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정의로운 전환’을 넘어선 전환의 조건
전주희 / 문화/과학 편집위원, 서교인문사회연구실
* 이 원고는 계간 <문화/과학> 120호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글의 최종 수정본은 <문화/과학>을 참고해주세요.
1. ‘IMF 위기’가 초래한 전환 이후
기후위기가 가속화되면서 그에 대응하는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고 있다. 그러나 정세 속에서, 대중운동의 과정에서 함께 성장하는 여타의 다른 개념들, 정의들처럼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용어 역시 매우 다양한 의미를 함축할 뿐만 아니라 서로 갈등하고 경쟁하는 의미들이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된다. 이와 더불어, 최근 기후정의운동을 중심으로 “기후변화가 아닌 체제전환”이 기후운동의 핵심 구호로 부상하면서 체제전환의 의미를 둘러싼 해석투쟁이 전개되고 있다.[1]
기후위기와 관련한 노동의 과제는, 주로 탈탄소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석탄화력 발전 분야와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하여, 산업전환 국면의 고용안정 문제에 집중해 ‘정의로운 전환’의 요구를 구체화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이 외에도 폭염 시기 건설노동자, 물류센터 노동자 등 기후위기가 초래한 환경에 노출되는 경우의 건강권 문제가 제기되고는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기후변화가 아닌 체제전환”이라는 깃발 아래서 노동은 어떤 구호를 외쳐야 하는지, 체제전환에서 노동의 과제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유보되어 있다.
‘노동’의 관점에서 ‘정의로운 전환’은 ‘산업전환’이나 에너지산업의 ‘우회적 민영화’ ‘시장화’에 대응해왔던 연장선에서 수용된다. 그러나 기후위기라는 전 지구적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승인하지 않는다면 ‘정의로운 전환’의 요구는 과거의 ‘고용보장’ 요구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기후위기’와 ‘체제전환’의 교차점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에서, 기술주의와 시장주의에 기초한 기후위기 대응을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해 반자본주의 전선의 표현물인 ‘체제전환’의 이름 아래 노동의 근본적인 전환의 과제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대체 그것이 어떻게 제출될 수 있을 것인지는 막연하고 아득할 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선 ‘거대한 도약’을 말하기 이전에, 우선 현재 노동운동이 처한 조건을 집중해내는 것을 과제로 설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IMF 위기가 초래한 ‘전환’을 잠정적으로 ‘첫 번째 전환’이라고 부르고, 이 전환이 가져온 근 30여 년의 변화가 단지 고용 형태를 넘어 노동의 풍경을 얼마나 냉혹하게 바꾸어놨는지를 압축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기후정의운동과 체제전환 사이에 ‘반신자유주의’의 접합점을 마련해 전환의 물질적 조건을 응축시켜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의 응축이 없다면 탈성장 대안사회 혹은 생태사회주의 혹은 체제전환이라고 부르는 ‘두 번째 전환’의 상상이 현실화되는 과정은 상당히 지연될 것이다.
이 글은 IMF 위기가 초래한 전환이 노동을 어떻게 바꾸어냈고 이 변화된 노동의 지형 위에서 ‘정의로운 전환’의 요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체제전환에서 노동의 과제를 탐색해보고자 한다.
2. 신자유주의 노동의 일반정서 ‘불안’, 그리고 ‘공정’
‘전환’의 과제를 키워드로 접근해본다면, 노동-생산 혹은 노동-이윤을 대체하는 노동의 연관 검색어는 ‘생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명을 ‘정상적 착취’ 이상으로 내어주었다. 그러나 IMF 위기가 가져온 노동은 ‘과잉착취’ 이상의 무엇을 노동에 덧붙이고 있다. 근대사회에서 실업자 혹은 노동능력을 상실한 자에게 따라붙는 온갖 ‘비정상’을 향한 낙인과 비난이 있었다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을 함으로써, 노동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무시와 모욕감, 그리고 고통이 가해지게 되었다.
이는 단지 불안정 노동이라는 특정한 형태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노동이 야기하는 사회적 고통은 비단 실업자와 비정규직 등 고용 관련 불안정성을 겪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고용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지만 노동 관련 불안정성을 모면할 수 없는 노동자들, 결국 모든 노동자에게 미친다”[2]는 주장과 같이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의 일반적 정서는 ‘불안’으로 수렴된다. 그런데 이 ‘불안’은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기 어려운 조건이기도 하다. ‘불안’은 균열적이고 파편화된 노동의 틈새 사이에서 각자의 노동이 겪는 무시와 모욕감, 그리고 불안을 상대화하며 틈을 더 벌리는 기제가 된다.
오랫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무시와 모욕감에 대해 성토하며 임금과 노동조건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의 고통을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지난 ‘공정 논란’에서 드러난 것처럼, 정규직들은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취업준비생’으로 불안한 시간을 견뎌야 했던 자신의 노력과 고통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였다. 나와 너의 불안이 연대의 조건이 되지 못하는 것, 자신의 고통이 특권화되거나 고통 자체가 노동의 가치절하의 원인이 되는 것은 IMF 위기가 가져온 첫 번째 전환의 풍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공정’ 담론은 철저하게 불안이라는 조건 위에서 작동하는 ‘불충분한 정의’ 혹은 ‘신자유주의적 정의’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관행을 부수며 등장했는데, 이것이 ‘혁신’ 내지는 ‘진보’ 담론과 결합하며 새로운 사회의 ‘전환’의 기치를 내걸었다.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 정파의 중심 아젠다 중 하나는 ‘능력주의’”였으며, 이는 IMF 위기를 겪으면서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와 사회를 ‘구원’하고 ‘정상화’하기 위한 ‘개혁담론’으로 부상”했다.[3]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 연설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열심히 하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공정한 사회, 경쟁력 있는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4]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에 이어 신자유주의적 노동 개혁을 밀어붙이면서 한쪽으로는 자유로운 경쟁을 옹호하는 공정 담론을, 다른 한쪽에서는 ‘기득권 타파’라는 미명하게 노동조합의 힘을 부정의한 것으로 만들면서 ‘노동 혐오’ ‘귀족 노조’ 담론을 유포했다.
“파업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야 한다.” 2002년 12월 18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명동에서 마지막 거리유세 중 한 말이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노동자도 자율권을 갖고 활동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특혜도 해소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6월 28일 철도노조가 전면파업에 돌입한 지 불과 2시간 만에 공권력을 투입해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이후 노동조합 활동을 대기업 노동자의 ‘귀족노조’의 특권쯤으로 프레이밍하며, 노동자의 집단적 권리 행사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5].
이러한 기조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진다. 이명박 정부는 당시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딸 특채 논란으로 낙마하면서 ‘공정사회’라는 화두를 정권 후반부의 주요 전략으로 제시했다. 2010년 8·15 기념 경축사에서 당시 이 대통령은 “사회 모든 영역에서 ‘공정한 사회’라는 원칙이 확고히 준수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공정사회’를 처음 설파했다. 당시 조국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제시했으나 공정사회는 진보진영에도 좋은 화두”라며, “진보진영은 대중들에게 ‘과연 공정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6]
한나라당은 박근혜 비대위원장 당시 공정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면서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제시했다. 대선 후보 당시에는 신자유주의에 따른 경제 불공정 관행을 바로잡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결 방향을 제시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공정인사 지침」(2016. 1. 22)을 통해 ‘쉬운 해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공정인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7]
문재인 정부 들어 공정은 ‘뜨거운 감자’가 된다. 2017년 5월 10일 19대 대통령 취임식 선서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가령 질서 있는 항쟁이었는지, 요란한 정권 교체에 불과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촛불 이후 탄생한 문재인 정권이 국정기조로 ‘공정’을 전면에 내건 것은 촛불 이후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여전히 견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불안정 노동, 착취와 수탈의 지위
한국사회에서, 특히 IMF 위기 이후 적극적으로 생산된 ‘공정’ 개념은 시대적 변화를 추동하는 사회적 정의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계급적 불만들을 특정 ‘세대’ 혹은 특정 ‘집단’이 전유하면서 자신의 불안을 ‘특별한 고통’으로 특권화한 결과다.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을 지속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던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 전략이 노동 내부를 분할한 효과이기도 하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불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집단과 그러한 자격을 박탈당한 집단으로 양분되어 있다. 역설적이게도 불안정 노동자일수록 ‘불공정’을 입에 올리기 어려워한다. 그들은 이미 ‘불공정한 집단’으로 공격받고 있거나, 그들이 겪고 있는 차별과 고통이 ‘공정’의 실현으로 해결될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불안정 노동자들은 제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일정한 시민권을 박탈당한 상태인 ‘대표 불능(misrepresentation)’의 상태에 놓여 있다.
낸시 프레이저는 전 세계적 불평등과 인종주의 확산 등 ‘지구화 시대’에 부합하는 정의의 문제를 재설정하며, ‘(재)분배, 인정, 대표’라는 삼차원적 정의론을 제시한다. 그는 경제적 분배와 문화적 인정을 결정하는 ‘정치적인 것’의 차원으로 ‘대표(representation)’의 문제를 제기한다.
“정의의 정치적 차원은 사회적 귀속의 기준을 학립하고 이를 통해서 누구를 구성원으로 볼 것인지를 결정함으로써 다른 차원들의 범위를 설정한다. 정치적 차원은 정당한 분배와 상호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범위 안에 누가 포함되어야 하고, 누가 배제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8] (강조는 인용자)
한국에서 ‘불안정 노동자’의 지위는 단지 고용상의 비정규성이나 저임금 노동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에서 배제되거나, 노동의 권리를 보장받는 법의 바깥에 있음을 뜻한다. 4대보험을 받지 못하거나, 법정 노동시간 제한을 보호받지 못하거나, 산재보험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체계적 박탈은 법과 제도에 의해 실행되었지만, 그보다 앞서 정부의 긴급한 ‘방침’과 같은 명령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공공부문 민영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대량의 정리해고를 빠르고 신속하게 추진하기 위해 입법 등의 절차 대신 ‘방침’과 ‘지침’의 형태로 된 행정명령을 동원했다. 1988년 당시 기획예산위원회는 공기업 민영화 방침을 마련했는데, 이른바 ‘핵심과 비핵심’의 분할은 공기업 민영화의 기준뿐만 아니라 이후 노동의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분할 전략의 핵심 이념이 된다.
공기업의 설립 목적에 따른 고유업무와 핵심사업(Core Competence)에 전념. 민간이 수행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기능은 과감히 민영화 또는 민간위탁(Outsourcing).[9]
‘핵심과 비핵심의 분할’ 은 핵심적 노동을 수행하는 역량과 그러한 역량이 결여된 하위 집단으로의 분할이 마치 합리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라는 착각을 정당화했다. 1998년 도입된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은 비핵심 노동을 외주화로 털어내기 위한 핵심적인 제도다. 그러나 현행 「근로기준법」 제9조는 여전히 중간착취를 금지하며, 직접고용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법을 법으로 허물어버리는 이러한 입법의 절차들을 통해 기존의 노동권은 내부로부터 무너지게 된다.
이러한 파견법은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털어내며, 사용자의 재량권을 강화한다. 2000년대 초반 노사정 합의에서 비정규직 확대가 허용되면서, 재량권은 우선 여성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2007년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비정규직 보호법)이 제정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잔혹사가 본격화된다. ‘비정규직 보호’라는 법령의 취지가 무색할 만큼, 사용자는 ‘근로 기간 2년이 지난’ 계약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대신 계약을 해지하거나, 해당 업무를 아예 외주화하거나, 정규직으로 전환되더라도 무기계약직이나 별도의 하위 직군을 신설하는 등의 방식을 활용했다.[10]
역대 정부는 사용자(기업)의 재량권을 확대하는 대신, 이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하기 ‘공공부문 비정규직 보호 정책’을 마련했다. 이는 날로 거세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항을 일정 부분 수렴하면서, 비정규직을 보다 안정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 차원이었다.
가장 먼저 노무현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2006. 8)을 발표했다. 여기서 처음으로 ‘상시, 지속적 업무에 2년 이상 근무한 기간제 노동자 일부를 무기계약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이 수립된다. 이후 무기계약직은 정규직 전환이라는 이름아래 차등적인 지위를 신설하여 차별을 영속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또한 무분별한 외주화를 제어한다고 하면서도, ‘합리적 외주화’의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모든 공공부문의 외주화 가능성을 열었다.
이명박 정부 역시 「공공부문 비정규직 고용개선 대책」(2011. 11)을 마련했지만, 오히려 공공부문의 효율화와 시장화를 통해 ‘우회적 민영화’와 상시적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공공부문 효율성 제고를 위해서는 비정규직 활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제출했다. 이에 따라 정규직 전환 문턱은 더 높아졌다. 노무현 정부에서 제시한 ‘상시, 지속적 업무’와 ‘2년 이상 계속 근로’라는 기준에 더해 ‘평가에 따라 전환’한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박근혜 정부는 ‘공공부문의 상시, 지속적 업무를 수행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 고용개선 추진’을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고용개선 대책 보완지침」(2013. 4)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공공부문의 정규직 전환시 무기계약직으로의 전환이 확대되었고, 파견·용역 등 외주화된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대책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따라 ‘무기계약직’ 전환마저 회피하고 싶은 공공기관들은 관련 업무들을 외주화하면서 간접고용 노동이 공공부문에서 확대된다. 그 결과 2012~2013년 공공부문에서 기간제 등 직접고용 비정규직은 9,733명 감소했으나,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1,299명이 증가했다.[11]
이러한 흐름 안에서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이 자리한다. 물론 역대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에 비해, 문재인 정부는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할 만큼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제시했다. 우선, 비정규직의 대상 범위를 이전 정부보다 더 넓게 설정했다. 초단시간과 단시간 비정규직을 포함하고, 2년 이상 근무 기간의 조건도 삭제했다. 그리고 역대 정부에서 제외한 간접고용을 포함시켰다.
또한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대상에 생명·안전 업무의 직접고용을 명시했다. IMF 위기 직후, 전력·철도·공항·항만·병원 등 주요 국가 기간산업에서 생명·안전 업무들이 ‘비핵심’이라는 이유로 외주화된 바 있었다. 그 결과 ‘위험의 외주화’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위험업무를 수행하는 상시·지속 노동은 직접고용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을 반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비정규직 대책에도 불구하고, 불안정 노동을 확대하는 기존의 방향이 수정되거나 보완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기존의 비정규직이나 파견노동 관련 법은 그대로 유지된 채 이루어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보호 대책의 한계는 명확했다. 정부의 여러 ‘보호’ 정책들은 차라리 불안정 노동자를 원활하게 사용하기 위한 보충적 조치들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지경이었다. 동시에 현실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말로도 담기 어려운 다양한 노동의 분할”[12]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었다.
무기계약직은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 종종 임금체불이 되거나 폐업을 하는 지불능력 없는 소기업의 정규직이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의 비정규직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원청 사업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외주·하청 업체의 노동자들은 간접고용인가, 아닌가? 또는 자회사의 정규직을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 회사에 전속되지 않고 여러 곳의 일감을 동시에 맡아서 일하는 플랫폼노동자나 프리랜서는 특수고용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13]
이제 기업은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사용한다. 노동자를 개인사업자로 만들거나, 기존의 자영업자들을 프랜차이즈로 재편하여 종속적인 관계로 재설정하거나, 플랫폼을 통해 프리랜서의 ‘자유’를 자본의 통제하에 둔다.[14] 그 결과 사용자인 기업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하며, 그들에게 보다 포괄적인 재량권을 쥐여준다. 노동자는 비가시적이면서 촘촘한 통제의 망에 자신의 노동을 더 많이 종속시키게 된다. 이렇게 자본의 재량권이 확대된다는 것은 “임금 계약을 통해 매개되지 않는 지배의 확대”를 의미하며, 노동자는 착취뿐만 아니라 수탈의 대상이 된다.[15]
낸시 프레이저는 『좌파의 길(canibal capitalism)』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징이며, 지배자가 어떠한 추가적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착취를 전개할 수 있는 조건”으로 수탈을 지목하며, 착취와 수탈은 별개의 과정이 아니라, “단일한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서로 깊이 얽힌 측면들”이라고 정의하고, 이 둘 사이의 사회적 분할이 인종주의적이라고 평한다.[16]
나는 수탈의 요소를 착취의 요소와 결합한 것이 국가-관리 자본주의에서 인종화된 노동의 상황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미국이라는 중심부의 유색인 노동자는 임금을 받았지만, 그 액수는 자기재생산을 위한 평균적인 사회적 필요비용보다 적었다. 다른 한편으로 유색인 노동자는 자유로운 인격과 미국 시민이라는 형식적 지위를 갖추었지만, 공적 권력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실제로 보장해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었다. (…) 말하자면 유색인 노동자의 지위는 수탈/착취의 정치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을 합친 것이었다. (…) 초과착취(suer-exploitation)라는 말은 (…) 지위 차이는 무시한 채 오로지 인종 간 임금격차의 경제학에만 초점을 맞춘다. 반면에 나의 접근법은 경제적 약탈과 정치적 예속의 뒤엉킴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17]
한국의 불안정 노동자를 곧장 ‘또 다른 인종’으로 간주하는 것이 어색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불안정 노동자의 삶과 노동은 단지 고용상의 불안정성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들은 체계적이고 중첩적으로 제도의 바깥으로 밀려나 있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그들의 ‘취약성’이 재생산되고, 그 ‘취약성’은 교환과 계약의 과정을 넘어서는 폭력적 강탈의 조건이 된다. 이 조건이란 낸시 프레이저가 지적하는 대로 경제적인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이 교차한 결과다.
4. 에너지 전환과 ‘정의로운 전환’
발전산업은 IMF 위기 이후 민영화를 위한 매각 대상 1순위였다. ‘한국전력공사’의 민영화를 위해 산업자원부는 「전력산업 개편 기본계획」(1999. 1)을 수립하고, 2000년에는 「전력산업구조개편촉진에관한법률」을 제정한다. 수순대로 2001년 한국전력공사를 분할하여 6개 자회사(5개 발전회사와 한수원)를 설립한 뒤, 분할된 화력발전 공기업에 대한 매각을 추진했다. 2002년 발전노동자들의 전면파업과 ‘민영화 반대’ 사회적 여론에 힘입어 공기업 매각은 중단되었지만, ‘시장형 공기업’ 지정을 통해 효율화와 6개 공기업 간의 경쟁체제를 도입하고 발전정비 분야와 운전분야의 외주화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면서 발전산업의 ‘우회적 민영화’를 계속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발전산업의 노동역시 이른바 ‘핵심’과 ‘비핵심’으로 분할되어, 중층적인 원·하청 구조로 재편되었다.
2018년 12월 10일 석탄화력발전소 하청 노동자로 일하던 김용균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2002년 이후 중단된 민영화 이후 진행된 외주화가 얼마나 많은 취약한 노동을 형성해왔는지가 사회적으로 드러났다. 화석연료에 기반한 에너지체제와 신자유주의적 노동체제가 교차하는 지점에 김용균의 사망사고가 있었다. 이로부터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당시에 ‘기후위기에 따른 에너지 전환’의 문제는 여전히 노동의 시야 바깥에 자리했다.
그러는 사이 보령발전소 1, 2호기 폐쇄(2020), 삼천포발전소 1, 2호기, 호남발전소 1, 2호기(2021), 울산기력 4~6호기(2022)가 폐쇄되면서 ‘조용한 해고’가 별다른 대책 없이 이뤄졌다. 이번에는 김용균 노동자를 사망케 한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구조적 이해는 온데간데 없고, 석탄화력발전소를 당장에 폐쇄하지 않으면 기후악당이 되는 것처럼, 모든 가치와 요구에 앞서 발전소 폐쇄가 전제되었다. 그리고는 폐쇄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는 한에서 ‘정의로운 전환’ 용어가 정부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불안정 노동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둘러싼 담론은 무엇보다 에너지전환 과정에서 특정 산업과 특정 지역이 더 큰 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18], 특정 노동자 집단의 지위가 더 악화된다는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발전소가 폐쇄되면 ‘모든 노동자’가 일터를 잃는 것이 아니다. 지역에 터를 잡고 삶을 살아온 청소 여성노동자, 2차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우선 정리된다. 하청업체라고 할지라도 전국적인 사업소를 가진 규모 있는 기업 소속 노동자들은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될 수 있었다. 화력발전소뿐만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나 LNG 발전소의 기술력을 보유하는 하청업체는 좀 더 여유가 있었다.
어느 지역에 거주하는가도 영향을 미쳤다. 발전소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에게 산업단지가 발달되지 않은 보령과 산업단지가 있는 울산은 전혀 다른 생존의 조건이다. 고령의 청소 여성노동자에게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타지역으로 ‘이주’한다는 계획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젊은 남성노동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기업 소속’의 발전소 정규직 노동자들은 발전소 폐쇄가 ‘고용불안’의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 결과 불안정한 노동구조가 에너지전환 시기와 맞물리며 더 깊은 불안정성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19]
그림 1 발전소 폐쇄와 고용불안정성의 심화 양상(전주희, 2022)
정부는 2025년 태안 발전소 1, 2호기, 2026년 보령 발전소 5, 6호기가 폐쇄되는 일정을 시작으로 2050년까지 정부가 운영하는 석탄발전소 모두를 폐기한다는 방침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연구용역으로 진행한 「정의로운 에너지전환을 위한 폐지 석탄발전소 활용방안 연구」(2021. 12)에 따르면, 2034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 30곳이 폐쇄되는 과정에서 ‘전환 불가 인원’ 즉 해고가 불가피한 인원은 총 4,911명, 이 가운데 정규직은 1,221명, 하청업체 소속은 3,690명으로 추산된다. 대규모 일자리 감소가 예측되는데도 재취업 교육, 실업 지원금 마련 등 과거 산업재편 및 구조조정 시기마다 빠짐없이 등장했지만 효과는 부실했던 대책만 나열되고 있을 뿐이다.
역대 정부들이 법과 제도 바깥으로 체계적으로 밀어낸 노동자 집단이 석탄발전소 폐쇄 과정에서 가장 긴급하게 보호받아야 한 노동자가 되었지만, 제도 바깥으로 밀려난 탓에 정부의 제도적 지원에서도 배제되는 악순환 또한 반복되고 있다. 가령 보령지역 석탄발전소 노동자들의 재취업을 위한 직업훈련 교육을 지자체에서 마련했지만(고용안정선제대응패키지 사업), 교육을 듣기 위해서는 하청 노동자들의 업무를 조정해야 하는데 이는 원청인 발전사의 ‘허가’와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결국 2020년 발전소가 폐쇄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2차 하청 20명의 노동자 중 재취업 교육을 수강한 노동자는 8명이 채 되지 못했다. 원청의 협조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에 의해 추진되는 ‘정의로운 전환’ 정책이 그대로 추진된다면 노동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이 이미 90%이상 민영화된 상태에서, ‘고용보장’ 수준에서 제기하는 일부 정규직 노동조합의 ‘정의로운 전환’ 요구 역시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재생에너지인 풍력발전의 경우,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하청업체가 석탄발전소의 하청업체에 비해 규모가 영세하고 기술력이 낮을 뿐만 아니라, 임금 역시 석탄발전소 1차 하청 노동자의 절반에 가까운 최저임금선을 유지하고 있다.[20] 탈석탄과 함께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 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재편 없이는 ‘정의로운 전환’의 길이 요원하다.
기후정의운동 진영에서 ‘공공 재생에너지’를 ‘정의로운 전환’과 함께 요구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단지 에너지원을 석탄에서 바람과 태양으로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지역 주민과 노동자뿐만 아니라, 지방에 일방적으로 전가된 에너지 산업에 따른 온갖 문제들을 재설정하는 문제는 시장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이다. 둘째, 발전산업의 중층화·외주화된 노동을 보다 평등한 노동체제로 전환하려는 시도와 공공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 동시적으로 추진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발전 분야에서 수십 년간 추진된 ‘우회적 민영화’와 ‘외주화’로 피폐화된 노동의 균열적 틈들을 메워낼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재구축하기 위해 공공재생에너지가 요청된다.
그러나 정부와 지자체, 민간 연구소에서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발전소 폐쇄에 따른 고용대책이나, ‘정의로운 전환’ 관련 정책 보고서 대부분은 지난 30여 년간 추진된 발전 분야의 민영화와 외주화, 그리고 노무현 정부 시절 재생에너지가 도입될 때부터 공공의 역할이 아닌 민간시장의 영역으로 설정한 오류와 한계를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대신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거버넌스의 구축’이 마치 최선의 선택인 것처럼 반복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그러나 ‘거버넌스’에는 기껏해야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 간의 조율과 조정 기능이 부여될 뿐, 에너지 전환과 그에 따른 ‘정의로운 전환’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설정하고 국가 차원의 에너지 정책을 구상하는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다.
성숙한 신자유주의는 거버넌스로 표현되는 ‘참여 민주주의’를 거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주요한 행정적 형태”로서, “신자유주의가 주체들을 지휘하기 위한 환경과 구조적 제약 그리고 유인을 제공하는 정치적 양식”으로서 거버넌스를 동원한다.[21] 그런 점에서 정의로운 전환이 거버넌스의 구축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5. 체제전환,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서 노동과 생명의 그물망 엮기
다시 기후위기 시대, 체제전환을 위한 노동의 연관 검색어를 떠올려보자. 반복하건데, 그것은 무엇보다 ‘생명’이어야 한다.
IMF 위기 이후 노동의 주요 요구는 ‘고용보장’이었고, 심지어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사회에 대한 요구가 불안정 노동에 차별적으로 전가되는 위험의 부정의에 가닿게 되었다. 구의역 ‘김 군’ 사망사고와 태안 석탄화력발전소 김용균의 사망사고 이후 ‘위험의 외주화’가 제기되고,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이 그 모든 가치보다 앞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석탄화력발전소는 다시 ‘고용보장’의 요구로 되돌아갔다. ‘정의로운 전환’이 다른 전략들과 연결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고용보장의 경계를 맴돌 수밖에 없다.
노동과 생명을 다시 연결시키기 위해, ‘위험의 외주화’라는 문제를 체제전환의 과제 위에 포개놓아보자. 그것은 단지 ‘노동안전’ ‘산업보건’의 문제가 아니라, 차별적으로 생명이 분할되는 문제를 지시한다. 즉 “착취 대상인 자유로운 주체들과 수탈 대상인 종속적 주체들”[22]로 나뉘는 사회적 분할의 경계위에 ‘위험의 외주화’라는 표식이 있다.
수탈은 착취와는 다른 방식의 축적이다. 수탈은 토지와 가축을 폭력적으로 강탈하듯이, 특정 역량을 징발하며 취약한 노동집단을 재생산한다. 이 조건하에서 ‘정의로운 전환’이란 전략이 갖는 정치적 일반성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수탈과 착취가 얽혀 강화되는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취약성’이란 역량들이 집단화되지 못한 채 파편화·위계화되는 현상을 포함한다. 다시말해 하나의 제도가 실행될 때, 해당 제도가 가장 필요한 특정 노동자 집단이 오히려 제도의 바깥으로 배제되는 것이 ‘취약성’의 본질이다.
김용균 사망사고 당시 정부의 ‘안전대책’에 대해 어느 발전소 하청 노동자는 매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청 노동자가 사망할 때마다 안전대책이 강화되었지만, 그래서 안전해지는 것은 원청 정규직들뿐’이라는 것이다. 작업장 안전대책이 포괄하는 노동자 집단은 어디까지일까. 정규직까지인가, 1차 하청까지인가. 조선소의 안전대책을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고용허가제하에서 이주노동자는 안전해질 수 있을까. 불안정 노동자에게 ‘위험’은 안전대책으로 해결될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속성을 가진다.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에서 제도의 포괄적 실행, 사각지대 없는 일반적 작동성은 특정 제도 자체의 설계를 벗어나는 문제가 된 것 같다. 이미 불안정하고 불균등한 노동체제 위에 균질적이고 균일한 제도의 실행이 가능할 수 있을까.
모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과 같이 갈수록 불안정 노동의 형태가 다변화되는 상황에서 어떤 제도이든, 그 제도의 효과는 매우 협소하고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불평등을 줄이려는 제도는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작업장 안전대책뿐만 아니라 주4일제 같은 노동시간 단축 역시 마찬가지다. 장시간 노동체제와 불안정 노동이 중첩되면서 시간 빈곤뿐만 아니라 시간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한 채 ‘주4일제’ ‘노동시간 단축’ 등의 가치가 과연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플랫폼 노동, 재택근무 등으로 노동시간과 생활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주4일제’는 대기업 정규직 같은 형태의 노동시간만을 더 빠르게 단축시킬 것이다. 그렇다고 노동시간 단축에 있어서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문제는 제도의 실행이 멈추는 지점이자 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경계다.
‘불안정 노동’이라는 문제를 우회한 채로 체제전환을 위한 노동의 전략이 제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균열적인 노동의 ‘틈’ 사이를 더 벌리는 ‘불안’이 연대와 연결의 감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그 물질적 조건을 해체하지 않는 이상, 체제전환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전환’ 역시 자유주의적 레토릭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1] 홍덕화, 「기후불평등에서 체제전환으로: 기후정의 담론의 확장과 전환 담론의 급진화」 , 『환경사회학연구』 24권 1호, 2020.
[2] 장진범, 「우리가 아직-다시 노동을 말하는 이유」, <2024 체제전환운동포럼> 자료집, 2024, 307.
[3] 조형근, 「능력주의, 말과 담론이 걸은 역설의 길을 벗어나기」, 『역사비평』 140호, 2022, 9.
[4] 같은 글.
[5] 양문석, 「말 바꾸는 노대통령 갈수록 무섭다」, 『언론노보』 361호, 2003, 3.
[6] 우리사회가 불공정하다는 대중적인 불만과 인식은 청년세대에 더 강한 정서이긴 하지만, 분명 일반화된 정서다. 이명박 정부시절 공정이 한창 뜨거운 이슈이던 2011년 전국 16개 시와 도에 거주하는 19세 이상 성인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당시 특임장관실이 공정사회관련 대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국민 72.6%가 우리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공정하지 않다는 응답이 젊은 층일수록 높게 나왔지만(20∼30대는 75% 이상, 40∼50대는 72∼73%), 60대 이상에서도 65% 이상의 높은 응답율을 보이고 있다.
[7] 이상호, 「[시평 340] 박근혜 정부, ‘쉬운 해고’를 ‘공정 인사’로 둔갑시켰다!」, 참여연대, 2016. 2. 3.
[8] 낸시 프레이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김원식 옮김, 그린비, 2010, 38-39. 강조는 인용자.
[9] 기획예산위원회, 「[보도자료] 제2차 공기업 민영화 및 경영혁신 계획」, 1988. 8. 4.
[10] 이승윤 외, 『한국의 불안정 노동자』, 후마니타스, 2017, 54.
[11] 국가인권위,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의 고용안정 및 처우개선을 위한 권고」, 2014. 11. 10.
[12] 장귀연, 「불안정 노동 어디까지 와 있나」, 비정규직이제그만과 철폐연대가 함께하는 네 번째 워크숍 자료집, 2024. 4. 25, 3.
[13] 같은 글, 3-4.
[14] 같은 글, 4.
[15] 낸시 프레이저, 『좌파의 길』,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23, 82.
[16] 같은 책, 87.
[17] 같은 책, 320, 각주 13.
[18] 홍덕화, 위의 글.
[19] 전주희, 「발전소 폐쇄에 따른 차별적 고용위기의 실태와 문제」,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따른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 방안연구』, 사회공공연구원, 2022.
[20] 전주희, 「공공재생에너지를 통한 노동의 정의로운 전환: 풍력발전산업을 중심으로」, 『공공재생에너지 확대전략』, 사회공공연구원, 2023.
[21] 심지어 “현대의 신자유주의는 거버넌스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웬디브라운, 『민주주의 살해하기』, 배충효·방진이 옮김, 내인생의책, 2017, 161.
[22] 낸시 프레이저, 앞의 책,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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