바퀴 돌듯 늘 현재만을 살아가는 자본주의적 삶의 형상을 가리킬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페졸리가 놓친 ‘실천’의 문제, 자본주의에 포획된 일상생활을 어떻게 재전유할 것인가의 문제로 돌아온다. 마페졸리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또 다른 이상, 모더니티 사회에서 말하는 자유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 포스트모더니티 사회가 지향하는 노마디즘을 제시했다. 그러한 이상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마페졸리의 전제를 비판하는 것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도착 지점만을 들어다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면한 현실, 우리에게 주어진 실재하는 것들로부터 새로운 출발점을 설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페졸리의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어야 한다. 자본이 모든 곳에 자신의 빛을 비추고자 할 때, 반드시 드리울 수밖에 없는 그림자는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우리가 포착해야 할 잔기, 지하의 중심성, 사회적 삶의 역능은 도대체 무엇일까? 자본주의라는 시그니피앙에서 배제된 시그니피에들은 무엇일까? 그것들에서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을까? 자크 라깡의 성차공식(sexsuation)을 빌려 말해보면, 자본(팔루스)의 구조적 논리가 작동하는 자본주의라는 남성적 구조에서 벗어나 무한 집합을 가능케 할 여성적 구조로 진입할 수 있는가? 팔루스(phallus)의 구조적 논리를 부정할 수 있는 계기는 어디서 발견할 수 있고,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 걸까?
< 참고문헌 >
Moishe Postone. 1993. Time, Labour, and Social Domina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김무경. 2007. 『자연 회귀의 사회학: 미셸 마페졸리』. 파주: 살림출판사.
미셸 마페졸리 저·이상훈 역. 2013. 『디오니소스의 그림자』. 서울: 도서출판 삼인.
미셸 마페졸리 저·박재환 역. 2004. “일상생활의 사회학-인식론적 요소들.” 『일상생활의 사회학』. 파주: 도서출판 한울.
미셸 마페졸리 저·박정호·신지은 역. 2017. 『부족의 시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개인주의의 쇠퇴』. 파주: 문학동네.
미셸 마페졸리 저·신지은 역. 2010. 『영원한 순간: 포스트모던 사회로의 비극의 귀환』. 서울: 이학사.
박치완. 2010. “질베르 뒤랑의 제3의 논리와 시니피에의 인식론.” 『철학연구』 제39집, 132-167.
이영빈. 2010. “기 드보르(G. Debord)의 상황주의 운동(1952-1968)-일상생활비판을 위한 예술과 사회혁명의 결합을 중심으로-.” 『역사학 연구』 제40집, 223-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