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Mickaël)
ARIEN NASELLI
번역: 임하은
나는 pédé라는 말을 절대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말에는 비하의 뉘앙스가 있기 때문이다. 근데 너는 그 말을 가끔 쓰니까, 우리가 같이 있을 때는 나도 어쩌다 한 번 쓰게 된다. 하지만 그건 pédale이나 grosse pédale 같은, 그냥 웃자고 하는 표현일 뿐이다. 나는 게이나 호모라고 말한다. 아니면 아예 아무 말도 안 한다. 스스로를 규정해야 한다는 게 짜증난다. 어쨌든, 공장 동료들 앞에서 내가 pédé라고 말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걔네는 이미 하루 종일 tapette[1]같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니까.
우리의 정체성, 삶, 경험, 싸움, 그리고 자부심은 정치적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혁명적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게 도대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 LGBTQIA+ 이슈에 관심 많은 기자인 나로서는 이런 운동권 언어에 익숙하다. 그 말들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거의 아무 의미도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확실한 건, 이런 말들은 내 35살 사촌 미카엘에게는 아무 말도 되지 않는다는 거다. 그의 주변에서는 아무도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의 남자친구인 57살의 패트리스(보레프의 Super U에서 일하는 운송 노동자)도, 그가 어울리는 다른 게이나 레즈비언 친구들, 이를테면 아이를 갖기 위해 미카엘이 정자를 기증해줬던 롤라와 그녀의 아내 제니퍼도 마찬가지다. (PMA 합법화 이전이라 둘은 방식이 없어 ‘손수’ 해결해야 했었다.)
미카엘의 정체성 — 게이, 노동자 계급, 엄마는 판매원·캐셔·요양보호사, 아빠는 전기 기사, 그리고 그르노블에서 15km 떨어진 9천 명 규모 도시 거주… 이런 것들을 두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환경에서는 공동체를 이루기도, 요구를 정리하기도, “정체성이 정치적이다”라고 외치기도 어렵다. 입을 여는 사람과 입을 닫고 사는 사람 사이의 경계는, 대부분 계급의 경계이기도 하다.
SNS에서 가끔 “게이 시스 백인”을 비판할 때, (여성·트랜스·퀴어·비백인보다 가진 특권을 자각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정작 부유한 게이 시스 백인과 고졸·월세 부담하며 주말에 차로 3시간 가는 여행이 유일한 여유인 게이 시스 백인 사이의 엄청난 차이는 너무 쉽게 묻힌다. 우리 안에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영역에서 다시 자신의 특권을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 그럼 앉아봐요, les pédés.
내 사촌을 소개할게. 우리가 서로를 부르는 방식 그대로: “여보세요, 내 쿠즈(couz)? 너 어디있니?!”
내가 대학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주변에서 봐온 그 어떤 게이의 삶과도 다른, 그리고 이제는 내 삶과도 다른, 지만 내가 너무나 잘 아는 그 삶이다. 냐하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서로 모든 걸 털어놓고 지냈으니까. 미카엘의 게이로서의 삶은 럽 문화도 아니고 (너는 약도 안 하고 술도 못 마시고), 정치 활동도 아니고 (너의 좌파적 신념은 삶에서 나온 것이지, 깃발을 들고 외치는 종류는 아니다), 화려한 업적이나 직업을 통해 인정받는 삶도 아니다.
너는 미국계 대기업 주사기 공장에서 품질 검사로 일했고, 그 덕에 2020년, 우리가 파리 아파트나 시골집에서 Zoom으로 술 마시며 버티던 동안 너는 공포를 안고 일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어떤 “평범한 게이의 삶”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일부 게이들이 더 화려한 동료들을 미워하며, 프라이드 퍼레이드의 화려함이 오히려 혐오를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말하는 그런 “정상성” 이야기가 아니다. 미카엘은 정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게이 문화 바깥도 아니다. 그는 조용한 베어게이이면서 때때로 튀어나오는 미친 게이언니같은 면도 있다. 저렴하고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변덕스러운 체중 증가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나이가 좀 있는 남자들을 좋아한다. 양자리 특유의 고집은 심한 소심함에 가려져 있고, 며칠씩 방 안에 틀어박혀 브리트니 스피어스 사진과 노래를 정리하곤 한다. 가능하다면 밤에만 살고 싶어 했을 거다 — 그는 규칙을 너무 싫어한다. 그는 극도로 예민하고, 사랑을 갈망하면서 동시에 고독도 필요로 한다. 가끔 예민해지지만, 나한테만큼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는 나를 누구보다 웃긴다 — 진짜 기저귀 차야 할 정도로, 청소년 때까지도. 우리는 의성어, 수백 개의 영화·노래·디즈니 만화 대사, 가족 썰, 야한 농담, 뮤리엘 로뱅 스케치, “Buffy contre les vampires” 장면들로 이루어진 우리만의 언어를 만든다. 그걸 사전으로 만들자는 얘기도 늘 한다. 잊어버릴까 봐.
미카엘은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사랑한다.
나도 그렇고.
나는 1990년대에 태어난 한 게이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다. 기자도 아니고, 홍보 담당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고, 아티스트도, 피아니스트도, 영화감독도, 일러스트레이터도, 그래픽 디자이너도, 건축가도, 기업가도, 유럽연합 공무원도, 광고쟁이도, 스타 헤어디자이너도, 박사 과정도, 사회학자도, 철학자도, 지리학자도, 교사도, 의사도, 변호사도, 판사도 아닌 사람.
마치 게이라는 사람이 흥미롭기 위해서는 좋은 직업, 예술 활동, 화려함 같은 게 필요하다는 듯한 세상에서 말이다.
미카엘 — “사람들 머릿속에서는, 네 직업이 너를 완전히 정의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멋져 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 뭐 해?” 하고 물었을 때, 네가 공장에서 일하는 그냥 먹고사는 직업이라고 말하면 그게 덜 멋지니까 더 이상 말을 안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나 — 그게 언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
미카엘 (머뭇거리며) —“파리에서 너랑 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은 적 있어. 거긴 다 예술계, 미디어, 정치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뿐이잖아. 내 일이 지적이지 않으니까 내가 덜 흥미롭게 느껴지는 거지… 근데 내 동료들이나 병원·마트에서 일하는 내 친구들이랑 있을 때는 그 느낌이 전혀 없어. 너 보러 파리에 가면, 그렇게 편하진 않아. 내가 공장에서 주사기 가지고 뭘 하는지 사람들이 궁금해하지도 않으면 대화가 거기서 끝나버려. 근데 생각해보면, 네가 내 동료들 사이에 있으면 너도 똑같이 불편할 거야. 서로 환경이 너무 다르니까. 일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나도 맞춰야 해. 다들 랩 듣고… 문화적인 얘기는 거의 안 하거든.” 게이라는 사람들이 사실은 이성애자보다 평균적으로 더 적은 돈을 번다는 조사들이 많이 있다. 그런 걸 보면 난 미카엘 속에서 연구자 베누아 코카르의 『Ceux qui restent(“Ceux qui restent”)』 같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을 떠올렸다. 그 책은 프랑스 동부의 쇠퇴한 시골에서 이동성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책 속에는 게이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시골에서 인생을 꾸리는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지만, 거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성애자였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라는 위치를 견디기 위해 ‘좋은 평판’을 중심으로 삶을 구성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작은 도시의 게이들은? 그들도 사회적 약자인데, 게다가 좋은 평판까지 박탈된 존재라는 뜻인가? 코카르는 내게 자신이 연구 중에 레즈비언 몇 명을 보긴 했지만 “게이 남성들은 관찰하고 있던 집단 내부에 아예 포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캐셔 게이’, ‘운반 노동자 게이’, ‘실업자 게이’, ‘서빙 알바 게이’, 그리고 ‘공장 노동자 게이’의 삶을 직접 이야기해보려 한다. 분노도 않고(일터의 스케줄 빼고), 파괴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화려하지도 않은 이 삶을.
나는 이 삶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히 여긴다. 그는 나에게 형제 같은 존재이자, 동시에 가장 친한 친구 같은 존재다. 이보다 더 강한 사랑의 조합은 없다. 인터넷에 게이 사촌이라고 검색하면, 엘리자베스 2세가 멀찌감치 사촌 중에 화려한 게이 귀족이 있었다는 기사나 크리스틴 부탱이 자기 친사촌과 결혼했다는 얘기, 그리고 몇 페이지 넘기면 포르노가 나온다. 크리스틴 라가르드가 “It Gets Better” 캠페인에서 가톨릭 보수 가정에 태어난 자기 사촌의 커밍아웃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털어놓는 영상도 있다. 그 사촌은 어머니가 임종 직전일 때에야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난 항상 알고 있었어. 왜 이제야 말한 거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뒤에 슬픈 음악이 나오니까 좀 울컥하기도 한다, 설령 말하는 사람이 전IMF 총재라 해도. 검색을 더 하면, 우리 둘의 프로젝트였던 “The Cousins”도 나온다. 우리 자신과 게이 아이콘들에 대한 일종의 자축 카바레였다. 페이스북 페이지는 1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다. 우리는 같은 문신도 새겼고, 디지털 카메라로 밤새 굴리며 영상을 찍어 올렸다. 150명 팔로워에게 보여주려고 “J’ai pas vingt ans!” 안무를 밀리미터 단위로 연습하고, 브리트니 스피어스, Kylie Minogue, Lady Gaga를 주제로 각종 패러디 시나리오를 쓰면서. 사람들은 지금도 그때의 퀄리티에 놀란다. 우리가 10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TikTok에서 유명해졌을 거라고 농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어른이 됐다. 에너지는 더 쉽게 고갈되고, 현실의 걱정과 시간 부족이 우리를 짓누른다. 처음엔 버티지만, 결국 삶이란 게 끝까지 달리는 경주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거기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미카엘은 공장의 4X8 이틀 아침, 이틀 오후, 하루 밤… 이 미친 스케줄 때문에 잠도 제때 못 자기 일쑤다. 시간보다 더 큰 문제는, 계급이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거의 평행해 보이던 두 선이 조금씩 멀어지듯 사람들을 떼어놓는다는 것이다. 같이 자란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가끔은 마치 우리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예전에 나는 그걸 동네의 무게라고 말하곤 했다. 미카엘이 속해 있던 보레프의 동네는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엔 좋은 곳이었지만, 그만큼 사람을 바깥 세상으로 밀어내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미카엘은 늘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챙겨야 했다. 게다가 엄마 아빠도 늘 열심히 일해야 했고, 집안 사정도 넉넉하지 않았고, 이삿짐도 여러 번 옮겼고, 마음 편히 숨 돌릴 틈이 거의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운이 좋았다. 내 부모님은 내 공부에 계속 관심을 가져줬고, 내가 다른 데로 가보겠다고 하면 멀리라도 데려가주었다. 나는 “다른 세상”을 보는 법을 미리 배웠다. 미카엘에게는 그런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는 동네 바깥을 향해 마음속에 문을 열기까지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게 그를 덜 똑똑하게 만들거나 세상에 덜 민감하게 만든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는 사람의 감정 변화에 아주 민감하고, 누군가 상처받는 걸 누구보다 먼저 눈치챈다. 그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할 뿐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함께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집에 살았는지, 누가 부모였는지, 학교에서 어떤 선생님을 만났는지, 집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받았는지… 그런 차이들이 시간이 지나며 다른 나침반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다른 나침반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른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나는 그르노블을 떠나 공부하러 갔다. 그러고 파리로 갔다. 그리고 또 다른 나라로 갔다.
그동안 미카엘은 그 자리에 남았다. 일을 해야 했고, 월세를 내야 했고, 엄마를 돌봐야 했고, 동네를 떠난다는 건 그에게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이동했고, 그는 남아 있었다. 이건 단순한 지리적 차이가 아니다. 계급이라는 이름의 구조는 늘 같은 곳에 사람을 붙잡아 두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관계는 멀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고, 아무 말 없는 침묵도 편하게 공유하고, 서로의 집에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그런 단단한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우리가 같은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강둑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 손을 흔들 수는 있지만 갑자기 건너갈 수는 없는 그런 거리. 어느 순간, 나와 미카엘의 삶은 서로를 향해 기대어 있는 듯하면서도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둘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여름이면 우리는 같은 강에서 헤엄치곤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우리가 발을 담그는 물은 서로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멀어진 건 아니다. 오히려 이 차이를 아주 섬세하게 의식하면서 더 조심스럽게 서로를 붙잡고 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게이 커뮤니티를 하나의 집단처럼 말한다. “LGBTQIA+ 공동체”, “우리의 투쟁”, “우리의 역사”, “우리의 문화” 같은 표현으로. 하지만 그 “우리”는 항상 동일한 우리가 아니다. 게이 남성들을 하나로 묶어서 같은 욕망, 같은 문화, 같은 언어를 쓴다고 말하는 건 정말로 잘못된 상상이다. 마치 게이가 되면 자동으로 화려함과 정치적 자의식을 갖게 되는 것처럼. 그러나 미카엘이 보여주는 삶은 그렇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는 퀴어 이론도 모르고, Queer Nation의 역사도 모르고, Stonewall도 자세히 모른다.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런 지식은 대부분 대학, 책, 행사, 네트워크를 타고 전달되는데 그에게는 그런 ‘통로’가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질문하게 된다. 게이라는 정체성은 대체 어느 순간, 어떻게 배우는 걸까? 나는 이론과 문화와 상징과 역사를 통해 게이라는 나를 구성해왔다. 그러나 미카엘은 삶 자체로 게이가 되었다. 몸과 마음, 감정과 두려움, 사랑과 상처를 통해. 우리가 사용하는 ‘게이 문화’라는 것이 사실은 특정 계급이 가진 언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점점 더 크게 다가왔다. 내가 어느 날 그에게 물었다. “네가 느끼기엔, 넌 게이 공동체의 일부라고 생각해?”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사실… 잘 모르겠어. 게이라는 건 내 안에 자연스럽게 있는 거지 어떤 집단에 속하려고 만든 건 아니니까. 내가 속한 공동체는 직장 동료들이고, 엄마고, 내가 함께 지내는 친구들이고… 게이라고 해서 특별히 따로 자리를 찾고 싶지는 않아.”
그는 계속 말한다.
“내가 파리에 살았다면, 아마 좀 다를 수도 있겠지. 근데 여기서는… 게이라고 해서 뭘 더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냥 조용히 살아가는 거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갑자기 너무 뚜렷하게 깨달았다. 게이라는 정체성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깃발이고, 언어이고, 정치이고, 문화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사랑하고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이 둘은 그 어떤 것도 서로보다 더 옳지 않다. 나는 미카엘에게 게이라는 정체성을 ‘설명’하거나 ‘이론화’하는 순간보다 그냥 함께 앉아 이야기하는 순간에 그의 삶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그는 나보다 적게 배우지 않았고, 단지 다른 방식으로 배운 것이다. 책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정치가 아니라 삶으로. 그리고 그 방식은 전혀 덜 중요한 방식이 아니다. 어릴 적 우리는 함께 놀면서 서로를 지켜봤다. 내가 공부에 몰두할 때, 미카엘은 음악과 춤과 영상에 몰두했다. 그는 밤마다 방 안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를 반복 재생하며 영상과 사진을 정리하고, 편집하고, 믹스했다. 누구도 그 열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삶 그 자체였다. 우리가 만든 “The Cousins”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였다. 페이스북에 영상을 올리고, 수십 명의 팔로워와 소통하며, 춤과 노래를 정밀하게 연습했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가장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현실적인 걱정과 시간 부족은 우리에게 계속 압박을 준다. 특히 미카엘은 공장에서 4x8 스케줄로 일하며 잠조차 제대로 못 자고, 피로와 싸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놓치지 않는다. 어린 시절 함께했던 시간은 지금의 우리 관계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비록 삶의 속도와 환경은 다르지만, 서로의 존재는 여전히 가장 큰 힘이 된다. 미카엘은 가끔 내 삶과 나의 세상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삶과 비교할 때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그는 직장에서 게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고, 사랑을 공공연히 말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조용히 지켜야 했다. 그 경험은 때때로 그에게 고립감을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삶을 견고히 지켜냈다. 그는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자신의 필요보다 상대의 편의를 먼저 생각한다. 그런 그의 성격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그를 특별하게 여긴다. 심지어 우리 할머니조차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함께 여행을 떠날 때면 그는 평소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작은 모험에도 설레고, 새로운 풍경 속에서 즐거워한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 그와 함께한 순간들을 떠올린다. 서로 손을 잡고, 웃으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던 모습. 그리고 우리는 종종 꿈을 나눈다. 언젠가는 두 사람만의 여행을 떠나자고. Thelma et Louise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세상 모든 걸 잠시 잊고 떠나는 것. 그 순간이 오면, 어떤 장애물도 우리를 막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안다. 나이 들어서도, 함께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미카엘과 나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서로를 통해 반사된다. 나는 그가 가진 세심함과 감수성, 그리고 삶을 견디는 힘을 배워왔다. 그는 나에게 웃음과 위안을 주고, 나는 그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준다. 우리는 서로에게 단순한 사촌,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다. 형제 같기도 하고, 가장 친한 친구 같기도 하며, 가끔은 삶의 거울처럼 서로를 비춘다.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사랑과 유대, 그리고 이해의 깊이를 경험한다. 미카엘은 평생 게이라는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체득했다. 사회적 규범이나 외부 시선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감각으로 삶을 살아왔다. 그 삶은 화려하지 않지만, 정확하고, 솔직하며, 진정성이 가득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로 남아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이해하며, 함께 웃고, 함께 눈물짓는 순간들은 어떤 세상의 편견이나 계급 구조보다 강하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 꿈꾸곤 한다. 언젠가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서로를 의지하며, 자유롭게 떠나는 여행. 그 순간이 오면, 세상의 어떤 장애물도 우리를 막지 못할 거다. 나이 들어서도, 우리는 함께일 것이다. 끝으로, 미카엘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삶은 서로에게 닿아 있어. 그게 가장 큰 축복이야.”
그 말 속에서, 나는 늘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정체성, 계급, 환경, 나이와 상관없이, 사랑과 이해, 그리고 서로를 향한 관심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가장 빛나게 만든다는 것. 미카엘과 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서로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충실하며.

[1] 동성애자, 특히 게이들을 향한 혐오 표현
- 도서정보: Pédés, collectif, 2023, Points.
https://www.editionspoints.com/ouvrage/pedes-florent-manelli/9791041410224
- 엮은이: Florent Manelli
- 지은이: Jacques Boualem, Camille Desombre, Adrien Naselli, Julien Ribeiro, Ruben Tayupo, Nanténé Traoré et Anthony Vin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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