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전환 이후 새로운 인권운동의 흐름
(1)자유권운동
전개과정
자유권의 경우 새로운 인권운동은 1세대인권운동의 흐름을 기본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나 양심수 문제 등과 관련된 국가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운동은 90년대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다. 다만 1세대 인권운동이 자유권을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민중운동 등 활동가들의 인권문제를 중심으로 전개해왔다면 새로운 인권운동은 자유권을 사회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일반 영역으로 확대해갔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가령 재소자 인권문제도 양심수만이 아니라 소위 ‘일반 잡범’이라고 불리는 수형자 일반의 권리문제로 확장한 것이다. 또한 국가보안법 등 반체제적 활동에 대한 악업적 국가기구의 폭력만이 아니라 성적 표현의 자유와 같은 활동에서도 국가기구에 의한 자유권 타압에 대한 저항을 확장해 갔다.
90년대 자유권 운동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또 다른 중요한 점은 기술 환경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자유권 의제 및 개념의 등장이었다. 통칭 정보인권으로 규정될 수 있는 활동이 디지털 정보통신기술의 확산 및 이용과 관련하여 출현한 것이다. 전자신분증반대운동, 인터넷등급제 등 인터넷 감시반대 운동, NEIS반대 운동 등으로 정보인권운동이 드러났다. 이 활동에서 1996년 총파업 통신지원단 활동을 밑거름 삼아 출범한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국가폭력에 대항하여 자유를 지키려는 운동의 성격을 이 글에서는 ‘반억압’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자유권운동의 흐름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짚어볼 점은 자유권이라는 권리의 주체가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장된 점이다. 이는 ‘반차별’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집약되는 운동이 보여주는 바이다. 국내에서 반차별운동은 1994년 성소수자 단체의 결성으로부터 본격화된 성수자운동이나 이주민인권운동, 장애인인권운동, 청소년인권운동 등 특정 정체성 집단이 그 정체성으로 인해 당하는 차별과 배제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각 정체성집단의 반차별운동이 인권운동진영의 주요 의제로 부상하게 된 것은 노무현 정권 말기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 국면이었다.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법안에는 차별금지 사유로 ‘성적지향, 학력 및 병력, 출신국가, 언어, 범죄전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이 누락되었다. 이렇게 주요 차별금지사유가 누락되자 성소수자단체들로부터 저항운동이 시작되었고, 인권운동 진영은 온전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목표로 한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리하여 반차별공동행동에서 차별금지법제정연대로 이어지는 활동이 전개된다. 반차별운동은 자유권 운동의 맥락에서 보자면 통상 개인적 권리의 대표적 영역으로 여겨졌던 자유권이 단지 원자적 개인의 독립성 및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자유주의적 권리에 그치지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 집단의 권리이기도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자유권운동의 쟁점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통념은 양자가 상호보완적 관계 내지는 상호적 강화의 관계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특성을 인권의 내용적 특성이 보완한다거나 민주주의의가 발전하면 인권 역시 보장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근대 민주주의 핵심 이론가들로 꼽히는 로크나 루소, 혹은 현대 민주주의 이론가들의 대표자들인 롤스나 하버마스는 동시에 인권론의 이론적 전거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과연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계가 이렇게 상호보완적이거나 상호강화적이기만 한 것일까? 민주주의와의 인권의 만남은 항상 조화롭고 행복한 만남이기만 한 것일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반차별운동이 다수대중에 의해 좌절을 경험하는 상황이다. 차별금지법제정이 실패로 끝난 지금까지의 역사는 이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2007년에도, 2011년에도, 2013년에도 차별금지법에 정부의 원안으로부터 후퇴허거나, 의원들의 입법안이 철회되는 사태의 배경에는 차별금지법제정에 대한 대중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다. 이는 2014년 서울시인권헌장이 대중적 반대운동에 부딪혀 폐기되었을 때와 충남인권조례의 폐지에서도 우리가 경험한 사태이다.
물론 차별금지법, 서울시인권헌장을 반대하고 충남인권조례를 폐기하도록 선동하고 공세적으로 활동한 세력을 다수 대중이 아니라 보수기독교세력이거나 일부 혐오세력으로 규정하고 축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일부 혐오세력이나 보수기독교세력에 맞서 차별금지법, 서울시인권헌장, 충남인권조례등을 옹호하고 차별금지 및 소수자 정체성 집단의 자유를 옹호하는 대중이 그 ‘일부 세력’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면 과연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반차별제도들이 무력화되었을까? 이 사태는 차별에 반대하는 대중보다 차별에 찬성하는 대중이 규모에 있어서도 활동의 강도에서도 더 ‘다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민주주의의 맹점이라는 쟁점을 제기한다. 인민의 지배로서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모든 사람이 정치적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전근대적 정치의 지배적 형태였던 군주정이나 귀족정은 정치적 결정 능력이 불평등하고, 그러한 결정능력에 최적화된 소수의 사람들4)만이 통치를 할 수 있다는 논리에 입각하여 구축된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정치적 결정 능력의 동등성을 주장하였고 그리하여 모든 사람, 즉 인민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민주주의는 평등에 대한 지지를 인권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동등한 정치적 결정능력을 가진 인민이 항상 모든 정치적 사안에서 동일한 의견을 제출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의견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때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사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두 번째 원리를 채택하게 된다. 이 두 번째 원리는 모든 사람이 정치적 결정능력에서 동등하다는 첫 번째 원리로부터 연역되는 것이다. 동등한 이들 사이에서 이견이 발생할 경우 더 많은 이들이 지지하는 의견이 더욱 타당하다는 논리이다.
문제는 여기서 더 많은 이들이 지지하는 정치적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이라는 보장을 민주주의는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수가 정의롭지 못한 결정을 하거나 합리적이지 못한 결정을 할 수 있다. 이는 나치의 집권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도 여러 차례 발생한 사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맹점은 플라톤을 비롯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오래된 비판이 제기한 문제이다. 차별금지법제정에 대한 대중적 반대나 충남인권조례폐지 운동은 바로 다수에 의한 결정이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는 민주주의의 맹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태일 것이다.
정치사상사에서는 민주주의의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법치주의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가령 루소의 입법자론이 이를 잘 보여준다. 입법자는 인민이 아니라 인민 외부에서 온 현명한 자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민 외부의 현명한자가 제정한 법이 민주적 공동체의 의사결정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결국 인민보다 더 우월한 자가 존재함을 승인하며 평등의 원칙을 위배하는 논리가 된다. 우리의 맥락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 조직화된 상대적 다수 대중의 반대나 불특정 다수 대중의 여론에 반하여 인권의 원칙에 입각한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국제인권기준과 같은 인권의 원칙에 입각한 결정이기에 이는 타당한 결정일까? 아니면 다수에 의한 결정이란 민주주의의 원리에 어긋나기에 부당한 결정일까?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를 거치면서 인권운동의 자유권 의제가 확장되는 성과만큼이나 인권운동이 새로이 마주한 곤란한 문제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진보적 인권운동은 자신의 활동원리를 민주주의의 원리와 동일시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계에 대한 입장은 정리되어 있는 것일까?
인권운동이 ‘인권독재’를 꿈꾸지 않는 한 반인권적 감수성을 가진 대중들이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이 인권의 원칙에 반하는 결정을 할 때 그 집합적 행위를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무조건 승인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반인권적 감수성이 확산되어가는 상황에서 인권운동은 어떻게 모든 인간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갈 수 있을까? 즉 인권운동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변증법을 사고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을 갖고 있는 것일까?
(2)사회권운동
전개과정
사회권 운동의 흐름은 크게 세 국면으로 나뉘어 진다. 첫 번째는 국제인권기준의 사회권 관련 문서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활동이 중심이 되는 국면이다. 이 활동은 주로 유엔에 국내 사회권 관련 실태를 보고하여 권고를 이끌어 내거나, 사회권 규약이나 유엔의 인권관련 선언문을 소개 및 해설하거나, 국제인권기준에 비추어 국내의 사회권 실태를 조사, 평가하고 개선방향을 제시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두 번째는 사회적 권리박탈 현장에서 벌어지는 당사자들의 투쟁에 결합하고 연대하는 활동이 주된 국면이었다. 정리해고자반대투쟁, 비정규직 권리투쟁, 노동자 감시 및 차별 반대투쟁 등 노동권 확보투쟁이나 주거, 의료, 물 등의 공공성 강화투쟁 등이 이 국면의 주된 활동이었다. 세 번째는 반체제적 사회운동과의 결합되는 국면이다. 노무현 정권 후기에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노골적 국가폭력에 의한 총체적 권리박탈이 빈번해졌고 이는 단지 개인의 자유권이나 사회권과 등 개념적 수준에서 구별되는 권리침해만이 아니라 체제의 성격으로 인해 벌어지는 권리박탈의 문제였다. 이에 대한 저항은 개별 권리침해 사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침해를 지속적으로 반복되게 하는 체제를 바꿔야 하는 운동이라는 인식 속에서 인권운동이 권리박탁의 당사자들 및 여타 사회운동과 적극적으로 연대투쟁을 전개해 갔다. 평택미군기지저지투쟁, 아셈, 한미FTA 반대투쟁, 용산참사, 쌍용자동차정리해고, 제주도 강정마을 미군기저건설, 밀양송전탑, 그리고 세월호참사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과 결부된 투쟁이 중심이 되는 국면이다.
사회권운동의 쟁점
사회권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제인권기준에 입각한 사회권운동은 점점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오히려 구체적인 권리박탈의 현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사회운동에 연대하는 방향으로 사회권운동은 전환되어 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사회권조약 자체의 현실적 효력 부재가 가장 클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권리에 대한 법형식적 규정으로서 국제인권기준 상의 사회권은 사회적 권리를 침해하거나 박탈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조건에 대하여 이론적 인식체계와 분석 도구들을 담보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인권운동에 사회권운동을 등장시킨 것은 운동 사회 내 인식의 큰 전환이 필요한 것이었고, 사회권 운동으로 인권침해의 구조적 질서를 보여주려”(최은아 인터뷰, 2016년 인터뷰)했었던 의도와 달리 자유권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들의 법률적 규정은 ‘인권침해의 구조적 질서’를 분석하고 그 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 시야를 제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에 대항 하는 투쟁, 나아가서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고자 하는 변혁운동적 문제설정 속에서 한국의 진보적 인권운동은 국제인권기준상의 사회권에 주목하였으나 그 사회권목록들은 자본주의 체제변혁이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형성된 개념틀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회권 관련 국제인권기준들은 체제의 모순을 분석하고 변혁의 계기를 드러낼 수 있는 이론적 전망, 분석 도구, 운동 전략 등을 제공해주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의식과 이론적 도구 사이의 불일치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진보적 인권운동 진영의 담론 속에서도 발견된다. 『인간답게 살 권리』의 부록으로 실린 ‘인권운동의 과제’에는 사회권운동을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로 ‘인권담론의 재구성’을 제시한다. 이때 인권담론의 재구성이란 ‘사회권 침해에 대한 구조적 접근’이 요구되며, 이는 경제적 세계화를 비롯한 경제질서의 변화가 어떻게 사회권 침해의 요인이 되는지를 분석하며, 나아가 세계인권선을 비롯한 국제인권규범이 당연히 전제하는 재산권과 사회권을 충돌을 극복할 인권이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인권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현재 인권운동에 대한 고민을 듣는 인터뷰에서도 드러난다. 현지 인권활동에서 필요한 부분에 대한 인권활동가들의 고민을 옮겨본다.
“맨땅에 헤딩을 해왔다. 구조적으로 진득하게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 테크니컬한 부분에서 자문을 받을 수 있지만 활동가만큼 제대로 된 논거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 정부쪽에 들어간 사람이 많고 학자들 속에서 소통을 하고 뭔가를 만드는 작업들도 잘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연구자 집단이 없는 요인이다.” ; “왜 우리가 사회를 바꿔야 하고 어떠한 무슨 사회로의 변화인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줄 수 있는 집단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당사자주의의 한계와 논리를 극복할 수 있다.” ; “인권연구는 기존 인권개념의 문제를 드러내고 재구성하는 작업. 인권이 주창하는 가치들에 대한 철학적 정립을 해줘야 한다. 연구가 너무 법에 빠져있다.”; “학자가 없다보니 이론적 기반에 대한 공부도 활동가가 해야 한다.” (인권연구소창, 『인권활동가 50인이 말하는 한국인권운동의 현황』, 2007)
즉 한국사회라는 구체적 현실에 기반을 둔 인권이론의 필요하다는 말이다. 사회권운동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변혁운동적 문제의식에 부합하는 인권담론의 재구성, 사회경제적 권리박탈의 현장에서 전개되는 사회권운동의 현실에 기반 한 인권이론의 구축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진보적 인권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작동하는 변증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진보적 인권운동의 형성 과정을 추동했던 계기 중 두 가지, 즉 변혁운동의 계기와 국제인권기준의 계기 사이의 변증법이다. 사회권운동의 문제의식은 변혁운동의 계기로부터 추동되었으나 그 운동의 언어, 혹은 이론적, 전략적 근거는 변혁운동적 계기로부터 제공된 것이 아니라 국제인권기준의 계기로부터 제공되었다. 그러나 국제인권기준은 성격상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변혁과 같은 문제설정 속에서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가령 유엔은 반드시 자본주의의 유지가 그 존재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세계체계 자체를 변혁하겠다는 지향을 가진 기구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 인권운동은 일국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변혁지향이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사회권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하지만 문제설정(자본주의체제변혁)과 그 문제설정을 작동시키기 위한 구체적 작업의 수단(국제인권기준) 사이의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사회권운동은 점차로 국제인권기준상의 사회권으로부터 탈피하여 현장 중심의 사회적 권리투쟁에 연대하고 개입하는 방향으로 사회권운동을 전개해 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운동에 걸 맞는 사회권이론의 전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