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의 위기와 외부의 낙하
필자: 수차미

“한국에는 하나의 작품에 매몰되어 컷단위 대사단위로 분석과 감상글을 올리는 마이너 갤러리 커뮤니티 문화가 있습니다. 이들은 매주 최신 연재분을 자체 번역해서 공유하여 일본과 시차없이 작품을 소비하며 마치 경주마 감각으로 내가 빠는 이 작품이 판매량이 몇 천만부고 극장흥행 수익이 어떻고 이래서 라이벌 작품보다 우위에 있다는 '갈드컵'을 즐깁니다. 작품이 성장하고 세간의 인정을 받는 게 곧 나의 기쁨으로 환원되는 아이돌 오시 문화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역 블로거의 네이버 블로그에 올라온 글 「두유노 원나블헌 금속노조 진귀주톱?」을 읽었다. 이 글은 경기일보에 기고된 모 영화평론가의 글을 지적하며,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요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재밌게 본 걸 나도 재밌게 봤다는 점에 따른 ‘연결감’으로 분석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300만 구독자를 지닌 유튜버 ‘침착맨’이 최근 티빙에서 <귀멸의 칼날> 같이 보기를 진행했던 일을 든다. 사람들은 침착맨의 방송을 더 잘 즐기고 싶어서 그가 봤던 작품을 본다. 마치 우리의 지난 세기에 <모래시계>나 <야인시대>를 보지 않으면 서로 간에 할 말이 없던 것처럼, ‘소속감’이 그 자체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동인이 되어주고 있다. 특히 이 소속감은 자신을 집단에 대입하는 일로 이어지면서 ‘동일시’ 현상을 만들어내는데, 팬문화의 좋은 점과 나쁜 점 모두가 여기서 일어난다. 가령 야구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응원하는 팀이 경기에서 지면 무언가 나 자신도 패배한 듯한 느낌이 든다. 축구라고 해서 이는 다르지 않다. 몇 년 전 호날두가 한국의 친선 경기에 ‘노쇼’를 했을 때 기대의 높이는 있는 그대로가 충격량으로 변환됐다. 아이돌 문화에서도 팬문화는 자신이 지지하는 그룹을 음악방송 1위에 올려놓기 위한 ‘총공’등의 행위가 존재하기도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세는 정말로 ‘연결감’ 때문일까? 이 의견도 틀리지는 않으니 위의 논의를 이어가보려 한다. 디시인사이드의 만화 갤러리에는 일본 만화를 불법으로 번역해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는 일이 일상이다. 이 일의 위법성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언급해둘 건 소위 말하는 ‘달린다’는 행위다. 통상 ‘~달린다’는 표현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거나 위법소지가 있어 금세 삭제될 예정인 게시물을 빠르게 업로드하는 일을 가리킨다. 그건 야한 성인만화일 수도 있고, 일본만화의 불법 판본일 수도 있다. 관리자가 눈길을 주기 전에 빠르게 앞서 나가야 하니까 ‘달린다’고 표현하는 셈인데 이 행위의 핵심이 바로 연결성이다.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연재되는 콘텐츠를 언급하면서 서로의 감상을 공유한다. 위의 사례는 이를 공적인 자리에서 행하는 것일 뿐, 만약 그 소재가 공식적이거나 위법하지 않은 무언가라면 충분히 담론을 생성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특정 주제로 스레드가 열렸을 때 ‘자기’에 대해 말하거나, 티브이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방송을 보면서 라이브방송 댓글을 다는 일이 그렇다. 이 행위에서 댓글은 영상이 송출되는 순간에 근접하도록 반응하는 것이 목표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달린다’는 어떻게 연결감으로 이어질까? 이야기의 흐름이 동시다발적으로 제시될 때는 그 흐름을 읽는 게 중요하다. 인터넷 방송이라면 해당 방이 어떤 분위기인지를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으로 댓글을 다는 일이 가능하다. 분위기에 동떨어진 말이나 반응을 할 경우 ‘일기’를 쓴다며 밴을 당하기 일쑤다. 결국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 댓글창의 최전선에 자리해야만 이 문화를 잘 즐길 수 있다. 즉, ‘달린다’는 건 가장자리에 서는 일이다. 이 주변부에서 우리는 서로 같은 외부를 본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서 왔지만 모두 같은 하늘에 속한다. 꼭 같은 내부에 속해있는 게 아니더라도 ‘바깥’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서로는 충분히 연결될 수 있다. 우리가 위에서 말하는 연결감이란 이것과 같다. 안을 향해 웅크리기보다 밖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일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안을 자유낙하의 짜릿함으로 바꾸는 일이다. 여기서 추락은 실패나 패배 같은 말이 아니라 자신을 유일자로 만들어주는 행위에 가깝다. 단순히 중앙에서 밀려나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의 해방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영화가 ‘달리는 시간’을 품는다면 만화는 ‘시간의 끝을 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만화’를 영상화한 ‘만화영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만화영화는 팬덤 문화를 토대로 하는 ‘만화’이자, 별개의 세계로 작동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두 가지 성격 모두를 띤 이 만화영화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누군가는 이를 만화로 바라보는 한편, 영화로서 극장가를 점령한 일이 탐탁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볼 수 있겠지만 이를 둘러싼 갈등의 핵심은 결국 한국영화의 위기다. 제작비와 관객수를 통해 제시되는 수치상의 패배가 한국영화 관계자를 수치스럽게 하고 있다. 패배감이 위기의식으로 바뀌고, 이는 다시금 외부집단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로 바뀐다. 성 안에 갇힌 이들에게서 실수와 실망은 화친할 것인지 항전할 것인지를 묻는 동력원이 된다. 구체적으로 짚는다면 사람들은 ‘한국영화’의 위기를 ‘한국’의 위기에 동일시한다. 여기서 무언가 자기들끼리만 아는 것, ‘바깥’에 자리한 외부 문화는 줄곧 가장자리에 서며 자기들 내부를 공동으로 취급한다. 이처럼 내부가 외부를 바라보기 위해 올라서는 발판으로서의 기능을 잃을 때, ‘내부’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위 블로거의 언급 중, 불법으로 번역한 만화가 밈으로 정착해 사용되는 일을 지적한 점도 생각할 부분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2010년대 인터넷 문화의 일부였던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 있다. 이 만화는 2010년대 이전에 존재했던 ‘엽기’ 문화의 연장선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다. 2부에서 죠셉 죠스타와 기둥 속의 사내의 대결, 3부의 유명한 레로레로와 4부의 킬러퀸, 5부의 ‘거짓말을 하는 맛’ 등 만화 안에 밈 레퍼런스가 널렸다. 이들 밈은 당시 작품을 본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은어가 되며 팬으로서의 연결감을 확보했는데, 이는 2010년대 들어 벌어지는 SNS 열풍에 결합하며 다소 신기한 풍경으로 진화한다. 트위치와 같은 온라인 방송 플랫폼, 유튜브와 커뮤니티 등에서 특정 만화를 본 사람끼리만 쓰던 은어가 ‘바깥’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최근에서 접근해본다면 ‘~의 호흡’이나 ‘~의 악마’ 같은 표현은 <귀멸의 칼날>과 <체인소맨>에서 유래된 것이다. 위로 올라가면 <진격의 거인>에서 ‘무지성 거인’이라는 표현이 있고 <고스트 바둑왕>에서 ‘신의 한수’가 있다. 가장 유명한 건 <건담>에서 나온 ‘흑역사’라는 표현이고, <아인>에서 ‘자네라면 할 수 있어!’라는 장면이 짤방으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에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를 간접 경험한다. 일상의 한 경험을 그림으로 풀어내는 일 중에는 ‘만화’나 ‘영화’ 같은 콘텐츠를 소비했던 일도 포함된다. 이 간접경험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보고 들었던 풍경을 다시 보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풍경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서고 싶어한다. 가장자리에 선다는 것, 우치타 타츠루에 따르면 타인과의 소통에 부담을 느낀 젊은이들은 이를 마치 절벽에 내몰린 것처럼 여긴다. 이는 즉 사회생활 자체가 항상 가장자리에 서 있는 듯 부담스럽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변부’에 선 밈을 소비하는 건 우리가 아는 소통의 정의를 ‘위태로움’에서 ‘달린다’로 바꾼다. 이들 세대는 서로를 밀고 당기며 앞서 나가는 게 아니라 추락의 감정을 발견한다. 일반적으로라면 추락은 즉각으로 죽음과 연결되기 마련이지만 자유낙하의 세계에서는 아니다. 이 세계에서 추락은 ‘달린다’는 감각과 그에 따른 부여잡음의 감정을 제공한다. 알고리즘을 타고 미끄러지는 이 세상에서 ‘내부’는 외부를 위해 결속돼있다. 내부는 공동으로 추락하는 이들이 올려다보는 하늘을 바라보는 위치로서 하나의 시간을 통솔하는 기준점이 된다. 시간의 가장자리를 달려 도착한 곳은 바로 그 내부다.
<극장판 체인소맨>의 흥행을 두고서 이를 어느 한쪽으로 설명하는 건 그리 정교한 해석이 될 수는 없다. 시네필 문화는 영화에 대한 동일시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일도, 영화 굿즈를 사 모으는 일도 영화에 자기를 동일시하려는 움직임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영화 문화에서는 동일시가 아니라 주체화가 주된 안건으로 선정된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은 특정 담론에 참여하는 자신이 아니라 담론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자신을 상정한다. 여기서 사람들이 주로 행하는 건 원심력에 대항해 내부로 돌아가려는 것이지만, 있는 그대로를 내버려둔다 해도 나쁠 건 없다. 사실 남들이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자신도 그걸 좋아하기란 힘들다. 밖으로 밀려난다는 건 혼자가 되는 일과는 무관하다. 도리어 가장자리에 서는 일은 시간을 달린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다시 분화하는 과정일 수 있다. 시간은 계속해서 하나가 되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자기를 발현하려고 노력한다. 남들이 다 보는 걸 자신도 알고 싶어서 따라가고 싶어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기를 되찾고 싶어서 보는 것이기도 하다. 취향의 세계에서 이는 정말로 중요하다.
**이 글이 비평하고 있는 원글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인-무브 기고" 코너는 공개 모집을 통해 접수된 원고를 게재하는 공간으로,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지닌 필진들과 함께하기 위한 취지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원고에 담긴 의견이나 입장은 필자의 개인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서교연의 공식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려 드립니다.
'인-무브 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비평의 트랙, 평론가의 자리 (1) | 2025.11.14 |
|---|---|
| Pédés, 검은 피부, 무지개마스크 (Peau noire, masque arc-en-ciel) (0) | 2025.11.06 |
| Pédés, -와 연결된 소녀/딸 (Fille à) (0) | 2025.11.05 |
| [주권론을 둘러싼 정치적인 것의 딜레마, 1편] 조르주 바타유의 죽음과 주권 (0) | 2025.10.22 |
| 뫼비우스의 우주를 넘어서 (0) | 2025.10.18 |
| 데모스를 해체하기(Undoing the Demos), 2장 (0) | 2025.10.13 |
| 미혹을 버린 영화, 원본을 버린 클립 (3) | 2025.09.21 |
| 데모스를 해체하기(Undoing the Demos), 서문 & 1장 (0) | 2025.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