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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산업재해는 어떻게 숨겨졌나

 

전주희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한국의 산재는 유별나다. 매년 2000명이 넘게 일하다 사망하는 수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22년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산업재해 현황분석」에 따르면 2,223명이 한해에 일터에서 사고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반면 산재사망을 제외하고 일하다 아프거나 다치는 산재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산재사고가 많다면 당연히 사망률도 그에 비례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은 산재사고는 매우 적은데 산재사망률은 높게 나온다. 사망사고는 숨길 수가 없기 때문에 통계에 잡히지만 사망이 아닌 다치거나(사고로 인한 산재) 아픈(업무상 질병 재해) 경우 산재가 광범위하게 은폐되면서 산재통계가 왜곡된다.

 

 

숨겨진 위험, 구조화된 위험

 

산재은폐는 어느 나라나 존재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산재은폐는 장기간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의도적으로 숨겨진 산재이다 보니 정확한 통계를 내기 어렵지만 ‘은폐되는 산재 건수가 전체의 66.6%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김정우, 「노동조합은 산업재해 발생과 은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산업노동연구>27권1호, 한국산업노동학회, 2021)가 있고, 국민권익위원회에서도 산재 은폐율이 최소 54.8%에서 93%에 달한다는 연구결과(「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 개선방안」, 2014)를 내놓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수치는 과소추정된 것일 수 있다.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이나 아예 외주화된 업체 소속의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의 산재은폐율은 정규직보다 더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산재의 특징은 작업장의 위험이 숨겨진 채로 장시간 구조화되어 있는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숨겨진 위험이 드러나지 않은 채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은 위험이 해결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기보다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어 위험이 자연화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위험의 자연화’는 작업장에서 ‘위험은 당연한 것이다. 그 위험을 조심하지 않은 노동자 책임이다’는 식의 위험에 대한 전도된 인식이 고착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하청노동자 김용균의 사고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하청노동자들을 만났을 때, 하청노동자들은 원청의 관리자와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위험은 현장 나가자마자 다 위험하죠. 위험을 없앤다? 그럼 발전소를 싹 다 없애야죠?”(김용균 특조위 보고서, 187)

 

구조화된 위험 하에서 산업재해는 현장노동자의 책임이 된다. 사회적으로 ‘위험의 외주화’가 김용균 사망사고의 원인이라고 지목되는 와중에도 일부 발전소 현장 노동자들은 김용균 사망사고의 책임을 일차적으로 김용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열심히 일하려다 보니까 유발된 과잉행동’, ‘숙련이 미숙해서 벌어진 불안정한 행동’을 한 김용균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산재은폐가 발생한다. 발전소 현장은 ‘살아있는 김용균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었다. 김용균처럼 죽음에 이르지 않았지만 김용균과 유사한 산재사고를 경험한 하청노동자들, 그리고 이들의 사고를 목격한 동료들은 대부분 원청인 발전사와 하청업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고를 당한 하청노동자가 산재를 신청하면, 해당 하청업체는 안전관리 소홀로 재계약시 패널티가 부과된다. 원청은 하청과 맺은 도급계약에 ‘일의 지시’를 상세하게 규정하는데, 이 내용중에 하청업체가 책임져야할 안전항목이 있다. 원청은 하청에게 더 많은 일의 양을 더 적은 비용으로 계약하면서 더 철저한 안전을 주문한다. 이것이 도급계약상 이뤄지는 ‘일의 완성’의 내용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하청노동자는 나와 나의 동료들의 ‘밥줄’을 위해 산재신청을 회피하고, ‘공상처리’를 하게 된다. 노동자는 하청업체에서 비공식적 보상금과 치료비를 받는 대신 산재를 숨긴다. 

 

 

산재를 숨기는 사회 ‘안’에 노동자가 있을 뿐

 

원청과 하청의 수직적 구조를 따라 위험이 전가될 뿐만 아니라 위험에 대한 책임이 내려간다. 가장 아래 하청노동자가 있는데, 이는 주로 50인 미만 사업장 소속 노동자거나 건설산업에서 주로 활용되는 일용직 노동자다. 산재통계를 살펴보면 업종별로는 건설업에서 산재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고, 사업체 규모면에서는 50민 미만 사업장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이는 건설업이 특히 더 위험한 작업이 많고, 소규모 사업장의 안전시스템이 대기업에 비해 부실하다는 통념에 기댄 전문가와 행정 관료들의 진단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건설업과 소규모 사업장의 위험을 자연화한다. ‘더 위험하다’는 결과가 원인을 대체하거나 표면적인 원인 추적에 머무르게 되면 ‘어떻게 위험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구조적인 원인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산재사망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현장에서 산재은폐가 일반화되고, 위험에 대한 노동자의 ‘알 권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현장에서 위험은 관리자가 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이러한 현장일수록 노동자는 위험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회피하기 위한 자율적 조치를 하기 어렵다. 위험한 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 ‘작업중지권’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현장은 작업중지권 따위는 무시하는 이윤의 속도가 통제한다. 

 

작업장의 위험을 드러내는데 소극적인 것은 기업만의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 국토부는 5년째 정기적으로 공개해 온 ‘건설현장 사망사고 발생 상위 100대 건설사’ 명단 발표를 아무런 공지 없이 중단했다. 주요 건설회사들이 ‘법적 근거 없는 망신주기’라며 제기한 민원을 받아들인 결과다. 김용균 사망사고 이후 그나마 강화된 안전제도와 정책들이 슬그머니 후퇴하고 있다. 산재사고가 발생하며 고용노동부가 조사한 사고원인을 담은 ‘재해조사 의견서’는 전문가들과 노동자들의 공개요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개되지 않고 있다. 사고 원인을 둘러싼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염려가 위험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사회적 통제보다 앞선다.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산재사고 뉴스 대부분은 기업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그나마 나아졌지만, 이러한 관행은 여전하다. 고용노동부는 기업명을 포함한 산업재해 현황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연구단체가 기업명, 사업장명을 포함한 데이터 공개를 위해 고용노동부와 분쟁조정을 신청했고, 조정결과 산재현황 자료는 공공데이터에 해당하기 때문에 공개하라는 권고 결정이 내려졌지만 끝내 고용노동부는 해당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한 사회에서 노동자가 ‘밥벌이’의 이익을 쫓느라 산재를 숨긴다면, 이는 그 노동자를 둘러싼 사회가 이미 공동선으로 합리화된 기업의 이윤을 보장하느라 작업장의 위험을 부차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의 위험이 궁금하지 않은 사회, 아니 노동자가 구조적인 위험에 처해있으며 이는 법과 제도, 사회적 통제력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을 암묵적으로 회피하고 싶어하는 사회 ‘안’에 산재은폐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노동자가 있을 뿐이다. 이 부조리한 ‘강제된 선택’ 앞에 놓인 노동자의 동의 아래 ‘안전한 사회’ ‘무재해 기업’이라는 한국적 신화가 재생산된다. 

 

 

시민과 노동자의 ‘알 권리’와 중대재해처벌법

 

중대재해처벌법은 2021년 1월 26일 제정되어 2022년 1월 27일부터 시행 중이다. 이 법의 기본 취지는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의 최고 경영자에게 사고의 책임을 물어 처벌한다는 것에 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법의 제정과 시행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최근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장 투명한 계급의식을 갈등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처벌이냐 예방이냐’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구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러한 구도는 주로 경총 등의 기업 측에선 전문가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이미 답이 정해진 채 잘못된 이분법적 구도 하에 중대재해처벌법의 실효성을 심문한다. ‘처벌은 산재를 감소할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되는 예방 우위의 주장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은 처벌을 강조한 다소 비전문적이고 감정적인 입법이고, 이는 기업의 예방의지를 꺽는다는 점에서 퇴행적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규제보다는 규제완화를 선호하는 탈규제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은 전대미문의 악법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표를 얻기 위해 만들어진 전형적인 이념법이자 포퓰리즘 법”이라고 비난하는 입장의 반대편에서 보자면 그동안 적절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아 산재사고를 일으킨 기업과 경영책임자에게 내려진 처벌은 평균 400~500만원 가량의 벌금에 불과했다. 처벌 없는, 그래서 제대로 된 책임도 없는 예방만 강조한 결과다. 

 

문제는 처벌과 예방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처벌과 예방의 종합적 관계다. 이전까지 예방은 ‘사업주의 안전에 대한 의지’에 기댔다. 다시 말해 법적 규제를 포함한 사회적 통제가 노동안전에 있어서 전혀 작동되지 않았다. 이는 예방의 실패이자 처벌의 실패이기도 하다. 

 

중대재해처벌법은 ‘한국식 자율규제’의 실패를 선언하며 경영책임자의 법적 책임을 명시적으로 규정한다. 이는 시민과 노동자가 기업의 안전한 경영활동과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사회적 통제를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관된다. 적절한 안전조치를 마련하지 않아 노동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기업의 명단이 공개되고 이것이 기업의 가치평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건설사들이 기업명을 공개하는데 반발하는 것은 기업의 이윤에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망신주기’라는 사회적 평판은 도덕적 효과 이상을 발휘한다. 산재사고가 빈번한 기업에 취직하기를 꺼려하고, SPC 산재사고 사례처럼 산재다발 사업장의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며, 궁극적으로 산재가 기업의 이윤추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도록 만들어야 ‘사업주의 안전의지’가 강제된다. ‘피 묻은 빵을 먹지 않겠다’는 사회적 통제가 작동되는 사회에서 산재는 지금과는 다른 규모와 형태로 발생할 것이다. 

 

‘처벌이냐 예방이냐’의 잘못된 이분법을 걷어내고, 중대재해처벌법을 포함한 산재제도의 방향을 모색해보자.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산재은폐’는 작업장의 위험을 처리하는 방식의 표면적 결과로 나타났다. 작업장의 위험은 숨겨져야 했고, 구조적으로 방치되었고, ‘위험의 외주화’로 나타난 새로운 위험에 무관심해왔다. 무엇을 알아야 할지, 무엇에 대해 알아야할지, 어떻게 소통해야할지 총체적으로 무능력하고 무관심한 결과가 ‘산재은폐’라는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를 바꾸어 내기 위해, 시민과 노동자의 ‘알 권리’라는 차원에서 산재문제를 접근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기업의 정보는 ‘영업비밀’이라는 명분으로 사회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관계자외 출입금지’ 팻말 안에서는 근대 시민이 상상할 수 없는, 시민적 평등이 제거된 전근대적 권력관계 아래 노동자가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시민은 노동자이지만, 노동자로 작업복을 입는 순간 시민의 정체성은 마법처럼 사라진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합리성’이다.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의 합리성이 노동자를 때 이른 죽음으로 몰고 갈 만큼 폭력적으로 관철되는 사회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의 권리가 더 많이 보장되고 강화되어야 하지만, 사회와 기업의 담벼락이 ‘관계자외 출입금지’ 팻말을 중심으로 분할된 사회에서 노동자의 권리가 강화될 리 없다. 시민이 기업의 정보를 알 수 없는데, 노동자가 작업장안에서 위험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알 권리’는 단지 지식이나 정보의 접근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앎의 평등한 접근을 지향한다.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이 차별적으로 인식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한 처우가 ‘공정’으로 합리화될 때, 산재 위험은 사회의 주변부에서 증식한다. 산재에 대한 앎은 고립되고 협소화되어 시민의 보편적 인식의 일부를 형성하지 못한다. 

 

따라서 산업재해에 대한 ‘알 권리’의 시민적 확장이라는 방향아래 처벌과 예방,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법을 비롯한 법과 제도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실효성은 법적 처벌이 얼마만큼 강화되었는지, 이것이 기업의 예방활동으로 이어졌는지 여부로 판단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처벌이 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예방 효과가 증명되지 않으면 과잉입법이라고 비난할 것이고, 처벌이 여전히 약하다면 ‘종이호랑이법’에 불과하다며 법 자체를 부정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법 하나가 산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법에 대한 기대보다 법에 대한 무력화를 의도한 주장에 불과하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실효성 여부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새로운 제도와 관행으로 이어지고 정착되는가의 문제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새로운 관행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김용균 사망사고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있는가. 여기에 답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나 기업, 정부만이 아니다. 

 

 

 

* 이 글은 <기획회의> 통권 606호 2024.04.20.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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