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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기고

모두 함께 모여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고 있다

by 인-무브 2026. 1. 9.

모두 함께 모여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고 있다

 

필자: 수차미

 

 

 

KMDB에 올라온 「에바(EVA), 시네마테크에 타라!”」를 읽었다. 그리고 씨네21에 올라온 「어떤 영화 문화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를 읽었다. 시네마테크의 과거와 현재를 다루는 이 글들에서 눈에 들어온 건 시네마테크를 일종의 공동체로 읽어내는 흐름이었다. KMDB의 이수연 연구원은 한국사회로부터 닫힌 영화들이라는 점이 일본문화 금지령으로 더 심했던 일본영화들이 왜 시네마테크에서 주요하게 다가왔는지를 설명한다.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영화를 보고 싶다”는 욕구가 이들을 시네마테크로 불러모았고, 모두 함께 모여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고 있다는 감각이 이후 영화제라는 합법적인 장 안으로 편입됐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서술에서 의아한 건 영화제를 합법으로 규정하는 술자의 시점이다. 영화제는 라이선스를 받아 작품을 상영하는 것이니 엄밀히 합법인 게 맞다. 하지만 시네마테크와 영화제는 향유자의 입장에서 체감할 만한 차이가 크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들에겐 볼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지 라는 물음은 빠져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볼 수만 있으면 그게 어디라도 별 상관은 없다. 합법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반대로 그게 불법이었을 때는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뜻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시네마테크에 대한 서술은 향유자의 시점이기보다 일종의 정책적인 관점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고, 이런 소소한 경험들이 모여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역사를 구성한다. 역사는 시네마테크의 소실을 영화제의 부흥과 연결하지만, 한편에는 당나귀와 프루나 같은 파일전송 프로그램의 대두가 있다. 공적인 장소가 제공되어 음지가 사라진 게 아니라, 눈으로 채록하기 힘들만큼 더 세밀화돼 관측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흥미롭게도 2020년대 이후에 들어서 이 문제가 재점화되었는데, 코로나 판데믹을 거치며 세계가 온라인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제나 극장 등이 폐쇄됨에 따라 다시금 온라인을 통해 영화가 유통되는 환경을 열어줬다. 여태껏 영화제가 공적인 유통 경로였다는 정설을 뒤집을 수 있는 실험환경을 제공해준 셈이다. 이 시기 한민수가 『영화도둑일기』에서 영화제의 영화들이 어떤 경로로 공적 무대에 소환되는지를 규명한 후 현장에는 숱한 고백이 뒤따랐다. 단순히 영화 하나를 보고 나서 토론을 하는 형태의 공동체는 온라인 환경을 거쳐 영화 파일을 모두와 공유하는 형태로 변형된다. 핵심은 이 시기에 새로 등장했다는 게 아니다. 이들이 음성화된 자신의 활동 형태를 밖으로 드러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들 집단은 자신들을 시네마테크로 규정하면서 자체적인 상영 컨셉과 스케줄을 갖고서 활동했다. 파일의 출처를 최대한 공적인 것에 포섭하려 했지만 자막 문제도 그렇고 일정 부분은 음지와 섞인 형태를 했다. 이런 상황은 해당 상영을 제한할 수 있는 저작권리 주체가 아직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점에서 명실상부한 회색지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일정 부분은 시네마테크의 기능을 분담한다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공간의 본래 역할을 생각해보게 된다. 모두가 함께 모여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고 있다는 말에서 방점은 앞과 뒤 어느 쪽일까. 혼자서 은밀히 보면 오히려 들킬 확률이 더 줄어든다. 반대로 모두가 함께 모였으면 무언가 사회적으로 인준 받은 것을 보아야 건실한 것도 같다. 결국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시네마테크라는 형식이 일종의 공적인 인증으로 사용된다는 점뿐이다.

 

시네마테크가 면죄부를 주고 있다고 지적하려는 게 아니다. 위의 현상을 마이크로시네마로 규정하는 흐름에서 마이크로를 어떻게 겉으로 드러낼 것인지와 결합하는 문제다. 이들 집단은 자기를 알릴 요령으로 시네마테크라는 인장을 요구했고 이에 집단의 형태나 성격에 구분 없이 서로 간에 편입된다. 시네마테크라는 형식은 비공식성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내부를 갖지 않는다. 공적인 것의 무대가 있다면 이 바깥이 바로 비공식성을 띨 것이므로 도리어 이곳에서는 내부가 없어야만 한다. 공적인 것을 공의 기호로 돌려놓고 나면, 이제 주변부라는 말은 실질상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시네마테크 자체가 무언가를 가두는 형식이기에 반대로 시네마테크가 하나의 결론으로만 제시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네마테크는 특정한 무엇을 가리키기보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의 한 흐름을 가리킨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이 더 많은 상황에서 공적인 것은 곧 수면으로 드러나 자신의 생존을 알리고, 이를 따라 다시금 신호를 발산할 수 있는 생존자 집단이다. 관중의 이름으로 말한다면 잔존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네마테크의 정의가 허락되지 않은 것을 하고 있다는 배덕감을 내포한다면 이 잔존은 애초에 허락을 구하는 공간이 아닌 것 같다. 도리어 이 시네마테크는 일방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공적인 것에 침입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찢김에 가깝다. 김홍중이 자신의 저서 『세계에 대한 믿음』에 대해 쓴 글에서 말하듯이 “극장에서, 우리의 눈동자는 그 안으로 세계가 침투하는 열린 상처, 또는 벌어진 구멍이 된다. 상처가 상처를 통해 상처를 바라본다.”

 

만약 시네마테크가 어디를 가도 볼 수 없을 영화를 공적으로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 물 밑의 흐름을 지층의 균열에서 분출하는 창구라고 볼 경우 이와 같은 형태의 시네마테크는 일종의 관광지가 될 공산이 크다. 온천수를 지층의 찢김이라 하면, 그 위에 세워진 시네마테크는 아즈마 히로키 식의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사적인 삶을 공적인 장치에 접속하는 관광객은 영화를 관람하는 경로와 관계없이 시네마테크라는 형식 아래서만 관중으로 남는다. 즉 시네마테크는 관중들을 무대 위로 올리는 역할을 하며, 이는 관광객의 여정에서 볼 만한 것으로 추천된 덕분이다. 어디를 가면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다는 예측이 하나의 목적과 결합할 때 관광지가 표면에 대두한다. 쉽게 말해 영화와 극장무대는 물리적으로 형체가 있는 게 아니라 여행의 흐름에서 뭍 밑으로 형성되는 지대다. 항구적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니 마찬가지로 관중도 무대를 찾아 옮겨 다녀야 하며 이 과정에서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유랑극으로서의 영화가 등장한다. 사실 영화사의 초중반대도 건실했던 형태의 상영인 만큼, 그다지 새롭지 않은 것을 새로운 시대에 마주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양한 영화를 번들로 엮어 전시하는 형태의 상영은 마치 팝업스토어처럼 관광객들에게 찾아다니며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안에서는 시네마테크를 운영하는 주체의 공신력이 등이 주요 동인이 되지만, 반대로 지인이나 인기인, 인플루언서나 업계인처럼 개인의 취향에 따라 발길을 잡아끌 만한 요인도 많아서 결국에는 중앙이 아니라 를 중심으로 선택하게 된다. 아무리 잘난 영화라도 당장 내가 속한 네트워크 안에 없으면 관심 밖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런 가정을 해볼 수도 있다. 인스타그램이나 X처럼 자신이 어떤 곳에 있을지를 스스로 정하는 것으로 자신이 어떤 영화를 보고 싶은지를 결정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흥미로운 제안을 해본 것에 불과하지만 플랫폼 서비스의 알고리즘이 어느 정도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를 탐구하는 계층이 쓴 게시물이 중도층의 발길을 돌린다. 영화를 극적으로 향유하지는 않지만, 유명한 곳이라면 한 번쯤은 가보는 중도층은 입소문을 따라 해당 영화를 관람하게 된다. 특히 이 알고리즘은 평소라면 자신이 접할 일이 없을 찢김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특수하게 바라보아진다. 만약 영화가 한 개인의 일상을 의미 있게 봉합한다면 아마도 이 방문은 주변부의 사건들을 응집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시네마테크라는 찢김은 단순히 허공에 뚫린 구멍처럼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거나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게 배수구로 모두 빨려나가지 않게끔 구멍을 틀어막을 기회를 제공한다. 즉 영화는 상처를 품는 게 아니라 상처에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주변부의 중심에 서는 듯한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이때 영화란 마치 시네마테크처럼 상처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자신이 상처에 속하지는 않지만, 상처를 공급하는 역할로서 바로 서는 시네마테크는 하나의 거대한 구멍이 아니라 미세한 전조들에 대응하는 예비로서 기능한다. 그렇다면 시네마테크는 단순히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고 있다는 감각을 공유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서, 그런 것을 스스럼없이 꺼내놓을 수 있는 공유의 장이 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시네마테크란 상처받은 이들의 공동체가 되어야만 한다. 

 

 

**이 글에서 언급된 원글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kmdb.or.kr/story/836/9271
이수연 연구원, 에바(EVA), 시네마테크에 타라!

 

https://www.kmdb.or.kr/story/956/9292

김홍중, 세계에 대한 믿음, KMDB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09000

김소미, 어떤 영화 문화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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