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주디스 버틀러가 10월 7일 하마스의 군사행동이 벌어진 직후 작성한 글이다. 따라서 글의 논조는 하버드 팔레스타인 연대 위원회를 비롯해 하마스의 행동을 변호하는 입장들을 비판하고 하마스의 행위를 규탄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이스라엘의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 이해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략이 본격화되고 민간인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버틀러는 보다 이스라엘을 강하게 비판하는 논조로 이동했다. 버틀러는 다른 유태인 지식인들과 함께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휴전을 요구했으며[각주:1], 미국 언론 <데모크라시 나우(Democracy Now)>와의 인터뷰에서도 이스라엘의 대량학살을 비판했다. 이 글을 읽을 때 버틀러의 이러한 구체적인 논조 이동 역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가장 공개적이고 긴급하게 논의되어야 하는 것들은 현재 우리의 프레임(framework) 내에서는 논의가 어렵다. 당면한 문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고 싶지만, 해야 할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프레임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나는 폭력, 현재의 폭력, 폭력의 역사와 폭력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누군가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저지르는 대규모 폭격과 살상을 역사의 일부로 이해하며 이 폭력을 기록하고자 한다면, '상대화' 또는 '맥락화'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규탄을 하든 용인을 하든, 뭐든 말이 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요구되는 것의 전부일까? 사실 나는 하마스가 저지른 폭력을 그 어떠한 조건 없이 규탄한다. 이것은 끔찍하고 역겨운 학살이다. 이것이 나의 주된 생각이고, 이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 다른 생각들도 있다.
거의 즉각적으로, 사람들은 당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알고 싶어하며, 당연하게도 이런 살인에 대해 유일하게 내비칠 수 있는 반응은 의심의 여지없이 비난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또는 역사적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강한 윤리적 규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할까?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규탄하고 있는지, 그 규탄의 범위는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우리가 반대하는 정치적 구성체(formation) 또는 구성체들(formations)에 대해 설명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묻는 게 정말 문제를 상대화하는 것일까?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 설명하지 못한 채 반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특히 지식이 ‘상대화’ 하는 기능과 판단 능력 약화에만 복무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해를 거부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더더욱 이상하다. 만약 우리의 규탄을 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조명하는 사태만큼 끔찍한 범죄에까지 확장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반드시 요구된다면 어떠한가? 우리의 비난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고 끝날 것인가? 도덕적, 정치적 규탄에 수반될 상황에 대한 비판적이고 정보에 입각한 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현 상황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마치 흉악한 범죄에 동조하는 도덕적 실패자처럼 비춰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내고서 말이다.
하마스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른 폭력의 역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변질된 형태의 윤리적 추론을 사용한다. 물론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력이 압도적인 수준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무자비한 폭격, 대상의 나이에 상관없이 집과 거리에서 자행되는 살인, 감옥에서 행해지는 고문, 가자지구에 식량을 통제하여 아사상태로 만드는 행위, 거주지 강탈. 이러한 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아파르트헤이트, 식민 통치, 무국적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상대로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하버드 팔레스타인 연대 위원회(the Harvard Palestine Solidarity Committee)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하마스의 치명적인 공격에 대해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만이 문제다'(‘the apartheid regime is the only one to blame’) 라고 주장하는 성명을 냈을 때, 이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하마스가 져야 할 끔찍한 살상에 대한 책임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시에 하버드 팔레스타인 연대 위원회와 그 구성원들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협박을 받을 이유도 없다. 물론, 하버드 팔레스타인 연대 위원회가 이 지역의 폭력의 역사를 짚어 내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조직적인 토지 탈취부터 일상적인 공습, 무차별적 구금과 군 검문, 강제 가족 분리, 표적 살해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죽어가거나 느닷없이 죽는, 죽음의 상태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반드시 언급돼야 하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정확한 설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마스의 폭력이 곧 이스라엘의 폭력의 다른 이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슬로 협정[각주:2]이 깨지고 이스라엘 점령하에 살고 있는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서서히 죽어가거나 느닷없이 죽는, 죽음의 상태'에 놓인 상황에서, 즉 적법한 절차 없이 감시가 계속되고 행정 구금의 위협이 가해지며,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의약품, 식량, 물 공급을 중단하는 봉쇄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하마스와 같은 단체가 왜 힘을 얻게 되었는지 이해도를 높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마스의 역사를 참고한다고 해서 하마스의 행동에 대한 윤리적 또는 정치적 정당성까지 얻게 되지는 않는다. 하버드 팔레스타인 연대 위원회가 요청한 것처럼, 팔레스타인의 폭력을 이스라엘의 폭력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라고 한다면, 도덕적 과실의 원천은 단 하나뿐이며 이 폭력행위조차 팔레스타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는 팔레스타인의 행위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방법이 아니다. 식민 통치를 끝내고, 이스라엘 감옥에서 행해지는 무차별적 체포와 고문을 중단하고, 국민국가의 국경통제를 통해 물과 식량이 배급되는 가자지구 봉쇄를 끝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무엇인지 고려하려면, 만연하고 잔인한 이스라엘의 폭력을 이해하는 것과 폭력에 대한 어떠한 정당화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이 지역의 모든 주민들에게 어떤 세상이 가능할지에 대한 질문은 정착민-식민(settler-colonial) 통치를 종식시키는 방법에 달려 있다. 하마스는 이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끔찍하고 경악스러운 해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다른 답안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점령'을 언급하는 것이 금지된다면(현대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Denkverbot’[각주:3]), 이스라엘의 군사 통치가 인종 분리주의인지 식민주의인지에 대한 논쟁조차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과거, 현재 혹은 미래를 이해할 수 있는 희망이 없다. 미디어를 통해 대학살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은 절망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이 절망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미디어를 통해 이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절망적인 도덕적 분노의 자극과 찰나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정치적 도덕성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는 인내심과 용기가 필요한 배움과 명명(naming)의 길이다. 이를 통해 윤리적 규탄은 윤리적 비전을 동반할 수 있다.
나는 하마스가 가한 폭력에 반대하며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말은 도덕적,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규탄이 무엇을 전제하고 함축하고 있는지 대충 얼버무리지 않는다. 내 의견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윤리적 규탄은 반대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마 아니라고 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이나 하마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그들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규탄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현대 미디어의 재현에 기대어, 이것이 실제로 옳고 유용한 것인지, 역사를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지 않고 거기서 멈춘다면 그 사람은 무지를 받아들이고 제시된 프레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바쁘고 모두가 역사학자나 사회학자가 될 수는 없다. 무지를 받아들이고 제시된 프레임을 신뢰하면서 살아도 되고, 그렇게 생각해도 된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무엇일까?
우리의 도덕성과 정치가 규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면 어떨까? 어떤 삶의 형태가 이 지역을 이런 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지를 계속 묻는다면 어떨까? 무자비한 범죄를 규탄하는 것 외에도 이런 종류의 폭력이 종식되는 미래를 만들고자 한다면 어떨까? 이는 일시적인 규탄을 넘어서는 규범적인 열망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슬로 협정 이후 가자지구 자치권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장 단체로 성장한 하마스, 다른 전술과 목표를 가지고 결성된 팔레스타인의 단체들, 식민 통치와 만연한 군사 및 경찰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자유와 정치적 자결권을 향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열망에 대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도 하마스가 해체되거나 하마스가 공존을 위한 비폭력 열망을 가진 단체로 대체되는 자유로운 팔레스타인을 위한 투쟁의 일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규탄하는 것에만 도덕적 입장을 국한시킨 사람들에게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종류의 도덕적 분노는 틀림없이 반지성적이면서도 현재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분노는 어떻게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지, 폭력의 미래가 아닌 다른 미래를 향해 상황이 바뀔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을 역사책으로 이끌 수도 있다. 이것이 윤리적으로 문제적인 ‘맥락화’의 행위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책임을 전가하거나 면죄부를 주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맥락화 형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가 이 두 가지 형태의 맥락화를 구분할 수 있을까? 끔찍한 폭력을 맥락화하는 것이 폭력을 회피하거나 더 심하게는 합리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모든 형태의 맥락화가 그런 식의 윤리적 상대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버드 팔레스타인 연대 위원회가 하마스의 공격에 대해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만이 문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형식의 윤리적 책임론에 동의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역사를 배워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공포스러운 현재의 순간을 넘어서서 그 공포를 부정하지 않는 동시에 그 공포가 우리가 재현하고, 인지하고, 반대해야 할 모든 공포를 대표하지 않도록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의 현대 미디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수십년간 겪어온 폭격, 무차별적 공격, 체포 및 살해의 공포를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미디어에서 지난 70년간의 공포보다 최근 며칠간의 공포를 다루는 것이 더욱 윤리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이 순간의 윤리적 반응은 점령당한 팔레스타인과 강제 이주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견뎌온 극단적인 불의와 지금 이 순간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재(人災)와 인명 손실에 대한 이해를 덮어버릴 위험이 있다. 몇몇 사람들은 하마스가 저지른 폭력 행위에 대해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 하마스에게 면죄부를 주는 데 사용되거나, 하마스가 저지른 끔찍한 일이 아닌, ‘사건이 발생하게 된 맥락’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게 될까 우려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를 맥락화로 이끄는 것이 그 공포 자체 라면 어떨까? 이 공포는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날까? 언론은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프레임을 제공한다. 사실상 언론은 상황을 미리 파악한 셈이다. 만약 가자지구가 점령하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거나 ‘창살 없는 감옥’으로 명명되었다면, 다른 해설이 따라왔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상황설명 같아 보이지만, 언어는 우리가 무엇을 말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서술할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한다. 그렇다, 언어는 무언가를 설명 할 수는 있지만, 말할 수 있는 것에 부과된 틀에 들어 맞을 때만 힘을 얻을 수 있다. 올해 혹은 점령 기간 동안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몇명의 팔레스타인 어린이와 청소년이 살해당했는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이 정보가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과 이스라엘인에 대한 살해에 대해 알거나 평가하는 데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폭력과 애도, 분노의 역사를 알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폭력과 애도, 분노의 역사만을 알고 싶은 것이다. 스스로를 ‘반시온주의자(anti-Zionist)’라고 칭하는 이스라엘 친구는 가족과 친구들을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우리는 그녀를 위로해야 하고 나도 당연히 그녀를 향한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이는 명백히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겪은 공포, 친구와 가족의 상실을 다른 한편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느꼈을 것이라고, 혹은 그들이 수년간의 폭격, 감금, 군사 폭력을 겪어 왔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나 또한 나같은 사람들에게 가해진 잔혹한 행위로 인해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트라우마와 함께 살고 있는 유대인이다. 하지만 그러한 잔혹 행위들은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가해졌다. 나는 내가 본 잔혹한 행위들을 명명하기 위해 이 얼굴, 저 이름과 나를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쓴다.
결국 문제는 단순히 공감의 실패가 아니다. 공감은 주로 동일시의 성취나 나와 타인의 경험 사이의 번역을 가능하게 하는 프레임내에서 만들어 진다. 만약 지배적인 프레임이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사람들의 삶을 더욱 애도할만한(grievable)것으로 여긴다면, 다른 일련의 죽음보다 특정한 일련의 죽음을 더욱 끔찍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누구의 삶이 애도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묻는 것은 누구의 삶이 더 소중하냐는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여기에 인종차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이스라엘 국방장관의 말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짐승들’이라면, 만약 바이든이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대인’을 대표한다면 (반동세력의 요구대로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이스라엘로 통합시킨 것이다.), 이 장면에서 애도할 수 있는 사람들, 비통할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재현되는 이들은, 오로지 이스라엘인들 뿐이다. ‘전쟁’이라는 장(場, scene)은 유대인들과 이들을 찾아 죽이려는 짐승들로 연출된다.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주의의 사슬을 끊어내려는 사람들을 짐승에 비유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도 살인할 때 ‘짐승’ 취급을 당했던가? 동시대 폭력에 대한 인종차별적 프레이밍은 ‘문명화된 것’과 ‘문명’을 보존하기 위해 지배되거나 파괴되어야만 하는 ‘짐승들’ 간의 식민주의적 대립의 핵심을 반복한다. 만약 우리가 윤리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와중에 이 프레임을 받아들인다면, [단순히] 발화를 넘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으로까지 확장되는 인종차별의 한 형태에 연루되어 있는 우리 스스로를 발견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급진적인 해결책이 반드시 뒤따라와야 한다.
만약 윤리적 규탄이 어떠한 맥락이나 지식과 무관한 명백하고, 시의적절한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규탄이 이루어지는 조건, 대안들이 조율되는 단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최근의 상황에서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해결되어야 하는 구조적 문제이자 극복되어야 하는 지속적인 부정의의 한 부분인 식민주의 인종차별의 형태를 되풀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윤리적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부정의의 역사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된다. 이는 또 다른 불의를 저지를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며, 언젠가 이 확고하지 않은 토대 위에 서 있는 우리의 확신은 흔들리게 될 것이다. 생각하고, 인지하고, 판단하는 힘을 잃지 않고 윤리적으로 가증스러운 행위를 규탄할 수는 없는 걸까? 당연히 우리는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미디어를 통해 목격하고 있는 폭력 행위들은 끔찍하다. 미디어의 관심이 높아진 이 순간, 우리가 보는 폭력만이 우리가 아는 폭력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 폭력을 개탄스러워하며 우리의 공포감을 표출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나는 며칠간 속이 메스꺼웠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대가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네타냐후의 대량 학살에 관한 수사(rhetoric)가 팔레스타인인 대량 학살로 현실화될지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나는 상대주의와 평등함에 대한 논쟁에 얽매이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잃은 생명과 가자지구에서 잃은 생명을 조건 없이 애도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쩌면 더 넓은 애도의 범위는 평등의 더욱 실질적인 이상을 뒷받침할지도 모른다. 이 이상은 삶의 평등한 애도가능성을 깨닫고 이들이 죽어서는 안됐다고 분노하는 것, 죽은 자들이 더 많은 삶을 누리고 그들의 삶에 대해 평등하게 인정받을 자격이 있었다는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이 문서화했듯, 이스라엘군과 정착민들이 최근의 사태가 시작되기도 전인 2008년부터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3800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살해한 사실을 모른 채 어떻게 미래의 평등한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들을 위한 이 세상의 애도는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이 하마스에 ‘복수’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시작한 후로 수백명의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죽었고, 더 많은 이들이 며칠, 몇 주 안에 죽게 될 것이다.
식민지 폭력의 역사를 배우고 보도와 설명을 위한 언어와 서사, 현재 작용하고 있는 프레임을 검토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우리의 윤리적 입장을 위협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중요하지만 현존하는 폭력을 합리화하거나 앞으로의 폭력을 허가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지식의 목표는 현재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 프레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미 받아들인 윤리적 반대 입장에 추가해야 할 윤리적 반대 입장이 더 있을 수 있으며, 여기에는 이 지역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짓누르고, 애도할 권리, 분노와 연대를 인지하고 표현할 권리, 자유로운 미래를 향해 스스로 길을 찾을 권리를 빼앗는 군사 및 경찰 폭력에 대한 반대도 포함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비폭력의 정치가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절대적인 원칙으로 작동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폭력의 정치를 옹호한다. 나는 비폭력을 실천하는 해방 투쟁이 우리 모두가 살고 싶은 비폭력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나는 폭력을 명백히 규탄하는 동시에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 하마스와 같은 집단이 사라지고 점령이 종식되며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자유와 정의가 번성할 수 있는 진정한 평등과 정의를 위한 상상과 투쟁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평등과 정의 없이, 폭력으로 건국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자행한 국가폭력이 종식되지 않고서는 불평등, 권리박탈, 인종차별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정상화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서의 '평화'가 아닌, 진정한 평화의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는 검열이나 범죄화,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악의적인 고발을 당할 거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모든 형태의 국가폭력을 명명하고, 설명하고 반대할 수 없으면 실현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세상은 식민 통치의 정상화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자유를 지지하는 세상, 즉 자유와 비폭력, 평등과 정의 속에서 함께 살고자 하는 그 땅의 모든 주민들의 가장 깊은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이다. 많은 이들이 보기에 이 희망은 나이브해 보이고 심지어는 불가능해 보일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몇이라도 현존하고 있는 구조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이 희망을 강하게 붙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우리들의 시인과 우리들의 몽상가, 길들여지지 않은 바보들, 사람을 모을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