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론을 둘러싼 정치적인 것의 딜레마
강길모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연재를 시작하며
푸코는 『안전, 영토, 인구』 강의에서, 사회주의 정치의 기획이 성립하려면 다른 통치성과는 구별되는 사회주의 통치성이 발명되어야 했으나 그러한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주권적 폭력에 대한 비판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 채 국가폭력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주의 국가들과 대동소이하거나 더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 그 외의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국가장치에 통치를 의존했었던 사실 등은 현실사회주의가 사회주의 이전의 국가들과 다른 통치성을 발명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예시일 것이다.
반면 오늘날 전 지구적 차원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지배적인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자신만의 고유한 통치성을 발명해냈으며, 이 통치성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폭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신자유주의 통치성 자체만이 현대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주권 개념이 갖는 문제 역시 여전히 현재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상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자신의 고유 영역인 경제는 말할 것도 없을뿐더러 국가주권, 인종주의, 젠더 권력 등 다양한 장치들과 결합하고 있고, 이 결합을 통해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력을 총체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많은 대안적 담론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푸코의 지적대로 사회주의 통치성은 여전히 현실 정치 속에서 충분히 발명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현실사회주의가 보여주었듯, 기존의 혁명 담론과 혁명 이후에 대한 담론들은 주권과 폭력의 문제를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채 유지되었다. 둘째, 오늘날의 비판적 담론들은 대부분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특정 국면들을 지적하는 데 머물러 있으며, 통치성과 주권을 함께 관통하는 폭력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현존하는 비판들은 현실에 대한 반테제로 기능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사회주의 통치성을 실질적으로 구상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것이다.
기후위기와 국제사회의 신뢰성 붕괴, 젠더와 인권 문제에 대해 억압적으로 작동하는 국가 및 문화적 권력, 그리고 여전히 전통적 좌파 정치가 반복하는 주권 중심적 폭력의 문제를 고려할 때, 우리는 단순한 신자유주의 비판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기획을 필요로 한다. 필자가 말하는 사회주의 통치성은 기존의 국가 주권적 통치성과 구별되며,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관리 장치들과도 다른 성격을 가져야 한다. 이는 첫째, 주권적 폭력의 예외상태에 의존하지 않고 정치적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는 방식, 둘째, 시장 합리성과 통치 기술에만 매이지 않고 사회적 연대와 평등을 제도화할 수 있는 방식, 셋째, 젠더·인종·생태적 차원을 포함해 권력의 교차적 구조를 다층적으로 포착하고 변형할 수 있는 방식을 포함한다.
따라서 본 연재에서 되짚어보려는 것은 단지 주권과 정치적인 것에 대한 기존 비판을 재현하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이 비판들이 드러내는 통치성의 성격을 연결·분석함으로써, 주권과 통치성의 이중적 메커니즘을 동시에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탐색이 미래의 사회주의 통치성을 사유하기 위한 필수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1편. 조르주 바타유의 죽음과 주권
1. 조르주 바타유의 주권론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주권론은 주권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단순한 정치적 권위나 법적 근거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는 주권을 국가나 주권자가 행사하는 일방적 권력의 형태로 이해하는 통념을 벗어나, 죽음을 감수하거나 타자에게 부과함으로써 드러나는 과잉의 권력으로 해석한다. 바타유에게 주권은 노동과 유용성의 질서에 종속되지 않는 낭비와 초과의 차원에 속하며, 죽음은 그러한 주권이 가장 극단적으로 발현되는 사건이다.
이와 같은 바타유의 통찰은 기존의 주권 이론이 과소 평가했던 개체적 죽음과 주체적 주권의 내적 연관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철학적 위상을 갖는다. 그는 주권을 단순히 사회적 계약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사유하고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초월적 체험으로 파악한다.
특히 바타유는 이러한 주권의 사유를 통해, 근대 정치철학이 지향해온 보편주의적 합리성과 그로부터 파생된 제도 중심의 정치관을 비판한다. 그에게 주권은 결코 제도나 규범에 의해 보장되는 권력이 아니라, 인간이 죽음의 가능성 속에서 스스로의 유한성을 체험하는 그 극단적 순간에서만 드러나는 실존적 사건이다. 다시 말해, 바타유의 주권론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근본적 한계—즉, 죽음—을 외면한 보편주의적 정치이론에 대한 급진적 비판으로 기능한다.
2. 일반경제의 논리와 자유로서의 주권
생명체와 인간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필요nécessité가 아니라 바로 그 반대인 ‘사치/과잉luxe’인 것이다.
- 『저주받은 몫』[1]
바타유의 주권론을 논하기에 앞서, 그것의 전제가 되는 일반경제론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타유에 따르면 일반경제란 근대 경제학이 전제로 하는 제한경제, 즉 물질의 생산과 교환, 효용과 축적에 국한된 관점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일반경제는 자연적·우주적 차원에서의 에너지 흐름 전체를 포괄하며, 인간의 경제 활동 역시 이러한 거대한 순환 속의 일부로 이해된다. 이러한 일반경제론에서 부의 생산은 단순히 물질의 생산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와 욕망, 과잉의 생산까지 포괄하는 의미를 갖는다. 바타유의 이러한 생각은 마르셀 모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교환과 소비가 단순한 물질적 행위가 아니라 정신적·사회적 가치를 내포하며, 그 과정에서 특정한 권력관계가 형성된다는 분석틀에서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바타유의 일반경제의 핵심은 과잉dépense이다. 바타유는 인간 존재가 단순히 필요nécessité의 충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치luxe와 낭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그는 소비를 생산적 소비와 비생산적 소비로 구분하면서, 전자가 노동과 유용성의 질서 속에 포섭되는 반면, 후자는 효용과 목적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인간의 불안을 소진시키고 자유를 드러낸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일반경제의 시간성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효용의 질서는 지속과 축적의 시간을 따르지만, 낭비와 소비는 순간의 파괴와 소진 속에서 발생한다. 죽음은 이 순간적 소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주권과 죽음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난다.
3. 희생제의와 자유의 문제
희생제의는 그 대표적 사례다. 바타유에게 희생제의란 과잉 생산된 사물과 욕망, 부를 공동체적으로 소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실용적 목적을 전혀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효용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무의미한 행위’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반경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실천이 된다.
희생제의 속에서 죽음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초과의 힘으로 전환되며, 그 과정에서 주권의 가장 심원한 차원이 노출된다. 기적이 등장하여 과잉생산된 부의 의미를 맛보는, 자기파괴적 주체의 순간이 희생자에게 부여되고, 공동체가 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바타유에게 희생제의는 단순히 공동체 유지의 수단이 아니라, 사물의 세계 속에서 신성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사건이다. 기적은 초월적 구원의 표지가 아니라, 낭비와 소진의 행위를 통해 내재적으로 발생하는 초과의 체험이며, 주체가 그 체험 속에서 자기 한계를 초과하는 순간이다.
물론 바타유가 희생제의를 긍정하기 위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희생제의의 원인을 공동체의 제한경제적(물질적-제도적) 성장이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 지점으로 간주한다. 제한경제의 성장에 의해 과잉생산된 부는 삶의 균형을 깨고, 변화시키며, 불안을 불러오는 힘이 된다. 이미 제한경제의 성장 속에 효용과 목적에 따라 얌전히 머무르는 삶을 위협할 과잉된 에너지의 생산, 즉 일반경제적 생산도 깃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잉생산된 부를 공동체가 낭비하고 소진시키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삶의 불안을 소진시키는 것이며 이 소진을 통해 유용성의 차원에 종속된 개체들을 순간으로서의 자유를 체험하는 주체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바타유의 생각이다. 그리고 가장 극단적인 소진의 형태라 할 수 있는 희생제의를 포함하여, 여러 형태의 부의 소진을 가능케하는 낭비를 통해 확보된 자유의 체험이 바로 바타유가 보는 주권의 순간이다. 그래서 바타유에게 주권은 단순히 주체의 자율적 결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체가 자신을 구성하는 한계(죽음과 효용의 질서)를 초과하며, 자기 파괴의 가능성 속에서 경험하는 극한의 자유—즉, 타자성에 자신을 개방하는 자유—를 의미한다. 그런데 부의 분배는 자기 구성의 한계 안의 행위, 즉 낭비와 소진을 연기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기에 결코 자유를 확보할 수 없다.
그러나 희생제의는 일반경제의 성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경제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며, 또 그 유지 속에서만 기능한다. “파괴적 축제의 폐허로부터 보존되는 것은 오로지 공동체뿐”이며 “희생제물은 그저 폭력에 내맡겨진다”.[2] 궁극적으로 이 제의는 바타유적인 의미에서의 주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며 그저 공동체를 유지시킬뿐이자 여전히 제한경제적인 메커니즘에 종속된 것, 즉 사물들의 세계의 메커니즘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즉 희생제의는 주권의 극적 현시를 보여주면서도, 결국은 공동체 유지라는 제한경제의 메커니즘에 종속된다. 그리고 진정한 주권—자유의 확보로서의 주권—을 생산하지 못한다.
결국 바타유에게 주권은 제한경제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의미한다. 일반경제의 핵심인 과잉과 소진의 논리—즉 소모와 낭비의 윤리—는 곧 바타유적 의미의 주권을 이해하는 근본 토대가 된다.

4. 찰나의 시간성과 기적의 체험
바타유의 분석에서 핵심은 주권과 죽음 사이의 관계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저주받은 몫』에서 희생제의는 주권이 출현하는 한 장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과잉 생산된 재화와 욕망, 나아가 생명을 소진시키는 행위로서, 효용의 질서 바깥에서 죽음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의미화한다. 그러나 바타유가 비판하듯, 희생제의의 사회적 종교적 의미는 사물들의 세계의 메커니즘에 종속된 채 사회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할뿐이다. 바타유가 생각하는 주권의 의미는 단순한 희생제의의 사회적·종교적 의미를 넘어선다. 그는 『주권』에서 주권을 “기적의 맛”으로 비유한다.
내 생각엔, 본질적으로, 만일 노동자가 스스로에게 와인 한 잔을 허락한다면 이는 그가 삼 킨 포도주 속에 어떤 기적 같은 맛의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맛이 정확히 주권의 근본 기반 fond이다.
- 『La Souveraineté』[3]
바타유에게 주권은 노동과 생산의 질서에 예속되지 않고 잉여를 소비하는 경험 그 자체와 맞닿아 있다. 그는 기적의 경험을 주권의 근본 기반으로 파악한다. 노동자가 스스로에게 와인 한 잔을 허락할 때, 그것은 단순한 소비 행위가 아니라, 삶 속에서 기적 같은 순간적 초과를 경험하는 행위이다. 주권은 바로 이러한 순간적 경험 속에서 드러난다.
주권의 순간적인 경험성을 도입하며, 바타유가 대화하는 이론은 베르그송의 생성 철학이다. 베르그송에게 환경에 따라 그저 적응하는 ‘적응적 진화’는 악의 본질이며, 선의 본질은 끊임없는 생성이다. 바타유가 희생제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현실사회주의를 비판 할 때, 더 나아가그가 일반경제를 말할때 정신적인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이는 그가 환경에 그저 적응해서 상황을 유지하는 것을 악으로 간주하고, 끊임없는 생성을 선으로 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베르그송은 『시간과 자유의지』에서 지속의 시간성에 독특한 위상을 부여한다. 베르그송에게 순수지속은 과거와 현재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시간의 구조를 형성하며, 물질과 완전히 독립된 것이다. 그는 "순수한 지속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연속적인 질적 변화의 형태"라고 말하며 끊임없는 생명의 변화를 순수지속의 시간으로 간주한다. 바타유는 베르그송의 지속의 시간성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진 않으며, 지속의 시간성보다 찰나의 시간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만 바타유의 찰나의 시간성은 베르그송의 순수지속과 대립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순수지속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변형했다고 보는 편이 적합하다.
그러나 찰나는 모든 지식의 바깥에 그 이하에 혹은 그 너머에 머무른다. 우리는 시간 속의 규칙적 연쇄(enchaînement)를 상수des constantes를 인식하지만 작용의 이미지와 흡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즉 장래avenir에 종속된 시간 속 연쇄에 종속된subordonnée 예속적인 존재 양태를 닮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찰나에 대해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건드리는 것 , 우리에게 지고로 souverainement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식작용(opération)은 주권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자마자 멈춘다.
- 『La Souveraineté』[4]
바타유에 따르면 인식 작용은 주권을 포착하려는 순간 멈추어 버린다. 왜냐하면 찰나는 지속의 연속성을 중단시키며, 효용과 축적의 질서를 벗어나는 초과의 순간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권은 연속적 시간의 질서 속에서 인식될 수 없으며, 오직 순간적 과잉의 체험으로만 드러난다. 즉, 주권은 지식이나 인식작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권은 개념적 파악을 초과하는, 오직 체험될 뿐인 순간적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의 생성과 경험은 분리 불가능하다.
5. 파시즘의 일반경제적 구조
이처럼 바타유의 일반경제론은 주권을 죽음과 기적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한다. 주권은 단순히 정치적 권위의 근거가 아니라, 죽음을 감수하거나 타자에게 부과하는 행위 속에서, 그리고 효용을 넘어서는 기적적 체험 속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권은 단순한 제도적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가 죽음과 기적이라는 두 차원에서 자신을 어떻게 위치시키는가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바타유에게 주권은 언제나 ‘살아 있는 자가 죽음을 직면하고도 소멸되지 않는 체험’의 자리이며, 이는 초과와 낭비, 즉 일반경제의 메커니즘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바타유의 통찰은 파시즘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파시즘의 대중적 열광을 단순히 정치적 선동이나 경제적 불만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주체가 ‘기적을 체험하려는 충동’을 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조직한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파시즘의 열광은 효용과 합리성의 질서가 억압해온 초과의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방출시키며, 대중이 스스로를 ‘죽음을 감수하는 공동체’로 체험하게 만드는 일종의 종교적-주권적 체험이었다. 바타유의 언어로 말하면, 이는 낭비와 희생의 구조가 국가적 차원에서 재전유된 경우이다.
파시즘은 이러한 초과의 에너지를 “기적의 형식”으로 포장하고, 지도자(주권자)를 통해 대중이 초월적 통합을 체험하는 장치로 전환시킨다. 즉, 파시즘은 낭비와 초과의 일반경제적 경험을 집단적 숭배의 형태로 조직하여, 주권의 메커니즘을 전체주의적 질서 속에 포섭한 것이다. 대중은 이 체험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초월한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타자에게, 혹은 국가의 이름으로 위임함으로써 주권적 행위를 대리 경험하게 된다. 바타유가 보기에 파시즘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기적의 체험이 자유의 초과로서가 아니라 권력의 재생산 메커니즘으로 전락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결국 파시즘은 바타유가 말하는 일반경제의 충동―초과, 낭비, 죽음, 기적의 체험―을 완전히 억압하지도, 완전히 해방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그것을 국가적 질서 속에 봉합함으로써, 인간의 초과적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정치 형태로 기능한다. 바타유의 관점에서 보면, 파시즘은 여전히 제한경제적 체제들처럼 죽음을 관리하는 체계이며 동시에 기적을 재현하는 체계이다. 바로 이 점에서 파시즘은 근본적으로 주권의 일반경제적 구조를 왜곡된 형태로 재현한다고 할 수 있다. 파시즘은 대중이 스스로 주권적 체험을 수행할 수 없도록 만들고, 그 체험의 권한을 지도자(수령, 국가)에 위임하게 만든다. 즉, 바타유가 말하는 초과의 체험이 대리적 구조로 전이되어, 대중은 기적을 체험하는 대신, 기적을 보는 자로 전락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파시즘은 일반경제의 에너지를 억압하면서도, 그 잉여를 정치적으로 재활용하는 체계가 된다.
바타유는 현실사회주의 또한 이와 유사한 한계를 지닌다고 본다. 현실사회주의는 분배와 노동의 질서를 중심으로 하는 제한경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과잉과 낭비의 차원을 억압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주권을 왜곡했다. 그는 이러한 체제들이 모두 죽음을 연기하거나 은폐함으로써, 주권의 근본적 사건—죽음의 체험을 통한 자유의 초과—을 제거해 버렸다고 비판한다. 결국 현실사회주의 역시 죽음을 관리하는 체계로서,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제한경제적 질서에 머물러 있었다.
6. 가라타니 고진 비판과 보편주의의 망각
이러한 바타유의 일반경제-주권에 대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바타유의 일반경제 이론과 근연성이 있는 보편주의 모델의 한 가지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가라타니 고진은 『세계사의 구조』를 비롯한 자신의 저서에서 주권, 네이션, 경제의 삼항계를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세 가지 근본 구조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 삼항계가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얽혀 있는 교환형태에 근간을 두고 있기에, 호수성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새로운 교환형태를 통해 이 삼항계의 악무한적 성격으로부터 벗어나서 보편주의적 세계공화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분석을 보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주권은 태생적으로 죽음을 강요하는 폭력의 권력이다. 국가장치에 의해 죽이고, 죽임 당하고, 전쟁에 내몰리는 주체들을 만들어내는 권력이 가라타니 고진이 보는 주권의 핵심이다. 반면 네이션은 집단적 동일성을 근거로 그 죽음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다. 주권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그리고 타자를 살해하는 상황에 놓인 주체에게 과거의 종교가 취했던 죽음의 공포와 불안, 무의미를 해소하는 근대적 형태가 바로 네이션이다. 또,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를 말하는데, 무한한 교환과 분배의 질서가 신용을 통해 유지되는 구조로서 파악된다. 주권의 관점에서 경제를 다시 정의하자면, 주권이 죽음의 순간적 강제를 통해 공동체를 조직한다면, 경제는 지속적인 순환 과정을 통해 사회 질서를 안정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고진의 관점이다. 고진이 가진 주권에 대한 정의와 생각은 바타유와 사뭇 다르고, 경제에 대한 용어사용법도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권을 둘러싼 문제설정 및 교환관계에 입각한 일반경제론이 도입되고 있다는 점만큼은 바타유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고진의 삼항 구조가 바타유와 유사한 까닭은 그의 일반경제론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진은 바타유와 마찬가지로 모스로부터 교환의 메커니즘이 단순히 물질적 교환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정신적 가치와 함께 권력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고진의 삼항계 구분을 바타유의 일반경제론을 경유하여, 혹은 바타유의 일반경제론을 통해 보완해서 다시 바라보면, 고진의 삼항계 구분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바타유는 교환과 권력의 메커니즘을 제한된 물질적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초과와 낭비, 그리고 죽음까지 포함하는 일반경제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따라서 고진이 말하는 자본경제의 순환은 주권과 네이션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이미 처음부터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유지하는 제한경제적 질서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바타유적 의미에서 볼 때, 개체의 죽음을 무한히 유예하거나 지연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즉, 이때 경제적 신용은 죽음을 끊임없이 유예하고 연기하며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바타유는 이미 『저주받은 몫』에서 근대 경제체제 전체를 제한경제라는 이름으로 강하게 비판하며, 제한경제가 죽음을 무한히 연기하고 은폐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일반경제에 의한 주권의 순간이 이러한 제한경제에 의해 왜곡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바타유는 근대 경제이론 일반을 제한경제로 비판할뿐, 시장경제가 주권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 현재의 우리에게 다소 아쉬운 부분인데, 이를 고진의 작업을 바타유적으로 확장해서 본다면 이러한 공백을 메꿀 수 있을 것이다. 즉, 자본주의 경제가 특별히 더 제한경제에 의한 일반경제의 왜곡으로서, 즉 주권의 죽음 강제와의 긴장 관계를 맺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지연시키는 이중적 구조의 장치로서 기능하며, 이러한 장치가 신용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하이데거의 ‘죽음으로의 결단(Sein-zum-Tode)’ 개념을 참조하면 이러한 논의는 또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개별 존재가 자기 유한성을 자각하는 실존적 계기였다. 바타유 역시 죽음을 개별 존재가 불안과 무를 자각하는 실존적 계기로 본다는 점에서는 하이데거와 접점을 갖는다. 그러나 바타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을 단지 개인의 실존적 사건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질서 속에서 주권의 본질이 드러나는 사건으로 파악한다. 이는 주권과 죽음, 그리고 네이션이라는 장치가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심화된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도록 만든다. 네이션은 집단적 동일성에 기반하여 죽음을 정당화하는 장치이고, 주권은 죽음을 강제하는 권력이므로, 양자의 관계는 단순한 병렬이 아니라 동일한 죽음의 정치학 위에서 맞물려 작동한다.
이처럼 고진의 삼항 구조는 하이데거적 실존과 바타유적 주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주권과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경제적 장치들의 복합적 작동을 조망할 수 있는 이론적 틀로 새롭게 읽힌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해석은 고진의 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도 작용한다. 고진의 삼항 구분은 지나치게 도식적일 뿐 아니라, 주권-죽음의 문제를 충분히 사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네이션과 미학』에서 네이션이 죽음과 맺는 관련성과 욕망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세히 다루었지만, 주권과 경제의 차원에서 정확하게 죽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깊이 탐구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고진이 제시하는 대안 모델, 즉 보로메오의 매듭이라 불린 삼항계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제시된 ‘어소시에이션 모델’에서 드러난다. 고진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평등을 기입하고, 그 평등의 원리인 이소노미아에 입각한 결사체 모델, 즉 어소시에이션 모델을 통해 주권·네이션·경제의 악순환을 극복하려 했다. 상호동등성과 호수성 원리에 입각해, 자유롭게 서로가 서로를 소비하는 연대를 통해 삼항계의 순환을 깨고 새로운 일반경제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고진의 이론에서 바타유가 지적한 낭비와 소진의 차원, 그리고 이와 맞닿아 있는 기적과 죽음의 문제가 사라져 버렸다. 다시 말해, 고진의 어소시에이션 모델은 분배와 평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보편주의 모델을 제시했으나, 자신이 이미 지적했던 주권이 드러내는 죽음의 강제와 맞닿아 있는 일반경제의 초과와 과잉, 낭비, 소진의 차원들을 모두 삭제해 버렸다.
요컨대 바타유의 관점에서 보면, 고진의 이론은 두 가지 수준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 삼항계 내부에서 죽음의 문제를 주권-네이션-경제의 연쇄 속에 통합하지 못한 채, 이들 간의 교차를 도식화한다. 둘째, 대안적 모델로 제시된 어소시에이션 모델에서는 아예 죽음과 초과의 차원이 삭제되어, 교환의 균형과 평등만이 남게 된다. 이로써 고진은 바타유가 ‘기적’이라 부른 초과적 체험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인간을 죽을 수 없는 존재로 가정한 보편주의 모델의 오류를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바타유의 주권론을 통해 고진의 모델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면, 그의 어소시에이션 모델은 코스모폴리탄적 보편주의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망각하고 기적을 제거한 모델로 드러난다. 이러한 보편주의 모델들은 인간을 죽을 수 없는 존재처럼 전제하며, 낭비와 초과 대신 합리적 분배의 경제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 모델은 기적을 체험하려는 주체의 충동, 즉 일반경제적 메커니즘의 작동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고, 이 작동을 바로잡아야 할 오류처럼 취급하는 한계를 갖는다. 즉, 우리가 바타유를 따라간다면, 죽음을 망각한 보편주의는 결국 주권과 정치의 가장 심층적인 자유의 차원을 제거해 버리고, 인간 실존과 공동체 질서가 직면하는 불가피한 초과들을 은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오늘날의 여러 대안 담론들 중 하나, 즉 주권과 죽음의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거나 그것을 손쉽게 다른 차원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론의 사례 중 하나이다. 분명히 바타유가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며 강조한 것은, 주권과 죽음의 문제는 경제이론이나 사회이론이 전제하는 경제주의적(바타유의 관점에선 제한경제적) 인간학적 도식으로는 결코 회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바타유가 보기에 현실사회주의는 노동과 생산의 질서에 몰두한 나머지, 잉여와 초과의 소비,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기적적 체험의 차원을 배제함으로써 결국 새로운 주권 개념을 발명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보편주의적 기획들은 이러한 발명의 실패를 종종 망각하거나, 과소평가 하곤 한다.
7. 결론
이 글은 조르주 바타유의 일반경제론을 전제로 주권론의 철학적 토대를 해명하고, 죽음과 기적의 문제를 중심으로 주권의 본질을 조명하였다. 이를 통해 바타유의 관점에서 주권은 단순히 법적·정치적 근거로서 기능하는 제도적 권력이 아니라, 죽음을 감수하거나 타자에게 부과하는 행위이자 효용의 질서를 초과하는 기적적 체험 속에서 드러나는 과잉의 권력이며, 때로는 극한의 자유에 대한 체험 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어 현실사회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의 사유가 갖는 정치적 함의를 짚었고,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과 마르틴 하이데거와의 비교를 통해 바타유의 사유가 지닌 독창성을 강조했다. 결국 바타유의 주권론은 현대 정치철학이 놓치기 쉬운, 죽음과 초과의 문제를 사유의 중심으로 복귀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론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탁월한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바타유가 제시한 생성 혹은 성장에 대한 사유를 오늘의 우리가, 그리고 새로운 사회주의적 통치성을 모색하는 이론이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우선 그의 사유는 근본적으로 난해하고 추상적이어서, 추상적인 철학자들의 논의 중에서도 이를 곧바로 실천적 함의로 전환하기 어려운 편이다. 따라서 바타유의 개념들을 적어도 현대 정치철학이나 사회이론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번역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특히 그가 에로티즘의 문제에서 전개한 생명의 과잉과 죽음의 향유에 대한 논의는, 일반경제와 주권 개념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 그리고 이를 사회주의 통치성의 발명으로 이어 나가기 위해 반드시 재검토되어야 할 영역이다. 바타유가 말하는 과잉생산과 생성의 윤리가 자본주의적 확장주의 경제나 물질적 풍요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통치성의 차원에서 어떠한 주체성의 생산을 의미할 수 있을지는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주권을 궁극적 자유의 문제로 전환해서, 자유의 직접적 체험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그의 급진적인 생각은 사회주의 통치성의 구상에서 큰 요점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제한경제의 메커니즘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일반경제의 성장과 소진이 어떠한 조건 하에서 가능한지, 그리고 일반경제가 제한경제와 맺는 근본적인 관계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상세한 해명이 요구되어야 한다.
이 글은 이러한 해석과 번역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바타유의 주권과 죽음의 문제를 중심으로 그의 사유의 핵심 구조를 정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에로티즘에 대한 논의를 충분히 포함한 보다 포괄적인 분석을 시도하지 못한 것은 이 글의 명확한 한계이지만, 이는 향후 연구에서 바타유의 생성의 윤리와 사회주의 통치성의 욕망의 문제를 함께 재사유하려는 과제로서 남겨둔다.
참고문헌
Georges Bataille, Volume 8: L'Histoire de l'érotisme, Annexes, 1976
조르주 바타유, 『파시즘의 심리 구조』. 김우리 옮김. 두번째테제, 2022.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일반경제 시론|소진/소모』. 최정우 옮김. 문학동네, 2022.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2.
가라타니 고진. 『네이션과 미학』.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9.

[1]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일반경제 시론|소진/소모』. 최정우 옮김. 문학동네, 2022, 16p
[2]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일반경제 시론|소진/소모』. 최정우 옮김. 문학동네, 2022, 98p
[3] Georges Bataille, Volume 8: L'Histoire de l'érotisme, Annexes, 1976, 249p. 바타유 전집 8권에 실린 La Souveraineté 중 발췌. 인용문 번역은 현대정치철학연구회 김우리 회원의 도움을 받았다.
[4] Georges Bataille, Volume 8: L'Histoire de l'érotisme, Annexes, 1976, 2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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