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9년 서교연 페미니즘 이론학교 시즌02 신자유주의와 교차성 페미니즘 수업의 최종 과제로 발표된 글입니다. 아직 논문으로 완성된 글이 아닌 초고입니다. 차후 완성된 글 형태로 발전시켜 다른 지면에 게제할 예정이니 인용은 불가함을 알려드립니다.
장애여성, 교차하는 억압의 자리에서 저항의 교차성을 선언하다
: 장애여성공감 20주년 선언문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에 대한 교차성 페미니즘적 독해
정정훈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1.탈규범적-비장성적 존재들의 정치
처음 그 선언문의 제목을 들었을 때의 충격은 쉽사리 잊혀 지지 않았다.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 라니! 장애여성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20주년을 맞이하여 공표한 선언문에서 자신들을 “불구”로 명명한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그 동안 장애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장애인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에 대한 저항은 매우 중요한 활동이었다. 분명 ‘불구’는 ‘장애자’, ‘애자’, ‘병신’ 등과 같이 장애인을 비하하는 계열의 언어이다. 장애운동은 이러한 멸칭들에 치열하게 저항하여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스스로의 운동을 “불구의 정치”로 규정하는 그 선언문의 제목이 어찌 충격적이 않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 충격은 단지 그간 장애운동이 격렬하게 반대해왔던 장애인에 대한 멸칭을 장애여성공감(이하 공감)이 20주년 선언문의 제목으로 삼았다는 것에 있지만은 않았다. 내게 이 선언문의 제목이 놀라왔던 또 다른 이유,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장 강한 이유는 바로 이 선언문이 제시한 ‘불구’라는 단어에서 그 동안 장애운동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한계를 돌파하는 힘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 한계란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다’는 보편적 평등 주장이 비장애인의 신체와 정신을 규범적인 것으로 승인하는 뜻하지 않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장애를 비장애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정상성을 척도(measure)로 이해하며 여전히 세계를 비장애라는 규범적 신체와 정신을 기준으로 인식하게 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그런데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이하 「불구의 정치」)는 ‘불구’라는 멸칭을 사용함과 동시에 그 ‘불구’라는 위치에서의 ‘정치’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불구’라는 단어를 장애여성운동의 맥락 속에서 ‘용도변경’하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규범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않기에 비정상적 존재이며, 그래서 차별과 배제와 같은 억압의 대상이 되는 것이 타당함을 입증하는 낙인인 ‘불구’라는 말을 자신들의 정치를 규정하는 말로 적극적으로 전용하면서 이 선언은 규범과 정상성 자체를 불안정화한다. 즉 ‘불구’는 정상성의 척도에 입각해서 보자면 비정상적이고 무능력하여 쓸모없고 열등한 이들의 이름이지만, 자신의 존엄성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치적 주체의 이름이라고 「불구의 정치」는 되받아치면서 말하고 있는 것(speaking back)이다.1)
「불구의 정치」는 다층적 의미에서 ‘불구’인 장애여성이라는 자리에서 정치를 모색한다. 즉 장애인이나 여성이라는 각각의 정체성으로 분리될 수 없는 혼성적 위치로부터 인권의 정치를 탐구한다. 이는 장애여성만이 아니라 비정상적이고 탈규범적 존재자로 규정되어 불구화된 또 다른 소수자들과의 만남, 연대와 긴장이 공존하는 만남 속에서 모색되는 정치이다.
그래서 「불구의 정치」는 그러한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억압이 결코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파악한다. 단지 비장애인에 의한 장애인의 배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 이성애자에 의한 비이성애자의 차별로 ‘불구의 존재’ 각각에 대한 억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이한 ‘불구의 존재들’이 경험하는 억압은 다층적 억압들이 교차하며 구성된 것이다. 동시에 불구의 정치는 이 다차원적 억압에 대한 저항이 단지 특정한 소수자 집단의 투쟁만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억압이 교차적인만큼 저항 역시 다층적 소수자 집단의 투쟁이 교차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 교차 속에서 소수자 집단의 정체성 역시 지속적으로 변화된다고 「불구의 정치」는 말한다.
이 글은 장애여성인권운동의 현장에서 생산된 급진적 실천 담론으로부터 내가 받은 충격의 의미를 규명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나는 이를 위해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페미니즘 이론학교 시즌 2 교차성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 과정에서 공부했던 교차성 페미니즘, 특히 페트리샤 힐 콜린의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에 기대일 것이다. 교차성 페미니즘의 관점에 입각하여 「불구의 정치」를 읽어가면서 이 선언문에 나타난 한국 장애여성 페미니즘의 운동이 제시하는 해방적 정치의 급진성을 탐구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미국 흑인여성의 경험과 투쟁이라는 정치적 맥락에서 벼려진 교차성 페미니즘이 한국이라는 또 다른 맥락으로 어떻게 번역되어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또한 이 작업은 장애여성공감이라는 장애여성운동단체의 활동이라는 한국사회의 구체적 페미니스트 장애운동의 활동과 사고가 어떻게 교차성 페미니즘을 풍부화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려는 시도이다.
2.불구화-장치, 복수적 억압의 조합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2) 「불구의 정치」의 첫 문장이다. 하지만 「불구의 정치」는 인간 존엄성의 보편성을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이 보편성은 전제될 뿐이다. 「불구의 정치」는 선언문답게 빠른 호흡으로 그 보편성을 배반하는 현실의 문제로 나아간다.
"그러나 시대마다 존엄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외쳐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장애인을 비롯해 시대마다 불화하는 존재들은 ‘불구’라는 낙인으로 차별받았다. 장애여성은 몸의 차이로 비정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지만 동시에 모든 시대에는 그러한 존엄성을 부정당하는 존재들이 있어왔다. ‘정상적’(normal)이라고 규정된, 그래서 규범(norm)으로 합의된 정체성과 다른 특성을 가진 자들, 규범으로부터 벗어났기에 규범과 조화를 이룰 수 없고 규범을 위협하는 존재들, 즉 규범성과 정상성과 불화할 수밖에 존재들이 바로 ‘불구’로 낙인찍혀 존엄성을 거부당하는 것이다.
불구는 존엄성을 거부당한 자들의 자연적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불구는 특정한 이들의 존엄성을 거부하는 ‘시대’, 즉 권력의 특정한 합의에 의해 선별된 존재들에게 낙인으로 부여된 이름이다. 그런데 「불구의 정치」는 불구를 선별하는 권력을 무엇보다 국가에서 발견한다.
"불구의 존재들을 선별해온 국가는 정상적인 국민과 비정상적인 국민을 구분하며 불평등을 유지했다."
그런데 왜 가부장제, 비장애인중심성, 혹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가 ‘불구’의 선별자로 지목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불구의 정치」가 불구를 선별하는 기제의 제도적 성격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장애인과 이주민에 대한 최저임금 적용 제외, 군형법의 추행죄,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의 우생학 등 법과 제도로 장애와 몸, 빈곤,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 등을 기반으로 한 차별을 양산하고 국민과 비국민에 대한 불평등과 억압을 조장해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감의 20주년 선언문은 규범적 정상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존재들을 불구로 선별하하는 구체적 장치를 지목한다. 그것은 앞에서 열거된 ‘법과 제도’이다. 즉 국가만이 제정하고 설립할 수 있는 법과 제도라는 구체적 장치들에 의해 차이를 가진 몸과 정신은 불구로 낙인찍힌다. 불구란 자연성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통해서 어떤 신체와 정신들을 무능력하고 권리 없는 존재로 만드는 사회적 과정, 즉 불구화(dispowerment) 과정의 산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장애여성의 인권운동을 선언하는 「불구의 정치」가 단지 장애여성의 불구화에만 주목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선언문은 ‘장애여성’만이 아니라 장애, 몸, 빈곤,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 이주민 등 또 다른 소수자들의 불구화에 주목한다. 「불구의 정치」가 파악하는 국가란 이들 모두를 각각의 독특성을 가진 불구로 만드는 권력 장치일 것이다. 하지만 「불구의 정치」가 장애여성만이 아닌 다른 불구들의 선별 역시 주목하는 것은 불구화된 그 어떤 소수자들도 오로지 자신만의 독자적인 ‘비정성과 탈규범성’에 의해 불구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애여성의 불구화는 단지 장애여성이라는 신체와 정신의 차이만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애여성의 불구화는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 재생산, 장애, 이주 및 국적 등과 복합적 계기들의 착종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인식이 「불구의 정치」에는 드러나고 있다. 각각의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은 다른 소수자들의 억압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은 결코 하나의 기제에 의해서 작동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여성의 평등한 권리가 온전히 실현되는 경우가 있을까? 성소수자의 권리가 박탈된 사회에서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진 사례가 있었던가? 한국 사회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러나 동시에 미국과 일본, 독일과 영국, 인도와 중국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하나의 소수자 집단만이 차별과 배제, 불평등과 부정의에 고통 받는 경우는 없다.
특정한 소수자 집단이 억압받는 사회는 또 다른 소수자 집단이 동시에 억압받는 사회이다. 이는 특정한 정체성이나 지위 집단의 억압은 단지 그 정체성 및 지위에 대한 억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체성 및 지위들에 대한 억압을 다차원적으로 경유하는 억압의 복잡한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짐을 함축한다. 「불구의 정치」가 장애여성운동조직의 선언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억압받는 소수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교차성 페미니스트 콜린스의 지배 매트릭스(matrix of domination) 개념은 특정한 소수자 집단을 억압하는 과정의 복잡성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이 개념은 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과 같은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과 결부된 권력관계가 각각의 정체성이나 지위에 따라 개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각이한 권력관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작동함으로써 지배의 가능조건을 구축한다.
"지배 매트릭스라는 용어는 여러 억압이 맞물리며 작동하기 시작하고 전개되고 봉쇄되는 사회조직 전체를 지칭한다…(중략)… 서로 맞물리며 작동하는 여러 억압도 인간의 행동에 대응하여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를 띤다. 또한, 지배의 형태 자체가 변화하기도 한다. 지배 매트릭스는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여러 억압이 한 사회적 위치에서 취하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권력조직이다."(콜린스, 380)
콜린스는 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과 같은 관련된 억압들의 맞물림을 통해 조직화된 권력의 배치를 지배 매트릭스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 지배 매트릭스는 초역사적 지배의 구조가 아니라 항상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의해 구체화된 형태를 이루는 권력 배치이다.
지배 매트릭스는 억압의 교차성을 사유해온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집합적 사유 과정을 통해 구축된 개념이다. 흑인 여성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억압이 단지 젠더나 인종, 혹은 계급이나 섹슈얼리티 어느 하나의 계기만으로 해명될 수 없음을 감지하면서 이를 이론적 언어로 개념화하는 인식론적 투쟁을 전개해 왔다. 이 인식론적 투쟁의 과정에서 억압의 교차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박미선, 108)
페미니스트 교차성이론은 주로 흑인 여성의 억압 경험을 분석하고 이에 저항하기 위한 개념으로 출발하였다. 그러한 억압 경험에 대한 분석이 축적되면서 억압구조의 일반에 대한 개념으로 벼려진 것이 지배 매트릭스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억압들은 하나의 계기에 입각해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복수의 계기들이 맞물리면서 구축되며 이렇게 서로 맞물리는 억압들이 조직화되어 사회 전체의 지배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억압구조의 일반화는 개념의 추상적 공간에서만 유의미하다는 점이다. 콜린스는 복수의 억압이 맞물려 형성되는 억압 일반의 구조라는 추상은 현실적으로는 언제나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구체적 형태를 띠게 됨을 강조한다. 즉 “지배의 모든 맥락은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여러 억압을 다양하게 조합하여 조직한다”(381)는 것이다. 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과 관련된 복수의 억압들은 특정한 시대적 조건과 상황 속에서 특수하게 ‘조합’됨으로써 언제나 구체적인 지배 매트릭스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미국 흑인 페미니스트의 억압과 저항의 경험이라는 독특한 정치적 맥락에서 창출된 이론을 한국의 장애여성운동이라는 ‘다른 맥락’에 접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지배 매트릭스 의 이러한 이중적 차원, 즉 억압구조의 일반성 및 역사적 구체성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3) 모든 억압은 구조적으로 복수의 억압들이 교차되며 작동하지만 그 구체적 양상은 억압들이 어떻게 조합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지배 매트릭스의 개념은 미국 흑인 여성을 억압하는 지배 매트릭스와는 다른 형태의 지배 매트릭스, 곧 한국 장애여성이 경험하는 억압들의 역사적-구체적 조합에 대한 인식과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불구의 정치」가 강조하는 ‘억압의 선별자로서 국가’란 장애,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이주, 장애, 재생산의 문제 등과 결부된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서 소수자를 불구화하는 장치이다. 이 불구화의 장치로서 국가가 바로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억압들의 역사적-구체적 조합으로서의 지배 매트릭스라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한국적 상황에서 장애여성들은 인종이라는 억압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미국 흑인 페미니스트의 교차성 이론이 주목하지 않는 ‘장애’라는 또 다른 계기에 의해 관통되는 억압을 경험한다. 즉 한국의 장애여성은 미국 흑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복수의 계기가 교차하여 작용하는 억압을 경험하지만 각각의 여성에게 있어서 그 억압의 조합방식은 다른 것이다.
장애여성의 불구화를 이주민, 비장애여성, 성소수자, 장애남성, 가난한 사람들의 불구화와 더불어 사고해야만 한다고 파악하는 「불구의 정치」는 장애여성이 경험하는 억압이 법과 제도라는 불구화 장치에 원인이 있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이 불구화의 장치인 국가를 교차성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파악하자면 한국의 지배 매트릭스라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3.의존과 독립의 불가분성, 그리고 횡단의 정치
이렇게 「불구의 정치」는 장애여성을 불구화하는 지배 매트릭스를 국가장치로 규정하면서 억압의 교차적 차원을 드러낸다. 하지만 억압의 교차적 차원을 인식하는 것은 그 억압의 견고함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불구의 정치」에서 불구는 단지 교차적 억압의 희생자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비록 억압당하는 자들이지만 또한 그 억압에 순응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억업과 불화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불화는 권력의 진공 지대가 아니라 지배가 작동하는 권력 관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불구의 정치」는 불구를 선별하는 권력의 작동 한 가운데서 불화로서의 불구의 정치가 시작된다고 선언한다.
"사회와 국가는 온전하지 못한 기능이나 스스로 구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불구의 정치가 피어난다."
「불구의 정치」는 지배 매트릭스를 저항 불가능한 완벽한 압제 시스템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권력이 있는 곳에 항상 저항이 있다는 푸코의 언명처럼 공감의 선언문은 국가로 표상된 불구화-장치에는 저항의 지점이 배태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콜린스의 지배 매트릭스 개념에서도 나타난다. 콜린스에 따르면 지배 매트릭스의 역사적 구체성이란 언제나 억압에 대응하는 인간 행위의 영향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지배 매트릭스는 “인간의 행동에 대응하여 역사적 특정한 형태를 띤다”라고 밝힌 앞의 인용문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지배 매트릭스의 구체적 형성은 항상 특정한 역사적 정세 속에서 이루어지는 “억압과 저항운동의 변증법적 관계”(380)의 효과인 것이다.4)
즉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띠는 특정 지배 매트릭스는 언제나 저항에 대한 대응 속에서 구축되며 이렇게 구축된 구체적인 지배 매트릭스에는 또한 저항의 계기가 배태되어 있다. “온전하지 못한 기능이나 스스로 구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국가라는 이름을 가진 지배 매트릭스 내에서 차별받고 배제된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과 배제에 대한 저항 역시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법과 제도”를 통하여 장애여성과 소수자들을 불구로 만드는 억압 장치에 대한 저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불구의 정치」는 장애여성의 경험이 갖는 저항적 가능성에 주목한다. “장애의 경험은 성장과 개발이 보편인 시대에 저항할 수 있는 남다른 감각”이라고 이 선언문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저항의 감각은 장애라는 단독적 경험의 고유성으로부터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불구의 정치」는 장애여성의 환원 불가능한 경험과 위치가 곧 장애여성의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위치를 갖는 소수자들과의 만남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장애여성의 경험과 위치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의 존재를 일깨우며 정상성을 강요받는 다른 몸들과 만난다. 그리고 불구의 존재들과 함께 폭력적인 운명을 거부한다."
복수의 억압이 조합되어 형성된 지배 매트릭스 안에서 장애여성들은 ‘폭력적 운명’을 강요받아 왔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적 운명에 대한 저항은 장애여성이라는 단독적이고 고유한 정체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애여성의 경험과 위치 자체가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의 존재”들과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애여성의 경험과 위치는 다른 억압받는 자들과의 연대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장애여성이 거부해야할 폭력적 운명은 장애여성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물론 서로 다른 소수자들은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가진 독특한 존재자들이고, 각이한 소수자 집단이 경험하는 억압은 그 구체성에 있어 구별됨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지배 매트릭스의 작동 효과는 기본적으로 소수자들을 불구화하는 한에 있어서 그들에게 공통적이다. 또한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하나의 소수적 정체성에 대한 억압은 항상 다른 소수적 정체성에 대한 억압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장애여성은 “다른 불구의 존재들과 함께 폭력적 운명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장애여성의 억압이 다른 소수자 집단의 억압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장애여성의 해방은 다른 소수자 집단의 해방과 항상 연동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구의 정치”는 연대의 정치이다. 장애여성운동은 억압과 종속으로부터 장애여성의 해방을 추구한다.
억압으로부터 장애여성의 해방 과정은 골방이나 시설에 유폐되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던 이들의 독립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구의 정치」는 의존과 돌봄 없는 독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페미니즘의 통찰을 전면에 내세운다.
"독립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번번이 꺾였고 존엄보단 쓸모의 증명을 강요 받아왔다. 우리는 긴 시간 겪어온 부당한 경험이 개인의 불운과 능력의 결과가 아님을 정확히 알고 있다. 권리를 박탈당하고 자원이 없는 이들이 독립에 도달하지 못해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의존과 돌봄 없는 독립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해방의 과정으로서 독립의 과정은 또한 의존과 돌봄의 과정이다. 「불구의 정치」는의존과 독립을 상호 전제적 관계에 있으며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한다. 이는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구체적 지배 매트릭스에 의해 불구화된 소수자들이 서로 돌보며 의존하는 가운데 함께 독립해가는 활동을 말한다. 장애여성운동이 전개하는 정치가 연대의 정치라면 이때 연대는 의존과 독립의 불가분성으로서의 연대인 것이다.
그러나 돌봄과 의존에 기초한 독립이라는 연대의 정치가 장애여성의 정체성을, 그 고유한 경험과 위치를 무화하는 것은 아니다. 「불구의 정치」는 장애여성의 환원할 수 없는 경험과 위치의 변별성을 강조한다. 장애인 여성의 경험은 비장애인 여성의 경험과도 다르지만 장애인 남성의 경험과도 같지 않다. 여기서 공감의 장애여성주의 시각(disabled feminist perspective)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애여성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성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제당하거나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쉽게 성적 폭력과 착취의 대상이 되어 왔다. 참혹한 사건이 벌어질 때 마다 국가는 엄벌주의를 내세워서 취약한 여성들을 보호하겠다고 하지만 우리는 왜 이러한 폭력이 근절되지 않는지 알고 있다. 폭력은 구조적 차별에서 자라나며, 성적 위계에 따라 다르게 매겨지는 존재의 가치를 뒤집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보호가 아니라 권리를 요구한다. 장애를 가진 여성의 성적 자유와 결정을 가로막는 장벽에 도전하고 역량을 박탈하는 구조에 맞서 싸운다."
장애여성은 남성의 지배가 관철되는 한국 사회에서 다른 여성처럼 배제의 대상이자, 성적 폭력과 착취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비장애인 여성이 경험하는 배제, 착취, 폭력과 다른 이유에서 장애여성들은 그러한 억압을 경험한다. 비장애인 여성은 비장애인 여성이 수행하는/수행하도록 기대되는 성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배제되고, 성적으로 폭력을 당하다며 착취된다.
그러나 장애여성과 비장애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의 원인이 완전히 다른 것은 물론 아니다. 이 폭력은 “성적 위계에 따라 다르게 매겨지는 존재의 가치”체계에서 기인하는 ‘구조적 차별’이자 ‘구조적 폭력’이다. 이 폭력의 구조 안에서 장애여성과 비장애 여성의 상대적 위치 차이가 폭력의 현상적 이유를 다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장애여성주의’는 ‘장애’여성주의이기도 하지만 장애‘여성주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성에게 자행되는 폭력의 구조 자체에 대한 투쟁이 필요하다. 권력은 폭력의 희생자인 여성에게 ‘보호’를 말하지만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성적 위계에 기반을 둔 구조의 변혁을, 그리고 이를 통해 보장되는 권리를 요구한다. 장애여성에게 이 권리 투쟁은 “성적 자유와 결정을 가로 막는 장벽”을 허물기 위한 투쟁이며, 궁극적으로 성적 자유를 행사하고 성과 결정된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역량을 박탈하는 구조의 변혁을 위한 투쟁이다.
하지만 장애여성 페미니스트의 투쟁은 대문자 페미니즘, 여성의 단일성을 가정하는 일부 페미니즘적 경향에 강한 긴장을 유발한다.5) 「불구의 정치학」은 “여성 안에도 몸의 차이와 위계가 있다는 점”을 환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고정 불변하는 정체성으로서 여성 정체성의 단일성을 가정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이 여성의 경험을 단일화하면서 장애여성의 관점을 무시하거나 누락하는 것을 비판한다. 우리는 페미니스트이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누구와 싸우고 연대하는가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한다."
정체성이 변한다는 것은 정체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불구의 정치」는 분명 장애여성의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여성, 장애인, 장애여성, 소수자 등 우리의 정체성에 기반한 운동은 중요”하며,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이 선언은 분명히 밝힌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정체성은 결코 단일한 것도 고정된 것도 아니다. 정체성 자체로부터 정치적 입장의 동일성이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정체성은 “누구와 싸우고 연대하는가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다.
「불구의 정치」가 말하는 함께 싸움, 연대는 고정된 정체성들의 물리적 공동 실천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함께 싸우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과정, 화학적인 공동의 행동이다. 「불구의 정치」는 그러한 연대의 정치가 공감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적대세력의 공통성, 정치적 이해관계의 근접성, 각자 투쟁 과제를 초월하는 상위의 목표 등이 연대의 기초가 아니다. 연대의 출발점은 공감이며, 연대의 실천 과정은 정체성의 변화 과정이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와 만나 무엇을 향해 갈 것인가? 이질적인 존재들의 마주침과 뒤섞임, 흔들림 속에서 끝없는 질문과 토론이 공감을 가능케한다. 우리는 중심을 향하기보단 사회의 주변부에서 차이를 이해하고 발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각자의 경험에서 서로의 삶과 운동을 배우고, 사회적 차별을 해석하는 힘을 익혔다. 반복되는 사회의 거절과 친구의 죽음, 지켜지지 않는 국가의 약속과 폭력 속에서 역설적으로 공감하는 힘과 맞서 싸우는 연대를 터득했다."
그러나 공감은 결코 평온한 정서의 교감이 아니다. 그것은 ‘이질적 존재들의 마주침과 뒤섞임’의 과정, 즉 서로 다른 존재들이 충돌과 갈등, 혹은 긴장 속에서 서로 연루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서이다. 그래서 “흔들림 속에서 끝없이 질문하고 토론”할 수밖에 없다. 공감은 이 평탄치 않은 충돌과 긴장 속에서 비로소 발생하며 이러한 긴장감이 연대의 시작이다.
또한 공감은 단지 정서의 차원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불구로 낙인찍힌 자들 사이의 공감은 같은 처지에 경험하는 아픔에 대한 정서적 공명만이 아니다. 「불구의 정치」가 말하는 공감은 불구의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인식론, 다른 지식을 통해서 형성된다. 불구의 존재들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의 자리에서 ‘차이’의 의미를 익혔고, 또 다른 불구의 존재들의 삶과 경험을 통해 차별을 해석할 수 있는 인식론을 만들어 갔으며, 자기 해방을 위한 정치를 서로에게 배웠다. 이러한 앎의 형성 과정 자체가 “흔들림 속에서 끝없는 질문과 토론”의 지난한 과정이었으며, 이 치열한 지적 과정을 통해 공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구의 정치」가 강조하는 ‘정체성의 변화’란 서로 이질적인 불구의 존재들이 긴장감 속에서도 함께 하면서 경험하는 정서적이고 지적인 상호 작용, 즉 공감의 효과이며 연대의 결과이다. 그래서 이러한 공감, 연대, 정체성의 변화는 교차성 페미니즘이 저항의 정치학으로 강조하는 ‘횡단의 정치’와 공명한다.
"횡단의 정치에서, 흑인 여성이나 여러 다른 집단은 “정치적 행위자”이며, 흑인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화자”가 된다. 횡단의 정치에서 참여자는 자신의 특정한 집단적 역사에 “뿌리”를 두는 동시에, 다층적 차이를 넘어선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나와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콜린스, 408)
횡단의 정치는 지배 매트릭스 내에서 서로 다른 위치로 인해 상대적으로 각이한 억압을 당하는 각각의 피억압 집단들이 해방을 위해 함께 수행하는 정치이다. 그래서 횡단의 정치는 서로 차이나는 정치적 위치(position)를 가진 정치적 행위자들의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이 횡단적 대화는 “‘정치적 행위자’의 구체적인 입장을 고려한 연대”(408)를 강조한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구체적 입장을 고려한다는 것이 각 입장의 고정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횡단의 정치에 함께 하는 각 집단들은 물론 “자신의 경험에 중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상대에게 감정이입하여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408) 억압당하는 집단이 자신의 입장에 중심을 두는 것이 “뿌리내림”이라면, 상대의 입장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 “전환”인 것이다.
횡단의 정치는 정체성을 포기하거나 부차화하지 않지만 절대화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정체성이 자기 해방을 위한 핵심적 입각점이라면 다른 정체성들 간의 상호 감정이입은 자기 해방을 위한 역량의 증폭점이다.
공감의 20주년 선언문은 불구의 정치를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말하기를 멈추지 않되, 우리의 차별과 억압만이 특별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들과 함께, 정상성과 보편을 의심하고 싸우는 이들과 함께 의존과 연대의 의미를 다시 쓰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장애여성은 자신들의 경험을 끊임없이 말하면서 자신들의 입장과 정체성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다. 하지만 장애여성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차별과 억압만이 특별하고 중요하다”며 자신의 경험에 고착되지도 않는다. 장애여성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들과 함께, 정상성과 보편을 의심하고 싸우는 이들과 함께 의존과 연대의 의미를 다시 쓰는 투쟁”을 통해 또한 자신의 입장을 전환한다.
이렇게 “불구의 정치”란 억압의 선별자 국가, 불구화-장치, 혹은 다양한 억압들의 조합을 통해 이루어진 역사적 지배 매트릭스에 의존에 바탕을 두고 있는 독립, 공감으로부터 출발하는 연대, 혹은 횡단의 정치를 통해서 저항하며 불구화된 모든 이의 해방을 함께 이룩하고자 하는 해방적 실천이다.
5.장애여성의 힘기르기 정치와 저항의 교차성
장애여성공감의 20년은 바로 이러한 불구의 정치를 실천해온 역사이기도 했다. 공감은 비장애인과 여성이라는 입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장애여성의 권리를 고민하며 투쟁해왔다. 그러한 투쟁의 형태는 다양했다. 장애여성의 독립생활(Independent Life, IL)운동, 춤과 연극 그리고 노래 등의 장애여성 문화운동, 교육운동, 장애여성연구, 그리고 장애여성을 억압하는 법제도 에 대한 직접행 방식의 저항 등을 통해 장애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구조에 대항하는 다양한 운동을 펼쳐왔다. 더불어 이 운동은 단지 전형적인 지배집단이나 억압세력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비장애인과 남성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기존의 저항운동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수행해 왔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반인권적 권력집행과 제도에 대항하여 왔다.
이는 장애여성들의 힘기르기 정치가 실천된 과정이기도 했다. 그녀들은 탈시설 생활 공동체, 문화활동모임, 공부모임, 자조모임 등의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서 ‘집단적 생존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자신들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바꾸어 가기 위한 ‘제도변혁을 위한 투쟁’을 해왔다. 콜린스가 흑인 여성들의 힘기르기 정치에서 발견한 ‘집단적 생존을 위한 투쟁’과 ‘제도변혁을 위한 투쟁’의 결합은 공감의 활동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공감의 20주년 선언문은 “불구의 정치”가 곧 장애여성의 실천이, 의존을 통한 독립, 갈등과 긴장 속에서 시작되는 공감에 기초한 연대의 정치, 즉 횡단의 정치임을 보여준다. 이는 억압만이 아니라 저항 역시 교차적으로 구성됨을 보여준다. 다양한 불구의 존재들이 의존하고 연대하는 과정은 곧 저항의 교차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의 교차성을 통해 장애여성들은 힘기르기의 정치를 실행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장애여성공감. 2018.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 장애여성공감 웹소식지. 2018년 2월호.
박미선. 2014. 「여성주의 좌파이론을 향해서 : 흑인 페미니즘 사상과 교차성 이론」. 『진보평론』. 59호.
버틀러, 주디스. 2016. 『혐오발언』. 유민석 옮김. 알렙.
콜린스, 페트리샤 힐. 2008. 『흑인 페미니즘 사상』. 박미선, 주혜연 옮김. 도서출판 여이연.
1) 버틀러는 “되받아야쳐 말하기”(speaking back)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흰다. "만일 동일한 발언이 되받아쳐 말하기(speaking back)와 그것으로 말하기(speaking through)의 계기가 됨으로써 그 발언을 건네받은 자에 의해 차지되고 변하게 된다면, 인종차별 발언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인종차별적 기원으로부터 이탈되지 않을까? 의도가 그것이 '마음에 품고 있던' 그 행동에서 실현되고 해석이 의도 그 자체에 의해 미리 통제되는 일종의 효과적인 말하기를 보장하려는 노력은 더이상 진실이 아니며 전혀 진실이 아니었을 언어에 대한 어떤 주권적인 그림으로 회귀하려는 희망적인 노력에 해당하며,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들 때문에 진실이 아닌 것을 환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발언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은 그런 발언과 관련된 권위의 장소를 변경시키는 하나의 방식이다." (버틀러, 178)
2) 이 글에서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로부터 직접 인용할 경우 따로 서지사항을 표시하지 않고 인용한다. 인용문 중 내주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은 모두 이 글로부터의 인용이다.
3) 나는 콜린스의 지배 매트릭스 개념이 가진 추상성-일반성과 역사성-구체성이라는 이중적 차원이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라는 독특한 정치적 실천 속에서 형성된 개념을 탈맥락화해버리는 손쉬운 전유를 막아준다고 생각한다. 가령 2019년 서교인문사회연구실의 서교연 포럼에서 발표에서 교차성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어떤 학자는 콜린스의 지배 매트릭스 개념에서 총체화하는 이론이 갖는 탈맥락화 효과에 대한 우려를 표시한바 있다. 즉 페미니스트 교차성이론은 흑인 여성의 억압과 저항이라는 구체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고 이 경험을 둘러싼 독특한 정치적 실천을 위한 이론이기에 생태문제나 식민주의 문제 등과 같은 다른 정치적 맥락이나 권력관계의 분석에 활용하는 것의 적절성에 대한 회의를 조심스럽게 표현한바 있다. 하지만 콜린스의 지배 매트릭스 개념은 그것의 추상이 이론적 사고의 공간에서만 유의미하며, 실제 현실에서 작동할 때에는 언제나 억압들의 조합 형태라는 역사적 구체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함의를 가진다. 다시 말해 지배 매트릭스 개념의 활용은 미국 흑인 여성이 경험하는 억압들의 역사적 조합 방식과 다른 억압의 역사적 조합 방식을 통해서 그들의 경험과는 차이를 갖는 억압을 분석하고 저항의 지점을 사고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4) 콜린스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통하여 권력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을 종합하고자 시도했다고 한다. 권력에 대한 첫 번째 접근법이 바로 본문에서 언급한 권력과 저항의 변증법이다. 권력에 대한 두 번째 접근법은 “권력을 집단의 소유물이 아니라, 특정한 지배의 매트릭스 안에서 순환하는 무형적 실체이며 다양한 위치에서 개개인들이 맺는 관계”(447)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권력은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관철하기 위한 고정된 수단과 같은 것이 아니라 지배 매트릭 내에서 만들어지는 유동적인 위치들의 관계를 뜻한다. 이는 권력을 소유물이 아니라 전략적 관계로 파악하는 푸코의 권력 개념을 차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콜린스는 이를 통해 푸코보다는 인간의 주체성과 행위자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이러한 접근법은 지배의 매트릭스 안에서 개개인의 주체성이 인간의 행위성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강조”(447)하는 관점이다. 이 두 관점은 흑인 여성의 해방적 실천에서 나타나는 ‘의식’에서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12장 “힘기르기의 정치를 향하여”를 참조하라.
5) 계급문제나 민주정부 집권 등과 같은 의제를 내세우는 남성 진보 운동가 및 지식인들의 입장에 대하여 페미니즘 의제의 중심성을 포기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들을 향해 진보 진영의 남성들은 페미니즘 내의 구별을 시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김규항의 「그 페미니즘」(<씨네21>, 2002년 4월호)이다. 이 글에서 김규항은 어떤 페미니즘은 “모든 사회적 억압의 출발점인 계급문제에는 정말이지 무관심하다”고 비판한다. 그러한 페미니즘을 김규항은 ‘주류 페미니즘’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구성원들은 “주류 페미니즘이 그런 저급한 사회의식에 머무는 실제 이유는 그 페미니즘의 주인공들이 작가, 언론인, 교수(강사) 따위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이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다. 김규항의 이 글 이후 최보은을 시작으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김규항의 아전인수격 페미니즘 감별 및 나이브한 페미니즘 분류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다. 이후로도 이는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 논쟁을 경유하여, 이선옥의 페미니즘 비판 칼럼이나 오세라비의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를 경유하면서 재생산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페미니즘 내부의 차이와 긴장을 손쉽게 지적하는 것이 반페미니스트 담론 정치가될 가능성이 적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역사를 보면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항상 동일한 입장을 취하여 온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생물학적 여성만을 챙긴다는 입장의 여성대중운동이 출현하면서 페미니즘 내부의 차이는 단지 이론적 입장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렛팸vs쓰까’라는 구도 형성되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논쟁은 대중운동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기도 하지만 페미니즘 이론 진영 내에서도 전개되었다. 가령 윤김지영, 정승화 등과 같은 논자들은 레디칼 페미니즘을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글을 쓰면서 소위 렛팸의 이론가로 부상했다. 반면 타리나 나영 등은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면서 생물학적 정체성이라는 단일입장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여성정체성 및 페미니즘 운동을 옹호하였다.
2018년에 작성된 공감의 「불구의 정치」 작성에는 바로 페미니즘 내부의 입장 차이라는 배경이 있다. 나는 계급문제가 사회적 억압의 근원이고 성공한 여성들의 주류 페미니즘은 천박한 사회인식을 가졌다는 식의 저급한 페미니즘 비판이나 페미니즘이아니라 이퀄리즘이야 진짜 페미니즘이라는 식의 페미니즘을 호도하는 선동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물학적 여성만을 진짜 여성으로 환원하면서 다른 억압들을 부차화하거나 무시하는 입장과 페미니즘 정치학을 구별지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