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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In Moving Translation

영어의 아시아적 양식들에 대하여 (On the Asiatic Modes of English)

by 인-무브 2025. 8. 13.

영어의 아시아적 양식들에 대하여

On the Asiatic Modes of English

 

 

*저자: 이택광 (Alex Taek-Gwang Lee)

*원문: https://www.facebook.com/alex.t.lee/posts/pfbid0Y6EbWWt2TuuXhSDa9KbvQtba38dWreWCXxHMs9fpzKGZgDp2BvfecDSDtaxtED5hl
*번역: 김강기명 (서교인문사회연구실)

 

 

가야트리 스피박은 나에게 외국어 학습의 중요성을 처음 각인시킨 인물이었다. 단일하고 동질적인 민족이라는 신화가 여전히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아시아의 작은 "민족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이 교훈은 학문적 삶의 토대가 되었다. 그녀의 입장은 결코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포장되지 않았다. 그녀는 언어를 단순히 상업이나 외교의 도구로 보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WTO가 우리에게 영어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중국 관료에게 한 그녀의 유명한 답변을 자주 떠올린다. "WTO가 아니라 영시를 읽기 위해 영어를 공부하라." 그녀에게 언어 학습은 지정학적 필요가 아니라 미학적, 인식론적, 윤리적 참여의 문제였다.

나 자신의 영어와의 관계는 매우 다른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나는 미군 기지에 둘러싸인 마을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영어는 제국적 존재의 가청적 증거로 기능했다. 그런 환경에서 영어를 제국의 언어 이외의 다른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나중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둘러싼 마르크스주의 논쟁을 성찰하기 시작하면서 영어에 대한 나의 사고는 변화했다. 문제는 더 이상 영어가 지배의 도구인지 여부가 아니라, 언어가, 경제적 체제와 마찬가지로, 강제와 창조성, 종속과 전유가 공존하는 모순적 공간이 될 수 있는지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영어가 순전히 영미 제국의 강제를 통해 아시아의 링구아 프랑카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야마구치 마코토의 『근대 일본의 영어 학습 프로그램의 탄생』(英語講座の誕生―メディアと教養が出会う近代日本)은 이런 가정을 복잡하게 만든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영어는 이 지역의 지배적 외국어가 아니었다. 18세기로 가 보면, 유럽에서 중국어 능력은 교육받은 사람의 표지로 여겨졌으며, 이는 당시 세계질서 속 청나라의 문화적 위신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제국어가 만다린이었다. 그 권위는 아편전쟁과 청나라 헤게모니의 점진적 붕괴 이후에야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국어로서 만다린의 지속적인 힘은 대만의 역사에서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중국 내전에서 패한 장개석은 대만으로 도피하여 만다린을 공용어로 강제했으며, 호키엔어, 하카어, 원주민 언어의 표현 자유를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제한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시아의 언어 지배화가 영어의 도래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서구 제국주의만의 현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야마구치는 일본의 전간기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도 기록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경제적 번영의 시대에 접어들었고 자국의 예외주의를 선언하며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했다. 이미 대규모 아시아 이민에 적대적이었던 캘리포니아에서 반일 감정은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는 1924년 배일 이민법과 반일 토지법 수정안으로 성문화되었다. 이러한 전개는 일본의 반미 감정을 강화시켰고, 영어는 적대적 외세의 언어라는 낙인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에서 시부카와 겐지 같은 인물들이 주도하는 영어 교육 완전 폐지 운동이 등장했다. 시부카와는 영어 교육이 영미 문화의 모방을 조장하여 일본의 "국가 독립"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도쿄제국대학 국문학과는 이런 정서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주요 지식인 중 한 명인 후지무라 쓰쿠루는 메이지 시대와 달리 일본이 이제 서구 열강과 동등한 지위에 섰으며, 맹목적 모방을 넘어서 독창적 창조성을 함양할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후지무라의 해결책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전체 인구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는 대신 일본은 중앙화된 "번역국"을 설립하여 소수 엘리트를 영어 같은 언어로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번역가들은 모든 외국 지식을 중재하여 일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하도록 보장할 것이었다. 이 모델에서 영어는 완전히 거부되지 않았지만 도구화되었고, 영어권 세계로 동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문화적, 정치적 우월성을 투사하기 위해 오직 소수만이 습득하게 되었다.

종합해보면 이러한 역사들은 영어를 서구 제국주의의 단순한 유산으로 보는 어떤 선형적 서사도 흔들어놓는다. 청, 일본, 영국, 미국 등 서로 다른 제국들이 각각 언어를 권력의 기술로 동원한 더욱 얽혀있는 그림을 드러낸다. 이런 관점에서 문제는 단순히 영어가 지배의 언어인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재전유될 수 있는지다. 스피박의 조언이 외국어로 시를 읽는 즐거움과 변혁적 잠재력을 가리킨다면, 이러한 역사들은 언어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과거와 현재 제국들의 침전물을 담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과제는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거주하며 제국의 언어조차 다른 세계들을 상상하는 도구로 전환하는 것이다.

영어를 문화적 위협으로 거부하면서 동시에 권력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이중 전략은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공산주의 혁명 이후 중국도 제국 언어에 대한 단순한 저항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영어 문제와 씨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 중국 정책입안자들은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논의했다. 이는 문화적 항복이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의 논리에 뿌리를 둔 계산된 고려였다. 문어와 구어의 통일이 정치적 통합과 국가 발전에 필수적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 전 세계적 소통을 위해 설계된 단순화된 영어 형태(simplified form of English)를 촉진하는 계획인 영국의 BASIC English 조직이 중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지도를 제공했다. 이런 맥락에서 영어는 제국의 배타적 소유물이라기보다 혁명 국가 자신의 목적에 봉사할 수 있는 중립화된 기술적 매체로 나타났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전후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1955년 반둥 회의가 중국어나 일본어가 아닌 영어를 공식 업무 언어로 선택한 것도 이런 변화하는 언어 질서 하에서였다. 자체적인 긴 영어 사용 역사를 가진 인도의 중요한 역할이 의심의 여지없이 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영어 선택은 또한 식민지 과거가 다양하고 종종 상호 이해불가능한 언어적 환경을 남긴 신생 독립국들 사이에서 영어를 통한 소통의 가능성을 인정한 실용적 인식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어가 아시아의 주요 링구아 프랑카로 부상한 것은 단순히 영미 제국 지배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신흥 탈식민 질서에서 스스로를 위해 발언할 수 있는 공통 플랫폼을 추구한 아시아 지도자들의 전략적 결정의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영어는 정복자의 언어로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기주장을 위해 전유되고 재형성되고 재배치된 매체로서 아시아에 진입했다.

이런 이유로 아시아의 영어는 어떤 단일한 주인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깨진 언어(broken language)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즉 여러 지역 언어들과 역사적 경험들과의 충돌을 통해 오염되고 분열되고 재구성된 언어다. 아시아적 양식 속에서 영어는 번역, 혼종화, 즉흥성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런던이나 워싱턴에서 사용되는 영어가 아니라 다언어적이고 다성적인 언어, 즉 제국적 기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해방된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