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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정치를 함께 사유하기

 

한샘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이 글은 <인문예술잡지F> 24호에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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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이유로 『인문예술잡지F』의 편집부로부터 1984년에 출간한 『공동체문화라는 잡지를 소개받고 이에 대한 생각을 써주기를 청탁받았다. 1980년대의 공동체 문화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거니와, 전공인 ‘철학’과 청탁받은 주제인 ‘공동체’가 과연 어떻게 접목이 될 수 있을지 선뜻 잘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망설였다. 그럼에도 청탁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 어려운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과 1980년대의 한국 사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나에게 익숙한 프랑스 현대 철학에서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한국 사회에서 도대체 공동체를 어떻게 사유하고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잡지에는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다. 크게 세 가지 기획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공동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매체의 민주화를 위하여’, ‘문화운동 현황’이라는 표제였다. ‘매체의 민주화를 위하여’에 실린 글들은 대개 우리나라 방송 혹은 대중매체의 현실에 대해 그것이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떤 글에서는 그 내적 해법을 고민하기도 하고 어떤 글들은 대중매체의 대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즉 노동조합이나 대학의 언론들을 다루면서 ‘민중언론’을 주제화한 경우도 있고, 재미있게도 새로운 대중매체로서 대자보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글도 볼 수 있었다. ‘문화운동 현황’에 수록된 글들은 내용적으로 더 큰 편차들을 지니며 잡지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해 반성하는 글, 지역문화운동의 실태를 조명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문화운동 중에서도 특정한 장르, 즉 노래와 미술을 통한 문화운동의 새로운 국면들을 다룬 글들도 재미있게(33년의 시차를 온전히 느끼면서) 읽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마당과 무대」라는 제목의, 마당굿/마당극을 다루면서 민중적 양식으로서의 마당에 대한 고민을 제시한 글을 읽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이렇듯 전체적으로 당대의 문화운동에 대해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글들이 실려 있었지만 사실 가장 눈여겨 본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첫머리에 실려 있는 기획, ‘공동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여기 실린 글들은 백기완의 「민족공동체 이념과 그 실천적 과제」와 박현채의 「공동체론, 공동체 운동」 두 꼭지이다. 잡지의 제목이 『공동체문화』이기도 하거니와, 아마도 잡지의 편집부가 가장 힘주어 말하고 싶은 내용이 바로 이 첫 번째 기획 코너에 담겨 있으리라. 하지만 이런 기대를 하고 읽어본 글들의 내용은 기대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미리 말하자면, 두 개의 글은 모두 공동체를 그리 중차대한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게 두 글의 기본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잡지의 기획 의도를 생각해보면 이는 다소 당혹스럽다. 민족문화 혹은 민중문화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당대의 관심을 ‘공동체’를 통해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기획의도일 것으로 미루어 생각해본다면, 청탁의 결과물을 이러한 형태로 받게 된 편집진은(불과 2호일 뿐인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공동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기획에 대한 청탁글들 중 들어오지 않은 글이 다수라는 점이다. 머리말에서 편집부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번호 기획물로서 가장 중점을 둔 「공동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 청탁에 예정된 원고가 일부 들어오지 않은 사실만으로도 각기 고유의 관심분야에서조차 공동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적지 않은 고전을 겪고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공동체 문제를 가장 활발하게 제기하고 있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생활공동체 논의, 문화 분야에서의 예정된 원고가 들어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공동체문화 편집부, 『공동체문화』 제2집, 공동체, 1984, 8쪽. 이하 책명과 쪽수만 표시.)

 

이러한 아쉬움을 야기한, 이러한 상황의 원인은 단지 청탁받은 필자들의 게으름 때문일까? 그렇다고 보기만은 어렵다는 것을, 무엇보다 백기완과 박현채의 입장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백기완과 박현채 역시 공동체라는 주제를 명쾌하게 부각시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대해 어찌어찌 써낸 자들의 소극적인 자세, 그리고 결국 써내지 못한 자들의 침묵. 이는 공동체라는 주제 혹은 개념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어려움 때문이 아닐까? 일단 이 글에서는 이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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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백기완의 글을 보자. 백기완은 공동체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우선 살핀다. “실제로 공동체란 말이 적용된 역사의 맥으로 보면 힘을 장악한 지배계층이 지배명분으로 혹은 지배 이념으로 제기해온 빈도가 더 많았음을 부인 못하게 한다... 이리하여 근대사의 지평에 비죽이 나선 이른바 공동체는 국가권력이 강제한 권력구조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공동체문화』, 17쪽)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란 “역사에 있어 정체성 내지 반동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러나 글쓴이가 공동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이는 이러한 부당한 지배 구조가 극복된 형태로서의 ‘참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는 삶의 터전이란 이러한 정체적 공동체의 타파 내지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지며 그것은 최소한도 부당한 독점과 착취가 청산되고 부당한 억압과 지배가 극복되어 인간의 보편적 염원이 관철되는 사회, 이를테면 고루 잘사는 삶의 터전이 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참 공동체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공동체이다. 백기완은 이를 “민족공동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당대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제국주의이며 “제국주의는 민중과의 모순으로 되며 이러한 모순 관계에서 민중이 주체가 되어 쟁취하는 것이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참 공동체로서의 민족공동체를 달성하는 것을 현실에서 찾자면 그것은 바로 “민족의 통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백기완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좌우간 이러한 자주적인 힘, 주체적인 힘을 도출하고 또 조직해냈을 때만이 오늘에 이 압도적인 안팎의 압제를 깨뜨리고 참다운 민족공동체 즉 민족의 자주통일을 쟁취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백기완의 글은 다분히 민족주의 노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에게 공동체란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는 것이고 따라서 극복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그 극복이란 제국주의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고, 결국 이는 민족의 통일로써 달성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민족공동체의 이념이다. 그런데 백기완의 글에는 공동체 개념이 굳이 부각될 필요가 없다는 정서가 드러난다. 즉 공동체 개념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참 공동체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는 민족이나 민중 개념이면 충분하다. 잡지의 제목과 야심찬 기획이 무색하게도 백기완의 논조는 ‘중요한 것은 민족 억압의 해방이며, 그걸 굳이 공동체라는 말로 표현한다면 민족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정도의 수준이다.

박현채의 글 또한 공동체에 대한 접근 방식이 백기완과 굉장히 비슷하다. 그 역시 공동체라는 개념 고유의 유효성에 대해 긍정하는 입장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 속에 등장하는 공동체들을 부정적으로 파악한다. “계급 사회에서 공동체의 본질은 지배 기구로서의 본질에서 구해지게 된다.”(『공동체문화』, 43쪽) 무계급 사회라 할 수 있는 원시공동체의 경우 공동체는 긍정적으로 인정될 수도 있겠지만, 계급 사회로 이행하면서 공동체는 “자본제화, 근대화를 위해 부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된다.” 공동체에 대한 박현채의 입각점은 백기완보다 더욱 비판적인데, 단적으로 백기완이 긍정했던 민족공동체에 대해 박현채는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민족공동체 이론은 공동체를 정신적 실체로 보는 헤겔의 관념론에서 출발하여... 인종주의로 되어 역사에서 반동적인 파시즘으로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 운동으로서의 이른바 민족공동체 운동은 역사에서 크게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현채에게 공동체 문화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공동체문화는 민족문화 그것만일 수는 없고 민중문화로서의 민족문화이어야 한다.” 즉 박현채는 공동체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민중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박현채에게 공동체를 그 자체로 다루는 것은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일단 “공동체 논의는 실체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원리로서의 공동체라는 범위 이상의 것일 수는 없”다. 이는 공동체론이라는 것이 우리가 원리상 공동체적이라는 것, 즉 우리의 삶의 양식이 기본적으로 공동체를 이룬다는 정도 이상일 수 없다는 것으로 읽힌다. 부각되어야 하는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민중이다. “기껏해야 두레패나 군포계, 대동계 그리고 향약 등에서 공동체의 잔존을 보면서 공동체 운동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적 삶이 아니라 민중적 삶이어야 되며 민중문화이어야 한다... 공동체 논의나 공동체 운동은 좁은 의미의 공동체 논의나 공동체 운동이 아니라 보다 큰 민족적 논의나 운동의 종속된 일환 이상의 것일 수는 없다.” 즉 백기완과 마찬가지로 박현채 역시 공동체라는 개념이 부각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민중문화로서의 민족문화를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리하면 두 개의 기획 글에서 모두 공동체는 소극적으로만 다루어진다. 공동체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념으로 삼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두 필자가 보기에 공동체 혹은 공동체 문화에 대해 고찰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지는 않다. 제국주의의 압제와 계급적 모순이라는, 당대의 정치적 사안에 대해 공동체는 힘을 갖지 못한다. 즉 이들에게 공동체란 정치를 사고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하고 부족한 개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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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동체에 대한 질문들은 다양한 형태와 층위로 제기될 수 있다. 공동체는 필요한가? 현대적 생활양식의 피폐함을 버텨낼 수 있는 유대감을 보충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든,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대항·대안문화의 보루라는 차원에서든, 이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공동체의 필요성을 소리 높여 역설해야 하는가? 즉 공동체는 주장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은 것이 말하자면 앞서 살펴본 백기완과 박현채의 입장일 것이다.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것과 공동체가 주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이를 보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질문이 될 것이다. 공동체라는 개념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사유되어야 할 많은 것들이 그렇듯, 공동체 역시 우리에게 사유의 대상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서 다루는 것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들뢰즈·가타리(Gilles Deleuze·Félix Guattari)는 철학을 일컬어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때 창조란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다. 오래된 개념이라도 그것에 달라붙어 변용시킴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창조다. 그러나 아무 개념에나 달라붙을 수는 없다. 어떤 개념도 철학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좋은 철학이란 곧 시기적절한 개념을 부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동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삼아 부각시키기 어려운 근본적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삶의 양식 그 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현존재(Dasein)로서의 우리가 존재하는 근본 양태가 함께-있음(Mit-sein)이라 지적한 바 있다. ‘공동으로 존재함’ 자체가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즉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고립되어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며, 서로 기대고 있는 존재로서만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면 이는 우리가 항상 그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동체문화』를 둘러싼 긴장 역시 공동체 개념이 가진 이런 미묘한 지점을 잘 보여준다. 즉 함께-있음이 우리 삶의 조건이며 그런 점에서 공동체 역시 너무나 중요하지만,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박현채의 언급처럼, 공동체를 원리로서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무언가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시 묻자면 ‘공동체’라는 개념은 지금 우리가 사유할 만한 것인가? 철학의 대상으로 삼을만한 것인가? 즉 달라붙어 고민할 만한 것인가? “어떤 개념이 그 이전의 것보다 ‘나은’ 것이라면, 그 까닭은 그 개념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변주들과 울림들을 듣게 해주고, 기발한 절단들을 행하며, 우리들 위를 비상하는 어떤 사건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 · 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9, 45쪽.)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싶다. 공동체라는 것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무언가 얻어낼 만한 것이 있는지, 새로운 울림들을 들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찌 보면 앞서 다뤘던 두 필자, 백기완과 박현채와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공동체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유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이 부정의 언사에 대해 좀 더 정확히 말하자. 영원히 아니라든지, 이제 더 이상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직은’,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즉 공동체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공동체 개념의 축소로 이어지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 입장은 이런 것이다. 공동체를 지금 내세우지 말자. 그러나 공동체를 내세우지 말자는 것이 공동체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는 공동체에 대한 현대적 논의들, 특히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 바디우(Alain Badiou)와 랑시에르(Jacques Ranciére)의 입장을 겨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정치의 문제와 관련해 공동체를 사고한다. 미리 말하자면 이들은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는데, 이러한 이론적 구도 안에서 공동체는 그 가능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즉 이들은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부각시키면서 공동체를 정치로부터 떼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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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에게 공동체(community)는 공산주의(communism)를 통해 표상되는 이름이다. 공산주의(혹은 사회주의) 열풍이 불 때 사람들은 공동체 개념을 내세웠고 그것을 통해 해방적 정치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러한 열망이 역사적으로 실패로 드러난 뒤에, 이제 철학자들에게 공동체는 사유하기 난감한 것이 된다. 공동체는 밝힐 수 없는 것이거나(블랑쇼(Maurice Blanchot)), 무위(낭시(Jean-Luc Nancy)) 혹은 도래하는 것(아감벤(Giorgio Agamben))으로서 말해진다. 개념들 간의 편차는 있지만, 이들은 모두 현실에서 공동체의 실패를 목도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모든 (정치적) 가능성을 포기하지는 않으려는 이론적 시도들로 이해된다. 이에 대해 바디우는 과감하게도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손에 닿지 않는 공동체의 주어짐은 바로 오늘날... 모든 세계에 고유한 불가능성이다.”(알랭 바디우, 『조건들』, 이종영 옮김, 새물결, 2006, 292쪽.) 바디우가 볼 때 이것이 공산주의의 실패 이후 사람들의 일반적 반응이다.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세계에 불가능한 것은 공동체라고. 왜냐하면 이제 존재하는 것은 합리적 경영, 자본, 커다란 균형들뿐이므로... 그리하여 세계의 실재는 바로 불가능으로서의 공동체이다.”

그리하여 모든 정치는 원천적으로 필요의 경영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해방적 정치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바디우는 이러한 연결을 넘어 정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데 다음의 문장이 결정적으로 제시된다. “공동체의 불가능성이 우리가 그것을 코뮌주의(공산주의)라 명명하건 무어라 명명하건 해방적 정치의 명령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즉 공동체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방적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가능성을 긍정하기 위해 바디우가 택한 전략은 이렇게 공동체를 정치와 떼어놓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기본적으로 치안(police)과 정치(politique)를 구분한다. 우리가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집단들의 결집과 동의, 권력의 조직, 장소들 및 기능들의 분배, 이러한 분배에 대한 정당화 체계가 이루어지는 과정들 전체”(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길, 2015, 61쪽.)를 랑시에르는 치안이라 명명한다. 즉 타인들과 관계 맺고 서로의 몫을 분배하는 활동들은 근본적으로 기존 사회의 논리를 공유하는 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치안은 “행위 양식들과 존재 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 사이의 나눔을 정의하는 신체들의 질서”이며, 이러한 질서를 나누지 못한 자들은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따라서 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치안이라는) 짜임과 단절하는 것”이다. 즉 그 짜임을 다시 짜는 것을 통해 기존의 짜임에서 몫을 갖지 못한 자들이 몫을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정치다.

문제는 랑시에르에게 공동체가 치안의 질서에 속한다는 점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민주주의(랑시에르에게 정치와 민주주의는 많은 경우 동의어처럼 쓰인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등의 이념이다. “만약 어떤 정치체 내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과 평등하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정치체는 정의상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다.”(진태원, 「랑시에르와 발리바르 - 어떤 민주주의?」, 『실천문학』 110호, 실천문학사, 2013.) 그런데 모든 공동체는 그 원리상 평등의 이념을 완전히 구현할 수 없다. “사회 조직 원리일 수 있는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 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13, 156쪽.) 오히려 공동체는 기존의 불평등과 위계를 어떤 식으로든 재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사유 불가능한 것이다.”(랑시에르, 2013, 135쪽) 진태원은 이를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말하자면 공동체 없는 민주주의”(진태원, 2013.)라고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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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말 그럴까? 공동체에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 없는가? 공동체는 정치의 장소가 아닌가? 이는 물론 이들(바디우와 랑시에르)이 공동체 개념을 어느 정도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며, 정치 개념을 그와 상반된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취급하기 때문이다. 즉 이들에게 공동체란 기존의 관념과 위계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된다. 공동체는 기껏해야 자본주의하의 경영의 공간이 되거나(바디우), 기존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랑시에르). 반면 이들에게 정치는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랑시에르식으로 말해 현실은 불평등하다. 그러나 평등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평등을 이야기하자. 이것이 대단히 거칠게 정리한,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는 정치다. 욕망하는 현실을 도래시키기 위한 이 ‘해야 한다’의 힘, 정치적 이념의 힘이 바로 이들의 정치론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공동체와 정치에 대한 이러한 개념적 분리가 문제를 해결해주는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이는 공동체가 정치와는 무관한 공간임을 승인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공동체적 활동은 아무런 정치적 의미를 갖지 못하는 활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이념(평등이나 민주주의와 같은)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이라면, 그 실현을 위한 지난한 과정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다름 아닌 공동체, 즉 위계와 배제를 포함하고 있는 공동체라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공동체가 정치적이지 않다는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그것은 공동체를, 기존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개념으로 국한시킬 때에만 맞는 말이 된다. 그러나 왜 그래야 하는가?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누군가 등장했을 때 그들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새로운 수식어가 붙겠지만 그들 역시 공동체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다만 그때에도 우리는 또다시 그 공동체와는 다른 누군가인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서의 데모스(demos)를 기다릴 수 있다.

정치를 공동체와 분리시키는 개념적 작업은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상상력의 범위를 더 넓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공동체라는 표상을 곧바로 전체주의와 연결시키는 어떤 알레르기 반응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알레르기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을까? 아니면 혹시 다 나았는데도 우리가 지나치게 위축되는 것일까? 어느 쪽으로도 대답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정치와 공동체의 개념적 분리로 인한 난점 역시 크다는 것이다. 굳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공동체 논의를 다루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으로서의 공동체의 정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잠재성이 외부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 역시 우리의 공동체에 이미 내재해 있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타자이고 도래하는 것이지만, 우리 안에 상존하는 타자이고 그로부터 도래하는 어떤 것이다.

6 

정리하자면 이렇다. 공동체를 내세우지 말자. 하지만 공동체를 정치와 분리시키지도 말자. 사실 공동체를 이러한 정치적 ‘투쟁’의 장소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공동체 자체를 내세우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공동체의 원리란 이러이러하다’는 선언으로 이어지기 쉽고, 그 선언에 비추어 통과된 것만을 공동체의 구성 요소로서 승인하게 되기 쉽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몫의 분배과정’이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공동체 자체의 선한 의지라고 포장됨으로써 결국 공동체 안의 위계와 불평등, 배제의 원리를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공동체의 문제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공동체를 새롭게 구성할 것인가?’ 가 관건이 된다. 이때 구성이란 기존 공동체의 갱신일 수도 있고 새로운 공동체의 설립일 수도 있다. 공동체가 좋은 것임을 아무리 말해도 거기에서는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 주장되어야 하는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내용이며 공동체의 욕망이다. 그리고 이는 꼭 공동체라는 이름을 앞세울 필요가 없는 것들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공동체문화』에 실려 있는 두 개의 글이 말하고 있는 것 역시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민족의 자주통일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계급적 모순의 철폐일 수도 있다. 그것이 민중의 혁명적 열망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욕망이 모인다면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며, 공동체의 원리 또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이 발생 안에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 다시 말해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백기완과 박현채의 주장은 공동체의 사소함에 대해 지적하고 그것을 정치와 분리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내용이 무엇으로 채워져야 할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를 말하지 않기.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기. 이것이 공동체의 ‘새로운 변주들과 울림들’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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